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결혼식을 사흘 앞두고 기상특보가 바뀌었다.
예상 강수량은 두 배로 늘었고, 오후부터 순간풍속 20미터가 넘을 수 있다는 알림이 떴다.
청림방직 문화관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같은 화면을 보고도 다른 말을 했다.
김유라의 아버지는 호텔로 옮기라고 했다.
시설팀은 임시 방수막이 버틸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박재하는 구조상 위험하지 않다고 설명했지만, ‘위험하지 않다’와 ‘비가 새지 않는다’는 다른 말이었다.
서연은 화이트보드에 선택지를 세 개 적었다.
1. 예정대로 진행하되 본식 시간을 오전으로 당긴다.
2. 같은 장소에서 실내 동선만 사용한다.
3. 호텔로 전면 이동한다.
각 선택지 아래에 비용, 하객 안내, 안전성, 디자인 손실을 나눠 썼다.
서연은 마지막 결정 시한도 적었다. 오늘 밤 아홉 시 기상
법원에서 온 우편은 월요일 오전에 도착했다.[친권자 및 양육자 변경 사전조정 신청 안내]신청인 이름은 차도진이었다.서연은 첫 장을 읽은 뒤 바로 도진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서경민에게 원본을 넘기고 사건번호부터 조회했다.“정식 접수는 맞습니다.”서경민이 말했다.“다만 신청 대리인이 이상해요. 차도진 씨가 선임한 적 없는 태강그룹 법무법인입니다.”신청서에는 서연이 잦은 해외 출장과 야간 근무로 아이를 방치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최근 기자들이 유치원 앞에 몰린 것도 ‘현 양육 환경의 불안정성’으로 쓰였다.도진이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으니 아이를 돌볼 시간이 충분하다는 주장도 붙었다.“본인 서명은요?”“전자위임장입니다. 그룹 인사시스템에 등록된 예전 전자서명이 사용됐어요.”서연은 헛웃음을 삼켰다.5년 전 자신의 서명을 베낀 사람들이 이번에는 도진의 이름으로 양육권을 신청했다.도진은 변호사 연락을 받고 30분 만에 왔다.서연의 사무실 문 앞에서 들어가도 되는지 묻고 기다렸다.“이 신청, 당신이 한 거 아니죠?”“아닙니다.”“증명할 수 있어요?”도진은 준비해온 자료를 내놓았다.최근 선임한 개인 법률대리인 계약서, 태강 법무법인 위임 해지 통보, 전자서명 사용중지 신청.“그룹 시스템에서 제 서명을 사용한 접속기록도 요청했습니다. 제가 하지 않았다는 진술서를 지금 작성하겠습니다.”서경민은 전자접수 내역을 다시 열었다. 위임장이 등록된 시각은 도진이 시우 상담센터에 있던 때였다. 휴
차명희가 보낸 상자는 아이 키만 했다.현관 앞에 놓인 상자를 본 시우는 눈을 크게 떴다.“내 거야?”배송기사가 서명을 요구했다. 발신인은 태강문화재단이었고, 품목에는 ‘교육용 완구 세트’라고 적혀 있었다.서연은 상자를 들이지 않았다.“반송할게요.”“엄마, 뭔데?”“시우한테 보내온 선물.”“열어보면 안 돼?”“누가 보냈는지 알고 나서 정해야 해.”서연은 발신인을 숨기지 않았다.“아빠 엄마가 보냈어.”시우는 상자보다 서연 얼굴을 먼저 봤다.“엄마 싫어하는 사람?”“응.”“나도 싫어해야 돼?”질문에 서연은 잠깐 숨을 골랐다.“아니. 시우가 아직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돼.”“그럼 선물은?”“만나지 않은 사람에게 큰 선물을 먼저 받으면, 나중에 싫다고 말하기 어려워질 수 있어.”시우는 상자 위 화려한 공룡 그림을 봤다.“공룡인데.”“그래도.”아이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떼를 쓰지는 않았다.“사진만 찍어도 돼?”서연은 배송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상자 그림만 찍어줬다. 물건은 그대로 돌아갔다.시우는 사진을 자기 앨범에 넣지 않고 한 번 본 뒤 지웠다.“나중에 할머니 만나면 공룡 좋아한다고 말해도 돼?”
