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01화

Author: 주 한잔
이민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나도 어쩔 수 없소. 황명의 뜻을 거스를 수 없지 않소?”

그는 오히려 소우연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낭자, 낭자가 폐하께 청하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겠소?”

소우연은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방금까지는 나를 사랑한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나보고 혼인을 막아 달라고 하는 것이오?”

“그럴 리가 있겠소?”

이민수는 다급히 변명했지만, 이미 소우연의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내가 정말 오라버니에게 속을 거라고 생각했소?”

그녀는 속으로 계산을 굴렸다.

‘이민수가 이렇게까지 나를 설득하려는 이유가 있을 거야.’

그래서 섣불리 강하게 거절하지 않고, 적당히 떠보는 태도를 취했다.

어차피 그녀가 반드시 막아야 할 것은, 이민수와 소우희의 혼인.

그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낭자, 가지 마시오. 화내지 마시오.”

“아직 우희 낭자와 난 혼례를 치른 사이는 아니지 않소?”

그녀가 돌아서려 하자, 이민수는 오히려 안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내게 미련이 남아 있는 듯 하군.’

이민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소우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일부러 볼을 부풀렸다.

그러자 이민수는 그녀를 더욱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붉은색 비단옷을 입고 매화 사이에 서 있는 그녀는 눈 속에 핀 꽃처럼 매혹적이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토라진 표정까지.

그는 한순간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낭자, 정말 화난 것이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으나, 소우연은 살짝 몸을 피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오라버니가 누구를 아내로 맞이하든 상관하지 않겠소.”

그러나 그녀는 곧 덧붙였다.

“다만, 그 상대가 소우희라면… 난 다시는 오라버니를 보지 않을 것이오.”

이민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낭자, 그렇다면 낭자는 아직도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오?”

그는 속으로 흥분했다.

'만약 진심으로 날 미워했다면, 이렇게까지 감정을 보이지는 않았겠지.'

그는 다시 한번 그녀를 껴안고 싶었지만, 소우연은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02화

    이민수는 잠시 말을 잃었다.눈앞의 소우연은 예전과는 완전히 달랐다.그녀와 오랜 시간을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이 여자가 이렇게 매력적인 사람이었나?’‘아니면 혼례를 하고 나니 더 이상 부끄러울 것도 없어진 건가?’이민수는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스쳤다.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녀를 다시 붙잡는 것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그러면… 내가 방법을 찾아 낭자를 정실부인으로 맞이하겠소. 어떠시오?”소우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내가 세자빈이 될 수 있다는 말이오?”이민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금 더 나아갔다.“낭자가 원한다면, 태자비 자리까지도 보장할 수 있소.”태자비.소우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역시 평서왕부의 야망은 황위로 향해 있구나.’그녀는 일부러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기는 한데, 나중에 말을 바꾸시면 나는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오?”이민수는 순간 말을 멈췄다.“그럼 낭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오?”소우연은 조용히 말했다.“문서를 남겨 주시오.”이민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그건 곤란하오.”그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혹시라도 낭자가 나를 속이면, 나는 어찌 되겠소?”소우연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증서 하나 남겨둘 수 없다는 것이오? 혹시 아직도 소우희를 잊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이민수는 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그럴 리가 있겠소? 우희 낭자는 이미 평춘왕에게 시집갈 몸이 아니오?”“정말 낭자를 완전히 단념하신 것이오?”“당연하오.”소우연은 그의 태도를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오라버니가 내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오?”그제야 이민수는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이것을…”그는 그녀의 손에 약병을 쥐여 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이것을 복용하면 아이를 가질 일이 없소.”소우연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이민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낭자가 나와 함께할 생각이라면, 절대 그 자식과 아이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03화

