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경솔했소.”진우는 다소 안타까운 기색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내년, 마마께서 평안히 아이를 낳으신 뒤에라도……”황손이 태어난 뒤라 해도, 남에게 맡기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 같았다.정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내년에 다시 얘기해요.”“설마, 아직도 경문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아니겠지?”“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겁니까?”진우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날 내가 간석을 찾아온 경문을 봤소. 멀리서 아씨를 한참 바라보더이다.”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정연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경문이 자신을 멀리서 바라봤다니, 그녀는 그저 담담히 말했다. “남들이야 몰라도, 자네는 알고 있지 않소?”진우: “???”정연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진우가 가끔 멍청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일을 처리할 땐 분명히 민첩하고 똑똑한데, 이럴 땐 꼭 바보 같단 말이지.“경문이 날 찾은 건, 십중팔구 그 주인을 위해서겠지. 용강한 대인의 병세는 마마만이 누그러뜨릴 수 있으니 말이야.”그 말에 이르자 정연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고민에 빠졌고, 결국 진우에게 털어놓기로 결심했다.그를 살짝 밀어 먼 곳으로 데리고 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이 원사가 내게 의견을 구했는데, 사실상 황제나 마마께 전하라는 말이지. 뱃속 아이를 위해서라도, 마마와 용강한 대인은 자주 마주쳐야 한다고…”진우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정연은 속이 타들어가는 듯한 심정이었다.“마마는 늘 현명하시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계시겠죠. 그러니 지금 말하지 말고, 새해가 지나고 나서 얘기하세.”“저도 그렇게 이 원사에게 말했습니다.”진우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참 영리하기도 하지.”정연은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물었다.“그럼 마마께 슬쩍 떠보는 건 어때?”마마는 본디 온화한 성정에, 자신에게도 유난히 잘 대해주셨다.특히 지난번 일 이후엔 온갖
“됐소.”이 원사는 진맥을 마친 뒤, 마마의 몸에 내열증이 심하게 쌓여 있음을 느꼈다. 태아를 안정시키는 약을 짓는 데에도, 일반 산모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 요구되었다.대개의 산모는 온보약이 필요하지만, 마마께서는 반대로 열을 다스리는 약이 필요하였으며, 약재의 양 또한 조금만 어긋나도 태아에게 해가 될 수 있었다.정연은 이 원사를 영화궁 밖까지 배웅했다.“이 원사, 마마의 몸은 괜찮으신가요?”이 원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지금으로선 큰 탈은 없어 보입니다만…”“말씀하시지요, 숨기실 것 없사옵니다.”“…그럼, 정연 아씨께서도 판단을 함께해 주십시오.”판단이라니, 정연은 순간 당황했다.이내 이 원사는 말을 이었다.“제 숙부 이 의원께서도 오래도록 마마의 평안맥을 살펴오셨고, 저 또한 그 맥을 따라 진찰해온 바, 마마의 체내 열은 꽤 심각합니다. 허나 숙부와 의논하던 중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마마의 증상은 용강한 대인의 체질과는 정반대이니, 둘이 함께 있을 때 서로의 기운이 억제되는 듯 보이더군요.”정연은 입을 떼며 말했다.“대인의 말씀이시라면… 마마께서 용강한 대인과 자주 마주하신다면, 이 내열증이 완화될 수 있다는 뜻인가요?”이 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제가 감히 올릴 수는 없지요.”정연은 속이 답답했다.그런 말은, 자신도 감히 꺼낼 수 없는 일이었다.곧 마마께서는 중전으로 책봉되실 터인데,일국의 중전이 신하와 자주 어울린다는 소문이라도 돌게 되면, 아무리 황제께서 마마를 총애하신다 해도, 조정의 대소신료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었다.“정연 아씨, 지금은 겨울이라 그나마 버티고 있습니다만, 봄이 되어 기온이 오르면 이 내열이 감당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면 태아도, 마마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그리 심각하단 말씀이십니까?”정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이 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사옵니다. 정연 아씨께서는 마마께서 가장 신뢰하시는 분이니
