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우연은 창가에 앉아 창문을 열고는 시녀들이 장난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명심이와 아이들은 매년 눈이 올 때마다 눈사람을 만드는데 질리지도 않은가 봅니다.”곁에 있던 정연의 말에 소우연이 웃으며 대답했다.“즐거워 보여서 참 좋구나.”사람들은 회남왕 이육진의 성격이 난폭하고 감정 기복도 심하다고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저택에 있는 시녀들은 어떻게 저렇게 밝고 해맑을 수 있을까?“그러고 보면 왕야는 밖에 떠도는 소문처럼 그리 어려운 분이 아니지 않느냐?”정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왕야께서는 무서운 면을 외부인과 적에게만 보여주십니다.”정연은 고개를 돌려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왕야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신부를 바라보았다. 왠지 이번에는 왕야 곁에 진정한 배필이 나타난 것만 같았다.“적에게만 보여준다…”“그렇습니다. 왕야께서 감정 기복이 심하신 건 맞지만 이유 없이 화를 내시지는 않으십니다.”고개를 끄덕이던 정연은 소우연에게 따듯한 화차를 한 잔 따라주며 말을 이어갔다.“왕야께서 왕비님을 대하시는 태도가 남다르십니다.”소우연은 정연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정연이 말한 것처럼 소우연은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목숨 잃고 밖으로 버려진 신부가 아니기에 다들 소우연을 특별하다고 느꼈을 것이다.“그럴 수도 있지.”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연은 말머리를 돌려 소우연에게 화차를 마셔보라고 권했다.소우연은 옅은 미소를 띠며 화차 찻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그녀는 생각했다. ‘악인도 결국 사람이니, 칠정육욕이 없을 수야 없겠지?’그는 언제나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으니, 필시 사랑도 정마저도 끊어낸 자일 것이다.전생에서, 혈육의 정과 사랑은 마치 바늘처럼 그녀의 가슴을 찔러왔고, 그 고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다.그러나 이번 생의 그녀는, 그런 굴레를 모두 벗어던지고 오직 자신을 위해 살고자 했다.그리고 소우희와 이민수, 이 두 사람과는 다시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으리라!이로부터 며칠 뒤.눈이 녹기 시작했고 마당을 지키
이육진과 소우연은 가까이 다가가 덕빈 마마께 큰절을 올렸고, 덕빈 마마는 환히 웃으며 손을 가볍게 흔드셨다.“이만 고개를 들 거라.”“감사하옵니다, 어마마마.”소우연은 윗몸을 일으키자마자 손을 뻗어 이육진의 휠체어를 잡아주었고 한 치도 불만이 없어 보였다.그 아름다운 작은 얼굴은 길을 오는 동안 거센 눈바람을 맞았는지, 두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마치 도자기 인형처럼 보였다.어쩐지, 아들이 그녀를 맘에 들어한다더니.단귀비는 자리를 내리도록 명하였고, 곧이어 기 나인에게 작은 주방에서 만든 다과를 가져오게 하였다.“안 그래도 네 아바마마께서 며칠 전부터 네가 언제 처를 데리고 궁에 들어오는지 계속 물으셨어. 마침 잘 왔구나.”덕빈의 말에 소우연이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 걱정을 끼쳐드려 송구하옵니다.”이육진은 요즘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일찍 찾아뵙지 못했다고 설명했고 소우연이 다친 일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어차피 회남왕 관저에서 벌어지는 일은 어마마마도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다과와 차를 올린 기 나인은 시녀에게 조정 앞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주상이 논의를 마치면 바로 보고를 하라고 했다.그렇게 단향궁에 있는 세 사람은 가볍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수려한 외모에 차분한 성정을 지닌 소우연은 심지어 이육진을 각별히 신경 쓰는 듯 보였다.‘저 아이는 분명 평서왕의 아들과 혼약이 있었던 거 아닌가? 이렇게 빨리 그자를 버리고 내 아들에게 빠졌다고?’만약 이육진이 예전처럼 건강하고 외모도 수려했으면, 덕빈도 조금은 믿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이육진 얼굴에 저렇게 보기 흉할 정도로 상처가 크게 남았는데 소우연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걸까? 저러다가 이육진도 결국 공세에 넘어가지 않을까?덕빈은 소우연을 보며 이미 돌아가신 황후 언니가 떠올랐다. 경성 제일 미녀였던 황후 언니는 황제를 평생 제대로 홀렸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황제는 그 여인을 잊지 못하고 있다.이 생각만
