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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or: 수박빙수
뒤에는 한눈에 봐도 값비싼 한정판 마이바흐 한 대가 서 있었다.

기사가 먼저 내려 차를 살폈다.

아림도 먹먹해진 가슴을 문지르며 문을 열고 내렸다. 상대는 정중했다.

상태를 확인한 뒤, 아림이 먼저 차선을 바꾸며 끼어든 부분이 있으니 사진을 찍어 두고 보험사와 경찰이 과실을 확인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아림은 시간을 확인했다. 미간이 깊게 좁혀졌지만, 어쩔 수 없이 길가에서 기다렸다.

무심코 마이바흐 뒷좌석을 스치듯 보았을 때, 한 남자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묘하게 낯이 익었다.

아림은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비서에게 메신저로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고 업무를 배정했다.

집중하고 있던 때, 맑고 좋은 우디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

이어 뼈마디가 반듯한 손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금박이 박힌 명함이 들려 있었다.

“최아림 씨, 오랜만이에요.”

아림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곁에 서 있던 기사가 언제 바뀌었는지, 그 자리에는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짙은 붉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셔츠 깃은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위로 살짝 올라간 눈꼬리에는 장난스럽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높은 콧대와 예쁜 입술 선은 지적이면서도 귀한 느낌을 줬다.

영리하고 사람을 홀리는 여우 같은 남자였다.

아림은 명함을 훑었다. 잠시 뒤에 이 사람에 관한 기억이 떠올랐다.

권창현. 금령시 재벌가 권씨 집안의 외아들이자, 현재 HG그룹 CEO.

몇 년 전 아림이 아버지 최태성을 대신하여 참석한 경매장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권창현은 마음에 드는 물건을 보면 값을 따지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였다. 잊고 싶어도 잊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다만 권씨 집안과 박씨 집안은 오랜 경쟁 관계였다.

권창현과 박이헌도 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최씨 집안은 박씨 집안과 가까웠으니, 자연히 권씨 집안과는 거리를 두었다.

이런 방식으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아림은 생각을 정리하고 명함을 받아 들며 예의 바르게 웃었다.

“권 대표님, 정말 죄송하게 됐네요.”

“제가 뒤에서 받았으니 전적으로 제 과실입니다. 많이 놀라셨죠.”

창현은 신사답게 짧은 악수만 하고 아림과의 거리를 벌렸다.

“사과의 뜻으로 제가 커피 한잔 대접해도 될까요?”

아림이 고개를 저어 거절하려는데, 비서의 전화가 다급하게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원장님, 큰일 났어요! 내담자분이 자극받고 이성을 잃어서 옥상으로 올라가셨어요. 뛰어내리겠다고 해요. 조 선생님도 자리에 안 계시는데, 어떡하죠?]

아림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먼저 신고부터 하고 당장 매뉴얼대로 안전 조치해요. 사람들 대피시키고. 나는 바로 갈게요!”

하지만 이곳은 관광지 근처라 차가 여전히 꼼짝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고가도로 위라 다른 교통편으로 갈아탈 방법도 전혀 없었다.

아림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차라리 뛰어갈 생각을 하던 때, 누군가 아림의 품에 차가운 헬멧 하나를 불쑥 안겼다.

그리고 얼떨떨해 돌아보니, 창현의 기사가 마이바흐에서 접이식 오토바이를 꺼내고 있었다.

권창현이 옆에 서서 아림을 보았다.

“탈 줄 압니까?”

아림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창현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모셔다드리죠.”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권 대표님.”

상황이 급했다. 예의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창현은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에 올라 손을 내밀었다.

아림은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그 손을 잡고, 힘을 빌려 뒷자리에 올랐다.

망설일 틈도 없이 오토바이는 굉음을 내지르며 쏜살같이 내달렸다.

무서운 속도였다. 바람이 귓가에서 쉴 새 없이 울부짖고, 도시의 건물들이 뒤로 밀려났다.

