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수는 지금까지 소우연에게 신경을 쓴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때 당시 들고양이를 받았을 때에도 대충 하인들에게 던져주며 키우라고 했었다.자신들조차 먹는 게 변변치 않았던 하인들은 당연히 들고양이에게 좋은 음식을 먹일 수 없었기에 고양이의 상태는 엉망진창일 수밖에 없었다.고양이는 저택에서 학대까지 받은 듯 목에는 줄이 묶여져 있었다.목줄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이민수의 시선을 발견한 상평은 재빨리 설명했다.“세자 저하께서 키우라고 하신 고양이인데 혹시 목줄을 풀어주면 도망이라도 갈까 봐 이렇게 계속 묶어두고 있었습니다.”이민수가 한숨을 살짝 내쉬며 입을 열었다.“앞으로 이 고양이에게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잘 챙겨줘야 한다. 절대 굶겨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네, 명심하겠습니다.”“한 달 뒤, 내 앞에 털이 예쁘고 건강한 배꽃을 데려다 놓아야 할 것이다.”“네, 세자 저하. 소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들고양이를 안고 서재를 나선 상평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배꽃아, 너도 이제 팔자가 피게 생겼어.”세자 저하가 들고양이에 대한 태도 변화에 상평은 이민수의 뜻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또한 그저 추측일 뿐이다.한편, 회남왕 저택에서.저녁 식사를 마친 뒤, 이육진은 목욕을 하러 욕실로 들어갔고 소우연은 오늘따라 유난히 얼굴이 뜨거웠다.오늘 이육진을 본 순간부터 계속 불편했고 너무 부끄러워서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그러다가 어젯밤 자신의 신음소리와 몸을 배배 꼰 행동들이 너무 경박해 보이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그때 당시 이육진의 입맞춤과 여기저기 그녀를 더듬던 손길에 너무 부끄러웠고 결국 자신도 모르게 야릇한 소리를 낸 것이다.“연아?”이육진은 몇 번이나 소우연의 이름을 불렀지만 소우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그는 소우연의 얼굴이 왜 빨개진 건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이때, 겨우 정신을 차린 소우연은 이육진을
“제가 왕야께 약을 발라드리겠습니다.”소우연은 가면을 벗은 이육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직 흉터가 남아있긴 하지만 예전의 수려한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보였다.언젠가 이육진은 예전의 수려한 외모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더군다나 소우연은 이육진의 신분이나 외모 때문에 그를 믿는 것이 아니라 전생에 이육진이 그녀의 시체를 거두어 주었기 때문이다.“그래, 알겠어.”이육진이 소우연의 손목을 놓아주자 소우연은 연고를 가져와 꼼꼼하고 조심스럽게 이육진의 얼굴에 발라주었다.이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육진은 가까이 다가가 소우연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어젯밤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소우연은 전혀 언짢아하거나 반항한 적이 없었으며 이는 이육진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한편, 이육진의 돌발 행동에 흠칫하던 소우연은 얼굴이 빨개진 채 다시 연고를 발라주었다.그러다가 침을 놓기 위해 옷을 벗을 때에도 이육진은 소우연을 피하지 않았다. 어젯밤에 소우연이 그의 몸을 자세하게 보지는 않았지만 손으로 만지긴 했으니까.“여긴 괜찮사옵니까?”소우연이 발그레한 얼굴로 이육진에게 침을 맞을 때 느낌을 묻자 이육진이 대답했다.“개미가 깨무는 것 같아.”“혹시 불편한 데 있으시면…”“혹시 불편한 데 있으면 바로 연이 너에게 얘기하마.”소우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육진이 바로 대답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살짝 돌려 소우연의 가늘고 하얀 손을 쳐다보자 소우연은 부끄러워서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이육진은 이내 화제를 돌렸다.“오늘 네가 만안당에서 했던 말을 다 들었어. 역시 연이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착한 여인이야.”이런 여인이 아니었다면 4년 전 심하게 다친 이육진을 구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머뭇거리던 소우연은 진지한 눈빛으로 이육진을 쳐다보며 대꾸했다.“왕야께서는 상운국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신 분입니다. 이런 왕야를 따라 전장에서 용감히 싸운 병사들도 당연히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소우연의 말에 이육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우연은 자신의 말이 너무 직설적이었다는 것을 잘 알지만 이렇게 확실하게 얘기하지 않으면 평서왕 부자에게 기선을 빼앗길 것이다.소우연에게는 천천히 설명하고 일을 진행할 시간이 없다.