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51화

Author: 주 한잔
그러니 이육진이 어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애써 외면했던 아픔을 명심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얘기했는데 어찌 명심에게 벌을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시 태자의 성격대로 벌을 내렸다면 명심은 겨우 목숨은 부지할 수 있다고 해도 어느 외진 마을에 팔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알면 됐어. 앞으로 말 조심하고 분위기 파악하면서 태자빈 마마를 잘 모셔. 그럼 아무도 널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던 이때, 복도에 간석의 모습이 보였다.

간석은 오늘 태자 저하와 함께 궁에 가지 않은 건가?

“간 태감님, 어쩐 일로 돌아오셨습니까?”

정연의 물음에 간석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직 날도 안 밝았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느냐?”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요?”

정연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간석이 말을 이어갔다.

“소씨 부인께서 태자부 앞에서 태자 저하를 기다리고 있었어. 태자 저하를 보자마자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소우희와 소한준 그자를 제발 살려달라고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네.”

“그자들은 참 겁도 없네요.”

정연이 입을 떡 벌렸다. 예전의 태자 저하였다면 그들이 무릎을 꿇기도 전에 모가지가 날아가거나 어디 먼 곳으로 추방됐을 것이다.

간석은 이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래도 명색이 태자빈 마마의 친정 사람들이지 않느냐? 나중에 태자빈 마마께서 깨시면 전해드리거라. 태자 저하께서 소씨 부인을 곁채에서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그 분은 대체 뭐 하려고 이러는 겁니까?”

명심은 씩씩거리며 말을 하는 와중에 진심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태자빈의 친정 사람들이 태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되레 제일 큰 걸림돌이었다.

정연이 언짢은 표정으로 명심을 힐끗 쳐다보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간석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간 태감님. 나중에 마마께서 깨시면 소인들이 바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또한 태자 저하께서는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252화

    한참 뒤.젓가락을 내려놓은 소우연은 창밖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나뭇가지에 앉아 청아하게 우는 새소리까지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오늘 뭐 특별한 일 없느냐? 진우는 어디 있어?”소우연이 물었다. 소한준의 다리가 부러졌고 소우희는 공갈과 협박까지 당했는데 그들 성격에 이렇게 조용하게 있을 리가 없다.어쩌면 진우가 뭔가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이때, 정연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말했다.“안 그래도 소인 마마께 드릴 말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태자 저하께서 아침 일찍 날이 밝기도 전에 조정에 가시려고 집을 나섰다가 저택 앞에서 소씨 부인을 마주쳤다고 합니다. 태자 저하는 그자가 태자빈 마마의 친정 가족이어서 차마 매정하게 돌려보내지는 못하시고 곁채에서 기다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마마께서 아침 진지를 드시고 임씨 부인을 어떻게 처리하든 마음대로 하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아침 일찍 날이 밝기도 전에 임진숙이 감히 태자부에 찾아왔다고?한편, 소우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리가 없는 정연은 간석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간 태감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으로 보면 소씨 부인은 소 장군님과 평춘 왕비 일로 마마께 부탁하러 오신 것 같습니다.”“그렇다면 어디 한번 만나봐야지.”말을 하던 소우연은 명심이 들고 온 대야에 손을 깨끗하게 씻은 뒤, 정연이 건넨 수건으로 손을 쓱 닦고는 수건을 곁에 있는 바구니 안에 툭 던졌다.“네, 알겠습니다.”소우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마당으로 향하자 정연은 명심에게 방 안을 깔끔하게 청소하라고 당부한 뒤, 빠른 걸음으로 태자빈의 뒤를 따랐다.한편, 곁채에서.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소씨 부인은 소우연을 보자마자 미간을 확 찌푸리며 소우연을 아니꼽게 쳐다보았다.“너 이제 태자빈이 됐다고 이 어미도 모른 척하는 것이냐?”소씨 부인의 말에 정연이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무엄하옵니다! 태자빈 마마를 보셨으면 인사부터 하셔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253화

