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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바타에게 (10)-을의 반격

Autor: 제로슈즈
last update Data de publicação: 2026-10-23 12:39:11

*

“좋아.”

수현은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오늘은 김수현으로 무너지지 않기로 했다.

*

박건우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레스토랑 에플이었다.

알람이 김현숙이 운영하는 곳.

수현이 그녀에게 한참 시달리던 시절, 인터넷으로 몇 번이고 검색해 봤던 레스토랑이었다.

유명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우승한 셰프가 근무하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한 끼에 45만 원짜리 코스 요리를 팔면서도 예약이 어려운 곳이라고 했다.

수현은 간판을 올려다봤다.

에플.

어제까지만 해도 저 이름을 보기만 하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물론 긴장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건우가 툭 던지듯 말했다.

“쫄았습니까?”

피식.

수현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쫄았냐니.

박건우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늘 반듯한 자세로 어려운 말을 골라 하던 남자가 아닌가.

그래서였을까.

피식으로 시작한 웃음은 점점 커졌다.

“푸핫…… 끅!”

수현은 결국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건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그렇게 웃깁니까?”

“아니…… 쫄았냐는 말이요.”

수현은 웃음 때문에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건우 씨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잖아요.”

건우는 말없이 수현을 바라봤다.

뭐지.

웃는 얼굴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니, 정확히는 보기 좋았다.

분명히 하은빈과 같은 얼굴인데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은빈이 조용히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여자였다면, 김수현은 시끄럽고 정신없이 사람의 리듬을 망치는 타입이었다.

건우는 문득 자신이 수현을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그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지금 그 태도는 복수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자제하시죠.”

차갑게 식은 말투.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수현의 마음이 금세 서운함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호텔에서 간장계란밥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이렇게 차갑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수현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도 덕분에 긴장은 조금 풀렸다.

건우는 수현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돌렸다.

이런 분위기는 위험했다.

하은빈과 닮은 얼굴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흔드는 여자.

그건 계획에 없었다.

*

레스토랑 에플의 내부는 하나의 전시 공간 같았다.

천장까지 이어진 와인 셀.

낮게 깔린 조명.

조용히 움직이는 직원들까지.

사람들은 음식을 먹는다기보다 분위기를 소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수현은 조심스럽게 내부를 둘러봤다.

한 끼 식사에 45만 원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

이곳에서는 물잔 하나를 내려놓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홀 안쪽에서 이 모든 분위기를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분명 다시 확인하랬지?”

수현의 걸음이 멈췄다.

익숙한 목소리.

아니, 너무 익숙해서 듣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하는 목소리였다.

김현숙.

알람이였다.

“그대로 나가도 좋다고…….”

“어디서 말대꾸야?”

직원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김현숙은 그런 직원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수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더니.”

“무슨 뜻입니까?”

“아니…… 콜센터에서도 그러더니 자기 직장에서도 똑같다고요.”

수현은 울먹거리는 직원을 바라봤다.

“분명히 저 여자가 억지 부리는 걸 거예요. 항상 그랬으니까.”

“그걸 어떻게 확신합니까?”

“3개월 동안 내가 당한 일이니까요.”

그 순간 직원이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안쪽으로 뛰어갔다.

수현의 얼굴도 함께 굳었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표정이 무너졌다.

저 직원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있었다.

억울하지만 대꾸할 수 없고, 울고 싶지만 울어서도 안 되는 기분.

콜센터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느꼈던 감정이었다.

그때 건우가 낮게 이름을 불렀다.

“김수현 씨.”

“네?”

“이제 그런 얼굴도 버려야 합니다.”

수현은 그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되묻고 싶었지만, 되묻는 버릇부터 고치라던 건우의 말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건우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을 연민해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습관 말입니다.”

“…….”

“그리고 을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이제 김수현 씨 시야에 들어오면 안 됩니다.”

순간 수현의 머릿속에 콜센터 시절이 지나갔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되뇌곤 했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전화 받는 기계다.

그래야 견딜 수 있었다.

그래야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고객들의 말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가 되라는 걸까.

저 직원의 처지를 외면하는 사람이 되라고?

“왜요?”

수현이 조용히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요?”

건우의 시선이 천천히 김현숙 쪽으로 옮겨갔다.

“감정을 드러내는 건 약점을 노출하는 겁니다. 저 사람처럼.”

낮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리고 약점을 들킨 사람은 결국 조종당하게 됩니다.”

