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By:  6jayUpdated just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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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좋아지고있어...” 갑작스러운 사고로 언니를 잃은 서연은 어린 조카를 돌보기 위해 형부 태주의 집에 들어간다. 슬픔으로 무너진 세 사람은 서로의 빈자리를 메우고, 서연과 태주는 어느새 가족보다 깊은 마음을 품는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한 두 사람. 죄책감 끝에 겨우 서로를 선택하려는 순간, 죽은 언니의 흔적이 다시 문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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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001화. 형부라고 부르면

2027년 1월 4일, 눈 내리는 저녁.

“우리…… 보고 싶어서 만난 거지, 처제?”

두 남녀는 차 안에 있었다.

먼저 만나자고 한 것은 서연이었다. 돌려줄 물건도, 전할 부탁도 없었다. 태주는 그걸 알면서 나왔고, 지금은 보고 싶었다는 말까지 했다.

서연은 종이컵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따뜻한 라테를 샀는데 한 모금도 넘기지 못했다. 종이컵 뚜껑의 작은 구멍으로 김이 빠져나왔다. 태주의 무릎 위에도 검은 커피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형부.”

익숙한 호칭을 부르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서연은 다음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그를 그렇게 부르면 언제든 선을 그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언니가 처음 소개해 준 날부터 불러 온 말이었다. 지금도 틀린 호칭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태주가 자신을 보는 눈은 달라져 있었다.

“응.”

“저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알아.”

“언니 자리를 갖고 싶은 것도 아니고요.”

“그것도 알아.”

“그런데도 형부가 보고 싶었어요.”

태주는 두 손으로 종이컵을 감쌌다. 손등의 힘줄이 도드라졌다. 바로 앞에 서연이 있는데도 그 손을 다른 데로 옮기지 않았다.

앞유리에 달라붙은 젖은 눈송이가 난방 열에 녹아 흘렀다. 와이퍼가 물기를 밀어낼 때마다 맞은편 카페의 불빛이 잠깐씩 또렷해졌다.

차 밖에서는 사람들이 목도리를 여미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쪽을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자신이 부끄러워 서연은 시선을 내렸다.

“나도 서희를 잊은 적 없어.”

“네.”

“모든 걸 잊어야 네가 보이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컵을 감싼 서연의 손이 멈췄다.

언니를 생각하지 말자고 했다면 차에서 내렸을 것이다. 지난 일을 잊고 자기만 보라고 해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태주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언니의 이름을 그대로 부른 채 서연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더 나쁜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서연은 대답 대신 컵 가장자리를 문질렀다. 괜찮다고 해 주지 않는 사람이어서 믿었는데, 지금은 그와 함께 잘못된 곳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둘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서연이 손가락을 펴자 눌린 종이가 작게 울렸지만, 두 사람 모두 그쪽을 보지 않았다.

난방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밖에서 어깨에 붙었던 눈은 벌써 녹아 코트 천을 짙게 적셨다. 서연은 단추를 풀지 않았다. 벗어 놓으면 더 오래 머물겠다는 뜻처럼 보일까 봐서였다.

조수석 발치에는 접은 검은 우산이 놓여 있었다. 서연은 구두 끝으로 우산을 밀지 않게 발을 모았다. 몸을 조금 옮기는 것만으로도 태주가 돌아볼까 신경이 쓰였다.

그를 보고 싶다고 말해 놓고, 정작 눈을 마주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태주가 운전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연은 그가 컵을 홀더에 내려놓는 것을 봤다. 빈손이 되자 더는 쳐다볼 곳을 찾지 못했다.

“역까지 데려다줄게.”

“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 됐다. 역에 내려 전철을 타고, 원룸에 돌아가 오늘도 아무 일 없었다고 생각하면 됐다. 태주는 실제로 그렇게 끝낼 수 있도록 기어봉에 손을 뻗었다.

서연은 그 손이 움직이기 전에 불렀다.

“태주 씨.”

형부란 호칭 대신 이름을 불렀다.

남자의 손이 기어봉 앞에서 멈췄다. 서연은 뒤늦게 ‘형부’라고 덧붙이지 않았다. 종이컵을 쥔 채 그가 이쪽을 돌아보기를 기다렸다.

“왜 그렇게 불렀어.”

“형부라고 부르면 자꾸 숨는 것 같아서요.”

“숨지 않으면?”

“모르겠어요.”

서연은 그의 얼굴을 보고 덧붙였다.

“그런데 지금 가면, 또 보고 싶을 것 같아요.”

