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도엽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도엽은 핸드폰을 들고 옆으로 비켜나서 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10초쯤 신호가 간 뒤에 통화가 연결됐다. 부드럽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도엽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하 대표님, 지난번에 말씀하신 협력은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까?”도현이 답했다. [서두를 것 없습니다.]도엽이 말했다. “제 쪽 상황은 조금 급해졌습니다.”도현이 물었다. [무슨 뜻이죠?]도엽은 숨기지 않았다. 도현이 마음만 먹으면 금방 알아낼 수 있는 일이었다. “강솔이 집안에서 내준 평가 과제를 예정보다 일찍 마쳤습니다. 곧 JX그룹 지분 20%를 받게 됩니다.”도현이 되물었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도엽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도현은 서두르지 않고 말했다. “협력 범위는 정해져 있습니다. 제가 필요할 때 그쪽에서 강솔을 붙잡아 두고, 그로 인해 생기는 일은 제가 수습하는 겁니다. 그쪽 지분까지 지켜 드리기로 한 건 아닙니다.”도엽이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틀린 말은 아니었다.‘그래도 손을 잡았으면 서로 돕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그런 생각을 하는데 도현의 다음 말이 들렸다. [진씨 집안 둘째 아드님께서 그 정도도 모르고 계셨던 건 아니겠죠?]도엽이 물었다. “그럼 언제 저희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설마 강솔이 지분을 받은 뒤는 아니겠죠.”도현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주주총회는 무리 없이 열릴 줄 알았다. 그런데 주주들이 하나둘 일이 생겨 당장 돌아올 수 없다며, 며칠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잠깐은 중현이 뒤에서 수를 쓴 게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는 모두 정상적이었다. 누가 개입한 흔적은 없었다.한동안 답이 없자 도엽이 다시 물었다. “하 대표님, 듣고 계십니까?”도현이 사실대로 답했다. [정확한 시점은 모릅니다. 기다리기 싫으시면 협력을 취소하셔도 됩니다.]도엽은 말문이 막혔다. 취소하고 싶은 마음은
진무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물론 순순히 넘기고 싶을 리 없었다.하지만 진우찬 앞에서 그런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예전에 정숙이한테 맞장 뜨던 그 배짱은 다 어디 갔어!”진우찬은 화가 치밀었다. 곧 닥칠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꽉 막혔다. “지분이 정말 그 애 손에 들어가면, 앞으로 우리가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정숙이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못 깨어났는지 잊었어?”진무천이 굳은 얼굴로 진우찬을 엄하게 바라보았다. “할 말 다 했냐?”“내 앞에서 무게 잡지 마.” 강솔에게 지분이 넘어가는 걸 막고 싶었던 진우찬은 앞뒤도 가리지 않고 내뱉었다. “형이 정말 강솔한테 지분 넘기면, 사람 시켜서 차로 진정숙 친 거 다 말해 버릴 거야!”진무천을 둘러싼 공기가 급격히 가라앉았다.옆에서 듣던 도엽은 작은아버지가 얼마나 멍청한지 새삼 실감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 없었다.도엽이 그나마 좋게 일러주었다. “고모 일에는 작은아버지도 가담하셨잖아요. 말씀해 봤자 작은아버지께 좋을 게 없습니다.”진우찬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좋을 게 없으면 말고. 강솔이 너희를 좋은 사람으로만 안 보면 돼.”진우찬이 보기에는 진무천이 강솔에게 지분을 주겠다고 한 것 자체가 화해를 청하고 싸움을 끝내겠다는 뜻이었다.그 관계를 망가뜨려 놓으면 됐다.그러면 진무천도 더는 지분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진무천이 칼날 같은 시선으로 진우찬을 보며 낮게 말했다. “말하고 싶으면 해.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신 뒤에 일어날 일을 감당할 자신만 있으면. 경고는 해 뒀다. 아버지 연세가 많으셔. 언제 유언장을 쓰셔도 이상하지 않아.”진우찬이 멈칫했다. 곧 미간이 구겨졌다. 자신이 진무천 일행과 짜고 진정숙을 해쳤다는 걸 아버지가 알면, 유산은 한 푼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그런데...’진우찬은 곧 정신을 차렸다. “형네는 안 무서운데 내가 뭐 겁날 게 있겠어? 구체적으로 계획한 건 전부 형이랑 도엽이잖아. 난 의견 낸 것도 없어
