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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Penulis: 마음봄
서재에서 눈을 뜬 승호는 차가운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평소 집에 들어오는 날이 많지 않았고, 와도 주로 서재에서 잤기 때문에 낯설 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묘하게 달랐다.

평소라면 서재에서 자도, 아침에 눈을 뜰 때면 갈아입을 옷과 구두, 양말까지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없었다.

승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을 이어 가기도 전에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지연이 들어왔다.

지연은 눈을 비비며 울먹였다.

“아빠, 엄마 어디 있어? 왜 엄마가 나 안 깨웠어? 나 늦겠어.”

승호는 시간을 확인했다. 정말 유치원에 늦게 생겼다.

‘하유가 지연을 안 깨웠다고?’

딸이 지각하지 않게 챙기는 건 하유가 가장 신경 쓰던 일이었다.

늘 일찍 일어나서 모든 걸 준비하고 정시에 유치원에 데려다줬다.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다.

‘대체 뭘 하는 거지?’

가사도우미가 지연의 가방을 들고 급히 달려왔다.

승호가 무심하게 물었다.

“애 엄마는?”

“사모님은... 어젯밤 나가신 뒤로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

승호의 시선이 멈췄다.

“안 들어왔다고?”

‘나와 지연이 한 달이나 바깥에서 쉬다 돌아왔다고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다는 건가?’

‘심지어 방 하나 때문에 밤새 집에도 안 들어왔어.’

‘심하유, 처제가 나한테 네가 기분 전환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지난 한 달 동안 찾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넌 완전히 제멋대로 굴기 시작한 모양인 것 같네...’

그리고 어젯밤 하유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

‘심하유, 이번엔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는 건가?’

승호는 입꼬리를 비틀며 차갑게 웃었다.

‘그래, 어디까지 하나 보지.’

가사도우미의 말을 들은 지연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빠의 옷자락을 잡았다.

“아빠, 엄마 왜 그래? 화난 거야?”

승호는 태연하게 말했다.

“괜찮아. 오늘 밤이면 들어올 거야.”

승호는 확신했다. 하유는 자신과 지연을 너무 사랑해서 절대 떠날 수 없는 여자였다.

화가 나도 오래 가지 못할 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돌아올 게 뻔했다.

승호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가사도우미에게 지연을 씻기고 아침을 먹이라고 했다.

그때 혜원이 다가왔다.

“형부, 내가 지연이 씻겨 줄게. 언니도 참 너무하네. 형부가 그렇게 잘해 주고 쉬라고 여행까지 보내 줬는데 애를 두고 나가 버리다니.”

“나한테 이런 남편이 있었다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언니는 자기가 정말 복 받은 줄도 몰라.”

혜원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형부도 화내지 마. 내가 있으니까 지연이는 잘 챙길게.”

다정하고 배려 깊은 말투였다.

승호는 혜원을 바라보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혜원이 지연의 손을 잡았다.

“가자. 지연이 아침에 뭐 먹고 싶어? 이모한테 말해 봐.”

아까까지 걱정하던 기색은 벌써 사라졌다. 지연이 고개를 들었다.

“나 콜라랑 치킨 먹을래. 그리고 이모랑 아빠가 같이 데려다줘. 다른 애들은 다 엄마 아빠가 데려다주는데 나만 아니잖아. 나도 그러고 싶어.”

혜원이 승호를 바라봤다.

“형부, 지연이 부탁 들어주자.”

승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좋아! 오늘 친구들이 나 엄청 부러워하겠다.”

아침을 먹고 승호는 지연을 유치원에 데려다줬다. 그런 뒤 혜원과 함께 회사로 향했다.

주변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회사에 들어간 혜원은 자신의 넓은 독립 사무실로 향했다. 문을 닫자, 그동안 유지하던 온화한 미소가 바로 사라졌다.

혜원은 서류 가방에서 문서를 꺼내며 눈빛을 날카롭게 굳혔다.

아침에 거실 테이블 구석에서 발견한 하유의 이혼합의서였다.

그동안 혜원이 하유 앞에서 공들여 연기한 보람이 있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전업주부가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려고 했다.

이혼합의서에는 하유의 서명만 있었고 승호의 서명은 없었다.

혜원의 눈빛이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반드시 이 합의서를 효력이 생기게 만들 거야.’