태주는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눈송이가 붙은 창 너머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문을 열고 내리면 저 사람들 사이로 걸어갈 수 있었다. 오늘도 커피 한 잔 마신 일로 끝낼 수 있었다.

그런데 서연은 손잡이를 찾지 않았다. 그의 손이 기어봉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우리…… 지금 멈출까?”

와이퍼가 앞유리를 한 차례 쓸고 지나갔다. 낮은 물음은 그 소리가 멎은 뒤에도 귀에 남았다. 그만하겠다고 하면 그는 더 묻지 않을 사람이었다.

서연은 컵을 홀더에 내려놓았다.

“아니요.”

태주의 손이 뺨 가까이에서 멈췄다. 기다리는 손에 서연이 먼저 얼굴을 기댔다. 따뜻한 손바닥에 닿은 뒤에야, 눈앞의 사람이 정말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견디기 어려워졌다.

고개를 들면 눈이 마주쳤다. 내리면 그의 손에 뺨이 더 깊이 닿았다. 서연은 어느 쪽으로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서연이 그의 손목을 감쌌다. 태주는 그 손을 내려다보다 다시 그녀와 눈을 맞췄다. 서연은 먼저 잡고도 손가락을 펴지 않았다.

태주가 몸을 숙였다.

입술이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서연은 눈을 뜨고도 바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에게 가까이 간 것도, 멈추지 말라고 한 것도 자신이었다.

태주가 물러나려 하자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멈췄다. 서연은 자신이 붙잡았다는 걸 알고도 곧바로 놓지 못했다.

잠깐 뒤에야 손이 풀렸다. 태주의 손바닥은 아직 뺨 곁에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다시 다가가지 않았다.

서연은 입을 열었다. 이름을 부르려 했는지, 아무 말이라도 해서 그를 물러나게 하려 했는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형부…….”

조금 전 버리려던 호칭이 끝내 입 밖으로 나왔다.

“나도, 알아.”

그는 언니가 사랑했던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가 끝나기 전에 서연이 다시 끌어당겼다.

두 번째 입맞춤은 짧지 않았다. 이가 가볍게 부딪쳤고, 태주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입 안에서 울렸다. 서연은 기어봉 쪽으로 빠져 나가려던 그의 손목을 다시 잡았다. 잡은 손은 이미 빈손이 아니었다. 손가락 사이로 그의 맥박이 뛰었다.

난방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코트 깃 안으로 들어온 그의 손끝이 처음에는 망설이는 것처럼 멈췄다가, 서연이 고개를 더 들자 그대로 내려갔다. 목, 잠긴 단추의 위, 브래지어 천이 시작하는 자리.

“차 안이야.”

태주가 입술 사이에서 말했다.

“알아요.”

“누가 보면.”

“안 봐요. 아까부터 확인했어요.”

말이 부끄러워 서연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 뒤로 와이퍼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남았다. 태주의 손바닥이 코트 안에서 가슴을 덮었다. 옷을 입은 채로도 유두가 손금에 걸렸다. 서연의 허리가 시트에서 살짝 떴다가 내려앉았다.

“여기까지 하자.”

태주가 낮게 말했다. 손은 거두지 않았다.

“형부가 시작해 놓고.”

“그래서 말하는 거야.”

서연은 대답 대신 무릎을 조금 벌렸다. 좁은 조수석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태주의 시선이 내려갔다. 코트 자락 아래 어두운 스타킹과, 그 위로 올라간 치마 끝이 보였다.

그의 손바닥이 허벅지 안으로 들어왔다. 스타킹 너머로 온기가 닿자 서연은 이를 악물었다. 종이컵이 홀더 안에서 흔들렸다. 라테는 이미 식어 있었다.

손가락이 스타킹의 얇은 끝을 더듬다 가장자리를 내렸다. 살에 직접 닿는 순간 서연의 숨이 끊겼다. 태주는 그 숨을 듣고도 더 묻지 않았다. 묻기에는 이미 늦은 손이었다.

면 팬티가 한쪽으로 밀렸다. 중지가 틈을 가르고 들어갈 때 서연은 핸들 쪽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젖어 있네.”

혼잣말처럼 낮았다. 비난도 달램도 아니었다. 사실만 있었다.

“……말 안 해도 돼요.”

“내가 알아야 해.”

한 마디가 들어간 뒤에 두 마디가 겹쳤다. 좁은 각도여서 깊이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도 서연의 허벅지가 떨렸다. 창문에 김이 서렸다. 맞은편 카페의 불빛이 흐릿해졌다 선명해졌다.

