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윤혜진은 카페 공사장에서 스물한 살 이태오를 만난다. 충동처럼 시작되어 하룻밤으로 끝났다고 믿었던 관계. 그러나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한 그가, 어느 날 남편 한정우와 함께 혜진의 앞에 나타난다.
View More< 저 문 하나만 열면 남편과 아들이 있었다. 불과 몇 걸음이었다. 그런데도 혜진은 태오를 밀어내지 않았다. 입술이 맞닿았다. 숨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태오가 다시 다가왔다. 이번에는 혜진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윤혜진.” “부르지 마.” “왜요.” “그냥...부르지 마.” “엄마라고 부를까요, 그럼?” 혜진이 그를 노려봤다. 태오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건 더 싫잖아.” 문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혜진은 태오에게 더 깊이 몸을 기댔다.>
카페 문을 닫은 건 팔 년 만에 처음이었다. 정확히는 폐업이 아니라 공사 때문이었다. “사장님, 이 벽은 다 뜯는 거 맞죠?” “네.” “아깝긴 하네. 원목인데.” “뜯어주세요.” 현장소장이 벽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상태는 괜찮아요. 잘 손보면 살릴 수도 있는데.” “버리지는 마세요. ” “네?” “떼어낸 거요. 버리지 말고 모아두세요.” 소장이 혜진을 한번 쳐다봤다. “어디 쓰시게요?” 잠시 벽을 바라봤다. 팔 년 동안 카페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짙은 원목이었다. 군데군데 긁히고 색도 바랬지만 나무 자체는 아직 단단했다. “테이블로 만들 수 있지 않아요?” “만들 수야 있죠.”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새로 사는 게 더 깔끔할 텐데.” “알아요.” “돈도 크게 차이 안 날 거고.” “그래도요.” 소장이 웃었다. “사장님 의외시네.” “뭐가요?” “아까는 미련 없이 다 뜯으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벽으로 쓸모를 다했다면 테이블이 되면 되고, 테이블이 될 수 없다면 다른 쓸모를 찾으면 그만이었다. 점심 때쯤에 다시 카페에 들어갔을 때 벽은 절반쯤 사라져 있었다. 인부들는 점심 겸 휴식시간을 가지러 다들 나가고 없었다. 그 때 안쪽에서 일정한 소리가 들렸다. 사각. 잠시 멈췄다가, 다시 사각. 전동공구 소리가 가득했던 오전과는 달리 아날로그적인 느린 소리였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아까 떼어낸 원목들이 길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가 펜치를 깊숙이 물리고 손목을 틀었다. 팔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드러난 어깨에서 팔뚝까지 근육이 단단하게 당겨졌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 위로 땀이 얇게 번들거렸다. 끼익. 녹슨 못이 나무에서 천천히 딸려 나왔다. 그는 못을 바닥에 던져놓고 손등으로 턱에 맺힌 땀을 훔쳤다. 그러자 손등에 묻어 있던 톱밥이 턱선을 따라 희미하게 번졌다. 이상하게 눈이 갔다. 얼굴보다 손이 먼저였다. 크고 거친 손. 손등에는 자잘한 상처가 있었고 손가락 마디에는 오래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그 손이 원목 위를 천천히 훑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생각보다 오래 보고 있었다. “목수예요?” 남자의 손이 멈췄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박혀 있던 못 하나를 마저 뽑았다. 챙. 바닥에 못이 떨어지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아닌데요.” “그런데 능숙하네요.” “이 정도는 다 합니다.” “현장 일 오래 했어요?” “좀.” 짧은 대답이었다. 혜진은 그제야 그의 얼굴을 제대로 봤다. 생각보다 더 젊었다. 아니, 어리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짧은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이마에 조금 붙어 있었고, 콧날과 턱에는 하얀 먼지가 묻어 있었다. 그가 그녀를 한번 훑어보더니 물었다. “왜요?” “뭐가요?” “계속 보시길래.” 혜진은 눈썹을 살짝 올릴 뿐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요?” 그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없는데요.” “그럼 됐네요.” “네.” 그가 다시 고개를 숙이는가 싶더니 덧붙였다. “계속 보셔도 되고.” “…….” “난 상관없으니까.” 사포가 다시 나무 위를 스쳤다. 그녀는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 건방지네. 