‘우승호도, 우씨 집안의 모든 것도 다 내 거야.’

혜원은 합의서를 잘 넣어 두고 커피를 내렸다. 노트북을 켜자 메일 한 통이 화면에 떴다.

[오늘부로 모든 디자인 공급을 중단합니다. 협업은 종료하며 별도 안내는 없습니다.]

“장난해...?”

혜원이 컵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커피가 튀면서 책상 위 기획서를 적셨다.

그건 바로 다음 분기 주얼리 론칭 기획안이었다. 핵심 디자인은 전부 그 익명 메일 계정에서 보내오는 자료에 기대고 있었다.

3년 전, 혜원이 이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관리 부서의 말단 직원이었다. 경력도 짧고 재능도 평범했다.

주얼리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내세울 만한 작품이 없어서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앞날이 막막하던 때, 내부 시스템에서 허점을 하나 발견했다.

익명으로 들어오는 디자인 원고는 일반적으로 관리 부서에서 1차 확인한 뒤 디자인팀으로 넘겨졌다.

어느 날 우연히 그 원고들을 본 혜원은 첫눈에 압도됐다.

지도교수가 늘 말했던, 자신에게는 없는 재능이 바로 저런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질투가 치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혜원은 그 익명의 디자인을 중간에서 빼돌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제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관리 부서 말단에서 디자인 총괄 자리까지 올라왔다.

승호는 혜원이 내놓는 작품에 매우 만족했다. 업무를 핑계로 두 사람의 거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혜원은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려 간절한 문구로 답장을 보냈다.

[선생님, 혹시 오해가 있으신가요? 지금까지 협업은 문제없이 진행됐습니다.]

[원고료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면 다시 협의할 수 있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직접 만나서 말씀드려도 좋습니다.]

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혜원은 노트북을 거칠게 닫았다. 주먹을 꽉 쥐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3년 동안 그 익명의 사람을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성별조차 몰랐다.

다만 그 디자인들이 자신이 위로 올라갈 수 있게 해 준 사다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몰랐다.

이제야 비로소 승호와 지연의 생활 속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놨다.

하필 이런 때에...

“젠장.”

이를 악문 혜원이 낮게 욕을 내뱉었다.

그 디자인들이 없으면 혜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혜원은 숨을 깊게 고르며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해.’

...

한편, 하유는 오전 내내 바쁘게 움직인 뒤에야 핸드폰을 확인할 여유가 생겼다.

텅 빈 알림 화면을 보자 가슴 한쪽이 쓰렸다.

그 집을 나온 지 하루가 넘었지만 승호도, 딸도 메시지 한 줄 보내지 않았다.

전화 한 통도 없었다.

하유는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책상 위 디자인을 봤다.

6년 전, 하유는 주얼리디자인 전공을 졸업하면서 ‘전국 주얼리 디자인 공모전’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단숨에 이름을 알리자, 여러 회사나 유명한 공방에서 제안이 들어왔다.

그중 가장 마음을 끈 곳은 파리에 있는 공방이었다.

당시 제시된 조건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났다.

하지만 승호를 만난 뒤 모든 게 달라졌다.

하유는 달력을 펼쳐서 한 날짜를 바라봤다.

올해 ‘전국 주얼리 디자인 공모전’ 접수 마감일은 바로 오늘이었다.

그 공모전은 주얼리 업계의 흐름을 가늠하는 무대였다.

하유는 6년 전 이곳에서 이름을 알렸고, 6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이곳에서 시작하려는 것이다.

곧바로 노트북을 켠 뒤 접수 페이지에 들어갔다. 작품을 업로드하고 정보를 입력한 뒤 제출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한 문구가 떴다.

[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하유는 문구를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야.’

‘이제부터 공모전을 제대로 준비해야지.’