태주가 손을 빼고 벨트 버클을 풀었다. 금속 소리가 차 안에서 유난히 컸다. 서연은 그 소리를 지우려고 다시 그의 입을 막았다. 키스는 서툴렀다. 이가 또 부딪쳤다.

조수석과 운전석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짧지 않았다. 서연이 엉덩이를 들고 건너가려다 콘솔박스에 무릎을 부딪쳤다. 태주가 시트를 뒤로 밀었다. 공간이 조금 늘었을 뿐이었다.

서연이 치마를 걷어 올리고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코트는 그대로였다. 벗으면 밖에서 더 잘 보일 것 같아서였다. 속옷만 옆으로 밀어 둔 채 그의 것을 손으로 찾았다. 손안에 들어온 무게가 생각보다 뜨거웠다. 귀두가 이미 젖은 입구에 닿았다.

밀어 넣는 각도가 맞지 않았다. 조금만 들어가고 미끄러졌다. 서연이 허리를 숙여 다시 맞추자 태주의 숨이 목에서 깨졌다.

“아프면 그만해.”

“안 아파요.”

반쯤 들어갔을 때 서연의 입에서 소리가 새나갔다. 그녀는 그 소리를 삼키려다 호칭을 삼키지 못했다.

“형부——.”

태주의 손이 허리에서 멈췄다. 들어간 것도 멈춘 채로 한 번 뛰었다. 서연은 그 정지가 자기 탓인 줄 알고 더 내려앉으려 했다. 태주가 허리를 붙잡았다.

“그 말로 하면 내가 빠져.”

“그럼 뭐라고 해요.”

“지금은…… 이름.”

“태주 씨.”

그제야 그가 허리를 올렸다. 그러나 시트 각도가 받쳐 주지 못했다.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서연의 무릎이 핸들에 닿았다. 경적이 울릴 뻔한 자리에 손이 먼저 갔다. 태주가 핸들을 제압했다. 두 사람은 잠깐 숨을 고르며 서로를 봤다.

차 안에서는 안 됐다.

태주가 이마를 서연의 이마에 붙였다.

“뒤로 가자.”

“네.”

서연이 조수석으로 내려설 때 다리 사이로 액이 흘렀다. 스타킹 안쪽에 온기가 번졌다. 그녀는 그 감각을 모른 척하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잠깐 들어왔다가 문이 닫히며 끊겼다.

뒷좌석은 더 어두웠다. 태주가 지갑을 꺼냈다. 콘돔을 집어 든 손가락에, 지금은 끼지 않은 결혼반지의 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서연은 그 자리를 보지 않으려다 결국 봤다. 포장지를 찢는 소리가 와이퍼 소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태주가 씌우는 동안 서연은 스타킹을 한쪽만 내렸다. 둘 다 벗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고, 전부 벗으면 돌아갈 곳이 없어질 것 같아서였다.

그가 서연의 무릎 사이로 들어왔다. 한 번에 다 들어가지 않았다. 서연이 각도를 바꾸자 허벅지 안쪽이 그의 허리에 밀착됐다. 채워지는 감각이 깊어지자 서연은 눈을 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얼굴은 언니가 사랑했던 그 얼굴이었다. 숨소리도 그 목소리였다. 서연은 그 사실을 아는 채로 다리를 더 열었다.

“봐.”

태주가 말했다.

“보고 있어요.”

“눈 감으면 내가 누군지 모를까 봐.”

잔인한 말이었다. 서연은 그 말을 고치라 하지 않았다.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차체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창 너머로 사람이 지나갔다. 이쪽을 보는 사람은 여전히 없었다. 그 사실이 안심이 되면서 더 더러워졌다.

태주의 손이 코트 안에서 유두를 문질렀다. 아래에서는 깊어졌다. 서연이 신음을 삼키려 그의 손등을 물었다. 이 자국이 남을 힘까지는 주지 못했다.

절정은 예쁘게 오지 않았다. 서연의 안이 먼저 조여 들었고, 태주가 그 조임을 느끼고 허리를 멈췄다가 더 밀어 넣었다. 서연은 뒷좌석 천장 손잡이를 잡았다. 잡고도 이름이 나오지 않아 다시 그 단어를 삼켰다.

형부.

입 안에서만 불렸다.

태주가 조금 뒤에 따라왔다. 숨이 목에서 갈라질 때 그는 서연의 이름을 불렀다. 언니의 동생으로 부르던 그 이름이 아니었다. 그냥 서연이었다.

