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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Penulis: 마음봄
하유는 병원에서 거의 한 달을 보낸 뒤 혼자 퇴원 절차를 밟았다.

그 한 달 동안 승호와 지연은 단 한 번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혜원은 진작에 퇴원했다.

하유는 매일 혜원이 올리는 SNS 게시물을 볼 수 있었다.

위치 태그는 유럽의 설산 마을에서 고성 옆 쇼핑 거리로 계속 바뀌었다.

사진 속 승호의 목 위에 올라탄 지연은 눈이 휘어지도록 웃고 있었다.

혜원이 쪼그리고 앉아서 지연의 신발 끈을 묶어 주는 사진도 있었다.

셋이 눈밭에서 서로 끌어안은 모습은 누가 봐도 단란한 가족 같았다.

하유는 사진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가슴이 더 깊게 베이는 것 같았다.

혜원이 일부러 자신에게 보여주려고 올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혜원은 하유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여동생이었다.

하유의 친부모는 혜원의 양부모인 임정한 부부였다.

어린 시절 실종됐던 하유는 심명권 부부의 손에서 자랐고, 대학에 들어간 뒤에야 친부모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떨어져 지낸 탓인지, 임정한 부부는 친딸인 하유보다 어려서부터 키운 수양딸인 혜원에게 더 깊은 정을 주고 있었다.

하유가 친부모 집으로 처음 돌아간 날, 혜원은 분명히 말했다.

하유가 자기 것을 하나도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오히려 하유의 것까지 전부 가져가겠다고.

그래서 이런 식으로 SNS를 이용한 도발은 이미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 자체는 하유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가슴을 아프게 한 건 남편과 딸이었다.

지연이 한 손으로 승호를, 다른 한 손으로 혜원을 잡고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는 사진을 바라보자, 가슴 한가운데가 통째로 뜯겨 나가는 듯했다.

하유는 핸드폰을 껐다. 택시를 불러서 집으로 돌아갔다.

차가 집 앞에 멈췄다.

하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사도우미가 하유를 보자 깜짝 놀랐다.

“사모님,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으세요? 어디 편찮으세요? 의사 불러 드릴까요?”

하유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짧게 대답한 뒤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안방으로 들어가서 옷장을 열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 집에서 6년을 살았지만 하유의 물건은 많지 않았다.

평소 출근할 때 드는 가방 하나도 다 채우지 못했다.

하유는 씁쓸하게 웃으며 지퍼를 잠갔다. 가방을 메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현관에서 신발까지 갈아 신었을 때 대문이 열렸다.

승호와 지연, 혜원이 함께 들어왔다.

승호는 하유를 보자 눈길을 잠깐 멈췄다가 곧 평소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 좀 정리해 둬. 오늘 혜원이 여기서 잘 거야.”

하유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지연이 말했다.

“맞아, 엄마. 이모는 아프잖아. 엄마 큰 방 이모한테 주면 안 돼?”

하유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딸을 바라봤다.

“지연아,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거기는 안방이야. 이 집 주인이 쓰는 방을 이모한테 내주라는 거야?”

“나는...”

지연은 말문이 막혔다. 작은 볼이 붉어지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혜원이 급히 앞으로 나오면서 두 팔을 벌려 지연을 뒤로 감쌌다. 곧바로 눈시울을 붉힌 채 말했다.

“언니, 애한테 화내지 마. 다 내가 몸이 안 좋아서 그래. 내가 오지 말았어야 했어... 언니가 나 싫어하는 것도 알아.”

“그래도 지연이는 그냥 내가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애가 뭘 잘못했겠어... 내가 갈게. 그러니까 지연이한테 화내지 마...”

말을 마친 혜원은 눈가를 훔치며 돌아섰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서 몸이 휘청거렸고, 급히 의자를 짚으면서 버티는 모습은 한없이 연약해 보였다.

지연이 다급히 달려가 혜원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이모 가지 마! 나랑 있어 주다가 아픈 거잖아. 우리 집에서 자. 가지 마!”

승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하유를 바라봤다.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방 하나 가지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

하유는 눈앞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차갑게 식어 갔다.

혜원은 혈색도 좋고 입술에도 생기가 돌았다. 조금만 자세히 봐도 아픈 척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반대로 하유는 안색이 창백했고 손에는 아직 붕대까지 감겨 있었다.