더군다나 소우연은 이 소설 속에서 최대 악역인 이육진이 이민수가 황위를 물려받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소우연이 회남 왕비가 되기 전부터 이민수와 이육진은 이미 기싸움을 하고 있었다.때문에 소우연은 마음이 급했고 지금부터라도 이육진이 백성들 마음속에서의 인상을 되돌리기를 바랐다.시간이 멈춘 듯 방 안은 고요했다.그러다가 한참 뒤, 이육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 연이 네가 원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하지만…”이육진이 머뭇거리자 소우연이 물었다.“걱정되는 게 있으신 겁니까?”“이것 말고는 더 없는 것이냐?”이육진은 전에 소우연에게 유일무이한 사랑을 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소우연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다시 태어나고 나서 매일 살아남으려고 애를 썼고 소씨 가문이 무너지는 모습과 그녀를 배신한 이민수와 소우희가 천벌받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구체적으로 어떤 천벌을 받길 바랄까?이민수가 평생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바로 황위이기에 반드시 그 꿈을 망가트려야 한다.소우희는 평생 소우연의 공을 가로채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했으며 티 하나 없는 옥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의 칭찬과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려고 한다.그렇다면 소우희에게서 한 가지씩 빼앗아 그녀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나쁜 여자로 만들어주어야 한다.소우연은 이육진 품을 벗어나 공손하고 깍듯하게 그에게 인사를 올리며 나중에 권세를 얻으면 두 사람을 확실하게 처벌해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다.하지만 이육진은 소우연을 놓아주지 않았다.“왕야…”“아직 나에게 숨기는 일이 있는 것 같구나.”소우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소설 속의 별 볼일 없는 존
“건방진 것! 천한 몸종 주제에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바닥에 주저앉은 소우희가 진우를 무섭게 노려보며 큰소리로 외쳤지만 진우는 전혀 겁을 먹지 않은 채 되레 코웃음을 쳤다.“평춘 왕비는 외출하실 때 하인도 안 데리고 다니시나 봅니다?”“너!”화가 잔뜩 난 소우희는 씩씩거리며 고개를 들어 평춘왕 관저 마차 옆에 꿈쩍도 하지 않고 서있는 마부를 쳐다보았다.그 모습에 화가 더욱 치밀었다.“계속 이렇게 난동을 부리시면 저희 왕야께서 평춘왕 저택에 직접 찾아가실 수도 있을 것 같 같은 괜찮으시겠습니까?”진우의 말에 소우희는 그제야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더 이상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회남왕이 별볼일 없는 폐인이지만 그의 부친은 이 나라의 황제이다.그에 비해 평춘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만약 소우희 때문에 평춘왕이 수모를 당한다면 결국 그 고통은 소우희가 고스란히 받게 될 것이다.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모여들자 진우가 말을 이어갔다.“평춘 왕비님, 적당히 하시고 이만 돌아가십시오. 여기서 서로 얼굴을 붉혀봤자 왕비님께 득이 될 게 전혀 없습니다.”태어나서 단 한번도 이런 수모를 당해본 적이 없는 소우희는 자신이 한낱 호위무사 따위에게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더니 옷소매 안에서 성냥을 꺼내 들었다.“내가 오늘 이 만안당을 불태워버릴 것이다! 이곳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것이야!”소우희가 뱉은 말을 행동에 옮기기도 전에 진우가 검으로 소우희 손에 든 성냥을 날려버렸다.이때, 밖으로 나온 소우연은 바닥에 비참하게 쓰러져 있던 소우희를 힐끗 쳐다보았다. 주변에 모여 있던 백성들은 수군거리기 바빴다.소우희의 모습은 마치 예전에 진원 장군 저택 앞에 버려졌던 소우연 같았고 그때 당시 지나가던 사람들도 수군거리면서 소우연에게 손가락질을 했다.모든 상황들이 예전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지만 이번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상대는 소우연이 아닌 소우희였다.“소우연, 너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어. 내가 이런 꼴을 당하는 걸 보고
”허허! 소우희 저 여자가 감히 겁도 없이 이런 앙큼한 짓을 저질렀을 줄은 몰랐네! 진정향을 조제한 게 소우희가 아니라면 군영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 약들도 당연히 소우희가 조제한 게 아니겠지.”이민수가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평소에도 소우희가 눈에 거슬렸던 상평이 말을 보탰다.“소인은 소우희 아씨가 경성에서 최고로 총명한 여인이라 성격이 그렇게 난폭한 줄 알았습니다.”“성격이 난폭하다고?”이민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금까지 이민수가 본 소우희는 너무도 온화하고 유순한 요조숙녀였다. 물론 조금 전 난동을 부리면서 만안당을 태워버리겠다고 한 모습을 보고 조금 역겨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한편, 드디어 신세 한탄의 기회가 생기자 상평은 그날 소우희가 그에게 남자구실을 못하는 놈이라고 했던 말에 살을 잔뜩 붙여서 이민수에게 얘기했다.