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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바타에게 (11)-복수를 위한 쇼

Author: 제로슈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6 13:25:52

*

얼마 지나지 않아 건우의 비서가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다.

꽃다발은 단순히 '크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했다.

수현의 상반신이 가려질 만큼의 크기였다. 차라리 거대하다는 말이 어울렸다.

붉은 장미와 연분홍 장미, 크림빛에 가까운 흰 장미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꽃 사이사이에 자리한 안개꽃과 짙은 초록 잎들이 화려함을 더했다.

꽃을 들고 오는 비서의 몸이 살짝 휘청였다.

크기도 크기지만 무게 또한 가볍지 않아 보였다.

저거 설마…… 나를 주려는 건가?

비서가 가까워질수록 수현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부끄러움에 심장 박동까지 빨라졌다.

“어그로를 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건우의 말이 맞았다.

저 꽃다발의 존재 이유는 딱 하나였다.

시선을 끄는 것.

그리고 꽃다발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어그로 끌기…… 딱 좋은 날씨기는 하네요.”

수현은 달아오른 얼굴을 손부채질하며 중얼거렸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꽃다발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테이블마다 대화를 나누던 손님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는 식사를 멈췄고, 누군가는 노골적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마침내 비서가 꽃다발을 건넸다.

그리고 당연한 순서처럼 건우는 꽃다발을 수현에게 내밀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꽃다발에서 건우로, 다시 수현에게로 옮겨갔다.

폭탄 돌리기.

언젠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게임이 떠올랐다.

폭탄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넘어가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터져버리는 게임.

수현은 지금 막 터지려는 폭탄을 품에 안은 기분이었다.

숨 쉬는 것조차 어색했다.

시선을 받는 건 수현의 몫이 아니었다.

평생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살아왔다.

콜센터에서는 존재감이 없어야 편했고, 일상에서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안전했다.

그런데 지금은 레스토랑 안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었다.

수현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본 건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김수현 씨.”

어느 때보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건우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이럴 때는 조금 웃어주는 게 좋습니다.”

가까워진 거리.

귓가에 닿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수현의 어깨가 순간 움찔 떨렸다.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수현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건우는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봤다.

“꽃다발 정도로는 웃는 얼굴을 보기 힘들군요.”

“네?”

그가 수현의 뒤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목걸이를 꺼내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수현은 순간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체온.

희미하게 스치는 우디향.

목덜미를 간질이는 낮은 숨소리까지.

정신이 아찔해졌다.

곧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쇄골 위로 내려앉았다.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 짧은 순간만큼은 정말로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박건우 옆에 서도 어색하지 않은 여자.

누군가의 선망을 받는 여자.

이런 꽃다발과 보석이 당연한 여자.

어쩌면 자신도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스치던 순간이었다.

“지금 우리 복수 중입니다.”

건우가 수현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연애 놀이가 아니라.”

순간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던 감정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맞다.

이건 다 연출이었다.

꽃다발도.

목걸이도.

박건우의 다정한 말투도.

전부.

복수를 위한 쇼.

수현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조금 전까지 요란하게 뛰던 심장이 차분해졌다.

이 모든 게 익숙한 것처럼.

마치 처음부터 이런 세계에서 살아온 여자처럼.

그녀는 어깨를 펴고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

건우는 수현의 표정이 달라진 것을 확인하고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현도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김현숙이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툭.

건우의 손끝이 가볍게 수현의 손등을 스쳤다.

신호였다.

수현은 꽃다발을 끌어안은 채 미소를 지었다.

복수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

건우는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냈다.

차가운 물이 목 아래로 넘어갔지만 이상하게도 속은 답답해졌다.

한순간에 변해버린 수현의 모습 때문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의 다정한 행동 하나에 얼굴을 붉히던 여자였다.

그런데 선을 긋자마자 표정이 바뀌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 세계에 속해 있던 여자처럼.

분명히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거슬렸다.

“하아.”

낮은 숨이 새어 나왔다.

위험 신호였다.

김수현은 어디까지나 하은빈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대체품일 뿐이다.

그 이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건우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선을 그었다.

탁.

그때였다.

진한 향수 냄새가 가까이서 풍겨왔다.

“어머. 이게 누구야?”

김현숙이었다.

*

“못 알아볼 뻔했네. 이름이…….”

김현숙은 끝내 수현의 이름을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김현숙에게 수현은 상담원 1, 2, 3 중 하나였으니까.

부를 때는 '야', '너'면 충분했으니까.

“김수현입니다.”

수현은 김현숙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 김수현 맞다.”

김현숙의 시선이 수현의 옷차림과 목걸이, 꽃다발을 천천히 훑었다.

그러더니 조금 전과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못 알아볼 뻔했네. 김수현 씨.”

김현숙의 입에서 처음으로 존칭이 나왔다.

물론 완전한 존중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 정도 변화만으로도 충분했다.

모멸의 감정을 돌려줄 시간은 아직 많았으니까.

수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긴장으로 손끝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것은 쇼다.

이제 곧 사라질 김수현을 위한 마지막 쇼.

“여기는 손님한테 반말을 하나 보네요.”

수현은 포크로 샐러드를 천천히 뒤적이며 말했다.

“불쾌하네.”

김현숙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수현의 말은 자신뿐 아니라 레스토랑 자체를 깔아내리는 말이었다.

“아니…… 구면이니까…… 요. 원래 반말을 하기도 했고…… 요.”

“지금은 위치가 바뀌었는데…….”

수현이 방울토마토 하나를 찍어 입에 넣었다.

“그럼 곤란하죠.”

김현숙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완벽하게 공수가 뒤집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건우가 수현을 향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짧은 신호 하나만으로도 수현은 안심이 되었다.

“김현숙 씨?”

“씨?”

고작 호칭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반응은 생각보다 컸다.

그렇게 남을 깔보는 게 일상인 사람이, 막상 자신이 아래로 내려가는 건 못 견디는구나.

수현은 샐러드 접시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접시를 들어 올렸다.

손끝이 잠깐 멈췄다.

하지만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쨍그랑!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드레싱과 채소가 바닥 위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레스토랑 안의 시선이 동시에 이쪽으로 쏠렸다.

“어머.”

수현이 구두 끝을 내려다봤다.

“소스가 튀었네.”

그리고 김현숙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

“닦을 거 좀 가져다주시죠.”

“너 지금 뭐 하는…….”

수현은 대답 대신 테이블 위의 물컵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김현숙의 말이 뚝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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