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돼!”극심한 통증에 소우연은 큰소리로 외치며 눈을 번쩍 떴다.소우연 앞에 펼쳐진 건 화려하게 꾸며진 방이었으며 향초가 불에 타고 있는 소리가 들렸고 은은한 향도 퍼지고 있었다.조금 전까지 온몸을 괴롭히던 통증도 전부 사라진 것만 같았다.소우연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방을 쓱 훑어보았고 단번에 이 방이 신혼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고개를 숙여보니 자신은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이 혼례복은 소우연이 쌍둥이 여동생 소우희를 위해 3년에 거쳐 직접 만든 혼례복이었는데 결국 소우연이 이 혼례복을 입고 시집가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리고 소우연의 결혼 상대는 악명이 자자한 회남왕 이육진이다.상운국에서 명망 높은 전쟁의 신이었던 이육진은 3년 전 전쟁에서 부하에게 배신을 당해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다. 결국 목숨 걸고 싸워서 위험한 상황을 벗어났지만 그 과정에서 온몸의 신경들이 전부 잘려 폐인이 되고 말았다.그 뒤로 이육진은 성격이 난폭해지기 시작했으며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노비와 시녀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하기도 했다.황제가 이육진에게 혼인을 몇 차례나 하사했지만 신부들은 혼사를 치른 이튿날 바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회남왕 관저 밖에 버려졌다.그러다가 한 달 전, 이육진의 모친 덕빈은 황제 앞에서 난동을 부리며 다시 한번 혼인을 하사해달라고 했고 그 상대가 바로 진원 장군 가문의 둘째 딸 소우희였다.어렸을 때부터 소우희를 애지중지 키운 소씨 가문에서는 당연히 사랑하는 딸을 이육진에게 보낼 수 없었기에 결국 소우연이 쌍둥이 여동생 대신 이육진과 혼인을 하게 된 것이다.사실 소우연은 오래 전부터 연모하는 사내가 있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함께 큰 두 사람은 혼인을 약속한 사이이기도 했다.때문에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시집을 가기 싫었고 더군다나 회남왕에 관한 소문이 너무 흉흉한 탓에 겁이 나기도 했다.그러다가 혼사가 이뤄진 당일 날, 소우연은 소우희의 꼬드김에 넘어가 결국 도망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멀리 도망치기도 전에 다시 잡혀오게 되었
소우연은 침대에 누운 이육진을 보며 한참동안 넋이 나간 표정을 짓다가 자신도 저 침대에 올라가야 하나 망설여졌다.이육진의 태도로 보면 소우연과 잠자리를 가질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지만 내일 아침 덕빈이 시녀를 보내어 가채를 살펴보고 두 사람이 합방하지 않은 걸 발견하면 소우연을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올라와.”소우연이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침대에 누워 있던 이육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고 움찔한 소우연은 자신의 옷을 꽉 잡고 있다가 우물쭈물하며 다가갔다.소우연이 침대에 스스로 올라가려던 그때, 이육진이 갑자기 돌아눕더니 손을 뻗어 방 안을 비추던 초를 꺼버렸고 이내 방 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다음 순간, 소우연의 손목을 덥석 잡은 이육진은 그대로 확 잡아당겼고 화들짝 놀란 소우연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순식간에 침대 위로 올라와 이육진 품에 와락 안기게 되었다.보기보다 훨씬 튼튼한 이육진의 몸매에 소우연은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소리 질러.”이육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고 소우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들었다.하지만 바로 이때, 이육진이 손을 뻗어 소우연의 허리끈을 확 풀어헤쳤고 소우연이 반응을 하기도 전에 빠르게 그녀의 옷을 벗겼으며 결국 내의밖에 남지 않았다.“악!”화들짝 놀란 소우연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가슴을 가렸고 찬바람이 느껴지자 온몸을 덜덜 떨었다.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의 허리를 손으로 꽉 쥔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난 네 몸에 손대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알아서 큰소리로 신음소리를 내.”한 번도 신음소리를 낸 적이 없는 소우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계속 망설였다가 이육진이 직접 나설까 봐 걱정이 된 소우연은 가까스로 입을 열어 소리를 냈다.한편, 소우연의 나른한 목소리에 이육진은 미간을 확 찌푸렸고 냉랭하고 덤덤하게 다시 말했다.“멈추지 말고 계속해.”소우연은 너무 억울하고 서러웠지만 그만큼 살고 싶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최소한 이육진
