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일생에 단 한번뿐인 치명적인 사랑. 여러 세대에 걸친 운명과 사랑, 피와 전쟁의 서사를 그린 동양풍 판타지 BL 3부작
View More“염상(炎常), 혹여… 백호족(白狐族, 흰 여우 부족) 순혈을 가까이서 본 일이 있나?”
랑하(狼河)의 말투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마치 금서(禁書)를 열어 보듯 조심스러웠다.
시선은 연못을 향하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현실을 비껴간 듯 꿈결처럼 흐릿했다.
여름 햇살이 현궁 뒤뜰의 정자를 넘어 붉은 연꽃 위로 흩어졌다.
물결에 반사된 그 빛은 되돌아와, 잔뜩 굳은 랑하의 얼굴 위를 스쳤다.
그의 등 뒤로, 묵직한 흑발이 진청색 장포의 허리춤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중원의 동쪽, 대동(大東).
이 땅에서, ‘랑하’, 그의 이름 두 글자를 모르는 이는 드물었다.
강인함과 차가움이 함께 깃든 존재감.
많은 이들이 그를 상국(上國)에서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무장이라 칭했으나, 정작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만 오늘, 그는 유난히 창백하고 허약해 보였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이, 아직 부상의 여파를 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염상이라 불린 남자는 피식 웃으며, 원형 탁자 한쪽에 자연스럽게 걸터앉았다.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와 화려한 차림새는, 화호족(火狐族, 붉은 여우 부족) 특유의 기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백호족 순혈이라면, 그 머리 허연 놈들 말이지? 그야 당연히 내 눈으로 직접 봤지! 그대들 현랑족(玄狼族, 검은 늑대 부족)이 여기서 궁이나 지키는 사이에, 변방에서 그놈들과 툭하면 부딪쳤으니 말이야.”
염상은 일부러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특히 '이영(李盈)' 놈이 나타난 날엔, 살아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정도라니까.”
랑하는 여전히 연못을 바라본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역시 위험한 자들이로군.”
염상은 그제야, 오랜 벗에게서 묘한 기색이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웃음을 거두고 랑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자네… 오늘 좀 이상한데. 왜 갑자기 그놈들한테 관심을 보이는 거지?”
“…….”
염상은 눈을 가늘게 뜨며 랑하를 주시했지만, 그는 입을 다문 채였다.
염상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 듯, 다시 말을 쏟아냈다.
“위험하다마다…! 특히 '이완(李完)', 그 반도 놈의 피를 이어받은 순혈이라는 놈들은, 사람을 홀리는 도술까지 부린다고 하니 말이야. 나도 그 이영 놈이랑 제대로 한번 붙었다가, 눈앞이 아득해지는 바람에 죽을 뻔….”
그 순간, 랑하의 긴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허공을 움켜쥐었다.
흐릿하던 눈동자는 어느새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뭐야, 자네 설마… 이번에 은어곡(銀魚谷)에서 진짜로 뭔가를 보기라도 한 거야?”
염상은 그제야 말을 멈추었다.
며칠 전, 랑하가 홀로 마주친 존재.
그의 머리카락, 눈동자, 그리고 숨결.
금방이라도 눈앞에 다시 살아날 듯, 아직까지도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간, 거친 바람이 일어 연꽃잎을 어지럽게 흔들었다.
어느새 랑하의 기억은… 조용히 그 밤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
계곡 사이에 내려앉은 해거름이 달빛에 지워지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린 나뭇잎들이 여기저기에서 거칠게 울렸다.
“대장군, 저쪽입니다!”
수하의 외침에, 랑하는 급히 몸을 틀었다.
흙탕물이 튄 군복 자락이 마구 나부끼고, 진흙은 발을 잡아끌듯 미끄러졌다.
랑하는 병사들 대여섯 명과 함께 광명군부(光明軍部)로 복귀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마침 은어곡 입구에서 수상한 그림자 몇을 발견했고, 곧장 그들의 뒤를 쫓았다.
정제된 무장.
날쌘 몸놀림.
그들은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은 채 빠르게 흩어졌지만, 랑하의 눈에는 아주 익숙한 분산술 중 하나일 뿐이었다.
“너희는 오른쪽으로 돌아가라! 나머지는 계곡을 막아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들이 흩어졌고, 랑하는 가장 기민하게 움직이던 한 인물을 쫓아가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른 자들과는 결이 달랐다.
검은 변복 차림을 했지만, 풀어헤쳐진 은빛 머리카락이 달빛에 반사되어, 어둠 속에서도 유독 또렷하게 보였다.
몸이 얼마나 가벼운지, 마치 땅을 거의 밟지 않고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은발. 순혈이다.’
