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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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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s by 혜진

나를 짐승 취급한 두 여자를 길들이겠습니다

나를 짐승 취급한 두 여자를 길들이겠습니다

여섯 해 전, 황후 오델린과 황녀 벨리사는 칼리아를 인간이 아닌 짐승처럼 다뤘다. 전쟁영웅이 되어 돌아온 칼리아는 이제 제국의 여제. 아버지의 죽음 뒤에 숨은 진실을 파헤치며 두 여자의 모든 것을 빼앗기 시작한다. 그런데 서로를 배신하며 살아남은 두 여자는, 자유를 되찾은 뒤에도 칼리아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복수로 시작된 세 여자의 위험한 사랑이 뒤집히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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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54화. 이제는 시키지 않아도
054화. 이제는 시키지 않아도풀렸던 눈동자가 다시 초점을 찾았다.그래도 눈의 흑자는 계속 위로 치솟았다."크흑……! 아……!"그리고 나는 천천히, 젖소의 젖을 짜듯 양쪽 젖꼭지를 잡고 짜내기 시작했다.힘을 주고, 비비고, 끝을 눌렀다.오델린의 어깨가 떨렸다.나는 그 어깨를 살짝 깨물고 빨았다.흠집이 남게."하아……아……!"오델린은 완전히 축 늘어진 육체를 내 쪽으로 기댔다.등이 내 가슴에 닿았다.심장이 전해졌다.미친 듯이 뛰는 심장."잘했어요."오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숨을 몰아쉬며 내게 기대어 있었다.목의 형벌환.흐트러진 검은 머리.젖은 허벅지.짐승의 자세로 시작한 밤이, 짐승처럼 기대는 밤으로.오델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도 내 어깨에 기대는 무게는 조금 더 깊어졌다.처음으로, 저항하지 않는 무게였다."그런데 하나만 더. 오늘의 마지막이에요."오델린이 고개를 들었다.눈이 흐릿했다.나는 축 늘어진 그녀의 젖꼭지를 그대로 잡아 들어 올렸다.힘없이 처지던 살이 손끝에 당겨졌다.오델린의 목에서 짧게, 하아,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무, 무엇을……""배변 교육이에요. 짐승은 오줌도 주인 눈앞에서 눠야 하니까."구석에 있던 낮은 대야를 끌어왔다.목욕물을 받는 놋쇠 대야.차가운 테두리가 돌바닥에 닿으며 쇳소리를 냈다.오델린의 시선이 대야를 따라 내려갔다.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얼굴이었다.그리고 이해한 순간, 굳었다.지금까지의 어떤 벌보다 단단하게."……그것만은.""왜죠.""그것만은, 싫습니다."처음 나온 '싫습니다'였다.짐승의 자세를 하고, 항문을 내주고, 절정 직전에서 굶겨도 버티던 여자가, 그 문장 앞에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앉아요. 등을 대고, 무릎을 세우고, 허벅지를 벌리고.""……""손은 머리 뒤로. 싸는 걸 내가 다 보게."오델린은 한동안 나를 봤다.눈빛이 흔들렸다.그래도 천천히 움직였다.등을 차가운 돌바닥에 대고, 무릎을 세우고, 허벅지를 양
Last Updated: 2026-09-16
Chapter: 053화. 오늘은 진짜 짐승으로 만들어줄게요
053화. 오늘은 진짜 짐승으로 만들어줄게요오델린이 처음으로 나를 짐승이라고 부른 날을 나는 냄새로 기억한다.마구간.마른 건초.말의 체온.안장에 밴 기름 냄새.길들이는 중인 어린 말을 타려다 떨어졌다.팔꿈치가 까지고 손바닥에 흙이 묻었다.오델린이 왔다.화난 얼굴이 아니었다.너무 차분했다.그게 늘 더 무서웠다."말 안 듣는 짐승도 너보다는 관리하기 쉽겠구나."어린애는 비유를 비유로 듣지 않는다.나는 그 말을 그대로 들었다.말보다 못한 아이.관리해야 할 상태.그날 이후 내 이름은 상태가 되었다.관리해야 할 아이.왜 이렇게 다루기 힘드니.이름보다, 통제해야 할 상태가 먼저였다."기억나요?""마구간. 예.""뭐라고 했어요."오델린은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열었다."말 안 듣는 짐승도, 황녀보다 관리하기 쉽겠다고 했습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그 말대로 해줄게."오델린의 눈이 아주 조금 커졌다."무슨 말입니까.""당신이 나를 짐승이라고 불렀잖아요. 그럼 오늘은 진짜 짐승으로 만들어줄게요."단추를 풀었다.목까지 올라온 깃이 벌어지며 속살이 드러났다.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내가 직접 벗겼다.어깨에서 끈을 밀어 내리고, 천이 가슴을 지나 허리로 미끄러졌다.치마자락이 바닥에 쌓였다.속옷까지.이제 방 안에 남은 것은 목의 형벌환과 손목의 기본 구속구뿐이었다."엎드려요.""……""짐승은 두 발로 서 있지 않아요. 손과 무릎으로. 엎드려."오델린은 한동안 나를 봤다.눈빛은 꺾이지 않았다.그래도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손이 돌바닥을 짚었다.무릎이 바닥을 받쳤다.구속구가 돌에 부딪혀 딱, 하고 울렸다.허리는 일자로, 엉덩이는 위로.황후였던 여자의 몸이 짐승의 자세를 했다."그래. 그게 짐승이지.""……입 닥치시죠.""벌칙 정할게요. 힘이 빠져서 무릎이 꿇리면 벌이에요. 당신이 엉덩이를 들 수 없으면, 몸은 끝날 때까지 내가 가지고 놀아요."뒤로 돌았다.엎드린 몸은 뒤에서
Last Updated: 2026-09-15
Chapter: 052화. 둘은 아직 서로를 믿고 있었다
052화. 둘은 아직 서로를 믿고 있었다“엄마한테 말했어?”“아니.”“갑자기 열어도 돼?”“내가 들어갈 수 있는 방이니까.”벨리사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나는 문을 열기 전에 덧붙였다.“그래도 먼저 부를 거야.”그리고 문을 두 번 두드렸다.“오델린.”안에서 잠깐 정적이 흘렀다.“예, 폐하.”목소리는 평소와 비슷했다.조금 낮고.아주 조금 느렸다.“들어갈게요.”“알겠습니다.”그제야 문을 열었다.*오델린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회색 형벌복.목의 검은 형벌환.머리는 자개 핀 하나로 낮게 묶여 있었다.정리되어 있었다.너무 정리되어 있어서 오히려 눈에 들어왔다.등은 곧았고, 두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했다.옷깃도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평소의 오델린 베르시아라고 해도 될 만큼 단정했다.다만 자세히 보면 달랐다.얼굴빛이 조금 옅었다.눈 아래에는 잠을 덜 잔 사람처럼 얕은 그늘이 남아 있었다.손가락이 완전히 힘을 되찾지 못한 듯 한 번씩 천천히 접혔다 펴졌다.내가 들어오는 소리에 몸을 일으킬 때도 평소보다 반 박자 늦었다.방 안에는 목욕 뒤의 비누 냄새가 났다.그 아래에 침실에서 맡았던 것과 비슷한 희미한 단내가 남아 있었다.벨리사가 문턱에서 멈췄다.이번에는 허락 때문이 아니었다.“엄마.”오델린의 얼굴이 바뀌었다.아주 잠깐.정말 잠깐이었다.회색 눈이 커지고, 입술이 열릴 듯하다가 멈췄다.그리고 곧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고고하고.차분하고.딸 앞에서 한 번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던 여자의 얼굴.“벨리사.”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흔들리지 않았다.벨리사는 들어오지 못하고 서 있었다.내가 말했다.“들어가도 돼.”그제야 한 걸음.두 걸음.벨리사는 오델린 앞까지 가지 않았다.서로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거리에서 멈췄다.오델린의 시선이 먼저 딸의 얼굴을 훑었다.머리.귀걸이.드레스.손목.목.다친 데가 없는지 확인하는 눈이었다.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보여주기 전에 딸부터 보는 사람의
Last Updated: 2026-09-15
Chapter: 051화. 엄마는 어디 있어?