강솔이 옅게 웃었다. “네.”모두 각자의 차에 올랐다.신동의 차에 타는 강솔을 보며 노인은 자랑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역시 우리 진씨 집안 핏줄이야.’‘참 기특하게 해냈어!’진씨 집안 본가로 향하는 길, 강솔은 차창 밖으로 밀려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처음 이곳에 왔던 때가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H시에 막 도착했을 때는 회장님과 외할아버지가 지켜 주고 있어도 드러내 놓고, 또는 뒤에서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여씨 집안 때문에 목숨을 잃을 위기도 있었다.그런데 지금은 집안에서 내준 과제를 완수했다.곧 원래 엄마의 것이었던 지분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띠링-핸드폰에 메시지가 떴다.강정숙이 보낸 것이었다. [우리 솔이, 집안 과제 마친 거 축하해. 소중한 내 딸!]강솔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그저 딸이라고 부른 게 아니었다.강솔이라는 이름을 불러 주었다.‘엄마는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니까.’강정숙이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마음 놓고 서명하고 절차 밟아. 여윤재 회장이랑 내가 다 준비해 뒀어. 이번에는 일이 틀어지거나 위험해질 일 없을 거야.]강솔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여기까지 왔다.이제는 부모가 앞길의 장애물쯤은 치워 줘야 했다.강솔이 답했다. [네.]강솔이 다시 보냈다. [엄마.]강정숙의 답장이 왔다. [응?]강솔은 따스한 눈으로 한 줄을 적었다. [언제나 사랑해요.]메시지를 읽은 강정숙이 웃었다. 손끝을 움직여 짧게 답했다. [집에 와서 밥 먹자, 기다리고 있을게.]강솔이 답했다. [네.]답장을 보내고 나니, 2분 전에 여윤재도 축하 메시지를 보낸 게 보였다. 문장마다 강솔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음과 칭찬이 가득했다.강솔은 평소처럼 감사하다는 말만 돌려보냈다....한편, 그 말 외에는 아무것도 오지 않자, 여윤재가 헛기침하고 핸드폰 화면을 강정숙에게 내밀었다. “딸한테 사랑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알려 줘.”강정숙은
강솔이 잠깐 멈칫했다.하지만 곧 이해됐다. 진씨 집안은 어쨌든 H시의 네 유력 가문 중 하나였다. 집안의 실권을 쥔 진환식에게 강솔의 프로젝트가 끝났다는 소식을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태휘까지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강솔이 옆에 둔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의강소프트웨어 일만 정리하고 내려갈게.” 오늘 의강소프트웨어에 온 이유는 노력의 결실을 확인하는 것 외에도, 직원들의 여행 경비를 결재하기 위해서였다.거기까지 생각하자, 강솔의 시선이 홍일과 신동에게 향했다.엄밀히 말하면 두 사람은 의강소프트웨어의 정식 직원이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 일로도 강솔을 적잖이 도와주었다.강솔의 시선을 느낀 신동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강솔이 곧바로 말했다. “의강소프트웨어 직원들 전부 회삿돈으로 여행 가거든. 너희도 갈래?”두 사람이 동시에 답했다. “안 갑니다.”강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고 싶으면 출발 전까지 마음을 바꿔도 된다고 말하려는데, 홍일이 늘 그렇듯 돈밖에 모르는 기계 같은 소리를 했다. “그만큼 현금으로 주시면 됩니다.”신동이 얼른 선을 그었다.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강솔이 홍일을 보았다. “돈이 많이 부족해?”홍일에게서 월급을 올려 달라거나 현금으로 달라는 말을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두 번째에는 일부러 장난치는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매번 이러니 정말 돈이 급한 사정이 있거나, 큰돈이 들어가는 데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홍일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거리낌없이 답했다. “부족한 건 아닙니다. 그냥 모으고 싶어서요.”“월급 적게 주는 건 아니잖아. 좀 넉넉하게 써도 일 년이면 꽤 모일 텐데. 게다가 너는 일 년 내내 돈을 거의 안 쓰고.” 강솔도 평범하게 살아 본 적이 있어 돈을 모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옷은 강솔이 맞춰 주었다.먹고 입고 자는 것부터 이동에 드는 비용까지 전부 책임졌다.따로 돈 쓸 곳이 많지도 않았다.처음으로 홍일