시우는 새로 만든 가족 그림을 냉장고에 붙였다.엄마와 자신, 도진이 나란히 서 있었다. 종이 끝에는 작은 네모 하나가 비어 있었다.“이건 뭐야?”서연이 묻자 시우가 크레파스를 찾으며 말했다.“아직 안 그린 거.”“누구를 그릴 건데?”“몰라.”아이는 노란색과 초록색을 번갈아 집었다.“친구들은 할머니도 그리고 강아지도 그렸어.”“시우가 그리고 싶은 사람을 그리면 돼.”“아빠 엄마 그려도 돼?”서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시우가 사진으로 본 차명희를 떠올리는 것 자체를 막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가족 그림 한 칸이 만남을 허락한다는 뜻이 되게 할 수도 없었다.“그림에는 그려도 돼.”“만나는 건?”“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엄마가 아직 싫어서?”“응.”시우는 의외로 더 묻지 않았다.네모 안에 사람 대신 회색 문을 그렸다.“이건 문이야?”“응. 열지 말지 나중에 정하는 거.”서연은 크레파스를 쥔 작은 손을 봤다.아이가 어른들의 말을 자기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그날 밤 서연과 도진, 두 변호사는 제보받은 메일 백업을 함께 열었다.영상회의 화면에 5년 전 일정표가 떴다.호텔 라운지 1803호.예약자는 차성혁 비서실.참석자 메모에는 ‘문화재단 C.M.H /
화요일 저녁, 도진은 작은 도시락통을 들고 왔다.“뭐야?”시우가 현관에서 물었다.“주먹밥.”“샀어?”“만들었어.”도진은 전날 서연에게 시우가 먹지 못하는 재료와 보관 시간을 먼저 물었다. 견과류는 넣지 않았고 밥은 방문 직전에 만들었다. 실패한 첫 번째 주먹밥은 자신이 먹고 두 번째 것을 가져왔다.서연은 그 준비를 듣고도 “잘했어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이 음식을 가져오기 전 보호자에게 묻는 것은 칭찬받을 특별 행동이 아니라 기본이었다.서연은 도시락통보다 도진 손가락의 밴드를 먼저 봤다.“칼에 베였어요?”“김 자르다가요.”“김을 칼로 잘라요?”“가위가 어디 있는지 몰랐습니다.”시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가위는 서랍 두 번째.”“다음에는 기억할게.”식탁에서 뚜껑을 열자 주먹밥 여섯 개가 서로 다른 크기로 붙어 있었다. 가장 큰 것은 주먹보다 컸고, 작은 것은 포도알만 했다.시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이건 아빠 거. 큰 거.”“왜?”“아빠 손으로 했잖아.”도진은 가장 큰 주먹밥을 접시에 옮겼다. 간이 한쪽에 몰려 짰지만 아무 말 없이 먹었다.서연은 작은 것을 하나 집었다.“참기름 너무 많이 넣었네요.”“계량스푼을 잘못 봤습니다.”“그래도 먹을 만해.&rd
가족 참여 수업 날, 유치원 정문은 평소보다 조용했다.경찰과 유치원 직원이 외부 촬영을 막았고, 보호자들은 휴대전화를 투명 보관함에 넣고 입장했다.촬영 제한은 모든 가족에게 똑같이 적용됐다. 원장은 수업 시작 전, 다른 아이 사진을 개인 계정에 올리지 말고 내부 촬영본도 배포 전 확인해 달라고 안내했다. 시우 한 명을 숨기는 행사가 아니라 모든 아이의 얼굴을 지키는 수업으로 만든 것이다.도진은 휴대전화를 맡기며 회사 비상 연락도 꺼 두었다. 오늘 명찰에 적힌 역할 외에는 교실 안으로 가져오지 않았다.시우는 교실 앞에서 서연의 손을 잡고 도진을 찾았다.“아빠 늦어?”“약속 시간까지 3분 남았어.”“지하철 놓쳤나.”도진은 1분 뒤 복도 끝에서 나타났다.정장을 입지 않고 짙은 회색 니트와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명찰에는 ‘한시우 보호자 차도진’이라고 적혀 있었다.시우가 명찰을 읽었다.“회장님 아니네.”“오늘은 보호자야.”“뒤에 앉아.”“알겠어.”수업은 종이 상자로 가족이 함께 살 집을 만드는 활동이었다.시우는 엄마와 바닥을 만들고, 도진에게는 지붕을 맡겼다.“아빠 지붕 잘해?”“해본 적 없어.”“회사에서는 집 안 만들었어?”“호텔은 만들었는데 내가 직접 접지는 않았어.”“그러니까 못하지.”시우는 확신에 찬 얼굴로 풀칠 방법을 보여줬다.도진은 지붕 한쪽을 비뚤게 붙
토요일 두 시간 방문은 집 밖에서 진행하기로 했다.장소는 동네 어린이과학관이었다. 입구가 좁고 주말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시우가 직접 고른 곳이었다.도진은 약속 시간 10분 전에 도착해 표를 사려다가 멈췄다.서연이 도착하기 전 일정을 대신 정하지 않기로 했다.세 사람이 만난 뒤 시우가 키오스크에서 공룡 전시와 빛 실험실 중 하나를 골랐다. 아이는 한참 고민하다 빛 실험실을 눌렀다.“공룡 아니어도 돼?”도진이 묻자 시우가 말했다.“공룡은 다음에 보면 돼.”도진은 그 말을 마음에 넣어두었다.전시관 안에서 시우는 손전등으로 벽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도진이 토끼 모양을 흉내 냈지만 귀가 세 개가 됐다.“그건 토끼 아니야.”“뭐로 보여?”“외계인 닭.”시우가 웃었고, 서연도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도진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 순간을 휴대전화로 찍고 싶었지만 꺼내지 않았다.사진은 허락을 받아야 했다.도진은 시우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아이가 전시를 보느라 집중한 순간에 허락을 묻는 것도 흐름을 끊을 수 있었다.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매번 기록할 필요는 없었다.서연은 그가 휴대전화를 넣는 모습을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묻지 않고 참은 행동을 일일이 칭찬하면 또 평가받기 위한 수행이 될 수 있었다.관람을 마치고 아이스크림 가게에 갔다.시우는 딸기, 서연은 커피, 도진은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았다.“아빠도 먹어.”“괜찮아.”“그러면 내 거 녹으면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