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답답한 심정에 도문군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문이를 당당히 곁에 두고, 언제든 마음 놓고 바라보기 위해서는 과거에 급제해야만 했다. 그때가 되면, 이해준이라도 감히 막지 못할 것이다.“송윤현 말이에요. 그 집안 사정도 복잡해서, 설령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결국은 강제로 혼인을 시킬 겁니다. 하지만 만약 그 자가 스스로 좋아하는 사람, 혹은 경장명과 같은 인물과 혼인하게 된다면, 그 집안사람들도 더는 감히 뭐라 할 수 없겠지요.”도문군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심연희와 심교은이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천왕 전하야 더 말할 필요도 없죠.”“맞아요, 언니, 그러니 더 서둘러야죠.”심연희는 말없이 입술을 다물었다. 서두르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천은 끝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승낙하는 것도, 거절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의 진심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게다가 정녕 이천이 심선희의 향낭을 받은 것이 사실인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그 무렵, 이영과 이천 남매는 암위가 전한 소식을 따라 명화가의 한 객줏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경문과 용강한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어찌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진 거지…”그날 이후, 자신이 품은 마음을 숙부께서 오해하신 뒤로는 줄곧 피하시기만 했다. 생일날조차 외면하신 채 나타나지 않으셨다. 오늘은 분명 해명할 기회라 여겼는데, 정작 뵙지도 못하고 말았다.돌아오는 길, 이영은 문득 길가에 자리한 한 점포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가게 주인은 어디에 계시느냐?”“대체 누구시길래 묻는 겁니까?”“지기라 할 만한 친구다.” 이영은 살짝 웃으며 답했다.여주인은 두 남매의 남다른 기품에 눌려, 숨기려 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며칠 전 다녀가시긴 했습니다만, 지금은 뵐 수 없을 듯합니다.”이영은 미간을 좁히며 여주인을 한 번, 가게 안의 여점원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모두 단정히 차려입은 여인들이었다.이
“뭐 어때? 청렴하고 곧은 천왕 전하, 서원에 그분을 좋아하지 않는 여인이 어디 있겠니?”“맞아. 왜 꼭 쟤네들만 좋아해야 해? 우리라고 못 좋아할 건 없잖아?”심선희의 얼굴은 더 붉어졌다.“그만해. 가을 과거가 코앞인데 공부나 열심히 하자.”“하지만 전하께서 네 향낭을 받아주신 건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영광이 아니잖아.”“그건 그저 우리 집안 비방일 뿐이야. 전하께서 잠을 이루시도록 돕는 거지, 쓸데없는 말 하지 마.”“알았어, 알았어. 조용히 할게.”셋은 그렇게 인사만 나눈 뒤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심교은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전하께서… 선희 언니의 향낭을 받으셨다고요?”심연희는 대답 대신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이천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언니의 얼굴빛이 좋지 않은 걸 본 심교은은 속이 답답해졌다.그렇다고 천왕 전하를 붙잡아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사실 저 사람들 말도 틀린 건 아니야. 천왕 전하를 좋아하는 여인이 얼마나 많은데. 전하뿐 아니라 경 대인을 흠모하는 이도 적지 않아. 특히 송윤현은 경 대인을 향해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잖아.”도문군도 거들었다.“우리 서원 여학생들, 참 대담하기 짝이 없죠.”정말 대담했다.하지만 이곳에 들어온 본래 뜻은 잊은 게 아닐까?학문을 닦으러 왔는데 누구는 잘생긴 얼굴만 떠올리고, 누구는 벼슬아치만 마음에 두다니.심교은이 혀를 찼다.“서원에 와서 왜 공부는 뒷전인 거죠? 다들 하나같이 하루 종일 사내들 생각만 하는 거 같아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도문군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여인들의 개혁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에요. 모두가 다 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저조차 완전히 그렇다고는 할 수 없죠.”“게다가 다 깨어 있다 한들, 남녀 간 정을 맺고 싶지 않다거나, 벗을 사귀고 싶지 않다거나, 혼인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잖아요?”심교은이 씩 웃었다.“그렇긴 하죠. 하지만 언니는 늘 말했잖아요. 과거 시험에 참여해 급제할 수만 있다면,