둘은 바로 떨어지지 못했다. 빠져나온 뒤에도 이마가 맞닿아 있었다. 콘돔의 끝이 무거웠다. 태주가 매듭을 지어 휴지에 감쌌다. 휴지는 원래 커피를 받치려 컵홀더에 넣어 둔 것이었다.

서연은 속옷을 바로잡다 포기하고 코트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스타킹은 한쪽으로 처진 채였다. 다시 조수석으로 넘어가 앉자 식은 라테가 그대로 있었다. 뚜껑 구멍으로는 더 이상 김이 오르지 않았다.

태주가 벨트를 채우고 운전석에 앉았다. 앞머리를 쓸어 넘긴 손이 잠깐 떨렸다.

“역까지 데려다줄게.”

같은 말이었다. 하기 전의 그 말과 같은 문장이었다.

서연은 창밖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가면, 또 보고 싶을 것 같아요.”

이미 하고 난 다음에도 그 말이 나왔다. 태주가 핸들을 쥔 채 웃지 않았다. 웃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집에 가서 씻어.”

“형부 손은요.”

“나는 나중에.”

서연은 그의 손등을 봤다. 이빨 자국은 흐렸다. 반지 자국은 선명했다.

차가 출발하지 않은 채로 한참이 지났다. 눈이 앞유리를 다시 덮었다. 와이퍼가 한 번 더 지나갔다.

***

원룸 불을 켠 것은 밤 아홉 시가 넘어서였다.

서연은 코트를 벗지 않은 채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고 허벅지 안쪽을 봤다. 희미한 붉은 자국이 손가락 두 개 너비로 남아 있었다. 문지르자 더 선명해졌다.

거울 속 목덜미에도 입술 자리가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목폴라를 입어야 했다.

휴대전화가 싱크대 위에서 울렸다.

『도착했어?』

서연은 젖은 손으로 화면만 보다가 내려놓았다. 답을 치면 오늘이 일정이 되고, 치지 않으면 사고처럼 남을 것 같았다.

물을 끄고 나서야 짧게 보냈다.

『도착했어요.』

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 오는 동안 서연은 자국 위에 수건을 올려 두었다. 덮는다고 지워지지 않는 자리였다.

창밖으로 눈이 아직 내리고 있었다.

그날은 2027년 1월 4일이었다.

