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말하다

사랑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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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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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배신으로 사랑도, 글을 쓰는 꿈도 잃어버린 도아윤. 3년 후, 런던에서 주얼리 브랜드 DW의 대표가 된 그녀 앞에 재수 없을 만큼 잘생긴 남자가 나타난다. 냉정한 기업 경영자 레이 컨덜튼. 최악의 첫인상과 달리 그는 아윤이 가장 아팠던 날, 빗속에서 손수건을 건넸던 남자였다. “그날부터 계속 기억했어. 너를.” 장난처럼 시작된 유혹, 거부할 수 없는 끌림, 그리고 점점 깊어지는 입맞춤. 하지만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레이의 과거에 숨겨진 위험도 다가온다.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던 여자와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남자. 두 사람은 상처 너머의 진짜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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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프롤로그. 가장 좋은 날이, 가장 나쁜 날이 되었다

도아윤은 그날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 될 거라고 믿었다.

오후 네 시 십칠 분. 지도교수의 연구실에서 나온 아윤은 복도 한가운데 멈춰 서서 손에 들린 원고를 내려다봤다. 두꺼운 종이 뭉치의 맨 앞장에는 익숙한 제목이 적혀 있었다. 《사랑을 찾다》. 처음으로 끝까지 써 내려간 장편소설이었다. 수십 번씩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한 문장들, 새벽마다 잠을 쫓아가며 고쳐 쓴 대사들,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도 한참 동안 컴퓨터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던 밤까지. 그 모든 시간이 이 원고 안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교수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윤아, 이건 출판사에 보내보자.”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자신이 쓴 소설을 정말 출판사에 보내도 되느냐고 몇 번이나 되물었고, 교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웃었다.

“너는 네 글을 너무 믿지 않는 게 문제야. 내가 읽어보니 이제 세상에 보여줘도 되겠다.”

그 말에 아윤은 결국 울어버렸다. 교수는 당황해 휴지를 건넸지만, 그녀는 웃으면서 눈물을 닦았다. 그렇게 오래 바라던 말을 들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구실에서 나와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은 이재율이었다.

삼 년 동안 곁에 있었던 남자. 아윤이 처음 소설을 쓰겠다고 했을 때 누구보다 크게 박수를 쳐줬고, 그녀가 글 때문에 밤을 새우면 투덜거리면서도 커피를 사다 주던 사람. 원고가 좀처럼 풀리지 않아 울상을 지을 때면 자기가 대신 악당을 혼내주겠다며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제일 먼저 알려주고 싶었다.

아윤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재율아, 나 할 말 있어.]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화면을 확인했다. 읽지 않은 표시가 그대로였다. 촬영이 있나 싶어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바쁜가 보네.”

아윤은 혼잣말을 하며 원고를 품에 안았다. 괜찮았다. 직접 찾아가면 되니까. 오늘은 조금 갑작스럽게 찾아가더라도 재율이 웃으면서 맞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

재율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거의 기울어 있었다. 복도 창문으로 들어온 붉은 햇살이 회색 벽을 비추고 있었고, 아윤은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아까 운 탓에 눈가가 조금 붉었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현관 앞에 선 그녀는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삑, 삑.

철컥.

문이 열렸다.

“재율아?”

대답이 없었다.

아윤은 익숙하게 신발을 벗으려다가 멈췄다. 현관 바닥에 낯선 구두가 놓여 있었다. 굽이 높고 장식이 화려한 여자 구두였다. 재율의 스타일리스트가 두고 간 물건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그는 집에서 촬영 관계자들과 미팅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집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웃음이었다.

“재율아, 누구 왔어?”

아윤은 현관에 선 채 잠시 귀를 기울였다.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현이?”

소아현.

같은 모임에서 알게 된 후배이자, 아윤을 볼 때마다 밝게 웃으며 언니라고 부르던 여자였다. 그녀가 왜 이 시간에 재율의 집에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아윤은 천천히 거실 쪽으로 걸었다.

“재율아.”

대답이 없었다.

대신 낮게 웃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들을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래.”

여자의 대답 뒤로 짧은 웃음이 이어졌다.

아윤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그런 순간을 맞는다고 했다.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아무 말도 듣지 못했는데 이미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아윤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랬다.

그녀는 거실 입구에 섰다.

그리고 보았다.

소파에 앉은 재율.

그의 무릎 가까이에 몸을 기댄 아현.

서로를 마주 보고 있던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입술을 맞추는 모습을.

아윤은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잊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 들고 있던 원고가 미끄러졌다.

툭.

