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다른 일 없으면 당장 나가라.” 진환식에게는 더 이상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진무천은 속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겉으로는 공손함을 유지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낮잠 방해하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뒤 더 머물지 않고 돌아섰다.유언장을 이미 썼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고 마음을 접었다. 진환식 성격에 그런 질문을 들으면 틀림없이 화를 낼 것이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받을 수 있는 것까지 전부 잃을 수도 있었다.그런 질문은 진우찬에게 시키는 편이 나았다.진무천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 진환식은 낮게 말했다. “네 큰외삼촌은 정말 어리석어. 그렇게 빙빙 돌면 내가 속셈 모를 줄 아나.”“아시면 더더욱 마음 편하게 가지셔야 해요.” 강솔이 진환식을 위로했다.진환식도 그러고 싶었다.하지만 두 아들은 생각할 때마다 속이 뒤집힐 만큼 화가 났다.“건강보다 중요한 건 없어요.” 강솔은 가치도 없는 일 때문에 외할아버지가 화를 내다 몸까지 상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네 말이 맞다.” 진환식이 고개를 끄덕였다.강솔은 더 머물지 않았다. “그럼 쉬세요. 식사 때 다시 와서 모실게요.”진환식이 담담하게 답했다.“그래.”강솔은 고개를 끄덕였다.밖으로 나가려던 때 진환식이 갑자기 불렀다. “솔아.”강솔이 뒤를 돌아봤다.“너는...” 진환식은 말을 꺼냈다가 망설였다. 한참 고민한 끝에 뒷말을 삼켰다. “아니다. 가서 네 일 봐.”원래는 자기 유언장을 어떻게 쓰는 게 좋겠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강솔의 성격을 떠올리고 끝내 입을 다물었다.강솔은 강정숙과 마찬가지로 재산에 별 관심이 없었다.시간은 금세 흘렀다.한 시간 뒤 강정숙이 돌아왔다.강솔은 진환식을 깨워 점심을 먹으라고 했다. “점심 드세요.”진환식은 입맛이 없었다.“조금 더 잘게. 너희 먼저 먹어라.”하지만 오후가 다 지나도록 진환식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저녁이 됐다.강솔은 다시 평소처럼 불렀다. “저녁 드세요.”진환식이 점심과 같은
“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강솔이 천천히 말했다.“거짓말하라는 건 아니야.” 진환식은 강솔과 강정숙의 사이가 각별하다는 걸 알고 있어 먼저 설명했다. “오래전 일로 네 엄마가 괜히 마음 쓰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강솔은 솔직하게 말했다. “이미 늦었어요.”진환식은 이해가 안 된 눈빛이었다.강솔이 바로 설명했다.“엄마한테 벌써 말씀드렸어요.”진환식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언제?”강솔은 아주 솔직했다. “아까 차에서요.”진환식은 지금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강솔과 강정숙 사이에 정말 비밀이 하나도 없는 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역시 여윤재 딸답게 부녀가 나란히 강정숙에게 일러바친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너무 마음 쓰실 필요 없어요.” 강솔이 위로하려던 때.진환식이 아주 복잡한 표정으로 강솔을 바라봤다. 말투에도 걱정이 잔뜩 묻어났다. “솔아.”“네?”“네 엄마가 이 일로 나한테 빈정거리면 네가 한두 마디만 거들어 줄래?” 진환식은 딸의 성격을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벌써 여러 장면을 상상했다.강솔은 멍해졌다.‘무슨 뜻이지?’강솔이 묻기도 전에 신동이 문 앞에 와서 노크했다. “아가씨, 진 회장님의 큰아드님을 찾으십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답니다.”“들어오라고 해.” 진환식이 말했다. 조금 전과 달리 표정이 진지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진무천이 방으로 들어왔다. 방 안을 한 번 훑은 뒤 진환식에게 시선을 멈췄다.“나한테 무슨 볼일이야?” 진환식은 굳은 얼굴이었다.“아버지께서 언제 본가로 돌아오실 생각인지 여쭤보러 왔습니다.” 진무천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여기 계신 지도 꽤 오래됐습니다.”진환식이 바로 거절했다.“당분간 그럴 생각 없어.”진무천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진환식은 바로 나가라는 뜻을 드러냈다.“다른 일 없으면 가. 나 낮잠 잘 거야.”“정숙이랑 지내고 싶으신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래도 집안 체면은 생각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무천은