가슴이 죄어든 아림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고 창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얇은 옷감 너머로 아림의 체온이 전해지자 창현의 몸이 살짝 굳었다.

스로틀을 쥔 손에도 무심코 힘이 들어갔다.

한참을 내달린 끝에 급제동과 함께 오토바이가 병원 건물 앞에 멈췄다.

건물 아래에는 이미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눈에 띄는 통제선이 둘러쳐지고, 경찰과 소방대원이 역할을 나눠 인파를 대피시키고 에어매트를 설치하고 있었다.

아림은 오토바이에서 내리자마자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다리에도 힘이 풀렸다.

곧바로 다급하게 헬멧을 벗어 던지고, 한쪽으로 가 헛구역질을 했다.

그 모습에 창현이 미간을 좁히며 헬멧을 벗고 다가왔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까?”

상황이 급해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는 내내 속도를 줄이지 않았는데, 아림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창현은 손을 뻗어 아림의 몸을 허공에서 받쳐 주려 했다.

하지만 길고 단정한 손끝이 아림의 등에 닿기 직전, 아림은 이미 창백한 얼굴로 허리를 곧게 세웠다.

“전 괜찮습니다. 오늘 일은 감사합니다. 권 대표님,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아림은 아주 빠르게 말하고 곧장 건물 회전문을 향해 뛰어갔다.

오는 길에 비서가 내담자의 대략적인 상황을 보내 두었다.

지금 내담자는 B동 12층 옥상에 있었다.

구조 준비는 갖춰졌지만 상황이 위급해서 아림은 조금의 시간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아림이 급히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창현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

옥상의 일이 마무리됐을 땐, 이미 해 질 녘이었다.

이람의 이마와 등이 땀으로 얇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휴게실로 돌아가 여분의 흰 셔츠로 갈아입고, 내담자 차트를 확인하려던 때,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메시지 알림이었다.

저장된 이름은 ‘최지희’였다.

[언니, 내일 커피 한잔할 시간 있어요? 시간이랑 장소는 언니가 정해요.]

아림의 엄지가 화면 위에서 잠시 멈췄다.

지희와 이헌이 해외로 떠난 뒤, 두 사람은 아주 오래 단둘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마지막은 5년 전이었다.

[좋아. 시간이랑 장소는 네가 정해.]

전송을 누른 아림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몸을 돌려 내담자 차트를 꺼내 들었다.

...

다음 날, 병원 1층 카페.

지희는 먼저 도착해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은 지희는 명품 브랜드의 맞춤 의상을 입고 있었다.

정교하게 재단된 짧은 재킷, 옷깃에는 작고 섬세한 동백꽃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화장기 없이 나온 아림과 달리, 지희는 풀 메이크업에 높은 올림머리로 우아하고 단정해 보였다.

아림이 다가오자 지희는 곧장 웃으며 일어나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언니, 살이 많이 빠졌네요. 요즘 많이 바빴어요?”

아림은 자리에 앉았다. 표정은 차갑고 거리를 두고 있었다.

지희의 눈에 싸늘함이 스쳤다.

메뉴를 물은 뒤, 지희는 아림에게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주고 자신은 라테를 시켰다.

“언니, 그때 저를 놓아준 것 정말 고마워요. 지금 저랑 이헌 오빠는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오빠도 저한테 잘해 줘요.”

지희는 커피를 저으며 고개를 숙였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는 달콤한 행복이 가득했다.

“언니는 모르죠? 저 유빈이 낳을 때 아주 위험했거든요. 나중에 간호사가 그러는데, 오빠가 분만실 밖에서 5시간을 꼬박 애태우면서 한 발짝도 안 떠났대요.”

아림은 커피를 젓던 손을 멈췄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록 오빠가 표현엔 서툴러도, 하는 일마다 사람을 안심시켜 줘요.”

지희가 고개를 들었다. 미소는 부드러웠다.

