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희도 마다하지 않고 발그레한 얼굴로 다과를 하나 들고는 입에 넣자마자 감탄했다.“저하 오라버니께서 드시는 간식은 참 맛있습니다.”이천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에 보고 있던 책을 다시 손에 들었다.이에 심연희가 다시 말을 걸었다.“혹시 궐에서 보내온 간식입니까?”“그렇소.”“역시, 그래서 맛이 다른 거였습니다. 맛이 아주 특별합니다.”심연희는 이천이 책을 읽든 말든, 책이 머릿속에 들어올 수 있든 말든, 헤헤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저하 오라버니, 앞으로 간식 먹으러 가주 찾아와도 되겠습니까?”“유언비어들이 두렵지 않다면.”“전 그런 게 두렵지 않습니다. 학사에 있는 자매들이 다들 착하고 선한 분들입니다. 절대 이상한 유언비어가 생길 리가 없습니다.”국녀학의 여인들은 각자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서로 응원하고 지지했다.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다면 당연히 용감하게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때문에 아무도 이 일로 심연희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한편, 이천은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여전히 책에서 거두지 않았다. 너무도 차분하고 태연한 그의 모습을 보며 심연희는 참 부러웠다.“그럼… 저하 오라버니께서도 저를 남다르게 생각하고 계십니까?”심연희는 결국 이 질문을 던졌다.이에 잠시 침묵하던 이천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대답했다.“어쩌면 그럴 수도.”이천은 자신이 심연희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심연희의 이런 허술한 연기가 재밌어 보이는 건 사실이다.이런 재밌는 일들로 인해 예전 무미건조하던 나날들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진 것 같기도 했다.한편, 이천의 대답에 심연희는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저하께서 나한테 이렇게 관대하신데 이게 바로 날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게 아니고 뭐겠는가!’심교은이 그녀에게 말해줬던 것처럼 천왕 저하는 그녀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이 방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는 생각에 심연희는 더 이상 이천을 귀찮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저하께 인사를 올립니다.”심연희의 목소리에 이천은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낭자가 또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또 무슨 핑계를 들고 온 걸까?’팔을 대충 탁자 위에 올려놓은 이천은 고개를 들어 소녀를 쳐다보았다.“연희 낭자.”한편, 심연희는 입술을 살짝 오므린 채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바빴다.‘저하께서 왜 전혀 놀라지 않으시지? 심지어 나한테 왜 왔냐고 묻지도 않잖아?’이에 목청을 살짝 가다듬은 심연희가 말했다.“제 방에 상처에 바르는 고약이 없어서 저하께 고약을 빌리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심연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고 이에 이천이 몰래 피식 웃었다.‘낭자도 이런 핑계가 부끄러운 건가?’어제 다친 상처는 전혀 심각하지도 않았고 고약까지 발랐으니 진작 아물어서 딱지도 떨어졌을 것이다.이천의 시선이 면사포를 감은 심연희의 손가락에 닿았다.“앉으시게.”“네, 감사합니다, 저하.”심연희가 자리에 앉았다.한편,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이천은 고약이 든 약상자를 가져왔다.이천이 고약을 꺼내 들자 심연희는 어쩔 수 없이 면사포를 풀었다. 그리고 완전히 아문 손가락이 두 사람 앞에 드러났다.“낭자, 아무래도 너무 늦게 온 것 같소. 상처가 다 아물었네.”말을 하던 이천은 곧바로 고약을 다시 약상자 안에 넣었다.“아니, 저기!”급하게 소리를 낸 심연희는 심지어 손을 뻗어 이천의 옷소매를 덥석 잡았다.“저하 오라버니, 제 손가락은 아직 너무 아픕니다.”저하 오라버니…이 호칭을 들은 순간, 이천은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서 쉽게 진정할 수가 없었다.그리고는 자신의 옷소매를 꼭 잡고 있는 심연희의 손을 힐끔 쳐다보았다.딱지도 다 떨어졌는데 아프다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저하 오라버니.”심연희의 표정은 유난히 불쌍하기도 하고 유난히 귀엽기도 했다.이에 이천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아 약상자를 열고는 고약을 꺼내 심연희에게 건넸다.한편, 심연희는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이런 선을 넘는