강솔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예를 들면요?”제품기획 담당자가 목을 가다듬고 입술을 축이더니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여행 일수를 며칠 더 늘려 주시는 건 어떨까요?”강솔은 흔쾌히 답했다. “그래요. 대신 하루에 한 명씩 온라인으로 대응할 당번은 정해 주세요. 병원에서 장애가 생겨 연락하면 처리해야 하니까요.”“그건 당연하죠.” 제품기획 담당자는 프로젝트를 잘 알고 있었다. 서비스를 개통하고 대금을 받아도 유지 보수가 필요하다는 건 기본 상식이었다. “말씀 안 하셨어도 당번표는 짤 생각이었습니다.”당번이라고 해 봐야 대개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일이 생겨도 보통은 오래 걸리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다.“그럼 됐어요.” 강솔은 더 보태지 않았다.제품기획 담당자가 물었다. “그 밖에는요?”강솔이 되물었다. “네?”제품기획 담당자가 바로 물었다. “다른 조건은 없으십니까?”강솔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왜 그 부분을 자꾸 확인하는지 알 수 없었다.제품기획 담당자가 조금 으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L시 쪽 1차 프로젝트, 이미 완료했습니다. 검수하고 서명받은 다음 대금만 받으면 됩니다.”강솔은 잠깐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이내 강솔의 눈이 커졌다.강솔에게는 뜻밖의 소식이었다.제품기획 담당자가 들어와 그런 말을 할 때부터 일정이 앞당겨질 수 있겠다고 짐작은 했다. 하지만 벌써 끝났을 줄은 몰랐다.개발총괄이 말을 이었다. “대표님만 괜찮으시면 사람을 보내겠습니다.”강솔은 아직 완전히 실감하지 못했다. “병원 쪽이랑 협의도 다 됐어요?”강솔은 업무 일지를 매일 확인하지 않았다. 보통 일주일에 한 번 훑어보았고, 때로는 일지를 읽는 대신 제품기획 담당자나 각 팀장에게 진척 정도를 직접 묻기도 했다.지난번에는 보름 정도 더 걸린다고 했다.‘그런데 일주일 만에 끝났다고?’“네, 다 됐습니다.” 대표가 놀라는 모습을 보니 제품기획 담당자는 조금 뿌듯했다. “모든 절차를 개발총괄 쪽과 확인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 안 드린 건
운전하던 임풍이 입을 열었다. “만약 주주들이 약속을 안 지키면요? 최근에 하도현 대표님도 따로 만나서 식사하셨다던데요.” 한번 생각하면 다른 가능성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임풍은 남을 쉽게 믿지 못했다.강 비서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약속은 지킬 겁니다.”중현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중현이 고개를 돌려 강 비서를 보았다.어째서 그렇게 자신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이었다.강 비서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대표님의 판단과 준비를 믿어도 됩니다. 주주들은 전부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대주주로 있어야 마음을 놓을 수 있는지 잘 압니다.”중현의 기억은 텅 비어 있었다. 방금 들은 이야기도 전혀 생각나지 않았지만 깊이 고민하지는 않았다. 대신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강솔이 진씨 집안 지분을 받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리지?”강 비서가 대답했다. “며칠 남았습니다.”“주주총회는 그때까지 미뤄.” 중현은 자신 때문에 강솔에게 일이 생기는 걸 원하지 않았다. 도현의 성격상 지분을 손에 넣지 못하면 지안이나 강솔을 이용해 압박할 가능성이 컸다.지금은 여전히 기억이 없는 상태였다.여기에 문제까지 안겨주면 강솔은 자신을 더 달갑지 않게 여길 터였다.중현이 당부했다. “이유는 자연스럽게 만들고.”강 비서가 답했다. “알겠습니다.”“일 끝나면 내가 왜 기억을 잃었는지도 알아봐.” 중현은 계속 기억 없이 살고 싶지 않았다. 강솔과 자신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했다.“이미 확인했습니다.” 강 비서가 태블릿에서 자료를 띄워 건넸다. “외상 때문에 기억을 잃으신 게 아닙니다. 최면 때문입니다.”“최면을 건 의사는 이분입니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최면 전문가, 심준 교수입니다.”중현은 태블릿을 받아 꼼꼼하게 읽었다.심준에 관한 자료를 전부 살펴본 뒤에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최면으로 잊은 거라면, 다시 최면을 걸어서 되찾을 가능성도 높겠지.’‘그런데...’중현은 일을 척척 알아서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