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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수박빙수
아림은 걸음을 멈추고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 부모님께서 박 대표에게 충분히 설명했을 것 같은데요?”

로아의 친부모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로아는 아직 갓난아이였고, 곧 보육원으로 보내질 처지였다.

아림은 혼자 남겨진 아이를 차마 외면하지 못해 입양하기로 결심했다.

이헌은 아림을 몇 초 바라보다가 담배를 눌러 껐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아림 곁까지 걸어왔다.

“그때 우리는 임신 준비 중이었어. 임신했을 가능성이 있었고, 로아 나이도 딱 맞아떨어져.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이헌의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살피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여전히 윗자리에 선 사람의 태도였다.

“확인할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어.”

아림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속에서 치미는 짜증을 눌러 앉힌 채 이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니야.”

“로아의 출생에 대해선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아. 당신이 어떻게 확인하든 내가 막을 수도 없겠지. 다만 반대로 생각해 봐. 우리 부모님이 최지희를 얼마나 아끼는지 당신도 알잖아.”

“로아가 정말 당신 아이였다면, 두 분이 나와 로아를 어디 깊숙한 곳에 숨겼을 거야. 우리를 밖으로 내보내 당신과 최지희의 결혼에 흠집을 내게 둘 리 없잖아.”

아림은 팔짱을 끼고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스쳤다.

“게다가 당신은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지? 내가 바람난 전남편의 아이라도 낳았을까?”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헌은 서늘한 눈빛으로 아림을 깊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팽팽한 침묵 사이로 아래층에서 지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밥이 다 됐어. 얼른 내려와.”

아림은 이헌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마당에서 지희가 유빈을 안은 채 옥상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곱게 다듬은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아림은 무심히 시선을 거두고 돌아섰다.

막 방으로 들어서려던 때, 뒤에서 이헌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로아가 네 말대로 입양아이길 바라. 확인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지만 정말 내 딸이라면, 아무도 없이 네 곁에 놔두진 않을 거야.”

말을 마친 이헌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30분 뒤, 아림이 캐리어를 끌고 내려왔을 땐 이미 식사가 한창이었다.

이헌은 그릇을 들고 아기 의자에 앉은 유빈에게 차분히 밥을 먹이고 있었다.

최태성 부부는 지희의 접시에 쉴 새 없이 반찬을 올려 주고 있었고, 집 전체가 화목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로아만이 한쪽에서 작은 고개를 폭 떨군 채, 서러움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왜 우리 엄마 안 기다려?”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헌만 로아를 무심히 한번 훑고는, 고개를 돌려 도우미더러 로아에게 밥을 먹이라고 일렀다.

식사 내내 지희의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예전에 지희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하다 팔을 다쳤고, 다 나은 뒤로도 해외 공연 때마다 팔이 제멋대로 떨려 실수를 반복했고, 그 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민혜정은 속상해하며 곧장 지희의 손을 잡고 안타까워했다. 그러고는 이헌을 탓하듯 말했다.

“그때 뮤엔병원에서 초청장을 받았다면서? 박 서방, 지희를 데리고 백요한 교수님에게 진료받게 하지 않았나?”

지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가가 희미하게 붉어졌지만, 이헌을 감싸듯 낮게 말했다.

“엄마, 이헌 오빠 탓 아니에요. 뮤엔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정신건강의학 연구기관이라, 일반 외래 진료는 보지 않는대요.”

“우리가 갔을 때도 직원이 초청 명단에 우리 이름이 없다는 걸 확인했고, 아무리 부탁해도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았어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이헌 오빠가 금령 컨벤션센터에서 세계적인 정신건강의학 국제학술대회가 열린다는 걸 알아봐 줬기 때문이에요. 백요한 교수님과 연구팀도 참석한대요.”

“최근 연구팀에 새로 합류한 제자 중에 ‘제니’라는 분이 있는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그러니까 PTSD를 전문으로 연구한대요.”

“그분 논문은 임상적 가치도 아주 높다고 했고, 제 해외 주치의도 그분에게 치료받을 수만 있다면 제 병이 좋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했어요.”

“다만 워낙 조용히 활동하는 분이라, 실제로 본 사람이 거의 없대요.”

제니 이야기가 나오자 지희의 눈에 동경하는 빛이 어렸다.

지희는 조심스레 이헌을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다시 무대에 설 거야. 그래야 이헌 오빠 곁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어.’

‘누구에게도 이헌 오빠를 빼앗기지 않을 거야.’

“이모님, 로아는 제가 먹일게요.”