바닥에 떨어진 종이 뭉치에서 몇 장이 흩어졌다.

그 소리에 두 사람이 돌아봤다.

“……아윤아?”

재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아현도 놀란 듯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연 순간, 아윤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붙들고 있던 기대까지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언니.”

아현은 잠깐 망설였다.

그러더니 천천히 말했다.

“우리 만난 지 좀 됐어요.”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선명했다.

만난 지 좀 됐다고.

얼마나?

언제부터?

내가 몰랐던 시간이 대체 얼마나 길었던 걸까.

아윤은 재율을 바라봤다.

그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윤아, 이건…….”

“설명해 봐.”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화가 나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차분했다. 어쩌면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인지도 몰랐다.

“무슨 설명을 할 건데?”

재율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아니라…….”

“방금 내가 본 게 뭔데?”

“아윤아.”

“내가 잘못 본 거야?”

재율은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아윤은 그 침묵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웃음이 났다.

정말 우습게도.

“와.”

그녀가 작게 웃었다.

“나 오늘 진짜 좋은 날이었는데.”

재율의 표정이 흔들렸다.

“무슨…….”

“내 소설.”

아윤이 바닥에 흩어진 원고를 내려다봤다.

“드디어 끝났어.”

그녀는 한 장씩 종이를 주웠다. 끝이 구겨진 첫 페이지를 펴고 그 위에 다음 장을 올렸다. 손이 떨려 제대로 가지런히 맞춰지지 않았다.

“교수님이 출판사에 보내보자고 하셨어. 내가 쓴 글을, 진짜 책으로 만들어볼 수도 있대.”

재율이 한 걸음 다가왔다.

“아윤아, 일단 내 말 좀…….”

“그래서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해주려고 왔어.”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남자는 아까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웃을 때 한쪽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가는 것도, 난처할 때 눈썹 사이를 찌푸리는 버릇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더 끔찍했다.

“네가 제일 좋아해 줄 줄 알았거든.”

재율이 입을 다물었다.

그 뒤에서 아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니, 저희도 일부러 이렇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아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우리?”

“…….”

“지금 우리라고 했어?”

아현의 얼굴이 굳었다.

