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후 2시, 루미에르 대표 번호로 문의가 쏟아졌다. 전화 메모지에는 예약 문의보다 취재 요청이 더 많이 적혔다. 은채가 전화를 받는 동안 지수는 인터넷 기사를 서연에게 보여줬다.
[유명 웨딩플래너, 재벌가 신부 잠적 직전 “곤란한 일은 제가 정리”]
기사에 붙은 녹음은 15초였다.
“예식 준비를 계속할지, 잠깐 멈출지는…….”
“곤란한 일은 제가 정리할게요.”서연이 한 말이었다. 다만 첫 문장 뒤에 있던 ‘신부님과 직접 확인해야 해요’가 잘려 있었다. 기사는 두 문장을 붙여놓고 신부를 도피시켜 주기로 한 약속처럼 설명했다.
지수는 댓글 창을 닫았다.
“전남편 결혼식도 고의로 깼다는 말까지 다시 나와요. 성운 쪽에서는 50억 원 손해를 물리겠다는 통보를 보냈고요.”
밤 9시, 서연은 서경민과 함께 경찰서에 들어갔다. 앞서 보낸 녹음과 기사 자료에 설명을 보태기 위해서였다. 연주도 자신이 원해서 연락을 끊었으며 누구에게 강제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하러 왔다.현관 옆에서 기다리던 기자가 서연을 알아봤다. 질문이 겹쳤다.“신부에게 잠적을 권유한 게 맞습니까?”“50억 원 배상 요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서연은 서경민을 봤다. 그는 제출할 자료가 든 서류철을 챙기고, 길게 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연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제 이야기는 제가 할게요.”서연은 그녀를 중앙으로 밀거나 카메라 쪽으로 돌려세우지 않았다. 연주가 멈춘 자리에 나란히 섰다.“저는 한서연 대표님이 시켜서 연락을 끊은 게 아닙니다. 예식 준비 과정에서 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한 기자가 공방의 위치를 물었다. 서경민이 생활 장소에 관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겠다고 했다.“그럼 결혼은 예정대로 합니까?”“하지 않습니다. 오늘 상대방에게 제 뜻을 직접 전했습니다.”연주는 다음 말을 꺼내기 전에 한 번 숨을 골랐다.“제 의사인데도 계속 누군가 시킨 일이라고 하지 말아주세요.”그 말을 마친 연주가 물러났다. 서연은 공개된 녹음의 앞뒤가 잘렸다는 사실만 설명했다. 전체 통화는 7분 40초였지만 기사에는 15초만 실려 있었다.“당사자와 직접 준비 여부를 확인하겠다는 말에서 뒷부분이 빠졌습니다. 원본과 기사의 차이는 대리인을 통해 전달하겠습니다. 개인적인 상담 내용까지 모두 공개하지는 않을 겁니다.”“누가 편집한 겁니까?&rd
수요일 저녁 7시, 약속한 연수원 회의실이었다. 도진은 지수에게 시우를 부탁하고, 아이가 자기 전에 영상통화를 할 수 있게 시간을 맞춰두었다.최승혁은 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연주의 팔부터 잡으려 했다. 서연이 둘 사이로 의자를 밀어놓았다.“앉아서 이야기하세요.”“백연주,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 양가 어른들 앞에서 나만 우스워졌잖아.”연주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테이블 아래에 둔 두 손이 서로를 붙잡고 있었다. 서경민이 회의 목적과 녹음 사실을 알리자 승혁은 마지못해 맞은편에 앉았다.“내가 어른들께 잘 말해줄 테니까 들어와. 스트레스받아서 그랬다고 하면 돼.”연주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접은 종이를 꺼냈다. 승혁이 종이를 낚아채려 하자 그녀가 자기 쪽으로 당겼다.“제 말부터 들어요.”“들으러 왔잖아. 뭘 더 해주면 돼? 드레스도 네가 고른 걸로 바꿔줄게.”승혁은 휴대전화 화면을 켜 드레스 사진을 찾았다. 연주는 그 화면을 보지 않았다.“저한테 어디 아픈 건 아닌지 물어본 적 있어요?”“지금 멀쩡히 앉아 있잖아.”“어제 제가 연락을 끊었을 때요.”승혁의 손이 잠시 멈췄다. 곧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다리를 꼬았다.“온 집안이 널 찾았어. 그걸로 부족해?”“결혼식에 늦을까 봐 찾은 거잖아요.”서연은 연주 앞의 물잔을 조금 옆으로 옮겼다. 종이를 펼칠 공간이 생겼다. 연주는 적어온 문장을 한 번 보고 고개를 들었다.“이 결혼은 하지 않을게요.”승혁이 짧게 웃었다.&ldquo