“언니,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자랑하려는 게 아니에요. 다만... 오빠가 저한테 그랬거든요.”

“언니와 함께 살았던 그 1년... 사실은 꽤 힘들었다고요.”

쓰고 텁텁한 커피 맛이 목 안에 걸렸다.

아림의 얼굴에 잠시 모멸감이 스쳤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언니도 알잖아요. 오빠가 책임감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뭐든 혼자 짊어지려 하고요.”

“언니랑 살 때 내내 둘이 안 맞는다고 느꼈는데, 두 집안 사업이 걸려 있으니 차마 먼저 말을 못 꺼냈던 거예요.”

지희의 목소리에는 이헌을 향한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최지희.”

아림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차분히 지희를 바라보았다.

“우리 사이에 그렇게 풀어야 할 옛이야기가 그렇게 많진 않을 텐데. 할 말 있으면 돌리지 말고 바로 해.”

“언니, 제가 이런 얘길 꺼낸 건, 언니랑 오빠는 이미 지난 일이라는 걸 언니한테 말해 두고 싶어서예요. 언니도 얼른 좋은 짝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안 그러면 우리 관계... 앞으로 지내기가 좀 불편할 것 같아서요.”

지희의 ‘가면’을 벗어 던진 모습에 아림은 다시 스틱을 집어 커피를 저었다.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가슴 한편은 욱신거렸다.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나와 박 대표는 진작에 아무 사이도 아니야. 내가 짝을 찾든 못 찾든, 내 눈에 지금 박 대표는 그저 제부일 뿐이니까.”

그 대답을 듣고도 지희는 완전히 안심하지 못했다.

지희는 두려웠다. 아림이 아직 이헌을 잊지 못했을까 봐, 핑계를 만들어 이헌 곁에 남을까 봐.

그래도 지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럼 다행이고요. 저야 당연히 언니 믿죠.”

그 뒤 지희는 이헌과 지내며 있었던 달콤한 일들을 몇 가지 더 늘어놓았다.

아림에게 아무 반응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아림은 한동안 혼자 앉아 있다가, 끝에 가서 다 식어 버린 아메리카노를 들어 단숨에 마셨다.

...

병원.

휴식 시간이었다.

아림이 돌아왔을 때, 엄준은 진료실에 앉아 독일어로 쓰인 학술지를 보고 있었다.

문소리를 들은 엄준이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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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30화

    로아는 소파에서 뛰어내렸다. 상자 주위를 한 바퀴, 또 한 바퀴 돌았다. 신이 난 로아의 작은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로봇 친구야!”주방에서 과일을 씻던 아림이 기척에 나와 보니, 거실의 포장 상자와 그 곁에 심상한 얼굴로 선 이헌이 한눈에 들어왔다.미간이 좁혀지며, 걸음이 잠깐 멎었다.“지금 이게...?”“오해하지 마. 마침 회사 신제품이 나와서, 이건 로아 주는 거야. 아... 아저씨의 성의라고 해 두지.”‘아빠’라는 두 글자를, 이헌은 억지로 삼키고 ‘아저씨’로 바꿨다. 그는 가끔 자신과 아림의 결혼이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잊곤 했다.이헌의 목소리는 여전히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로아가 몹시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가슴 깊은 곳 어딘가가 먹먹해졌다.로아가 촉촉한 큰 눈을 깜빡이며 두 손으로 입을 채, 놀람과 기쁨 가득한 얼굴로 아림을 올려다보았다.“엄마, 진짜 로아한테 주는 거랬어. 뜯어봐도 돼?”아림이 대답하기도 전에 계단 쪽에서 지희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지희는 연노란색 홈웨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느슨하게 올려 묶었고, 안색은 괜찮아 보였다.그리고 시선은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아림과 들뜬 로아를 스치고, 이내 고급 포장 상자에 닿았다.“이거 신제품이야?”지희는 상자에 찍힌 로고를 손끝으로 쓸며 웃었다.“오빠도 참 아이를 너무 예뻐한다니까. 우리 유빈이 새 로봇 갖고 싶다고 한마디한 것뿐인데 바로 사람 시켜 보냈네.”로아는 큰 눈을 깜빡였다. 얼굴에 피었던 웃음이 그대로 굳었다.아림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유빈은 이헌의 ‘첫사랑’이 낳은 아이였다.다만 로아가 마음 쓰였다. 딸이 속상해할까 봐, 그게 겁났다.이헌의 미간이 알아채기 힘들 만큼 좁아졌다. “유빈이는 이미 많잖아. 집에만 적어도 네다섯 대는 있고. 이건 로아 거야.”“로아한테... 준다고?”지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목소리가 높아졌고, 말투에는 억울함이 묻어났다.“유빈이 그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그걸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29화