051화. 엄마는 어디 있어?벨리사는 내 침실 구조를 알고 있었다.모를 수가 없었다.며칠 전에도 제 발로 들어왔고, 어제는 더 오래 머물렀다.침대가 어느 쪽에 놓였는지, 창가 소파가 어디 있는지, 안쪽 벽에 문 하나가 더 있다는 것까지 이미 봤다.그 문 뒤에 오델린이 있다는 것도 안다.고해 시간이 되면 내가 직접 문을 열고 데리고 나온다는 것도.그러니 오늘 벨리사가 묻고 싶은 건 위치가 아니었다.“엄마, 괜찮아?”아침부터 가져온 서류철을 책상 위에 내려놓은 뒤였다.나는 첫 장도 펼치지 않고 벨리사를 봤다.밝은 크림색 드레스에 금빛 갈색 머리를 반쯤 묶었다.귀에는 작은 초록 보석이 흔들렸다.겉으로는 늘 보던 벨리사였지만 손끝이 서류 모서리를 괜히 두 번 쓸었다.“어떤 의미로.”“그냥 괜찮냐고.”“벨리사.”이름만 부르자 입술이 조금 비뚤어졌다.“그렇게 보면 꼭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잖아.”“지금은 반쯤 하고 있으니까.”벨리사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잠깐 나를 노려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고해할 때 봤잖아.”“누구를.”“엄마.”나는 기다렸다.벨리사는 자기가 어디까지 말하고 싶은지 고르는 중이었다.“네가 엄마 방 안에서 계속 뭘 하는지는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마지막 말만 조금 빨랐다.“그런데 고해할 때는 밖으로 데리고 나오잖아.”“응.”“손 풀어줄 건 풀어주고. 물도 주고. 시간 정해놓고. 끝나면 끝났다고 하고.”나는 대답하지 않았다.벨리사는 그런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생각보다.”그녀가 손가락을 깍지 꼈다.“선을 지키더라.”이상한 말이었다.내가 오델린에게 선을 지킨다는 말.틀린 말도 아니었다.고해 시간에는 특히 그랬다.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오델린이 정확한 문장으로 인정하게 하고, 정해둔 벌이 끝나면 끝냈다.시간을 늘리지 않았고, 대답을 바꿀 때까지 같은 질문을 반복하지도 않았다.그게 벨리사에게는 중요해 보였다.자기 어머니가 바로 내 침실 안쪽에 갇혀 있다는 사실
Last Updated: 2026-09-13
Chapter: 050화. 서로를 묻히고 시작했다
050화. 서로를 묻히고 시작했다이번에는 아까보다 빠르게.오델린의 허리가 떠올랐다가 내려앉았다.발목의 쇠가 덜컹거렸다."아, 아...! 안, 돼...!""안 돼?""거, 거기...! 그렇게 하면...!""그렇게 하면 뭐.""....!""말해. 그러면 뭐.""...가, 갈 것 같습니다.""가면 네가 지는 거야."오델린이 이를 악물었다.나는 멈추지 않았다.음핵을 문지르고, 튕기고, 다시 문지르고.오델린의 몸이 활처럼 휘어졌다.묶인 팔이 머리 뒤에서 떨렸다."아, 아아...!"절정 직전.오델린이 시계를 봤다.눈이 커졌다.아직 한참 남았다."아직 십 분도 안 됐어.""....!""참아. 네가 이기려면."천천히, 더 천천히.음핵 위에서 동그랗게.오델린은 참았다.숨을 멈추고, 허벅지를 떨며, 이빨을 악물고.절정 직전에서 버텼다."하... 하...!""잘 참네.""....!""그래서."나는 손을 뗐다."여기서 끝.""아...!"오델린의 몸이 부르르 떨었다.절정 직전에서 끊긴 몸이, 그 자리에서 떨고 있었다.눈이 흐려졌다."끝났습니까...""아직 안 끝났어.""....!""십오 분은 아직 남았고. 네가 직접 해."오델린의 눈이 커졌다.묶인 손이 머리 뒤에서 움직였다.내려가고 싶어 움직였다.하지만 팔꿈치가 걸렸다.닿지 않았다.거울 속에서 그녀는 자기 손이 자기 몸에 닿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만지고 싶어?""...만지고 싶습니다.""직접 해."나는 손목의 구속구를 풀었다.쇠가 쇠에서 빠지는 소리.찰칵.팔이 내려왔다.오델린은 잠시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형벌 이후 처음으로, 자기 몸을 만질 수 있는 손."거울 봐.""....""네가 지금 무슨 꼴인지."오델린의 손이 내려갔다.배.골반.그리고 보지 바로 위에서 멈췄다.손끝이 떨렸다.닿기 직전에 멈췄다."허락해 주십시오.""뭘.""...제 보지를, 만지게.""네 몸인데?"오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Last Updated: 2026-09-12
Chapter: 049화. 거울 앞에서 상 줄게요
049화. 거울 앞에서 상 줄게요거울을 먼저 들여보냈다.사람 키만 한 전신 거울.나무 틀도, 장식도 없는 맨 거울.창문 없는 회색 방 한가운데 세우자 방이 통째로 비쳤다.벽, 세면대, 욕조, 그리고 잠긴 도구함까지.그다음 시계.거울 옆 탁자 위에 올렸다.초침이 도는 게 보이는 시계였다.오델린은 방 구석에 서 있었다.내가 부르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았다.어제부터 몸에 밴 규칙이었다.아니, 벌써 며칠째인지도 모르겠다.물어보고, 허락받고, 움직이는 것.그게 몸에 배었다."나와."발목의 쇠가 바닥을 스쳤다.찰랑."거울 앞에 서."오델린이 거울 앞에 섰다.회색 형벌복.목에는 검은 형벌환.머리는 자개 핀 하나로 낮게 묶여 있었다.무릎 벌을 하고, 고해를 하고, 그래도 그녀는 자세를 놓지 않았다."옷 벗어."손이 형벌복 끈으로 갔다.그리고 멈췄다."전부입니까.""전부."형벌복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속옷까지 벗어 발밑에 내려놓았다.나는 그 옷들을 발로 한쪽에 밀어 두고, 오델린을 거울 앞에 정확히 세웠다."다리 벌려. 발 하나만큼."발목의 연결쇠가 허락하는 만큼 벌렸다."손."오델린이 두 손을 머리 뒤로 올렸다.나는 손목의 구속구를 서로 맞물렸다.쇠가 쇠를 끼우는 소리.찰칵.팔을 내리려 하면 팔꿈치가 머리 옆에서 걸렸다.완전히 내릴 수 없는 각도였다.거울 속에 오델린이 섰다.팔은 머리 뒤로 묶이고, 다리는 벌어지고, 가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제모된 보지가 거울 빛에 번들거렸다.이후 내 손이 매일 닦아 낸 몸이었다.회색 눈이 거울 속의 자신과 마주쳤다.나는 그 옆에 섰다.거울 속에서 우리 둘이 나란히 비쳤다."오늘 게임이야.""게임.""십오 분. 그 시간 동안 안 가면 네가 이겨.""이기면요.""오늘 밤 침대에서 자."오델린의 눈이 바닥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나흘째 자고 있는 바닥.차갑고 단단한 돌."지면?""아침까지 내가 이 방에 있어."오델린은 잠깐 생각했
Last Updated: 2026-09-12
벌거 벗은 황태자님

벌거 벗은 황태자님