    찬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혹시 섣달그믐날 밤에 눈이라도 내리는 걸까?소우연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왕비마마, 바로 단향궁으로 돌아가지 않으십니까?”정연이 그녀가 매화원을 향해 가는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이민수가 내 매화 감상을 방해한다고 해서, 내가 포기할 이유는 없겠지?”지금 단향궁으로 돌아가 봤자, 덕빈은 휴식을 취하고 있고, 혼자 방에 있어 봤자 불편하기만 할 터였다.“알겠습니다.”정연도 그녀를 따라 매화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약 반 시진이 지나고, 하늘에서 함박눈이 조용히 내리기 시작했다.주인과 시녀는 천천히 단향궁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눈발이 점점 거세졌다.정연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모두 제 탓입니다.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소우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소복이 내리는 눈송이가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괜찮다. 오히려 좋은걸?”차가운 바람과 눈은,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금 깨닫게 해 주었다.예전 같았다면, 오늘 이민수가 했던 말들을 곱씹으며 밤을 새웠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의 말이 하나도 진심으로 들리지 않았다.그는 변하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거짓과 위선으로 사람을 속이는 사람이었다.“왕비마마, 저기 왕야께서 오십니다!”정연의 말에 소우연은 정신을 차렸다.눈앞을 바라보니, 간석이 우산을 들고 이육진의 휠체어를 밀고 오고 있었다.이육진의 손에는 또 다른 우산이 들려 있었다.소우연은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소첩, 왕야를 뵙습니다.”그러나 그녀가 인사를 다 올리기도 전에, 이육진이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손을 잡았다.“부인, 춥지는 않소?”그의 손은 따뜻했다.소우연은 손에 들고 있던 탕파자를 살짝 흔들며 웃었다.“왕야께서 챙겨주신 덕분에, 하나도 춥지 않습니다.”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이육진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외투를 정리해 주었다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04화

    대전 안, 대신들의 은밀한 속삭임이 귓가를 스쳤다.하지만 소우연은 개의치 않았다.그녀는 이육진의 휠체어를 조용히 밀며, 궁인의 안내를 받아 지정된 좌석으로 향했다.그 자리는 원래 태자의 자리였다.하지만 현재 상운국에는 태자가 없었다.황제의 유일한 자손인 이육진을 위해 덕빈이 직접 그 자리를 남겨둔 것이었다.그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 해에도 그 자리는 결코 다른 이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대전 한쪽, 소홍범과 소현준이 앉아 있었다.그들은 소우연이 이육진을 모시고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과거 같았더라면,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수군대는 가운데, 소우연은 얼굴을 붉히며 도망치고 싶어 했을 것이다.그러나 오늘의 그녀는 달랐다.그녀는 어깨를 곧게 펴고,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이육진을 이끌었다.그것도 그들의 반응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도로 말이다.그리고… 그 모습을 눈여겨보는 또 다른 이들이 있었다.평서왕 이남진, 그리고 이민수.이남진은 손에 든 찻잔을 가만히 내려놓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낭자가 저렇게나 절색이었나…”다행히도, 그의 아들은 여색에 현혹되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이 여자는 아주 귀찮은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그러나, 이남진은 모르고 있었다.바로 옆에서, 이민수가 그녀를 바라보며 씁쓸한 감정을 삼키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이 여인은… 원래 내 것이었어.’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살짝 쥐었다.그 순간.“왕야, 왕비마마, 근래 건강은 어떠하십니까?”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육진은 시선을 들었다.그 앞에 선 사람은 정승, 정태부였다.그는 한때 황태자의 스승이자, 이육진에게 학문을 가르친 은사였다.이육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덕분에 저는 건강합니다.”그러고는 되묻듯 말했다.“스승님의 건강은 어떠하신지요?”소우연도 조용히 미소를 머금고, 예의를 갖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정태부는 오랜 세월 조정에서 물러나 있었으나, 이번 연회에는 이육진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05화