“오라버니!”잠시 눈을 감았을 뿐인데, 그새 이영이 꿈속에 나타난 걸까?이천이 흐릿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눈을 뜨니, 눈앞에는 정말로 이영이 서 있었다. 두 눈에는 설렘과 긴장이 가득했다.“오라버니, 어서 절 따라오세요!”무슨 일일까?“제 사람들이 경문의 자취를 찾았습니다.”“경문이?”막 잠에서 깬 탓에 순간 멍해 있던 이천은 곧 정신을 다잡았다. 용강한의 곁을 지키던 자가 바로 경문이 아니던가.“어디서 찾았다고 하던가요?”“명화가에서요.” 이영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려 있었다.그녀는 오래도록 용강한을 뵙지 못했으니, 경문을 보았다면 용강한 역시 경성으로 돌아온 것이 틀림없었다.이천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손을 씻은 뒤, 이영을 따라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폐하, 또 천왕 전하께서는 어찌 그리 급히 어디로 가시는 걸까요?”정원을 거닐다가 두 사람의 바쁜 발걸음을 본 심교은이 곁에 있던 심연희에게 물었다.심연희는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알 리가 없지 않은가.“폐하?”그때 낭하를 지나던 도문군이 다가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방금 저 남장 차림을 한 분이 폐하십니까?”심연희와 심교은은 시선을 돌렸다. 도문군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목소리에는 격한 떨림이 배어 있었다.“맞습니다. 폐하십니다.”과연 남장 차림을 한 황제 이영이었다.황제가 궁궐을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궁 안이 발칵 뒤집힐 만한 일이었다. 하물며 그 모습이 누군가의 눈에 띈다면, 그 파장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심연희는 도문군의 근심을 눈치채고, 조용히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곁의 암위들은 허수아비가 아닙니다. 또 오늘은 곁에 천왕 전하와 검오까지 함께 계시네요. 폐하께서 다치실 리 없습니다.”더구나 황제의 얼굴을 아는 이들은 조정 대신 몇몇과, 후궁의 극소수 궁인뿐이었다.도문군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의 가슴을 치고 들어온 것은 황제의 위풍당당한 풍모였다
“국녀학에 늘 붙어 있다는 말이군…”용강한이 낮게 중얼거렸다. 따로 점을 치지 않아도, 이천과 심연희 사이가 아직 불이 붙지 못했다는 건 뻔히 알 수 있었다.두 사람의 인연이라…용강한은 문득 자신이 이천에게 쳐준 괘상을 떠올렸다. 무슨 하늘이 정해준 인연이라 했던 것도, 결국은 외삼촌 된 자가 잠시 측은한 마음을 낸 것일 뿐. 지금 와서 그게 옳았는지 그른지도 알 수 없었다.“기회가 되면 이천과 심연희의 소식을 한번 엿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대인께선 혹 두 분이 끝내 맺어지지 못할까 염려하시는 겁니까?” 경문이 물었다.용강한은 경문을 바라보다가, 뭐라 말하기도 어려웠다. 어차피 도화 비녀까지 내어줬는데, 그것마저도 인연을 맺지 못한다면 자신이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은가.“대인, 만약 천왕 전하가 아니라면… 연희 아씨와 경 대인은 과연 인연이 있을까요?”용강한은 소매 속 손을 살짝 움켜쥔 뒤 천천히 대꾸했다.“이제 너도 제법 기량이 늘었으니, 네가 한번 점쳐 보겠느냐?”“…….”경문은 말이 막히더니, 곧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대인, 농도 지나치십니다. 전 아직 대인의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하는걸요.”그는 몇 가지 일을 보고하고는 물러났다.용강한은 다시 찻잔을 들어 빙빙 돌리며, 이천의 준수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 품행이며 가문, 학문까지 흠잡을 데가 없는 사내였다. ‘이토록 많은 장점을 가진 사내거늘…’……“전하를 뵙습니다.”이천이 막 조정에서 돌아와 연못가에 이르렀을 때, 심선희가 그를 가로막았다. 그녀는 두 손에 향낭을 받쳐 들고 고개를 숙여 바치며 말했다.“이것은 제가 직접 바느질해 만든 향낭입니다. 숙면에 도움이 되니, 부디 전하께서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혹시 거절당할까 두려운 듯, 그녀는 서둘러 덧붙였다.“듣기로는 전하께서 요사이 정무에 힘쓰시느라 제대로 쉬지 못하신 듯합니다. 저희 조부님께선 본디 민간 의원이셨는데, 특히 불면과 정신 쇠약을 다스리시는 데 능하셨습니다. 감히 주제넘게도,
