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053화. 돌아온 건 나야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나서야 내가 진짜 나왔다는 걸 실감했다.건물 밖은 생각보다 조용했다.시간이 늦어서인지 큰길 쪽으로 나가도 문을 연 가게가 많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에는 새벽 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 떠 있었다.한태겸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그게 당연했다.내가 나가겠다고 했고, 걔는 문을 열어줬다.나가고 싶으면 나가.직접 그렇게 말했으니 이제 와서 연락이 오는 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그런데도 화면을 한 번 더 켰다.아무것도 없었다.“재수 없어.”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도 모르고 중얼거렸다.택시를 잡을까 하다가 걸었다.갈 곳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성당에 가면 된다.문이 닫혀 있어도 미정 이모한테 연락하면 어떻게든 들어갈 수 있을 거고, 안쪽 휴게실 소파에서 몇 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그게 싫으면 찜질방도 있었다.돈도 있었다.숙박업소를 잡아도 됐다.그러니까 갈 데가 없어서 한태겸 집에 있었던 건 아니었다.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인지 나는 성당 쪽으로 먼저 걸었다.* * *성당 앞에 도착했을 때는 불이 거의 다 꺼져 있었다.입구 옆 작은 보안등만 켜져 있었다.나는 한동안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휴대폰을 꺼내 미정 이모 이름을 찾았다.통화 버튼만 누르면 됐다.이모는 분명 받을 것이다.무슨 일이냐고 물으면서도 일단 들어오라고 할 사람이다.그런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내가 왜 나왔는지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한태겸이랑 싸웠다고 하면 될 수도 있었다.같이 지내다가 나왔다고 하면 더 간단했다.그런데 그 다음 질문이 싫었다.다시는 안 갈 거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하지.나는 그 대답을 모르고 있었다.결국 통화 화면을 닫았다.성당 계단에 잠깐 앉았다.밤공기가 차가웠다.가방을 발 옆에 내려놓자 안에서 충전기 끝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짐이 정말 별로 없었다.옷 몇 벌이랑 세면도구, 충전기, 노트.이걸 들고 나왔는데도 집에 두고 온 게 계속 생각났다.내가 사
052화. 서이안은 돌아오지 않았다태겸은 교실 앞에 서 있었다.담임이 왜 그랬냐고 물었다.태겸은 한참 입을 열지 못했다.그리고 결국 내가 시킨 대로 말했다.자기가 장난치다 그랬다고.죄송하다고.교실 뒤에서 몇 명이 웃었다.나도 웃었다.그때 태겸이 나를 한 번 봤다.그 눈을 기억하고 있었다.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척한 게 아니었다.나는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 싫었다.“그날.”태겸의 시선이 다시 내게 왔다.“네가 창문 깬 거 아니었어.”“알아.”“내가 시켰어.”말하고 나자 속이 울렁거렸다.“네가 했다고 말하라고.”태겸의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나는 그게 더 무서웠다.“왜?”질문은 짧았지만 의미는 분명했다.나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그날의 내가 왜 그랬는지는 알고 있었다.“네가 제일 쉬웠으니까.”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문제 생겨도 크게 말 안 할 것 같았고, 내가 시키면 할 것 같았고.”태겸의 턱선이 굳었다.나는 계속 말했다.멈추면 다시 못 할 것 같았다.“그리고 애들 앞에서 확인하고 싶었어.”“뭘 확인하려고 했는데.”“네가 내 말 어디까지 듣는지.”그 말까지 하고 나니 정말 토할 것 같았다.나는 웃지도 못했다.“됐냐.”태겸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숨이 막혔다.“끝까지 말하라며. 말했잖아.”“응. 들었어.”“그런 얼굴 하지 마.”“내가 어떤 얼굴인데.”“나 불쌍하게 보는 얼굴.”태겸의 미간이 아주 조금 좁아졌다.“불쌍하게 안 봐.”“그럼 뭐야.”“화나.”그 한마디가 오히려 안심됐다.차라리 그게 나았다.“그래. 화내.”“지금은 더 말하면 네가 버티기 힘들 것 같아서 안 하는 거야.”그 순간 다시 숨이 턱 막혔다.“또.”“이안아.”“나 봐주지 마.”태겸이 한 걸음 움직이다가 멈췄다.“봐주는 거 아니야.”“그럼 왜 맨날 적당한 데서 멈추는데.”“네가 무너지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나는 웃었다.정말 웃음밖에 안 나왔다.“복