“이 약은 상처 치료에 꽤 효과가 좋습니다. 제가 얼른 상처에 발라드리겠습니다.”소우연은 하얀 고약을 손가락에 조금 묻혀 이육진의 상처에 발라주었고 손가락에서 통증이 살짝 느껴진 이육진은 고개를 숙여 소우연을 빤히 쳐다보았다.고개를 푹 숙인 채 상처를 꼼꼼하게 살피던 소우연은 본능적으로 입을 삐죽 내민 채 상처에 바람을 후후 불었다가 자신이 실례를 범했다는 생각에 재빨리 입을 꾹 닫았다.한편, 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을 보며 왠지 기억 속에 있던 그 사람이 떠올랐고 특히 소우연이 발라준 이 고약은…조금 뒤, 소우연은 휠체어에 탄 이육진을 모시고 덕빈에게 인사를 올리러 갔다.황제께서 이육진의 혼사를 잘 마무리 지으라고 덕빈을 회남왕 관저에 3일 머무를 수 있게 허락했다.소우연은 이육진의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덕빈이 머무른 방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신혼방을 떠나자마자 나인 한 명이 몰래 신혼방으로 들어가 침대보에 묻은 핏자국을 확인한 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떠났다.소우연과 이육진이 덕빈이 머무른 방에 도착했을 때, 신혼방에 들어가 핏자국을 확인하던 나인이 두 사람보다 먼저 와있었고 덕빈의 방 안에 들어가 덕빈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었다. 그러자 덕빈은 만족스럽게 피식 웃었다.“소인 덕빈 마마께 인사를 올립니다.”덕빈 앞에 서서 잔뜩 긴장한 소우연은 손바닥에 땀이 잔뜩 맺혔다. 소우연은 자신이 혹시라도 말실수를 저질러서 덕빈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할까 봐 너무 두려웠다.한편, 덕빈은 몸을 잔뜩 움츠린 소우연을 힐끔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이육진에게 돌렸다. 이육진은 표정이 덤덤했지만 조금 전 소우연이 인사를 할 때 본능적으로 소우연을 쳐다보았기에 그래도 자신의 부인을 신경 쓴다는 뜻이다.“고개를 들고 가까이 오너라. 네 얼굴을 자세하게 보고 싶구나.”덕빈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소우연은 덕빈이 혹시라도 수상한 낌새를 눈치챌까 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소씨 가문에서 아무도 모르게 소우희 대신 소우연을 이육진에게 시집보냈기에 만에 하
“네가 어떻게 돌아온 것이냐?”소홍범이 굳은 표정으로 딱딱하게 물었고 소우연은 아버지의 그런 표정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소씨 가문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어렸을 때부터 우러러봤던 아버지인데 지금 소우연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혐오와 불만밖에 남지 않았다.한편, 이민수도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소우연을 쳐다보았다.그들은 회남왕 관저에 보내진 소우연이 살아서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아버님 질문이 참 이상하네요? 제가 이집에 돌아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오늘은 혼인을 치른 제가 친정에 인사를 드리러 와야 하는 날입니다. 설마 아버님께서 이를 잊으신 겁니까?”소우연의 말에 안색이 조금 나아진 소홍범이 태연한 모습으로 말했다.“돌아왔으면 저기 뒤뜰에 가 있거라.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소우연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예전이라면 소우연은 아버지가 시킨 대로 바로 뒤뜰로 갔을 것이지만 이제는 신분이 다르기에 아버지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아버님, 혹시 제가 들으면 안 되는 얘기라도 있는 것입니까?”소우연이 태연한 모습으로 천천히 대청 안으로 들어갔고 예전에 모든 면에서 조심스러운 소우연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그리고 더 이상 소씨 가문 사람들의 비위도 맞추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리 노력해도 이 사람들은 그녀를 사랑해주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대문 앞에서 죽음을 당해도 시신조차 거둬주지 않을 사람들이다.한편, 소우연의 행동에 화가 난 소홍범이 언성을 높였다.“이게 지금 버릇없이 무슨 짓이냐? 넌 애초부터 우리 대화에 끼어들 자격도 없었어. 이만 물러가라는 말 안 들려?”소우연은 그저 눈을 깜빡이며 소홍범을 빤히 쳐다보았다.“아버님, 혹시 제 신분을 잊으신 겁니까? 전 어제부터 회남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럼 아버님께서도 저를 보시면 예를 갖춰 인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흠칫하던 소홍범은 화가 더욱 치밀었고 감