황태자의 저주를 풀려다, 그와 키스해야만 안정되는 계약에 묶였다. 문제는 그에게 걸린 것이 저주가 아니라 계약이었다는 것. 계약을 우회하기 위해 새로운 술식을 만든 순간, 한 문장이 잘못 해석됐다. “해방되고 싶다.” 그 결과 황태자는 저주뿐 아니라 옷이라는 구속에서도 해방되기 시작했고, 나는 그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질 수 없게 됐다. 더 큰 문제는 계약을 안정시키는 가장 빠른 방법이— 그와 입을 맞추는 것. 그리고 아무도 내가 황태자의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선 안 된다. 그래서 왕립 마도학회의 고위 마법사였던 나는 하루아침에 그의 전속 시녀가 되었다. 누군가 문을 열면 그의 뒤에 숨고, 정체를 들킬 것 같으면 품 안으로 파고들고, 계약이 폭주하면 다시 입을 맞춘다. 처음에는 전부 계약 때문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해졌다. 계약이 멀쩡한데도, 그는 내 손을 늦게 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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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43. 엘로이즈 드 라베른
043. 엘로이즈 드 라베른다음 날 아침, 별궁에 꽃이 들어왔다.흰 장미와 옅은 금빛 리본.황실에서 허락한 사람만 쓸 수 있는 색이었다.“누가 보낸 겁니까?”내가 카드에 손을 뻗자 에드윈이 먼저 이름을 읽었다.“라베른 공작 영애입니다.”레오니스가 보고서에서 눈을 들었다.“엘로이즈가?”이름을 부르는 게 자연스러웠다.나는 어제 일을 떠올렸다.오래 알면 이름을 편하게 부를 수 있다.아무 문제도 없는 일이었다.“오늘 오후에 방문하겠답니다. 황후 폐하께서도 허락하셨습니다.”에드윈은 마지막 문장을 조금 무겁게 말했다.허락이라기보다 지시일 가능성이 컸다.라베른 공작가는 황후의 친정과 가까웠다. 그리고 엘로이즈 드 라베른은 오래전부터 황태자비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렸다.“거절하시겠습니까?”“거절할 이유가 없다.”레오니스는 다시 보고서를 봤다.나도 꽃을 옮겼다.이유가 없는 일은 하면 된다.이유가 너무 많은 일보다 간단했다.오후 세 시, 엘로이즈는 약속 시간보다 한 치도 빠르거나 늦지 않게 도착했다.밝은 금발은 햇빛을 받은 비단처럼 정돈돼 있었고, 연청색 드레스는 화려하면서도 과하지 않았다.걸음은 가벼웠고 미소는 정확했다.나와는 모든 게 반대였다.“오랜만이에요, 레오니스.”전하도, 저하도 아니었다.레오니스는 놀라지 않았다.“귀국했다는 말은 들었다.”“그런데 먼저 보러 오지는 않았죠.”“바빴다.”“여전하네요.”엘로이즈가 웃었다.레오니스는 웃지 않았지만 불편해 보이지도 않았다.둘 사이에는 설명할 필요 없는 시간이 있었다.나는 차를 내려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엘로이즈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새 시녀인가요?”“전속 시녀다.”레오니스가 바로 대답했다.어제 학회에서 했던 말과 같았다.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다른 의미로 들렸다.“이름은요?”“비비라고 합니다.”내가 예를 갖추자 엘로이즈가 고개를 기울였다.“예쁜 이름이네요. 전속 시녀를 두지 않던 사람이 마음을 바꾸게 할 만큼 유능한가 봐요.”“필요해서 두
Last Updated: 2026-09-16
Chapter: 042. 필요의 뜻
042. 필요의 뜻필요하다.그 한마디 뒤로 마차 안이 이상하게 조용해졌다.나는 먼저 계약을 확인했다.문양 없음.거리 안정.의복 고정 정상.당장 처리해야 할 위급 상황도 없었다.“무슨 일에 필요하십니까?”레오니스의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다.그제야 그도 답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별궁에 도착하면 말하지.”“지금 말씀하기 어려운 일입니까?”“그대는 질문이 많군.”“정확한 업무를 알아야 준비합니다.”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조용히 있을 준비를 해.”말이 되지 않았다.그러나 나는 더 묻지 않았다. 황태자가 일을 만들겠다면 별궁에 도착할 때까지는 기다릴 수 있었다.문제는 내가 이상하게 안도했다는 점이었다.데미안과 남아 자료를 보는 편이 연구에는 훨씬 유리했다.그런데 필요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돌아오는 길이 싫지 않았다.나는 그 감각을 피로 항목에 넣었다.별궁에 도착하자 에드윈이 현관에서 우리를 맞았다.“예정보다 두 시간 일찍 오셨군요.”“일정이 끝났다.”“학회 쪽에서는 방금 추가 자료 반출 승인서를 보냈는데요.”나는 레오니스를 봤다.그는 외투를 벗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내일 보면 된다.”에드윈이 서류를 넘겼다.“그보다 전하, 오늘 남은 일정은 없습니다.”역시 없었다.나는 손을 내밀어 레오니스의 외투를 받았다.시녀의 일이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그런데 외투를 놓는 순간 그가 말했다.“차.”“지금 준비하겠습니다.”“서재로.”그게 업무의 전부였다.나는 차를 끓이고, 온도를 맞추고, 서재 탁자에 내려놓았다.레오니스는 보고서를 읽었다.십 분이 지났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전하.”“듣고 있다.”“저를 부르신 이유가 차입니까?”그가 펜을 내려놓았다.“전속 시녀에게 차를 부탁하는 게 이상한가?”“학회 연구를 중단시킬 만큼 급한 일은 아닙니다.”“그 남자가 아니어도 자료는 볼 수 있어.”“데미안은 금고 출입 권한이 있습니다.”“이름을 편하게 부르는군.”나는 멈췄다.그
Last Updated: 2026-09-16
Chapter: 042. 필요의 뜻
042. 필요의 뜻필요하다.그 한마디 뒤로 마차 안이 이상하게 조용해졌다.나는 먼저 계약을 확인했다.문양 없음.거리 안정.의복 고정 정상.당장 처리해야 할 위급 상황도 없었다.“무슨 일에 필요하십니까?”레오니스의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다.그제야 그도 답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별궁에 도착하면 말하지.”“지금 말씀하기 어려운 일입니까?”“그대는 질문이 많군.”“정확한 업무를 알아야 준비합니다.”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조용히 있을 준비를 해.”말이 되지 않았다.그러나 나는 더 묻지 않았다. 황태자가 일을 만들겠다면 별궁에 도착할 때까지는 기다릴 수 있었다.문제는 내가 이상하게 안도했다는 점이었다.데미안과 남아 자료를 보는 편이 연구에는 훨씬 유리했다.그런데 필요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돌아오는 길이 싫지 않았다.