처음 든 생각이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원목의 갈라진 부분을 엄지로 눌러보며 말했다. “마음껏 보세요.” “…….” 사포가 다시 나무 위를 스쳤다. 사각, 사각.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 같은데 묘하게 들렸다. 그녀는 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대답 대신 원목을 뒤집었다. 양손으로 들어 올리는 순간 티셔츠가 등에 팽팽하게 당겨졌다. 생각보다 몸이 좋았다. 헬스장에서 만든 몸과는 조금 달랐다. 예쁘게 만들어진 근육이라기보다 계속 무언가를 들고, 밀고, 당겨온 사람의 몸. “이름이 뭐예요?” 사포질이 멈췄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왜요?” “그냥 궁금해서요.” “이태오.” 태오가 다시 사포를 잡았다. “사장님은요?” “윤혜진.” 그가 사포질을 멈추지 않은 채 이름을 한번 되뇌었다. “윤혜진.” 씨도, 사장님도 붙이지 않았다. “나보다 많이 어린 것 같은데.” 그제야 태오가 고개를 들었다. “몇 살처럼 보여요?” “스물다섯?” 그가 웃었다. “스물하나.” 순간 표정 관리가 안됐다. “스물하나?” “네.“ 열아홉인 아들 민재의 얼굴이 순간 떠올랐다. 고작 두 살 차이였다.조금 전까지 보이던 것들이 갑자기 불편해졌다. 손, 팔, 젖은 티셔츠. 한 걸음 물러났다. “어리네.” 태오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 물었다. “실망했어요?” “뭘.” “어려서.” 헛웃음을 쳤다. “내가 왜 실망해요?” “그러게.” 태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사포가 나무 위를 지나갔다. “왜 실망하지.” “…….” 혼잣말처럼 해놓고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아까부터 이 남자는 자기를 보고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지유는 태준의 커다란 티셔츠 한 장을 걸친 채 서재에 앉아 있었다. 벽과 천장, 책장까지 온통 나무로 마감된 공간이었다. 제법 넓은 방이었지만 차갑거나 휑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된 목재 특유의 색감과 은은한 향 덕분에 아늑했다. 간간이 다이닝룸 쪽에서 도마를 두드리는 칼질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탁, 탁.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그 소리마저 지유의 마음을 고요하게 했다. 지유는 의자를 뒤로 돌려 책장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경제서와 역사서, 두꺼운 외국어 원서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그사이에서 유독 낡은 양장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책등에는 아무런 제목도 적혀 있지 않았다. — 무슨 책이지? 호기심에 책을 꺼내 펼쳤다. 그 순간, 책장 사이에서 편지와 쪽지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어?” 지유가 놀라 몸을 숙였다. — 뭐야. 학창 시절에 주고받은 연애편지라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에 피식 웃으며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 누렇게 바랜 편지 봉투, 반으로 접힌 메모지, 모서리가 닳은 작은 종이들. 그사이에 사진 한 장이 섞여 있었다.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지유는 무심코 사진을 집어 들었다. 어느 레스토랑에서 찍은 듯했다. 두 사람의 뒤로 테이블과 조명이 희미하게 보였다. 사진 속 여자는 꽤 어려 보였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과 앳된 얼굴.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웃음이었다.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어찌나 밝은지 사진을 보는 사람마저 따라 웃게 만들 정도였다. 그 옆에는 태준이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은 얼굴이었다.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입가와 눈매에는 희미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지유는 사진을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갔다. — 이렇게 웃는 사람이었나. 사진 아래쪽의 흰 여백에는 작고 동그란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태준 오빠, 내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한 장뿐인 이 사진은 오빠가 간직해.
