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단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도현은 단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거실에는 단아와 태휘 둘만 남았다.꼬박 일 분 가까이 두 사람 모두 입을 열지 않았다. 단아는 낯선 사람을 대하듯 태휘와 시선을 맞췄고, 태휘도 말없이 단아를 바라보기만 했다.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하나 놓여 있는 듯했다.몇 분쯤 흐른 뒤 단아가 먼저 침묵을 깼다. “여기 왜 왔어?”“네가 전해 달라고 한 말 강솔한테서 들었어.” 태휘는 대답하며 도현의 재킷으로 완전히 가려지지 않은 단아의 목 주변을 잠깐 바라봤다.단아가 짧게 답했다. “응.”태휘가 물었다. “너 하도현 좋아해?”단아의 움직임이 멈췄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태휘가 이름을 분명히 했다. “하도현 말이야.”단아가 도현을 좋아한다면 태휘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좋아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내린 결정을 단아에게 말할 생각이었다.“내 사생활이야.” 단아는 정면으로 답하지 않았다. 말투에는 예의를 차린 거리감이 묻어 있었다. “다른 일 없으면 이제 가줘.”태휘는 확신하듯 말했다. “넌 하도현 안 좋아해.”단아가 되물었다. “네가 나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내가 아는 너는 감정 문제를 애매하게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야.” 태휘는 단아와 시선을 맞춘 채 말했다. “하도현을 정말 좋아했으면 아까 바로 그렇다고 했겠지. 이렇게 피해 가는 대답은 안 했을 거야.”단아는 태휘의 추측을 꺾기 위해 무언가 말하려 했다.하지만 태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단아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네 허락 안 받고 네 동생 해외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먼저 진행했어.” 태휘가 상황을 설명했다. “현지에 내가 믿을 만한 사람도 있어. 하도현이 네 동생을 붙잡고 널 협박할 일은 없을 거야.”태휘가 어제 오지 않은 이유도 그 일을 먼저 처리하느라 그랬다.단아가 자기 일에 멋대로 개입했다며 화를 낸다면, 원하면 지금이라도
안경 너머 도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도현은 태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작은 변화라도 찾아내려 했다.태휘가 먼저 물었다. “임단아 씨가 지금 여기에 없습니까?” 표정도 목소리도 아까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도현은 처음에는 없다고 둘러댈 생각이었다. 하지만 최근 지나치게 공교로운 일이 몇 번 이어졌던 게 떠올랐다. 생각을 바꿔 말했다. “있습니다. 지금 쉬고 있는데 제가 불러오죠.”태휘가 짧게 답했다. “부탁드립니다.”도현은 안경을 한번 밀어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층으로 향하기 전 태휘를 몇 초 더 살펴봤지만 특별한 점은 찾지 못했다. 그제야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도현은 단아가 있는 방 문을 열었다.앞서 몸이 많이 지친 탓에 단아는 아직 깊게 잠들어 있었다.도현이 침대 옆으로 다가가자 단아의 목과 쇄골에 남은 붉은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격하게 가까워졌던 흔적이었다. 아래층에서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태휘를 떠올리자 도현의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쳤다.도현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단아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일어나.”단아는 그 손길에 잠에서 깼다.아직 정신이 완전히 들기도 전에 도현이 바로 말했다. “진태휘가 아래에서 너 기다리고 있어.”단아의 몸이 굳었다.‘태휘? 여기엔 왜 온 거지?’도현은 단아의 얼굴을 계속 살피며 물었다. “진태휘가 널 왜 찾아왔을까.”단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도현이 천천히 되물었다. “진짜 몰라?”단아가 짧게 답했다. “응.”막 잠에서 깬 단아는 아직 정신이 반쯤 잠겨 있었다. 그래서 줄곧 멍한 표정이었고, 태휘가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놀란 기색도 선명한 감정이라기보다 의문에 가까워 보였다.단아가 물었다. “혼자 왔어? 아니면 다른 사람도 같이 왔어?”도현이 답했다. “혼자.”단아는 생각하는 척 눈을 내리깔았다.도현은 더 의심하지 않고 단아의 허리를 안아 그대로 품에 들어 올렸다. “가자. 내려가.”단아가 반사적
