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VVIP 전용 상담실의 공기는 유리알처럼 차갑고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선형 통유리창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강남 도심의 붉은 노을빛이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묵직한 호두나무 테이블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차도진은 서연이 권한 맞은편 가죽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으나, 시선은 테이블 위에 놓인 태블릿 화면이나 포트폴리오가 아닌 오직 서연의 얼굴에만 박혀 있었다.
5년이라는 잔혹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기묘하고도 숨 막히는 재회였다.
도진의 기억 속에 박혀 있던 한서연은 늘 가문의 서슬 퍼런 압박 앞에서 조용히 숨죽이던 여자였고, 차가운 저택 안에서 홀로 눈물을 삼키던 유약한 아내였다.
그러나 지금 마주 앉은 한서연은 몸에 완벽히 피트되는 베이지색 실크 수트를 단정하게 차려입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는 당당한 눈빛으로 태강그룹 회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동안 어디서 무얼 하고 살았던 겁니까.”
도진의 목소리가 억눌린 채 낮게 긁히듯 흘러나왔다.
서연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태블릿 화면을 매끄럽게 터치해 루미에르의 3D 공간 조감도와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를 띄웠다.
“차 회장님, 루미에르의 VVIP 공식 상담 세션은 1회당 50분으로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인 신변잡기를 나누기에는 뒤이어 대기 중인 다른 고객들의 일정이 너무 촉박하네요.”
“한서연.”
“대표 한서연입니다. 상담 중에는 상호 간의 공식적인 비즈니스 예절을 지켜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서연의 음성은 지극히 정중하고 부드웠으나, 그 안에 담긴 단호함은 칼날보다 날카로웠다. 도진의 턱 근육이 굳어지며 짙은 눈매가 서늘하게 좁혀졌다.
자신을 태강그룹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아닌, 그저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고객 중 한 명으로 취급하는 그 태도가 도진의 오만한 자존심을 맹렬하게 긁어댔다.
“태강과 신우의 예식은 올해 하반기 대한민국 재계 최대의 이벤트입니다. 사적인 감정이나 유치한 반발심으로 장난칠 자리가 아니라는 건 당신도 잘 알 텐데.”
“사적인 감정으로 일에 임했다면, 애초에 차 회장님의 의뢰 자체를 수락하지 않았을 겁니다.”
서연은 담담한 손길로 최고급 수입 패브릭 샘플 북과 공간 기획 서류철을 넘기며 명료하게 말을 이어갔다.
“루미에르는 오직 결과물의 완벽함과 완성도로만 가치를 증명합니다. 태강그룹의 브랜드 가치와 신우그룹의 위상에 걸맞은 하이엔드 프라이빗 콘셉트, 프랑스 오트 쿠튀르 아틀리에와의 독점 협업, 그리고 철저한 비공개 보안 프로토콜을 이미 완벽하게 구축해 두었습니다.”
도진은 서연이 내민 기획서 요약본을 내려다보았다.
공간 연출부터 동선 분리, 미디어 통제 가이드라인, 심지어 신부 측 하객과 신랑 측 하객의 좌석 배치에 이르기까지 한 치의 결함도 없는 완벽한 설계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이 결혼식을 성공시키려 하고 있었다. 자신을 버린 남자의 재혼식을, 자신의 손으로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흠결 없이 완성하기 위해서.
도진의 심장 언저리에서 형용할 수 없는 이질적인 통증이 묵직하게 번져 나갔다.
차라리 원망을 쏟아내거나 뺨이라도 때렸다면 견디기 쉬웠을 터였다. 하지만 서연의 눈빛 속에는 어떠한 증오도, 분노도, 일말의 미련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계약 진행에 앞서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서연이 만년필을 쥔 손을 테이블 위에 단정히 얹으며 도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드레스 피팅, 베뉴 선정, 주얼리 셀렉션 등 모든 과정에 신랑과 신부의 성실한 협조가 필수적입니다. 사전 조율 없이 일정이 일방적으로 취소되거나 어그러질 경우 루미에르는 계약을 즉시 파기할 수 있으며, 지급된 계약금은 전액 위약금으로 귀속됩니다.”
“……좋아. 전부 수락하지.”
도진은 서연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계약서 하단 서명란에 만년필로 거침없이 서명했다. 서명을 마친 그가 펜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고 서늘하게 물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까? 내 결혼식을 당신 손으로 직접 치르는 게.”
서연은 서명된 서류를 깔끔하게 정리해 결재판에 넣으며, 한 치의 흠도 없는 매끄러운 미소를 띠었다.