방으로 들어온 황제는 이육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타깝기도 하고 마음도 너무 아팠다.그러다가 시선을 돌려 소우연을 쳐다보았고 수려한 외모에 기품도 넘쳐 보이는 모습에 살짝 놀란 듯했다.황제는 진원 장군 가문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큰딸이 외모가 부족하거나 성격이 괴팍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그리고 아들 이육진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황제는 이 두 사람을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다들 그렇게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네. 오늘은 그저 간단한 가족 모임일 뿐일세.”덕빈이 제일 먼저 고개를 들었고 곁에 서있던 기 나인에게 눈치를 주자 기 나인은 바로 궁녀와 내시들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한편, 소우연은 여전히 고개를 깊이 숙인 채 감히 황제의 용안을 올려다보지 못하였다.조금 뒤, 기 나인과 단향궁 내시가 황제 앞에 진수성찬을 차렸고 소우연은 그 음식들을 힐끗 쳐다보았다.나중에 주상께서 회남왕의 신부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소우연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걸까?생각만 해도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였다.한편, 소우연의 긴장한 모습을 눈치챈 이육진은 그녀에게 귤을 건네며 말했다.“왕비, 식사전에 귤 하나 먼저 먹지 않겠소?”“감사하옵니다.”고개를 살짝 든 소우연이 휠체어에 앉아있던 이육진과 눈이 마주쳤고 손을 뻗어 귤을 받던 순간, 이육진이 소우연의 손을 살짝 잡은 채 낮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전했다.“겁먹지 마.”‘이 남자가 나한테 겁먹지 말라고 했어…’소우연은 진심 어린 이육진의 눈빛에 마음이 살짝 흔들렸고 이내 입술을 오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그 뒤로 이육진은 기미상궁을 시켜 소우연에게 이런저런 반찬을 잔뜩 덜어주었고 소우연은 덕분에 긴장은 많이 풀렸지만 황제와 덕빈의 뜨거운 시선에 점점 난감했다.겨우 식사 자리가 끝나고 황제와 덕빈에게 인사를 올린 소우연은 이육진과 함께 단향궁을 나섰다.한편, 단향궁에서.입가심을 하고 있던 황제가 덕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넷째가 이번 왕비를 꽤 마음에 들어
회남왕 관저의 마차가 번화한 거리에 나서자 거리를 오가던 마차와 백성들은 너도나도 양옆으로 물러섰다.한편, 마차 안에 앉아있던 이육진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소우연은 창문을 가린 천막을 살짝 열고는 밖을 쳐다보았다.거리에는 손님들로 가득 찬 주막과 보따리 장사를 하고 있는 장사꾼들로 북적거렸다.처녀였을 때, 소우연은 거의 외출한 적이 없었으며 어머니는 외출할 때마다 소우희만 데리고 나갔다.씁쓸하게 웃던 소우연은 이내 천막을 내렸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이육진과 눈이 딱 마주쳤다.얼굴이 빨개진 소우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왕야,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은 겁니까?”“아니.”아닌데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걸까?소우연이 볼을 만지며 고개를 살짝 숙인 그때, 이육진이 말했다.“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나한테 한번 얘기나 해보지 그래?”소우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쳐다보자 이육진이 다시 물었다.“없는 건가?”“신경 써주셔서 감사드리지만 전 아직 두서가 없습니다.”‘두서가 없다… 대체 어떤 두서가 필요한 걸까? 더럽고 염치없는 것들은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하지만 이건 결국 소우연의 개인 사정이기에 소우연이 아직 소씨 가문과 완전한 결렬을 결정하지 못했다면 이육진도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회남왕 저택으로 돌아온 뒤, 이육진은 서재로 가기 전 소우연에게 외출할 땐 반드시 호위무사를 대동하라고 당부했다.“알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소우연은 깍듯이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한 뒤, 이내 반짝이는 눈빛으로 물었다.“혹시 왕야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을까요?”이육진은 소우연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보며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그래.”소우연은 떠나는 이육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소우연을 곁에서 지켜보던 정연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착잡해졌다.예전에 회남왕은 경성에서 외모가 가장 출중한 사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이제는…허나, 왕비의 눈빛에는
진규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육진이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왕비는 내 앞에서 항상 조심스럽고 온순한 모습이었거든. 그렇게 큰소리로 날뛸 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네.”“왕비님께서 화내실 때 꽤 무섭습니다. 당당하기도 하시고요.”진규가 대답했다.전에 진규는 소우연이 소씨 가문에 찾아갔을 때 회남왕 왕비의 신분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소씨 가문 사람들을 상대했다고 했다.이육진은 왕비 신분을 꽤 유용하게 쓰는 소우연이 대견하기도 했다.한편, 소우연이 회남왕 관저로 돌아왔을 땐 이미 날이 꽤 어두웠고 하인들은 서둘러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명심이 소우연에게 찾아가 물었다.“왕비님, 식사 준비가 다 됐는데 이제 왕야를 모셔올까요?”소우연이 흠칫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왕야께서 아직도 저녁 식사를 하지 않은 것이냐?”