막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하유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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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내 내 차례가 왔다   제30화

    임정한은 입을 열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문혜령도 침묵했다. 입술만 가볍게 떨렸다.혜원도 무슨 문서인지 궁금해서 가까이 오려고 했다. 하지만 임정한이 바로 서류를 접어 치우면서 내용을 보여주지 않았다.혜원은 물어보려다가 분노한 임정한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그래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하유가 임정한을 제대로 화나게 만들었다.‘진짜 미쳤나 봐. 어떻게 부모한테 저럴 수 있어.’하지만 혜원의 속마음은 달랐다.‘그래. 더 미쳐 봐. 그래야 좋지.’임정한의 목소리가 잠겼다.“그래서 대체 뭘 원하는 거야?”하유가 임정한을 바라봤다.“원하는 거 없어요. 제 양아버지한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면, 이 자료도 밖으로 나가지 않을 거예요.”“너...”임정한은 손가락으로 하유를 가리켰다. 손이 심하게 떨리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지만, 한참 동안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문혜령도 화가 나 온몸을 떨었다. 입술을 떨며 날카롭게 말했다.“하유야, 너... 너 정말 부모도 모르는 애구나!”하유는 입술을 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 곧바로 돌아서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뒤에서는 임정한이 찻잔을 내던지는 소리와 문혜령의 울음 섞인 날카로운 욕설 소리가 들렸다. 하유는 옷깃을 여미고 계속 걸었다.임정한이 양아버지 문제로 하유를 협박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친가에 처음 돌아온 뒤부터, 임씨 가족은 갖가지 말로 하유를 가스라이팅하면서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려고 했다. 하유가 말을 듣지 않으면 늘 양부모를 건드렸다. 하유도 결국 언젠가는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임정한의 노트북 시스템에 몰래 접속해 계정 기록과 내부 자료를 확인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불법·규정 위반 증거를 찾아 따로 보관해 뒀다.예전에는 그래도 친부모라는 생각 때문에 그 증거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이제는 너무 지쳤다.툭하면 임씨 가족의 협박을 받고, 아무 조건 없이 혜원에게 모든 걸 양보하라는 요구도 더는 견디고 싶지 않았다.하유

  • 끝내 내 차례가 왔다   제29화

    문혜령이 말을 이어 갔다.“혜원이 드레스를 네가 가져갔다며? 혜원이 공모전에서 입으려고 한 옷인데 왜 굳이 동생이랑 싸워? 네 옷장에 옷도 많잖아.”하유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그 드레스는 제 거예요. 혜원이가 제 걸 가져가려고 한 거고요.”혜원의 눈가가 바로 붉어졌다.“언니 말이 맞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오랫동안 언니 자리에서 살았으니까 언니가 날 싫어하는 것도 당연해...”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문혜령은 마음이 아픈 듯 혜원을 품에 안고 하유를 노려봤다.“혜원이 뭘 잘못했는데? 그동안 이 아이가 우리 곁에 있어 줬으니까 우리가 버틴 거야!”하유는 가만히 선 채 손가락을 하나씩 움켜쥐었다.수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들을 때마다 가슴은 여전히 아팠다.하유가 문혜령을 바라봤다.“그래서 저는 언제나 다 양보해야 해요? 예전에는 아버지랑 엄마를 양보했고, 지금은 제 딸까지 그랬어요.” “맛있는 것, 좋은 물건, 집에서 저한테 준 차도 혜원이 한마디 하면 다 가져갔잖아요. 아직도 부족해요?”“그게 무슨 말버릇이야?”임정한이 식탁을 세게 쳤다.“네가 언니니까 동생한테 양보하는 게 당연하지. 드레스 한 벌 가지고 왜 이렇게 속이 좁아?”하유는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아버지인 남자를 바라봤다. 마음에 남아 있던 마지막 온기마저 식어 갔다.“그 드레스는 저한테도 중요해요.”하유는 한마디씩 분명하게 말했다.“저도 참가할 공모전이 있어요. 그 옷은 양보하지 않을 거예요.”“너...”임정한이 화가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유야, 이제 정말 제멋대로 하겠다는 거냐?”문혜령도 표정을 굳혔다.“너 예전에는 안 이랬잖아. 왜 이렇게 철이 없어졌니?”하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이 집에서는 하유가 틀린 사람이 될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임정한은 하유가 말없이 서 있는 모습에 더 화가 났다.“이렇게 말도 안 들을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널 찾지 말 걸 그랬다! 네 양아버지가 대체 너를 어떻게 키운 거야?”