“정말 그랬다면 목적이 뭐였을까.” 진무천은 그 가능성을 쉽게 믿지 못했다. “HS그룹은 지금 하도현이 맡고 있다는 걸 잊지 마.”한번 경영권을 넘기면 다시 가져오기는 쉽지 않았다.두 사람은 J시 사람이 아니었지만, 도현이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노려 왔다는 건 알고 있었다.중현이 그 정도로 어리석을 리 없었다.도엽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라도 알아내는 게 있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진무천은 알겠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통화가 끝났다.도엽은 머릿속이 엉킨 기분이었다. 한때는 강솔을 계속 막는 계획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 고모 강정숙 몫이었던 지분을 돌려준다 해도 자신들이 지금 가진 자산만으로 충분히 안정적이고 넉넉한 삶을 살 수 있었다.집안에는 중현과 비견할 만큼 능력이 뛰어난 태휘도 있었다.하지만 아버지가 쉽게 손을 놓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너무 잘 알았다.생각이 복잡하게 얽힌 채, 도엽은 핸드폰을 꺼내 중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 대표님, 시간 되면 한번 볼 수 있어요? 얘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중현은 차에 막 올라탄 뒤 메시지를 확인했다.도엽의 메시지를 본 중현은 한 손가락으로 알림을 밀어 치웠다.옆에 앉아 있던 레미가 그 모습을 봤지만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물었다. “진짜 J시로 돌아갈 거야?”중현이 되물었다. “내가 안 돌아가면 강 비서랑 그 사람들 못 빼낸다고 한 건 너잖아?”레미가 답했다. “맞아.”“그럼 가야지.”친구 사이인 만큼 레미는 한마디 조언했다. “그 사람들은 아직 하도현 손에 있어. 네 곁으로 다시 데려오려면 결국 하도현이랑 정면으로 얘기해야 해.”도현은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중현이 강 비서를 돌려달라고 하면 여러 가지를 의심할 게 분명했다.중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별일 없었으면 하도현도 벌써 알고 있을 거야.”레미는 이해가 안 됐다.중현이 느긋하게 덧붙였다. “유상진도 하도현 사람이라며?”레미는
중현의 짧은 한마디에 진무천은 의심이 생겼다.강솔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계속 중현과 거리를 두는 표정이었다. 진무천은 두 걸음 앞으로 나서서 중현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하 대표, 기억이 돌아온 건가요?”‘하중현... 기억을 되찾았다면 우리 계획은 잠시 멈춰야 할지도 몰라...’‘아직 기억이 없는 상태라면, 굳이 강솔에게 자기 동선을 알려 주는 이유가 뭘까?’중현의 깊은 시선이 진무천을 훑었다. “누구시죠?”강솔이 대신 소개했다. “진무천 이사님, 내 외삼촌이야. JX그룹 대표 진태휘 아버지이기도 하고.”중현은 진무천을 두어 번 살핀 뒤 짧게 대답했다. “아.”진무천은 말문이 막혔다.‘고작 ‘아’ 한마디가 끝인가?’강솔은 중현이 그대로 서 있자 물었다. “더 할 말 있어?”중현이 답했다. “없어.”강솔은 문 쪽으로 시선을 한번 보냈다.뜻은 너무 분명했다.할 말이 끝났으면 나가라는 의미였다. 강솔은 중현을 붙잡아 둘 생각이 없었다.중현은 그 눈빛을 알아차렸다. “계속 일해. 더 방해 안 할게.”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덧붙였다.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하고.”강솔은 대꾸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가 오후 업무를 이어 갔다.중현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강솔이 다시 일에 집중하자 조용히 돌아서서 나갔다.대표실에 남은 진무천만 아직 이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멀어지는 중현의 뒷모습을 보며 도엽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생각할수록 이상했다.도엽은 중현이 강솔에게 아무 감정도 없고 오로지 아이 양육권에만 관심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방금 전 모습만 봐서는 도무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강솔이 차갑게 굴어도 중현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일 정도였다. 강솔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진무천은 당사자에게 답을 못 들었으니 강솔에게 물었다. “하중현의 기억이 돌아온 거야?”“몰라요.” 강솔은 솔직하게 답하며 새 사업계획서를 집어 들었다. “저도 외삼촌보다 그 사람과
