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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바타에게 (9)-하은빈을 입는 날

Author: 제로슈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1 05:25:24

*

옷장을 뒤졌지만 입을 만한 옷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지금부터 살아갈 삶에 어울리는 옷이 없었다.

인터넷 최저가를 검색해 샀던 티셔츠 몇 장, 늘어난 카디건, 색이 바랜 청바지.

수현은 한참 동안 옷장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동안 대체 뭘 입고 살았던 걸까.

물론 옷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매달 갚아야 하는 카드론 대출금과 생활비. 그것만으로도 월급은 빠듯했다.

그러니 옷이란 그저 몸을 가리는 물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하은빈.

세진유통 외동딸.

앞으로 수현이 살아가야 할 이름이었다.

그 이름에 어울리는 옷이 필요했다.

수현은 옷장을 다시 한번 뒤졌다.

그러다 결국 검은 원피스 하나를 꺼냈다.

몇 년 전 회사 동료 언니가 버리려던 것을 얻어 온 옷이었다.

평소에는 입을 일이 없어 장례식에 갈 때나 꺼내 입던 원피스.

수현은 천천히 옷을 펼쳐 들었다.

장례식.

생각해 보면 오늘은 딱 그런 날이었다.

김수현이라는 사람의 장례식.

하은빈의 삶을 입기 위해 김수현의 삶을 벗어버리는 날.

오랫동안 장롱 안에 처박혀 있던 원피스에는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수현은 손으로 먼지를 털어냈다.

툭. 툭.

그 작은 움직임 사이로 어제 일이 떠올랐다.

알람이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유리창을 깨고, 경찰서까지 끌려갔던 일.

25년 인생 최초의 일탈이었다.

그동안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걸고 벌인 엄청난 모험.

그런데 박건우의 변호사가 도착한 뒤, 모든 것은 믿기지 않을 만큼 쉽게 끝났다.

합의.

얼마가 오갔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적지 않은 돈이 움직였다는 것만큼은 알람이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수현은 깨달았다.

아.

이게 부자들의 세계구나.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 그들에게는 구두 굽 하나 부러진 정도의 해프닝으로 끝나는 세계.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무서울 정도로 쉽게 해결돼서.

무서울 정도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지나가 버려서.

그때였다.

“김수현 씨.”

경찰서를 막 나오던 순간, 박건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수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검은 밤.

차가운 가로등 불빛 아래, 박건우는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괜찮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수현은 이상하게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괜찮냐고?

내 인생이 지금 통째로 뒤집히고 있는데?

하지만 수현은 웃지 않았다.

대신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앞으로 이런 순간은 수도 없이 많아질 것이다.

그때마다 무너질 수는 없었다.

“네.”

수현이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세요.”

그 순간 박건우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렸다.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사람처럼.

혹은 예상과 다른 반응을 보인 상대를 새롭게 바라보는 사람처럼.

“김수현의 삶을 정리하십시오.”

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직장도. 인간관계도 전부.”

“…….”

“당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그 말이 이상할 만큼 오래 귀에 남았다.

*

수현은 다시 거울 앞에 섰다.

박건우를 떠올리자 지금 입고 있는 검은 원피스가 싸구려 비닐봉지처럼 보였다.

이런 옷을 입고 박건우 앞에 설 생각을 하니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옷이라도 하나 사야 하나.

수현은 비상금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168,500원]

액정에 뜬 숫자를 보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돈이면 완벽하지는 않아도, 박건우 옆에 섰을 때 그럭저럭 구색에 맞는 옷 하나 정도는 건질 수 있을까.

문제는 시간이었다.

아울렛까지 가려면 택시를 타야 했다.

그럼 택시비만큼 옷 예산이 줄어든다.

수현이 머릿속으로 택시비를 계산하고 있을 때였다.

지잉. 지잉. 지잉.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인은 박건우.

수현은 숨을 한 번 삼킨 뒤 전화를 받았다.

“네…….”

곧 낮고 차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 앞에 필요한 물건을 두었습니다.

“물건이요?”

-한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수현은 휴대폰을 든 채 현관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익숙한 로고가 찍힌 쇼핑백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한눈에 봐도 수현의 생활 반경에는 없던 물건들이었다.

비싸다.

그것도 아주 많이.

-확인했습니까?

“네.”

수현은 짧게 대답했다.

수화기 너머로 박건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복수할 때 입기에는 나쁘지 않을 겁니다.

“복수요?”

-우리의 복수에는 값비싼 옷이 필요하거든요.

“아…….”

-특별히 매장에서 가장 비싼 것들로만 골랐습니다. 존재만으로 '내가 명품이다'라고 말하는 것들로.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수현은 웃지 못했다.

복수.

위험한데, 달콤한 단어.

-김수현 씨.

“감사합니다.”

-두 시간 후에 기사 보낼 테니까 타고 오시면 됩니다.

수현은 눈을 깜박였다.

“근데…… 복수를 어떻게 하는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박건우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

-김수현 씨는 저만 따라오면 됩니다.

“…….”

-그게 하은빈과 어울리는 태도니까.

통화는 거기서 끝났다.

수현은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하은빈과 어울리는 태도.

그 말이 묘하게 가슴 한쪽을 눌렀다.

수현은 천천히 쇼핑백을 열었다.

안에는 몸선을 따라 부드럽게 떨어지는 블랙 미니 드레스와 얇은 굽의 구두, 작은 보석이 박힌 귀걸이와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수현은 손끝으로 드레스 천을 만졌다.

부드러운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지금까지 입어본 옷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수현은 조심스럽게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지퍼를 올리고, 목걸이를 걸고, 귀걸이를 끼웠다.

마지막으로 구두에 발을 넣었다.

그리고 다시 거울 앞에 섰다.

“…….”

숨이 멎었다.

거울 속에는 조금 전까지의 김수현이 없었다.

창백하고 초라해 보였던 얼굴은 검은 드레스 위에서 오히려 또렷해 보였다.

가늘게 드러난 목선.

허리를 따라 부드럽게 떨어지는 실루엣.

높지만 편안한 구두까지.

옷 하나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아니, 옷 하나로 수현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까.

수현은 거울 속 여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김수현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은빈도 아니었다.

그 사이 어디쯤.

낯설고, 위태롭고,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여자.

수현은 어깨를 펴고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거울 속 여자의 눈빛도 달라졌다.

희미하게 다른 빛이 들기 시작했다.

복수.

그 단어가 다시 떠올랐다.

수현은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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