수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럼 박건우와 나는?

서로의 비밀을 공유한 사람끼리는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수현은 건우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질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건우가 먼저 말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절대로 들키지 마십시오.”

“…….”

“김수현 씨가 하은빈 대신 살아간다는 사실을.”

짧은 침묵이 흘렀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켜쥐었다.

자신이 하은빈이 아니라는 사실.

그것이 들키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까.

건우는 아직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생각하는 하은빈의 세계에서는 작은 실수 하나도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

수현은 애써 표정을 정리했다.

“근데 여기 왜 온 거예요?”

건우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아까 분명히 복수하러 왔다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여기서 밥 먹는 게 복수가 돼요?”

그 말에 건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의 시선이 김현숙으로 옮겨갔다.

“사실은 평생 넘볼 수도 없는 위치의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떨 것 같습니까?”

수현은 잠시 생각하다 작게 중얼거렸다.

“…기분 더럽겠죠.”

“맞습니다.”

건우가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 시작은 김수현 씨가 해야 합니다.”

수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나중에 당신 앞에서 무릎 꿇을 때 더 비참할 수 있도록.”

수현은 김현숙을 바라봤다.

그새 또 다른 직원을 잡고 화를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두려움.

통쾌함.

그리고 아주 조금의 기대감.

“그러니 허리 펴시죠.”

건우가 낮게 말했다.

“오늘만큼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 당당해야 합니다.”

수현은 발끝에 힘을 주고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눈에 힘을 주었다.

건우는 그런 수현을 잠시 바라봤다.

“좋습니다.”

그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럼 일단 어그로를 한번 끌어볼까요?”

건우는 비서를 호출했다.

수현은 영문을 모른 채 그를 바라봤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현은 박건우가 말한 '어그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의 아바타에게 (10)

복수의 시작

*

“좋아.”

수현은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오늘은 김수현으로 무너지지 않기로 했다.

*

박건우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레스토랑 에플이었다.

알람이 김현숙이 운영하는 곳.

수현이 그녀에게 한참 시달리던 시절, 인터넷으로 몇 번이고 검색해 봤던 레스토랑이었다.

유명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우승한 셰프가 근무하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한 끼에 45만 원짜리 코스 요리를 팔면서도 예약이 어려운 곳이라고 했다.

수현은 간판을 올려다봤다.

에플.

어제까지만 해도 저 이름을 보기만 하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물론 긴장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건우가 툭 던지듯 말했다.

“쫄았습니까?”

피식.

수현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쫄았냐니.

박건우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늘 반듯한 자세로 어려운 말을 골라 하던 남자가 아닌가.

그래서였을까.

피식으로 시작한 웃음은 점점 커졌다.

“푸핫…… 끅!”

수현은 결국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건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그렇게 웃깁니까?”

“아니…… 쫄았냐는 말이요.”

수현은 웃음 때문에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건우 씨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잖아요.”

건우는 말없이 수현을 바라봤다.

뭐지.

웃는 얼굴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니, 정확히는 보기 좋았다.

분명히 하은빈과 같은 얼굴인데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은빈이 조용히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여자였다면, 김수현은 시끄럽고 정신없이 사람의 리듬을 망치는 타입이었다.

건우는 문득 자신이 수현을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그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지금 그 태도는 복수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자제하시죠.”

차갑게 식은 말투.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수현의 마음이 금세 서운함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호텔에서 간장계란밥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이렇게 차갑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수현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도 덕분에 긴장은 조금 풀렸다.

건우는 수현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돌렸다.

이런 분위기는 위험했다.

하은빈과 닮은 얼굴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흔드는 여자.

그건 계획에 없었다.

*

레스토랑 에플의 내부는 하나의 전시 공간 같았다.

천장까지 이어진 와인 셀.

낮게 깔린 조명.

조용히 움직이는 직원들까지.

사람들은 음식을 먹는다기보다 분위기를 소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수현은 조심스럽게 내부를 둘러봤다.

한 끼 식사에 45만 원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

이곳에서는 물잔 하나를 내려놓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홀 안쪽에서 이 모든 분위기를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분명 다시 확인하랬지?”

수현의 걸음이 멈췄다.

익숙한 목소리.

아니, 너무 익숙해서 듣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하는 목소리였다.

김현숙.

알람이였다.

“그대로 나가도 좋다고…….”

“어디서 말대꾸야?”

직원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김현숙은 그런 직원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수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더니.”