“네.”강솔이 답했다.“너희 먼저 가. 난 할 일이 좀 있어.” 강정숙은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네.”강솔은 대답한 뒤 진환식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갔다.엄마가 말한 ‘할 일’이 무엇인지 강솔은 대강 짐작했다.조금 전 진무천의 반응과 의사실에서 들은 이야기 때문에 강정숙도 의심을 품은 듯했다. 진환식이 예전에 크게 앓았던 일에 다른 사정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차에 오른 뒤, 강솔과 진환식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노인이 눈을 감고 쉬는 걸 본 강솔은 고민 끝에 핸드폰을 꺼내 강정숙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혹시 외할아버지 일 알아보시려는 거예요?]강정숙은 꽤 뜻밖이었다.딸이 자기 생각을 알아챌 줄은 몰랐다. [왜 그렇게 생각해?][레미한테 가 보세요. 조금 아는 게 있어요.]전에 강솔도 레미에게 부탁해 그 일을 알아본 적이 있었다. 조금씩 실마리가 보일 무렵 중현에게 일이 생겼고, 뒤이어 진환식이 조사 사실을 눈치채 더 알아보지 말라고 하면서 그대로 흐지부지됐다.강정숙은 더 놀랐다.강솔은 자신에게 숨기지 않고 전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알려 줬다.[외할아버지도 두 외삼촌이 한 일이라고 짐작하셨어요.]문장을 읽은 강정숙은 미간을 좁혔다.잠시 뒤, 강정숙은 짧게 답했다. [알았어.]강솔은 메시지를 확인한 뒤 핸드폰 화면을 껐다.그 뒤로 차 안은 조용했다. 진환식이 함께 있으니 평소 말 많던 홍일과 신동도 말을 아꼈다. 반면 뒤차에 탄 진무천은 속이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강정숙이 자신을 몰아붙이며 질문하던 모습을 떠올릴수록 불안감이 커졌다.한참 고민한 끝에 진무천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강정숙이 진 회장 예전 일 의심하는 것 같아. 조사 들어가면 밑에 애들 입 단단히 막아.”상대는 바로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진무천은 전화를 끊었다.앞유리 너머 강솔이 탄 차를 바라보는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한때는 기사에게 속도를 올려 앞차를 들이받으라고 하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정말 충돌한다면 강
다음 날.강솔과 강정숙은 진환식을 모시고 검사를 받으러 갔다. 태휘가 미리 연락해 두긴 했지만 여러 검사를 모두 마치는 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모든 검사가 끝난 뒤.세 사람은 의사실에서 결과를 설명받고 있었다.“진 회장님께서 요즘 마음고생이 많으셨습니까? 감정 기복도 크셨고요?” 의사는 검사 결과를 모두 확인한 뒤 강솔 일행에게 물었다.강솔은 무의식적으로 진환식을 바라봤다.강솔은 대부분 회사에서 일하느라 외할아버지의 평소 상태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진환식은 강정숙이 걱정할까 봐 앞에서는 티도 거의 내지 않았다.강정숙도 아버지를 바라봤다.진환식은 헛기침했다. “큼큼, 좀 그랬지.”“평소에는 마음을 편하게 유지하시고 큰 자극은 피하셔야 합니다.” 의사가 하나씩 당부했다. “혈압과 심박이 갑자기 튀어 오르면 실신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진환식은 바로 맞장구쳤다. “그래, 그래.”강정숙이 물었다. “사소한 자극에도 실신할 수 있나요?”“보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회장님은 여러 해 전 크게 앓아 입원하신 뒤 심장이...” 의사는 숨기지 않고 진환식의 상태를 다 설명하려 했다.“그 정도로 심한 거 아니야.” 진환식이 재빨리 말을 끊었다. 강정숙이 끝까지 캐묻는 건 피하고 싶었다. “넌 걱정하지 마.”“심한 거 아니라면서 왜 그렇게 눈치를 보세요?” 강정숙은 바로 핵심을 찔렀다.진환식은 입을 열었다가 반박도 못 하고 다시 다물었다.옆에서 듣던 강솔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요즘 너무 바빠 외할아버지가 전에 했던 말을 잊고 있었다.외할아버지의 몸.그 상태가 이렇게 된 데에는 두 외삼촌이 원인이었다.“솔아?” 강정숙의 목소리가 생각을 끊었다.강솔이 정신을 차려 보니 의사의 주의사항 설명은 이미 끝나 있었다. 딸이 넋을 놓고 있는 걸 본 강정숙이 한마디 더 물었다. “왜 그래?”강솔은 진환식을 바라봤다.진환식은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세세한 변화를 잘 보는 강정숙은 두 사람의 움직임을 모두 봤다. 무