그래야만 소우희가 더 이상 이민수 앞에서 가식을 떨지 못할 것이다.“소우희가 정말 그런 말을 했단 말이냐?”“세자 저하, 소인이 어찌 감히 없는 말로 우희 아씨를 욕보이겠습니까? 소인이 남자구실을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평상은 심지어 울먹이기까지 했고 이 말을 들은 이민수는 표정이 확 굳어졌다.그가 지금까지 마음에 품고 있었던 여인에게 이런 충격적인 모습도 있었다니. 요즘 들어 그가 몰랐던 소우희를 많이 알게 되는 것 같았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민수는 백성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소우연을 보게 되었다. 환하게 웃는 소우연은 너무도 훌륭하고 어여쁜 규수의 모습이었다.곁에 서있던 상평은 이민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소우연을 보자마자 바로 깨달았다. 세자 저하는 소우연 아씨가 마음에 든 것이다.“상평아, 오늘 아침 배꽃에게 밥은 주었느냐?”갑자기 들고양이를 언급하는 이민수의 말에 화들짝 놀란 상평은 만안당 안으로 들어가는 소우연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보다가 얼른 대답했다.“세자 저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저택
“정말이었네…”소현준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임곽수가 소우연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맞습니다. 왕비님께서 조제하신 약이 확실합니다.”소현준은 고개를 돌려 소우연을 멍하니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결국 물었다.“그럼 진정향과 군영에서 쓰는 약들도 전부 왕비님이 조제한 겁니까?”“제가 맞다고 얘기하면 대감께서 믿으시겠습니까?”소우연이 단호한 눈빛으로 소현준을 쳐다보자 소현준은 마음이 흔들렸다.사실 소현준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소우연에게서 직접 듣고 나니 여전히 당황스럽고 모든 게 거짓말처럼 느껴졌다.소현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숨을 살짝 내쉬던 소우연은 진우에게 현장에 모여 있는 백성들을 밖으로 내보내라고 명했다.그렇게 진료실 안에는 소우연과 정연 그리고 소현준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대감께서 제 말을 믿으신다면 제가 소우희를 원망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소우희는 제 모든 걸 빼앗았습니다. 모두가 그자의 편이 되었고 심지어 제 마지막 가치까지 이용하기 위해 저를 대신 회남왕에게 시집까지 보냈습니다. 만약 제가 소우희의 말을 듣고 회남왕 저택에서 도망쳤다면 덕빈마마께서 저를 어떻게 처리했을 것 같으십니까? 혹 회남왕이 소문처럼 성격이 난폭하고 잔인한 사람이었다면 제가 지금까지 살아있었을까요?”소우연의 물음에 소현준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조금만 잘못됐다면 왕비님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겠지요.”“대감께서 그래도 꽤 솔직하신 분이네요. 그럼 만약 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면 소씨 가문에서 저를 위해 나섰을까요?”“황족이 엮인 일이니 아무도 감히 섣불리 나서지 못하지요. 그리고 버려진 자식이니 더더욱 나서지 않았을 것이고.”소현준의 대답에 소우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전생에 소씨 가문 사람들은 황권이 두려웠을 뿐만 아니라 소우연이 버려진 자식이기에 아무도 그녀의 생사를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그래도 소현준이 이렇게 솔직하고 명백하게 얘기해주니 더 이상 전생에 당한 불공평한 대우에 집착하지
“왕비께서는 그때 당시 매일 밖으로 외출하지 않으셨습니까?”소현준이 참다못해 묻자 소우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전 그때 겨우 한 시간씩 외출했던 것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왜 외출했겠습니까? 약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소현준을 위해 약을 지으러 외출하면서 낡은 절에 쓰러져 있던 한 낯선 남자를 치료해주기도 했다.그 남자의 말투로 보아서는 경성 사람 같았는데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얼굴에 심각한 화상을 입고 온몸에 크고 작은 칼자국과 화상자국들이 가득했다.소우연과 그녀의 곁을 지키는 시녀 외에 소우희만 이 일에 대해 대충 알고 있었다.그때 당시 소우희는 남녀가 유별하니 소우연에게 그 남자를 치료하지 말라고 제지했지만 살아 숨 쉬는 생명을 그냥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소우희는 이를 모른 척해줄 수 있다고 했지만 그 남자를 살리는 조건으로 소우희는 소우연의 공을 빼앗으려 했다. 소우연이 매일 외출하면서 소현우를 7일동안 보살폈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소현우에게 그를 살린 사람이 소우희라고 생각하게 만들려고 했다.“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피곤합니다. 대감께서도 별로 듣고 싶지 않으신 것 같은데 이만 돌아가주십시오.”소우연이 피곤한 기색을 보이자 정연도 한걸음 나서서 말을 보탰다.