051화. 나가면 되잖아“그 얼굴. 나한테만 해.”한태겸이 그렇게 말한 뒤로 자꾸 그 문장이 생각났다.기분이 나빴으면 좋았을 텐데.차라리 어이가 없거나, 재수 없거나, 저 인간이 또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넘길 수 있었으면 편했을 것이다.그런데 싫지 않았다.그게 제일 짜증났다.나는 성당에서 돌아오는 동안 태겸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태겸도 마찬가지였다.집에 도착하니 거실 불은 켜져 있었고, 태겸은 소파 앞 낮은 테이블에 서류 몇 장을 펼쳐놓고 있었다.내가 현관문을 닫자 고개를 들었다.“왔어?”“보면 모르냐.”“오늘은 늦을 줄 알았어.”“왜 그렇게 생각했는데.”“우진 씨랑 정리할 게 더 남았다고 했잖아.”나는 신발을 벗다가 멈췄다.“또 그 얘기야?”“아니. 그냥 기억하고 있었어.”“그게 더 싫어.”태겸이 낮게 웃었다.“어제는 기억하는 것도 너한테만 하는 줄 알았다며.”“그걸 아직도 붙잡고 있냐?”“좋았으니까.”나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너 진짜 사람 열받게 하는 재주 있다.”“알아.”“그걸 자랑처럼 말하지 마.”태겸은 더 웃지 않았다.내가 소파 반대편에 앉자 펼쳐져 있던 서류를 한쪽으로 모았다.그 움직임을 보고 나서야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는 걸 알아챘다.질투 얘기를 하려는 얼굴이 아니었다.나는 등받이에 기대며 물었다.“오늘도 할 거야?”“뭘 말하는 거야.”“옛날 얘기.”태겸의 시선이 잠깐 내 얼굴에 머물렀다.“싫으면 오늘은 안 해도 돼.”그 말이 예전 같았으면 편했을 것이다.지금은 아니었다.“그렇게 먼저 빠져나갈 구멍 만들어주지 마.”“만들어주는 거 아니야.”“그럼 왜 매번 나한테 정하래.”태겸이 잠시 침묵했다.“네가 싫다고 했던 걸 무시하고 싶지 않아서.”“그러니까 그게 짜증난다고.”“왜 짜증나는지는 모르겠어.”“나도 모르니까 묻지 마.”이번에는 태겸이 더 캐묻지 않았다.그게 또 마음에 안 들었다.나는 결국 소파에서 몸을 바로 세웠다.
050화. 나한테만 해이안이 잠깐 눈을 깜빡였다.“봉사 일정 때문에 가끔 하지.”“개인적으로도?”“그게 왜 궁금한데.”“궁금하니까 묻는 거야.”이안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너 진짜 어제 내 행동 그대로 따라 하네.”“나도 이제 알 것 같아서.”“뭘.”“네가 왜 강이현 신경 썼는지.”이번에는 이안이 웃지 않았다.나는 괜히 돌려 말하지 않았다.“질투하는 것 같아.”이안의 얼굴이 굳었다.“차우진한테?”“정확히는 차우진 때문이라기보다 네가 저 사람한테 편한 게 싫어.”이안은 한동안 내 얼굴을 봤다.“내가 다른 사람이랑 편하면 싫다고?”“응.”“너 지금 네가 무슨 말 하는지는 알아?”“알아.”“그러면서 어제는 나한테 강이현 때문에 질투하냐고 물었잖아.”“네가 질투하는 건 좋았으니까.”이안이 기가 막힌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진짜 재수 없네.”“그건 인정해.”“그리고 네 질투는 괜찮고 내 질투는 재미있어?”“둘 다 좋아.”이안의 표정이 잠깐 무너졌다.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게 나한테만 나오는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또 이상하게 좋아졌다.이안이 팔짱을 꼈다.“그래서 차우진 안 만나면 돼?”질문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그건 싫어.”“싫다면서 왜 만나도 된대.”“내가 싫은 거랑 네가 끊는 건 다른 문제니까.”“그러면 내가 계속 연락하고, 여기서 보고, 같이 일해도 아무 말 안 할 거야?”“그래도 그건 네가 정할 일이야.”이안의 눈빛이 미세하게 달라졌다.나는 말을 조금 천천히 이었다.“내가 싫다고 해서 네가 관계를 끊으면 그건 네 선택이 아니잖아.”짧은 정적이 생겼다.이안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내 손등에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그가 그걸 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감추지는 않았다.“너 진짜 사람 열받게 한다.”“어떤 부분이.”“이럴 때는 그냥 싫다고 우기든가, 가지 말라고 하든가 해야 되는 거 아니야?”“그렇게 해주길