“아직 안 하셨습니다. 태감께서 얘기하시길 왕야께서는 오늘 왕비님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시기로 약속했다고 하셨습니다.”“아니, 난…”제민 약방에 소우연이 원하는 약재가 없었기에 경성에 있는 다른 약방을 전부 돌아다니느라 시간이 늦어진 것이다.“그럼 얼른 왕야를 모시거라.”“네.”명심은 실실 웃으며 서재로 향했다. 왕비가 왕야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니 앞으로 왕비의 시녀들도 그 덕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이와 반대로 소우연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늦게 돌아와서 왕야의 저녁 식사 시간이 늦어졌는데 혹시 왕야가 화내지 않을까?‘화를 내면 최선을 다해 어르고 달래야지. 따로 방법이 없잖아.”본채 문 앞에 선 소우연은 이육진을 기다리면서 정연에게 물었다.“혹시 이 저택에 비어 있는 방이 있느냐?”“혹 뭘 하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약을 제조해야 하는데 따로 방 한 칸이 필요하다.”소우연이 사온 약재들은 아직 마차 안에서 내리지 않았다.“곁채는 많습니다. 하지만 약초 향이 왕비님과 왕야의 수면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요?”정연의 말에 소우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초 향이 꽤 진하기에 이육진이 싫어할 수도 있을
“다음번에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뚜렷한 윤곽, 만약 얼굴이 망가지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절세미남이었을 것이다.소우연은 이육진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시면 왕야께서는 먼저 식사를 하십시오. 안 그러면 제 죄가 너무 커지지 않겠습니까?”찻잔을 들고 있던 이육진의 손이 흠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소우연을 힐끔 쳐다보았다.“내가 부인의 죄를 물을까 봐 그렇게 두려운 것인가?”“아, 아닙니다.”두렵지 않다는 건 사실 거짓말이다. 황실에서는 어떻게 이혼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설령 그녀가 도망칠 마음이 있다 해도, 그곳엔 아직 단귀비가 있다. 그녀는 아직도 전생에 도망친 혼인의 결과가 생생히 기억난다!이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이 혼인을 잘 유지하여 마음 편하게 사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다.한편, 이육진은 소우연의 대답에 속으로 피식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온순한 척, 순진한 척하는 게 힘들지도 않은 건가?“왕야, 저를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시면 제가 심장이 많이 떨립니다.”소우연이 손바닥으로 발그레한 볼을 만지며 난감한 표정으로 말하자 이육진이 대꾸했다.“심장이 떨린다는 건 뭔가 찔리는 게 있다는 뜻이지.”가볍게 미소를 짓던 소우연은 고개를 저으며 반대 의견을 제기했다.“왕야께서 모르시는 게 있는데 심장이 떨린다는 건 설렌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소우연이 이육진의 눈을 빤히 쳐다보자 이육진이 도발하듯 웃으며 대꾸했다.“그럼 왕비는 누구한테 설레는 것이오?”소우연은 입술을 살짝 오므린 채 대답을 하지 않았고 젓가락을 들어 이육진에게 반찬을 덜어주었다.“이것 좀 드셔 보십시오.”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소우연의 표정과 행동은 의미심장했고 그 모습에 이육진은 물론 곁에 서있던 정연과 명심도 왕비가 참 대담하다고 생각했다.그렇게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이육진은 소우연이 덜어준 음식을 입에 넣었다.“괜찮네.”“그럼 이것도 드셔 보세요.”소우연의 행동에 이육
만약 소우연이 평서왕의 아들 이민수와 혼약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면 이육진은 소우연이 그를 좋아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자신을 좋아한다……이런 생각을 하던 이육진은 이내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명성이 이렇게까지 더럽혀지고 흉한데 어떤 여인이 그를 좋아할 수 있을까?이육진은 이내 화제를 돌렸다.“다음달 16일, 소우회와 평서왕 세자가 정식으로 혼약을 맺는다고 들었는데 부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소우연은 두 사람이 혼약을 맺는 날짜를 알고 있었고, 소설 원작에 적힌 중요한 날짜들도 대략 기억하고 있었다.“네, 알고 있습니다.”고개를 끄덕인 소우연은 이육진이 갑자기 이 일에 대해 언급할 줄은 몰랐다.“부인은 후회한 적 없는가?”“뭘 후회하단 말씀이십니까?”“부인이야말로 평서왕 세자의 세자빈이 될 사람이지 않았는가?”소우연이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전 지금 회남왕의 왕비이고 품계로 따지면 소우희보다 신분이 훨씬 높지 않습니까?”회남왕비의 신분에 대해 꽤 많이 적응한 소우연을 보며 이육진은 왠지 기분이 좋았다.그 뒤로 며칠동안 소우연은 매일 배나무 별채 안에만 있었으며 심지어 삼시 세끼도 별채에서 해결했다.별채 안에 심은 납매에 꽃이 피기 시작하자 소우연은 가지 몇 개를 꺾어 꽃병에 꽂고는 정연에게 건넸다.“이 꽃병을 왕야가 계신 서재에 가져가거라. 그리고 본채에도 놓아두거라.”정연이 가볍게 미소를 짓다가 물었다.“왕비님께서는 배나무 별채에서 며칠이나 지내셨는데 오늘도 본채로 돌아가지 않으실 겁니까?”“하지만 왕야께서…”소우연은 이육진이 매일 서재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왕야도 바쁘신 것 같은데 내가 괜히 신경 쓰이게 하면 안 되지. 나도 얼른 약을 만들어야 하고.”“왕비님께서 정말 왕야 얼굴의 흉터를 낫게 할 약을 만들어낼 수 있으신 겁니까?”정연의 물음에 소우연은 그저 피식 웃었다. 정연조차 믿지 못하는데 이육진이 그녀를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하지만 이육진이 치료를 받겠다고 동의