    방금 민혜정이 아림을 부른 말에도 반가움보다는 의아함에 가까웠다.왜 이 시간에 아림이 여기 있느냐고 묻는 듯한 소리였다.창현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곧 시선을 거두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올린 채 아림을 바라보았다. 말투는 아까보다 더 가벼워졌다.“아림 씨, 아까 저랑 같이 식사하기로 했잖아요. 더 늦으면 음식 다 식어요.”그는 자연스럽게 아림의 숄더백을 받아 자기 어깨에 걸쳤다.민혜정이 몇 마디 더 캐물으려 했지만, 창현은 벌써 차 문을 열고 아림에게 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창현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씨 집안 사람들을 대하는 차갑고 거리감 있는 태도와 아림을 대하는 부드럽고 세심한 태도는 누가 보아도 알 정도로 선명하게 대비됐다.이헌의 검은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늘 감정이 없던 듯한 준수한 얼굴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긴 것 같았다.지희는 이헌 곁에 오래 있었기에 그의 성향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지금 이헌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도 금방 알 수 있었다.지희의 눈이 어두워졌다. 곧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숨이 가쁜 듯 말했다.“오빠, 나... 나 너무 힘들어... 숨이 잘 안 쉬어져...”‘최아림 그 몹쓸 것에게 이헌 오빠를 또 빼앗길 순 없어!’‘오빠도, TG그룹 안주인 자리도, 다 내 거여야 해!!’지희의 ‘숨이 안 쉬어진다’라는 말은 모두의 시선을 단번에 돌렸다.민혜정이 가장 먼저 당황했다.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연달아 물었다. 목소리에는 진한 걱정이 묻어났다.“지희야! 왜 그래? 아까 너무 빨리 걸었니?”이헌은 고개를 돌려 지희의 허리를 받쳤다. 눈빛 하나에 기사가 곧바로 차를 가지러 뛰었다.같은 시간에, 뒤쪽의 마이바흐 문은 이미 닫혔다.아림과 창현은 떠났다.이헌은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며칠 뒤.요 며칠 이헌은 자꾸 이유 없이 딴생각에 빠졌다. 서류를 볼 때도, 회의 중에도 그랬다.그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잔뜩 구겨진 미간을 짚고 있는데, 비서 기찬이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28화