가사도우미도 한눈에 몸이 안 좋다는 걸 알아봤는데 이 부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지연은 다시 발을 구르며 눈물을 글썽였다.

“엄마 나빠! 엄마는 쪼잔해! 나 엄마 싫어!”

곧 혜원을 부축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 내가 위에 데려다줄게. 엄마 신경 쓰지 마.”

하유의 마음은 더 내려갈 곳도 없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게 바로 자신이 손수 키운 딸이었다.

승호는 늘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하유 곁을 지나 소파에 앉았다. 느긋한 걸음과 차가운 분위기에는 거리감만 가득했다.

하유는 거의 얼음처럼 차가운 승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낮게 웃었다.

“그래. 다들 그렇게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승호는 눈도 들지 않은 채 미간만 살짝 찌푸렸다.

“또 뭘 하려고?”

하유는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 6년 동안 너무 많이 설명했다.

승호는 매번 믿지 않았다.

하유는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꺼냈다. 안에는 이혼합의서가 들어 있었다.

승호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서명해.”

승호가 서류봉투를 내려다봤지만, 손을 뻗기도 전에 위층에서 지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졌다.

“아빠! 아빠 빨리 와! 이모가 이상해!”

승호는 바로 몸을 일으켜 위층으로 향했다. 서류봉투는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유는 허공에 내민 손을 천천히 내렸다.

위층에서는 곧 웃음 섞인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유만 아래층에 홀로 서 있었다.

아무 관계도 없는 남처럼.

하유는 서류봉투를 거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다 채우지도 못한 가방을 메고 문을 열어 집을 나왔다.

한참을 걷다가 택시를 잡아서 강림시 동쪽의 오래된 아파트단지로 향했다.

...

결혼 전, 하유가 자신의 작품으로 받은 상금을 모아서 사 둔 작은 집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가방을 내려놓은 뒤 소파에 앉자 여러 감정이 스쳤다.

예전에 하유는 이 집을 팔 뻔했다. 그 돈으로 파리에 가서 세계적인 주얼리 공방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다 승호를 만났다. 어쩌다 뒤엉킨 하룻밤을 보낸 뒤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하유는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공방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큰 집 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좋은 엄마가 되는 법부터 배웠다.

그래도 주얼리 디자인을 향한 마음까지 버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난 몇 년 동안 몰래 외주 작업을 해 왔다.

이름을 숨긴 채 직접 그린 주얼리 디자인을 한 장씩 팔았다.

일을 가리지 않았고 단가가 낮아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돈을 모았다.

지금 하유의 계좌에는 대략 20억 원 정도 모여 있었다.

막대한 돈은 아니었지만 다시 시작하기에는 충분했다.

더 우스운 건, 최근 승호 회사의 주얼리 사업이 몇 번이나 위기에서 살아난 데에는 하유가 익명으로 보낸 기획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지연을 재운 뒤 밤을 새워 그렸던 디자인들이 회사의 공급망을 지켜냈고, 시즌 출시도 간신히 살려냈다.

승호는 아무것도 몰랐고, 알려고 한 적도 없었다.

하유는 노트북을 켜서 익명의 메일 계정에 로그인했다.

곧이어 SW그룹 담당자의 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창밖은 이미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하유는 노트북을 닫고 창가에 섰다. 6년을 살아온 도시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제부터는 나를 위해 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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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내 내 차례가 왔다   제30화