  • 끝내 내 차례가 왔다   제28화

    하지만 하유는 정말 예전 같은 삶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승호도, 지연도 더는 붙잡지 않기로 했다.승호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물었다.“네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아?”“알아. 아이는 당신이 맡아. 잘 키워.”하유는 망설이지 않았다.승호의 목소리가 더 차가워졌다.“심하유, 나한테는 밀당 안 통해.”하유는 작게 웃었다.‘이 사람은 정말 자기 중심적이네.’하유가 말했다.“그런 거 아니야. 재산 조건 다시 정리하고 아이 양육권은 당신이 갖는 걸로 작성해. 다 만들면 나한테 보내.”말을 마친 하유는 택시 문을 열고 올라탔다.승호는 멀어지는 차를 계속 바라봤다. 눈빛이 싸늘하게 굳었지만 표정은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하유는 뒷좌석에 앉은 채 반쯤 열린 창문 밖을 바라봤다. 가로등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차례로 되풀이됐다.숨을 깊게 쉬었지만 가슴은 답답했다.그때 핸드폰이 울렸다.하유가 화면을 내려다봤다.임정한.이름 세 글자를 잠시 바라보다 받지 않았다.친가에 돌아간 뒤부터 그 집에 갈 때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갈 때마다 누군가의 편을 가르는 싸움이 벌어졌다.혜원은 언제나 모든 사람이 하유를 나쁜 사람으로 보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냈고, 친부모는 늘 혜원 편이었다.전화가 끊겼다가 다시 울렸다.하유는 숨을 고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하유야, 어디니? 오늘 저녁 집에 와서 밥 먹자.]친모 문혜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투는 다소 무심했다.“엄마, 요 며칠 일이 좀 있어요. 다음에 갈게요.”하유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 너머로 친부 임정한의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집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어? 밥 한 끼 먹을 시간도 없다는 거야?]하유는 숨을 고르면서 말했다.“정말 시간이 없어서...”[네 양아버지 직장 말이야. 내가 거기 윗사람하고 좀 친하거든.]임정한이 하유의 말을 끊었다. 느긋한 말투였다.[요즘 내부 승진 심사를 한다던데. 네 양아버지도 이제

  • 끝내 내 차례가 왔다   제27화

    지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참 생각하더니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엄마 둘 다 있으면 안 돼? 혜원 엄마는 나랑 놀아 주고, 엄마는 맛있는 거 해주면 되잖아. 그게 왜 안 돼?”하유의 가슴이 깊게 베이는 듯 아팠다.아이답고 솔직한 말이었지만 그 말은 오히려 하유의 마음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열 달 동안 품어 낳은 딸을 바라보며 하유는 살짝 웃었다.“사람이 원하는 걸 전부 가질 수는 없어. 엄마도 하나뿐이야. 너도 하나만 골라야 해.”지연은 멍하니 서 있었다. 눈가가 천천히 붉어졌다.하유의 눈을 바라봤지만 무서울 만큼 차분했다. 예전처럼 자신만 바라보는 온기가 보이지 않자 지연은 겁이 났다.입을 열고 ‘엄마를 고를래’라고 하려 했다.하지만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혜원은 사탕을 사 줬다. 밤늦게까지 애니메이션도 같이 봐 줬고 맛있는 곳에도 데려갔다. 그리고 지연에게 잔소리하지도 않았다.반면 하유는... 사탕도 못 먹게 하고, 애니메이션 보는 시간도 정해 놓고, 이것저것 하지 말라는 게 너무 많았다.‘엄마는 너무 귀찮게 해.’지연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하유는 잠시 기다리다가 몸을 돌렸다.“알았어.”더는 딸을 보지 않고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갔다.지연은 제자리에 서서 점점 멀어지는 엄마의 등을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표정이 일그러졌다. 엄마를 부르고 싶었지만 목이 막힌 듯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손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엄마는 다시 오겠지?’예전에는 지연이 아무리 떼를 써도 엄마가 늘 돌아왔다.‘이번에도 분명 돌아올 거야.’지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코를 훌쩍였다. 몸을 돌려 할머니 방으로 뛰어갔다....하유가 막 택시를 잡았을 때 뒤에서 승호가 따라왔다.“심하유, 아직 서명 안 했어.”평소와 다름없이 차가운 목소리였다.하유의 마음도 차갑게 굳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두 사람 중 딸은 다른 여자를 엄마로 삼고 싶어 했고, 남편은 첫사랑을 위해 자신과 이혼하려고 했다.‘됐어. 나