나는 그 감각을 피로 항목에 넣었다.별궁에 도착하자 에드윈이 현관에서 우리를 맞았다.“예정보다 두 시간 일찍 오셨군요.”“일정이 끝났다.”“학회 쪽에서는 방금 추가 자료 반출 승인서를 보냈는데요.”나는 레오니스를 봤다.그는 외투를 벗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내일 보면 된다.”에드윈이 서류를 넘겼다.“그보다 전하, 오늘 남은 일정은 없습니다.”역시 없었다.나는 손을 내밀어 레오니스의 외투를 받았다.시녀의 일이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그런데 외투를 놓는 순간 그가 말했다.“차.”“지금 준비하겠습니다.”“서재로.”그게 업무의 전부였다.나는 차를 끓이고, 온도를 맞추고, 서재 탁자에 내려놓았다.레오니스는 보고서를 읽었다.십 분이 지났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전하.”“듣고 있다.”“저를 부르신 이유가 차입니까?”그가 펜을 내려놓았다.“전속 시녀에게 차를 부탁하는 게 이상한가?”“학회 연구를 중단시킬 만큼 급한 일은 아닙니다.”“그 남자가 아니어도 자료는 볼 수 있어.”“데미안은 금고 출입 권한이 있습니다.”“이름을 편하게 부르는군.”나는 멈췄다.그
Last Updated: 2026-09-15
Chapter: 041. 비비는 내 전속 시녀입니다
041. 비비는 내 전속 시녀입니다데미안은 회의가 끝났는데도 돌아가지 않았다.정확히는 내 옆에서 책을 세 권째 펼치고 있었다.“이 문장도 보세요. 계승 계약에서 수락은 한 번인데, 유지 의사는 반복해서 확인합니다.”“주기가 적혀 있어요?”“월식마다.”나는 주석을 빠르게 베꼈다.데미안이 종이 한쪽을 눌러 줬다. 오래 함께 일할 때 하던 버릇이었다.“글씨는 여전하네요.”“알아볼 수 있으면 됩니다.”“본인만 알아보잖아요.”“그러니까 제 기록이죠.”그가 웃었다.맞은편에서는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레오니스는 조금 전부터 같은 페이지를 보고 있었다.나는 책의 제목을 확인했다. 짧은 판례문 세 개가 전부인 페이지였다.그가 읽는 속도로는 이미 열 번도 넘게 넘겼어야 했다.“전하, 필요한 부분을 찾지 못하셨습니까?”“찾는 중이다.”“어떤 단어를 찾으시는지 말씀해 주시면—”“비비.”학회에서 들을 이름이 아니었다.주변 연구자들의 펜이 잠깐 멎었다.나는 레오니스를 똑바로 봤다.그도 실수를 깨달은 듯했지만 말을 고치지는 않았다.“잠깐 와.”데미안이 나와 레오니스를 번갈아 봤다.“비비?”“황궁에서 쓰는 가명입니다.”“가명까지 필요할 정도로 위험한 일입니까?”“그래서 국가 기밀이라고 했잖아요.”나는 펼쳐 둔 자료를 정리했다.데미안이 종이를 놓지 않았다.“저녁까지 계실 거면 금고 자료도 꺼내 드리죠. 아르델 경 혼자서는 반출 허가가 안 날 겁니다.”맞는 말이었다.지금 끊기에는 아까운 실마리도 있었다.“그럼 부탁할게요.”“안 된다.”대답은 레오니스에게서 나왔다.데미안의 눈썹이 올라갔다.레오니스는 그제야 책을 덮었다.“오늘 자문은 여기까지다. 아르델 경은 황궁으로 돌아간다.”“전하, 아직 예정 시간이 남았습니다.”“별궁에서 처리할 업무가 있다.”처음 듣는 업무였다.나는 그를 살폈다. 문양은 보이지 않았고 옷도 멀쩡했다. 거리 제한이 흔들릴 만큼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데미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급한 일
Last Updated: 2026-09-15
Chapter: 040. 그 남자는 왜 웃게 합니까
040. 그 남자는 왜 웃게 합니까“비비안.”그 이름을 학회에서 듣는 건 자연스러웠다.문제는 부른 사람이 너무 자연스럽게 가까이 왔다는 점이었다.데미안 로셰르.왕립 마도학회 계약술 연구원.몇 번 같이 검증 작업을 했고, 한 번은 내 의뢰인이기도 했다.그는 회의실 문에 기대 서서 웃고 있었다.“황궁에 잡혀갔다는 소문이 맞았네요.”나는 펜을 던질 뻔했다.“잡혀간 게 아닙니다.”“그럼 왜 한 달 가까이 학회에 얼굴도 안 비쳤습니까?”“국가 기밀입니다.”“그 말이 더 잡혀간 것 같은데.”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데미안은 예전부터 말을 저렇게 했다.진지한 얼굴로 쓸데없는 결론을 내리고, 내가 반박하면 더 즐거워했다.“로셰르 경.”에드윈이 먼저 황태자를 소개하려 했다.데미안이 뒤늦게 레오니스를 보고 자세를 바로 했다.“전하. 결례했습니다.”“괜찮다.”레오니스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그런데 나는 알았다.조금 더 짧았다.데미안은 내 옆에 쌓인 자료를 봤다.“계승 계약 문법?”“비슷한 겁니다.”“‘선택’ 때문에 왔죠?”손이 멈췄다.“어떻게 알아요?”“아르델 경이 이런 낡은 판본까지 뒤질 때는 보통 단어 하나가 마음에 안 들 때니까.”그가 책 한 권을 꺼냈다.“이거 봤습니까?”내가 찾던 문법 주석서였다.“어디 있었어요?”“내가 빌려갔죠.”“반납일 지났잖아요.”“그래서 직접 가져왔습니다.”“연체료 내세요.”“연구자끼리 너무하네.”“규정입니다.”데미안이 웃었다.나도 따라 웃었다.책을 받으려 손을 뻗는 순간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그 책이 꼭 필요한가?”레오니스였다.나는 그를 봤다.“네. 지금까지 찾은 것 중 가장 정확합니다.”“그렇군.”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데미안이 책을 내게 건넸다.손가락이 잠깐 닿았다.아무 일도 없었다.계약도 반응하지 않았다.당연했다.그런데 레오니스의 시선이 그 짧은 접촉에 머문 걸 봤다.“전하?”“왜.”“문양이 불편하십니까?”“아니다.”“그
Last Updated: 2026-09-12
Chapter: 039. 비비안의 세계
039. 비비안의 세계왕립 마도학회에 들어서는 순간 걸음부터 달라졌다.시녀 비비처럼 반걸음 뒤에 설 필요가 없었다.고개를 숙일 이유도 없었다.회색 시녀복 대신 짙은 남색 로브를 입고, 머리도 평소처럼 높게 묶었다.가슴에는 정회원 표식.비비안 아르델.내 이름이 제대로 적혀 있었다.레오니스는 정식 자문을 받는 황태자 자격으로 함께 왔다.에드윈이 외부에 공개할 명목도 만들었다.황실 고대결계 문법 검토.실제 목적과 아주 멀지는 않았다.학회 문이 열리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잉크.마석 가루.오래된 종이.그리고 누군가 태운 실험약 냄새.문지기가 내 정회원 표식을 보자 별다른 확인도 없이 문을 열어줬다.“오랜만입니다, 아르델 경.”“삼 주밖에 안 됐습니다.”“여기서는 사흘만 안 보여도 실종입니다.”그 말에 옆의 레오니스가 나를 봤다.나는 못 본 척 걸음을 옮겼다.별궁에서는 내가 사라지면 계약이 흔들렸다.여기서는 사흘만 안 보여도 동료들이 찾는다.같은 ‘필요’인데 느낌이 전혀 달랐다.“아르델 경!”복도 끝에서 한 연구자가 달려왔다.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실험실 또 태웠어요?”“이번에는 제 방 아닙니다.”“그 말은 누군가의 방은 태웠다는 뜻이네요.”주변에서 웃음이 났다.나도 웃었다.아주 자연스럽게.그제야 레오니스가 옆에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개를 돌리자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호박색 눈이 평소보다 오래 머물렀다.“왜 그러십니까?”“아니.”대답이 짧았다.나는 더 묻지 않았다.학회 안쪽 회의실에는 고대 계약어 자료가 준비돼 있었다.내가 요청한 건 ‘선택’과 ‘계승’을 함께 쓰는 옛 문장 사례였다.황실 계약이라고 밝히지 않았다.그럴 필요도 없었다.연구원들은 문법만 보면 된다.나는 로브 소매를 걷고 바로 책을 펼쳤다.“이 판본은 틀렸어요.”맞은편 연구원이 당황했다.“첫 장도 안 보셨는데요.”“서문 연도가 안 맞습니다.”책을 뒤집어 판권 기록을 보여줬다.“후대 필