    내시총관 수현이 연회의 시작을 알리자, 궁녀들이 일제히 요리를 올리기 시작했다.각지에서 공수된 최고급 음식들, 서역에서 들여온 진귀한 포도주가 금빛 잔에 가득 채워지고, 강남과 강북의 별미가 차례로 상에 올랐다.궁중 악사들의 연주가 시작되고, 교방사의 무희들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등장해 우아하게 춤을 추었다.겨울의 추위를 잊게 만드는 화려한 광경이었다덕원궁은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오랜만이구나.”그러나 그때… 누군가 다가와 잔을 들었다.소우연이 고개를 들어보니, 평춘왕, 이종대였다.“숙부님.”이육진은 무심한 듯 잔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평소라면 이종대와의 대화를 피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소우연도 예의상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이종대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그러나 이내 본래의 표정을 되찾고, 곁에 있던 소년의 팔을 살짝 잡아끌었다.“이 분은 바로 회남왕이시다. 어서 인사드리거라.” 그러고는 다시 이육진을 향해 말했다.“이 아이는 내 장남, 이지윤이네.”“형님, 처음 뵙겠습니다. 이지윤이라고 합니다.”이지윤이 단정하게 손을 모아 예를 올렸다.“형수님, 처음 뵙겠습니다.”소우연을 향해서도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그의 얼굴은 전형적인 국자형이었다.눈매는 날카로웠고, 시종일관 두 눈을 번뜩였다.소우연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역시 부전자전이구나.’이종대가 이제야 이육진을 찾아온 것도,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간을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그녀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피하자, 이지윤이 순간적으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역시나…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군.’소우연이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이육진이 서늘한 눈빛을 보냈다.“숙부님, 공연이나 즐기러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이종대는 실소를 머금으며 아들을 데리고 자리로 돌아갔다.소우연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그러나 이육진은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부인,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는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06화

    소현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육진과 소우연에게 향했다.두 사람은 오랜 세월을 함께한 듯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은빛 가면을 쓴 채 검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이육진.그는 단정한 자세를 유지한 채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회남왕, 이육진.만약 그가 폐위되지 않았다면, 만약 그가 불구가 되지 않았다면… 소우연은 그와 혼인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소현준의 미간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그가 왕위 계승자로 남아 있었다면, 그가 여전히 건장한 몸이었다면… 소우연은 절대 그 곁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이제야 그는 깨달았다.소우연이 이제는 그들에게 전혀 마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그녀는 더 이상 소씨 가문의 편을 들지도, 형식적으로나마 정을 나누려 하지도 않았다.그날, 그가 회남왕 관저를 찾았을 때 소우연이 보였던 차가운 태도를 떠올리며, 그는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그가 자리를 뜨려던 순간…“이보시오, 처남.”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현준이 멈춰 서자, 평춘왕, 이종대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장난기 어린 미소였지만, 그 속에는 노골적인 조롱이 담겨 있었다.“어찌 이리 냉정하게 날 보는 것인가?”소현준은 주먹을 꽉 쥐었지만, 끝내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였다.오늘은 섣달그믐날.그리고, 단 아홉 날 후면, 소우희가 이종대의 정식 부인이 될 터였다.‘흥, 장차 가족이 될 몸인데 너무 냉정하군.”이종대는 가벼운 농담을 던지듯 중얼거렸지만, 옆에 있던 이지윤은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아버지를 바라볼 뿐이었다.저건 냉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쓰디쓴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소현준이 자리로 돌아오자, 소홍범이 다급히 물었다.“세자 저하는 뭐라고 하더냐?”소현준은 무겁게 앉아 주먹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고개를 저었다.“우희는 결국 평춘왕에게 시집갈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쾅!소홍범의 손에서 술잔이 미끄러져 나가며, 탁자 위의 도자기 그릇과 부딪쳐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07화

    “연아?”이육진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그런데 돌아보니, 소우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답답한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살짝 돌려 창밖을 가리켰다.‘저기, 너의 부친이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소우연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증오하는 것은 자들이 저를 다른 이와 다르게 대했던 점이지, 저를 왕부로 보낸 것 자체는 아닙니다.”하지만 소우연은 몇 마디는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괜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말이다.그녀의 말을 들은 이육진은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억누르지 못했다.이육진은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그리고 서서히 입꼬리를 올렸다.“…정말이냐?”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날카로운 기운이 서려 있었지만, 그 안에는 확실히 이전보다 부드러움이 배어 있었다.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기에, 이육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그러고 나서야, 차창 밖을 향해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소 장군, 마차를 가로막은 이유가 무엇이오?”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마차 밖, 간석이 문을 열고 발을 물렸다.소홍범이 시선을 들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여전히 은빛 가면을 쓴 이육진과 그의 옆에서 시선을 피하는 소우연이었다.“신, 신첩의 둘째 딸, 소우희를 구해주십시오!”“왕야, 왕비마마께 간곡히 청합니다!”소홍범이 다급하게 말하며 머리를 조아렸다.그러나, 이육진은 무심히 옷깃을 정리하며 차갑게 물었다.“소 장군은 무엇을 근거로 내가 장군의 딸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그 말뜻 속에는 조소가 서려 있었다.의 명성이 갑자기 좋아진 것인가?분명 세상 사람들은 그를 잔혹하고 냉혈한 존재라고 부르지 않았던가?그런 사람이 누군가를 구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소우연조차 더 이상 소씨 가문을 가족으로 여기지 않는데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08화