서경민은 연주가 건넨 자료를 페이지별로 나눠놓았다. 건설 계열사 인수 검토서 옆에 가족 재단의 지분 이전 약정이 놓였다. 서연은 두 문서에 반복되는 이름부터 확인했다.“여기요. 제가 결혼하면 이 지분을 넘긴다는 거죠?”연주가 빈 서명란 위를 짚었다. 서경민은 문서의 작성일과 당사자를 다시 살폈다.“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다만 이 문서가 실제로 체결됐는지, 누구에게 어떤 의무가 생기는지는 더 확인해야 합니다.”“저한테는 이미 끝난 일이라고 했어요. 제가 식장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고.”“연주 씨가 서명한 건 아니고요?”“네. 날짜만 확인하라고 했어요.”연주는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방금 전까지는 파일을 열어본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눈치를 봤는데, 이제는 조항 끝까지 손가락을 따라가며 읽었다.“태어날 아이에 관한 말도 있네요. 아이를 낳을지 물어본 적도 없는데.”서연이 물잔을 가까이 놓아줬다. 연주는 컵을 잡고도 마시지 않았다.“아버지는 이 결혼이 싫다고 하면 회사 사람들 월급까지 제가 끊는 거라고 했어요.”“회사의 거래와 연주 씨의 혼인 의사는 구분해서 확인하겠습니다.”서경민이 펜을 내려놓았다.“오늘 이 자료를 다 이해해야만 거절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원치 않는 결혼이라는 말씀은 먼저 전할 수 있어요.”연주는 컵을 내려놓고 연락처 목록을 열었다. 최승혁의 이름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만나면 또 제가 예민해서 그런 거라고 할 거예요.”“그럴 때 무슨 답을 하실지 미리 적어볼까요?”서연은 양가가
서연은 처마 밑에서 우산을 접었다. 빨랫줄에는 쪽빛 천과 연한 노란 천이 걸려 있었다. 문 안쪽에서 걸쇠를 미는 소리가 났다.“대표님.”연주는 전화할 때보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문을 반쯤 열고 서연의 뒤를 살폈다. 차 앞에 서 있던 도진과 서경민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같이 온 분들은 밖에 계실 거예요. 변호사님 이야기가 필요하면 부를게요.”“네. 들어오세요.”연주가 문을 열어줬다. 서연은 그제야 안으로 들어갔다.작업대에는 젖은 천과 마른 천이 따로 놓여 있었다. 연주가 급히 의자 위의 실타래를 치우자 서연이 옆에 있던 빈 의자를 끌었다.“그건 그대로 두세요. 여기 앉으면 돼요.”연주의 손톱 아래에는 푸른 염료가 남아 있었다. 연주는 그 손을 감추려다 말고 무릎 위에 내려놨다.“사진을 보고 오신 거예요?”“소개 자료에 공방이 있더라고요. 전화가 연결돼서 다행이었어요.”“비서한테 지워달라고 했었는데. 회사 일과 관계없는 사진이라고 해서요.”연주가 입꼬리를 올렸다가 금방 내렸다.“오늘은 약속 지키려고 나왔어요. 그런데 숍으로 가는 길에 승혁 씨한테 연락이 왔어요. 정오 오찬에서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적어 보냈더라고요.”그녀는 가방에서 꺼낸 휴대전화를 켰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연달아 올라왔다. 연주가 보여준 원고에는 결혼 후 그룹 업무에서 물러나 가정에 전념하겠다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제가 한 적 없는 말이에요. 그걸 제 입으로 읽으래요.”서연은 화면을 연주 쪽으로 돌려놓았다.“그래서 이쪽으로 오셨군요.”