“무슨 뜻입니까?”

“아니…… 콜센터에서도 그러더니 자기 직장에서도 똑같다고요.”

수현은 울먹거리는 직원을 바라봤다.

“분명히 저 여자가 억지 부리는 걸 거예요. 항상 그랬으니까.”

“그걸 어떻게 확신합니까?”

“3개월 동안 내가 당한 일이니까요.”

그 순간 직원이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안쪽으로 뛰어갔다.

수현의 얼굴도 함께 굳었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표정이 무너졌다.

저 직원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있었다.

억울하지만 대꾸할 수 없고, 울고 싶지만 울어서도 안 되는 기분.

콜센터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느꼈던 감정이었다.

그때 건우가 낮게 이름을 불렀다.

“김수현 씨.”

“네?”

“이제 그런 얼굴도 버려야 합니다.”

수현은 그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되묻고 싶었지만, 되묻는 버릇부터 고치라던 건우의 말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건우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을 연민해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습관 말입니다.”

“…….”

“그리고 을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이제 김수현 씨 시야에 들어오면 안 됩니다.”

순간 수현의 머릿속에 콜센터 시절이 지나갔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되뇌곤 했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전화 받는 기계다.

그래야 견딜 수 있었다.

그래야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고객들의 말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가 되라는 걸까.

저 직원의 처지를 외면하는 사람이 되라고?

“왜요?”

수현이 조용히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요?”

건우의 시선이 천천히 김현숙 쪽으로 옮겨갔다.

“감정을 드러내는 건 약점을 노출하는 겁니다. 저 사람처럼.”

낮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리고 약점을 들킨 사람은 결국 조종당하게 됩니다.”

수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럼 박건우와 나는?

서로의 비밀을 공유한 사람끼리는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수현은 건우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질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건우가 먼저 말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절대로 들키지 마십시오.”

“…….”

“김수현 씨가 하은빈 대신 살아간다는 사실을.”

짧은 침묵이 흘렀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켜쥐었다.

자신이 하은빈이 아니라는 사실.

그것이 들키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까.

건우는 아직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생각하는 하은빈의 세계에서는 작은 실수 하나도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

수현은 애써 표정을 정리했다.

“근데 여기 왜 온 거예요?”

건우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아까 분명히 복수하러 왔다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여기서 밥 먹는 게 복수가 돼요?”

그 말에 건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의 시선이 김현숙으로 옮겨갔다.

“사실은 평생 넘볼 수도 없는 위치의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떨 것 같습니까?”

수현은 잠시 생각하다 작게 중얼거렸다.

“…기분 더럽겠죠.”

“맞습니다.”

건우가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 시작은 김수현 씨가 해야 합니다.”

수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나중에 당신 앞에서 무릎 꿇을 때 더 비참할 수 있도록.”

수현은 김현숙을 바라봤다.

그새 또 다른 직원을 잡고 화를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두려움.

통쾌함.

그리고 아주 조금의 기대감.

“그러니 허리 펴시죠.”

건우가 낮게 말했다.

“오늘만큼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 당당해야 합니다.”

수현은 발끝에 힘을 주고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눈에 힘을 주었다.

건우는 그런 수현을 잠시 바라봤다.

“좋습니다.”

그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럼 일단 어그로를 한번 끌어볼까요?”

건우는 비서를 호출했다.

수현은 영문을 모른 채 그를 바라봤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현은 박건우가 말한 '어그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의 아바타에게 (10)

복수의 시작

*

“좋아.”

수현은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오늘은 김수현으로 무너지지 않기로 했다.

*

박건우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레스토랑 에플이었다.

알람이 김현숙이 운영하는 곳.

수현이 그녀에게 한참 시달리던 시절, 인터넷으로 몇 번이고 검색해 봤던 레스토랑이었다.

유명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우승한 셰프가 근무하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한 끼에 45만 원짜리 코스 요리를 팔면서도 예약이 어려운 곳이라고 했다.

수현은 간판을 올려다봤다.

에플.

어제까지만 해도 저 이름을 보기만 하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물론 긴장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건우가 툭 던지듯 말했다.

“쫄았습니까?”

피식.

수현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쫄았냐니.

박건우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늘 반듯한 자세로 어려운 말을 골라 하던 남자가 아닌가.

그래서였을까.

피식으로 시작한 웃음은 점점 커졌다.

“푸핫…… 끅!”