“소 대감님, 이만 돌아가주십시오.”가족이 아닌 정연이 들어도 화가 치미는 대화였다.잠시 머뭇거리던 소현준은 자신이 단 한번도 관심을 주지 않은 여동생이 이제 그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것 같아서 이내 돌아섰다.소현준이 진료실을 나서자 정연이 소우연에게 다가가 물었다.“왕비님, 오늘 진료를 계속 할까요?”손을 미세하게 떨고 있는 소우연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소현준은 모든 진실을 다 알고 나서도 소우희를 전혀 탓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소우희를 위해 소우연에게 찾아오기까지 했다.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진료는 이만해야 할 것 같다.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자.”소우연이 담담한 표정으로
“연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냐? 그럼 조금 전에 했던 말도 진심이냐?”“당연히 진심이지요. 마음만 급하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특히 왕야께서는 4년 동안 거의 걷지 않으셨기에 더욱 천천히 적응해야 합니다.”“알겠다. 앞으로 연이 네 말을 잘 듣도록 할게.”잠시 고민하던 소우연이 말했다.“그럼 앞으로 매일 한 시간만 걷기 연습을 하십시오.”“그래.”휠체어에 앉은 이육진은 지팡이를 곁에 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우연이 말한 것처럼 마음만 급하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에 소우연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했다.간단하게 목욕을 마친 뒤,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약을 발라주고 침을 놓고 안마까지 해주었다.그러면서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기도 했다.이육진은 이민수가 얘기한 배꽃에 대해 생각하느라 정신이 팔려 소우연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왕야?”세 번째 부름에 겨우 정신을 번쩍 차린 이육진은 당황한 듯 물었다.“아, 그럼 소현준 그자는 왜 그냥 간 것이냐?”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저에게 소우희와 소씨 가문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차마 요구할 수가 없었겠지요.”“그래도 소씨 가문 나머지 사람들보다 자기 주제를 확실하게 알긴 아네.”이육진의 말에 소우연도 동의하듯 피식 웃었다.소현준은 소씨 가문의 유일한 장원 급제자로써 대리사경 일을 맡고 있었으며 소씨 가문에서 꽤 높은 지위를 자랑했다.만약 그때 당시 소현준이 소우연의 편에 들어 한 마디만 해주었다면 소우연은 소씨 가문에서 이렇게까지 처참한 대우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평춘왕 관저에서.만안당에서 큰 수모를 당한 소우희는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평춘왕 관저로 돌아왔고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손님 몇 명을 데리고 돌아온 평춘왕과 마주치게 되었다.화들짝 놀란 소우희는 말까지 더듬었다.“왕, 왕야…”“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왜 아직도 이 집에 있는 것이야?”평춘왕의 말에 소우희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친정에 갔다가 돌아온 겁니다.”“친정에 갔다가
“오라버니, 그렇게까지 격식 차리실 필요 없어요.”소우연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 이육진은 밤새도록 그녀에게 오라버니라 부르게 했다.겉으론 무심한 척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생각해보면 자신이 평소에 용강한을 오라버니라 부르는 것도 한몫했는지도 모른다.두 사람은 예전부터 서로를 형제처럼 여기기로 했고, 오랜 시간 그렇게 지내왔다.하지만 지금처럼 신분이 달라지고, 관계가 미묘하게 바뀐 뒤에는 그 친근한 호칭조차 누군가에겐 불편함이 될 수 있었다.특히 이육진이라면 겉으론 태연해도, 그 속마음은 질투심에 가득 차 있을 것이다.그 생각에 소우연은 괜히 조심스러워졌다.가을이 끝나가고 있었지만, 아직 날이 매섭게 춥지는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강한은 벌써 겨울 외투에 털 망토까지 두르고 있었다.몸이 정말로 차갑긴 한 모양이었다.그 모습에 소우연은 마음이 살짝 저릿해졌다.“태자빈 마마, 혹시 목이 불편하신 겁니까?”용강한이 조심스레 물었다.들리는 목소리로 봐선 확실히 쉰 듯했다.소우연은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요.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무리하지 마십시오.”말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동편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혹여 불편하신 게 있으시면 꼭 말씀해 주세요.”소우연은 정중히 말했다.용강한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신세를 지게 되어 송구합니다.”곁에 서 있던 경문이 조용히 앞으로 나와 예를 올렸다.“실례를 무릅쓰고 여쭙습니다. 소인은 어디서 묵게 될지요…”소우연이 정연을 바라보자, 정연이 자연스럽게 답했다.“이 방 옆에 통방이 하나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별채 객실이 하나 있네.”경문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용강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객실에서 머무르도록 하게. 자네 코 고는 소리가 너무 크지 않은가.”“……!”경문은 한순간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자신이 코를 곤다는 사실은 처음 들었다.늘 가까운 방에서 주