방 안에서는 창가에 앉은 진환식이 전화 통화중이었다. “언제 돌아오냐?”“곧이 언제인데?”“단아도 같이 오냐?”그 말을 들은 강정숙은 태휘와 통화 중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진환식의 말이 끊긴 틈에 문을 두드렸다. 똑똑-진환식이 소리를 따라 돌아봤다.세 사람이 모두 서 있는 걸 본 진환식은 수화기 너머 태휘에게 말했다. “이따 다시 얘기하자. 일 끝나면 빨리 와. 나도 좀 바쁘다.”통화가 끝났다.진환식은 미소를 띠고 강정숙을 바라봤다. “정숙아, 무슨 일이야?”“여 회장이 어제 아버지가 거의 쓰러질 뻔했다고 하던데요.” 강정숙은 이런 일에 돌려 말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떠세요? 다른 데 불편한 곳은 없고요?”진환식의 시선이 곧바로 여윤재에게 꽂혔다.‘이 녀석이.’‘그걸 그대로 일러바쳐?’여윤재는 태연하게 진환식의 시선을 받았다. “정숙이 물어보잖습니까.”“나 괜찮아.” 진환식은 여윤재를 한 번 노려본 뒤 강정숙에게 말했다. “쟤 말 믿지 마.”“허튼말인지 아닌지는 회장님이 더 잘 아실 겁니다.” 강정숙이 이렇게 나온 이상 여윤재도 더 숨길 이유가 없었다. “어제 거의 쓰러질 뻔한 것 말고도 며칠 전엔 숨도 좀 차셨습니다.”진환식은 눈빛으로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었다면 여윤재는 이미 온몸이 성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냥 잠깐 급해서 숨이 찬 거야.” 진환식은 딸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서둘러 해명했다. “저 녀석이 말하는 만큼 심한 건 아니야.”강정숙이 바로 결정했다.“내일 병원 가서 검사받으세요.”진환식은 말끝을 흐렸다. “안 가면 안 될까...”병원에 가면 강정숙이 몸 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챌 게 분명했다. 자칫 병원에 입원할 수도 있었다.강정숙이 바로 답했다.“돼요.”진환식의 눈이 반짝였다. “진짜?”강정숙의 답이 전과 똑같았다.“네.”진환식이 안도의 숨을 쉬며 입을 열려던 때 강정숙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대신 내일부터 댁으로 돌아가세요.”“정숙아.”진환식의 웃음이 사
“네 엄마 성격 너도 알잖아.” 여윤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정숙이 누구보다 고집이 세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어보면 무조건 용서 안 한다고 할 거야.”강솔은 대답하지 않았다.엄마의 성격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었다.“나도 숨기진 않으마.” 여윤재는 진환식의 상태를 떠올리며 고민 끝에 사실대로 말했다. “이런 걸 묻는 건 네 외할아버지 건강 상태가 좀 안 좋아서야. 어제 같이 걷다가 거의 쓰러질 뻔하셨다.”강솔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에 걱정이 바로 드러났다. “의사한테 진료받으셨어요?”“주치의가 봤어. 오래된 지병이래.” 여윤재는 숨기지 않았다. “좋아지려면 마음 편한 게 중요한데, 회장님은 죄책감이...”여윤재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강솔은 무슨 뜻인지 알았다. 마음에서 생긴 병은 결국 마음에서 풀어야 했다. 외할아버지는 줄곧 엄마의 용서를 바라고 있었다.“엄마한테 말씀드렸어요?” 강솔이 물었다.“아니.”“...”강솔의 눈에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떠올랐다.“말하면 네 엄마를 곤란하게 만들잖아.”여윤재가 이유를 설명했다. “회장님을 용서하면 자기 자신한테 미안할 거고, 용서하지 않았다가 네 외할아버지가 속앓이 끝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평생 죄책감 가질 수도 있어.”그 말을 듣고, 강솔은 여윤재를 한동안 바라봤다.여윤재가 시선을 알아차리고 물었다. “왜?”“회장님은 정말 엄마를 사랑하세요?” 강솔이 여윤재의 감정을 의심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당연하지.” 여윤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대답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확고했다. “왜 그런 걸 물어?”“외할아버지는 엄마의 아버지예요. 엄마가 집에 머물게 했다는 건 아직 마음이 남아 있다는 뜻이에요.” 강솔은 오히려 여윤재보다 상황을 더 정확히 봤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 때문에 용서하지 못하는 것뿐이고요.”여윤재는 말이 없었다.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지금 외할아버지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면 제일 먼저 엄마한테 알려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