죽을 죄? 갑자기 무슨 죽을 죄?이육진은 그저 왕비가 그에게 어떤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인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정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한숨을 푹 내쉬던 이육진이 손을 내저으며 정연에게 일어나라고 했다.“넌 왕비가 어떻게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지 그것만 얘기하면 된다.”이육진이 직설적으로 묻자 정연이 바닥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왕비님은 왕야와 혼사를 치르고 나서부터 매일 왕야에 대해 물으셨고 요 며칠 동안은 매일 배나무 별채에만 묵으시면서 직접 약을 달이고 약을 자신의 몸에 발라 보시면서 가끔 왕야가 어디에 계신 지 뭘 하고 계신 지 물으셨습니다. 별채에 심은 납매가 꽃이 피자마자 왕비님께서는 바로 꽃을 꺾어서 소인에게 서재에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소인은 왕비님께서 왕야께 열과 성을 다하고 계시다고 말한 겁니다.”이육진은 탁자에 놓인 꽃병을 다시 한번 힐끗 쳐다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왕비는 오늘도 배나무 별채에서 밤을 보낼 예정이냐?”“말씀은 안 하셨지만 아마도 그러실 것 같습니다.”왕비가 하인을 시켜 배나무 별채 방 안에 이불까지 깔았고 며칠동안 그곳에서 밤을 보냈기에 오늘밤도 십중팔구 별채에서 잘 것이다.이육진은 어이없다는 듯이 허허 웃었다. 그를 그렇게 걱정하고 신경 쓴다는 사람이 며칠동안 본채로 돌아오지도 않는단 말인가?“이만 나가보거라.”이육진이 손을 내둘렀다.조금 뒤, 정연이 배나무 별채로 돌아와보니 소우연이 명심과 시녀 두 명, 그리고 내시 두 명을 데리고 마당에서 약을 빻고 있었다.정연이 다가가자 소우연이 바로 물었다.“왕야께서는 서재에 계시더냐?”“서재에 계십니다.”“그럼 내가 보낸 납매는 마음에 들어 하셨느냐?”소우연의 물음에 정연이 애매하게 대답했다.“아마도… 마음에 드신 것 같습니다.”확실하지 않은 정연의 대답에 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다가 다시 물었다.“왕야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느냐?”“왕야께서 왕비님이 오늘밤에도 별채에서 밤
용부에 도착하자 하인이 다가와 알리겠다고 했지만, 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미리 알리지 않으셔도 돼요.”정연과 진우를 데리고 주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소우연은 마당 한가운데서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는 용강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얇은 담요 하나 덮은 채 대나무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그의 온몸을 감싸며 은은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햇살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소우연은 잠시 숨을 삼켰다.곁에 있던 호위가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저는 태자빈입니다. 용 감정과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호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그는 그녀를 몰라볼 리 없었다. 주군께서 가장 자주 안부를 묻던 이였다. 위급한 상황에는 도우라는 명까지 내려졌으니, 그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과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누구도 들이지 말고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발소리조차 삼키며 마당을 가로질렀다.낙엽과 풀이 깔린 바닥 위로 바스락이는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돌려보내라.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용강한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소우연은 멈추지 않았다.“제가 오늘 올 거라는 예감이 들진 않으셨나요?”그제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햇살을 뚫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그대로 누운 채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했다.“태자빈 마마셨군요. 자리에 앉으시지요.”소우연은 그제야 그의 옆에 놓인 또 하나의 안락의자를 발견했다.방석까지 가지런히 놓인 자리가, 누가 봐도 ‘그녀’를 기다린 자리였다.“이걸 미리 준비하셨군요. 오늘 제가 올 걸 아셨던 거네요.”“예. 그리고 약간의 수를 써서 태자 전하께서 잠시 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단둘이 뵙고 싶었거든요.”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맥해드릴게요.”“괜찮습니다…”그의 말이 끝나
