임유진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깨달았다.강지혁이 말한 ‘그 여자’는 바로 사모님이었다.게다가 아직 얼굴이 상하기 전의, 젊은 시절 모습 그대로의 사모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그녀는 예전에 강지혁의 어머니 젊은 시절 사진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겸이가 닮은 건 사실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닮음은 점점 더 뚜렷해질지도 몰랐다.“혁아... 아무리 사모님을 원망한다고 해도, 겸이는 우리 아이야. 제발... 그 아이에게까지 화를 내지는 마...”임유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듯 망설이면서.그러자 강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나는 아이에게까지 화를 전가할 생각은 없어. 겸이는 네가 목숨 걸고 낳은 아이고, 우리 세 아이는 내게 그 무엇보다 소중하단 걸 알아둬.”임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스승님과 사모님도 뉴스를 보고 걱정돼 전화를 주셨어. 사모님은 심지어 다시 S 시에 와서 널 보고 싶어 했어. 결과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으신다면서. 혁아, 사모님은 지난 세월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을 거야. 아마 그때의 잘못을 자신의 목숨으로라도 되돌리고 싶어 했을지도 몰라.”강지혁의 목소리는 갑자기 차갑게 굳었다.“그건 그 여자가 죽는다고 해도 보상할 수 없어.”임유진은 그제야 알았다.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사모님이 아무리 괴로워해도, 이미 그때의 잘못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그는 사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와 그의 어머니 사이에는 반드시 정리가 필요했다.“혁아, 그럼 사모님에게 어떻게 할 생각이야?”임유진은 조심스레 물었다.그러면서도 두 손은 무심코 환자복을 꼭 쥐었다.만약 그가 정말 사모님을 철저히 벌할 생각이라면...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강지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번 생에 다시는 S 시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할 거야.”임유진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임유진은 알고 있었다.겸이가 이렇게까지 찾아와 준다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겸이의 지난 시간은 여느 아이들과 달랐다.김재호의 교육 방식은 아이의 동심을 철저히 짓밟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다행히 겸이는 하유은을 만났고, 하유은을 통해 따스함을 알게 되었다.그 덕분에 비로소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하지만 하유은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겸이 마음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겸이가 단순히 뉴스를 보고 자신과 강지혁을 걱정해 찾아왔다는 건...혹시 자신들과의 거리를 아주 조금이라도 좁히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언젠가는 겸이가 진심으로 부모를 받아들여 주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었다.임유진은 조심스럽게 겸이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고, 시선을 낮춰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엄마는 네가 아빠, 엄마 보러 와 줘서 정말 기뻐.”겸이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왜... 기쁜 거지? 다친 건데, 아픈 게 맞는데... 왜 웃고 있지?’아이의 마음속에는 의문이 일렁였다.겸이는 고사리 같은 손을 들어 임유진의 목덜미로 뻗었다.하유은이 깜짝 놀라 막으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작은 손이 임유진의 목을 움켜쥐었고, 그곳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그 손길이 상처를 건드리자, 임유진은 본능적으로 미간이 찌푸려졌다.“겸아, 손 놔!”강지혁은 그녀의 표정을 발견하고는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겸이를 제지했다.분명 아들이 그녀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강한 호통에 겸이는 화들짝 놀라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임유진은 재빨리 겸이를 달랬다.“혁아, 겸이는 그냥 내 상처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그녀는 부드럽게 겸이의 손을 감싸 쥐고, 붕대를 잡아당기지 못하게 살며시 방향을 바꿔주었다.“이렇게 손바닥을 살짝 대는 거야. 그러면 엄마가 안 아프지.”임유진은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괜찮아. 곧 다 나을 거야. 상처만 건드리지 않으면 사실 하나도 안 아파.”겸이는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봤