“이해? 내가 왜?”소우연은 싸늘하게 굳은 눈빛으로 소우희를 쳐다보았고 소우희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흠칫 놀랐다가 이내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언니 아직도 날 많이 원망하고 있는 거잖아. 내가 어떻게 해야 언니가 날 용서해줄 수 있어?”소우연이 아무런 대답도 없이 소우희를 빤히 쳐다보자 소우희가 눈물을 쓱 닦으며 말을 이어갔다.“내가 죽어야 화가 풀리겠어?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날 더 예뻐했다는 걸 나도 알아. 오라버니들도 그렇고. 다들 언니에게 신경을 많이 쓰지 못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래도 언니는 소씨 가문 딸이잖아. 회남왕과 결혼한 것도 마냥 나쁜 일은 아니야. 어찌 됐든 회남왕은 왕실 사람이고 신분도 높잖아. 내가 민수 오라버니와 혼사를 맺은 게 문제라면 난 이 혼사를 취소해도 돼. 언니 기분만 좋아질 수 있다면 난 상관없어.”소우희가 엉엉 울면서 몸을 휘청거리자 소우연은 미간을 확 찌푸린 채 동생이 또 무슨 꿍꿍이를 계획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갑자기 찾아와서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앞을 가로막는 걸 보면 뭔가 속셈이 있는 게 분명하다.바로 이때, 소우희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갑자기 손을 들고 자신의 뺨을 강하게 때렸고 백옥같이 하얀 소우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벌겋게 부어 올랐다.소우연은 소우희의 돌발 행동에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혼자서 갑자기 미쳤을 리는 없고 주변에 누군가가 있는 게 확실히다.이때,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다음 순간 누군가에 의해 옆으로 확 밀린 소우연은 하마터면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너무도 익숙한 한 남자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소우희를 부축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우연을 째려보았다.“소우연! 네가 아무리 불만이 많아도 우희에게 손을 대서는 절대 안 돼! 우희가 네 일로 얼마나 많이 자책하고 있는 줄 알아? 어젯밤에도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밤새 울었어. 네가 회남왕 저택에 가서 고생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네가 어떻게 우희한테 이럴 수 있어!”소
한편, 소우연은 약들을 서랍 안에 잘 정리해둔 뒤, 의서 한 권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이때, 창문이 바람에 흔들렸고 방 안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 들자 소우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굳게 닫았다.“왕비님, 혹시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밖에 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고 소우연이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다.”의서를 내려놓은 소우연은 그제야 날이 어두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육진은 어디 갔지? 왜 아직도 안 돌아오지?’소우연이 방 문을 열자 밖에 서있던 어린 시녀 한 명이 소우연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왕비님.”“저기… 왕야께서 오늘 외출하셨느냐?”“왕야께서는 현재 서재에 계십니다.”하긴, 다리가 불편한 이육진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거의 외출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품을 하던 소우연은 방으로 돌아가 겉옷을 걸치고는 다시 방을 나섰다.“네 이름은 무엇이냐?”“소인 명심이라고 합니다.”“명심이 네가 길을 좀 안내하거라. 왕야께 겉옷을 가져다주려고 한다.”소우연의 말에 흠칫하던 명심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왕비님, 소인이 일단 물어보고 나서 안내해드리겠습니다.”“물어본다니? 누구한테 물어본다는 것이냐?”이 저택에서 소우연이 도망치지 않는다고 해도 그저 그 어떤 행동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꼭두각시일 뿐이다.숨을 깊이 들이마신 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가서 물어보거라.”“네, 왕비님.”명심은 이내 곁채로 향했고 마침 한 여인이 곁채 안에서 걸어 나왔다.“정연 언니, 왕비님께서 왕야께 겉옷을 드리러 가시고 싶다고 하십니다.”명심의 말에 정연은 본채를 힐끗 쳐다보고는 빠르게 다가와 소우연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소인, 왕비님께 인사를 올립니다.”“날씨가 많이 추운 것 같은데 혹시 내가 왕야께 겉옷을 드리러 가도 되겠느냐?”소우연의 말에 정연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예전에 이 관저에 시집온 여인들은 하나같이 나쁜 꿍꿍이를 품고 있었으며 의도를 가지고 회남왕에게 접근했기에 결국 이튿날 싸늘한 주검