“와주세요. 그런데 저를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시면…….”“그럴 생각 없어요. 만나서 이야기만 해요.”연주는 공방 주소를 확인해 주고 전화를 끊었다. 서연은 서경민에게 안전은 확인됐다는 사실을 먼저 전달했다. 가족에게 주소까지 알리는 문제는 당사자와 따로 이야기하기로 했다.지수가 창가의 블라인드를 내려놓았다. 정문 앞에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늘어 있었다. 주차장에서 나오는 직원에게 다가가 길을 막는 사람도 보였다.“정문은 어려워요. 지하 출구에도 두 팀 있고요.”도진은 건물 관리실에 연락해 반대편 하역장 통로를 쓸 수 있는지 물었다. 관리인이 퇴근 차량과 겹치지 않는 시간을 알려줬다. 방문객 출입은 로비까지만 허용하고 직원 뒤를 따라 사무실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답도 받았다.“차를 그쪽에 댈게. 운전은 내가 할까?”“그래요. 변호사님도 같이 가주세요. 연주 씨가 가족들 연락을 무서워해요.”도진이 하원 시간을 보더니 서연에게 휴대전화를 보였다. 지수가 먼저 시우를 데려다 집에서 봐줄 수 있다고 답해온 참이었다.“지수 씨 괜찮겠어요? 사무실도 바쁜데.”“은채 씨와 업무 나눴대. 시우한테는 내가 직접 말할게.”도진은 유치원에 보호자 변경을 알리고 아이와 잠깐 통화했다. 시우는 왜 아빠가 안 오느냐고 물었다. 도진은 늦어져서 미안하다고, 자기 전에 꼭 다시 전화하겠다고 답했다. 서연은 그 시간을 자기 휴대전화에도 적었다.서경민이 노트북을 챙겼다. 도진은 먼저 내려가 차를 옮겼다.서연은 지수와 은채에게 남은 업무를 나눠줬다. 오후에 약속했던 시안은 예정대로 보냈고, 외부 답변은 사실확인 중이라는 공지 하나로 모았다.
오후 2시, 루미에르 대표 번호로 문의가 쏟아졌다. 전화 메모지에는 예약 문의보다 취재 요청이 더 많이 적혔다. 은채가 전화를 받는 동안 지수는 인터넷 기사를 서연에게 보여줬다.[유명 웨딩플래너, 재벌가 신부 잠적 직전 “곤란한 일은 제가 정리”]기사에 붙은 녹음은 15초였다.“예식 준비를 계속할지, 잠깐 멈출지는…….”“곤란한 일은 제가 정리할게요.”서연이 한 말이었다. 다만 첫 문장 뒤에 있던 ‘신부님과 직접 확인해야 해요’가 잘려 있었다. 기사는 두 문장을 붙여놓고 신부를 도피시켜 주기로 한 약속처럼 설명했다.지수는 댓글 창을 닫았다.“전남편 결혼식도 고의로 깼다는 말까지 다시 나와요. 성운 쪽에서는 50억 원 손해를 물리겠다는 통보를 보냈고요.”“봉투와 첨부 자료 그대로 변호사님께 보내줘. 저 액수가 어떤 근거로 나온 건지도 확인해야 해.”서연은 회사의 통화 기록에서 오전 9시 수신 파일을 찾았다. 길이는 7분 40초. 저장 안내 뒤에 연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지수가 스피커를 끄고 헤드폰을 건넸다. 사무실 직원들에게까지 연주의 울음을 들려줄 이유는 없었다.“원본 올리면 끝나는 거 아닌가요?”“그 안에 가족 이야기까지 다 있어. 연주 씨와 이야기하기 전에는 공개하지 말자.”“우리도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요.”“가만히 있자는 말은 아니야. 우선 기사 속 문장이 어디서 잘렸는지 표시해 줘. 우리 답변 구간부터 설명하자.”지수는 음성 파일을 별도로 보관하고 기사 화면과 게시 시각을 저장했다. 서연은 연락 가능한 회선을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