“수십억 원 대의 프로젝트를 믿고 맡겨주신 VVIP 고객님께 그저 깊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음 주 화요일, 윤세아 이사님과의 첫 콘셉트 미팅에서 뵙겠습니다.”
완벽한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빈틈없는 작별 인사. 도진이 굳은 표정으로 상담실 문을 열고 나간 뒤, 서연은 홀로 남아 조용히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주머니 속, 아들 시우의 유치원 가방 키링을 부서져라 꽉 쥐고 있었다.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되었다. 이 결혼식은 서연에게 있어 과거의 사슬을 영원히 끊어내고 완벽한 승리를 쟁취할 무대였으니까.
차성혁의 첫 공판은 두 달 뒤로 잡혔다.판결까지는 더 오래 걸릴 예정이었다.서연은 달력을 보고 그 날짜에 별도 표시를 하지 않았다. 출석이 필요하면 변호사가 알려줄 것이고, 그때 일정을 조정하면 됐다.삶을 판결문이 나올 때까지 멈춰둘 생각은 없었다.월요일 오전, 박소현이 다시 루미에르를 찾았다.한 달 전 결혼을 진행할지 결정하지 못해 계약하지 않았던 고객이었다.이번에는 남자친구가 함께 오지 않았다.“결혼 안 하기로 했어요.”소현은 웃으려다 눈시울을 붉혔다.“축하받으러 오던 곳에 이런 말 하러 와도 되나 고민했어요.”서연은 티슈를 내밀었다.“결정을 확인하러 오신 거라면 괜찮습니다.”서연은 소현이 헤어진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폭력이나 강요가 있었는지 안전에 필요한 질문만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소현은 위험 때문이 아니라, 결혼 뒤 자녀와 경력에 관한 생각이 끝내 맞지 않았다고 했다.“누가 틀린 건 아닌데 계속 미루기만 했어요.”“그럼 취소 연락도 두 분이 합의한 상태인가요?”“네. 그런데 부모님들이 다시 만나보라고 하세요.”서연은 상담기록에 ‘관계 조정’이 아니라 ‘가예약 취소 지원’이라고 적었다. 플래너가 두 사람을 다시 붙이는 역할까지 맡아서는 안 됐다.“제가 겁쟁이 같아요. 식장까지 알아보고 부모님께도 말씀드렸는데.”“준비한 시간이 아깝다고 결혼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대표님은 안 아까우세요? 상담도 두 번이나 해주셨잖아요.”“상담비는 받았습니다.”소현이 울다가 웃었다.서연은 이미 예약해둔 촬영 스튜디오와 드레스 숍의 취소 기한을 확인했다. 계약 전 상담 단계에서 잡아둔 가예약이라 손실은 크지 않았다.스튜디오는 예약금을 전액 돌
태강그룹 임시 주주총회는 예상보다 조용하게 끝났다.가족 승계 문구 삭제.문화재단 독립 이사회 구성.외부 감사위원 선임.내부고발자 보호규정 강화.도진이 요구한 개편안은 일부 수정됐지만 핵심은 통과됐다.주주총회는 도진의 복귀를 한꺼번에 승인하지 않았다. 먼저 정관 개정과 외부 이사 선임을 의결하고, 새 인사위원회가 후보 면접을 진행했다. 도진은 다른 두 후보와 같은 질문을 받았다.5년 전 내부통제가 가족 지시에 무너졌을 때 무엇을 했는지.본인이 다시 같은 위험이 되었을 때 누가 막을 수 있는지.도진은 ‘제가 달라졌다’고 답하지 않았다. 대표의 지시도 기록과 감사를 거치게 하고, 친족 관련 결재에서는 대표가 빠지는 규정으로 막아야 한다고 설명했다.면접 결과와 반대 의견까지 주주들에게 공개된 뒤에야 1년 임기가 확정됐다.그는 1년 한시 임기의 대표이사로 복귀했다.‘황제의 귀환’ 같은 기사 제목이 붙었지만, 실제 첫 출근은 회의 세 건과 사과 한 번으로 끝났다.도진은 과거 자신이 묵인했던 비서실 정보수집 관행에 대해 임직원에게 공식 사과했다. 오너 가족 관련 업무를 별도 보안 명목으로 처리하던 팀은 해체했다.강태욱이 새 출입카드를 건넸다.“다시 오신 기분이 어떻습니까?”도진은 명패가 놓인 자리를 봤다.“예전 자리 같지 않군.”“집무실은 그대로인데요.”“제가 달라져야 한다는 뜻이겠지.”첫 결재는 시우와 관련이 없었다.두 번째도 서연과 관련이 없었다.도진은 회사 복귀를 가족에게 보여줄 증거로 만들지 않았다.대표실 책상 위에 가족사진도 올리지 않았다.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우 사진을 회사 방문객에게 공개할지 아직 아이와 서연에게 묻지 않았기