소우연은 믿음직한 사내의 품에 안겨 곧장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다음 날.이육진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간석은 황급히 내관들을 불러 시중을 들게 했다.진규도 안으로 들어왔다.“황제 폐하, 주상 만수무강을 기원하옵니다.”이육진이 물었다.“그 아이는 낳았느냐?”“예, 하지만…”“그 아이를 살려두는 것이 내 최선의 관용이었다.”진규가 고개를 저었다.“폐하, 아이는 태어났지만… 아령이 직접 손으로 목을 조여 죽였습니다.”“뭐라고?”이육진은 순간 얼어붙었다.“그 여자가 미친 게냐?”“진이준의 말에 따르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고 합니다.”“이지윤은? 옆에서 그걸 지켜보기만 했다는 거냐?”이육진은 간석에게 옷을 입히게 하며 거칠게 물었다.진규가 말했다.“이지윤은 아직 밖에서 아내와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산파가 허겁지겁 뛰쳐나와 아이가 아령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했습니다.”“천벌을 받을 짓이로다!”그와 연아가 아이를 갖기까지 얼마나 힘겨웠던가. 그런데 그들은…그 아이를 위해 이육진은 이미 계획을 세워두었다. 이정의 집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마을에서도 나름 지위 있는 집안이다.그 아이가 이정의 집에서 자란다면, 이지윤과 아령 같은 잔혹하고 도리에 어긋난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보단 훨씬 나을 터였다.하지만, 아직 그의 사람이 아이를 확인하기도 전에 아령이 먼저 아이의 숨통을 끊은 것이다.이육진은 간석이 짜준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좋다. 앞으로 평춘왕 관저에는 양탕만 내리게 하라. 먹고 마시지 않겠다면 그건 그들의 몫이니.”그리고는 그 수건을 정연이 들고 있던 쟁반 위에 툭 던졌다.“예, 명 받들겠사옵니다.”진규는 물러났다.이육진은 정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중전이 이 일을 묻는다면…”그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연아가 거짓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그냥 사실대로 말해라.”정연이 고개를 숙였다.“알겠사옵니다.”하늘은 이미 여명으로 물들어 있었다.이육진은 간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마마, 신은… 신은 당시 현장에 없었고, 배치한 첩자들도 돌발 상황은 예상하지 못해 아무 명령 없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시간이 정지된 듯 고요했다.북풍이 뺨을 베일 듯 차갑게 몰아쳤다.“마마…!” 정연이 소우연을 부축하며 다급히 불렀다.“마마, 괜찮으십니까?”그녀는 황급히 소우연의 도포를 여며주며, 찬바람에 몸이 식을까 염려했다.“괜찮아요. 어쩌면, 난 정신을 되찾은 순간부터 소가 사람들과는 생사를 건 관계가 되었는지도 모르는구나.”그녀가 말한 ‘정신을 되찾은 순간’이 무엇인지 정연과 진규는 이해하지 못했다.그녀만이 알고 있었다.자신이 다시 태어난 그 순간부터, 소가 사람들과는 대립하는 운명이었음을.“괜찮다. 이런 일들은, 굳이 나에게 숨기지 않아도 된다.”그녀는 그렇게 나약하지도 않았고, 숨김받고 싶지도 않았다.숨긴다는 건 마치 하늘을 거스르며 훔쳐 얻은 이 목숨을 누군가가 늘 탐하고, 노리고, 심지어 도전하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예, 마마.”하늘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다.한 바퀴를 돌아 영화궁으로 돌아왔을 때, 이육진은 이미 주청을 모두 살펴본 상태였다.그녀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이육진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밤이 되었다.소우연은 또다시 악몽에서 깨어났다.이육진도 곧장 깨어났고, 즉시 이 원사를 부르려 했다.그러자 소우연이 급히 그를 막았다.“괜찮아요.”“한동안 이런 식으로 놀라 깬 적 없었잖아.”“악몽은 늘 있는 거예요. 단지 예전엔…”예전엔 용강한과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며, 점차 줄어들었을 뿐.지금은 용강한과 오래 만나지 못했고, 낮에 소가 사람들을 본 탓인지, 다시금 임진숙이 아이를 저주하던 장면이 꿈에 나타난 것이다.태어나지 못하게 저주했던 그녀의 아이.“예전엔 왜 말하지 않았어?”이육진은 인내심을 가지고 물었다.소우연은 말했다. “예전에도 악몽은 있었어요. 다만 서방님께서 몰랐을 뿐.” “그래?”
