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내가 닦아 줄게.”그런데 성규연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강아연은 이상하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예전의 냉담하던 성규연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이렇게 세심하게 굴다니 믿기 어려웠다.하지만 강아연은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필요 없어요.”“하지만 난 필요해.”그 말을 마치자마자 성규연은 강아연이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허리를 감싸 안아 올렸다.“성규연 씨!”강아연이 비명을 질렀다.“내려놔요!”“싫어.”성규연은 그대로 강아연을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욕조에는 이미 따뜻한 물이 받아져 옅은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옆에는 의자까지 놓여 있었다.성규연이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 강아연이 씻으러 오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도와주려는 속셈이었다.거기에 그럴듯한 이유까지 댔다.“혼자서는 불편하잖아. 감기라도 걸리거나 부딪혀 다치면 곤란하니까 나한테 기회를 줘. 도와주게 해 주면 안 될까?”그의 목소리는 진지했다.강아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시 거절하지도 않았다.굳이 자청해서 시중을 들겠다는데 거절할 필요가 있을까.성규연은 허락으로 받아들이고 살짝 웃으며 강아연의 앞에 다가가 가슴 쪽으로 손을 뻗었다.강아연은 속눈썹을 떨며 한 걸음 물러섰다.“옷은 제가 벗을게요.”“아연아,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마. 우리 결혼한 지 벌써 육 년이잖아.”성규연은 다정하게 어깨를 감쌌다. 그러면서도 단추를 풀어 줄 때는 강아연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알아서 고개를 돌렸다. 이어 세면대에서 집게핀을 가져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모아 올려 주었다.“사무실에서 혼자 두 시간이나 연습했어. 이 정도면 좀 나아진 것 같지 않아?”칭찬을 바라는 목소리였다.강아연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성 대표님, 참 한가하신가 봐요.”“한가하지 않아. 오늘 해외 화상회의만 두 번 했고, 중간에 새 프로젝트 준공식에도 갔어. 쉰 시간은 다 합쳐도 20분이 안 돼. 대신 회의할 때 책상 아래에서 몰래 영상을 보면서 연습했지. 외국인들은 보지도 못하고 알아듣지
심소연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서영란을 보았다.그러나 서영란은 잠시 멈칫하더니 입꼬리를 비틀었다.“그건 장담 못 해.”심소연의 눈에서 희망의 빛이 서서히 사라졌다.“하지만 네가 쟁취하려고 노력만 한다면 얻지 못할 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어.”서영란은 심소연을 일으켜 세우고 흐트러진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긴 뒤 옷깃을 매만졌다. 마치 직접 빚은 예술품을 감상하는 듯했다.“나도 전력을 다해 도와줄 거고.”“어머님...”심소연은 가슴이 뭉클했다. 서영란이 늘 자신에게 잘해 준 건 알지만 의문도 있었다.“사실 오래전부터 궁금했어요.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 주세요?”부모 없는 고아일 뿐인 자신에게 말이다.심소연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보육원에서 자랐다. 일곱 살 때 자선활동을 하러 온 서영란에게 입양된 뒤로 친딸처럼 사랑받았다.“늘 딸이 하나 있었으면 했거든.”서영란은 심소연의 어깨를 다독이며 진지하게 말했다.“그러니까 소연아, 날 실망하게 하지 마.”“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심소연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 망설이며 물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강아연이 또 임신했는데 무사히 낳기라도 하면 규연이가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요?”“그럴 일 없어.”서영란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규연이 같은 사람은 애초에 누굴 사랑할 줄 몰라. 강아연이 셋이나 넷을 낳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걱정하지 마.”심소연은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맞장구쳤다.“그럼 이제 뭘 해야 하죠?”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두 사람이 예전처럼 화해하게 둘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밤마다 같은 침대에서 자고 부부끼리만 할 수 있는 짓까지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질투에 잠도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심소연은 옆으로 내린 손을 꽉 쥐었다. 눈에 불만이 스쳤다.“천천히 해. 서두르지 말고.”서영란이 어깨를 다독이며 타일렀다.“두 사람이 임신 사실을 숨기려 한다면 우리도 당분간 모르는 척하면 돼. 아이가 태어나려면 몇 달이나 남았는데 시간이