    입술을 오므리고 있는 임진숙은 귀찮고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소우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소우연과 소우희는 똑같이 그녀의 자식이지만 쌍둥이인 두 아이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왜!소우연의 이목구비는 소씨 가문의 그 늙은이를 훨씬 많이 닮았다!분명 쌍둥이인데 소우연을 낳을 때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쳤고 임진숙은 극심한 통증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이와 반대로, 소우희를 낳을 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고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었다.그리고 생김새로 보면 소우연은 갓 태어났을 때 얼굴이 쭈글쭈글한 게 한눈에 봐도 소씨 가문 할망구와 거의 똑같았다.그것도 모자라 하루 종일 울어대서 임진숙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소홍범에게 시집을 가고 나서 지금까지 소씨 가문 노부인이 이 집을 관리하고 있었기에 명문 가문 규수 출신인 임진숙은 이런저런 능력이 뛰어났지만 단 한번도 실권을 손에 쥐여본 적이 없었다.그러니 어찌 원망스럽지 않겠는가!하지만 소우희는 달랐다. 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얼굴도 통통하고 눈도 말똥말똥한 게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났다.그때 당시 소홍범은 이런 말을 했었다.“우연이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습니다. 아주 복덩이가 따로 없습니다.”소씨 가문 노부인도 환하게 웃으며 소홍범의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이 아이는 나중에 나라에 소문난 미인이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엔 너를 많이 닮았구나. 무조건 지혜롭고 선한 아이로 클 것이야.”그렇게 칭찬을 금치 못하던 노부인은 소우희를 보자마자 미간을 확 찌푸렸다.“같은 배에서 나왔는데 생김새는 왜 이렇게 다른 지 모르겠네. 우희는 진숙이를 더 많이 닮았구나.”딸이 어미를 닮은 게 뭐 잘못되었단 말인가!소우희와 소우연은 한 시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소우희는 임진숙을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노부인의 예쁨을 받지 못했다.임진숙은 지금 생각해도 분하고 억울했다!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임진숙은 심지어 자신에게 자식이 소우희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으며 소우연은 쳐다보는 것만으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254화

    “소씨 부인 당신뿐만 아니라 소홍범 장군, 소현우 장군, 소현준 장군 그리고 소한준 장군, 심지어 소씨 노부인까지 그깟 사기꾼 점쟁이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저를 소외하고 미워하고 괴롭히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조제한 약을 소씨 노부인께 드려도 노부인은 쳐다보지도 않고 저에게 던지고 가셨지요.”소우연은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소우희가 약을 드렸을 땐 달랐습니다. 노부인께서는 심지어 의심조차 하지 않고 바로 쓰셨지요. 너무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말을 하던 소우연은 미간을 확 찌푸린 채 표정이 막연했다. 슬프거나 화가 난 게 아니라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똑같은 소씨 가문 딸인데 왜 소씨 가문 사람들은 유독 그녀만 미워하고 홀시한 걸까?“왜 그런 건지 아직도 모르는 겁니까?”냉랭하고 담담한 표정을 짓던 임진숙은 소우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마마는 소씨 가문의 저주받은 존재이기 때문이지요.”그 말에 소우연은 허허 웃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단아하게 앉아있는 임진숙 입에서 나온 말은 더할 나위 없이 차갑고 냉정했다.“하긴, 왜 그랬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도 관심이 없거든요. 하지만 소씨 부인께서 오늘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 잊으신 건 아니지요?”정신을 번쩍 차린 임진숙은 그제야 냉랭하던 표정이 확 풀리더니 소우연을 쳐다보며 말했다.“예전의 일들은 다 지나갔으니 더 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태자빈 마마께서 우리 한준이와 우희를 도와준다면 진원장군 관저는 여전히 마마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겁니다.”임진숙이 소우연을 아무리 싫어하고 아니꼽게 생각한다고 해도 소홍범과 나머지 소씨 가문 사람들은 절대 소우연을 놓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한편, 소우연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이자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아직도 과거에 살고 있는 건가?’진원장군 관저는 예전에도, 앞으로도 절대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255화