수현은 결국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건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그렇게 웃깁니까?”

“아니…… 쫄았냐는 말이요.”

수현은 웃음 때문에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건우 씨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잖아요.”

건우는 말없이 수현을 바라봤다.

뭐지.

웃는 얼굴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니, 정확히는 보기 좋았다.

분명히 하은빈과 같은 얼굴인데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은빈이 조용히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여자였다면, 김수현은 시끄럽고 정신없이 사람의 리듬을 망치는 타입이었다.

건우는 문득 자신이 수현을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그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지금 그 태도는 복수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자제하시죠.”

차갑게 식은 말투.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수현의 마음이 금세 서운함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호텔에서 간장계란밥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이렇게 차갑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수현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도 덕분에 긴장은 조금 풀렸다.

건우는 수현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돌렸다.

이런 분위기는 위험했다.

하은빈과 닮은 얼굴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흔드는 여자.

그건 계획에 없었다.

*

레스토랑 에플의 내부는 하나의 전시 공간 같았다.

천장까지 이어진 와인 셀.

낮게 깔린 조명.

조용히 움직이는 직원들까지.

사람들은 음식을 먹는다기보다 분위기를 소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수현은 조심스럽게 내부를 둘러봤다.

한 끼 식사에 45만 원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

이곳에서는 물잔 하나를 내려놓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홀 안쪽에서 이 모든 분위기를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분명 다시 확인하랬지?”

수현의 걸음이 멈췄다.

익숙한 목소리.

아니, 너무 익숙해서 듣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하는 목소리였다.

김현숙.

알람이였다.

“그대로 나가도 좋다고…….”

“어디서 말대꾸야?”

직원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김현숙은 그런 직원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수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더니.”

“무슨 뜻입니까?”

“아니…… 콜센터에서도 그러더니 자기 직장에서도 똑같다고요.”

수현은 울먹거리는 직원을 바라봤다.

“분명히 저 여자가 억지 부리는 걸 거예요. 항상 그랬으니까.”

“그걸 어떻게 확신합니까?”

“3개월 동안 내가 당한 일이니까요.”

그 순간 직원이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안쪽으로 뛰어갔다.

수현의 얼굴도 함께 굳었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표정이 무너졌다.

저 직원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있었다.

억울하지만 대꾸할 수 없고, 울고 싶지만 울어서도 안 되는 기분.

콜센터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느꼈던 감정이었다.

그때 건우가 낮게 이름을 불렀다.

“김수현 씨.”

“네?”

“이제 그런 얼굴도 버려야 합니다.”

수현은 그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되묻고 싶었지만, 되묻는 버릇부터 고치라던 건우의 말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건우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을 연민해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습관 말입니다.”

“…….”

“그리고 을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이제 김수현 씨 시야에 들어오면 안 됩니다.”

순간 수현의 머릿속에 콜센터 시절이 지나갔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되뇌곤 했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전화 받는 기계다.

그래야 견딜 수 있었다.

그래야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고객들의 말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가 되라는 걸까.

저 직원의 처지를 외면하는 사람이 되라고?

“왜요?”

수현이 조용히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요?”

건우의 시선이 천천히 김현숙 쪽으로 옮겨갔다.

“감정을 드러내는 건 약점을 노출하는 겁니다. 저 사람처럼.”

낮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리고 약점을 들킨 사람은 결국 조종당하게 됩니다.”

수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럼 박건우와 나는?

서로의 비밀을 공유한 사람끼리는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수현은 건우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질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건우가 먼저 말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절대로 들키지 마십시오.”

“…….”

“김수현 씨가 하은빈 대신 살아간다는 사실을.”

짧은 침묵이 흘렀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켜쥐었다.

자신이 하은빈이 아니라는 사실.

그것이 들키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까.

건우는 아직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생각하는 하은빈의 세계에서는 작은 실수 하나도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

수현은 애써 표정을 정리했다.

“근데 여기 왜 온 거예요?”

건우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아까 분명히 복수하러 왔다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여기서 밥 먹는 게 복수가 돼요?”

그 말에 건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의 시선이 김현숙으로 옮겨갔다.

“사실은 평생 넘볼 수도 없는 위치의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떨 것 같습니까?”

수현은 잠시 생각하다 작게 중얼거렸다.

“…기분 더럽겠죠.”

“맞습니다.”

건우가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 시작은 김수현 씨가 해야 합니다.”