    간석은 마치 이육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조용히 마차의 문을 닫았다.진규는 태연하게 채찍을 들어 올렸다.찰나의 순간, 채찍이 가차 없이 휘둘러졌다.끝이 소홍범의 발치 가까이 스치고 지나갔다.소홍범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고, 차가운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멀어지는 마차의 바퀴 소리, 은은하게 울리는 마차 장식의 방울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그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마차의 문이 닫히기 직전, 그가 본 소우연의 눈빛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겨울날 얼음보다 차가운 시선, 날카로운 서릿바람처럼 그의 가슴을 베어내는 듯한 눈빛.그제야 그는 확신했다.소우연은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마음대로 휘둘러도 괜찮은 아이가 아니었다.그녀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멀어져가는 마차를 보며 그는 가슴이 매우 답답했다.그가 예전에 소우연을 특별히 아껴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소씨 가문에서 그녀가 먹고 입는 것에 부족함은 없지 않았는가?마차 안.이육진은 소우연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조금 전 질문, 이제 대답해 줄 수 있겠느냐?”소우연은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왕야, 정말 알고 싶으십니까?”“그렇다. 아주 많이 알고 싶다.”그녀가 원하는 것을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다시는 외롭거나, 슬퍼지는 일이 없도록.소우연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전… 부드럽고 쫀득한 과자를 좋아하고, 여름에는 눈처럼 새하얀 옷을 입는 걸 좋아합니다. 연초록빛을 띤 맑은 색감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화려하지 않은 장신구를 선호합니다.”이육진은 그녀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듣고 있었다.“그리고?”“…그것뿐이에요.”그녀가 말을 맺자, 이육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소우연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이육진은 부드럽게 물었다.“네가 무엇을 갖고 싶은지 말하지 않았구나.”소우연은 그제야 가볍게 웃었다.그녀는 그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고개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09화

    이것이 어쩌면 하늘이 자신에게 베푼 단 하나의 선물일지도 몰랐다.설날 밤, 대다수의 백성들은 아직 잠들지 않았고, 거리에는 상인들이 장사를 계속하고 있었으며, 주점들도 문을 닫지 않고 있었다.밤하늘에는 간간이 폭죽이 터지며, 경성은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소우연은 마차의 창문을 살짝 열었다.쌓인 눈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여전히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왕부에 도착한 것은 자시 무렵이었다.그때가 되자, 폭죽 소리가 더욱 요란해졌고, 이육진은 그녀에게 함께 왕부 대문 앞에서 불꽃놀이를 보자고 했다.곧이어, 간석이 준비한 수많은 폭죽과 불꽃놀이가 하늘을 수놓았다.왕부 하인들과 궁녀들까지도 환호성을 질렀다.눈부시게 피어나는 불꽃을 보며, 소우연은 차분히 미소를 지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지만, 여전히 조용했다.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육진이 물었다.“연아, 마음에 드느냐?”이육진은 그녀가 유독 조용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다른 여인들이라면 벌써 손뼉을 치며 웃고 있을 터였다.그녀는 자신이 왕부에 오는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한 번도 마음껏 웃어 본 적이 없었다.정말로, 그녀는 진심으로 회남왕부 안주인의 삶을 받아들인 것일까?소우연은 그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좋아요.”그녀는 폭죽이 터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문득 떠올렸다.‘전생에서 내가 죽고 나서, 소우희와 이민수는 얼마나 행복했을까?’‘그들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 슬퍼했을까?’‘지금쯤 소우희는 눈물을 흘리고 있을까? 이민수는 가슴을 치며, 잃어버린 사랑을 후회하고 있을까?’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설날이 지나고, 초하루, 이틀 동안 이육진은 계속 황궁에 머물렀다.그동안, 소우연은 왕부에서 그를 위한 연고를 만들고 있었다.그때, 정연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방금 진우가 약방에 다녀오다가, 멀리서 우희 아씨가 지켜보는 걸 보았답니다.”“…지켜봤다고?”정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마