    결국 또 소우연과 말다툼을 하고 있는 임진숙을 보며 나인은 소름이 쫙 돋았다. 남이 봐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을 소씨 부인은 왜 아직도 인정하지 못한단 말인가!소우연은 이제 더 이상 소씨 가문 사람들의 협박이나 공갈에 굴복할 사람이 아니다!한편, 소씨 부인은 소우연의 말을 아직도 의심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독학으로 의술을 익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회남왕의 다리와 얼굴을 고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그럼 당연히 소한준의 다리도 고치지 못한다는 뜻인데 지금이라도 빨리 명의를 따로 알아보는 게 빠를 것이다.한편, 소씨 부인이 떠나자 소우연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 위에 확 엎어버렸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씩 올린 채 담담하게 웃었다.‘고작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소씨 부인께서 화가 많이 나셨네? 난 전생에 사지가 다 잘려서 밖에 버려졌는데. 그리고 이민수와 소우희가 혼인을 맺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난 그해 겨울 그렇게 처참한 죽음을 당했는데 소씨 가문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내 생사를 확인하러 나오지 않았잖아! 이제 시작이야. 고작 가슴이 조금 답답한 걸로 턱도 없으니까 기대하시라고!’“정연아, 두 달 전에 손 근육을 다쳐서 나한테 치료를 받았던 환자가 이제 다 나았을 거다. 그자한테 찾아가서 이제 내 의술을 널리 알려도 된다고 얘기하거라.”정연은 소우연의 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때 당시 그 남자 환자의 두 손은 까무잡잡했고 손톱 안에는 흙이 잔뜩 끼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진정한 평민이었다.하지만 그때 왕야의 다리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왕비는 그 환자의 손을 치료해주지 않기로 했다.당시 그 환자는 데리고 온 아이들과 함께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애원했고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왕비는 치료를 해주는 대신, 반드시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그리고 인질로 남자의 세 사내아이들을 약방에 제자로 들여 곁에 두었다.이제 왕야께서 건강을 회복했다는 소식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기에 이 일도 숨기고 있을 필요가 없다.“걱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256화

    나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소인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마님, 그러지 말고 큰 아씨와 화해를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두 분은 모녀 사이이지 않습니까?”“모녀? 그 계집애는 단 한번도 날 어미라고 생각한 적 없다.”“마님도 큰 아씨를 싫어하고 소외하지 않으셨습니까?”“그 계집애는 어머님을 너무 많이 닮았다. 걔가 태어난 순간부터 어머님은 매일 걔만 안아주고 예뻐했지. 어머님을 닮아서 나중에 꼭 큰일을 할 거라고 하는데 너무 꼴 보기가 싫었어!”나인은 다시 침묵했다.다른 건 몰라도 큰 아씨가 큰일을 한 건 확실하다. 큰 아씨는 지금까지 크면서 어르신이나 마님의 사랑이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했는데 되레 둘째 아씨보다 훨씬 훌륭하게 자랐다.“마님, 이렇게 고집을 부린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큰 마님께서도 이제 큰 아씨를 받아들였는데 어미인 마님도… 그리고 마님도 직접 보지 않으셨습니까? 큰 아씨의 수려한 외모는 큰 마님과 전혀 닮은 구석이 없습니다.”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그 말에 소씨 부인은 머릿속에 천둥번개가 울려 퍼졌다. 소우연의 미모는 현재 경성에서 손꼽힐 정도였으며 나인이 말한 것처럼 소씨 가문 노부인의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되레 임진숙이 예전에 잃어버렸던 여동생 임혜숙과 더 닮은 듯하다.“혜숙아, 우리 종이접기 하자!”“혜숙아, 저기 호떡 파는 거 있어. 우리 호떡 사먹자!”“저기 왜 저렇게 시끌벅적하지? 우리 저기 가보자.”그때 당시 어리고 철이 없었던 임진숙은 어머니가 여동생만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동생을 데리고 호떡을 사서 시끌벅적한 곳으로 구경갔다가 결국 여동생을 데리고 백화루로 향했다.임진숙은 예전에 나이가 많은 나인한테서 백화루 주인이 예쁘고 어린 아가씨만 잡아간다고 들은 적이 있었기에 임혜숙에게 백화루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했다…“마님, 평춘왕 관저에 도착하였습니다.”곁에 앉아있던 나인의 목소리에 임진숙은 과거의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257화