아림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리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로아가 아림을 보자마자 신이 나서 포동포동한 팔을 휘저었다.

아림은 도우미에게서 국을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식혀 한 숟가락씩 딸에게 먹였다.

식사 분위기는 곧 미묘하게 바뀌었다.

지희는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미안한 척 자리에서 일어나 아림의 곁으로 다가왔다.

“언니, 그때 일은 제가 늘 미안하게 생각했어요. 그때 했던 말은 다 화가 나서 한 말이었어요. 언니를 다치게 하려고 한 생각은 정말 없었는데...”

“그리고 이헌 오빠가 절 위해서 언니한테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사과라는 말과 달리, 지희의 눈가와 입매에는 감출 수 없는 달콤함과 우쭐함이 번졌다.

지희는 가볍게 아림의 팔을 잡았다.

“그래도 다 지난 일이잖아요. 언니도 뮤엔병원의 그분들을 만나고 싶겠죠? 이번 국제학술대회 초청장은 구하기가 정말 어렵대요.”

“이헌 오빠가 정말 애를 써서 겨우 두 장을 구했어요. 제가 백요한 교수님을 뵈면 언니 얘기 잘해 볼게요. 언니도 그런 분을 뵐 기회가 생기게요. 어때요?”

아림은 웃는 듯 웃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럼 미리 고맙다고 해야겠네.”

“아니에요.”

지희는 달콤하게 웃고 다시 최태성 부부 곁으로 돌아가 앉았다.

최태성 부부는 지희가 착하고 배려심이 깊다며 연달아 칭찬했다.

최태성은 손을 크게 내저으며 지희를 달랬다.

“지희야, 걱정하지 마라. 돈은 문제가 아니다. 인맥도 우리가 찾으면 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빠 엄마가 꼭 그 ‘제니’라는 사람을 데려다가 네 병을 완전히 고쳐 주마.”

“우리 지희는 태어날 때부터 무대에서 꼭 설 사람이었으니까.”

...

아침 식사 뒤, 아림은 본가에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가족에게 인사한 뒤 딸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로아를 차에 태우자마자 민혜정이 뒤따라 나와 아림을 한쪽으로 불렀다.

나무 그늘에서 민혜정은 아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목소리에는 여러 뜻이 담겨 있었다.

“아림아, 지희와 이헌이는 사이가 좋아. 아이도 저렇게 컸고. 엄마가 한마디만 할게. 박 서방에게 더는 딴마음 품지 마라. 서로 상처만 될 뿐이야. 굳이 그럴 필요 없잖니.”

아림은 어이가 없었지만 민혜정의 의도를 곧 이해했다.

지희가 옥상에서 아림과 이헌이 단둘이 있던 일을 민혜정에게 말한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버린 물건을 다시 줍는 취미 없어요. 남의 결혼을 건드리는 짓도 하지 않을 거예요.”

아림의 표현은 직설적이고 따가웠다.

민혜정의 표정이 조금 굳었지만, 잠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엄마도 네가 걱정돼서 그래. 참, 기회가 있으면 네 동생 대신 그 ‘제니’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좀 알아봐 줘.”

아림이 입을 열기도 전에 민혜정은 혼자 피식 웃었다.

“됐다. 네가 운영하는 작은 병원에서 업계 탑급 의사를 알 리가 없지. 엄마가 괜한 생각을 했구나.”

아림은 잠깐 멈칫했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네, 맞아요. 로아가 기다리니까 먼저 가 볼게요.”

아림은 로아를 무용학원에 데려다주었다. 수업이 끝나면 도우미가 데리러 가도록 부탁했고, 저녁에는 로아가 가장 좋아하는 식당에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뒤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

오늘은 공휴일이었지만, 병원은 평소처럼 열려 있었다.

아림의 진료일이기도 해서, 여러 내담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휴일이라 길에 나온 사람이 많았고 도로는 유난히 막혔다.

차는 차량 행렬 속에서 거의 기어가듯 움직였다.

앞쪽으로 길게 이어진 차들의 후미등을 보며 아림은 마음이 급해졌다.

9시에 첫 상담이 시작되는데, 시간은 벌써 8시 50분이었다.

아림은 비서에게 먼저 내담자 검사를 진행하게 하려 했다.

그때, 둔탁한 충격음이 터졌다.

생각에 잠겨 있던 아림은 아무 대비도 하지 못했다.

충격에 몸이 앞으로 밀리며 운전대에 세게 부딪혔다.

묵직한 통증이 가슴께로 퍼졌다.