이와 동시에, 원치각에서.이천은 오늘도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는 심지어 원치각 안팎을 깨끗하게 청소까지 했는데도, 그래서 몸이 너무 힘들고 지치는데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머릿속에 심연희가 일부러 했던 사소한 행동들이 떠오르면 유치하다고 생각되면서도 참 재밌는 것 같았다.그렇게 생각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심연희가 언제까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려고 이런 노력을 할까?똑똑똑…이천은 이내 웃음을 거두었다.“들어오거라.”방으로 들어온 검오가 내실의 침상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는 보고를 올렸다.“저하, 소인이 폐하를 안전하게 궁까지 모셔다 드렸습니다.”“그래, 잘하였다.”잠시 멈칫하던 이천이 물었다.“그럼 폐하께서는 심초운을 찾은 것이냐?”검오가 고개를 저었다.“저하, 못 찾으셨습니다.”‘못 찾았다고? 아바마마께서 영이를 위해 그동안 실력이 강한 비밀 호위무사들을 그렇게 많이 키웠는데 사람 하나 못 찾는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이때, 검오가 말을 이어갔다.“폐하께서는 아무래도 비밀 호위무사들이 심 대감님을 찾는 걸 원치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어째서?”“소인 감히 폐하의 뜻을 함부로 추측할 수는 없습니다.”이천은 고개를 들어 검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고 이에 검오가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제 황제 폐하가 아닌 천왕 저하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잠시 잊은 것이다.“저하, 소인 생각엔 폐하께서 비밀 호위무사의 힘을 빌려 심 대감님의 동향을 조사하고 싶지 않은 듯합니다. 이는 두 분 부부사이의 감정에 불리하니 말입니다.”부부사이의 감정에 불리하다?검오가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다시 말을 이어갔다.“소인도 여기저기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부부사이에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서로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입니다. 특별한 수단을 사용하면 폐하께서는 당연히 원하시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지만 폐하께서는 심 대감님께 충분한 믿음과 안전감을 드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이에 이천
심연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직 잘 모르겠어.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저하께서는 내가 적극적으로 찾아가고 곁에 다가가는 것을 조금도 반감하지는 않는 것 같아.”오늘 심연희의 연기는 너무도 허술하고 티도 많이 났다. 머릿속에 이천의 옅은 미소가 떠오르자 심연희는 또다시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이천은 심연희가 원치각에서 일부러 한 행동들을 진작 눈치챘을 것이고 그래서 그런 웃음을 보였던 게 확실하다.이천의 미소는 사람의 마음을 사르르 녹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심연희의 말에 심교은이 입을 떡 벌렸다.“우리 누이 큰일났네요. 사랑이라는 감정에 푹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네요.”심교은은 이내 돌아서서 명주와 수화에게 물었다.“너희들이 말해보거라. 내 말이 맞지 않느냐?”“작은 아씨 말씀이 옳습니다.”심연희는 살짝 뜨거워진 볼을 만지작거렸다.“그만 얘기해야겠다.”“왜 그만 얘기합니까?”심교은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심연희를 쫓아갔다.“저 오늘밤 누이와 함께 잘 겁니다!”세안을 마친 뒤, 심교은은 정말로 심연희의 침상 위로 올라가 심연희의 곁을 파고 들었다.“누이, 얼른 말해보십시오. 누이는 저하께 마음을 고백했습니까?”“이만 자거라.”“싫습니다. 누이가 말해주지 않으면 잠이 안 올 것 같단 말입니다.”심연희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심교은은 계속 조르며 심연희의 팔을 흔들었다.이에 심연희는 하는 수 없어서 말해주었다.“전에 고백한 적이 있다.”“그럼 저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심연희는 아직도 이천의 대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자신은 누군가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그래서 심연희가 더 적극적으로 이천에게 다가가 그에게 애정 표현을 하는 것이다.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할 줄 알게 된다.다만 이천은 특별한 어린시절을 겪었기에 심연희는 그런 이천에게 시간을 더 많이 주고 싶었다.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심연희는 걱정되는 게 있었다. 이천이 그녀를 거
