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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바타에게 (8)-대타일 뿐

Penulis: 제로슈즈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10-19 07:40:38

*

박건우는 서랍 깊숙이 숨겨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 버튼을 길게 누르자 검은 액정에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은빈과 연락할 때만 사용하던 휴대폰이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운전기사 명의로 개통한 번호.

그러나 결혼식 날 이후, 은빈에게서는 단 한 번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잠시 후 화면이 밝아졌다.

환하게 웃고 있는 하은빈의 얼굴이 나타났다.

건우는 한동안 말없이 사진을 바라봤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지키고 싶었던 사람.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는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있었다.

하은빈.

그리고 김수현.

똑같은 얼굴을 가진 두 여자.

하지만 그들이 살아온 삶은 너무도 달랐다.

건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김수현은 아직 모른다.

세진유통 외동딸의 삶이 어떤 의미인지.

그 화려한 자리 뒤에 얼마나 질식할 것 같은 공기가 숨어 있는지.

사람들은 하은빈을 부러워했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여자.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삶을 가진 여자.

하지만 건우가 알고 있는 하은빈은 달랐다.

은빈은 늘 누군가의 기대에 맞춰 살아야 했다.

아름다워야 했고, 조용해야 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됐다.

기쁘지 않아도 웃어야 했다.

싫은 일이 있어도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선택이 아니라 순응이었다.

주변 사람들을 빛내기 위해 존재하는 장신구 같은 삶.

살아 있는 생화를 억지로 완벽한 조화처럼 만들어가는 삶이었다.

그리고 결국.

하은빈은 도망쳤다.

아니,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건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손끝이 천천히 휴대폰 액정을 쓸었다.

“멍청하게.”

낮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누구를 향한 말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은빈인지.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자신인지.

아니면 이제 막 그 자리에 들어서려는 김수현인지.

건우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김수현은 자신이 어떤 세계로 들어오려는지도 모른 채 손을 내밀고 있었다.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말.

다른 사람의 삶을 살게 해주겠다는 말.

그녀에게는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었을 것이다.

건우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김수현이 얼마나 절박한 처지인지도.

어떤 말을 해야 그녀가 흔들리는지도.

그래서 더 미안했다.

이건 처음부터 공정한 거래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수현에게 새로운 삶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삶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전부 말하지 않았다.

하은빈의 자리가 단순히 화려한 옷과 값비싼 음식으로 채워진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도.

그녀가 왜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쳤는지도.

건우는 지난밤 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스위트룸을 신기한 듯 둘러보던 눈.

룸서비스 메뉴판의 가격에 놀라던 얼굴.

작은 상처 하나 때문에 한밤중에 의사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던 모습까지.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수현이 살아온 세계에서는 작은 돈 하나도 쉽게 쓸 수 없었으니까.

그런 여자에게 건우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다.

그 모든 상황은 우연이 아니었다.

박건우가 의도한 일이었다.

김수현이 하은빈의 삶을 받아들이도록.

그 삶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직접 느끼도록.

‘멍청해. 정말 멍청해.’

하지만 건우는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멈추는 순간, 은빈을 다시 그 집으로 끌고 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것만큼은 할 수 없었다.

건우는 길게 숨을 내쉬고 비서가 가져다준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레스토랑 에플 대표 김현숙.

3개월 동안 김수현을 알람처럼 부려먹은 여자였다.

남편은 세진그룹 마케팅부 부장.

건우는 서류의 한 부분에 시선을 멈췄다.

“세진그룹이라…….”

일이 생각보다 수월할 것 같았다.

김현숙이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잔인하면서, 힘 있는 사람 앞에서는 태도를 바꾸는 인간.

그런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건우는 다음 장을 넘겼다.

그러다 익숙한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최민석?”

김현숙의 아들.

그리고 박건우와 같은 학교를 나온 남자.

정확히는 백도현의 곁을 맴돌며 온갖 뒤처리를 해주던 인간이었다.

건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렇게 다시 엮일 줄은 몰랐다.

백도현과 박건우는 같은 학교, 같은 과를 나왔다.

그래서 건우는 누구보다 백도현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싫증이 나면 버린다.

그것도 상대를 완전히 망가뜨린 뒤에.

백도현이 한두 달씩 키링처럼 달고 다니던 여자들의 끝은 대부분 비슷했다.

휴학.

혹은 자퇴.

처음에는 누구나 그 여자들을 부러워했다.

J그룹 후계자의 연인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관계가 끝난 뒤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문이 따라붙었다.

남자를 매일 바꿔가며 만난다느니.

임신을 했다느니.

60대 사업가에게 스폰을 받았다느니.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소문은 퍼지는 순간부터 사람의 삶을 갉아먹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움직인 사람이 최민석이었다.

백도현이 싫증 낸 여자를 정리하는 일.

그녀가 다시는 백도현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

최민석은 언제나 그 일을 맡았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백도현의 손에는 먼지 한 톨 묻지 않았다.

건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 은빈이를 보낼 수 없었다.

절대로.

건우는 서류를 덮었다.

김현숙의 아들이 최민석이라는 사실은 뜻밖이었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김수현부터 준비시켜야 했다.

하은빈처럼 말하고.

하은빈처럼 행동하고.

누구도 두 사람의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건우는 휴대폰을 들어 김수현의 번호를 눌렀다.

잠시 화면을 내려다보던 그의 표정에서 마지막 망설임이 사라졌다.

연민은 어제까지다.

오늘부터 김수현은 어디까지나 하은빈의 대타일 뿐.

그러니 지금 필요한 건 감정이 아니었다.

김수현을 그 역할에 완벽하게 적응시키는 일.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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