열 달 전만 해도, 이 사람은 언니의 남편이었고, 서연은 그 사실을 호칭으로만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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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년 1월 4일, 눈 내리는 저녁.“우리…… 보고 싶어서 만난 거지, 처제?”두 남녀는 차 안에 있었다.먼저 만나자고 한 것은 서연이었다. 돌려줄 물건도, 전할 부탁도 없었다. 태주는 그걸 알면서 나왔고, 지금은 보고 싶었다는 말까지 했다.서연은 종이컵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따뜻한 라테를 샀는데 한 모금도 넘기지 못했다. 종이컵 뚜껑의 작은 구멍으로 김이 빠져나왔다. 태주의 무릎 위에도 검은 커피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형부.”익숙한 호칭을 부르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서연은 다음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그를 그렇게 부르면 언제든 선을 그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언니가 처음 소개해 준 날부터 불러 온 말이었다. 지금도 틀린 호칭은 아니었다.그런데 그 말을 들은 태주가 자신을 보는 눈은 달라져 있었다.“응.”“저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알아.”“언니 자리를 갖고 싶은 것도 아니고요.”“그것도 알아.”“그런데도 형부가 보고 싶었어요.”태주는 두 손으로 종이컵을 감쌌다. 손등의 힘줄이 도드라졌다. 바로 앞에 서연이 있는데도 그 손을 다른 데로 옮기지 않았다.앞유리에 달라붙은 젖은 눈송이가 난방 열에 녹아 흘렀다. 와이퍼가 물기를 밀어낼 때마다 맞은편 카페의 불빛이 잠깐씩 또렷해졌다.차 밖에서는 사람들이 목도리를 여미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쪽을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자신이 부끄러워 서연은 시선을 내렸다.“나도 서희를 잊은 적 없어.”“네.”“모든 걸 잊어야 네가 보이는 것도 아닌 것 같아.”컵을 감싼 서연의 손이 멈췄다.언니를 생각하지 말자고 했다면 차에서 내렸을 것이다. 지난 일을 잊고 자기만 보라고 해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태주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언니의 이름을 그대로 부른 채 서연을 보고 있었다.“그래서 더 나쁜 것 같아요.”“나도 그렇게 생각해.”서연은 대답 대신 컵 가장자리를 문질렀다. 괜찮다고 해 주지 않는 사람이어서 믿었는데, 지금은 그와 함께 잘못된 곳에 와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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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4화. 여기서 자겠다고?
식사가 끝나자 태주는 설거지를 하고 서연은 아이 가방을 풀었다. 봄이는 토끼 인형부터 가져가 귀에 코를 묻었다.“얘도 씻어?”“오늘은 안 씻어도 돼.”서연은 옷만 세탁 바구니에 넣었다. 태주가 잠옷을 찾자 봄이가 인형을 안고 자기 방으로 갔다. 아빠가 내민 옷을 밀어 두고 서랍 맨 밑에서 딸기 무늬 잠옷을 꺼냈다.서연은 식탁에 남은 바나나 껍질을 치우다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아버지에게 집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전화하니 엄마는 씻고 누웠다고 했다.“너는?”“좀 있다 들어가려고.”“밥은 먹었고?”“응. 아빠도 챙겨 먹어.”통화를 끊고 보니 저녁 8시가 넘어 있었다. 서연은 세탁기에 옷을 넣었지만 작동시키지 못했다. 내일 아침까지 두면 냄새가 날 텐데, 지금 돌리면 널고 가야 했다.태주가 봄이의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나왔다.“돌려 놔. 내가 널게.”“유치원 가방 안에 젖은 수건도 있어요.”“그것도 넣을게.”서연은 세제를 계량해서 넣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봄이는 아빠 무릎에서 머리를 말렸다. 바람이 귀에 닿자 얼굴을 찌푸렸고, 태주가 드라이어 방향을 바꿨다.잠자리에서는 동화책 한 권이 두 권이 되었다. 서연이 토끼 목소리를 내자 봄이가 틀렸다고 했다. 언니가 어떻게 읽어 줬는지 물었지만 아이는 알려 주지 않았다.“엄마처럼 해 줘. 한 번만.”서연은 같은 줄을 다시 읽었다. 봄이는 눈을 감았다가 금세 떴다. 이번에는 틀렸다는 말도 하지 않고 책장을 넘겼다.두 번째 책 마지막 장에서 태주가 방문을 두드렸다.“아빠도 들어가도 돼?”봄이가 베개를 조금 옮겼다. 태주는 침대에 올라가지 않고 바닥에 앉아 아이가 내민 책을 받았다. 그림 속 고양이 이름을 잘못 읽자 봄이가 바로잡았다.서연은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듣다가 벽시계를 봤다. 10시 30분이었다. 봄이의 눈은 감겼다 뜨기를 반복했다.“봄아. 이모 이제 집에 갈게.”아이가 곧바로 눈을 떴다.“왜?”“이모도 씻고 옷 갈아입어야지. 내일 점심 먹고 올게.”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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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5화. 놓으셔도 돼요