    ‘그럼 소우희 그녀가 처참한 죽음을 당할 거라고 했던 소우연의 말도 거짓이겠지! 능력도 없으면서 큰소리를 지껄이긴! 그 계집애 진짜 사람 짜증나게 하네!’“왕비님…”“왜 자꾸 불러!”왠지 모르게 몸이 자꾸 뜨거워지고 있는 느낌에 소우희는 모든 일에 예민하고 심란했다.그 모습에 흠칫하던 호위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저기, 진원장군 관저 소씨 부인께서 또 찾아오셨습니다.”“그럼 쫓으면 되잖아!”“하지만 이번에는 태자 저하와 태자빈 마마의 허락을 받고 오신 거라고 하셨습니다.”“태자?”소우희가 이를 악물었다.“이육진과 소우연 그 두 사람 진짜 내가 죽는 꼴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거야? 버러지 같은 놈들!”순간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른 소우희는 손에 들고 있던 과일을 바닥에 확 집어 던졌다.곁에 서있던 호위병과 춘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숨죽이고 있었다.겨우 감정을 억제한 소우희는 갑자기 간지러워진 손목을 쓱쓱 긁으며 말했다.“태자도 왔어? 태자가 같이 오지 않았다면 그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아? 지금 우리 평춘왕 저택은 절대 황태자의 눈 밖에 나는 일을 해서는 안 돼! 멍청한 놈! 평춘왕 저택에서 주는 밥을 먹으면서 그딴 식으로 일을 할 거야?”호위병은 너무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평소에도 소우희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크게 화내는 모습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더군다나 저택에 찾아온 사람은 왕비의 친모인데 어떻게 이렇게 냉정하고 차갑게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넋을 잃은 채 멍하니 서있던 호위병이 소우희의 명을 받고 돌아서려던 순간, 소우희가 다시 욕설을 퍼부었다.“버러지 같은 놈! 앞으로 일 제대로 해! 또 한번 멍청하게 굴면 그땐 가만두지 않을 거야!”“네, 왕비님!”호위병은 도망치듯 황급히 돌아서서 떠났고 춘화 등 하인들은 잔뜩 겁을 먹은 채 가만히 서있었다.왕야는 본채에 누워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계시고 평서왕세자는 매일 바깥일로 바쁘기에 이 저택은 완전히 소우희의 세상이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258화

    한편, 태자부에서.궁에서 황제와 이런저런 얘기를 오랫동안 나눈 이육진이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임진숙을 또다시 마주치게 되었다.임진숙은 이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태자 저하께 인사를 올립니다.”미간을 살짝 찌푸린 이육진은 간석을 힐끗 쳐다보고는 그대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한편, 간석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저하께서는 무슨 뜻이지?’간석이 고개를 돌려 진규를 쳐다보자 진규는 그저 어깨를 들썩였다.“간 태감님은 태자 저하의 심복이라고 자칭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그 역할을 보여줄 때가 된 것 같습니다.”말을 하던 진규는 이내 이육진을 뒤따랐고 홀로 남은 간석은 말문이 턱 막혔다.한편, 임진숙은 이육진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입을 떡 벌렸다.‘그래도 내가 황태자의 장모인데 사위라는 자가 어떻게 장모에게 저렇게 예의 없이 굴 수가 있단 말인가?’나인이 눈이 휘둥그레졌다.혀를 차던 간석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 호위병에게 물었다.“소씨 부인께서는 지금까지 계속 태자부에 있었던 것이냐?”호위병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아닙니다, 태감님. 태자빈 마마께서 아침에 소씨 부인을 만나 뵌 후 소씨 부인은 바로 저택을 떠나셨습니다.”“그런데 왜 또 찾아온 것이냐?”간석은 임진숙을 힐끗 쳐다보았다. 저자가 태자빈 마마의 친모가 아니었다면 말도 섞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어찌 됐든 두 사람은 혈연관계가 있기에 만에 하나 나중에 화해라도 하면 간석은 큰 죄를 저지르는 것이기에 임진숙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조금 전에 소씨 부인께서 태자빈 마마께 평춘왕 관저에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평춘왕 관저에서 소씨 부인을 문전박대 한 듯합니다.”호위병의 목소리가 꽤 컸기에 임진숙과 나인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이에 임진숙은 재빨리 말을 보탰다.“우리 우희가 평춘왕 관저에서 신분 지위가 그리 높지 못합니다. 태자빈 마마의 동행 없이는 평춘왕 관저의 대문을 절대 열어주지 않겠다고 하니 태감께서 부디 태자빈 마마를 잘 설득하여 나와 함께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259화