수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나중에 당신 앞에서 무릎 꿇을 때 더 비참할 수 있도록.”

수현은 김현숙을 바라봤다.

그새 또 다른 직원을 잡고 화를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두려움.

통쾌함.

그리고 아주 조금의 기대감.

“그러니 허리 펴시죠.”

건우가 낮게 말했다.

“오늘만큼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 당당해야 합니다.”

수현은 발끝에 힘을 주고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눈에 힘을 주었다.

건우는 그런 수현을 잠시 바라봤다.

“좋습니다.”

그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럼 일단 어그로를 한번 끌어볼까요?”

건우는 비서를 호출했다.

수현은 영문을 모른 채 그를 바라봤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현은 박건우가 말한 '어그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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Último capítulo

  • 나의 아바타에게   나의 아바타에게 (13)-도망친 약혼녀

    *“박건우.”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남의 약혼녀한테 찝쩍거리는 취향도 있었어?”수현의 웃음이 뚝 멈췄다.고개를 돌리자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연두색 니트에 청바지.이마를 덮은 자연스러운 앞머리와 장난기 어린 눈매까지.첫인상만 보면 사람 좋은 대형견 같았다.그런데 이상했다.분명 웃고 있는데 분위기는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마치 웃는 얼굴 아래 다른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 같았다.불길하다.본능이 먼저 경고했다.수현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약혼녀라는 말.그리고 박건우를 대하는 묘하게 삐딱한 태도.설마 저 사람이…….“백도현.”건우가 평소보다 또렷한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그 짧은 한마디만으로 수현은 알아차렸다.경고였다.긴장하라는 것.지금부터는 완벽하게 하은빈이어야 한다는 신호였다.하지만 어떻게?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백도현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었다.J그룹 후계자.하은빈의 약혼자.그리고 위험한 인간이라는 경고.그게 전부였다.“오랜만이네.”백도현이 웃으며 말했다.“약혼식 이후로 처음인가?”그 말에 수현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지금 저 말은 박건우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 질문이었다.약혼식 날 도망친 여자.그게 지금 자신이어야 했다.수현은 불안한 눈으로 백도현을 바라봤다.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지금 이 반응이 하은빈과 가장 어울릴 것 같았다.백도현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왜 그래?”그가 피식 웃었다.“은빈 누나, 긴장하네.”누나?예상하지 못한 호칭에 수현의 눈이 흔들렸다.연인 사이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이지만, 어쩐지 이상하게 들렸다.더구나 두 사람은 정략결혼을 앞두고 있던 사이가 아닌가.수현은 본능적으로 건우의 반응을 살폈다.건우 역시 미세하게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모른다.박건우조차 이 호칭의 의미를 모른다.그 사실이 수현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백도현은 그런 두 사람의 반응을 흥미롭게 바라봤다.“그렇게 박건우 눈치

  • 나의 아바타에게   나의 아바타에게 (12)-갑질의 대가

    *“고객 응대.”수현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하지만 차갑게 상대를 긁어내리고 있었다.김현숙은 수현의 손에 들린 물컵을 바라봤다.“여긴 이런 상황에서 직원이 바로 움직이지 않나 봐요.”수현이 웃었다.“아! 그렇게 서비스 정신이 없다고 매일 윗사람 찾으셨죠? 김현숙 씨는.”김현숙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근데 나는 누굴 부르나?”수현이 레스토랑 안을 천천히 훑었다.“사장 서비스 정신이 이 모양인데.”“야!”결국 김현숙의 인내심이 끊어졌다.“야! 김수현!”“시끄럽네.”수현의 말투가 서늘해졌다.“콜센터 전화할 때도 느꼈지만, 목소리 톤은 좀 낮추는 게 좋겠어요.”수현은 천천히 물컵을 내려놓았다.그녀의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다.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아니, 두렵지 않은 척하는 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김현숙은 얼굴을 붉힌 채 수현을 노려봤다.“너 지금 남자 하나 믿고 나한테 이러는 거야? 너 따위가 감히 건방지게!”“그런가?”수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적어도 아줌마 남편보다는 믿을 만한 거 같기도 하고.”“뭐?”김현숙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그동안 수현에게 쏟아부었던 폭언을 생각하면, 지금 그녀가 듣고 있는 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수현은 김현숙을 똑바로 바라봤다.상담원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전화기 너머의 김현숙은 언제나 무서운 사람이었다.수현이 아무리 사과해도 화를 냈고, 아무리 설명해도 듣지 않았다.그녀가 원하는 건 문제의 해결이 아니었다.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마음껏 짓밟는 것.그것뿐이었다.그런데 지금은?김현숙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고 있었다.수현은 그 표정을 보며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그 순간이었다.“너 진짜!”김현숙이 참지 못하고 수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탁!누군가 김현숙의 손목을 잡았다.박건우였다.건우는 자연스럽게 수현을 자신의 뒤쪽으로 숨겼다.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김현숙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해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 나의 아바타에게   나의 아바타에게 (11)-복수를 위한 쇼