“작은방에서요. 저녁마다 버스 타는 시간은 줄잖아요. 제 집은 그대로 두고요.”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어젯밤 신발장 앞에서 잡았던 소매가 떠올라 서연은 펜으로 빈칸을 눌렀다. 소매만이 아니었다. 목덜미에 닿았던 숨, 그 숨 때문에 열렸던 몸까지 빈칸을 눌렀다.“형부 방에 들어가겠다는 것도 아닌데요.”태주가 등을 세웠다. 서연은 말을 잘못 골랐다는 걸 알았다.“그러니까, 봄이가 적응할 동안만요.”“불편하지 않겠어?”“뭐가요?”“나도 여기서 살아.”서연은 펜을 쥔 손을 내려다봤다. 출근 시간과 버스 시간은 빼곡하게 적었는데, 그 말에는 준비한 대답이 없었다.아침에 잠이 덜 깬 얼굴로 마주칠 사람도 태주였다. 밤에 씻고 나와 복도 불을 끌 사람도. 방을 따로 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두 방문 사이에는 그를 지나쳐야 하는 복도가 있었다. 그 복도에서 숨이 다시 목덜미에 닿을 수도 있었다.“알아요.”서연은 고개를 들었다. 태주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불편하겠느냐는 질문을 취소하지도, 괜찮을 거라고 대신 대답해 주지도 않는 얼굴이었다.거실에서 봄이가 맞춘 퍼즐 조각을 두드렸다. 둘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른들의 대화를 듣지 못한 아이는 곰의 코를 제자리에 붙이고 있었다.“봄이한테는 아직 말하지 마.”“네. 사장님하고도 정해야 돼서.”“나도 현장 시간 확인할게. 네가 있어도 내가 해야 하는 건 해야지.”그가 서연의 메모장을 자기 쪽으로 당기지 않고 식탁 가운데로 조금 밀었다. 빈 종이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적었다. 펜 끝이 수요일 위에서 멈췄다.“일단 출근부터 얘기해 보고. 안 되는 시간이 있으면 그대로 말해.”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에 메모장을 넣으려는데 배에서 소리가 났다. 태주가 주방을 봤다.“밥 먹었다며.”“우유 마셨어요.”“그게 밥이야?”그는 명자가 남겨 둔 계란찜을 꺼냈다. 서연이 괜찮다고 하기 전에 밥그릇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봄이는 퍼즐 판을 안고 식탁 쪽으로 왔다.서연이 숟가락을 들자 태주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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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6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요일 아침 7시, 서연은 여행 가방 바퀴를 들고 현관 턱을 넘었다.태주가 문을 잡아 주었다. 봄이는 아직 자고 있었다. 가방 위에 묶어 둔 베개가 문고리에 걸려, 서연은 끈을 풀어 옆구리에 끼었다.“걸린다고 하더니 진짜 걸리네요.”목소리를 낮춰 말하자 태주가 문을 조금 더 열었다. 서연은 작은방에 짐을 밀어 넣고 시계를 봤다. 출근하려면 곧 나가야 했다.문을 여는 손이 월요일 밤 허벅지 뒤에 닿았던 손과 같다는 생각을, 서연은 가방 지퍼를 내리는 동안만 했다. 그 이상은 아침의 일이 아니었다.“저녁에 풀게요. 봄이가 깨면 가방 보여 주세요.”“응. 밥은 먹었어?”“김밥 사 왔어요. 제 건 가방에 있어요.”서연은 식탁에 김밥 두 줄을 놓았다. 태주는 하나를 바로 냉장고에 넣고 봄이가 먹을 것은 접시에 덜었다. 어른들이 모두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를 지금 깨우지는 않았다.다시 신발을 신는데 태주가 세탁한 손수건을 내밀었다. 사각으로 접힌 천에서 희미한 비누 냄새가 났다. 빈소에서 건넸다 돌려받지 못한 그 손수건과 같은 크기였다. 서연은 자기 가방 주머니에 넣었다.“고맙습니다.”그녀는 시간을 확인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가방 속 원룸 열쇠가 손끝에 걸렸다. 어제 상자를 마저 정리할 때 태주는 무거운 것을 건네지 않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서연도 월요일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발판, 놓으라는 말, 문 잠근 뒤의 손. 그 순서를 아침 인사에 올릴 자리는 없었다.오늘부터는 그 사람과 같은 현관으로 돌아온다.점심시간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짐 가져갔어?”“응. 아직 풀지는 못했어.”“네 집은 그대로 두고?”“응. 옷이랑 베개만 가져왔어.”어제도 같은 설명을 했는데 엄마는 다시 물었다. 낮에 돕는 것과 거기서 자는 건 다르다는 말까지 똑같았다.수화기 너머로 밥솥 여는 소리가 들렸다.“네 언니 옷은 건드리지 마.”서연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안 건드려.”“누가 가져가라거나 치우자고 해도.”“알았어, 엄마.”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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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7화. 아침