    “아니, 우리는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전에도 얘기하지 않았느냐?”소우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설 원작 속 이육진에 대한 묘사로 보면 얼굴이 망가진 뒤로 그는 절대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이민수와 소우희의 선량함을 돋보이게 하려면 이육진은 반드시 나쁜 짓을 저질러야 했다.“무슨 생각을 했길래 몸을 그렇게 떨었던 것이냐?”이육진이 물었다. 소우연은 밤에 꿈을 많이 꾸는 듯했으며 그 꿈들로 괴로워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이육진은 소우연을 품에 안은 채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었고 소우연의 비통함과 절망스러운 감정이 느껴지기도 했다.‘연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꿈 속에 자주 나오는 그 무서운 일들이 생각난 건가? 그녀는 대체 무슨 꿈을 꾸었을까?’먹이를 주고 있던 손이 흠칫하던 소우연은 이육진을 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소우희가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두렵고 절망적이지 않을까, 혹은 자신이 했던 나쁜 짓들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이육진은 손으로 소우연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대꾸했다.“그자는 두려워할 것이다. 절망도 느끼겠지만 그보다 증오가 더욱 커질 것이야. 그렇다고 절대 예전에 너에게 몹쓸 짓을 저지른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아. 그게 악한 인간의 특징이거든.”피식 웃던 소우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것 같습니다. 소우희 성격에 절대 후회할 리가 없겠지요.”“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있는 한, 아무도 너를 다치게 할 수 없다.”“네, 알고 있습니다.”소우희는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고 소우연을 증오하고 저주하는 것 외에 아무 방법이 없을 것이다.“그럼 이제 네 꿈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얘기해줄 수 있겠느냐?”이육진은 소우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더할 나위 없는 안전감을 주었다.한편, 소우연은 그런 이육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가끔 스쳐가는 장면 하나하나가 그녀를 고통스럽게 괴롭혔다.하지만 오늘 이렇게 이육진의 따듯한 손길

Latest chapter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82화

    용부에 도착하자 하인이 다가와 알리겠다고 했지만, 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미리 알리지 않으셔도 돼요.”정연과 진우를 데리고 주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소우연은 마당 한가운데서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는 용강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얇은 담요 하나 덮은 채 대나무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그의 온몸을 감싸며 은은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햇살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소우연은 잠시 숨을 삼켰다.곁에 있던 호위가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저는 태자빈입니다. 용 감정과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호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그는 그녀를 몰라볼 리 없었다. 주군께서 가장 자주 안부를 묻던 이였다. 위급한 상황에는 도우라는 명까지 내려졌으니, 그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과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누구도 들이지 말고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발소리조차 삼키며 마당을 가로질렀다.낙엽과 풀이 깔린 바닥 위로 바스락이는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돌려보내라.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용강한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소우연은 멈추지 않았다.“제가 오늘 올 거라는 예감이 들진 않으셨나요?”그제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햇살을 뚫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그대로 누운 채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했다.“태자빈 마마셨군요. 자리에 앉으시지요.”소우연은 그제야 그의 옆에 놓인 또 하나의 안락의자를 발견했다.방석까지 가지런히 놓인 자리가, 누가 봐도 ‘그녀’를 기다린 자리였다.“이걸 미리 준비하셨군요. 오늘 제가 올 걸 아셨던 거네요.”“예. 그리고 약간의 수를 써서 태자 전하께서 잠시 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단둘이 뵙고 싶었거든요.”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맥해드릴게요.”“괜찮습니다…”그의 말이 끝나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81화

    이민수는 혜주와 소범준만 남긴 채,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가 떠난 뒤, 아령은 소씨 가문 안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 소지윤에게 아이를 얻기 위한 계획도 한결 수월해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주는 속으로 생각했다.아씨는 누구에게도 깊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소지윤 대인에게만은 그 마음이 다른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왜 하필 그의 아이를 가지려 하시는 걸까.한편, 태자부.이육진은 연회를 열고, 용강한과 심소균을 초대했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즈음, 소우연이 용강한더러 ‘오라버니’라 부르자 심소균은 술잔을 들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아니…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지?’태자빈이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라면, 절대 가벼운 인연이 아닐 터.그보다 더 놀라운 건, 태자 이육진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심소균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에, 괜히 청주를 몇 잔 더 들이켰다.“그냥 조용히 마시죠.”용강한은 무심히 말하며 자신도 잔을 비웠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소우희는 이미 죽었다.그토록 집요하게 소우연을 괴롭히던 이가 사라졌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법도 했다.하지만, 연회 자리를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어딘가 무거웠다.심소균은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용강한은 알고 있었다.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심소균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자, 이육진은 하인을 불러 그를 데려가게 했다.연회가 마무리되고, 소우연이 조심스레 물었다.“오라버니,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세요?”“괜찮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웃었지만, 이어진 기침은 거셌고… 이내 곧 수건에는 선혈이 스며들었다.그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망토를 여미고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띠었다.그러나 그를 지켜보는 눈은 날카로웠다.소우연은 물론, 이육진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용 감정, 네 몸 상태가 왜 이리 나빠졌느냐.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그는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80화