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너무 갑작스러워.”오늘 소가 묘지에서 마주한 아령의 모습은 전혀 그런 기색이 아니었다.만안당에서 자신이 이미 아이를 가진 것처럼 말하며 트집을 잡던 시점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아령의 출산까지는 아직 한 달도 넘게 남아 있어야 했다.만약 이민수가 거세당하기 전 며칠을 기준으로 본다면, 그 아이는 최소 두세 달은 더 있어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결국, 그 아이는 이지윤과 아령 사이의 것이었다.자연히 이비 마마의 태기를 기준으로 계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마마, 틀림없는 사실입니다.”진규는 단호하게 답했다.소우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럼 고통받게 되겠네.”“그런 악인은 당연히 고통받아야지요.”진규는 그렇게 말하며, 소우연이 자리를 뜬 뒤 벌어진 일들을 모두 전했다.소우연은 진규가 그런 것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의아했다.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육진이 진규를 비롯한 이들에게 평춘왕 관저를 감시하도록 지시했음이 분명했다.그렇다면 이지윤과 아령이 오늘 벌인 일들,그리고 자신이 소가 사람들을 만난 일,아령을 찾아간 일까지도 모두 이육진이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그가 방금 전 들어오자마자 자신에게 겁먹지 않았는지,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를 물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사람을 붙여 지켜보게 해. 아이가 태어나거든 바로 데려가 농가에 맡겨 기르게 하고,아령과 이지윤 두 사람에겐 양탕을 하사하라.”잠시 말을 멈춘 이육진은 다시 덧붙였다.“그들에게 전하라. 하루 세 끼 꼬박꼬박 먹이고, 석 달이 지나면 이곳을 떠나게 하라고.”“예.”양탕을 석 달이나 마시다 보면 이미 중독이 깊어질 터.그 뒤에 끊어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들의 능력에 달렸다.진규가 나가고,소우연이 입을 열었다.“방금, 나에게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지?”“무엇을 말하는 거요?”“소가 사람들 말이에요. 내가 떠난 뒤 아령이 발작을 일으켰다고만 했지, 그들의 안부는 말하지 않았잖아요.”“그 여자가 멀쩡하던 사람이
“허허… 허허……”아령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왜 웃는지도 몰랐다.웃고, 또 웃다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울지 마, 울면 안 돼… 내가 해냈어. 임진숙 그 여자의 가족들, 전부 다 죽였어.”“아니야, 아직 소우연이 남았지. 그 못된 것, 내가 목을 조여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아니, 아니야, 어머니… 저 아니에요. 제가 임진숙의 친척들 다 죽였어요. 소우연… 걘 이미 소가에서 쫓겨났어요. 그 여잔 아니에요!”“천하의 불효녀, 이 악랄한 것… 내가 원귀가 되어 네 피를 말려 마시고, 네 뱃속 그 더러운 피까지 싸그리 없애주마!”“아니야… 안 돼, 제발 안 돼…”아령은 손에 들고 있던 함을 엎질러버리며 바닥에 무릎 꿇고는 허공을 향해 처절히 애원했다.“어머니… 어머니… 저 아니에요…”“아령… 아령……”이지윤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속삭였다.“아령아… 아무것도 없어. 오직 나,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아이뿐이야.” 아령은 혼란스러운 눈빛을 띤 채 흐느꼈고, 이내 배를 움켜쥐고 고통을 느꼈다.“나… 나… 아…”“왜 그래?”“배가… 배가 아파…”배가 아프다.계산으로 따지면 아직 한 달 넘게 남았을 터였다. 설마 벌써 낳으려는 건가?이지윤은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이 시체들 전부 처리해라. 나머진 나와 함께 평춘왕 관저로 돌아간다. 곧바로 산파를 불러라!”“예!”일행은 웅장한 기세로 평춘왕 관저로 돌아왔다.아령의 배는 점점 더 심하게 아파왔고, 산파가 맥을 짚은 뒤 말했다.“부인은 진통이 시작됐습니다. 조산의 기미가 보입니다.”“뭐라구…”이지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어서… 어서 산모를 살려. 아이는… 아이는 나중이다.”침상 위, 숨이 넘어갈 듯한 아령은 정신이 들어오며 이지윤의 그 말을 들었다.“예, 왕야. 걱정 마십시오. 이 늙은이, 온 힘을 다하겠사옵니다.”산파는 지체 없이 시녀들과 하인들에게 뜨거운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