차성혁의 구속기소는 한 달 뒤 이뤄졌다.그 한 달 사이 임시주주총회는 예정대로 열렸다. 수사가 끝나기 전이어서 일부 주주들은 도진의 책임도 함께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도진은 자신의 이사 해임안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표결 끝에 그는 이사직에서 해임됐다.도진은 결과에 불복하지 않았다. 차성혁의 범죄가 드러났다는 사실이 자신이 과거에 내린 잘못된 판단까지 없애지는 않았다. 향후 복귀 여부는 새 후보와 같은 심사를 거쳐 다시 결정받겠다고 밝혔다.적용된 혐의는 사문서위조, 명의도용, 업무방해,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배임과 횡령 등이었다.배정은과 최정환, 서민석도 각자 관여한 범위에 따라 기소됐다. 서민석은 자진출석과 원본 확보 협조가 양형에 반영될 수 있었지만 책임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이경자는 허위 인터뷰 대가로 받은 돈을 인정했다.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사과 영상을 찍겠다고 제안했다.서연은 거절했다.“정정보도에 필요한 서면 진술만 받겠습니다.”또 다른 눈물 영상이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법원은 우선 언론사 열두 곳에 정정보도와 기사 삭제를 명령했다.형사재판이 끝나기 전이었지만, 허위 계좌자료와 원본 사진이 확인된 부분에 대해서는 민사 조정과 임시 처분이 먼저 이뤄졌다. 일부 언론사는 항고 대신 정정에 합의했고, 끝까지 다툰 곳은 본안 소송을 이어가기로 했다.서연은 모든 기사를 인터넷에서 완전히 없애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복제본까지 지울 수 없었고, 사건 보도 자체도 남아야 했다. 검색 결과 첫 화면에 정정문이 함께 표시되고, 시우 얼굴이 들어간 사진과 허위 전표 이미지를 내리도록 범위를 정했다.정정문에는 모호한 표현을 쓰지 못하게 했다.‘한서연이 50억 원을 받고 이혼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해당 계좌는 본인 동의 없이 개설됐고, 한서연은 자금을 수령하거나 사용하지 않았다.’‘차도진의 정략결혼 파기와 한서연의 업무 수행 사이에 공모 정황이 없다.’서연은 문장을 직접 확인했다.‘오
차명희의 편지는 변호사 봉투로 왔다.이번에는 서연에게 전달해달라는 요구가 없었다.‘수사자료로 제출하지 않는 개인 서신이며, 수령 여부와 답변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겉봉에 적혀 있었다.서연은 사흘 동안 열지 않았다.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회의를 했고, 시우 학예회에 갔고, 윤세아 자선행사 견적을 마무리했다.넷째 날 밤, 집이 조용해진 뒤 봉투를 꺼냈다.편지는 한 장이었다.‘한서연 씨.나는 당신이 돈을 받고 떠났다고 믿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임신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도진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막았고, 사진이 거짓이라는 걸 알고도 사용했습니다.태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쓰지 않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며느리가 아니었고, 아들이 내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 당신을 없애려 했습니다.당신과 시우에게 용서를 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나게 해달라고도 하지 않겠습니다. 수사와 배상 절차에 필요한 일을 하겠습니다.미안합니다.’서연은 마지막 줄을 오래 봤다.‘하지만’이 없었다.‘그래도’도 없었다.그렇다고 상처가 줄지는 않았다.편지를 찢지 않고 다시 접어 서랍에 넣었다.답장을 쓰지 않는 결정도 하나의 답이었다. 서연은 편지를 증거철이나 시우 서류와 섞지 않고 개인 보관함에 넣었다. 언젠가 다시 읽을 수도, 그대로 폐기할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명희에게 알려줄 의무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시우가 그 서랍을 열려고 하자 서연은 손을 막았다.“엄마 편지야. 시우가 보면 안 되는 거야?”“응. 엄마가 보여주기로 할 때까진.”“비밀?”“나쁜 비밀은 아니고, 엄마 개인적인 것.”아이에게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모든 내용을 볼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쉬운 문장으로 알려줬다.다음 날 도진과 양육 일정 회의가 있었다.서연은 편지를 받았다는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도진도 묻지 않았다.11월 유치원 일정과 시우 건강검진, 겨울방학 면접교섭 시간을 정한 뒤 서연이 말했다.“차명희