Latest chapter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82화

    용부에 도착하자 하인이 다가와 알리겠다고 했지만, 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미리 알리지 않으셔도 돼요.”정연과 진우를 데리고 주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소우연은 마당 한가운데서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는 용강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얇은 담요 하나 덮은 채 대나무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그의 온몸을 감싸며 은은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햇살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소우연은 잠시 숨을 삼켰다.곁에 있던 호위가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저는 태자빈입니다. 용 감정과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호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그는 그녀를 몰라볼 리 없었다. 주군께서 가장 자주 안부를 묻던 이였다. 위급한 상황에는 도우라는 명까지 내려졌으니, 그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과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누구도 들이지 말고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발소리조차 삼키며 마당을 가로질렀다.낙엽과 풀이 깔린 바닥 위로 바스락이는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돌려보내라.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용강한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소우연은 멈추지 않았다.“제가 오늘 올 거라는 예감이 들진 않으셨나요?”그제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햇살을 뚫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그대로 누운 채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했다.“태자빈 마마셨군요. 자리에 앉으시지요.”소우연은 그제야 그의 옆에 놓인 또 하나의 안락의자를 발견했다.방석까지 가지런히 놓인 자리가, 누가 봐도 ‘그녀’를 기다린 자리였다.“이걸 미리 준비하셨군요. 오늘 제가 올 걸 아셨던 거네요.”“예. 그리고 약간의 수를 써서 태자 전하께서 잠시 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단둘이 뵙고 싶었거든요.”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맥해드릴게요.”“괜찮습니다…”그의 말이 끝나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81화

    이민수는 혜주와 소범준만 남긴 채,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가 떠난 뒤, 아령은 소씨 가문 안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 소지윤에게 아이를 얻기 위한 계획도 한결 수월해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주는 속으로 생각했다.아씨는 누구에게도 깊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소지윤 대인에게만은 그 마음이 다른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왜 하필 그의 아이를 가지려 하시는 걸까.한편, 태자부.이육진은 연회를 열고, 용강한과 심소균을 초대했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즈음, 소우연이 용강한더러 ‘오라버니’라 부르자 심소균은 술잔을 들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아니…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지?’태자빈이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라면, 절대 가벼운 인연이 아닐 터.그보다 더 놀라운 건, 태자 이육진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심소균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에, 괜히 청주를 몇 잔 더 들이켰다.“그냥 조용히 마시죠.”용강한은 무심히 말하며 자신도 잔을 비웠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소우희는 이미 죽었다.그토록 집요하게 소우연을 괴롭히던 이가 사라졌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법도 했다.하지만, 연회 자리를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어딘가 무거웠다.심소균은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용강한은 알고 있었다.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심소균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자, 이육진은 하인을 불러 그를 데려가게 했다.연회가 마무리되고, 소우연이 조심스레 물었다.“오라버니,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세요?”“괜찮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웃었지만, 이어진 기침은 거셌고… 이내 곧 수건에는 선혈이 스며들었다.그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망토를 여미고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띠었다.그러나 그를 지켜보는 눈은 날카로웠다.소우연은 물론, 이육진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용 감정, 네 몸 상태가 왜 이리 나빠졌느냐.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그는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80화