    임정한은 입을 열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문혜령도 침묵했다. 입술만 가볍게 떨렸다.혜원도 무슨 문서인지 궁금해서 가까이 오려고 했다. 하지만 임정한이 바로 서류를 접어 치우면서 내용을 보여주지 않았다.혜원은 물어보려다가 분노한 임정한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그래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하유가 임정한을 제대로 화나게 만들었다.‘진짜 미쳤나 봐. 어떻게 부모한테 저럴 수 있어.’하지만 혜원의 속마음은 달랐다.‘그래. 더 미쳐 봐. 그래야 좋지.’임정한의 목소리가 잠겼다.“그래서 대체 뭘 원하는 거야?”하유가 임정한을 바라봤다.“원하는 거 없어요. 제 양아버지한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면, 이 자료도 밖으로 나가지 않을 거예요.”“너...”임정한은 손가락으로 하유를 가리켰다. 손이 심하게 떨리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지만, 한참 동안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문혜령도 화가 나 온몸을 떨었다. 입술을 떨며 날카롭게 말했다.“하유야, 너... 너 정말 부모도 모르는 애구나!”하유는 입술을 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 곧바로 돌아서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뒤에서는 임정한이 찻잔을 내던지는 소리와 문혜령의 울음 섞인 날카로운 욕설 소리가 들렸다. 하유는 옷깃을 여미고 계속 걸었다.임정한이 양아버지 문제로 하유를 협박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친가에 처음 돌아온 뒤부터, 임씨 가족은 갖가지 말로 하유를 가스라이팅하면서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려고 했다. 하유가 말을 듣지 않으면 늘 양부모를 건드렸다. 하유도 결국 언젠가는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임정한의 노트북 시스템에 몰래 접속해 계정 기록과 내부 자료를 확인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불법·규정 위반 증거를 찾아 따로 보관해 뒀다.예전에는 그래도 친부모라는 생각 때문에 그 증거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이제는 너무 지쳤다.툭하면 임씨 가족의 협박을 받고, 아무 조건 없이 혜원에게 모든 걸 양보하라는 요구도 더는 견디고 싶지 않았다.하유

  • 끝내 내 차례가 왔다   제29화

    문혜령이 말을 이어 갔다.“혜원이 드레스를 네가 가져갔다며? 혜원이 공모전에서 입으려고 한 옷인데 왜 굳이 동생이랑 싸워? 네 옷장에 옷도 많잖아.”하유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그 드레스는 제 거예요. 혜원이가 제 걸 가져가려고 한 거고요.”혜원의 눈가가 바로 붉어졌다.“언니 말이 맞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오랫동안 언니 자리에서 살았으니까 언니가 날 싫어하는 것도 당연해...”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문혜령은 마음이 아픈 듯 혜원을 품에 안고 하유를 노려봤다.“혜원이 뭘 잘못했는데? 그동안 이 아이가 우리 곁에 있어 줬으니까 우리가 버틴 거야!”하유는 가만히 선 채 손가락을 하나씩 움켜쥐었다.수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들을 때마다 가슴은 여전히 아팠다.하유가 문혜령을 바라봤다.“그래서 저는 언제나 다 양보해야 해요? 예전에는 아버지랑 엄마를 양보했고, 지금은 제 딸까지 그랬어요.” “맛있는 것, 좋은 물건, 집에서 저한테 준 차도 혜원이 한마디 하면 다 가져갔잖아요. 아직도 부족해요?”“그게 무슨 말버릇이야?”임정한이 식탁을 세게 쳤다.“네가 언니니까 동생한테 양보하는 게 당연하지. 드레스 한 벌 가지고 왜 이렇게 속이 좁아?”하유는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아버지인 남자를 바라봤다. 마음에 남아 있던 마지막 온기마저 식어 갔다.“그 드레스는 저한테도 중요해요.”하유는 한마디씩 분명하게 말했다.“저도 참가할 공모전이 있어요. 그 옷은 양보하지 않을 거예요.”“너...”임정한이 화가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유야, 이제 정말 제멋대로 하겠다는 거냐?”문혜령도 표정을 굳혔다.“너 예전에는 안 이랬잖아. 왜 이렇게 철이 없어졌니?”하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이 집에서는 하유가 틀린 사람이 될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임정한은 하유가 말없이 서 있는 모습에 더 화가 났다.“이렇게 말도 안 들을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널 찾지 말 걸 그랬다! 네 양아버지가 대체 너를 어떻게 키운 거야?”