밤은 깊어가고, 뜰 안의 등불들이 하나둘씩 환히 켜졌다.하늘엔 엷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고, 둥근 달은 반쯤 가려진 채 수줍은 듯 사람 세상을 엿보고 있었다.이내 구름이 걷히자, 달빛은 유난히 밝고 또렷하게 아래를 비추기 시작했다.태자부 전체가 불을 밝힌 듯 환했고, 그 중심인 본채는 바람 소리마저도 따스하게 느껴질 만큼 봄기운이 감돌았다.온 뜰이 달빛에 잠긴 밤, 마치 봄날처럼 포근하고 평화로웠다.그렇게 두 시진쯤 흘렀을까.본채 밖 풍경에 달린 방울이 서너 번이나 울려 퍼졌다.그날 밤, 물을 부른 것만 해도 벌써 서너 번째였다.간석은 먼지떨이를 품에 안은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태자 전하, 정말 대단하십니다…’속으로 감탄이 절로 나왔다.하지만…‘태자빈 마마의 배는 어째서 아무 소식이 없단 말인가…’간석은 하늘을 향해 조용히 마음속 기도를 올렸다.‘하늘이시여, 두 분이 이토록 정성껏 애쓰시니, 부디 귀한 아기를 점지해 주시옵소서. 태자부는 물론 상운국 전체가 기뻐할 일 아니겠습니까…’그날 밤 마지막으로 물을 부른 것은 소우연이 반쯤 정신이 나간 채였을 때였다.기억나는 것은 이육진이 직접 그녀를 정갈히 씻기고, 이불을 덮어준 장면뿐이었다.정신을 온전히 차린 것은 다음 날 새벽, 해가 막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눈을 뜬 소우연은 본능적으로 정연을 불렀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고양이보다도 작고, 새된 소리조차 내지 못할 만큼 목이 완전히 쉬어 있었다.결국 그녀는 손을 들어 침상 옆에 달린 방울 끈을 당겼다.딸랑, 딸랑.방울 소리가 울리자 정연이 곧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태자빈 마마, 깨어나셨습니까?”소우연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대답 대신 정연을 바라보았다.입을 열 기운조차 없었기에.말없이 누운 그녀의 모습을 본 정연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피했다.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전날 밤, 태자빈 마마는… 많은 것을 견뎌내신 것이다.오늘은 하루 종일 침상에 누워 계셔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창밖으로는 눈이 부실만큼 찬란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따스한 봄바람이 불자 뜰 안의 꽃잎과 풀잎들이 살랑살랑 몸을 흔들거렸다. 곳간에서 피어난 은은한 꽃 향은 마치 봄기운처럼 방 안을 가득 채웠다.향이 번지자, 간석과 정연은 눈치껏 본채 문 앞에서 조용히 물러섰다.누군가는 옷가지를 준비하고, 누군가는 욕탕을 손질하며 각자 맡은 일을 묵묵히 해냈다.그로부터 한 시진이 흐른 뒤, 하늘은 어느새 어둠으로 뒤덮였다.그제야 이육진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물을 준비해라.”간단한 세신을 마친 뒤, 두 사람은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소우연은 숟가락을 들었지만, 밥을 뜨는 손끝이 자꾸만 힘을 잃어갔다.이육진이 손짓을 하자 정연이 얼른 앞으로 다가서려 했으나, 예상과 달리 그뿐만 아니라 간석과 명심에게도 전부 물러가라는 명이 떨어졌다.갑자기 시중 드는 사람을 내보내시다니… 또 그럴 작정이신 건가?정연은 속으로 아연실색했다.요즘 태자저하의 정력은… 지나치다 못해 겁이 날 지경이었다.태자빈은 눈에 띄게 지쳐 있었고, 윤기 없는 손끝, 가늘어진 숨결, 나긋하게 젖은 눈매까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얼마나 부른 걸까. 목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라니.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닫힌 뒤에야 소우연은 문득 깨달았다.방 안에는 이제 자신과 이육진, 단둘뿐이라는 것을.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미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순간, 이육진이 조용히 웃으며 그녀의 젓가락을 빼앗았다.곁으로 다가와 바짝 앉더니 부드럽게 물었다.“무슨 반찬이 먹고 싶으냐?”“예…? 제가 먹을 수 있어요.”얼떨결에 말하면서도, 소우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럴 수 있느냐? 방금 전엔 분명 못 하겠다 하지 않았느냐.”‘못 하겠다’라니…?소우연은 순간 멍해졌다가, 이내 머릿속으로 장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숨이 벅차오르던 그 순간.‘저… 더는 못 하겠어요…’맞다, 분명 그렇게 말했다.‘못 하겠다’… 그 말이 또 그런 의미로 들렸을 줄이야
