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저녁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이다정은 서류를 정리하는 척하며 몇 번이나 같은 페이지를 넘겼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 건이랑 엮인 거 아니지?”
낮고 또렷한 여성의 영어 발음.
차갑게 정리된 톤.
이다정은 고개를 들었다.
보이지는 않았다.
문이 닫혀 있었으니까.
하지만 분명히, 김다온의 목소리와 마주보고 말하는 누군가였다.
“…상관없어. 내가 정리해.”
그의 말은 짧았다.
늘 그렇듯 감정이 배제된, 업무용 음성.
이다정은 괜히 물컵을 들었다.
물을 마시지도 않으면서.
그녀는 자신이 왜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알았다
만찬이 끝난 뒤, 호텔은 다시 평소의 고요를 되찾은 듯 보였다.샹들리에 불빛은 여전히 찬란했고, 카펫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부드럽게 발을 삼켰다.그러나 긴 하루를 마친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이다정은 엘리베이터 대신 복도를 택했다.머리를 식히고 싶었다.“객실까지 도보 이동합니다.”김다온의 낮은 보고.“네.”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경호팀은 뒤쪽에서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복도는 길고, 고요했다.두꺼운 카펫 덕분에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이다정은 오늘 밤을 천천히 곱씹고 있었다.바이어의 과한 친절.그를 가로막던 단단한 등.“이다정으로서 예쁩니다.”라고 말하던 음성.그 문장이 계속 심장을 건드렸다.그때였다.틱—아주 미세한 소리와 함께, 조명이 한 번 흔들렸다.이다정이 고개를 들었다.“설마.”말이 끝나기도 전에.퍽—모든 불이 꺼졌다.완전한 암전.복도가 순식간에 검게 잠겼다.숨이 멎는 정적.창도, 빛도 없는 복도라서 시야가 완전히 사라졌다.누군가의 짧은 숨소리.“대표님.”김다온의 음성은 낮고 안정적이었다.그 어둠 속에서도 방향이 느껴졌다.이다정은 자신이 놀랐다는 걸 인정했다.아주 잠깐, 심장이 허공에 매달린 느
“기사님.”“네.”“저 오늘 많이 불편해 보였어요?”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네.”“어디가요?”“…눈.”짧은 대답.“눈이, 평소보다 자주 피했습니다.”이다정의 숨이 멎었다.그녀조차 인지하지 못한 습관.“그것도 보여요?”“보입니다.”그녀는 웃었다.이번엔 가볍지 않았다.“그럼 앞으로 조심해야겠네요.”“제가 있습니다.”무심한 말.하지만 확실한 선언.이다정의 가슴 어딘가가 천천히 뜨거워졌다.이 사람은 나를 ‘여자’로 보는 게 아니다.그렇다고 단순한 ‘보호 대상’도 아니다.내 호흡,내 시선,내 감정의 미세한 흔들림까지 읽어낸다.그리고—반응한다.그녀는 난간에서 몸을 돌렸다.“기사님.”“네.”“오늘 만찬, 성공이에요?”“네.”“그럼 저도 성공이네요.”그가 눈을 좁혔다.“무슨 의미십니까.”이다정은 빙긋 웃었다.“대표로서, 그리고.&rd
샹들리에가 길게 늘어진 연회장은 지나치게 화려했다.크리스털 잔이 부딪히는 소리,낮게 깔린 재즈 선율, 향수와 와인의 냄새가 뒤섞인 공기.공식 만찬.이다정은 짙은 네이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과하지 않으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색.대표로서의 품위와, 여자로서의 선을 동시에 지키는 선택.김다온은 그녀의 오른쪽 뒤, 반 걸음 거리.정확히 계산된 위치였다.시야 확보, 동선 차단, 즉각 대응 가능한 각도.하지만 오늘은,그 계산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Miss Lee, you look absolutely stunning tonight.”(이다정 대표님, 오늘 밤 정말 눈부십니다.)바이어 대표, 마이클 로웰이 와인잔을 들며 미소 지었다.필요 이상으로 부드러운 눈빛.이다정은 단정하게 웃었다.“Thank you. I’m glad you like the arrangement.”(감사합니다. 준비한 자리가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Arrangement? I’m talking about you.”(자리 말고, 당신을 말하는 겁니다.)주변에서 낮은 웃음이 흘렀다.이다정의 미소는 흔들리지 않았다.하지만 김다온은 봤다.그녀의 왼손이 테이블 아래에서아주 미세하게 움켜쥐어지는 것을.그는 한 발, 아주 자연스럽게 앞으로 이동했다.이전과 같은 거리였지만,체감상 더