지금, 아들이 임유진의 품에 파묻혀 그녀의 목덜미 쪽으로 입김을 불며 말하는 이 순간 역시 그랬다.“이렇게 하면, 엄마 안 아프죠?”임유진은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녀는 눈가가 촉촉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안 아파.”“앞으로 내가 엄마를 지킬 거예요. 나쁜 사람들은 다 쫓아낼 거고, 엄마가 다치게 하지 않을 거예요.”율이는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힘찬 목소리로 다짐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은 미소 지으며 아들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작은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지만, 품에서 벗어나려 하지는 않았다.율이는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꼭 안은 채, 얼굴을 바짝 파묻었다.‘이게 바로 엄마의 냄새구나. 엄마는 앞으로 내가 지켜줄 거야!’그리고 만약 몸이 성하고 팔에 링거 주사가 연결돼 있지 않았다면, 강지혁은 당장 아들을 임유진 품에서 번쩍 들어 올렸을 것이다.두 아이는 원래 병원에서 아빠, 엄마와 함께 밤을 보내겠다며 고집을 부렸고, 현이는 심지어 “내가 잘 돌봐드릴 테니 퇴원하면 그때 다시 유치원에 가겠다”고까지 했다.결국 임유진이 여러 번 달래고 설명한 끝에야, 두 아이는 마지못해 마음을 접었다.집사가 두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고 나서야, 임유진은 마치 큰 전투라도 치른 듯한 진이 빠짐을 느꼈다.밤이 되자 또다시 병실 문이 열렸다.이번엔 겸이와 하유은이었다.보디가드에게 붙잡혀 들어온 두 아이를 본 순간, 임유진은 놀라 눈이 커졌다.특히 하유은이 “우린 몰래 들어왔어요. 병원 입구엔 기자들이 잔뜩 있어요.”라고 말했을 때, 임유진은 손에 땀이 밸 만큼 긴장했다.“아빠, 엄마는 같이 안 오셨니?”임유진은 걱정스레 물었다. 두 아이는 아직 너무 어렸고, 게다가 하씨 가문은 병원에서 제법 먼 곳에 있었다.“아빠, 엄마는 저녁에 파티가 있으셔서, 제가 겸이 데리고 택시 타고 왔어요!”하유은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임유진은 두 아이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에 그제야 안도했지만, 혹여 위험한 일을 만날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가
강씨 가문에서는 이번 사건을 아이들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일부러 저택의 모든 소식을 차단해,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게 했다.그리고 ‘유치원 공사로 인해 몇 일간 휴원’이라는 명목으로 세 아이를 며칠 동안 집에 머물게 했다.비록 유치원이 실제로 공사할 필요가 없더라도, 강지혁 측에서는 충분히 그런 명분을 꾸며낼 수 있었다.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율이가 저택의 네트워크 차단을 뚫고, 대형 건물 폭발 사고 관련 뉴스를 발견한 것이다.그제야 율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빠와 엄마가 지금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안 되겠어. 당장 병원에 가서 아빠, 엄마를 봐야 해!”현이도 그 사실을 알고 곧바로 율이를 따라나섰다. 심지어 병원에 가서 아빠와 엄마를 돌봐야 한다는 명목으로 가방까지 정리하고 있었다.저택에서 아이들을 돌보던 집사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강지혁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회장님, 도련님, 아가씨를 병원으로 데려가도 괜찮을까요?”강지혁은 임유진을 바라보며,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그럼 보내라고 해. 안 보내면 계속 난리 날 테니까.”이제 임유진은 말을 오래 이어갈 수는 없었지만, 더 이상 휴대폰으로 타이핑하지 않아도 짧은 대화는 가능했다.전화가 끝난 뒤, 임유진이 강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하지만, 아이들이 우리 모습을 보고... 무서워할까 봐 걱정되네.”“이제 아이들도 위험을 알아야 해. 강씨 가문의 도련님, 아가씨라고 해서 모든 위험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강지혁이 차분히 답했다.“그럼 아이들이 울면 어떡해?”임유진이 조심스레 물었다.“아이들이 울고불고하는 거... 당연한 거 아닌가? 뭐가 두려워.”강지혁은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두 아이가 실제로 병원에 나타났을 때, 임유진은 눈앞에서 강지혁이 크게 당황하는 모습을 생생히 목격했다.현이는 아빠와 엄마가 다친 것을 보고, 특히 아빠가 링거 주사를 맞고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다.현이의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원래