그러나 백호족 순혈을 직접 본 건, 랑하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마치 한 마리 늑대처럼, 어둠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사냥감을 향했다.
랑하는 바람의 방향, 상대의 호흡과 체취, 발걸음의 속도 하나하나를 읽으며 거리를 확실하게 좁혀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비탈길 아래로 주춤거리며 내려서는 순간을 제대로 포착했다.
“서라!”
랑하는 빠르게 몸을 날려 상대를 단숨에 따라잡은 뒤, 그가 채 뒤돌아보기도 전에 다리를 걸어 그대로 넘어뜨렸다.
“어서 와 보게, 랑하. 이 염상이 자네를 위해 정성 들여 마련한 귀한 선물이 여기 있다네.” 늦은 밤, 염상은 어딘가 들뜬 표정으로 랑하의 팔을 억지로 이끌었다.그들은 현궁을 나가, 곧장 북쪽으로 말을 달려 우화산(牛化山) 중턱에 닿았다.그곳에는 염상의 안가로 쓰이는 암자와 정원이 숨겨져 있었다.언젠가 수련을 데리고 오려고 했었는데, 랑하를 먼저 데려오게 될 줄은 염상 자신도 정말 몰랐다. “이 밤에 무슨 선물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곳은 또 어디지? 우화산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도 몰랐군. 자네란 사람, 정말….” 랑하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용히 쉬고 싶을 때 소중한 벗과 함께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도록, 따로 준비해 둔 곳일세. 현궁만큼 크고 화려하진 않아도, 나름의 운치가 있지 않나?” 염상은 대나무 숲을 넘어 검붉은 벽을 가진 자그마한 별채로 랑하를 안내했다.그들을 따르던 수하들이 대숲 밖에서 조용히 발길을 멈췄다. “어떤가, 마치 신방(新房) 같지 않나?” “그래서 그 선물이란 게 대체 뭐란 말인가?” 염상의 목소리가 낮고 음험하게 깔렸다. “자네, 예전에 내게 물었지. 백호족 순혈을 가까이서 본 일이 있느냐고.”“갑자기 그 이야긴 왜…?” 랑하는 가슴 한구석이 갑자기 서늘해왔다. “은어곡 일 이후로…, 자네가 백호족에게 유난히 관심을 보이길래 말일세.이 위험한 놈을 생포하느라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나?” 염상은 바짝 얼어있는 랑하의 어깨에 손을 얹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절대로 그의 눈을 풀어주지 말게… 이유는 자네도 잘 알 테니.” 염상이 별채의 좁은 복도 끝에 난 문을 가만히 밀자, 붉은 비단 휘장이 드리워진 방이 나타났다.휘장이 걷히자, 그 안쪽에 놓인 침상 위에는…은빛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 굵고 단단한 밧줄로 양 손목과 발목이 대자로 결박된 사람이 누워 있었다.눈가엔 검은 천이 겹겹이 감겨있었고, 몸은 지쳐 혼절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랑하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왜 내가 이런 곳에….’ 의식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떠올랐다.이후는 얼굴에 묶인 천 때문에 눈꺼풀을 제대로 들어 올리지도 못한 채, 흐릿한 기억의 조각들을 붙잡으려 애썼다. 달이 떠오른 시각.또다시 그는 현궁의 동편 담을 넘었다.뒤뜰 회랑을 따라 연못 끝으로 돌다 보면, 작은 돌탑이 하나 나왔다.랑하의 옆모습을 몰래 지켜볼 수 있는, 좁고 비밀스러운 공간.그러나 그날은 몸을 숨기기도 전에 누군가가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쳤다.그다음은… 공백이었다.그리고 깨어난 순간.들리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가쁜 숨소리뿐이었다.무모했다.겁도 없이 적국의 심장부에 스스로를 내던진 자신이, 이 순간만큼은 너무 부끄러웠다.랑하는 아마도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그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가슴이 미어졌고, 눈물이 묶인 천을 타고 흘러내렸다. 은어곡에서 무사히 돌아온 그날 뒤로.세상은 이상하리만치 낯설었다.성인식을 마쳤으니, 이어서 정식 후계자 책봉일에 연화와의 혼례까지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후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이 모든 것이 다… 그날 밤의 기억 때문이었다. 은어곡의 달빛 아래에서 마주했던 한 사람.그가 도무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백호부 월지.이후는 처소 침상에 팔다리를 펴고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어둠 속에서 다시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날의 형상.검고 윤기나던 머리칼.반쯤 감겼지만, 아름다웠던 잿빛 눈동자,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힘겹게 흘러나오던… 그 숨결. 깊은 숲이 뿜어내는 향기.그건 마치 고요하고도 아득한 그리움 같아서, 이후의 마음속으로 천천히 파고들었다. “후우…후우….” 그는 사내의 호흡을 따라 하듯, 깊고 고른 숨을 내쉬어 보았다.그의 숨결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그리고 어느 순간…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이후는 은어곡에서 마주쳤던 랑하의 숨결을, 그의 체취를 도무지 잊지 못했다.자신을 짓눌렀던 손의 뜨거운 온도.가슴과