Last Updated: 2026-09-12
내가 구속한 아빠 절친이 나한테 집착한다

내가 구속한 아빠 절친이 나한테 집착한다

“너 지금 뭐 해?” “네 아빠 구속 중.” 내 절친의 아버지를 내 손으로 잡아갔다. 문제는 그 남자가, 우리 아빠의 30년 절친이기도 하다는 것. 잘생겼고, 다정하고, 사람을 지나치게 잘 믿어서 자기 회사에서 벌어진 횡령조차 뒤늦게 알아버린 남자. 나는 검사로서 그의 무죄를 확인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가 피의자가 아니라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선을 먼저 넘은 건 나였다. “어젯밤은 실수였어요.” 그러자 늘 내 선택을 존중하던 남자가 처음으로 고집을 부렸다. “거리를 두라고 하면 두겠습니다.” “…….” “그런데 없던 일이라고는 하지 마.” 절친은 아직 모른다. 자기 아빠가 사랑에 빠졌다는 걸. 그 상대가, 나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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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0화. 조수석에 내 자리가 저장됐다
30화. 조수석에 내 자리가 저장됐다태성이 먼저 내 손을 놓았다.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너무 자연스러운 판단이라 바로 이해했다.나는 몸을 좌석 안쪽으로 조금 낮췄다.밖의 남자는 차 번호판과 운전석 쪽을 번갈아 봤다.“알아본 것 같아요.”“그런 것 같습니다.”태성은 급하게 출발하지 않았다.오히려 평소처럼 시동을 걸고 안전벨트를 맸다.“고개 숙이고 있을 필요 없습니다.”“사진 찍히면요.”“내 사진이면 상관없습니다.”“내가 같이 찍히면.”그제야 태성이 나를 봤다.“그건 확인해야겠죠.”차가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남자는 끝까지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지만 플래시도 없었고 가까이 오지도 않았다.우리는 두 블록쯤 지나서야 말을 했다.나는 휴대전화로 바로 검색하지 않았다.사진이 올라왔는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은 강했다.하지만 아직 올라오지도 않은 사진을 찾겠다고 밤새 새로고침하는 건 내 방식이 아니었다.“혹시 기사나 커뮤니티에 올라오면 회사에서 먼저 알겠죠?”“아마도.”“내 얼굴이 찍혔으면 말해줘요.”“바로.”“지우라고 압력 넣지는 말고.”태성이 고개를 돌렸다.“내가 그렇게 할 사람으로 보입니까?”“아니니까 미리 말하는 거예요.”“알겠습니다.”짧은 약속이었다.내 직업도 그의 위치도 서로에게 무기가 되지 않게 하는 것.그게 우리가 밖에서 손을 못 잡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첫 데이트치고 화려하네요.”“미안합니다.”“왜 당신이 미안해요.”“내 얼굴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그럼 앞으로 얼굴 바꿀 거예요?”태성이 웃었다.“그건 어렵겠군요.”“그럼 미안해하지 마요.”나는 창밖을 봤다.조금 전 손을 먼저 놓은 것도 이해했다.그런데 이해하는 것과 서운하지 않은 건 달랐다.“다음에는 내가 먼저 놓을게요.”“왜요.”“매번 당신이 나 숨기는 사람 되는 거 싫어서.”태성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지안아.”“알아요. 숨겨야 하는 거.”“당신을 부끄러워서 숨기는 건 아닙니다.”“그것도 알아요.”나는 고개
Last Updated: 2026-09-16
Chapter: 29화. 밖에서는 손도 못 잡았다
29화. 밖에서는 손도 못 잡았다태성의 답은 짧았다.〈나도.〉그 뒤에 장소 하나가 왔다.밤 열 시까지 하는 대형 서점.나는 화면을 한참 봤다.첫 데이트라는 말을 서로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그런데 나는 옷을 두 번 갈아입었다.정장을 입으면 퇴근길 같았고, 너무 편하게 입으면 괜히 신경 쓴 티가 날 것 같았다.결국 평소보다 조금 부드러운 니트와 긴 코트를 골랐다.거울 앞에서 한참 서 있다가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피의자를 만날 때는 삼 분이면 준비했다.애인을 만나러 가는 데는 옷 하나가 이렇게 어려웠다.태성에게 사진을 보내 물어볼까 하다가 관뒀다.그건 너무 연애 같았다.이미 연애 중인데도.〈회장님 데이트 장소가 서점이에요?〉〈사람 많은 식당보다 덜 눈에 띕니다.〉반박할 수 없었다.한 시간 뒤 우리는 서점 서로 다른 입구로 들어갔다.***데이트라고 해놓고 처음 십 분은 서로 세 걸음쯤 떨어져 걸었다.태성은 코트를 입고 안경까지 썼지만 알아볼 사람은 알아볼 얼굴이었다.나도 검찰청 출입 기자나 사건 관계자를 마주칠 가능성이 있었다.집에서는 입을 맞추던 사이가 밖에서는 인사도 조심해야 했다.태성이 먼저 나를 봐도 내가 지나치면 모르는 사람처럼 시선을 거둬야 했다.반대로 내가 뒤에서 따라가도 그는 기다려주지 않았다.누군가 사진 한 장만 찍어도 설명이 길어질 관계였다.그 현실을 알고 시작했는데 막상 데이트라는 이름을 붙이자 훨씬 불편했다.연애를 숨기는 건 한 문장으로 쉬웠다.좋아하는 사람 옆에서 남처럼 걷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이게 데이트 맞아요?”내가 작은 목소리로 묻자 태성이 책등을 보는 척하며 대답했다.“당신이 서점이 싫으면 다른 데로 갑시다.”“서점이 싫은 게 아니라.”말을 멈췄다.뭐가 서운한지 말하기가 더 민망했다.태성은 한동안 재촉하지 않았다.나는 신간 코너에서 책 한 권을 뽑았다.그 순간 반대편에서 같은 책을 잡던 그의 손과 내 손가락이 닿았다.둘 다 바로 떨어졌다.너무 자연스러운
Last Updated: 2026-09-16
Chapter: 28화. 우리 뭐예요?