049화. 나한테만 그러잖아“네가 나한테 하는 거. 다.”이안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잠시 뒤 방문이 닫혔다. 잠금장치가 눌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나는 한동안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다라는 말이.그 한마디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밥을 챙기는 것, 연락을 기다리는 것, 피곤해 보인다고 먼저 알아채는 것, 싫다고 하면 멈추는 것. 아마 어젯밤의 일까지 전부 포함해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질투라고 부르면 이안은 바로 부정할 게 뻔했다.그래서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았다.다만 좋았다.복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인데, 그게 좋다는 사실이 더 문제였다.* * *다음 날 오후, 외근이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성당 근처까지 온 김에 들렀다고 생각하면 간단했다. 실제로 이안에게 미리 연락할 이유도 없었다.그런데 차에서 내린 뒤에도 어젯밤 들었던 말이 계속 생각났다.네가 나한테 하는 거. 다.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복도 끝에서 이안이 보였다.흰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접이식 상자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 앞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밝은 회색 운동복 차림에 체격이 단단했다. 상자를 받아 들면서 자연스럽게 웃었다.“이건 제가 옮길게요. 지난번에도 괜찮다고 하다가 허리 잡았잖아요.”“그때는 박스가 이상했던 거예요. 이것까진 할 수 있어요.”“그러니까 무거운 것만 달라고요.”이안이 잠깐 웃었다.“말 많네.”존댓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빠졌다.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처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그 장면을 보는 순간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았다.이안은 나한테 뭘 부탁해도 이유부터 따지는 사람이다. 싫으면 바로 싫다고 하고, 한번 밀어내면 쉽게 번복하지도 않는다.그런데 저 남자한테는 한 번 거절하고 끝이었다.“한태겸?”이안이 나를 발견했다.표정이 바로 바뀌었다.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웃음이 사라지고, 눈매가 가늘어졌다.“연락도 없이 왜 왔어.”그 말투를 듣는 순간 오히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근처 외근이 빨리
048화. 네가 나한테 하는 거, 다“저희요? 오래 같이 일했으니까 편하긴 하죠.”“편한 정도?”“술도 몇 번 마시고, 힘든 일 있으면 서로 커버해주고. 그 정도.”그때 성당 출입문이 열렸다.한태겸이 들어왔다.* * *태겸은 나와 강이현을 발견하자 걸음을 잠깐 늦췄다.강이현이 먼저 손을 들었다.“늦었네.”“미안. 외근이 예상보다 길어졌어.”“네가 늦는 것도 다 보네.”강이현이 웃으며 태겸의 어깨를 한 번 쳤다.태겸도 익숙한 듯 별 반응 없이 파일을 받아 들었다.그 장면이 이상하게 눈에 박혔다.너무 자연스러워서.누가 봐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 같아서.당연한데도 기분이 나빴다.강이현이 나를 돌아보았다.“서이안 씨, 덕분에 기다리는 동안 덜 심심했습니다.”“제가 뭘 했다고요.”“태겸이 회사생활 조금 팔았죠.”태겸이 나를 봤다.“내 얘기 했어?”“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 했지.”“뭘 물어봤는데.”“별거 아니야.”강이현이 웃었다.“네가 회사에서도 사람 귀찮게 챙기냐고 묻더라.”“강이현.”이름을 부르는 태겸 목소리가 낮아졌다.“왜. 틀린 말도 아닌데.”나는 그 둘을 번갈아 봤다.태겸이 강이현한테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처음 봤다.짜증은 났지만 정말 화난 건 아닌 얼굴.편해서 가능한 반응.강이현은 시계를 확인하고 말했다.“나는 먼저 갈게. 내일 회의 때 보자.”“오늘 자료는 메일로 보내.”“알았어.”그가 다시 태겸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서이안 씨도 다음에 봬요.”“네. 조심히 가세요.”강이현이 나가자 성당 안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 같았다.태겸이 파일을 내려다보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무슨 얘기 했어?”“말했잖아. 별거 아니라고.”“이현이가 내 회사생활 팔았다며.”“네가 원래 사람 잘 챙긴다더라.”태겸이 잠깐 눈을 좁혔다.“그게 궁금했어?”“조금.”“왜 그런 게 궁금했는데.”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아침부터 계속 걸리던 게 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내가 특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