“그럼 같이 갈까요?”심연희가 제안하자 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치각을 나서자 심연희는 그제야 날이 이토록 어두워졌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조금 전에는 방 안에 있어서 미처 몰랐던 것이다.서원 내에 제등을 켜는 학자들이 한두 명씩 보였다.이천과 심연희는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나란히 함께 걸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여느 때보다 묘하고 특별했다.한편, 행림각 내에서.경장명은 심연희가 명룬당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심연희가 이천을 찾아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심연희는 정말 수치심까지 무릅쓰고 이천을 찾으러 간 것이다.이와 반대로 경장명은 아무리 노력하고 진심을 보여도 심연희는 여전히 그저 그에게 남녀 사이의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가벼운 한마디일 뿐이다.‘낭자는 천왕 저하가 저렇게 좋을까? 그리고 천왕 저하도 참 이상하지. 겉으로는 성스러운 불자처럼 여색을 전혀 가까이하지 않을 것 같은데 왜 연희 낭자를 확실하게 거부하지 않는 걸까?’허허…경장명은 이를 꽉 악물었다. 그리고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 들어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한편, 학사로 돌아가기 전에 심연희가 이천에게 물었다.“저하, 저에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저하께 찾아가서 도움을 청해도 되겠습니까?”이천은 심연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예전처럼 매정하게 거절해야 하는데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래도 어느 정도 귀띔은 해주어야 한다.“낭자가 그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렇게 하오.”“물론 가치가 있지요.”심연희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이는 너무도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천과 함께하는 동안 그녀는 늘 전전긍긍했고 조심스러웠고 그 심정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이토록 설레고 두근거리는 느낌은 심연희를 들뜨게 했으며 지금까지 봐온 이야기책 속에 묘사한 기분과 너무도 흡사했다.아니, 심지어 이야기책 속에 적힌 것보다 더 황홀하면서도 불안하고 초조하며 몽롱하고도 달콤한 기분이었다.한편, 고개를 가
‘천왕 저하는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외모를 지니셨을까?’어느새 넋을 잃은 심연희는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미칠 것만 같았다.“고약 좀 발라야겠소.”이천의 말에 정신을 번쩍 차린 심연희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대답했다.“감사합니다, 저하.”이에 이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심연희도 황급히 일어나 이천을 따라갔다. ‘이러다가 상처에 피가 말라서 아무는 거 아니야?’이런 생각에 심연희는 일부러 베인 손가락을 꽉 눌러 피가 조금 더 흐르게 했다.한편, 약상자를 챙겨 돌아온 이천은 자연스럽게 구들에 앉아 다친 손을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심연희를 보게 되었다.“저하, 제가 이렇게 또 저하께 민폐를 끼치고 말았습니다.”이천은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조금 민폐이긴 하네. 낭자도 참 꾸준하고 노력이 가상한데… 설마 내가 평생 낭자한테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이대로 계속 내 곁에서 이런 노력을 평생 하진 않겠지?’평생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이천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내가 낭자의 이런 행동을 평생 감당할 생각을 잠깐이나마 했던 건가?’이런저런 생각에 이천은 고개를 숙여 심연희를 몰래 쳐다보았다. 얌전히 앉아있는 그녀는 한 마리의 온순한 고양이 같았다.고약을 찾아 뚜껑을 연 이천은 심연희의 다친 손가락을 쳐다보았다.‘조금 전에는 분명 피가 멎었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또 피가 이렇게 많이 흐르고 있는 거지?’이천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심연희가 입을 열었다.“저하, 제 다친 손가락은 괜찮은 것입니까?”“큰 문제는 없소.”“제 오라버니한테서 용강한 대감께서는 의술이 비범하시다고 들었습니다. 태후마마의 의술도 매우 뛰어나시고요. 그럼 저하의 의술도 그만큼 훌륭하신 겁니까?”이천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그 정도는 아니오.”그가 어찌 감히 용강한 숙부와 어마마마의 의술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물론 나중에 흠천감 내의 모든 의술을 전부 익히면 말이 달라질 수도 있다.핏자국을 닦은 뒤, 한 손으로 심연희의 다친 손가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