심지어 심소연이 손댄 바지마저 다시 입기 싫다며 호텔 목욕가운만 걸친 채 나가 버렸다. 심소연은 혼자 바닥에 쓰러진 꼴로 남았다.그때는 성규연에게 남자로서 문제가 있는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신을 보고도 아무 반응이 없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자신이 유혹할 때마다 성규연은 강아연을 찾아갔던 건지도 몰랐다. 애써 차려 놓은 모든 기회를 결국 강아연에게 넘겨준 셈이었다.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사진을 찍어 거짓 상황을 꾸미고, 쇄골에 립스틱 자국을 남겨 성규연과 관계를 가진 흔적인 척하며 강아연에게 일부러 보여 주었다.얼마나 우스운 짓인가!결국 진짜 우스운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다.심소연은 질투에 미칠 것 같았다.“왜요? 규연이는 강아연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안는 거예요? 강아연은 애를 하나 낳고 또 임신했는데 왜 저는 안 돼요? 왜...”같은 질문을 거듭 중얼거리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서영란은 넋 나간 심소연을 바라보다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말했다.“그만해. 이렇게 된 이상 화가 나 죽어 봤자 소용없어!”“하지만 어머님, 너무 억울해요!”심소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서영란을 바라보았다.“어릴 때부터 규연이 곁에 있던 건 저였어요. 규연이도 한때는 저와 결혼할 생각을 했잖아요. 제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떻게 다른 여자를 택할 수 있어요?”“네가 사랑한다고?”서영란은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 바로 위선을 폭로했다.“그만 순진한 척해. 사랑한다면서 예전에 규연이가 해외 유학을 갔을 때 외로움을 못 참고 다른 남자와 놀아났잖아.”그 말에 심소연의 표정이 돌변했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다리가 풀린 그녀는 서영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어머님, 일부러 규연이를 배신한 게 아니에요!”하지만 사실은 의도적인 배신이었다.성규연의 차갑고 무심한 태도를 견디지 못해 그가 외국에 있는 동안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 욕구를 풀려고 했다.그녀도 정상적인 여자였고 해소해야 할 욕망이 있었다. 성규연의 미적지근한 태
“저, 저는 몰라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의사는 몸을 움직여 옆으로 기어갔다.서영란은 눈빛을 날카롭게 바꾸더니 하이힐을 신은 발로 의사의 발등을 세게 짓밟았다.복도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아악!”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몰려들었지만 서영란의 경호원들이 막아섰다.서영란은 바닥에서 발을 감싸 쥐고 고통스러워하는 의사를 깔보며 차갑게 경고했다.“계속 모르는 척하면 다음에는 손을 밟아 버릴 거야.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게 손이지? 손이 없어지면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어?”악마의 속삭임 같은 말에 의사는 몸서리쳤다. 구조를 청하려고 무심코 휴대전화를 찾았다.“성규연이 널 구하러 올 거라 기대해?”서영란이 가볍게 웃었다.“그럼 시험해 봐. 멀리서 규연이가 달려오는 게 빠를까, 내 발이 네 손을 짓밟는 게 빠를까?”의사는 움직임을 멈추고 손을 감쌌다.온몸이 떨렸다. 서영란의 독한 눈빛을 보니 정말로 그러고도 남을 여자였다.“말할 거야, 말 거야?”서영란이 경호원에게 손짓하려 했다.“말하겠습니다! 말씀드릴게요!”결국 의사가 굴복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사, 사모님이 임신하셨습니다.”심소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규연이는 강아연을 그렇게 싫어하는데, 둘이 어떻게 부부 관계까지...”‘성규연은 심한 결벽증이 있지 않았던가? 예전에 강아연이 함정에 빠뜨린 데다 강명우 사건까지 있었으니 강아연을 뼛속 깊이 증오할 텐데 어떻게 그런 여자와...’“규연이가 어떻게 강아연이랑 잔다고?”심소연은 중얼거리다 의사의 멱살을 붙잡고 소리쳤다.“거짓말하는 거죠?”“아, 아닙니다...”의사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전, 전에도 성 대표님이 한밤중에 제 여자 동료를 불러 진료를 부탁하셨어요. 너무, 너무 심하게 관계를 해서 가볍게 찢어진 상처까지 났다고...”심소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러니까 규연이와 강아연은 단지 부부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그것도 자주, 격렬하게 맺었다는 뜻인가?’