    아림은 잠깐 멈췄다. 눈빛은 맑았지만 철저히 거리감을 유지했다.“걱정 고마워. 나 괜찮아.”그 말을 남기고 바로 나갔다.이헌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곧 마음을 다잡고 다시 서류를 펼쳤다.겨우 두 줄을 읽었지만, 단어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생각이 자꾸 흩어졌다.지난 이틀 동안 진료 구역에서 아림과 마주칠 때마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나 병실에서 필요한 말만 주고받을 때나,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동시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뚝딱거리는 감각도 함께 찾아왔다.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하면, 서로를 방해하지 않아도 평소보다 숨이 편했다.그런 느낌은 평생 냉정하고 절제된 규칙 속에서 살아온 이헌을 처음으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이틀 뒤 오전.간호사실에서 서명을 마친 아림은 진료실로 돌아가 흰 가운을 벗어 걸고 퇴근 준비를 했다.어제 야간 당직이었던 터라, 인수인계만 마치면 바로 퇴근할 수 있었다.건물 정문을 나서자마자, 멀리 익숙한 마이바흐가 보였다. 차 앞에는 짙은 네이비색 캐주얼 차림의 창현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흰색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오늘의 차림은 사업장에서 보이던 날카로운 분위기가 덜했다. 대신 느긋함과 여유, 또 지나치게 눈에 띄는 분위기가 있었다.아림은 피식 웃음이 샜다. 왠지 지금 창현의 모습은 꽁지깃을 활짝 편 공작새 같았다.아림이 나오자마자 창현은 바로 그녀를 알아봤다. 입가에 웃음이 번졌고, 긴 다리로 몇 걸음 만에 다가와 꽃다발을 내밀었다.“퇴근이에요?”아림이 꽃다발을 받아 향기를 맡으며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오늘 야간 당직이라는 소식을 입수해서, 퇴근길 마중 나왔죠.” 창현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은 그윽했다.“아림 씨 아직 식사 전일 것 같아서 식당에 자리도 잡아 놨어요. 전망 좋은 자리로... 시간 좀 내 주시죠?”“권 대표님...”아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27화

    점심때가 되자 최태성 부부가 도착했다.민혜정은 보온통을 들고 있었다. 평소의 단정한 여유는 온데간데없고, 긴장과 걱정이 얼굴 가득했다.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눈시울을 붉히고 지희의 뺨을 어루만졌다.“살이 많이 빠졌네.”최태성은 뒤따라 들어왔다. 말끔한 정장 차림에 표정은 엄했지만, 눈에 담긴 걱정은 숨기지 못했다.이어 지희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기가 아림이 병원이니 마음 놓고 지내라. 필요한 게 있으면 아림이에게 말하고.”그 한마디로 최태성은 지희를 아림에게 맡겼다.지희는 병상에 기대어 앉아 가족들에게 둘러싸였다. 눈가를 붉힌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괜찮아요. 그동안 오빠가 잘 돌봐 줬어요.”말투에는 진한 어리광이 묻어났다.민혜정은 마음이 아파 어쩔 줄 몰랐다. 침대 옆에 앉아 지희의 손을 꼭 잡고, ‘우리 보물 같은 딸이 고생했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최태성은 곁에 서 있었다. 말수는 적었지만, 지희를 보는 눈에는 아낌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병실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아림은 흰 가운을 입은 채 문가에 서 있었다. 발이 바닥에 붙어버리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 못했다.손에는 입원 서류가 들려 있었다. 지희의 서명을 받으려던 참이었다.하지만 병실 안에 가득한 온기를 보자, 차마 끼어들기가 어려웠다.문가에 선 아림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민혜정은 오래 끓인 전복죽을 지희에게 떠 주며 말했다.“엄마가 아침 내내 끓였어.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지희의 시선이 무심코 문가를 스쳤다. 입꼬리에 도발적인 미소가 어렸다. 곧 두 손으로 그릇을 받아 한입 먹고 감탄했다.“엄마가 끓여 준 건 역시 최고예요!”‘흥, 몹쓸 것. 내 엄마를 빼앗아 가면 뭐 해?’‘지금 네 엄마가 제일 아끼는 건 결국 나잖아?!’“맛있으면 엄마가 내일도 해줄게.”민혜정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목소리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다정했다.“왜 안 들어와?”이헌이 먼저 문가에 선 아림을 발견했다.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26화