이민수는 혜주와 소범준만 남긴 채,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가 떠난 뒤, 아령은 소씨 가문 안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 소지윤에게 아이를 얻기 위한 계획도 한결 수월해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주는 속으로 생각했다.아씨는 누구에게도 깊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소지윤 대인에게만은 그 마음이 다른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왜 하필 그의 아이를 가지려 하시는 걸까.한편, 태자부.이육진은 연회를 열고, 용강한과 심소균을 초대했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즈음, 소우연이 용강한더러 ‘오라버니’라 부르자 심소균은 술잔을 들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아니…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지?’태자빈이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라면, 절대 가벼운 인연이 아닐 터.그보다 더 놀라운 건, 태자 이육진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심소균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에, 괜히 청주를 몇 잔 더 들이켰다.“그냥 조용히 마시죠.”용강한은 무심히 말하며 자신도 잔을 비웠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소우희는 이미 죽었다.그토록 집요하게 소우연을 괴롭히던 이가 사라졌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법도 했다.하지만, 연회 자리를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어딘가 무거웠다.심소균은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용강한은 알고 있었다.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심소균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자, 이육진은 하인을 불러 그를 데려가게 했다.연회가 마무리되고, 소우연이 조심스레 물었다.“오라버니,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세요?”“괜찮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웃었지만, 이어진 기침은 거셌고… 이내 곧 수건에는 선혈이 스며들었다.그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망토를 여미고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띠었다.그러나 그를 지켜보는 눈은 날카로웠다.소우연은 물론, 이육진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용 감정, 네 몸 상태가 왜 이리 나빠졌느냐.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그는
서재 안은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숨막히는 분위기로 가득했다.이민수는 의연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희가 소우연에게 얼마나 애원했는지, 부인께서 또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 다들 기억하시겠지요? 그런데도 소우연은 우희를 단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답니다.”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지금 잠시 조용하다고 이게 끝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내민 손길을 뿌리치셨으니, 훗날 다시 찾아오신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고, 서늘한 눈빛을 떨구었다.“우희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령이 눈물로 애걸복걸하지 않았다면… 소씨 가문을 위해 이 더러운 일에 제 발로 들어설 생각 따윈 없었습니다.어차피 저희 평서왕부는, 태자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소홍범의 안색이 굳어졌다.평서왕의 야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 이육진이 불구가 되고 얼굴까지 망가졌을 무렵, 평서왕은 황태자의 자리를 가장 가까이서 노릴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다. 비록 직접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의 장남 이민수가 황제에게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가 될 거란 이야기는 조정에 이미 돌고 있었다.수년간 평서왕부는 조용히 인맥을 조율하고 관료를 포섭해왔다. 이육진이 회복했다고는 하나, 평서왕 부자의 야망은 그 무엇으로도 꺾이지 않았다.소씨 가문은 이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아버지…”소현우가 조용히 일어섰다. 우희를 향한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소우연에 대한 원망은 이미 마음속에서 불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지옥이라면, 차라리 평서왕세자의 손을 잡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소홍범은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바라보았다.소현준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소우연을 직접 만나야 하나… 아직은 이르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그 순간.이민수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자, 소현우가 갑작스레 그의 등