“유치해요.”강아연은 작게 중얼거리고 메달을 가져가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아빠, 엄마가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제대로 못 들은 성준서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제가 준 메달이 예쁘다고 하셨어요?”성규연은 몸을 굽혀 아이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네 엄마가 너 유치하대.”“네?”성준서가 어리둥절해 했다.성규연은 입꼬리만 살짝 올리고 강아연을 따라 들어갔다. 성준서도 얼른 뒤쫓았다.“아빠, 엄마! 같이 가요!”키 큰 남자와 작은 아이가 가녀린 여인의 뒤를 따르는 모습은 멀리서 보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정원에서 꽃가지를 손질하던 정원사가 그 광경을 보고 사진을 찍어 메시지를 보냈다.[대표님과 사모님이 화해하신 것 같습니다.]...경성 병원 VIP 휴게실에 앉아 있던 서영란은 그 메시지를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마침 검진을 마치고 돌아온 심소연이 물었다.“어머님, 무슨 일이세요?”조금 전 건강검진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진 것이다.“내가 전에 네 생일 파티에서 규연이한테 너랑 춤추라고 특별히 부탁했잖니. 그 기회를 제대로 잡았어?”서영란이 따져 물었다. 심소연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했고 자신이 참석하면 부담스러울까 봐 일부러 파티에도 가지 않았다. 그만큼 모든 걸 믿고 맡겼건만...심소연은 움찔하며 눈빛을 피했다. 자기만을 위해 마련된, 상류층 사교계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망쳐 버렸다는 사실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성규연은 사람들 앞에서 심소연을 버려두고 강아연을 데리고 나갔다. 그 바람에 심소연은 연회장 전체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그래서 그 소문을 막느라 갖은 애를 썼다.“어머님,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으세요?”심소연이 조심스레 되물었다.하지만 서영란의 눈에는 그 반응 자체가 실패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여 눈살을 더 깊이 찌푸렸다.“소연아, 이번에는 정말 실망이 크구나!”심소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즉시 고개를 숙였다.“죄송해요. 어머님, 잠깐 판단
‘기분을 풀어 주려고...’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마치 빈 황금홀에서 연주되는 첼로 선율 같았다.강아연은 잠시 멈칫하다 목걸이를 돌려주었다.“너무 비싸요. 받을 수 없어요.”하지만 성규연은 받지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남편이 아내에게 선물을 줄 때 가장 바라는 게 뭔지 알아? 아내가 받아 주는 거야. 그리고...”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선물 고르는 안목이 좋다고 칭찬해 주는 거.”강아연이 입꼬리를 올렸다.“안목은 모르겠고 돈을 잘 낭비하는 건 알겠네요.”‘목걸이 하나에 무려 200억이라니. 무슨 배춧값 내듯 말하는 거지?’“널 위해서라면 전 재산을 써도 아깝지 않아.”성규연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텅 빈 강아연의 목을 바라보았다.“내가 걸어 줄까?”강아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싫다거나 좋다고 하지도 않았지만 성규연은 대답을 기다리며 계속 그녀를 바라보았다. 끝내 대답하지 않으면 시선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한참 뒤 강아연은 그 집요함에 못 이겨 작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성규연 씨, 다른 여자들한테도 늘 이런 식으로 잘해 줬어요?”“몰라.”대답은 즉각적이었다.강아연의 눈에 의아한 빛이 스쳤다.성규연은 그녀의 손에서 목걸이를 가져와 몸을 숙였다. 강아연이 받아들이든 말든 가느다란 목에 팔을 둘러 조심스럽게 걸어 주었다.강하게 권하지 않는 이상 강아연은 목걸이에 손도 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예전에도 경매장에서 강아연에게 어울릴 만한 보석을 보면 사다가 보석함에 넣어 두곤 했다. 직접 착용한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한 번도 착용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지난번에는 그 보석들을 전부 팔기까지 했다.‘다른 여자에게 거액을 쓰는 건 그토록 신경 쓰면서 왜 정작 자신에게 쓴 돈에는 아무 의미도 두지 않는 걸까?’차창 밖으로 풍경이 흘러갔다. 황혼의 빛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고 마지막 햇살 한 줄기가 뒷좌석의 두 사람에게 비쳤다.그때 성규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달래 준 여자는 너 하나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