“…허.” 염상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거,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군.” 그의 두 눈동자는 섬뜩할 만큼 번쩍이고 있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은어곡에서 랑하와 마주쳤다는 바로 그놈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놈이 감히 혼자 이곳까지 숨어들어, 그를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고?’ 염상은 모든 의문이, 마치 깨진 그릇이 들어맞듯 조금씩 맞춰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그 백호족 사내가 정말로 단순히 목숨을 노리는 자객이 아니라, 랑하와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존재라면?’ 사실 염상은 오래전부터 랑하의 주변에 촘촘하게 자기 사람들을 심었다.표면적으로는 수련을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혹시라도 랑하의 빈틈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컸다.직접 매복시킨 수하들 외에도, 현궁 안팎의 보초병들 또한 매수해 두었다.그렇게 공들인 덫 안에, 사냥감이 스스로 들어온 셈이었다.염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명령을 내렸다. “당장 가서 놈을 생포해 내 앞에 끌어오너라! 꼭 살아있는 채로 데려와야 한다!” 그의 말 속에는, 들뜬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절대로, 놈의 두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말아라! 잡는 즉시, 눈을 묶어 가려야 한다!”“예! 장군!” 명을 받은 수하가 물러가자, 염상은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빛 달이 조용히 떠오르고 있었다.무언가 예상치 못한 운명 또한,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 “…흐….” 백호족 청년이 가는 숨을 겨우 토해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은빛 머리칼이 그의 뺨을 스치며 흔들렸다.그의 눈은 검은 천으로 사정없이 동여매어져 있었고, 두 팔은 벌려진 채 나무틀에 단단히 묶여있었다. “드디어 깨어난 건가…?” 염상은 단상 위에서 내려오며 키득거렸다.그의 두 갈색 눈동자는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여긴 어디냐!” 백호족은 격하게 몸을 떨며 소리쳤다. “그건 네 놈이 알 필요가 없다.” 염상이 천천히 그의 곁에 다가섰다. “
상국 태상황(太上皇)의 둘째 황자 염형(炎炯)의 장자.이름하여 염상(炎常).그는 어릴 적부터 화려한 외모와 총명함을 겸비하고 있었다.진갈색의 부드러운 곱슬머리와, 금빛이 도는 갈색 눈동자.그러나 그의 내면 어딘가에는,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는 얇은 칼날이 감춰져 있었다.권세와 재력, 미모와 언변을 겸비한 그는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았다.아마도 랑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평생 질투라는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염상과 랑하는, 어릴 적부터 광명군부 산하의 연무관에서 함께 무술을 배우며 자랐다.형제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가까운 사이.그러나 동시에… 두 사람은 연적(戀敵)이기도 했다. 랑하의 아내, 금수련.그녀는 화호족의 귀족 부락인 비취구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곳은 곧 염상의 고향이기도 했다.염상은 오랫동안 수련을 연모했다.그녀의 수정처럼 맑은 눈동자, 도도한 듯하면서도 섬세한 성정.귀족 가문의 여식다운 기품 속에서도, 그녀는 때때로 깨질 듯 연약한 눈빛을 보였다.그러나 그런 그녀의 마음속에… 이미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 장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혼담은 수련이 성인이 되자마자 빠르게 성사되었다.그녀의 아비 금예가 쌓아 올린 명예는, 랑욱 대장군의 아들 랑하와 외동딸의 혼인으로 보상받았다. 염상에게 그 모든 과정은… 고통 그 자체였다. 비취구의 대혼례 날 밤.웃음과 축배가 끊이지 않던 그날, 그는 신방 앞에서 랑하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문이 닫히고, 염상은 등을 돌려 처음으로 넋을 놓고 울었다.그는 랑하를 친구로 사랑했고, 무장으로 존경했으며, 같은 남자로서 증오했다.무표정하게 그녀를 품에 안은 그가, 견딜 수 없이 미웠다. 염상은 수련을 잊지 못했다.아니, 잊으려 애쓰지조차 못했다.현궁에 올 때마다 그는 어김없이 수련의 처소를 찾았다.그녀는 그를 맞이할 때마다 활짝 웃었고, 그렇게 웃다가도 눈물을 흘렸다.염상이 들려주던 고향 이야기, 어릴 적 그들이 함께 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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