이육진의 말에 고개를 살짝 든 소우연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고 있습니다.”대답을 하자마자 소우연의 얼굴이 다시 빨갛게 달아올랐고 이육진은 한참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옷도 벗어야 돼.”말을 마친 이육진은 태연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웠고 소우연은 눈치를 보다가 결국 내의만 남긴 채 옷을 다 벗었다.초가 꺼지자 방 안은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어두워졌고 소우연은 더듬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소우연 전에 이육진과 혼사를 치렀던 여인들은 전부 간첩이기에 결국 이육진에게 살해된 것이다.이육진은 소문처럼 무고한 생명을 함부로 죽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기에 그가 소우연에게 신음소리를 내라고 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소우연은 아직 알 수 없었다.이불을 덮은 소우연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첫날밤처럼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별다른 생각 없이 기다리고 있던 이육진은 소우연의 신음소리를 듣자 머릿속에 갑자기 조금 전 소우연에게 그 물건을 잡혔을 때의 촉감이 떠올랐다.순간 몸이 뜨거워진 이육진은 미간을 확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려 소우연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설마 내가 벗겨주기를 바라는 건가?”소우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그럼 첫날밤 소우연이 잠들고 나서 이육진이 그녀의 옷을 전부 벗겼다는 뜻인가?이런 추측에 소우연은 창피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지만 자신은 이미 회남왕비이기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잠자리를 가지자고 해도 거절할 수 없는데 옷을 벗으라는 건 너무도 당연한 요구였다.이불 속으로 숨어든 소우연은 옷을 전부 벗은 뒤 내의를 곁에 놔두려고 했지만 이육진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소우연은 입술을 살짝 오므린 채 옷을 건넸고 이육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옷을 바닥에 툭 던졌다.가만히 누워있던 소우연은 옆에 있던 이육진이 본인 옷도 벗고 있는 게 느껴지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합방하자는 뜻인가?소우연은 너무 긴장해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고 이불로 몸을 꼭 덮은 채 꿈쩍도 못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소우연은 의서를 읽고 있었고 정연은 곁에서 찻잔을 정리하면서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오늘 아침 덕빈 마마께서 저택을 떠나시면서 왕야께 왕비님을 모시고 궁으로 들어가 주상께 인사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주상?소우연은 오늘 아침 정연이 이육진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 말을 소우연 앞에서 한번 더 꺼내는 걸까?소우연이 정연을 힐끔 쳐다보자 정연은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다시 찻잔 정리에 집중했다.조금 전까지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던 소우연은 살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소설 속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덕빈은 아들 이육진을 끔찍이 아낀다고 했는데 이렇게 소우연을 데리고 궁에 들어오라고 한 걸 보면 단순히 인사만 받으려고 하는 건 아닐 것이다.간단하게 말하자면 만약 이육진이 소우연을 데리고 궁에 들어가기 싫어한다면 그것은 곧 이육진이 소우연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다.이육진이 소우연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덕빈은 절대 소우연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소설 원작에 덕빈이 소우연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지 확실하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알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고 그때가 되면 신부를 함부로 바꾼 소씨 가문뿐만 아니라 소우연도 저번 생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잃을 것이다.이번 생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이육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이런 생각에 소우연은 고개를 들고 정연을 쳐다보았다. 보통 시녀와 달리 얼굴도 예쁘장한 정연은 남다른 기품이 느껴졌고 말과 일 처리도 깔끔하고 확실했다.“정연, 혹시 내가 지금 서재에 왕야를 만나러 가도 되겠느냐?”소우연의 물음에 정연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대답했다.“왕야께서 왕비님은 뭐든 하셔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소씨 가문의 장녀가 시녀한테까지 말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한다고?정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고 소우연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정연에게 물었다.“혹시 부엌에 다과 같은 건 있느냐?”“있습니다. 왕야께 드리실 겁니까?