“누구지?” 임진숙이 물었다.“평서왕부의 세자저하, 그리고 스스로 둘째 아씨의 지기라 밝힌 여인입니다.”소현우가 곧장 말했다. “어머니, 우희와 친하다고 했던 그 손수건 친구입니다. 어제 시신 수습을 도왔던 그 아가씨예요.”임진숙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모셔라. 우희의 친구라니... 잘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예.”소현우는 급히 나가 마중을 나갔다.지금의 소씨 가문에겐 더 이상 발버둥칠 힘도, 핑계도 없었다.평서왕 세자 이민수, 한때는 소우희의 혼처 상대였던 사내. 소우연만 아니었다면, 소씨 가문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일도, 우희가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자신이 직접 여동생의 목을 조르는 죄를 짓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이민수가 도착하자, 병중에 있던 소홍범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맞았다.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다.태자부는 이제 발붙일 수 있는 곳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아니었다.소씨 가문이 마지막으로 기대어볼 곳은 오직 평서왕부뿐.본래부터도 세상은 소씨 가문이 평서왕부의 그늘 아래 있다고 여겨왔다.“소 장군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다시 뵙는 자리가 이리도 쓸쓸할 줄은 몰랐습니다.”소홍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얼굴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있던 소한준은 냉랭하게 내뱉었다.“소우연만 없었더라면, 우희는 진작에 세자저하의 곁에 있었을 겁니다. 이런 참변도 없었겠지요.”이민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 다 지켜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형식적인 위로가 몇 마디 오간 뒤, 아령은 이민수의 배려로 이당에 남아 임진숙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소홍범과 이민수, 소현우, 소현준은 서재로 향했고, 소한준은 하인의 부축을 받아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임진숙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참을 흐느꼈다.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았다.‘우리 우희가 왜 이리 비참하게 갔을까… 우리 집안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그녀는 끝없는 자책과 회한 속에 빠져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믿었어. 그 은인이 우리 어머니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피를 말리며 상운국에 도착했을 땐 외가 쪽은 이미 떠난 뒤였지. 나중에야 들었어. 멀리 남강으로 이사했다는 걸 말이야. 그 은인은 어머니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나 봐. 결국 어머니를 다시 백화루에 팔아넘겼어. 그리고 나도… 결국 기생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지.”아령은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로 조용히 혜주를 바라봤다.“넌 어떻게 생각해? 내 이모인 임진숙이라는 사람… 참 무섭지 않아? 그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지 않아? 왜 그 사람은 고귀한 장군 부인으로 살아가고, 우리 어머니는 천한 기생이어야 해? 왜 그 사람 자식들은 다들 한 자리씩 가질 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천한 신분이었던 걸까? 우리 어머니가 그걸 참지 못했어. 나도 마찬가지였고.”아령의 눈빛은 억눌린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그래서 맹세했어. 어머니랑.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기회가 생긴다면, 꼭 그 사람과 그 사람 가문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겠다고.”그녀는 눈물을 훔친 뒤, 환하게 웃었다.그 미소는 해맑았지만, 그 속에 담긴 결심은 날카롭고 서늘했다.“그게 바로 내가 살아 있는 이유야.”그 이야기를 들은 혜주는 마음 깊은 곳이 흔들렸다.‘그랬군요… 그래서…’소 부인 임진숙. 겉으론 다정하고 자애로워 보였지만, 어린 동생을 백화루 문 앞에 유기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분명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이중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소우희 아씨가 그렇게 악랄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군요.’‘진짜…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네요…’“그 진홍색 비단함, 꼭 잘 보관해. 그 안엔… 언젠가 그 집안 사람들의 뼛가루를 담게 될 거야. 그래야 어머니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테니까.”아령은 혜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너도 쉽지 않은 삶을 살았잖아. 그 마음, 나도 잘 알아. 평서왕부로 돌아가면 널 풀어줄거야. 그때 내가 준 돈으로 아무도 널 모르는 곳에 가서… 조용히, 너답게 살아.”그 말을 들은