28화. 우리 뭐예요?거울 속 내 얼굴이 낯설었다.화장도 안 했고 머리도 엉망이었다.그런데 웃고 있었다.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렸다.“미쳤나.”욕실 밖에서 태성 목소리가 들렸다.“뭐가요?”“아무것도 아니에요.”“혼잣말까지 보고해야 합니까.”“검사가 혼잣말 좀 할 수도 있죠.”“여긴 검찰청 아닙니다.”그 말이 이상하게 좋았다.여긴 검찰청이 아니었다.나는 서 검사도 아니었다.태성도 윤 회장이 아니었다.그런데 정확히 뭐냐고 물으면 여전히 대답할 수 없었다.***아침은 간단했다.토스트.계란.커피 대신 따뜻한 보리차.“왜 커피 안 줘요.”“어제 속 쓰리다며.”“내가 언제.”“국 먹기 전에.”“그것도 기억해요?”태성은 대답 대신 보리차를 내 앞에 놓았다.나는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사람 잘 기억하는 게 장점인지 집착인지 모르겠네.”“둘 다일 수도 있고.”고개가 들렸다.태성은 아주 태연하게 토스트를 잘랐다.“방금 뭐라고 했어요?”“사람을 잘 기억한다고.”“그 뒤에.”“못 들었으면 됐습니다.”“태성 씨.”그가 웃었다.요즘 이 사람은 나를 놀리는 법도 배우고 있었다.나는 토스트를 한입 먹었다.몇 분쯤 평범하게 식사를 했다.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내가 먼저 불안해졌다.두 번째 밤.두 번째 아침.보리차.칫솔.출근시간 계산.이 정도면 이름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그런데 이름을 붙이는 순간 모든 게 더 실제가 된다.윤서하.서재명.사건.나는 컵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태성이 먼저 물었다.“무슨 생각 합니까.”“우리.”말이 먼저 나왔다.태성의 손이 멈췄다.나는 바로 후회했다.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우리 뭐예요?”입 밖으로 나왔다.태성은 당황하지 않았다.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던 질문처럼 보였다.“뭐라고 생각합니까.”“왜 또 나한테 물어요.”
Last Updated: 2026-09-15
Chapter: 27화. 두 번째 아침
27화. 두 번째 아침내가 멈추면 같이 멈췄고, 내가 가까워지면 먼저 당겼다.한 번은 내가 숨을 정리하려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태성이 내 등을 쓰다듬었다.“괜찮습니까.”“이 상황에서 존댓말이에요?”내가 묻자 낮은 웃음이 들렸다.“습관이라.”“아까는 왜라고 했잖아요.”“그건 정신이 없어서.”나는 고개를 들었다.“그럼 계속 정신없게 해줄까요.”말을 하고 내가 먼저 웃었다.태성은 웃지 않았다.대신 내 뺨을 감싸 쥐었다.“그런 말 하지 마.”목소리가 낮았다.“왜요.”“진짜 그러고 싶어지니까.”평소의 윤태성이 아니었다.그게 좋았다.나는 그의 손바닥에 뺨을 조금 더 기댔다.“하면 되잖아요.”이번에는 그가 눈을 감았다.마치 참는 게 더 힘들어진 사람처럼.***눈을 떴을 때 방 안이 아직 어두웠다.커튼 사이로 새벽빛이 아주 조금 들어왔다.옆에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태성은 잠들어 있었다.나는 한동안 옆얼굴을 봤다.자는 얼굴은 생각보다 어려 보였다.평소에는 눈가의 잔주름이나 단단한 표정 때문에 나이가 느껴졌는데 지금은 아니었다.문득 손을 뻗어 보고 싶었다.그러다가 멈췄다.이상했다.첫날 내 집에서는 아침이 오는 게 무서웠다.지금은 조금 더 오래 밤이었으면 했다.태성이 눈을 떴다.“왜 안 잡니까.”목소리가 잠겨 있었다.“깼어요?”“보고 있으면 깨죠.”“사람이 눈 감고 있는데 어떻게 알아.”“느낌이 있습니다.”“회장님 감각 되게 예민하네.”태성이 팔을 뻗어 나를 가까이 끌었다.아주 자연스럽게.나는 그 품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생각했다.아침까지 남아 있었다.두 번째.태성이 내 머리 위에 턱을 가볍게 얹었다.“더 자요.”“몇 시예요.”“여섯 시 조금 넘었습니다.”“출근해야 되는데.”“한 시간은 더 자도 됩니다.”“여기서 검찰청까지 길 막히면.”“데려다
Last Updated: 2026-09-15
Chapter: 26화. 아빠가 그 만년필을 알아봤다
26화. 아빠가 그 만년필을 알아봤다아빠가 오기 전까지 만년필을 세 번 옮겼다.처음에는 서랍 안.그다음에는 내 가방.마지막에는 현관 수납장 위.태성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눈에 보이는 곳에 뒀다가, 아빠가 온다는 걸 떠올리고 다시 숨겼다.내가 하는 짓이 우스웠다.증거물도 아닌데 증거를 은닉하는 기분이었다.결국 가방 안쪽 지퍼에 넣었다.그 정도면 잊어버릴 수 있을 줄 알았다.저녁 일곱 시 조금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문 열려 있어.”아빠는 양손에 과일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혼자 사는 애한테 너무 큰 거 아니야?”“회사에서 들어온 거다. 네가 좀 먹어.”“그럼 반만 두고 가.”“반을 어떻게 두고 가냐.”평범한 대화였다.아빠는 내가 어릴 때부터 집에 오면 꼭 창문부터 봤다.환기했는지, 잠금장치는 멀쩡한지.예전에는 그게 잔소리였는데 오늘은 그 익숙한 동작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다.혹시 태성이 남긴 흔적을 먼저 찾을까 봐.정작 태성이 이 집에 남겨둔 건 거의 없었다.그런데 사람은 물건보다 행동을 더 잘 숨기지 못했다.아빠가 “요즘 좀 덜 피곤해 보이네”라고 말했을 때 나는 괜히 물병 뚜껑을 오래 돌렸다.“잠 좀 자서 그래.”“검사가 잠을 잔다고?”“가끔은 자.”아빠는 별 뜻 없이 웃었다.나는 그 웃음에도 뜨끔했다.그게 더 긴장됐다.아빠는 내 얼굴을 한번 보고 집 안을 둘러봤다.“요즘 늦게 다닌다며.”“사건 하는 검사가 원래 그렇지.”“그 회장 사건은 빠졌다며.”나는 물병을 꺼내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응. 이해관계 생겨서.”“잘했다.”아빠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를 가만히 봤다.“그런데 사건에서 빠진 뒤로 오히려 더 답답해 보이는데.”“뭐가.”“일 못 해서 속 막힌 사람처럼 보여.”정확히 절반만 맞았다.사건에서 빠진 건 답답했다.나머지 절반은 그 사건 한가운데 있던 남자와 연애를 시작해서 생긴 변화였다.“다른 사건 많아.”“알아서 하겠지. 넌 어릴 때부터 남이 못 만지게 하면
Last Updated: 2026-09-13
Chapter: 25화. 두 번이면 우리 사귀는 거예요?