어둠 속에서 이육진은 여린 소녀를 안고 생각에 잠겼다. 조금 질투가 났다. 소우연이 이러는 게 마치 이민세에게 배신당하고 억울해서 자신에게 온 것 같기도 했다.사랑이 없으면 증오도 없는 법, 가끔은 소우연의 진심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또 가끔은 그녀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느껴졌다.감정기복이 너무 심해서 순간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기도 했다.품 안의 여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가끔 정말 궁금할 때가 많았다.“아닙니다. 어찌 감히 그런 놈을 전하와 비교하겠어요.”그녀가 걱정하는 건 이민수가 가진 남자주인공의 운명이었다.천명이 정한 주인공의 운명을 가진 자!이육진은 그녀가 또 소설 얘기를 꺼내는 줄 알고 골치가 아팠다. 소설 속 세상은 환상에만 존재하는 것이었다.이육진은 자신의 허리를 꽉 껴안는 소녀를 바라보며 분노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용강한의 병세와 아바마마께서 보내온 미인들 때문에 아마 많이 속이 상했을 것이다.이육진이 말했다.“이틀 후에 황가 수렵대회가 열릴 텐데 나와 같이 갑시다.”“수렵대회요?”소우연이 놀라며 되물었다.“제가 그런데 가도 되나요?”“물론이오. 아바마마께선 매년 어마마마와 같이 가신다오.”황제는 어딜 가든 덕빈을 데리고 다녔다. 사람들은 덕빈이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다고 부러워하지만, 현실은….이육진은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한숨이 나왔다.그는 품 안의 소녀를 꽉 껴안으며 말했다.“중대사를 해결한 후에 시간이 나면 부인과 함께 어디든 가겠소.”“어디든지요?”“그럼, 어디든지.”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달콤해졌다.다음 날은 보슬비가 내렸다. 그리고 어느덧 수렵대회 날이 되었다.황가 수렵장은 일찍부터 황실 수비군이 겹겹이 호위했고 황실 귀족들과 조정의 대신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입장할 수 없게 했다.최근 들어 몸 상태가 좋지 않은 황제는 이육진과 다른 귀족 자제들을 시켜 시합에 참가하게 했다.말을 탄 이육진은 소우연의 앞으로 다가와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소우연은 죄책감이 들었다.이육진이 화를 낸 게 이해가 됐다.‘내가 과연 그렇게 이해심 넓은 사람일까?’갓 피어난 꽃처럼 아름다운 상연, 상란이 언젠가 이육진의 마음을 앗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갑갑하고 아파왔다.“네 말대로 하자꾸나.”결국 소우연은 정연을 봐서 명심을 처벌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내보내면 다시 안 볼 사람이었다.“명심을 대신해서 마마께 감사드립니다.”정연은 소우연에게 큰절을 올렸다.그날 밤.소우연은 정연에게서 태자가 배나무 별채로 가서 용 대인과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했다.소우연은 못내 서운했지만 자신이 자처한 일이니 차마 찾아갈 수가 없었다. 입맛이 사라진 그녀는 대충 끼니를 때우고 방으로 들었다.날이 어두워진 후, 처소로 돌아온 사내는 그녀가 저녁식사도 걸렀다는 얘기를 듣고 표정이 더 매섭게 굳었다.“저녁식사를 내오라 하거라.”이육진이 정연에게 분부했다.잠시 후, 반찬들이 식탁에 올라오자 이육진은 소우연을 끌고 식탁으로 가서 마주앉았다.그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없이 그녀의 접시에 반찬을 챙겨주었다.“전하….”소우연은 식사가 끝나자 일어서는 이육진을 다급히 붙잡았다.“저는 전하께서 그런 마음을 갖고 계실 줄 몰랐습니다.”“몰랐다고?”이육진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티를 내고 다녔는데 여전히 부족했나 보군.”그는 할 수만 있다면 가슴을 갈라서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저는 자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하물며….”소우연은 최근 들어 귀가가 늦어지는 사내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도 많이 재촉하시죠?”가끔 궁에 한번 갈 때마다 잔소리를 듣는 그녀였다.이육진은 거의 매일 궁에 가니 얼마나 재촉을 많이 들었을까?“부인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시오.”그는 살짝 누그러진 어조로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다른 여인과 이부자리에 들면 정말 속이 안 쓰릴 자신이 있는 거요?”“저는….”