    서재 안은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숨막히는 분위기로 가득했다.이민수는 의연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희가 소우연에게 얼마나 애원했는지, 부인께서 또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 다들 기억하시겠지요? 그런데도 소우연은 우희를 단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답니다.”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지금 잠시 조용하다고 이게 끝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내민 손길을 뿌리치셨으니, 훗날 다시 찾아오신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고, 서늘한 눈빛을 떨구었다.“우희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령이 눈물로 애걸복걸하지 않았다면… 소씨 가문을 위해 이 더러운 일에 제 발로 들어설 생각 따윈 없었습니다.어차피 저희 평서왕부는, 태자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소홍범의 안색이 굳어졌다.평서왕의 야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 이육진이 불구가 되고 얼굴까지 망가졌을 무렵, 평서왕은 황태자의 자리를 가장 가까이서 노릴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다. 비록 직접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의 장남 이민수가 황제에게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가 될 거란 이야기는 조정에 이미 돌고 있었다.수년간 평서왕부는 조용히 인맥을 조율하고 관료를 포섭해왔다. 이육진이 회복했다고는 하나, 평서왕 부자의 야망은 그 무엇으로도 꺾이지 않았다.소씨 가문은 이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아버지…”소현우가 조용히 일어섰다. 우희를 향한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소우연에 대한 원망은 이미 마음속에서 불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지옥이라면, 차라리 평서왕세자의 손을 잡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소홍범은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바라보았다.소현준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소우연을 직접 만나야 하나… 아직은 이르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그 순간.이민수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자, 소현우가 갑작스레 그의 등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79화

    “누구지?” 임진숙이 물었다.“평서왕부의 세자저하, 그리고 스스로 둘째 아씨의 지기라 밝힌 여인입니다.”소현우가 곧장 말했다. “어머니, 우희와 친하다고 했던 그 손수건 친구입니다. 어제 시신 수습을 도왔던 그 아가씨예요.”임진숙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모셔라. 우희의 친구라니... 잘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예.”소현우는 급히 나가 마중을 나갔다.지금의 소씨 가문에겐 더 이상 발버둥칠 힘도, 핑계도 없었다.평서왕 세자 이민수, 한때는 소우희의 혼처 상대였던 사내. 소우연만 아니었다면, 소씨 가문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일도, 우희가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자신이 직접 여동생의 목을 조르는 죄를 짓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이민수가 도착하자, 병중에 있던 소홍범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맞았다.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다.태자부는 이제 발붙일 수 있는 곳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아니었다.소씨 가문이 마지막으로 기대어볼 곳은 오직 평서왕부뿐.본래부터도 세상은 소씨 가문이 평서왕부의 그늘 아래 있다고 여겨왔다.“소 장군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다시 뵙는 자리가 이리도 쓸쓸할 줄은 몰랐습니다.”소홍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얼굴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있던 소한준은 냉랭하게 내뱉었다.“소우연만 없었더라면, 우희는 진작에 세자저하의 곁에 있었을 겁니다. 이런 참변도 없었겠지요.”이민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 다 지켜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형식적인 위로가 몇 마디 오간 뒤, 아령은 이민수의 배려로 이당에 남아 임진숙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소홍범과 이민수, 소현우, 소현준은 서재로 향했고, 소한준은 하인의 부축을 받아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임진숙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참을 흐느꼈다.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았다.‘우리 우희가 왜 이리 비참하게 갔을까… 우리 집안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그녀는 끝없는 자책과 회한 속에 빠져 있었다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78화