아림은 운전대를 꽉 붙잡고 숨을 골랐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룸미러를 보았다.

‘뒤차가 들이받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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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30화

    로아는 소파에서 뛰어내렸다. 상자 주위를 한 바퀴, 또 한 바퀴 돌았다. 신이 난 로아의 작은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로봇 친구야!”주방에서 과일을 씻던 아림이 기척에 나와 보니, 거실의 포장 상자와 그 곁에 심상한 얼굴로 선 이헌이 한눈에 들어왔다.미간이 좁혀지며, 걸음이 잠깐 멎었다.“지금 이게...?”“오해하지 마. 마침 회사 신제품이 나와서, 이건 로아 주는 거야. 아... 아저씨의 성의라고 해 두지.”‘아빠’라는 두 글자를, 이헌은 억지로 삼키고 ‘아저씨’로 바꿨다. 그는 가끔 자신과 아림의 결혼이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잊곤 했다.이헌의 목소리는 여전히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로아가 몹시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가슴 깊은 곳 어딘가가 먹먹해졌다.로아가 촉촉한 큰 눈을 깜빡이며 두 손으로 입을 채, 놀람과 기쁨 가득한 얼굴로 아림을 올려다보았다.“엄마, 진짜 로아한테 주는 거랬어. 뜯어봐도 돼?”아림이 대답하기도 전에 계단 쪽에서 지희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지희는 연노란색 홈웨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느슨하게 올려 묶었고, 안색은 괜찮아 보였다.그리고 시선은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아림과 들뜬 로아를 스치고, 이내 고급 포장 상자에 닿았다.“이거 신제품이야?”지희는 상자에 찍힌 로고를 손끝으로 쓸며 웃었다.“오빠도 참 아이를 너무 예뻐한다니까. 우리 유빈이 새 로봇 갖고 싶다고 한마디한 것뿐인데 바로 사람 시켜 보냈네.”로아는 큰 눈을 깜빡였다. 얼굴에 피었던 웃음이 그대로 굳었다.아림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유빈은 이헌의 ‘첫사랑’이 낳은 아이였다.다만 로아가 마음 쓰였다. 딸이 속상해할까 봐, 그게 겁났다.이헌의 미간이 알아채기 힘들 만큼 좁아졌다. “유빈이는 이미 많잖아. 집에만 적어도 네다섯 대는 있고. 이건 로아 거야.”“로아한테... 준다고?”지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목소리가 높아졌고, 말투에는 억울함이 묻어났다.“유빈이 그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그걸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29화

    방금 민혜정이 아림을 부른 말에도 반가움보다는 의아함에 가까웠다.왜 이 시간에 아림이 여기 있느냐고 묻는 듯한 소리였다.창현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곧 시선을 거두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올린 채 아림을 바라보았다. 말투는 아까보다 더 가벼워졌다.“아림 씨, 아까 저랑 같이 식사하기로 했잖아요. 더 늦으면 음식 다 식어요.”그는 자연스럽게 아림의 숄더백을 받아 자기 어깨에 걸쳤다.민혜정이 몇 마디 더 캐물으려 했지만, 창현은 벌써 차 문을 열고 아림에게 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창현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씨 집안 사람들을 대하는 차갑고 거리감 있는 태도와 아림을 대하는 부드럽고 세심한 태도는 누가 보아도 알 정도로 선명하게 대비됐다.이헌의 검은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늘 감정이 없던 듯한 준수한 얼굴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긴 것 같았다.지희는 이헌 곁에 오래 있었기에 그의 성향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지금 이헌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도 금방 알 수 있었다.지희의 눈이 어두워졌다. 곧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숨이 가쁜 듯 말했다.“오빠, 나... 나 너무 힘들어... 숨이 잘 안 쉬어져...”‘최아림 그 몹쓸 것에게 이헌 오빠를 또 빼앗길 순 없어!’‘오빠도, TG그룹 안주인 자리도, 다 내 거여야 해!!’지희의 ‘숨이 안 쉬어진다’라는 말은 모두의 시선을 단번에 돌렸다.민혜정이 가장 먼저 당황했다.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연달아 물었다. 목소리에는 진한 걱정이 묻어났다.“지희야! 왜 그래? 아까 너무 빨리 걸었니?”이헌은 고개를 돌려 지희의 허리를 받쳤다. 눈빛 하나에 기사가 곧바로 차를 가지러 뛰었다.같은 시간에, 뒤쪽의 마이바흐 문은 이미 닫혔다.아림과 창현은 떠났다.이헌은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며칠 뒤.요 며칠 이헌은 자꾸 이유 없이 딴생각에 빠졌다. 서류를 볼 때도, 회의 중에도 그랬다.그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잔뜩 구겨진 미간을 짚고 있는데, 비서 기찬이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28화