“용 감정의 병세가… 그리 심각한 것이냐?”이육진이 조심스레 물었다.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몸이 마치 얼음장처럼 차갑고, 맥도 약해요. 피가 흐르는 것조차 느릿느릿할 정도예요.”입술을 한 번 달싹이던 이육진은 소녀의 손을 쥐고 물었다.“생각해둔 방도가 있느냐. 완치할 수는 있겠느냐?”“지켜보면서 치료해나가야 해요.”소우연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치료를 맡게 되면 자주 뵈어야 해요. 솔직히 꽤 번거로운 일일 수도 있어요.”“자주라 하면… 얼마나 자주 말이냐.”이육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처음엔 매일 찾아가야 할지도 몰라요. 이후엔 차츰 경과를 봐가며 조절해야겠죠.”매일 얼굴을 본다.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소우연이 그를 ‘오라버니’라 부른 것도 그렇고, 이육진의 속은 은근히 뒤틀렸다.물론 소우연을 믿었다.그리고 용 감정이 자신과 소우연을 도와준 것도 고맙게 생각했다.하지만 아내가 매일 외간 남자의 집을 드나든다? 그것도 얼굴을 붉히며 ‘오라버니’라 부른다?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좋을 수 없는 일이었다.“혹시… 질투하시는 거예요, 부군?”소우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질투 안 한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한참을 망설이던 이육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아예 용 감정을 태자부로 데려오는 것이 어떠냐. 병세가 나아질 때까지만 머무르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정말… 그렇게 해도 되나요?”소우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듯 말했다.“하지만… 오라버니가 원치 않으실 수도 있어요.”오라버니? 이육진의 얼굴이 또 한 번 굳어졌다. 질투의 기운이 은근히 번져나갔다.그걸 눈치챈 소우연은 작게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용 오라버니는 점과 괘를 보는 분이에요. 이번 병도… 아마 저희를 도우시다 얻은 후유증 같아요. 그래서 더 신경이 쓰여요.”“그렇다면 네가 봐주는 게 마땅하지.”이육진은 조용히 대답하고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발걸음을 재촉했다.그 걸음이 얼마나 빠
미풍이 스치고 지나가며, 햇빛에 달아올랐던 소우연의 뺨에 잠시 시원한 기운이 스몄다.소우연은 손으로 뜨거운 햇살을 가리며 말했다.“오라버니, 이렇게 계속 햇볕 아래 계시는 건 좋지 않아요.”“하지만 이렇게 햇살을 맞고 있으면… 가장 편안합니다.”잠시 깊은 숨을 들이킨 후, 소우연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제가 반드시 방법을 찾아 치료해드릴게요.”용강한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빛엔 결심이 담겨 있었고, 그 표정은 단단했다.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전생에서 소우연을 위해 복수에 나선 이육진의 광기를 똑똑히 보았다.그 광기 속에 그는 자손도 남기지 못한 채 허무하게 사라졌다.그래서 이번 생에서, 그들이 진정한 인연이 되어 함께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그녀가 진심으로 웃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었다.비록 지금 그녀에게 솔직히 말한다 해도, 그녀와 함께 살기만 해도 자신의 병세가 조금씩 나아질 거라 해도, 그녀는 아마 이육진을 두고 자신을 택하지 못할 터였다.그녀가 택하더라도, 이육진이 그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만약 그렇게 되면 이육진은 그의 머리를 단번에 잘라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좋습니다. 마마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됩니다.”그의 말은 담담했지만, 묘하게 따뜻했다.이후 두 사람은 병세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었고, 소우연은 치료 방향에 대해 몇 가지 방법들을 제시했다.용강한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그렇다면 앞으로 매일같이 마마와 뵙게 될 텐데요. 태자 전하께서 괜찮아 하실까요?”소우연은 잠시 입술을 깨물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그 부분은… 제가 태자 전하와 상의해보겠습니다.”“예, 알겠습니다.”그는 말을 아끼며 눈을 감았다.무슨 결과가 나오든 상관없었다.어차피 그는 이미 운명을 바꾸었다.또한 이육진의 능력이라면 전생처럼 몰락하지는 않을 터였다.소우연은 눈을 찌푸리며 손으로 햇빛을
소우연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용강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제 운명을 점쳐봤습니다. 앞으로 십여 년은 무리 없을 것입니다.”그가 말한 ‘십여 년’은 아마도 소우연과 이육진이 황제와 황후가 되는 그 순간까지를 의미하는 듯했다.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그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십 년 남짓이 뭐가 충분합니까. 용 감정께서는 아직... 스물셋이시잖아요.”“예, 스물셋입니다.”“이렇게 젊은데, 장수하셔야죠. 백 년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렇다면 말씀대로 백 세까지 살아보겠습니다.”