한편, 경성 인근의 교외에서.동백꽃이 산 아래에 잔뜩 피어 있었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속에 가끔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보이기도 했다.일꾼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렛대를 들고 있었고 장인들은 어느새 오두막의 기본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경문은 옆에서 한마디씩 당부를 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대감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감님이 주신 도면에 따라 그림과 똑같은 집을 지어드리겠습니다.”이에 경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인들의 솜씨를 보아서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그리고 저쪽 편에 복숭아나무를 전부 심으시게. 마당에도 복숭아나무를 심어야 하고. 그리고 반대쪽에는 배나무를 심게. 매화나무가 지고 봄이 다시 찾아오면 배꽃과 복숭아꽃이 잔뜩 필 수 있게.”“대감님 참 품위가 고상하시네요.”장인이 연신 감탄을 하며 말했다.이에 경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품위가 고상한 게 아니라 주인님이 이렇게 당부한 것이다.이쪽 산봉우리에는 동백꽃이 잔뜩 심어져 있었고 산봉우리를 넘어 반대편 정자 밖에는 매화도 잔뜩 심어져 있었다.그들은 이곳에 과일나무를 조금 심으면 풍경도 예쁘고 나중에 과일도 따먹을 수 있을 것이다.“최대한 빨리 완공해 주시게.”“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안에는 무조건 완공할 수 있을 겁니다! 아주 예쁜 마당을 지어드리겠습니다!”경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잔뜩 심어진 동백꽃을 쓱 쳐다보았다. 최선을 다해 알아보았지만 이 땅이 어떤 자의 소유인지 알아내지 못했다.장인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인 경문은 이내 말을 타고 갓길을 따라 떠났다.그리고 조금 뒤, 경성 내에 위치한 산속 객줏집에 도착하게 되었다.말을 객줏집 일꾼에게 맡긴 경문은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들어오거라.”방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경문을 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방 안에 앉아있는 용강한에게 뭔가 할 얘기가 있는 듯 우물쭈물한 모습을 보였다.“편하게 말하거라.”차를 한 모금 마
심연희의 유일한 승산은 바로 매일 이천에게 찾아가 그와 사소한 담소를 나누면서 정을 쌓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흐르다 보면 이천도 어쩌면 심연희가 익숙해지고 습관이 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그녀를 향해 마음을 열어주지 않을까?원치각으로 천천히 걸어가던 심연희는 연못을 지날 때 곱게 핀 연꽃을 보고는 자신도 연꽃을 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물에 빠지는 수단은 한번으로 족하기에 심연희는 절대 같은 수법을 두 번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전에 한 소녀가 먼저 물에 빠지기도 했으니 말이다.심연희는 책을 내려놓고는 연못 속을 이리저리 뒤지다가 활짝 핀 연꽃 두 떨기를 따고는 다시 원치각으로 향했다.한편, 행림각에서.경장명은 연꽃까지 따서 원치각으로 향하는 심연희를 보며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조금 뒤, 심연희가 손을 들어 원치각 문을 두드렸고 이내 방에서 이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시게.”심연희가 방에 들어가자 검오가 바로 밖으로 걸어 나왔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는 이내 헤어졌다.“저하 오라버니.”서책 한 권과 연꽃 두 떨기를 품에 안은 심연의는 이천 앞으로 다가갔다. 한편, 이천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심연희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그리고는 심연희에게 앉으라고 손을 내밀었다.이에 심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제가 연꽃 두 떨기를 따왔는데 혹시 연꽃을 꽂을 만한 꽃병이 있을까요? 제가 꽂아드리겠습니다.”이천은 연꽃을 힐끔 쳐다보며 대답했다.“그런 건 없소.”흠천감에 있던 꽃병 두 개도 용강한의 것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어마마마께서 숙부를 위해 꽃을 자주 꽂아주었다고 한다.한편, 미간을 살짝 찌푸린 심연희는 주위를 쓱 살폈지만 확실히 연꽃을 꽂을 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꽃이 이대로 시들어갈 수밖에 없겠습니다.”심연희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이천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심연희는 이천이 연꽃을 꽂을 만한 물건을 찾으러 간 것이라고 확신했다.아니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