아윤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이제 너희는 우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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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날이, 가장 나쁜 날이 되었다
원고를 주워 들던 손이 멈췄다. 더는 주울 수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글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전까지 느꼈던 기쁨마저 우스운 것이 되어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원고를 내려놓았다. “둘이 잘 만나.” 재율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아윤아!” 그가 아윤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윤은 그 손을 내려다봤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이 좋아하던 손이었다. 처음 손을 잡았을 때는 얼마나 떨렸던가. 어느 겨울날, 손이 차갑다며 자신의 손을 코트 주머니에 함께 넣어주던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손길이 견딜 수 없이 낯설었다. “놔.” “내 말 좀 들어.” “놓으라고.” “실수였어.” 그 말에 아윤이 움직임을 멈췄다. “……뭐?” “정말 실수였어. 나는 너뿐인 거 알잖아.” 아윤은 재율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당황과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자신을 잃을까 두려운 것인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알려질까 두려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방금 어떤 말을 했는지만큼은 분명했다. 실수. 그는 자신들의 삼 년을 무너뜨린 일을 실수라고 불렀다. 아윤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짝! 마른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재율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아현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아윤도 놀랐다. 누군가의 뺨을 때려본 것은 처음이었다. 손바닥이 뜨겁고 저릿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럴 때는.” 아윤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실수였다고 하는 게 아니라,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재율이 고개를 돌렸다. 아윤은 그를 마지막으로 바라봤다. “나한테 미안했어야지.” 그리고 돌아섰다. 재율이 다시 이름을 불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짧은 시간조차 버티기 어려웠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거의 뛰다시피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뒤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윤아, 기다려!” 그녀는 기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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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날이, 가장 나쁜 날이 되었다
그러자 그가 조금 더 가까이 몸을 숙였다. “괜찮아요.” 조금 서툴렀다. 그러나 이상하게 다정했다.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위로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아윤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남자는 당황한 듯 멈췄다. “…….” 아윤은 울면서 웃었다. “안 괜찮은데요.” 물론 그가 알아들을 리 없었다. “하나도 안 괜찮아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수건을 그녀의 손에 조심스럽게 쥐여주었다. 손끝이 스쳤다. 차가운 비를 맞고 있던 그녀의 손과 달리 그의 손은 따뜻했다. 그 짧은 온기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아윤은 손수건을 내려다봤다. 그가 다시 말했다. “울지…… 마세요.” 아윤의 입술이 떨렸다. “그 말을 들으면 더 울고 싶어지는 거 알아요?” 남자는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아윤은 조금 웃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남자의 표정이 아주 조금 풀렸다. 그는 무릎을 굽힌 자세로 잠시 그녀를 살폈다. 아윤의 무릎이 다쳤는지 확인한 뒤,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알아들을 수 있는 간단한 영어였다. “Can you stand?” 아윤은 그의 손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사람의 손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사람. 그런데. 오늘 하루 동안 처음으로. 누군가의 손을 잡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윤은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남자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무릎에 힘이 풀려 휘청이는 순간에는 다른 손으로 팔꿈치를 받쳐주었다. 아윤은 그 덕분에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잠깐 가까워졌다. 남자의 코트에서 비 냄새와 희미한 나무 향이 났다. 아윤은 고개를 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젊었다. 그리고. 참 잘생긴 사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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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 없는 남자와 다시 만났습니다
도아윤은 사랑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약속을 믿지 않았다.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말도, 절대로 변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고백도 결국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불과했다. 한때는 그런 말들이 세상을 움직일 만큼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런데 참 우습게도 그녀는 여전히 사랑을 팔고 있었다. 그것도 꽤 비싼 가격에. “대표님, 이번 디자인은 어떠세요?” 아윤은 앞에 놓인 시제품을 내려다봤다. 작은 벨벳 받침 위에는 핑크 다이아몬드를 중심으로 두 개의 날개가 감싸듯 뻗은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세공 자체는 훌륭했다. 빛이 들어오는 각도에 따라 날개의 곡선이 부드럽게 반짝였고, 중심석도 지나치게 튀지 않도록 균형을 잘 잡았다. 하지만 무언가 부족했다. “엘리스.” “네, 대표님.” “예쁘죠?” 엘리스가 잠깐 눈을 깜박였다. “네. 정말 예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윤은 손끝으로 목걸이의 체인을 들어 올렸다. 가느다란 금속이 손가락 사이에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런데 예쁜 것밖에 없어요.” 회의실에 앉아 있던 직원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아윤은 그 반응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제품을 테이블 중앙에 내려놓고 직원들을 차례로 바라봤다. “이번 컬렉션의 이름이 뭐죠?” “언스포큰 러브입니다.” “맞아요. 말하지 못한 사랑.” 아윤은 태블릿 화면을 돌려 처음 기획안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지금 이 디자인을 보면 사랑을 말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아주 크게 외치는 사람 같아요. 