    “그때는 정말로 믿었어. 그 은인이 우리 어머니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피를 말리며 상운국에 도착했을 땐 외가 쪽은 이미 떠난 뒤였지. 나중에야 들었어. 멀리 남강으로 이사했다는 걸 말이야. 그 은인은 어머니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나 봐. 결국 어머니를 다시 백화루에 팔아넘겼어. 그리고 나도… 결국 기생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지.”아령은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로 조용히 혜주를 바라봤다.“넌 어떻게 생각해? 내 이모인 임진숙이라는 사람… 참 무섭지 않아? 그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지 않아? 왜 그 사람은 고귀한 장군 부인으로 살아가고, 우리 어머니는 천한 기생이어야 해? 왜 그 사람 자식들은 다들 한 자리씩 가질 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천한 신분이었던 걸까? 우리 어머니가 그걸 참지 못했어. 나도 마찬가지였고.”아령의 눈빛은 억눌린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그래서 맹세했어. 어머니랑.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기회가 생긴다면, 꼭 그 사람과 그 사람 가문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겠다고.”그녀는 눈물을 훔친 뒤, 환하게 웃었다.그 미소는 해맑았지만, 그 속에 담긴 결심은 날카롭고 서늘했다.“그게 바로 내가 살아 있는 이유야.”그 이야기를 들은 혜주는 마음 깊은 곳이 흔들렸다.‘그랬군요… 그래서…’소 부인 임진숙. 겉으론 다정하고 자애로워 보였지만, 어린 동생을 백화루 문 앞에 유기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분명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이중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소우희 아씨가 그렇게 악랄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군요.’‘진짜…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네요…’“그 진홍색 비단함, 꼭 잘 보관해. 그 안엔… 언젠가 그 집안 사람들의 뼛가루를 담게 될 거야. 그래야 어머니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테니까.”아령은 혜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너도 쉽지 않은 삶을 살았잖아. 그 마음, 나도 잘 알아. 평서왕부로 돌아가면 널 풀어줄거야. 그때 내가 준 돈으로 아무도 널 모르는 곳에 가서… 조용히, 너답게 살아.”그 말을 들은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77화

    그녀가 한때 이민수의 침소를 지키던 몸이었다는 사실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그랬군요...”소현우는 장정답지 않게 눈가가 붉어졌다.멀찍이서 하인들이 수레를 끌고 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저건...”“우희 언니에요.”아령은 숨김없이 고백하며, 눈가를 눌렀다. 슬픔을 삭이는 듯한 손짓이었다.소현우에게는 낯선 장면이었다.소우희에게 이런 절절한 마음을 나누던 벗이 있었던가.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소현준은 그리 쉽게 믿지 않았다.여인의 말은 빈틈이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그럼에도 혜주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었다.소현준은 혜주를 일으켜 세우며 눈을 맞췄다.“정말... 둘째를 원망하지 않느냐?”혜주는 힘 있게 고개를 저었다. 그 눈빛엔 감사와 충성이 담긴 듯 보였다.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그녀는 소우희를 증오했다. 결국 바랐던 대로 소우희는 혀를 잃고,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그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것이 보상받은 기분이었다.소현우는 그런 혜주의 내면까지는 읽지 못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어릴 적부터 함께한 사이니... 주인과 종이라도 정이 있었겠지.”사실 혀를 자른 것도 그날 격분한 소홍범의 지시였다.이제 소우희는 죽었고, 더는 이 하녀에게 뭐라 할 이유도 없었다.소현우는 이마를 짚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아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고맙다. 혜주가 그대 곁에서 지낼 수 있다면... 그 또한 우희가 남긴 인연이라 생각한다.”아령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오라버니... 아니, 장군님. 죄송해요. 순간 감정이 북받쳐서...”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치 실수라도 한 듯 웃어 보였다.소현우는 손을 내저었다.“우희의 벗이라면, 오라버니라 불러도 괜찮다.”잠시 후, 소씨 가문의 하인들이 아령 일행의 수레 대신 소우희의 시신을 직접 실었다.이제 그녀를 보내는 건, 가족의 몫이었다.소현준은 형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형은 어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76화

    전날엔 폭우가, 오늘은 뙤약볕이 내리쬐었다.이런 날씨 속에서, 소우희의 시신은 또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을까.강직한 무장이자 소씨 가문의 주인인 소홍범조차 그 앞에선 중심을 잃을 뻔했다.말을 꺼내려다 삼킨 그는, 결국 큰아들 소현우와 둘째 소현준에게 시신을 찾으러 가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난장골.산바람은 살을 찌를 듯이 뜨겁고, 공기마저 눅눅하게 달아올라 있었다.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숙취에 시달리던 소현우는 동생과 함께 난장골에 도착했다.주위를 둘러보니, 시신을 찾아 이곳을 헤매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그중 한 무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희고 단정한 옷차림의 소녀가 한 대의 수레를 따라가고 있었고, 수레 위엔 희미한 천이 덮인 시신 하나가 실려 있었다.소녀의 눈가엔 희미한 붉은 기가 맴돌았다.썩은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소현준은 코끝을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호위병 하나는 이미 참지 못하고 옆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소현준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둘째 아씨 시신부터 찾아라.”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하인들은 이를 악물고 악취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였다.하얀 옷의 소녀와 그 일행이 소씨 가문의 마차 앞으로 다가왔고, 소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실례합니다. 혹시 소씨 가문의 도련님들이신지요?”마차 안에 있던 소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마차 옆에 서 있던 소현준만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그리고 그 소녀 옆에 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혜주였다.혜주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조용히 예를 올렸다.그 눈동자엔 아련한 빛이 어려 있었고, 그리움과 슬픔이 섞인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소현준은 미간을 좁히며 소녀에게 물었다.“너는 누구냐?”시선은 혜주에게 있었지만, 질문은 분명 그 소녀에게 향한 것이었다.소녀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몸을 낮추며 답했다.“아령이라 합니다. 예전에 소우희 아씨를 몇 차례 뵌 적이 있고, 개인적인 은혜를 입은 바 있습니다. 서로 손수건을 나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75화