“이건요?” 지유가 장식장 위의 작은 물건을 가리켰다. 태준은 잠시 그것을 바라봤다. “그건…….”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지유의 질문에는 단순히 물건의 이름을 묻는 것 이상의 호기심이 있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왜 이런 것을 샀는지, 어째서 여기에 두었는지. 그러고 보면 태준 자신도 이유를 잊어버린 채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적지 않았다. 필요해서 샀던 것인지, 누군가에게 선물받았던 것인지조차 가물가물한 것들. 지유가 묻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별생각 없이 그 자리에 두었을 것이다. “왜요? 기억 안 나요?” “그러게. 이걸 왜 샀더라.” 태준이 웃자 지유도 따라 웃었다. “집에 있는 물건인데도 몰라요?” “오래 살다 보면 그래.” “얼마나 오래 사셨는데요?” “십 년은 넘었지?” “와.” 지유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통창 너머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 가장자리에는 키가 제법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정원 한편에는 야외용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뒤로 낮은 담장이 이어졌다. 혼자 살기에는 꽤 넓은 단독주택이었다. 아마도 넷, 아니 그 이상의 가족 구성원을 염두에 두고 구입한 집이리라. 5개의 방과 4개의 욕실은 좀 오버야. “안 무서워요?” “뭐가?” “이렇게 넓은 집에 혼자 있으면.” 무섭지는 않았지만, 가끔 지나치게 조용했다. “익숙해지면 괜찮아.” “나라면 맨날 거실에만 있을 것 같아요. 다른 방은 들어갈 일도 없겠는데요?” “나도 그래.” “그럼 나머지 방은 왜 있어요?” 태준은 웃으며 거실 통창 앞에 서있는 지유의 실루엣을 눈에 담았다. 정원에서 스며든 오후의 햇빛이 그녀의 어깨와 머리카락 가장자리에 엷게 내려앉아 있었다. 지유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봐요?” “그냥.” 태준은 느릿하게 웃었다. “잘 어울려서. 우리 집이랑.” 지유는 입술을 샐쭉 내밀더니 소파 쪽으로 걸어왔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정우는 셔츠를 벗어 던졌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아직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태오의 침대 밑에서 발견한 목걸이와 혜진의 목덜미에 남아 있던 붉은 흔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우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느새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혜진은 주방에서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고 찻잔을 꺼내는 뒷모습이 평소와 다름없이 익숙했다. 정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태오 집에는 가끔 가?” “응?” 혜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직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곱씹고 있었다. 태오의 아슬아슬한 질문이 못내 화가 났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꺼낸 것일까. 정우가 조금만 더 예민하게 받아들였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어디까지 허용하고, 언제 끝낼 것인지. 이제는 분명한 선을 그어야 했다. 자신은 결국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남편이 있고, 아들이 있고, 오랫동안 일구어 온 생활이 있는 세계. 잠시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버릴 수는 없었다. “거의 안 가지. 그건 왜?” “아니, 뭐. 태오 혼자 있으면 적적하잖아. 민재도 없고, 나도 거의 일에 매여 있고.” 정우는 주방 조리대에 한 손을 짚었다. “당신은 카페 오가는 길에 가끔 들러 주면 좋을 것 같아서.” 말투도, 내용도 한없이 다정했다. 그러나 혜진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달랐다. 사소한 표정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요하고 날카로웠다. 혜진은 티백을 꺼내 찻잔에 넣느라 그 눈빛을 보지 못했다. 아마 보았더라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지금 정우가 걱정하는 것은 태오의 외로움 따위가 아니다. 그리고 혜진 자신이 경계해야 할 사람은 태오가 아니라는 것을. 정우가 조리대를 돌아 혜진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붉은 흔적은 티셔츠의 목선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화장이 거의 지워진 탓에 오히려 아까보다 선명했다
그날 혜진이 먼저 정우에게 다가온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섹스는 없었다. 물론 수진을 만나는 간격이 유독 짧아진 탓에 정우로서는 아쉬울 겨를도, 안하게 된 기간을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혜진과는 잘 맞았다. 첫 만남부터 혜진은 섹스에 있어서는 꽤 대담했고, 즐겼다. 하지만 평소의 그녀는 조신하고 단정한 축에 속했다. 낮과 밤의 온도 차가 확연한 여자. 정우는 그 이중적인 면이 유독 마음에 들었다. 혜진 역시 정우와의 관계를 꽤 만족해했었다. 한 번으로 만족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정우가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고 나서야 혜진은 아쉬운 듯 웃으며 그의 몸을 꼭 끌어안곤 했다. —그런데 정우는 올리브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 먹어? 회사에서 뭐 먹고 왔어?” 혜진이 의아한 듯 정우의 접시를 들여다봤다. 음식은 반 넘게 남아 있었다. 어느새 다음 메뉴가 테이블 위에 놓이고 있었다. “점심 먹은 게 아직 소화가 안 됐나 봐.” “뭐 먹었는데?” “삼계탕” 정우의 시선이 문득 혜진의 목덜미에 머물렀다. 목걸이 하나 걸려 있지 않은 공허한 목덜미에서 쇄골까지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화장에도 채 가려지지 않은 붉은 반점이 눈에 들어왔다. 모를 수가 없다. 상대의 입술이 집요하게 머물렀을 때, 특히 피부가 연약한 여자에게 남곤 하는 흔적이었다. 정우 자신도 수없이 보아 왔고, 남기기도 했던 자국. 울혈. 정우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왜?” 혜진이 그를 바라봤다. 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목덜미에 머물러 있었다. “어디 아파?” 혜진이 물었다. 그제야 정우는 눈을 거두었다. “아니.” 그는 레몬수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올리브의 짠맛과 레몬의 신맛이 전혀 어우러지지 않은 채 입 안을 맴돌았다. “참, 다음 주에 부부 동반 모임 있는 거 알지?” 혜진은 새로 서빙된 도미 필레를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껍질은 노릇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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