    *얼마 지나지 않아 건우의 비서가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다.꽃다발은 단순히 '크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했다.수현의 상반신이 가려질 만큼의 크기였다. 차라리 거대하다는 말이 어울렸다.붉은 장미와 연분홍 장미, 크림빛에 가까운 흰 장미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꽃 사이사이에 자리한 안개꽃과 짙은 초록 잎들이 화려함을 더했다.꽃을 들고 오는 비서의 몸이 살짝 휘청였다.크기도 크기지만 무게 또한 가볍지 않아 보였다.저거 설마…… 나를 주려는 건가?비서가 가까워질수록 수현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부끄러움에 심장 박동까지 빨라졌다.“어그로를 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건우의 말이 맞았다.저 꽃다발의 존재 이유는 딱 하나였다.시선을 끄는 것.그리고 꽃다발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어그로 끌기…… 딱 좋은 날씨기는 하네요.”수현은 달아오른 얼굴을 손부채질하며 중얼거렸다.한 걸음.두 걸음.세 걸음.꽃다발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움직였다.테이블마다 대화를 나누던 손님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누군가는 식사를 멈췄고, 누군가는 노골적으로 이쪽을 바라봤다.마침내 비서가 꽃다발을 건넸다.그리고 당연한 순서처럼 건우는 꽃다발을 수현에게 내밀었다.사람들의 시선이 꽃다발에서 건우로, 다시 수현에게로 옮겨갔다.폭탄 돌리기.언젠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게임이 떠올랐다.폭탄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넘어가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터져버리는 게임.수현은 지금 막 터지려는 폭탄을 품에 안은 기분이었다.숨 쉬는 것조차 어색했다.시선을 받는 건 수현의 몫이 아니었다.평생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살아왔다.콜센터에서는 존재감이 없어야 편했고, 일상에서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안전했다.그런데 지금은 레스토랑 안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었다.수현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그 모습을 본 건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김수현 씨.”어느 때보다 다정한 목소리였다.건우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이럴 때는

  • 나의 아바타에게   나의 아바타에게 (10)-을의 반격

    *“좋아.”수현은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다.오늘은 김수현으로 무너지지 않기로 했다.*박건우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레스토랑 에플이었다.알람이 김현숙이 운영하는 곳.수현이 그녀에게 한참 시달리던 시절, 인터넷으로 몇 번이고 검색해 봤던 레스토랑이었다.유명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우승한 셰프가 근무하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한 끼에 45만 원짜리 코스 요리를 팔면서도 예약이 어려운 곳이라고 했다.수현은 간판을 올려다봤다.에플.어제까지만 해도 저 이름을 보기만 하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런데 오늘은 달랐다.물론 긴장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건우가 툭 던지듯 말했다.“쫄았습니까?”피식.수현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쫄았냐니.박건우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늘 반듯한 자세로 어려운 말을 골라 하던 남자가 아닌가.그래서였을까.피식으로 시작한 웃음은 점점 커졌다.“푸핫…… 끅!”수현은 결국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건우가 미간을 찌푸렸다.“뭐가 그렇게 웃깁니까?”“아니…… 쫄았냐는 말이요.”수현은 웃음 때문에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건우 씨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잖아요.”건우는 말없이 수현을 바라봤다.뭐지.웃는 얼굴이 생각보다 괜찮았다.아니, 정확히는 보기 좋았다.분명히 하은빈과 같은 얼굴인데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은빈이 조용히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여자였다면, 김수현은 시끄럽고 정신없이 사람의 리듬을 망치는 타입이었다.건우는 문득 자신이 수현을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래도.”그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지금 그 태도는 복수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자제하시죠.”차갑게 식은 말투.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수현의 마음이 금세 서운함으로 바뀌었다.그래도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어제 호텔에서 간장계란밥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이렇게 차갑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수현은 입