    서재 안은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숨막히는 분위기로 가득했다.이민수는 의연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희가 소우연에게 얼마나 애원했는지, 부인께서 또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 다들 기억하시겠지요? 그런데도 소우연은 우희를 단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답니다.”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지금 잠시 조용하다고 이게 끝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내민 손길을 뿌리치셨으니, 훗날 다시 찾아오신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고, 서늘한 눈빛을 떨구었다.“우희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령이 눈물로 애걸복걸하지 않았다면… 소씨 가문을 위해 이 더러운 일에 제 발로 들어설 생각 따윈 없었습니다.어차피 저희 평서왕부는, 태자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소홍범의 안색이 굳어졌다.평서왕의 야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 이육진이 불구가 되고 얼굴까지 망가졌을 무렵, 평서왕은 황태자의 자리를 가장 가까이서 노릴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다. 비록 직접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의 장남 이민수가 황제에게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가 될 거란 이야기는 조정에 이미 돌고 있었다.수년간 평서왕부는 조용히 인맥을 조율하고 관료를 포섭해왔다. 이육진이 회복했다고는 하나, 평서왕 부자의 야망은 그 무엇으로도 꺾이지 않았다.소씨 가문은 이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아버지…”소현우가 조용히 일어섰다. 우희를 향한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소우연에 대한 원망은 이미 마음속에서 불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지옥이라면, 차라리 평서왕세자의 손을 잡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소홍범은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바라보았다.소현준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소우연을 직접 만나야 하나… 아직은 이르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그 순간.이민수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자, 소현우가 갑작스레 그의 등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79화

    “누구지?” 임진숙이 물었다.“평서왕부의 세자저하, 그리고 스스로 둘째 아씨의 지기라 밝힌 여인입니다.”소현우가 곧장 말했다. “어머니, 우희와 친하다고 했던 그 손수건 친구입니다. 어제 시신 수습을 도왔던 그 아가씨예요.”임진숙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모셔라. 우희의 친구라니... 잘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예.”소현우는 급히 나가 마중을 나갔다.지금의 소씨 가문에겐 더 이상 발버둥칠 힘도, 핑계도 없었다.평서왕 세자 이민수, 한때는 소우희의 혼처 상대였던 사내. 소우연만 아니었다면, 소씨 가문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일도, 우희가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자신이 직접 여동생의 목을 조르는 죄를 짓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이민수가 도착하자, 병중에 있던 소홍범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맞았다.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다.태자부는 이제 발붙일 수 있는 곳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아니었다.소씨 가문이 마지막으로 기대어볼 곳은 오직 평서왕부뿐.본래부터도 세상은 소씨 가문이 평서왕부의 그늘 아래 있다고 여겨왔다.“소 장군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다시 뵙는 자리가 이리도 쓸쓸할 줄은 몰랐습니다.”소홍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얼굴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있던 소한준은 냉랭하게 내뱉었다.“소우연만 없었더라면, 우희는 진작에 세자저하의 곁에 있었을 겁니다. 이런 참변도 없었겠지요.”이민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 다 지켜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형식적인 위로가 몇 마디 오간 뒤, 아령은 이민수의 배려로 이당에 남아 임진숙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소홍범과 이민수, 소현우, 소현준은 서재로 향했고, 소한준은 하인의 부축을 받아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임진숙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참을 흐느꼈다.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았다.‘우리 우희가 왜 이리 비참하게 갔을까… 우리 집안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그녀는 끝없는 자책과 회한 속에 빠져 있었다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78화

    “그때는 정말로 믿었어. 그 은인이 우리 어머니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피를 말리며 상운국에 도착했을 땐 외가 쪽은 이미 떠난 뒤였지. 나중에야 들었어. 멀리 남강으로 이사했다는 걸 말이야. 그 은인은 어머니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나 봐. 결국 어머니를 다시 백화루에 팔아넘겼어. 그리고 나도… 결국 기생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지.”아령은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로 조용히 혜주를 바라봤다.“넌 어떻게 생각해? 내 이모인 임진숙이라는 사람… 참 무섭지 않아? 그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지 않아? 왜 그 사람은 고귀한 장군 부인으로 살아가고, 우리 어머니는 천한 기생이어야 해? 왜 그 사람 자식들은 다들 한 자리씩 가질 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천한 신분이었던 걸까? 우리 어머니가 그걸 참지 못했어. 나도 마찬가지였고.”아령의 눈빛은 억눌린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그래서 맹세했어. 어머니랑.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기회가 생긴다면, 꼭 그 사람과 그 사람 가문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겠다고.”그녀는 눈물을 훔친 뒤, 환하게 웃었다.그 미소는 해맑았지만, 그 속에 담긴 결심은 날카롭고 서늘했다.“그게 바로 내가 살아 있는 이유야.”그 이야기를 들은 혜주는 마음 깊은 곳이 흔들렸다.‘그랬군요… 그래서…’소 부인 임진숙. 겉으론 다정하고 자애로워 보였지만, 어린 동생을 백화루 문 앞에 유기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분명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이중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소우희 아씨가 그렇게 악랄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군요.’‘진짜…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네요…’“그 진홍색 비단함, 꼭 잘 보관해. 그 안엔… 언젠가 그 집안 사람들의 뼛가루를 담게 될 거야. 그래야 어머니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테니까.”아령은 혜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너도 쉽지 않은 삶을 살았잖아. 그 마음, 나도 잘 알아. 평서왕부로 돌아가면 널 풀어줄거야. 그때 내가 준 돈으로 아무도 널 모르는 곳에 가서… 조용히, 너답게 살아.”그 말을 들은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77화