서연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천장이 낯설었다. 얇은 요 아래로 단단한 바닥이 느껴졌고, 닫힌 문 너머에서 수도관을 타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몇 초가 지나서야 작은방에서 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다음으로, 이 요 위에서 그를 받아들인 밤이 떠올랐다.시계는 6시 12분이었다.허벅지 안쪽이 딴딴했다. 요 옆 작은 휴지통에 티슈가 구겨져 있었다. 태주가 새벽에 몰래 치우지 못한 것이었다. 서연은 그 티슈를 더 깊이 눌러 넣었다.복도에서 먼저 소리가 나는지 잠깐 귀를 기울였다. 물 한 컵을 마시러 나갔다가 옷차림까지 신경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옷차림만이 아니었다. 다리 사이의 감각까지 아침의 일이 되어 있었다.서연은 셔츠를 챙겨 욕실로 갔다.문 앞의 작은 발 받침을 비켜 디뎠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잠을 설친 티가 났다. 태주와 마주치기 전에 씻으려고 일찍 나온 것이 더 민망했다. 손목 안쪽에 얕은 붉은 자국이 있었다. 그가 붙잡았던 자리인지, 스스로 이를 악물다 남은 자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주방에 불이 켜졌다. 태주가 밥솥을 열어 보고 있었다.“일찍 일어났네.”“벌써부터 늦으면 사장님이 바로 원래 시간으로 돌려요.”“밥은 해 놨어. 국은 어제 거 데우면 되고.”태주가 냉장고 문을 열려다 그녀를 다시 봤다.“거기.”“뭐 묻었어요?”“옷깃. 안으로 접혔어.”그는 자기 목 옆을 가리켰다. 서연은 반대편 깃을 만졌다가 손을 바꿨다. 태주가 한 번 더 자기 옷깃을 가리켰다. 서연은 그가 다가올 것처럼 턱을 조금 들고 있었다.다가온 손끝이 깃을 펴다 쇄골 아래로 미끄러졌다. 얇은 셔츠 아래로 유두의 윤곽이 잠깐 섰다. 형광등이 그 자리를 그대로 비췄다. 태주의 시선이 그 점을 스치고 냉장고로 도망갔다. 서연도 본 척하지 않았다. 못 본 척하는 공기가 어제 밤보다 더 짙었다.“됐어.”태주는 냉장고 쪽으로 돌아섰다. 서연은 멀쩡해진 옷깃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가 손을 뻗은 것도 아닌데, 혼자 기다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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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8화. 보호자
금요일 오후, 봄이의 담임은 작은 봉투 하나를 서연에게 건넸다.“다음 주 수요일에 가까운 숲으로 산책을 가요. 동의서와 전에 쓰시던 비상 연락 카드를 넣었어요. 바뀐 연락처 확인해서 월요일까지 보내 주세요.”서연은 봉투를 가방에 넣으려다 멈췄다.“제가 이모라서요. 아빠에게 그대로 전할게요.”“네. 보호자분이 작성해 주시면 돼요.”“이모도 보호자야.”봄이가 끼어들었다. 선생님은 비상 연락 카드에 이모 번호도 적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신 아빠가 확인해서 보내 달라는 말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놀이터를 지날 때 아이가 다시 물었다.“보호자가 뭐야?”“봄이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챙겨 주는 어른.”“그럼 이모도 보호자네?”서연은 걸음을 늦췄다. 아이 손이 장갑 안에서 꼼지락거렸다.“그럼. 오늘 봄이를 데리러 오기로 했잖아. 추운데 혼자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아빠는?”“아빠는 봄이랑 같이 살면서 매일 챙겨 주잖아.”“엄마는?”찬 바람이 모자 아래로 파고들었다. 서연은 봄이의 귀를 덮어 주었다.“엄마도 그랬지.”봄이는 잠시 바닥의 보도블록만 밟아 걸었다. 검은 칸은 건너뛰고 회색 칸에만 발을 놓았다. 서연도 아이 속도에 맞췄다. 보호자라는 말이 수요일 밤의 문 닫힌 작은방과 겹쳐, 그녀는 장갑 안에서 아이 손을 더 정확히 쥐었다. 정확히 쥘수록 밤에 한 일이 보호와 멀어졌다.집에 돌아오자 봄이는 물병 이름표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봤다. 서연은 동의서 봉투를 냉장고 위에 두었다. 자기 이름은 직접 쓰겠다며 연필을 가져온 아이에게는 연습할 종이를 내줬다.아이가 강봄을 세 번 쓰는 동안 서연은 사과를 깎았다.태주는 오늘은 7시 10분쯤 들어오겠다고 미리 문자를 보냈다. 서연은 주간표의 저녁 칸에 그 시간을 적었다. 8시부터 할 일은 예정대로 할 수 있겠다는 걸 확인하고 봄이와 먼저 밥을 먹었다.7시가 조금 넘어 현관문이 열렸다. 태주는 작업복 위에 검은 점퍼를 걸친 채였다. 봄이가 봉투를 들고 달려가자 그는 신발도 벗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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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9화. 엄마 아니에요