    반 시진이 지나고, 어느덧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붉게 타오른 노을이 하늘 끝에 걸려 있었고, 맑고 푸른 하늘은 마치 물로 씻어낸 듯 투명했다.그 풍경은 마치 소우연의 마음과도 같았다.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 가볍고 평온했다.소우희는 죽었다.이 세계의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남주는 더 이상 남자 구실을 할 수 없었다.모든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새로 쓰일 터였다.진원 장군부.소현우는 돌아오자마자 술을 들이켰고, 그날 밤을 고스란히 의식을 잃은 채로 보냈다.그리고 다음 날, 해가 지기 직전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헝클어진 머리에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채, 그는 하인에게 명했다.“소씨 가문 사람들을 전부 정청으로 불러라.”며칠째 앓고 있던 소홍범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군의 업무는 거의 대부분 부장들에게 넘긴 상황이었고,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이육진이 그의 군권을 서서히 회수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지금 그의 수하 중 대부분은 본래 이육진의 옛 부하였다.이육진은 별다른 수를 쓰지 않아도, 그저 말 한마디면 모두가 따랐다.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소홍범, 그리고 그의 아들들마저도 과거엔 모두 이육진의 군 아래 있었다.5년 전,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이육진이 매복을 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소현우는 전방에서 적과 싸우며 지원 한 번 받지 못한 채 중상을 입었다.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그 순간, 그를 구해낸 사람은... 소우희가 아니었다.소우연이었다.소홍범은 이를 악물었다.소우희를 미워했다.믿고 싶었지만, 결국 기대를 저버린 딸이었다.소우연이 그의 큰아들을 살려냈다고 해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가족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그게 소우희의 자리를 대신할 이유는 아니었다.결국 일을 망쳤다.감히 소우연을 건드려, 집안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를 자초했다.정청에 모두가 모였다.눈이 퉁퉁 부은 임진숙이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님은 안 오는 거니...? 혹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74화

    ‘세상에 진심이란 없어.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그 말이 또렷이 귓가에 맴돌았다.마지막까지 아령의 목소리가 소우희의 머릿속을 울렸다.‘날 미워하지 마. 미워할 거면 너 자신을 미워해. 네가 소씨 집안의 자식이라는 걸. 네 어머니가 악독한 여자였다는 걸. 그 여자가 내 어머니 인생을 망쳤고, 그래서 난 태어나자마자 천민이 되었어.’‘난 바라는 거 없어. 단 하나, 너희 소씨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보는 것. 그것만이 내 삶의 이유야.그리고 지금 난 그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소우희는 그녀가 정말로 복수가 성공하길 바랐다.여자의 숨소리가 멎었다.소현우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비틀거리며 주저앉을 뻔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우희의 콧날 아래를 짚어보았다.숨이 없었다.정말로 죽은 것이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오라버니’라 불렀던 여동생. 그 목소리가, 그 웃음이,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았건만.소우희는 정말로 죽었다.그는 허둥지둥 감방을 뛰쳐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임진숙이 그 얼굴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니?”소현우는 눈을 피하며 단호히 말했다.“아무 일 아니에요. 어서 돌아가요. 어머니, 어서요.”말을 재촉한 뒤, 급히 달려가는 소씨 가문의 마차를 바라본 옥졸은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불안한 기운에 곧장 감방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소우희가 죽어 있었다.그녀는 움직일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건 단 하나.소현우 장군.그는 자신의 손으로 친여동생의 목숨을 거두었다.옥졸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어떻게 이런 일을 책임자에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더욱이 태자에게...그는 급히 의원을 불렀지만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소우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옥졸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직접 태자부로 달려갔다.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금세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