    그녀가 한때 이민수의 침소를 지키던 몸이었다는 사실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그랬군요...”소현우는 장정답지 않게 눈가가 붉어졌다.멀찍이서 하인들이 수레를 끌고 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저건...”“우희 언니에요.”아령은 숨김없이 고백하며, 눈가를 눌렀다. 슬픔을 삭이는 듯한 손짓이었다.소현우에게는 낯선 장면이었다.소우희에게 이런 절절한 마음을 나누던 벗이 있었던가.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소현준은 그리 쉽게 믿지 않았다.여인의 말은 빈틈이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그럼에도 혜주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었다.소현준은 혜주를 일으켜 세우며 눈을 맞췄다.“정말... 둘째를 원망하지 않느냐?”혜주는 힘 있게 고개를 저었다. 그 눈빛엔 감사와 충성이 담긴 듯 보였다.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그녀는 소우희를 증오했다. 결국 바랐던 대로 소우희는 혀를 잃고,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그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것이 보상받은 기분이었다.소현우는 그런 혜주의 내면까지는 읽지 못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어릴 적부터 함께한 사이니... 주인과 종이라도 정이 있었겠지.”사실 혀를 자른 것도 그날 격분한 소홍범의 지시였다.이제 소우희는 죽었고, 더는 이 하녀에게 뭐라 할 이유도 없었다.소현우는 이마를 짚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아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고맙다. 혜주가 그대 곁에서 지낼 수 있다면... 그 또한 우희가 남긴 인연이라 생각한다.”아령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오라버니... 아니, 장군님. 죄송해요. 순간 감정이 북받쳐서...”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치 실수라도 한 듯 웃어 보였다.소현우는 손을 내저었다.“우희의 벗이라면, 오라버니라 불러도 괜찮다.”잠시 후, 소씨 가문의 하인들이 아령 일행의 수레 대신 소우희의 시신을 직접 실었다.이제 그녀를 보내는 건, 가족의 몫이었다.소현준은 형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형은 어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76화

    전날엔 폭우가, 오늘은 뙤약볕이 내리쬐었다.이런 날씨 속에서, 소우희의 시신은 또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을까.강직한 무장이자 소씨 가문의 주인인 소홍범조차 그 앞에선 중심을 잃을 뻔했다.말을 꺼내려다 삼킨 그는, 결국 큰아들 소현우와 둘째 소현준에게 시신을 찾으러 가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난장골.산바람은 살을 찌를 듯이 뜨겁고, 공기마저 눅눅하게 달아올라 있었다.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숙취에 시달리던 소현우는 동생과 함께 난장골에 도착했다.주위를 둘러보니, 시신을 찾아 이곳을 헤매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그중 한 무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희고 단정한 옷차림의 소녀가 한 대의 수레를 따라가고 있었고, 수레 위엔 희미한 천이 덮인 시신 하나가 실려 있었다.소녀의 눈가엔 희미한 붉은 기가 맴돌았다.썩은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소현준은 코끝을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호위병 하나는 이미 참지 못하고 옆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소현준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둘째 아씨 시신부터 찾아라.”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하인들은 이를 악물고 악취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였다.하얀 옷의 소녀와 그 일행이 소씨 가문의 마차 앞으로 다가왔고, 소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실례합니다. 혹시 소씨 가문의 도련님들이신지요?”마차 안에 있던 소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마차 옆에 서 있던 소현준만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그리고 그 소녀 옆에 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혜주였다.혜주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조용히 예를 올렸다.그 눈동자엔 아련한 빛이 어려 있었고, 그리움과 슬픔이 섞인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소현준은 미간을 좁히며 소녀에게 물었다.“너는 누구냐?”시선은 혜주에게 있었지만, 질문은 분명 그 소녀에게 향한 것이었다.소녀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몸을 낮추며 답했다.“아령이라 합니다. 예전에 소우희 아씨를 몇 차례 뵌 적이 있고, 개인적인 은혜를 입은 바 있습니다. 서로 손수건을 나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75화