하트에 날개, 핑크 다이아몬드까지. 너무 친절하게 다 설명하고 있잖아요.” 디자인팀 막내인 샬럿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러면 하트를 조금 더 작게 만드는 게 어떨까요?” “좋아요. 그런데 크기만 줄인다고 해결될까요?” 샬럿이 잠시 고민했다. “……아니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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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의 어머니는 아윤에게 단순한 친구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영국에 온 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주얼리 디자인을 권한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그런 재능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때였다. [그리고 로빈도.] “로빈이?” [응. 윤 누나 언제 오냐고 아침부터 난리야.] 아윤의 얼굴이 풀렸다. “우리 로빈이 보고 싶다.” [봐! 나보다 로빈이 좋지?] “당연하지.” [도아윤!] 아윤이 웃었다. “알았어. 일찍 끝나면 갈게.” [약속!] “일찍 끝나면.” [그게 약속이지.] “네 마음대로 해.” [사랑해, 유니!] “응, 나도.” 전화를 끊은 아윤은 잠시 화면을 바라봤다. 사랑한다는 말. 예전에는 그 말을 듣는 것조차 어려웠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이유부터 의심했고, 영원히 곁에 있겠다고 하면 언제 떠날 생각인지 묻고 싶었다. 그런데 올리비아는 달랐다. 그녀는 사랑한다고 말하고는 정말로 곁에 있었다. 대단한 약속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윤이 힘든 날이면 찾아와 함께 밥을 먹었고, 아무 말도 하기 싫은 날에는 옆에 앉아 영화를 봤다. 그런 시간을 지나며 아윤은 깨달았다.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다만 여전히. 남녀 사이의 사랑만큼은 믿을 수 없었다. ⸻ 오후 세 시 오십 분. 아윤은 HR 그룹 본사 로비에 도착했다. 천장이 높고 유리 벽면이 넓게 펼쳐진 건물이었다. 바닥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직원들은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면서도 누구 하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윤은 안내 데스크에서 방문증을 받은 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오늘은 짙은 네이비색 원피스에 아이보리 재킷을 입었다. 장식은 최대한 줄이고 자신이 디자인한 작은 다이아몬드 귀걸이와 가느다란 팔찌만 착용했다. 과하게 꾸미지 않았지만 허술해 보이지도 않았다. 아윤은 그 균형을 좋아했다. “도아윤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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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 없는 남자와 다시 만났습니다
“없었으면 이 자리에서 제안하지 않았겠죠.”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남자가 웃었다. 아주 희미하게. “좋습니다.” HR 측 담당자들의 얼굴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첫 시즌 육 개월 독점 판매. 온라인 채널 유지.” 남자는 아윤을 바라봤다. “대신 판매 실적에 따라 두 번째 시즌의 조건은 다시 협상하죠.” 아윤은 잠시 그를 살폈다. 생각보다 빠른 결정이었다. “좋습니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남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았다. 순간. 아윤의 손끝에 묘한 감각이 스쳤다. 단단하고 따뜻한 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악수한 손을 내려다봤다. 남자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따라갔다. “도아윤 대표.” 그가 이름을 불렀다.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네. 저도요.” 남자가 손을 놓았다. 아윤은 손바닥에 남아 있는 온기를 애써 무시했다. ⸻ 회의가 끝났을 때는 오후 여섯 시를 넘기고 있었다. 아윤은 HR 본사를 나오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성공적이었다. 계약서 최종 검토만 남았지만 가장 까다로웠던 독점 조건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들어왔던 남자 때문이었다. 컨덜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성이었다. “컨덜튼…….” 아윤은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영국에서 드문 성일 수도 있지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올리비아였다. “응, 비아.” [끝났어?] “응. 이제 나왔어.” [그럼 우리 집 오는 거지?] “갈게. 대신 조금 늦을 수도 있어.” [괜찮아! 엄마한테 말해둘게.] “로빈이는?” [벌써 현관에 앉아 있어.] 아윤이 웃었다. “그럼 서둘러야겠네.” [조심해서 와!] “알았어.” 통화를 마친 아윤은 길가로 걸어갔다. 택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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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 없는 남자와 다시 만났습니다
‘진짜 최악이야.’ 아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인지. 조금 전 자신을 바라보던 눈이 자꾸 생각났다. ⸻ 레이 컨덜튼은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 도아윤. 회의실에서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어딘가 익숙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랬다. 또렷한 말투. 고집스럽게 올라가는 턱. 그리고 무엇보다. 눈. 그 눈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레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삼 년 전. 한국. 비가 내리던 거리. 그리고. 자신의 손을 잡고 일어서던 여자. ‘……설마.’ 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윤은 이미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날의 여자는 계속 울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고, 화장은 빗물에 번졌으며,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레이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조금 전 그녀를 일으켜 세우던 순간. 그때와 비슷한 감각이 느껴졌다.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한. “……도아윤.” 그가 낮게 이름을 불렀다. 그때 운전기사가 다가왔다. “이사님, 출발하시겠습니까?” 레이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웃었다. “아니요.” “네?” “잠깐 들를 곳이 생겼습니다.” 레이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에는 여동생에게서 온 메시지가 있었다. [오빠, 오늘 집에 올 거지?] [엄마가 저녁 먹으러 오래.] [그리고 오늘 내가 진짜 좋아하는 친구도 와!] 레이의 시선이 마지막 문장에 머물렀다. 좋아하는 친구. 올리비아는 늘 그런 식이었다. 아침마다 새로운 사람을 좋아하고, 일주일 뒤에는 또 다른 사람을 소개했다. 그러니 특별히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금 전 만난 여자가 떠올랐다. 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우연이 겹칠 리는 없었다. 그는 여동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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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렇게 말을 안 들어요?” 