  • 나의 아바타에게   나의 아바타에게 (9)-하은빈을 입는 날

    *옷장을 뒤졌지만 입을 만한 옷이 없었다.아니, 정확히는 지금부터 살아갈 삶에 어울리는 옷이 없었다.인터넷 최저가를 검색해 샀던 티셔츠 몇 장, 늘어난 카디건, 색이 바랜 청바지.수현은 한참 동안 옷장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동안 대체 뭘 입고 살았던 걸까.물론 옷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매달 갚아야 하는 카드론 대출금과 생활비. 그것만으로도 월급은 빠듯했다.그러니 옷이란 그저 몸을 가리는 물건에 불과했다.하지만 이제는 달랐다.하은빈.세진유통 외동딸.앞으로 수현이 살아가야 할 이름이었다.그 이름에 어울리는 옷이 필요했다.수현은 옷장을 다시 한번 뒤졌다.그러다 결국 검은 원피스 하나를 꺼냈다.몇 년 전 회사 동료 언니가 버리려던 것을 얻어 온 옷이었다.평소에는 입을 일이 없어 장례식에 갈 때나 꺼내 입던 원피스.수현은 천천히 옷을 펼쳐 들었다.장례식.생각해 보면 오늘은 딱 그런 날이었다.김수현이라는 사람의 장례식.하은빈의 삶을 입기 위해 김수현의 삶을 벗어버리는 날.오랫동안 장롱 안에 처박혀 있던 원피스에는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수현은 손으로 먼지를 털어냈다.툭. 툭.그 작은 움직임 사이로 어제 일이 떠올랐다.알람이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유리창을 깨고, 경찰서까지 끌려갔던 일.25년 인생 최초의 일탈이었다.그동안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걸고 벌인 엄청난 모험.그런데 박건우의 변호사가 도착한 뒤, 모든 것은 믿기지 않을 만큼 쉽게 끝났다.합의.얼마가 오갔는지는 몰랐다.하지만 적지 않은 돈이 움직였다는 것만큼은 알람이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그 순간 수현은 깨달았다.아.이게 부자들의 세계구나.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 그들에게는 구두 굽 하나 부러진 정도의 해프닝으로 끝나는 세계.온몸에서 힘이 빠졌다.무서울 정도로 쉽게 해결돼서.무서울 정도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지나가 버려서.그때였다.“김수현 씨.”경찰서를 막 나오던 순간, 박건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 나의 아바타에게   나의 아바타에게 (8)-대타일 뿐

    *박건우는 서랍 깊숙이 숨겨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전원 버튼을 길게 누르자 검은 액정에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은빈과 연락할 때만 사용하던 휴대폰이었다.추적을 피하기 위해 운전기사 명의로 개통한 번호.그러나 결혼식 날 이후, 은빈에게서는 단 한 번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잠시 후 화면이 밝아졌다.환하게 웃고 있는 하은빈의 얼굴이 나타났다.건우는 한동안 말없이 사진을 바라봤다.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지키고 싶었던 사람.그리고 지금,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는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있었다.하은빈.그리고 김수현.똑같은 얼굴을 가진 두 여자.하지만 그들이 살아온 삶은 너무도 달랐다.건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김수현은 아직 모른다.세진유통 외동딸의 삶이 어떤 의미인지.그 화려한 자리 뒤에 얼마나 질식할 것 같은 공기가 숨어 있는지.사람들은 하은빈을 부러워했다.아름답고, 우아하고,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여자.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삶을 가진 여자.하지만 건우가 알고 있는 하은빈은 달랐다.은빈은 늘 누군가의 기대에 맞춰 살아야 했다.아름다워야 했고, 조용해야 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됐다.기쁘지 않아도 웃어야 했다.싫은 일이 있어도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선택이 아니라 순응이었다.주변 사람들을 빛내기 위해 존재하는 장신구 같은 삶.살아 있는 생화를 억지로 완벽한 조화처럼 만들어가는 삶이었다.그리고 결국.하은빈은 도망쳤다.아니,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적어도 건우는 그렇게 생각했다.그의 손끝이 천천히 휴대폰 액정을 쓸었다.“멍청하게.”낮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누구를 향한 말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은빈인지.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자신인지.아니면 이제 막 그 자리에 들어서려는 김수현인지.건우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김수현은 자신이 어떤 세계로 들어오려는지도 모른 채 손을 내밀고 있었다.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말.다른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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