그는 가볍게 웃었지만, 소우연의 눈빛엔 걱정이 가득했다. 이런 몸으로 백세까지 산다는 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 자신에게도, 곁에서 함께하는 이들에게도.용강한은 옆의 빈 안락의자를 바라봤다. 소우연도 그의 시선을 따라 그 자리에 앉았다.“복용하셨던 약 처방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참고해보고 싶습니다.”“아직도 저를 치료해보시겠다는 겁니까?”“당연하죠. 감정께서는 태자 전하께도, 저에게도 큰 은인이십니다.”용강한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그저... 인연이었을 뿐입니다.”그건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그 해, 세상에 홀로 남은 듯 외로웠던 어느 날. 그녀가 건넨 하나의 장명쇠가 그의 모든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후로, 그녀를 위해 선택한 모든 길은 그 자신의 의지였다.그녀가 진심으로 웃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한 날을 맞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 기나긴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다.“용 감정은… 저에겐 정말 오라버니 같으십니다.”잠시 망설이던 소우연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세상에서, 태자 전하 말고는 용 감정께서 저를 가장 따뜻하게 대해주신 분 같아요.”그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그렇다면 이제부턴 저를 진짜 오라버니라 생각해도 좋습니다.”“참, 태자 전하께 이미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 감정께서는 제 친정 식구 같은 존
용부에 도착하자 하인이 다가와 알리겠다고 했지만, 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미리 알리지 않으셔도 돼요.”정연과 진우를 데리고 주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소우연은 마당 한가운데서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는 용강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얇은 담요 하나 덮은 채 대나무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그의 온몸을 감싸며 은은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햇살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소우연은 잠시 숨을 삼켰다.곁에 있던 호위가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저는 태자빈입니다. 용 감정과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호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그는 그녀를 몰라볼 리 없었다. 주군께서 가장 자주 안부를 묻던 이였다. 위급한 상황에는 도우라는 명까지 내려졌으니, 그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과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누구도 들이지 말고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발소리조차 삼키며 마당을 가로질렀다.낙엽과 풀이 깔린 바닥 위로 바스락이는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돌려보내라.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용강한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소우연은 멈추지 않았다.“제가 오늘 올 거라는 예감이 들진 않으셨나요?”그제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햇살을 뚫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그대로 누운 채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했다.“태자빈 마마셨군요. 자리에 앉으시지요.”소우연은 그제야 그의 옆에 놓인 또 하나의 안락의자를 발견했다.방석까지 가지런히 놓인 자리가, 누가 봐도 ‘그녀’를 기다린 자리였다.“이걸 미리 준비하셨군요. 오늘 제가 올 걸 아셨던 거네요.”“예. 그리고 약간의 수를 써서 태자 전하께서 잠시 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단둘이 뵙고 싶었거든요.”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맥해드릴게요.”“괜찮습니다…”그의 말이 끝나