    하얗게 질린 얼굴, 잘게 떨리는 입술, 흐려진 눈. 아림의 이런 모습에 지희의 눈에 쾌감 한 줄기가 스쳤다.‘몹쓸 것!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잘 살아?’‘내 것을 전부 빼앗아 갔으면서. 사라졌어야 하는 사람은 너잖아!’바로 그때 문이 열렸다.이헌이 문가에 서 있었다. 한 손은 문고리에 얹은 채였다.시선이 먼저 상태가 이상한 아림을 훑으며 미간이 좁혀졌다가, 이어 지희에게 닿았다.지희가 눈물에 젖은 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 그는 곧장 몇 걸음 다가가 지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무슨 일이야?”지희는 말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한가득 억울한데도 아림을 탓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참고 있는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곁눈질로 아림의 반응을 살피며 일부러 이헌의 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팔을 뻗어 이헌의 허리를 감았다.이헌의 몸이 살짝 굳었다. 미간이 더 깊게 구겨졌지만, 끝내 지희를 밀어내지는 않았다.따뜻하고 묵직한 손이 지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다독이듯, 힘이 실리지 않은 손길이었다.그는 조금 전부터 밖에 있었다. 지희가 억울하고도 고집스럽게 묻던 말들을 들었다.지금 지희의 병세는 불안정했다. 그는 자신 때문에 지희의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이헌은 아림을 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그 사실을 깨닫자 아림의 손 떨림은 더 심해졌다. 죽을 것 같은 질식감이 밀려와 숨을 조여 왔다.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신체화 발작이었다.아림은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발걸음이 비틀렸고, 급히 문 쪽으로 향했다.아림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여기에 더 있다가는 죽을 것 같았다.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이헌의 고요한 눈 안쪽에 억눌린 감정이 스쳤다.‘아림이 상태가 이상했는데... 왜 저러지?’오래지 않아 문 열리는 소리가 나자, 이헌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들어온 사람은 아림이 아니었다. 아림에게 아멜디 초콜릿을 선물했던 남자, 엄준이었다.“오늘 치료는

  •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제25화

    [이제 괜찮아.]“정말?”[응.]이헌의 말투는 대수롭지 않았다. 마치 별것 아닌 사소한 일을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하지만 대답을 마친 뒤, 시선은 무심코 오른팔에 내려앉았다. 그곳에는 아림이 직접 감아 준 붕대가 그대로 있었다.이헌은 무슨 마음이었는지 그날 이후로 병원에 가서 드레싱을 갈지 않았다.아림은 노트를 덮고 뻐근한 콧등을 눌렀다.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당신은 귀한 몸이니, 웬만하면 병원에 가서 사진이라도 찍어 봐. 괜히 미루지 말고.”아림은 남에게 빚지는 일을 싫어했다. 상대가 이헌이라면, 더더욱.[됐어.]아림의 거리감 있는 태도에 이헌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그 차가운에 아림은 짜증이 치밀었다. 더는 권하지 않았다.“마음대로 해. 그럼 이만.”아림은 먼저 전화를 끊었다.그 뒤 핸드폰을 책상 위에 엎어 두고 일어나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랐다.반 잔쯤 마시고 창가에서 한동안 숨을 고른 뒤에야, 자리로 돌아가 보고서 정리를 이어 갔다....금요일.지희는 제시간에 병원에 도착했다.첫 치료 때의 긴장과 달리, 이번에는 베이지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화장은 정돈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온화하고 예쁜 인상이었다.“교수님, 아림 언니.”지희가 먼저 인사했다. 목소리도 가벼웠다.백요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아림은 지희의 혈압을 재고, 지난 며칠 동안 수면과 식사 상태를 물었다. 항목별로 기록을 남겼다.지희의 협조도는 높았다. 답변은 명확했고, 가끔은 먼저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백요한은 지난 치료 기록을 넘겨 보고 안경테를 코 위로 밀어 올렸다.“지희 씨, 오늘 치료 절차는 지난번과 같습니다. 시간은 대략 40분 정도 걸릴 겁니다. 중간에 불편한 점이 생기면 바로 말하세요.”“네.”치료가 시작되자 아림은 곁에서 기록을 맡았다.지희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고, 호흡도 고르게 유지됐다.첫 치료 때 중간중간 울먹이고 떨며 감정이 격해졌던 것과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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