그녀가 한때 이민수의 침소를 지키던 몸이었다는 사실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그랬군요...”소현우는 장정답지 않게 눈가가 붉어졌다.멀찍이서 하인들이 수레를 끌고 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저건...”“우희 언니에요.”아령은 숨김없이 고백하며, 눈가를 눌렀다. 슬픔을 삭이는 듯한 손짓이었다.소현우에게는 낯선 장면이었다.소우희에게 이런 절절한 마음을 나누던 벗이 있었던가.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소현준은 그리 쉽게 믿지 않았다.여인의 말은 빈틈이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그럼에도 혜주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었다.소현준은 혜주를 일으켜 세우며 눈을 맞췄다.“정말... 둘째를 원망하지 않느냐?”혜주는 힘 있게 고개를 저었다. 그 눈빛엔 감사와 충성이 담긴 듯 보였다.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그녀는 소우희를 증오했다. 결국 바랐던 대로 소우희는 혀를 잃고,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그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것이 보상받은 기분이었다.소현우는 그런 혜주의 내면까지는 읽지 못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어릴 적부터 함께한 사이니... 주인과 종이라도 정이 있었겠지.”사실 혀를 자른 것도 그날 격분한 소홍범의 지시였다.이제 소우희는 죽었고, 더는 이 하녀에게 뭐라 할 이유도 없었다.소현우는 이마를 짚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아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고맙다. 혜주가 그대 곁에서 지낼 수 있다면... 그 또한 우희가 남긴 인연이라 생각한다.”아령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오라버니... 아니, 장군님. 죄송해요. 순간 감정이 북받쳐서...”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치 실수라도 한 듯 웃어 보였다.소현우는 손을 내저었다.“우희의 벗이라면, 오라버니라 불러도 괜찮다.”잠시 후, 소씨 가문의 하인들이 아령 일행의 수레 대신 소우희의 시신을 직접 실었다.이제 그녀를 보내는 건, 가족의 몫이었다.소현준은 형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형은 어
전날엔 폭우가, 오늘은 뙤약볕이 내리쬐었다.이런 날씨 속에서, 소우희의 시신은 또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을까.강직한 무장이자 소씨 가문의 주인인 소홍범조차 그 앞에선 중심을 잃을 뻔했다.말을 꺼내려다 삼킨 그는, 결국 큰아들 소현우와 둘째 소현준에게 시신을 찾으러 가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난장골.산바람은 살을 찌를 듯이 뜨겁고, 공기마저 눅눅하게 달아올라 있었다.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숙취에 시달리던 소현우는 동생과 함께 난장골에 도착했다.주위를 둘러보니, 시신을 찾아 이곳을 헤매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그중 한 무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희고 단정한 옷차림의 소녀가 한 대의 수레를 따라가고 있었고, 수레 위엔 희미한 천이 덮인 시신 하나가 실려 있었다.소녀의 눈가엔 희미한 붉은 기가 맴돌았다.썩은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소현준은 코끝을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호위병 하나는 이미 참지 못하고 옆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소현준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둘째 아씨 시신부터 찾아라.”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하인들은 이를 악물고 악취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였다.하얀 옷의 소녀와 그 일행이 소씨 가문의 마차 앞으로 다가왔고, 소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실례합니다. 혹시 소씨 가문의 도련님들이신지요?”마차 안에 있던 소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마차 옆에 서 있던 소현준만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그리고 그 소녀 옆에 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혜주였다.혜주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조용히 예를 올렸다.그 눈동자엔 아련한 빛이 어려 있었고, 그리움과 슬픔이 섞인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소현준은 미간을 좁히며 소녀에게 물었다.“너는 누구냐?”시선은 혜주에게 있었지만, 질문은 분명 그 소녀에게 향한 것이었다.소녀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몸을 낮추며 답했다.“아령이라 합니다. 예전에 소우희 아씨를 몇 차례 뵌 적이 있고, 개인적인 은혜를 입은 바 있습니다. 서로 손수건을 나