  • 끝내 내 차례가 왔다   제28화

    하지만 하유는 정말 예전 같은 삶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승호도, 지연도 더는 붙잡지 않기로 했다.승호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물었다.“네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아?”“알아. 아이는 당신이 맡아. 잘 키워.”하유는 망설이지 않았다.승호의 목소리가 더 차가워졌다.“심하유, 나한테는 밀당 안 통해.”하유는 작게 웃었다.‘이 사람은 정말 자기 중심적이네.’하유가 말했다.“그런 거 아니야. 재산 조건 다시 정리하고 아이 양육권은 당신이 갖는 걸로 작성해. 다 만들면 나한테 보내.”말을 마친 하유는 택시 문을 열고 올라탔다.승호는 멀어지는 차를 계속 바라봤다. 눈빛이 싸늘하게 굳었지만 표정은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하유는 뒷좌석에 앉은 채 반쯤 열린 창문 밖을 바라봤다. 가로등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차례로 되풀이됐다.숨을 깊게 쉬었지만 가슴은 답답했다.그때 핸드폰이 울렸다.하유가 화면을 내려다봤다.임정한.이름 세 글자를 잠시 바라보다 받지 않았다.친가에 돌아간 뒤부터 그 집에 갈 때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갈 때마다 누군가의 편을 가르는 싸움이 벌어졌다.혜원은 언제나 모든 사람이 하유를 나쁜 사람으로 보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냈고, 친부모는 늘 혜원 편이었다.전화가 끊겼다가 다시 울렸다.하유는 숨을 고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하유야, 어디니? 오늘 저녁 집에 와서 밥 먹자.]친모 문혜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투는 다소 무심했다.“엄마, 요 며칠 일이 좀 있어요. 다음에 갈게요.”하유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 너머로 친부 임정한의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집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어? 밥 한 끼 먹을 시간도 없다는 거야?]하유는 숨을 고르면서 말했다.“정말 시간이 없어서...”[네 양아버지 직장 말이야. 내가 거기 윗사람하고 좀 친하거든.]임정한이 하유의 말을 끊었다. 느긋한 말투였다.[요즘 내부 승진 심사를 한다던데. 네 양아버지도 이제

  • 끝내 내 차례가 왔다   제27화

    지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참 생각하더니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엄마 둘 다 있으면 안 돼? 혜원 엄마는 나랑 놀아 주고, 엄마는 맛있는 거 해주면 되잖아. 그게 왜 안 돼?”하유의 가슴이 깊게 베이는 듯 아팠다.아이답고 솔직한 말이었지만 그 말은 오히려 하유의 마음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열 달 동안 품어 낳은 딸을 바라보며 하유는 살짝 웃었다.“사람이 원하는 걸 전부 가질 수는 없어. 엄마도 하나뿐이야. 너도 하나만 골라야 해.”지연은 멍하니 서 있었다. 눈가가 천천히 붉어졌다.하유의 눈을 바라봤지만 무서울 만큼 차분했다. 예전처럼 자신만 바라보는 온기가 보이지 않자 지연은 겁이 났다.입을 열고 ‘엄마를 고를래’라고 하려 했다.하지만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혜원은 사탕을 사 줬다. 밤늦게까지 애니메이션도 같이 봐 줬고 맛있는 곳에도 데려갔다. 그리고 지연에게 잔소리하지도 않았다.반면 하유는... 사탕도 못 먹게 하고, 애니메이션 보는 시간도 정해 놓고, 이것저것 하지 말라는 게 너무 많았다.‘엄마는 너무 귀찮게 해.’지연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하유는 잠시 기다리다가 몸을 돌렸다.“알았어.”더는 딸을 보지 않고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갔다.지연은 제자리에 서서 점점 멀어지는 엄마의 등을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표정이 일그러졌다. 엄마를 부르고 싶었지만 목이 막힌 듯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손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엄마는 다시 오겠지?’예전에는 지연이 아무리 떼를 써도 엄마가 늘 돌아왔다.‘이번에도 분명 돌아올 거야.’지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코를 훌쩍였다. 몸을 돌려 할머니 방으로 뛰어갔다....하유가 막 택시를 잡았을 때 뒤에서 승호가 따라왔다.“심하유, 아직 서명 안 했어.”평소와 다름없이 차가운 목소리였다.하유의 마음도 차갑게 굳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두 사람 중 딸은 다른 여자를 엄마로 삼고 싶어 했고, 남편은 첫사랑을 위해 자신과 이혼하려고 했다.‘됐어. 나