25화. 두 번이면 우리 사귀는 거예요?태성은 딸에게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와. 대신 아빠가 잠깐 나갔다 들어갈 거야.”- 어디 가는데?“사람 데려다주고.”나는 괜히 숨을 멈췄다.서하가 누구냐고 묻기 전에 태성이 말을 이었다.“삼십 분이면 돼.”- 알았어. 그럼 나 먼저 들어가 있을게.통화가 끝났다.태성은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지 않았다.그게 오히려 좋았다.서하는 그의 딸이었다.나 때문에 밀어낼 사람이 아니어야 했다.“가요.”내가 먼저 차 문을 열었다.“서하 오기 전에.”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어젯밤 얘기를 하지 않았다.대신 다음 주 내 공판 일정도, 회사 일도 아닌 쓸데없는 얘기를 했다.신호가 너무 길다는 말.새로 생긴 건물이 생각보다 못생겼다는 말.그게 연애 같아서 더 이상했다.차에서 내리기 직전 태성이 내 손등을 한번 눌렀다.지하주차장이라 사람이 없었지만 오래 잡고 있지는 않았다.“오늘 연락해도 됩니까.”“어제 규칙도 없었는데 왜 허락부터 받아요.”“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너무 자주 들어서.”나는 문을 열다가 멈췄다.“그건 취소할게요.”“어떤 부분을.”“연락하지 말라는 거.”태성의 표정이 아주 조금 밝아졌다.“대신 내가 일할 때 답 없다고 서운해하지 말고.”“그 정도는 압니다.”“아는 사람이 연락하지 말랬다고 다른 방법까지 찾아요?”말해 놓고 내가 먼저 웃었다.태성도 따라 웃었다.“앞으로는 다른 방법을 찾겠습니다.”그 대답이 이상하게 기대됐다.***밤 열한 시가 넘어 태성에게 전화했다.이번에는 이유를 만들지 않았다.“서하 갔어요?”- 방금 갔습니다.“뭐 했어요?”- 딸이 와서 아버지가 뭘 하겠습니까. 얘기하고, 같이 텔레비전 보고.“재밌었어요?”- 꽤.그 대답에 마음이 놓였다.나는 침대에 기대앉아 무릎을 세웠다.“태성 씨.”- 듣고 있어요.“우리 지금 뭐예요?”말해 놓고 천장을 봤다.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걸 묻는 기분이었다
Last Updated: 2026-09-13
나를 괴롭히던 놈과 같이 살게 됐다

나를 괴롭히던 놈과 같이 살게 됐다

학창 시절 나를 괴롭히던 놈을 몇 년 만에 다시 만났다. 그런데 그 유명했던 일진 서이안이 긴 머리에 검은 옷을 입고 성당에서 수녀처럼 살고 있었다. 학교는 그놈을 벌줬지만, 내가 잃은 건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직접 받아내려고 했다. 복수하려고 다정하게 접근했다. 나를 믿게 만들고, 내게 익숙해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서이안은 정말 내게 익숙해졌다. 먼저 연락하고, 내 앞에서 잠들고, 결국 내 집까지 들어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내가 원했던 게 복수인지, 이놈이 떠나지 않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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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53화. 돌아온 건 나야
053화. 돌아온 건 나야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나서야 내가 진짜 나왔다는 걸 실감했다.건물 밖은 생각보다 조용했다.시간이 늦어서인지 큰길 쪽으로 나가도 문을 연 가게가 많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에는 새벽 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 떠 있었다.한태겸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그게 당연했다.내가 나가겠다고 했고, 걔는 문을 열어줬다.나가고 싶으면 나가.직접 그렇게 말했으니 이제 와서 연락이 오는 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그런데도 화면을 한 번 더 켰다.아무것도 없었다.“재수 없어.”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도 모르고 중얼거렸다.택시를 잡을까 하다가 걸었다.갈 곳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성당에 가면 된다.문이 닫혀 있어도 미정 이모한테 연락하면 어떻게든 들어갈 수 있을 거고, 안쪽 휴게실 소파에서 몇 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그게 싫으면 찜질방도 있었다.돈도 있었다.숙박업소를 잡아도 됐다.그러니까 갈 데가 없어서 한태겸 집에 있었던 건 아니었다.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인지 나는 성당 쪽으로 먼저 걸었다.* * *성당 앞에 도착했을 때는 불이 거의 다 꺼져 있었다.입구 옆 작은 보안등만 켜져 있었다.나는 한동안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휴대폰을 꺼내 미정 이모 이름을 찾았다.통화 버튼만 누르면 됐다.이모는 분명 받을 것이다.무슨 일이냐고 물으면서도 일단 들어오라고 할 사람이다.그런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내가 왜 나왔는지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한태겸이랑 싸웠다고 하면 될 수도 있었다.같이 지내다가 나왔다고 하면 더 간단했다.그런데 그 다음 질문이 싫었다.다시는 안 갈 거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하지.나는 그 대답을 모르고 있었다.결국 통화 화면을 닫았다.성당 계단에 잠깐 앉았다.밤공기가 차가웠다.가방을 발 옆에 내려놓자 안에서 충전기 끝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짐이 정말 별로 없었다.옷 몇 벌이랑 세면도구, 충전기, 노트.이걸 들고 나왔는데도 집에 두고 온 게 계속 생각났다.내가 사
Last Updated: 2026-09-16
Chapter: 052화. 서이안은 돌아오지 않았다
052화. 서이안은 돌아오지 않았다태겸은 교실 앞에 서 있었다.담임이 왜 그랬냐고 물었다.태겸은 한참 입을 열지 못했다.그리고 결국 내가 시킨 대로 말했다.자기가 장난치다 그랬다고.죄송하다고.교실 뒤에서 몇 명이 웃었다.나도 웃었다.그때 태겸이 나를 한 번 봤다.그 눈을 기억하고 있었다.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척한 게 아니었다.나는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 싫었다.“그날.”태겸의 시선이 다시 내게 왔다.“네가 창문 깬 거 아니었어.”“알아.”“내가 시켰어.”말하고 나자 속이 울렁거렸다.“네가 했다고 말하라고.”태겸의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나는 그게 더 무서웠다.“왜?”질문은 짧았지만 의미는 분명했다.나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그날의 내가 왜 그랬는지는 알고 있었다.“네가 제일 쉬웠으니까.”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문제 생겨도 크게 말 안 할 것 같았고, 내가 시키면 할 것 같았고.”태겸의 턱선이 굳었다.나는 계속 말했다.멈추면 다시 못 할 것 같았다.“그리고 애들 앞에서 확인하고 싶었어.”“뭘 확인하려고 했는데.”“네가 내 말 어디까지 듣는지.”그 말까지 하고 나니 정말 토할 것 같았다.나는 웃지도 못했다.“됐냐.”태겸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숨이 막혔다.“끝까지 말하라며. 말했잖아.”“응. 들었어.”“그런 얼굴 하지 마.”“내가 어떤 얼굴인데.”“나 불쌍하게 보는 얼굴.”태겸의 미간이 아주 조금 좁아졌다.“불쌍하게 안 봐.”“그럼 뭐야.”“화나.”그 한마디가 오히려 안심됐다.차라리 그게 나았다.“그래. 화내.”“지금은 더 말하면 네가 버티기 힘들 것 같아서 안 하는 거야.”그 순간 다시 숨이 턱 막혔다.“또.”“이안아.”“나 봐주지 마.”태겸이 한 걸음 움직이다가 멈췄다.“봐주는 거 아니야.”“그럼 왜 맨날 적당한 데서 멈추는데.”“네가 무너지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나는 웃었다.정말 웃음밖에 안 나왔다.“복
Last Updated: 2026-09-16
Chapter: 051화. 나가면 되잖아
051화. 나가면 되잖아“그 얼굴. 나한테만 해.”한태겸이 그렇게 말한 뒤로 자꾸 그 문장이 생각났다.기분이 나빴으면 좋았을 텐데.차라리 어이가 없거나, 재수 없거나, 저 인간이 또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넘길 수 있었으면 편했을 것이다.그런데 싫지 않았다.그게 제일 짜증났다.나는 성당에서 돌아오는 동안 태겸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태겸도 마찬가지였다.집에 도착하니 거실 불은 켜져 있었고, 태겸은 소파 앞 낮은 테이블에 서류 몇 장을 펼쳐놓고 있었다.내가 현관문을 닫자 고개를 들었다.“왔어?”“보면 모르냐.”“오늘은 늦을 줄 알았어.”“왜 그렇게 생각했는데.”“우진 씨랑 정리할 게 더 남았다고 했잖아.”나는 신발을 벗다가 멈췄다.“또 그 얘기야?”“아니. 그냥 기억하고 있었어.”“그게 더 싫어.”태겸이 낮게 웃었다.“어제는 기억하는 것도 너한테만 하는 줄 알았다며.”“그걸 아직도 붙잡고 있냐?”“좋았으니까.”나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너 진짜 사람 열받게 하는 재주 있다.”“알아.”“그걸 자랑처럼 말하지 마.”태겸은 더 웃지 않았다.내가 소파 반대편에 앉자 펼쳐져 있던 서류를 한쪽으로 모았다.그 움직임을 보고 나서야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는 걸 알아챘다.질투 얘기를 하려는 얼굴이 아니었다.나는 등받이에 기대며 물었다.“오늘도 할 거야?”“뭘 말하는 거야.”“옛날 얘기.”태겸의 시선이 잠깐 내 얼굴에 머물렀다.“싫으면 오늘은 안 해도 돼.”그 말이 예전 같았으면 편했을 것이다.지금은 아니었다.“그렇게 먼저 빠져나갈 구멍 만들어주지 마.”“만들어주는 거 아니야.”“그럼 왜 매번 나한테 정하래.”태겸이 잠시 침묵했다.“네가 싫다고 했던 걸 무시하고 싶지 않아서.”“그러니까 그게 짜증난다고.”“왜 짜증나는지는 모르겠어.”“나도 모르니까 묻지 마.”이번에는 태겸이 더 캐묻지 않았다.그게 또 마음에 안 들었다.나는 결국 소파에서 몸을 바로 세웠다.