    아림은 잠깐 멈췄다. 눈빛은 맑았지만 철저히 거리감을 유지했다.“걱정 고마워. 나 괜찮아.”그 말을 남기고 바로 나갔다.이헌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곧 마음을 다잡고 다시 서류를 펼쳤다.겨우 두 줄을 읽었지만, 단어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생각이 자꾸 흩어졌다.지난 이틀 동안 진료 구역에서 아림과 마주칠 때마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나 병실에서 필요한 말만 주고받을 때나,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동시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뚝딱거리는 감각도 함께 찾아왔다.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하면, 서로를 방해하지 않아도 평소보다 숨이 편했다.그런 느낌은 평생 냉정하고 절제된 규칙 속에서 살아온 이헌을 처음으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이틀 뒤 오전.간호사실에서 서명을 마친 아림은 진료실로 돌아가 흰 가운을 벗어 걸고 퇴근 준비를 했다.어제 야간 당직이었던 터라, 인수인계만 마치면 바로 퇴근할 수 있었다.건물 정문을 나서자마자, 멀리 익숙한 마이바흐가 보였다. 차 앞에는 짙은 네이비색 캐주얼 차림의 창현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흰색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오늘의 차림은 사업장에서 보이던 날카로운 분위기가 덜했다. 대신 느긋함과 여유, 또 지나치게 눈에 띄는 분위기가 있었다.아림은 피식 웃음이 샜다. 왠지 지금 창현의 모습은 꽁지깃을 활짝 편 공작새 같았다.아림이 나오자마자 창현은 바로 그녀를 알아봤다. 입가에 웃음이 번졌고, 긴 다리로 몇 걸음 만에 다가와 꽃다발을 내밀었다.“퇴근이에요?”아림이 꽃다발을 받아 향기를 맡으며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오늘 야간 당직이라는 소식을 입수해서, 퇴근길 마중 나왔죠.” 창현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은 그윽했다.“아림 씨 아직 식사 전일 것 같아서 식당에 자리도 잡아 놨어요. 전망 좋은 자리로... 시간 좀 내 주시죠?”“권 대표님...”아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27화

    점심때가 되자 최태성 부부가 도착했다.민혜정은 보온통을 들고 있었다. 평소의 단정한 여유는 온데간데없고, 긴장과 걱정이 얼굴 가득했다.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눈시울을 붉히고 지희의 뺨을 어루만졌다.“살이 많이 빠졌네.”최태성은 뒤따라 들어왔다. 말끔한 정장 차림에 표정은 엄했지만, 눈에 담긴 걱정은 숨기지 못했다.이어 지희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기가 아림이 병원이니 마음 놓고 지내라. 필요한 게 있으면 아림이에게 말하고.”그 한마디로 최태성은 지희를 아림에게 맡겼다.지희는 병상에 기대어 앉아 가족들에게 둘러싸였다. 눈가를 붉힌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괜찮아요. 그동안 오빠가 잘 돌봐 줬어요.”말투에는 진한 어리광이 묻어났다.민혜정은 마음이 아파 어쩔 줄 몰랐다. 침대 옆에 앉아 지희의 손을 꼭 잡고, ‘우리 보물 같은 딸이 고생했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최태성은 곁에 서 있었다. 말수는 적었지만, 지희를 보는 눈에는 아낌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병실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아림은 흰 가운을 입은 채 문가에 서 있었다. 발이 바닥에 붙어버리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 못했다.손에는 입원 서류가 들려 있었다. 지희의 서명을 받으려던 참이었다.하지만 병실 안에 가득한 온기를 보자, 차마 끼어들기가 어려웠다.문가에 선 아림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민혜정은 오래 끓인 전복죽을 지희에게 떠 주며 말했다.“엄마가 아침 내내 끓였어.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지희의 시선이 무심코 문가를 스쳤다. 입꼬리에 도발적인 미소가 어렸다. 곧 두 손으로 그릇을 받아 한입 먹고 감탄했다.“엄마가 끓여 준 건 역시 최고예요!”‘흥, 몹쓸 것. 내 엄마를 빼앗아 가면 뭐 해?’‘지금 네 엄마가 제일 아끼는 건 결국 나잖아?!’“맛있으면 엄마가 내일도 해줄게.”민혜정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목소리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다정했다.“왜 안 들어와?”이헌이 먼저 문가에 선 아림을 발견했다.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26화