소우연이 잠깐 넋을 잃고 있는 사이, 명심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계속해서 말했다.“금일 폐하와 덕빈 마마께서 상연과 상란을 태자 관저로 보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내일이면 또 다른 여인들을 보내겠지요. 저들은 남이지만 소인은 태자빈 마마의 사람이니 태자빈 마마의 말씀만 따를 것입니다.”정연은 다급히 명심의 어깨를 밀쳐 바닥에 쓰러뜨리며 호통쳤다.“너 미쳤니? 태자빈 마마께서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뭐가 있겠어?”명심이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정연은 고개를 들고 표정이 굳은 소우연의 눈치를 살피며 다급히 명심을 타일렀다.“빨리 태자빈 마마께 사죄드리지 못할까? 너 정말 욕심에 눈이 멀어서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구나.”하지만 명심은 뜻을 굽히지 않고 간곡히 청했다.“마마, 상연과 상란을 태자 전하께 보내실 바에는 제가 낫지 않겠습니까?”소우연은 이육진이 나가기 전 했던 말을 떠올렸다.“난 한 번도 부인 이외의 여인을 고려해 본 적이 없소.”정연은 한심한 얼굴로 명심을 밀쳤다.명심은 모든 걸 다 내걸겠다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태자빈이 마음이 약해져 허락할 수도 있지 않은가?태자빈도 아예 모르는 여인을 태자의 신변에 두기를 꺼릴 것이다. 그녀는 적어도 태자빈의 시종이니 앞으로 다루기도 쉬울 테고 오늘 들어온 여인들에 비해서는 쓸모가 많았다.소우연은 길게 심호흡하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누굴 선택해서 태자의 옆으로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다.”“마마….”“이만 물러가거라!”소우연의 호통을 들은 정연이 명심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소우연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책상 위에 턱을 괴고 앉았다.‘방금 그 사람 화난 거 맞지?’타 여인과 부군을 공유하고 싶은 여인이 어디 있을까?이 일은 그녀의 오랜 고민이었다. 그녀는 이육진이 안전하게 즉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육진이 첩실을 전혀 원하지 않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참 좋은 분이야.’소우연은 그런
“전생에 전하께 저한테 잘해주라고 귀띔하신 것도, 저에게 도망치지 말라고 말을 전해준 것도 오라버니셨지요.”이번 생의 그녀는 가마에 오를 때 전갈을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회귀한 시점이 도주 이후가 아니라 신혼 밤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오라버니 말씀이 맞아요. 지금 시급한 건 태자의 후대를 낳는 일입니다.”소우연은 초조하고 가슴이 쓰렸다.만약 그녀가 아이를 갖지 못한다면 다른 여인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용강한은 소우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다른 여인을 시켜 태자의 자식을 갖게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약간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이지만 이육진이 다른 여인을 품고 자식을 보게 된다면 태자의 자리는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우연이는….’과연 그녀는 이곳에서 벗어나 아무도 그들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까?‘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평범한 삶은 그가 원하는 삶이지 소우연이 그걸 원한다고 한 적은 없었다.이 시대의 여인들은 이해심 많다고 하지만 진심으로 다른 여인과 달갑게 부군을 공유할 여인이 어디 있을까?두 번의 생을 연모한 여인이 그런 서러움을 감내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갑갑했다.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가 말했다.“서두르지 말고 조금만 시간을 갖고 지켜보세요.”아직 이 주제를 다루기에는 이른 시점이었다.하지만 모든 일이 그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다.이육진이 관저로 돌아온 후, 소우연은 온종일 고민 끝에 시간을 더 갖기로 했다.그런데 그날 저녁, 수현이 예쁘장한 용모를 가진 두 여인을 태자 관저로 들였다.“소인 상연, 상란 태자 전하와 태자빈 마마를 뵈옵니다.”두 여인은 소우연보다도 한두 살 많아 보였지만 몸매가 요염하고 용모가 빼어난 것이 보고 있자니 불안감이 들게 했다.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다가 정연을 시켜 그들의 처소를 안배하게 했다.“부인, 아바마마의 뜻이고 난 전혀 생각이 없소. 걱정 마시오, 나에겐 부인뿐이오. 절대 저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용강한은 웃으며 말했다.“그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생활이 좀 궁핍해지겠지만요.”소우연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용강한은 계속해서 말했다.“어젯밤 달 밝고 별이 빛나고 있어 왕세자의 별자리가 매우 안정적이더군요. 그래서 점을 좀 봤습니다.”그 말을 듣자 소우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마지막 남은 힘으로 점을 친 것이 이육진을 위한 일일까? 아니면 그들 모두를 위한 일일까 궁금해졌다.“마마, 천명으로 따지면 태자전하는 왕세자보다 뒤처지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태자전하야말로 정통이니 서두르셔야 합니다.”“뭐… 뭘 서두르란 말인가요.”소우연은 갑자기 막막해졌다. 소설 속 그녀의 역할은 불행한 들러리 역에 지나지 않았다.회귀한 이후로 그녀는 운명을 바꾸기로 다짐했다.여주인공인 소우희가 죽었는데도 운명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단 말인가.용강한이 괜한 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그녀는 사내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대체 무슨 자격으로 태자와 경쟁하려 하는지 모르겠네요.”