Last Updated: 2026-09-15
Chapter: 050화. 나한테만 해
050화. 나한테만 해이안이 잠깐 눈을 깜빡였다.“봉사 일정 때문에 가끔 하지.”“개인적으로도?”“그게 왜 궁금한데.”“궁금하니까 묻는 거야.”이안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너 진짜 어제 내 행동 그대로 따라 하네.”“나도 이제 알 것 같아서.”“뭘.”“네가 왜 강이현 신경 썼는지.”이번에는 이안이 웃지 않았다.나는 괜히 돌려 말하지 않았다.“질투하는 것 같아.”이안의 얼굴이 굳었다.“차우진한테?”“정확히는 차우진 때문이라기보다 네가 저 사람한테 편한 게 싫어.”이안은 한동안 내 얼굴을 봤다.“내가 다른 사람이랑 편하면 싫다고?”“응.”“너 지금 네가 무슨 말 하는지는 알아?”“알아.”“그러면서 어제는 나한테 강이현 때문에 질투하냐고 물었잖아.”“네가 질투하는 건 좋았으니까.”이안이 기가 막힌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진짜 재수 없네.”“그건 인정해.”“그리고 네 질투는 괜찮고 내 질투는 재미있어?”“둘 다 좋아.”이안의 표정이 잠깐 무너졌다.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게 나한테만 나오는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또 이상하게 좋아졌다.이안이 팔짱을 꼈다.“그래서 차우진 안 만나면 돼?”질문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그건 싫어.”“싫다면서 왜 만나도 된대.”“내가 싫은 거랑 네가 끊는 건 다른 문제니까.”“그러면 내가 계속 연락하고, 여기서 보고, 같이 일해도 아무 말 안 할 거야?”“그래도 그건 네가 정할 일이야.”이안의 눈빛이 미세하게 달라졌다.나는 말을 조금 천천히 이었다.“내가 싫다고 해서 네가 관계를 끊으면 그건 네 선택이 아니잖아.”짧은 정적이 생겼다.이안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내 손등에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그가 그걸 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감추지는 않았다.“너 진짜 사람 열받게 한다.”“어떤 부분이.”“이럴 때는 그냥 싫다고 우기든가, 가지 말라고 하든가 해야 되는 거 아니야?”“그렇게 해주길
Last Updated: 2026-09-15
Chapter: 049화. 나한테만 그러잖아
049화. 나한테만 그러잖아“네가 나한테 하는 거. 다.”이안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잠시 뒤 방문이 닫혔다. 잠금장치가 눌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나는 한동안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다라는 말이.그 한마디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밥을 챙기는 것, 연락을 기다리는 것, 피곤해 보인다고 먼저 알아채는 것, 싫다고 하면 멈추는 것. 아마 어젯밤의 일까지 전부 포함해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질투라고 부르면 이안은 바로 부정할 게 뻔했다.그래서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았다.다만 좋았다.복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인데, 그게 좋다는 사실이 더 문제였다.* * *다음 날 오후, 외근이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성당 근처까지 온 김에 들렀다고 생각하면 간단했다. 실제로 이안에게 미리 연락할 이유도 없었다.그런데 차에서 내린 뒤에도 어젯밤 들었던 말이 계속 생각났다.네가 나한테 하는 거. 다.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복도 끝에서 이안이 보였다.흰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접이식 상자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 앞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밝은 회색 운동복 차림에 체격이 단단했다. 상자를 받아 들면서 자연스럽게 웃었다.“이건 제가 옮길게요. 지난번에도 괜찮다고 하다가 허리 잡았잖아요.”“그때는 박스가 이상했던 거예요. 이것까진 할 수 있어요.”“그러니까 무거운 것만 달라고요.”이안이 잠깐 웃었다.“말 많네.”존댓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빠졌다.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처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그 장면을 보는 순간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았다.이안은 나한테 뭘 부탁해도 이유부터 따지는 사람이다. 싫으면 바로 싫다고 하고, 한번 밀어내면 쉽게 번복하지도 않는다.그런데 저 남자한테는 한 번 거절하고 끝이었다.“한태겸?”이안이 나를 발견했다.표정이 바로 바뀌었다.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웃음이 사라지고, 눈매가 가늘어졌다.“연락도 없이 왜 왔어.”그 말투를 듣는 순간 오히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근처 외근이 빨리
Last Updated: 2026-09-14
Chapter: 048화. 네가 나한테 하는 거, 다
048화. 네가 나한테 하는 거, 다“저희요? 오래 같이 일했으니까 편하긴 하죠.”“편한 정도?”“술도 몇 번 마시고, 힘든 일 있으면 서로 커버해주고. 그 정도.”그때 성당 출입문이 열렸다.한태겸이 들어왔다.* * *태겸은 나와 강이현을 발견하자 걸음을 잠깐 늦췄다.강이현이 먼저 손을 들었다.“늦었네.”“미안. 외근이 예상보다 길어졌어.”“네가 늦는 것도 다 보네.”강이현이 웃으며 태겸의 어깨를 한 번 쳤다.태겸도 익숙한 듯 별 반응 없이 파일을 받아 들었다.그 장면이 이상하게 눈에 박혔다.너무 자연스러워서.누가 봐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 같아서.당연한데도 기분이 나빴다.강이현이 나를 돌아보았다.“서이안 씨, 덕분에 기다리는 동안 덜 심심했습니다.”“제가 뭘 했다고요.”“태겸이 회사생활 조금 팔았죠.”태겸이 나를 봤다.“내 얘기 했어?”“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 했지.”“뭘 물어봤는데.”“별거 아니야.”강이현이 웃었다.“네가 회사에서도 사람 귀찮게 챙기냐고 묻더라.”“강이현.”이름을 부르는 태겸 목소리가 낮아졌다.“왜. 틀린 말도 아닌데.”나는 그 둘을 번갈아 봤다.태겸이 강이현한테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처음 봤다.짜증은 났지만 정말 화난 건 아닌 얼굴.편해서 가능한 반응.강이현은 시계를 확인하고 말했다.“나는 먼저 갈게. 내일 회의 때 보자.”“오늘 자료는 메일로 보내.”“알았어.”그가 다시 태겸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서이안 씨도 다음에 봬요.”“네. 조심히 가세요.”강이현이 나가자 성당 안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 같았다.태겸이 파일을 내려다보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무슨 얘기 했어?”“말했잖아. 별거 아니라고.”“이현이가 내 회사생활 팔았다며.”“네가 원래 사람 잘 챙긴다더라.”태겸이 잠깐 눈을 좁혔다.“그게 궁금했어?”“조금.”“왜 그런 게 궁금했는데.”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아침부터 계속 걸리던 게 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내가 특별
Last Updated: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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