도아윤은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조금 전까지 런던의 유명 기업 HR 그룹에서 계약 조건을 논의하던 남자였다. 잘생긴 외모만큼이나 차갑고 냉정한 태도로 자신을 상대하던 사람. 그런데 그 남자가 지금은 친구의 집 현관에서, 그것도 자신과 불과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더욱 기가 막힌 건 그가 올리비아의 오빠라는 사실이었다. “……이사님.” “네.” “혹시 원래 이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으세요?” 레이 컨덜튼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남의 일이라.” “네. 제 손목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손을 다쳤으면 병원에 가는 게 좋겠다고 말한 게 그렇게 불쾌했습니까?”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한데요. 말투가 꼭 제가 초등학생이고 이사님이 선생님인 것 같아서요.” 레이는 잠시 아윤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말을 잘 들으면 되겠군요.” “…….” 아윤은 깨달았다. 이 남자와는 말싸움을 해봤자 자신만 피곤해진다는 사실을. 그때 두 사람 사이로 올리비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잠깐만. 너희 뭐야?” “뭐가?” 아윤이 돌아봤다. 올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처음 만나는 사람들 같지가 않아?” “처음 만나는 사람들 아니니까.” 레이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올리비아의 눈이 커졌다. “뭐?” “오늘 회사에서 만났어.” “회사?” “DW 입점 계약.” 아윤이 덧붙였다. “HR에서 미팅했거든.” 올리비아는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다 손뼉을 쳤다. “아! 오늘 오빠가 그 미팅에 들어간 거야?” “응.” “대박!” 무엇이 그렇게 대단한지 올리비아는 혼자 신이 났다. “그럼 잘됐네! 윤, 우리 오빠 어땠어?” 아윤의 입이 다물어졌다. 레이가 느긋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궁금하네.” “…….” “나도 듣고 싶은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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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손수건을 기억하십니까?
“네가 그렇게 대답하면 여자들이 싫어한다니까.” 레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부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 아윤을 바라봤다. 아윤은 무시했다. 완벽하게 무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식탁에 놓인 빵을 집으려고 오른손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윽.” 손목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아윤이 미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을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레이였다. “손.” 아윤은 모른 척했다. “…….” “도아윤 씨.” “네?” “아프죠?” “안 아파요.” 레이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에 머물렀다. 아윤은 급하게 손을 내렸다. “조금 삔 것뿐이에요.” “그걸 아직 확인하지도 않았잖아요.” “내일 병원 가면 되죠.” “내일.” 레이가 천천히 되물었다. “그 말은 오늘은 안 갔다는 뜻이고.” 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올리비아의 고개가 돌아갔다. “윤.” “……응.” “손목 다쳤어?” “조금.” “어떻게!” “그냥 넘어졌어.” “어디서!” “길에서.” “왜!” 아윤이 한숨을 쉬었다. “비아, 내가 일부러 넘어진 건 아니잖아.” 올리비아는 곧바로 아윤의 손목을 살폈다. “세상에. 이거 조금 부었잖아!” “괜찮아.” “뭐가 괜찮아! 너 손으로 일하는 사람이잖아!” “알아.” “당장 병원 가!” 아윤은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 종일 같은 말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때 레이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게. 내가 아까부터 그랬는데.” 아윤의 고개가 돌아갔다. 레이는 아주 얄밉게 웃고 있었다. 그 순간 아윤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저 남자의 입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일까. ⸻ 결국 아윤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컨덜튼 부인의 권유로 손목에 냉찜질을 했다. 다행히 통증은 조금 가라앉았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얼음팩을 손목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 옆에는 로빈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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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손수건을 기억하십니까?
흰 셔츠의 소매를 두 번 걷어 올렸고, 넥타이도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낮에 회사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이상하게 더 위험해 보였다. 아윤은 무심코 시선을 거뒀다. ‘뭘 봐.’ ‘정신 차려.’ 그때 레이가 말했다. “데려다줄게.” 아윤이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요.” “늦었잖아.” “택시 타면 돼요.” “손목도 다쳤고.” “이제 거의 안 아파요.” 레이가 천천히 그녀를 바라봤다. “고집.” “…….” “정말 세네.” 아윤이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올리비아가 옆에서 웃었다. “오빠, 윤 잘 부탁해!”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아윤은 어쩐지 그 말이 신경 쓰였다. 걱정 마. 너무 자연스러운 말이었다. 마치 자신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리고 생각했다. 사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 맞기는 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자 더 이상했다. ⸻ 차 안은 조용했다. 런던의 밤거리가 창밖으로 흘러갔다. 아윤은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리다 손수건을 꺼냈다. R.C. 작은 글자가 가로등 불빛 아래 희미하게 보였다. 레이는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안내한 뒤 그녀를 바라봤다. “그렇게 좋습니까?” 아윤이 고개를 들었다. “네?” “그 손수건.” 아윤은 잠시 손수건을 내려다봤다. “……좋아요.” 생각보다 솔직한 대답이었다. 레이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윤은 손수건을 손가락 사이에 감았다가 풀었다. “이상하죠?” “뭐가요.” “별것도 아닌데.” “…….” “그날 이후로 계속 가지고 있었거든요.” 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윤은 창밖을 바라봤다. “처음 영국에 올 때도 챙겨왔어요. 짐 정리하다 버릴까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상하게 못 버리겠더라고요.” “왜요?” 아윤은 잠시 생각했다. “글쎄요.”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날 제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레이의 표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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