차명희는 참고인이 아니라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됐다.허위사실 유포와 개인정보 불법 취득, 문서 위조 방조 혐의였다.그녀는 출석 전 도진에게 전화했다.“같이 가주면 안 되겠니?”도진은 한참 말이 없었다.“변호사가 동행할 겁니다.”“아들로서 묻는 거야.”“제가 옆에 있으면 어머니가 저를 위해 말하게 될 수 있습니다.”“무슨 뜻이니?”“사실이 아니라, 제가 듣고 싶어 할 말을 고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명희의 숨이 거칠어졌다.“너까지 나를 못 믿니?”“어머니가 서연 씨를 믿지 않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돌려드리는 게 아닙니다.”도진은 조용히 말했다.“진술은 혼자 책임지셔야 합니다.”명희는 전화를 끊지 못했다.“도진아. 나도 무섭다.”“그럴 겁니다.”“그 말뿐이니?”도진은 눈을 감았다.어머니가 자신의 두려움을 이유로 다른 사람을 밀어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두려움 자체를 조롱하고 싶지는 않았다.“사실대로 말씀하세요.”“그러면 네 작은아버지만이 아니라 나도 처벌받을 거야.”“네.”“그래도?”“그래도요.”명희는 결국 혼자 출석했다.정확히는 변호사와 함께였지만, 가족은 아무도 동행하지 않았다. 현관 앞에 모인 기자들은 도진이 어머니를 버렸느냐고 물었다. 명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들이 오지 않은 이유를 자신이 설명할 일이 아니었다.조사실에 들어가기 전 변호사는 불리한 질문에는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다시 알렸다. 명희는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기억이 불확실한 부분은 자료를 본 뒤 답하고, 자신의 범행에 해당하는 질문에도 변호사 조력을 받으며 진술하기로 했다. 처벌받겠다는 마음과 절차를 무시하는 것은 달랐다.진술은 오전부터 밤까지 이어졌다.그녀는 서연의 사생활을 조사하라고 배정은에게 지시한 사실을 인정했다.사진 원본에 여러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도 잘라 사용한 사실도 인정했다.도진에게 임신 가능성을 알리지 않았고, 서연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게 비서실에 지시했다고 말했다.다원컨설팅 5
윤세아는 검찰 출석 전날 서연에게 연락했다.“증언할 내용 중 당신 이름이 나옵니다.”“수사기관에서 연락받았어요.”“그래도 내가 먼저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두 사람은 신우그룹이 아닌 작은 갤러리 카페에서 만났다. 세아가 직접 운영을 맡은 신진작가 전시 공간이었다.“아버지가 결혼을 다시 추진하려고 합니다.”세아가 차를 따르며 말했다.“차도진 씨 말고 다른 집안과요.”“하실 겁니까?”“안 해요.”대답이 빨랐다.“예전에는 정략결혼도 경영 판단이라고 생각했어요. 상대가 나를 존중하고 조건이 공평하면 가능하다고.”“지금은요?”“조건이 공평한지 정하는 테이블에 내가 앉아 있지 않았다는 걸 알았죠.”세아는 아버지와 나눈 최근 대화도 들려줬다. 새 혼담 상대의 이름보다 먼저 양가 지분 교환표가 놓였고, 세아가 거절하자 ‘이번에는 네가 파혼 원인을 만들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그래서 이사회에 안건을 냈어요. 오너 가족의 혼인과 회사 투자계약을 연계하지 못하게 하는 내부규정.”“통과될까요?”“처음에는 안 되겠죠.”세아는 담담했다.“그래도 회의록에는 남습니다. 다음 사람이 같은 말을 할 때 처음이 아니게요.”세아는 유리창 너머 전시장을 봤다.“차도진 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알고 있었어요. 나도 사랑하지 않았고.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요?”“사랑이 없어도 동의는 있어야 하더군요.”세아는 자신의 증언서 사본을 내밀었다.양가가 결혼 날짜를 확정한 과정.모멘텀PR이 파혼 이후 여론 시나리오를 미리 준비한 사실.차성혁이 시우를 공개해 도진을 경영권 협상으로 끌어들이려 했다는 발언.그리고 신우그룹 측도 그 계획 일부를 알고 있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신우 측 참석자 이름에는 세아의 아버지와 법무담당 임원도 포함됐다. 그들은 시우 사진을 직접 공개하자는 데는 반대했지만, 서연을 ‘과거 관계인’으로 축소하는 공동성명에는 동의했다.“저도 그 자리에서 바로 나가지 않았습니다.”세아는 회의록에 자신의 침묵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