차는 호텔에 도착했다.김다온이 내려 문을 열어주었다.이다정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기사님.”“네.”“그 사람은… 다쳤어요?”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질문 의도를 읽는 눈.“지키지 못했습니다.”짧은 문장.이다정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그 말 속에 담긴 무게를그녀는 직감적으로 느꼈다.지키지 못했다.그래서 더 완벽해졌구나.그래서 지금은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으려는 거구나.이다정은 억지로 웃었다.“그래서 저한테는 더 철벽이에요?”“…아닙니다.”그는 바로 부정했다.“대표님께는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할 뿐입니다.”같은 상황.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찔렀다.자신은 그 사람의 대체가 아니다.하지만—그의 기준이 되는 건언제나 과거라는 느낌.이다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오늘도 수고했어요.”그녀는 돌아섰다.자동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뒤돌아보고 싶은 충동.하지만 참았다.괜히 기대하게 될까 봐.차 안.김다온은 그녀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확인했다.직원들이 안내하여실루엣이 사라질 때까지.그
저녁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정은 서류를 정리하는 척하며 몇 번이나 같은 페이지를 넘겼다.집중이 되지 않았다.복도 끝에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그 건이랑 엮인 거 아니지?”낮고 또렷한 여성의 영어 발음.차갑게 정리된 톤.이다정은 고개를 들었다.보이지는 않았다.문이 닫혀 있었으니까.하지만 분명히, 김다온의 목소리와 마주보고 말하는 누군가였다.“…상관없어. 내가 정리해.”그의 말은 짧았다.늘 그렇듯 감정이 배제된, 업무용 음성.이다정은 괜히 물컵을 들었다.물을 마시지도 않으면서.그녀는 자신이 왜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알았다.‘왜 신경 쓰는 거야.’합리적인 이유를 붙여보려 했다.해외 일정이 늘어났고, 외부 인력도 늘어났고, 위험도 증가했다.경호 책임자로서 외국 인력과 통화하는 건 당연하다.그럼에도.“…아직 그 여자 곁에 있어?”이번엔 더 또렷하게 들렸다.이다정의 손이 멈췄다.그 여자.순간 심장이 이상하게 내려앉았다.김다온의 대답은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짧은 침묵.“…그래.”담백한 한 단어.그녀의 속이 묘하게 서늘해졌다.그 여자.이다정은 더 듣지 않겠다고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 안.금속 벽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이 묘하게 낯설었다.조용하다.기계가 올라가는 미세한 진동, 숫자가 바뀌는 소리, 그리고 서로의 숨.“제가 못할 거라고 생각 안 하셨다는 뜻이에요?”이다정의 목소리는 가벼웠다.하지만 그 안쪽에는, 아주 얇게 긴장감이 깔려 있었다.김다온은 시선을 내리지 않은 채 답했다.“네.”짧다.그리고 망설임이 없다.이다정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커졌다.“믿었다는 말이네요.”그는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침묵은 부정이 아니었다.엘리베이터 숫자가 천천히 올라간다.이다정이 작게 웃었다.입술이 아주 조금 풀린다.“그래도 좀 떨렸어요.”김다온의 시선이 그녀에게 내려왔다.의외라는 듯, 아주 미묘하게.“전혀 그렇게 안 보였습니다.”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이다정의 손끝이 아주 살짝 움직였다.…보이면 안 되지.“연습 많이 했거든요.”“뭘요.”짧은 호흡.그리고—“기사님 앞에서 긴장 안 하는 연습.”정적.엘리베이터 안의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김다온의 시선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이다정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하지만 심장은 조금 빠르다.둥.둥.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그의 눈.차갑고, 정확하고, 가까이 가기 어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