반 시진이 지나고, 어느덧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붉게 타오른 노을이 하늘 끝에 걸려 있었고, 맑고 푸른 하늘은 마치 물로 씻어낸 듯 투명했다.그 풍경은 마치 소우연의 마음과도 같았다.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 가볍고 평온했다.소우희는 죽었다.이 세계의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남주는 더 이상 남자 구실을 할 수 없었다.모든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새로 쓰일 터였다.진원 장군부.소현우는 돌아오자마자 술을 들이켰고, 그날 밤을 고스란히 의식을 잃은 채로 보냈다.그리고 다음 날, 해가 지기 직전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헝클어진 머리에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채, 그는 하인에게 명했다.“소씨 가문 사람들을 전부 정청으로 불러라.”며칠째 앓고 있던 소홍범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군의 업무는 거의 대부분 부장들에게 넘긴 상황이었고,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이육진이 그의 군권을 서서히 회수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지금 그의 수하 중 대부분은 본래 이육진의 옛 부하였다.이육진은 별다른 수를 쓰지 않아도, 그저 말 한마디면 모두가 따랐다.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소홍범, 그리고 그의 아들들마저도 과거엔 모두 이육진의 군 아래 있었다.5년 전,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이육진이 매복을 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소현우는 전방에서 적과 싸우며 지원 한 번 받지 못한 채 중상을 입었다.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그 순간, 그를 구해낸 사람은... 소우희가 아니었다.소우연이었다.소홍범은 이를 악물었다.소우희를 미워했다.믿고 싶었지만, 결국 기대를 저버린 딸이었다.소우연이 그의 큰아들을 살려냈다고 해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가족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그게 소우희의 자리를 대신할 이유는 아니었다.결국 일을 망쳤다.감히 소우연을 건드려, 집안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를 자초했다.정청에 모두가 모였다.눈이 퉁퉁 부은 임진숙이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님은 안 오는 거니...? 혹
‘세상에 진심이란 없어.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그 말이 또렷이 귓가에 맴돌았다.마지막까지 아령의 목소리가 소우희의 머릿속을 울렸다.‘날 미워하지 마. 미워할 거면 너 자신을 미워해. 네가 소씨 집안의 자식이라는 걸. 네 어머니가 악독한 여자였다는 걸. 그 여자가 내 어머니 인생을 망쳤고, 그래서 난 태어나자마자 천민이 되었어.’‘난 바라는 거 없어. 단 하나, 너희 소씨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보는 것. 그것만이 내 삶의 이유야.그리고 지금 난 그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소우희는 그녀가 정말로 복수가 성공하길 바랐다.여자의 숨소리가 멎었다.소현우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비틀거리며 주저앉을 뻔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우희의 콧날 아래를 짚어보았다.숨이 없었다.정말로 죽은 것이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오라버니’라 불렀던 여동생. 그 목소리가, 그 웃음이,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았건만.소우희는 정말로 죽었다.그는 허둥지둥 감방을 뛰쳐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임진숙이 그 얼굴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니?”소현우는 눈을 피하며 단호히 말했다.“아무 일 아니에요. 어서 돌아가요. 어머니, 어서요.”말을 재촉한 뒤, 급히 달려가는 소씨 가문의 마차를 바라본 옥졸은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불안한 기운에 곧장 감방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소우희가 죽어 있었다.그녀는 움직일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건 단 하나.소현우 장군.그는 자신의 손으로 친여동생의 목숨을 거두었다.옥졸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어떻게 이런 일을 책임자에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더욱이 태자에게...그는 급히 의원을 불렀지만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소우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옥졸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직접 태자부로 달려갔다.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금세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