“제가 여기 와서 사업 자료 보는 건 회사 사람들이 이미 많이 알고 있어요.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고요.”강솔은 아주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태휘 오빠도 숨길 일 아니니까 당당하게 와서 보라고 했고요.”진무천이 입을 열려 하자,강솔이 한마디를 더 보탰다. “혹시 사규가 일부 바뀌었는데 외삼촌이 회사에 자주 안 나오셔서 태휘 오빠가 따로 말씀을 못 드린 걸 수도 있겠네요.”몇 마디뿐이었지만 진무천은 바로 할 말을 잃었다.반박하기도 애매했다. 이건 태휘가 직접 허락한 일이었다.JX그룹의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태휘에게는 자료 열람 범위를 정할 권한이 있었다. 애초에 진무천도 진짜 규정 위반을 따지려던 게 아니라 강솔을 긁으려고 꺼낸 말이었다.“그럴 수도 있겠네. 이 얘기는 그만하자.” 진무천은 자신에게 불리한 화제에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방향을 틀었다. “네가 지금 맡고 있는 의강소프트웨어는 어때?”“계획대로 진행 중이에요.” 강솔은 회사 일에 대해서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도엽 오빠 쪽 회사에서 중간에 방해하지 않았다면 가문 평가 과제도 더 빨리 끝냈을 것 같고요.”진무천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강솔은 문밖을 지키는 사람 쪽을 한번 보고 자세히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며칠 전에 의강소프트웨어 직원 여러 명이 이력서를 낸 적도 없는데 다른 회사에서 고액 연봉 제안을 받았어요. 따라가서 확인해 보니 그 회사가 도엽 오빠 소유더라고요.”진무천은 처음 듣는 일처럼 반응했다. “그런 일이 있었어?”“네.” 강솔은 진무천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지만 굳이 연기를 들춰내지 않았다. “시간 되실 때 도엽 오빠한테 회사 안에서 멋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하세요. 괜히 도엽 오빠 이름에까지 먹칠할 수 있으니까요.”“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반드시 끝까지 확인하게 하마.” 진무천은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강솔은 대꾸하지 않았다.사실 이해가 안 됐다. 이 방에 서로 눈치 볼 외부인도 없는데
강솔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신동도 더 거절하지 않았다.홍일이 함께 있으면 신동도 움직이기 편한 부분이 분명 있었다....다음 날 아침.홍일은 강솔을 JX그룹에 데려다준 뒤 신동과 함께 떠났다. 강솔은 오전 내내 태휘의 대표실에 머물며 여러 핵심 사업의 세부 내용을 읽었다.가능한 한 빨리 내용을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의강소프트웨어의 현재 진행 속도라면 빠르면 보름 남짓 뒤 두 번째 사업이 마무리되고 대금도 들어올 예정이었다. 그때 진씨 집안에서 내준 경영 평가 과제를 끝내고 지분까지 받으면 강솔은 JX그룹에 들어와야 했다.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오림이 미리 주문한 식사를 대표실로 가져왔다. 들어갔을 때 강솔은 마침 손에 들고 있던 자료 한 묶음을 다 읽은 참이었다.“강 대표님, 점심 가져왔습니다.” 오림은 포장을 하나씩 열어 식탁에 정돈했다. “신동 씨가 알려주신 취향대로 주문했습니다.”강솔이 말했다. “고마워요. 신경 써 주셨네요.”오림이 바로 답했다. “제 일입니다.”강솔은 사업계획서를 내려놓았다. 좋아하는 메뉴들로 준비된 걸 보고 핸드폰을 꺼내 신동, 홍일과 함께 쓰는 단톡방을 확인하면서 메시지를 보냈다. [진행 과정은 어때?]신동이 바로 답했다.[순조롭습니다.]홍일도 메시지를 보냈다.[재밌는 얘기 하나 들었습니다.]강솔의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이 번졌다.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 [무슨 얘기?]...한편, 홍일은 맞은편에서 밥을 먹고 있는 신동을 바라봤다. “말해도 돼?”“네 마음대로 해.” 신동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홍일은 바로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아가씨, 알고 싶으십니까?][응.][아가씨께서 2만 원 보내 주시면 알려 드리겠습니다.]강솔은 또 한 번 홍일이 돈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달라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신동 씨, 무슨 얘기야?]홍일은 그 문장을 빤히 보더니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아가씨가 갈수록 인색해지십니다. 큰돈도 많으신 분이 정보 하나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