이육진이 황제의 유일한 아들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어쨌거나 빠른 시일 내에 태자전하와 아이를 가지는 게 좋겠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말했다.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우연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었다.하지만 그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황실 핏줄은 줄곧 중요한 문제로 여겨지고 있었다.소우연은 물론이고 덕빈, 심지어 황제까지 회임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회진 때 왕세자의 아이를 회임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얼굴도 예쁜데다가 성격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그녀를 제외하면 딱히 적당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게다가 그녀는 소우연에게 이상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민수 때문에 그녀에게 적개심을 품은 거라고 하기엔 또 아닌 것 같았다.“생년월일만 알 수 있다면….”하지만 그게 있다고 해도 옅은 운명만 점칠 수 있지 깊게는 엿볼 수 없을 것이다.소우연은 용강한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다른 건
용강한이 고개를 들었다.“제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게 궁금하신 겁니까?”소우연은 눈을 피했다.그의 시선은 그녀를 지나 멀리 담장 너머, 새하얀 구름 위에 가닿았다.“태자빈 마마를 믿는 이유는 저 역시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다시 살아가는 사람 말이에요.”그건 더 이상 숨기지 않는 고백이었다.“저는 아주 오래 살았습니다. 오랫동안 스승님이 남긴 수첩을 파고들었고, 마침내 그 안의 내용을 해독해 마마와 제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죠.”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소우연을 바라보았다.입가에 맑은 미소가 스며들었다.“하지만 그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외로움만 짙어졌어요. 흠천감은 신성한 곳이었지만… 그만큼 고립된 곳이기도 했으니까요.”그의 눈빛엔 따뜻한 온기와, 지우기 힘든 쓸쓸함이 서려 있었다.“이젠 조금 덜 외로운 것 같습니다. 마마가 계시고 또 제가 설 수 있는 자리가 있으니 말이에요.”그가 웃어 보였지만, 입꼬리 끝엔 씁쓸함이 맴돌았다.“다만 미련을 다 놓지 못한 채 살고 있어서일까요. 요즘 들어 자꾸… 주공께서 꿈에 찾아오십니다.”소우연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그 역시 자신처럼 오랜 시간과 기억을 품은 채 이곳에 선 사람이었다.“그 꿈 속은 괜찮으셨어요?”그녀는 천천히 물었다.단순한 말이 아니었다.그가 겪은 전생 역시 고통으로 점철된 것이었을까. 혹시 자신처럼 매 순간이 지옥 같았던 건 아닐까.용강한은 눈을 감은 듯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그리고는 담담히 말했다.“확실한 건 하나뿐입니다. 제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을 잃었다는 사실 말이죠. 평생 지켜내고 싶었던 그것을 놓치고 나니, 그 뒤의 삶은 더는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소우연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그가 말한 '소중한 것'은, 혹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번 생에서는 되찾으셨어요?”잠시 침묵하던 용강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조금은요.”“조금…이요?”“그 정도입니다.”소우연의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다.
정연은 속으로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인이 주인의 허락을 받아 손님에게 상으로 내어지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궁중이나 세도가의 집안에서는 익숙한 풍경이었다.처음 자신과 명심이 이육진 곁에 배정됐을 때, 은근한 기대와 설렘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하지만 이육진은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차가운 기운이 흐르는 듯한 사람이라 속내조차 짐작하기 어려웠다.시간이 지나면서, 정연도 명심도 그 마음을 자연스레 거두게 됐다.그 뒤로 몇몇 왕비가 들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두 사람은 아예 사사로운 욕심조차 품지 않게 됐다.이제 태자와 태자빈은 궁중에서도 소문날 만큼 금슬이 좋았다. 이를 본 명심과 정연은 그가 하인을 눈여겨볼 일은 없을 거라 생각되었다.정연은 조용히 세월을 보내다 은혜를 입고 평온히 늙어가길 바랐다.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느덧 배나무 별채 앞에 도착했다.명심이 어깨를 움츠리며 나오다 소우연을 발견하고 곧장 다가와 인사했다.“태자빈 마마, 어젯밤은 평안하셨습니까?”소우연은 명심의 겉옷 깃이 잔뜩 여며진 걸 보고 물었다.“춥니?”“경문 대감께서 급히 자리를 비우시는 바람에, 약을 제가 대신 들였습니다. 용 대감께서 약을 천천히 드셔서 꽤 오래 서 있었는데… 그 근처가 너무 차가웠습니다.”“그 정도로?”“네. 정말 한겨울처럼 느껴질 만큼이었습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을 바라보았다.정연도 그제야 깨달았다. 조금 전 자신을 가까이 가게 하신 이유를 말이다.함께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안쪽에서 용강한의 목소리가 들렸다.“경문아, 내가 말한 안정환은 챙겨왔느냐?”소우연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말씀하신 안정환은 만안당에서 쓰는 것과 다른가요?”“태자빈 마마, 오셨군요.”용강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듯했으나 이내 앉은 채 인사했다.“편히 계세요. 굳이 일어나지 않으셔도 됩니다.”소우연은 손짓으로 그를 말렸다.오늘은 햇살도 흐렸고, 늦가을 바람도 매서웠기에 용강한은 실내에 머무르고 있었다.