이민수는 혜주와 소범준만 남긴 채,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가 떠난 뒤, 아령은 소씨 가문 안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 소지윤에게 아이를 얻기 위한 계획도 한결 수월해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주는 속으로 생각했다.아씨는 누구에게도 깊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소지윤 대인에게만은 그 마음이 다른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왜 하필 그의 아이를 가지려 하시는 걸까.한편, 태자부.이육진은 연회를 열고, 용강한과 심소균을 초대했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즈음, 소우연이 용강한더러 ‘오라버니’라 부르자 심소균은 술잔을 들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아니…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지?’태자빈이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라면, 절대 가벼운 인연이 아닐 터.그보다 더 놀라운 건, 태자 이육진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심소균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에, 괜히 청주를 몇 잔 더 들이켰다.“그냥 조용히 마시죠.”용강한은 무심히 말하며 자신도 잔을 비웠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소우희는 이미 죽었다.그토록 집요하게 소우연을 괴롭히던 이가 사라졌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법도 했다.하지만, 연회 자리를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어딘가 무거웠다.심소균은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용강한은 알고 있었다.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심소균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자, 이육진은 하인을 불러 그를 데려가게 했다.연회가 마무리되고, 소우연이 조심스레 물었다.“오라버니,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세요?”“괜찮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웃었지만, 이어진 기침은 거셌고… 이내 곧 수건에는 선혈이 스며들었다.그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망토를 여미고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띠었다.그러나 그를 지켜보는 눈은 날카로웠다.소우연은 물론, 이육진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용 감정, 네 몸 상태가 왜 이리 나빠졌느냐.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그는
서재 안은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숨막히는 분위기로 가득했다.이민수는 의연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희가 소우연에게 얼마나 애원했는지, 부인께서 또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 다들 기억하시겠지요? 그런데도 소우연은 우희를 단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답니다.”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지금 잠시 조용하다고 이게 끝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내민 손길을 뿌리치셨으니, 훗날 다시 찾아오신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고, 서늘한 눈빛을 떨구었다.“우희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령이 눈물로 애걸복걸하지 않았다면… 소씨 가문을 위해 이 더러운 일에 제 발로 들어설 생각 따윈 없었습니다.어차피 저희 평서왕부는, 태자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소홍범의 안색이 굳어졌다.평서왕의 야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 이육진이 불구가 되고 얼굴까지 망가졌을 무렵, 평서왕은 황태자의 자리를 가장 가까이서 노릴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다. 비록 직접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의 장남 이민수가 황제에게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가 될 거란 이야기는 조정에 이미 돌고 있었다.수년간 평서왕부는 조용히 인맥을 조율하고 관료를 포섭해왔다. 이육진이 회복했다고는 하나, 평서왕 부자의 야망은 그 무엇으로도 꺾이지 않았다.소씨 가문은 이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아버지…”소현우가 조용히 일어섰다. 우희를 향한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소우연에 대한 원망은 이미 마음속에서 불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지옥이라면, 차라리 평서왕세자의 손을 잡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소홍범은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바라보았다.소현준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소우연을 직접 만나야 하나… 아직은 이르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그 순간.이민수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자, 소현우가 갑작스레 그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