  • 끝내 내 차례가 왔다   제26화

    하유는 잠깐 망설였지만 곧 다가가서 침대 옆에 앉았다.채화경은 안쓰러운 눈으로 하유를 바라봤다.“많이 힘들었지?”하유가 고개를 저었다.“할머니, 저 괜찮아요.”“뭐가 괜찮아.”채화경은 손을 뻗어 하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네가 우리 집에 들어온 지 6년이야. 이 늙은이가 다 봤어. 넌 좋은 아이야. 잘못한 건 우리 우씨 집안이야.”하유의 눈가가 따끔해졌다. 눈을 내리깔고 감정을 눌렀다.“그 못난 녀석.”채화경은 승호 이야기를 꺼내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내 손자니까 성격을 내가 잘 알지. 본성은 나쁜 놈이 아닌데 사람 보는 눈이 없어. 누가 진심으로 잘해 주는지는 못 보고, 문제 일으키는 사람을 또 그렇게 감싸.”하유는 입술을 다물었다.채화경은 한숨을 쉬고 하유의 손을 잡아 토닥였다.“네가 이혼하고 싶다면 할머니는 네 편이야.”하유가 고개를 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채화경은 진지한 눈으로 하유를 바라봤다.“승호는 네 인생을 다 걸 만큼 좋은 남자가 아니야. 우씨 집안을 떠난 뒤에는 네 삶을 살아. 할머니는 네가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하유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6년 동안 시어머니에게 모욕을 당하고, 시누이에게 무시당했다. 남편에게 외면받고, 딸에게까지 싫다는 말을 들어도 절대 울지 않았다.그런데 채화경의 몇 마디에 6년 동안 마음 안에 쌓아 둔 벽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할머니, 감사합니다.”채화경이 하유의 손등을 두드렸다.“고맙기는. 내가 너한테 고마워해야지. 내 목숨을 네가 살렸잖니.”하유가 고개를 저었다.“당연히 할 일이었어요.”“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채화경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넌 내 목숨을 살려줬는데 나는 널 제대로 지켜 주지 못했어. 할머니가 미안하다.”하유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손으로 얼굴을 닦고 숨을 고른 뒤 일어났다.“할머니, 푹 쉬세요. 저는 먼저 갈게요.”채화경은 고개를

  • 끝내 내 차례가 왔다   제25화

    하유는 입술을 다물었다.“할머니, 이 일은...”“알아.”채화경이 하유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을 끊었다.“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채화경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몸을 바로 세웠다.“김 집사.”오래 일한 김숙이 밖에서 들어왔다.“장미란 급여 정산해 주고 오늘 안으로 내보내.”무릎 꿇고 있던 장미란이 급히 머리를 숙였다.“회장님,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발 내쫓지 말아 주세요.”채화경은 손을 들고 그만하라는 뜻을 보였다.김숙은 장미란을 일으켜 거의 끌다시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울음소리는 점점 멀어졌다.채화경의 시선이 다시 엄정숙에게 향했다.“승호 에미야.”엄정숙의 얼굴이 하얘졌다. 억지로 웃었다.“어머님, 지금은 쉬세요. 말씀하지 마시고...”“내일부터.”채화경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말 하나하나에 힘이 있었다.“회사에 이름만 걸어 두고 있는 자리, 전부 정리해.”엄정숙의 웃음이 굳었다.“어머님! 저도 회사에서 10년 넘게 일했어요. 공이 없더라도 고생한 건 있잖아요.”“무슨 고생을 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 내가 자료까지 꺼내 보여줘야 하니?”채화경이 감정 없는 눈으로 바라보자 엄정숙은 더 말하지 못했다.“세진아.”세진이 몸을 움찔했다.“할머니...”“지금부터 내년 오늘까지 용돈은 전부 끊는다.”세진의 눈이 커졌다. 입을 벌리고 항의하려다가 채화경의 표정을 보고 억지로 삼켰다.“하나 더.”채화경은 더 엄한 눈으로 세진을 봤다.“네 새언니한테 사과해.”세진의 표정이 굳어졌다.“지금. 바로.”거절할 수 없는 어조였다.세진의 얼굴은 붉어졌다가 하얘졌다. 억울해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그래도 채화경의 차가운 시선 앞에서는 더 버티지 못했다.한참 뒤에야 하유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미... 안... 해.”목소리는 작고 딱딱했다.사과라기보다는 억지로 굴욕을 참는 태도에 가까웠다.말을 마치자 하유를 매섭게 노려봤다.하유는 눈도 들지 않았다.처음부터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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