    반 시진이 지나고, 어느덧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붉게 타오른 노을이 하늘 끝에 걸려 있었고, 맑고 푸른 하늘은 마치 물로 씻어낸 듯 투명했다.그 풍경은 마치 소우연의 마음과도 같았다.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 가볍고 평온했다.소우희는 죽었다.이 세계의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남주는 더 이상 남자 구실을 할 수 없었다.모든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새로 쓰일 터였다.진원 장군부.소현우는 돌아오자마자 술을 들이켰고, 그날 밤을 고스란히 의식을 잃은 채로 보냈다.그리고 다음 날, 해가 지기 직전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헝클어진 머리에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채, 그는 하인에게 명했다.“소씨 가문 사람들을 전부 정청으로 불러라.”며칠째 앓고 있던 소홍범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군의 업무는 거의 대부분 부장들에게 넘긴 상황이었고,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이육진이 그의 군권을 서서히 회수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지금 그의 수하 중 대부분은 본래 이육진의 옛 부하였다.이육진은 별다른 수를 쓰지 않아도, 그저 말 한마디면 모두가 따랐다.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소홍범, 그리고 그의 아들들마저도 과거엔 모두 이육진의 군 아래 있었다.5년 전,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이육진이 매복을 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소현우는 전방에서 적과 싸우며 지원 한 번 받지 못한 채 중상을 입었다.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그 순간, 그를 구해낸 사람은... 소우희가 아니었다.소우연이었다.소홍범은 이를 악물었다.소우희를 미워했다.믿고 싶었지만, 결국 기대를 저버린 딸이었다.소우연이 그의 큰아들을 살려냈다고 해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가족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그게 소우희의 자리를 대신할 이유는 아니었다.결국 일을 망쳤다.감히 소우연을 건드려, 집안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를 자초했다.정청에 모두가 모였다.눈이 퉁퉁 부은 임진숙이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님은 안 오는 거니...? 혹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74화

    ‘세상에 진심이란 없어.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그 말이 또렷이 귓가에 맴돌았다.마지막까지 아령의 목소리가 소우희의 머릿속을 울렸다.‘날 미워하지 마. 미워할 거면 너 자신을 미워해. 네가 소씨 집안의 자식이라는 걸. 네 어머니가 악독한 여자였다는 걸. 그 여자가 내 어머니 인생을 망쳤고, 그래서 난 태어나자마자 천민이 되었어.’‘난 바라는 거 없어. 단 하나, 너희 소씨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보는 것. 그것만이 내 삶의 이유야.그리고 지금 난 그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소우희는 그녀가 정말로 복수가 성공하길 바랐다.여자의 숨소리가 멎었다.소현우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비틀거리며 주저앉을 뻔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우희의 콧날 아래를 짚어보았다.숨이 없었다.정말로 죽은 것이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오라버니’라 불렀던 여동생. 그 목소리가, 그 웃음이,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았건만.소우희는 정말로 죽었다.그는 허둥지둥 감방을 뛰쳐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임진숙이 그 얼굴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니?”소현우는 눈을 피하며 단호히 말했다.“아무 일 아니에요. 어서 돌아가요. 어머니, 어서요.”말을 재촉한 뒤, 급히 달려가는 소씨 가문의 마차를 바라본 옥졸은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불안한 기운에 곧장 감방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소우희가 죽어 있었다.그녀는 움직일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건 단 하나.소현우 장군.그는 자신의 손으로 친여동생의 목숨을 거두었다.옥졸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어떻게 이런 일을 책임자에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더욱이 태자에게...그는 급히 의원을 불렀지만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소우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옥졸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직접 태자부로 달려갔다.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금세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