  • 끝내 내 차례가 왔다   제26화

    하유는 잠깐 망설였지만 곧 다가가서 침대 옆에 앉았다.채화경은 안쓰러운 눈으로 하유를 바라봤다.“많이 힘들었지?”하유가 고개를 저었다.“할머니, 저 괜찮아요.”“뭐가 괜찮아.”채화경은 손을 뻗어 하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네가 우리 집에 들어온 지 6년이야. 이 늙은이가 다 봤어. 넌 좋은 아이야. 잘못한 건 우리 우씨 집안이야.”하유의 눈가가 따끔해졌다. 눈을 내리깔고 감정을 눌렀다.“그 못난 녀석.”채화경은 승호 이야기를 꺼내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내 손자니까 성격을 내가 잘 알지. 본성은 나쁜 놈이 아닌데 사람 보는 눈이 없어. 누가 진심으로 잘해 주는지는 못 보고, 문제 일으키는 사람을 또 그렇게 감싸.”하유는 입술을 다물었다.채화경은 한숨을 쉬고 하유의 손을 잡아 토닥였다.“네가 이혼하고 싶다면 할머니는 네 편이야.”하유가 고개를 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채화경은 진지한 눈으로 하유를 바라봤다.“승호는 네 인생을 다 걸 만큼 좋은 남자가 아니야. 우씨 집안을 떠난 뒤에는 네 삶을 살아. 할머니는 네가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하유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6년 동안 시어머니에게 모욕을 당하고, 시누이에게 무시당했다. 남편에게 외면받고, 딸에게까지 싫다는 말을 들어도 절대 울지 않았다.그런데 채화경의 몇 마디에 6년 동안 마음 안에 쌓아 둔 벽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할머니, 감사합니다.”채화경이 하유의 손등을 두드렸다.“고맙기는. 내가 너한테 고마워해야지. 내 목숨을 네가 살렸잖니.”하유가 고개를 저었다.“당연히 할 일이었어요.”“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채화경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넌 내 목숨을 살려줬는데 나는 널 제대로 지켜 주지 못했어. 할머니가 미안하다.”하유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손으로 얼굴을 닦고 숨을 고른 뒤 일어났다.“할머니, 푹 쉬세요. 저는 먼저 갈게요.”채화경은 고개를

  • 끝내 내 차례가 왔다   제25화

    하유는 입술을 다물었다.“할머니, 이 일은...”“알아.”채화경이 하유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을 끊었다.“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채화경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몸을 바로 세웠다.“김 집사.”오래 일한 김숙이 밖에서 들어왔다.“장미란 급여 정산해 주고 오늘 안으로 내보내.”무릎 꿇고 있던 장미란이 급히 머리를 숙였다.“회장님,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발 내쫓지 말아 주세요.”채화경은 손을 들고 그만하라는 뜻을 보였다.김숙은 장미란을 일으켜 거의 끌다시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울음소리는 점점 멀어졌다.채화경의 시선이 다시 엄정숙에게 향했다.“승호 에미야.”엄정숙의 얼굴이 하얘졌다. 억지로 웃었다.“어머님, 지금은 쉬세요. 말씀하지 마시고...”“내일부터.”채화경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말 하나하나에 힘이 있었다.“회사에 이름만 걸어 두고 있는 자리, 전부 정리해.”엄정숙의 웃음이 굳었다.“어머님! 저도 회사에서 10년 넘게 일했어요. 공이 없더라도 고생한 건 있잖아요.”“무슨 고생을 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 내가 자료까지 꺼내 보여줘야 하니?”채화경이 감정 없는 눈으로 바라보자 엄정숙은 더 말하지 못했다.“세진아.”세진이 몸을 움찔했다.“할머니...”“지금부터 내년 오늘까지 용돈은 전부 끊는다.”세진의 눈이 커졌다. 입을 벌리고 항의하려다가 채화경의 표정을 보고 억지로 삼켰다.“하나 더.”채화경은 더 엄한 눈으로 세진을 봤다.“네 새언니한테 사과해.”세진의 표정이 굳어졌다.“지금. 바로.”거절할 수 없는 어조였다.세진의 얼굴은 붉어졌다가 하얘졌다. 억울해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그래도 채화경의 차가운 시선 앞에서는 더 버티지 못했다.한참 뒤에야 하유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미... 안... 해.”목소리는 작고 딱딱했다.사과라기보다는 억지로 굴욕을 참는 태도에 가까웠다.말을 마치자 하유를 매섭게 노려봤다.하유는 눈도 들지 않았다.처음부터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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