임유진은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문득 건물 폭발 사건 때가 떠올랐다.그녀의 손이 강지혁의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려 할 때, 그가 했던 말...“임유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또 이래! 네가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그 ‘또’라는 한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혹시 그가... 과거를 기억해 낸 걸까?임유진은 몸이 떨리며, 얼굴에는 믿기 어려운 표정이 담겨 있었다.‘설마, 내가 착각한 걸까... 아니겠지...’그녀의 의문을 읽은 듯, 강지혁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때, 너는 절벽에서 바다로 떨어지며 나를 살리려 했어. 하지만 그때 나는 네 손을 잡지도, 널 구하지도 못했지. 이번에는 반드시 네 손을 잡을 거야.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임유진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렇다면, 그는 기억을 되찾은 걸까?과거 그녀가 바다에 떨어졌던 모든 진실을 기억하는 걸까?강지혁은 힘겹게 임유진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볼에 가져다 대고 부드럽게 비볐다.동작은 느렸지만, 그 한 번 한 번마다 무한한 애정과 그리움이 묻어났다.“유진아... 난 앞으로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너도 내 손을 절대 놓지 마... 알겠지? 만약 이 세상에 네가 없다면, 나에게는 살아갈 의미조차 없으니까.”[하지만 아이들도 있어... 우리 아이들은...]임유진은 다른 손으로 휴대폰을 타이핑하며 물었다.“아이들이 있기에 내가 살아야 한다고, 그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고 말하는 거지?”강지혁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되물었다.“하지만 유진아... 너 혹시 그거 알아? 예전에 네가 나에게 잘 살아달라고 했을 때, 그게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말이었어. 만약 그때 최면으로 기억이 조작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완전히 미쳤을 거야.”[정말... 기억을 되찾은 거야? 모든 걸 기억하는 거지?]임유진은 휴대폰으로 타이핑하며, 마음속이 조마조마했다.“응, 기억을 되찾았어. 네 손이 내 손가락
만약 그때 고은채가 강지혁 자신을 찌르게 했다면, 그는 아마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그렇게 했을지도 몰랐다.고이준이 병실을 나가자, 병실 안에는 임유진과 강지혁 단 둘뿐이었다.의사는 임유진에게 최대한 침대에 누워 쉬라고 했지만, 그녀는 조심스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한 걸음씩 강지혁의 침대 앞으로 다가가 침대 옆 소파에 앉아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그는 살아 있었다. 상처투성이지만 살아 있었다.이 몸에 가득한 상처는 모두 그녀를 위해 생긴 것이었다.하지만 그가 무사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임유진은 손을 들어, 옆으로 늘어진 그의 손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그의 손 역시 붕대로 감싸져 있었다.그 손은 예전에 그녀를 꼭 붙잡았던 손이었다.잠깐 놓으면 안전할 수 있었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밧줄 대신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그 순간, 그는 자신의 목숨마저 포기하며 그녀와 함께하려 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임유진은 그의 손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그러다 갑자기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그녀가 깜짝 놀라 얼굴을 돌리자, 강지혁의 속눈썹이 떨리고 있었고, 이내 깊은 눈동자가 서서히 드러났다.“혁아...”임유진은 참을 수 없는 마음에 그 이름을 불렀다.이제는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큰 울림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강지혁은 시선을 맞춘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수술 직후라 미간에 주름이 잡히며 눈을 찌푸렸다.임유진은 재빠르게 두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눌러주며 손짓으로 눕도록 했다.강지혁은 순순히 몸을 다시 눕히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왜 누워 있지 않고 일어났어? 너도 막 수술 끝났잖아.”임유진은 휴대폰을 들어 메모장에 글을 적었다.[내 수술은 작은 수술이야. 고은채가 목에 낸 상처가 외상이라 기도까지는 안 닿았고, 단지 상처가 조금 깊어서 실로 꿰맨 것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