    하얗게 질린 얼굴, 잘게 떨리는 입술, 흐려진 눈. 아림의 이런 모습에 지희의 눈에 쾌감 한 줄기가 스쳤다.‘몹쓸 것!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잘 살아?’‘내 것을 전부 빼앗아 갔으면서. 사라졌어야 하는 사람은 너잖아!’바로 그때 문이 열렸다.이헌이 문가에 서 있었다. 한 손은 문고리에 얹은 채였다.시선이 먼저 상태가 이상한 아림을 훑으며 미간이 좁혀졌다가, 이어 지희에게 닿았다.지희가 눈물에 젖은 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 그는 곧장 몇 걸음 다가가 지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무슨 일이야?”지희는 말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한가득 억울한데도 아림을 탓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참고 있는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곁눈질로 아림의 반응을 살피며 일부러 이헌의 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팔을 뻗어 이헌의 허리를 감았다.이헌의 몸이 살짝 굳었다. 미간이 더 깊게 구겨졌지만, 끝내 지희를 밀어내지는 않았다.따뜻하고 묵직한 손이 지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다독이듯, 힘이 실리지 않은 손길이었다.그는 조금 전부터 밖에 있었다. 지희가 억울하고도 고집스럽게 묻던 말들을 들었다.지금 지희의 병세는 불안정했다. 그는 자신 때문에 지희의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이헌은 아림을 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그 사실을 깨닫자 아림의 손 떨림은 더 심해졌다. 죽을 것 같은 질식감이 밀려와 숨을 조여 왔다.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신체화 발작이었다.아림은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발걸음이 비틀렸고, 급히 문 쪽으로 향했다.아림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여기에 더 있다가는 죽을 것 같았다.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이헌의 고요한 눈 안쪽에 억눌린 감정이 스쳤다.‘아림이 상태가 이상했는데... 왜 저러지?’오래지 않아 문 열리는 소리가 나자, 이헌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들어온 사람은 아림이 아니었다. 아림에게 아멜디 초콜릿을 선물했던 남자, 엄준이었다.“오늘 치료는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25화

    [이제 괜찮아.]“정말?”[응.]이헌의 말투는 대수롭지 않았다. 마치 별것 아닌 사소한 일을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하지만 대답을 마친 뒤, 시선은 무심코 오른팔에 내려앉았다. 그곳에는 아림이 직접 감아 준 붕대가 그대로 있었다.이헌은 무슨 마음이었는지 그날 이후로 병원에 가서 드레싱을 갈지 않았다.아림은 노트를 덮고 뻐근한 콧등을 눌렀다.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당신은 귀한 몸이니, 웬만하면 병원에 가서 사진이라도 찍어 봐. 괜히 미루지 말고.”아림은 남에게 빚지는 일을 싫어했다. 상대가 이헌이라면, 더더욱.[됐어.]아림의 거리감 있는 태도에 이헌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그 차가운에 아림은 짜증이 치밀었다. 더는 권하지 않았다.“마음대로 해. 그럼 이만.”아림은 먼저 전화를 끊었다.그 뒤 핸드폰을 책상 위에 엎어 두고 일어나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랐다.반 잔쯤 마시고 창가에서 한동안 숨을 고른 뒤에야, 자리로 돌아가 보고서 정리를 이어 갔다....금요일.지희는 제시간에 병원에 도착했다.첫 치료 때의 긴장과 달리, 이번에는 베이지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화장은 정돈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온화하고 예쁜 인상이었다.“교수님, 아림 언니.”지희가 먼저 인사했다. 목소리도 가벼웠다.백요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아림은 지희의 혈압을 재고, 지난 며칠 동안 수면과 식사 상태를 물었다. 항목별로 기록을 남겼다.지희의 협조도는 높았다. 답변은 명확했고, 가끔은 먼저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백요한은 지난 치료 기록을 넘겨 보고 안경테를 코 위로 밀어 올렸다.“지희 씨, 오늘 치료 절차는 지난번과 같습니다. 시간은 대략 40분 정도 걸릴 겁니다. 중간에 불편한 점이 생기면 바로 말하세요.”“네.”치료가 시작되자 아림은 곁에서 기록을 맡았다.지희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고, 호흡도 고르게 유지됐다.첫 치료 때 중간중간 울먹이고 떨며 감정이 격해졌던 것과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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