소우연의 손끝은 여전히 따뜻했다.“조금은 나아졌지만…”소우연은 조심스레 대답했다.“더 지켜보며 조절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그래.”이육진은 팔짱을 낀 채, 용강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나는 의술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저 사람 곁은 한기가 밀려온다. 차갑단 말이야.”소우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그렇게까지요? 전 잘 모르겠던데요.”사실, 손을 댔을 때 손목이 꽤 차갑긴 했지만. 그 외엔 오히려 덥고 습한 날씨에 시원함을 주는 약초처럼 그의 곁에선 묘하게 청량한 기운이 느껴졌을 뿐이다.그 말에 용강한이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정말 못 느끼셨습니까?”소우연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체온이 낮은 건 확실히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차가운 기운이 넘쳐흐를 정도까진 아닌 것 같아서요.”소우연이 손을 거두자, 용강한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태자빈 마마 말씀대로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치료하는 게 좋겠습니다.”소우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곁에 서 있던 경문에게 시선을 돌렸다.“앞으로 약은 명심이 가져올 거야. 꼭 챙겨 드시게 해야한다. 알겠느냐?”경문은 바로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예, 태자빈 마마. 깊이 감사드립니다.”사실 경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주군이 이 병을 앓기 시작한 이후, 수많은 의원이 불려왔지만 그는 늘 고개를 저으며 단 한 마디만을 반복했다.‘이 병은 인연이 있는 자만이 고칠 수 있다.’그래서 그는 고통 속에서도 진맥을 거절했고, 아무런 치료도 받지 않으려 했다.그런데 지금 그는 자신 앞에 있는 이 여인 앞에서는 아무런 거부도 없이 맥을 맡기고, 침까지 받아들이고 있었다..경문은 그저 조용히 속으로 중얼쳤다.‘아, 과연 이 분이 주군께서 말한 ‘인연 있는 사람’이었구나.’운명이란, 참으로 야속하고도 묘했다.“내가 연탄을 좀 보내볼까?”이육진이 문득 제안했다.하지만 용강한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이 가을 끝물에 연탄
희미한 꿈결 속.창밖에선 빗방울이 파초 잎을 두드리며 떨어지고, 거센 바람이 창틀을 덜컹이며 흔들고 있었다.소우연은 비몽사몽인 채로 고개를 돌려 창을 바라보았다.빗물이 방 안까지 들이치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정연아.”하지만 곧 귀에 들려온 대답은 익숙한 정연의 목소리와는 조금 달랐다.조금 더 낮고, 어딘가 남성적인 음성이었다.그녀가 말을 잇기도 전에 창이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곧 방 안이 조용해졌다.몸을 감싸던 싸늘한 기운도 어느새 사라지고, 등 뒤로 훈훈한 온기가 밀려왔다.마치 따뜻한 화로가 등을 데우는 듯한 느낌이었다.그 온기가 서서히 온몸을 감싸기 시작하자, 어딘지 모르게 숨결은 흐려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이건?’소우연은 문득 자신이 무언가에 휘감겨 있다는 걸 느꼈다.몸을 비틀며 벗어나 보려 했지만, 뒤에서 감싼 팔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집요했다.그러다 등 뒤에서 느닷없이 입술이 목덜미를 훑었다.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밖에선 정말로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우레처럼 굵은 빗줄기가 창살을 두드리며 방 안 가득 메아리쳤다.“누가 창 닫아달랬다더냐?”낮고 짙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이육진이었다.“꿈이었어요. 비가 오는 꿈을 꿨어요.”소우연이 나지막이 대답하자, 이육진은 묵묵히 웃음을 삼켰다.“그 비가… 혹시 ‘운우지정’의 그 비는 아니었느냐?”그 말에 소우연은 흠칫 놀라더니, 얼굴을 이불 속에 파묻었다.뺨이 후끈 달아오르며, 말도 잇지 못한 채 몸을 작게 웅크렸다.이 사람은… 진짜…그녀가 앞일만 생각하고, 뒷일을 대비하지 못한 걸 그는 귀신같이 알아챘다.이육진이 원한 건 단지 대화도, 단잠도 아니었다.창밖에선 여전히 바람이 울고, 비는 퍼붓고 있었다.그 거센 폭우가 한동안 이어지다, 이내 부슬부슬한 가랑비로 바뀌었다.하늘이 어둑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물을 준비하라’고 일렀다.밖에서 대기 중이던 정연과 간석은, 서로 눈빛을 맞춘 채 깊은 탄식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