토요일 아침, 냉장고의 주말 칸은 비어 있었다.태주는 주간표 앞에서 커피를 마셨다. 서연은 식빵 봉지를 닫으며 물었다.“오늘 장은 누가 봐요?”“내가 봐야지.”“봄이는요?”“같이 가거나 엄마한테 잠깐 부탁하고.”소파에서 그림을 그리던 봄이가 고개를 들었다.“나 이모랑 갈래.”태주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서연은 먼저 제 일정을 떠올렸다. 오전에 원룸에 가서 우편물을 챙기고 세탁물을 가져오려 했다. 가는 길에 마트가 있었다.“형부는 집에 있을 거예요?”“오전에 회사 서류만 좀 볼게. 오후엔 봄이랑 있을 거고.”“그럼 제가 장 봐 올게요. 원룸도 들러야 해서.”태주는 휴대전화에 적어 둔 목록을 보냈다. 쌀, 우유, 달걀, 봄이가 먹는 김, 두부. 서연은 자기 샴푸와 세제를 따로 적었다.“장 본 건 봄이 봉투 돈으로 쓰면 돼.”“공동으로 먹는 것만요.”“알았어.”그가 고집하지 않아 대화는 금방 끝났다. 태주는 봄이에게 마트에서는 이모 손을 놓지 말라고 말했다. 아이는 손보다 카트를 잡겠다고 했다.원룸에 들르자 봄이는 작은 집이라고 했다. 서연은 보일러를 잠깐 돌리고 창문을 열었다. 우편함에서 가져온 고지서를 책상 위에 놓고, 세탁 바구니에서 필요한 옷만 골랐다. 봄이는 창가에 서서 아래 골목을 봤다. 그 사이 서연은 욕실 선반만 확인했다. 손을 뻗지 않았다. 아이가 보이는 집에서는 어제 밤을 다른 방에 두기로 했다.싱크대에는 언니가 준 반찬통이 그대로 포개져 있었다. 봄이가 노란 뚜껑을 알아봤다.“우리 집 거.”“이모 주라고 엄마가 가져온 거야.”“그럼 이제 이모 거야?”서연은 통을 가방에 넣으려다 다시 내려놓았다.“응. 이모가 쓰는 거지.”봄이는 뚜껑을 하나씩 맞춰 보고는 가장 작은 통을 골랐다. 마트에서 딸기를 사 담아 가자고 했다. 서연은 씻은 통을 장바구니에 넣었다.주말 마트에는 사람이 많았다. 봄이는 약속대로 카트 손잡이를 잡았지만, 과자 진열대 앞에서는 자꾸 속도가 느려졌다. 서연은 과자 하나를 고르게 하고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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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10화. 멈춘 화면
일요일에는 이불을 빨기로 했다.서연이 작은방 요의 커버를 벗기자 봄이가 베갯잇을 들고 따라왔다. 자기 것도 같이 빨겠다는 말에 태주가 세탁기 앞에서 색을 나눴다. 요 커버를 뒤집는 동안 서연은 수요일 밤의 주름이 남아 있는지 봤다. 세탁망 안으로 밀어 넣자 그 주름은 보이지 않았다.“이건 흰 것끼리. 분홍 이불은 다음.”“왜 같이 안 해?”“분홍 물 들면 이모 베개도 분홍색 돼.”봄이는 잠깐 고민하더니 그건 예쁠 것 같다고 했다. 서연은 웃으며 자기 베갯잇을 흰 빨래 더미에 넣었다.욕실 아래칸에서 개인 세제를 꺼내려는데 언니가 쓰던 섬유유연제 병이 흔들렸다. 뚜껑 둘레에 말라붙은 파란 액체가 보였다. 서연은 자기 병만 빼고 위칸 문을 닫았다.태주는 세탁기를 돌리고 베란다 건조대를 닦았다. 서연이 창틀 먼지를 훑는 동안 봄이는 노란 집게를 전부 자기 바구니로 가져갔다.“오늘부터 이건 내 거.”태주가 순순히 남은 집게를 챙겼다. 서연은 그 모습에 웃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창틀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나눈 대화가 다시 생각났다. 처제라는 두 글자와, 끝나지 못한 오 분.첫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거실 서랍도 정리했다. 비어 있는 색연필 통, 다 쓴 건전지, 유효기간이 지난 쿠폰이 나왔다. 태주는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직접 확인했다. 서연은 물건을 들 때마다 물었다.“이 영수증은요?”“버려도 돼.”“이 충전선은?”“가족 태블릿 거야. 남겨 줘.”소파 아래에서 태블릿을 찾아 충전기에 꽂았다. 화면 한쪽이 금이 가 있었지만 전원은 들어왔다. 봄이는 비밀번호를 안다며 숫자를 눌렀다. 자기 생일 네 자리였다.“내가 춤추는 거 볼래?”태주가 먼지 묻은 손을 바지에 닦았다.“빨래 널고 보자.”“지금 조금만.”아이는 동영상 목록을 열었다. 가장 위에는 작년 겨울 날짜가 적혀 있었다. 분홍 양말을 신고 거실에서 빙글도는 봄이가 썸네일에 보였다.서연은 서랍 속 건전지를 한 봉지에 모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화면 속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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