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집에 돌아왔는데도, 몸이 아직 정류장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현관문을 닫고 신발을 벗고, 습관처럼 가방을 소파 위에 내려놓았는데도,
모든 동작이 조금씩 늦었다. 손이 평소보다 굼뜨고,
시선은 자꾸 허공에 멈췄다. 방 안은 늘 그렇듯 조용했는데, 오늘은 그 조용함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사람의 체온과 목소리와 시선이 너무 가까운 데 있었는데,
도화준이 물었다.“왜 웃습니까.”도희는 메모패드를 들어 보였다.“너무 지금 같아서.”그는 잠깐 보고 나서, 아주 짧게 말했다.“사시죠.”“쓸 일 없으면요.”“곧 생길 겁니다.”“무섭게 말하지 마요.”“현실적으로 말하는 겁니다.”도희는 계산대로 걸어가며 웃었다. 오늘은 유난히 웃음이 쉽게 나왔다. 아마 회사에서 웃으면 안 되는 타이밍을 너무 오래 버텼기 때문일 것이다.문구점을 나온 뒤에도 둘은 조금 더 걸었다. 오늘은 특별히 손을 먼저 잡지 않았다. 대신 도희가 작은 메모패드를 만지작거리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그의 손등을 한 번 툭 건드렸다. 도화준은 그걸 보고도 바로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아주 낮게 말했다.“오늘은 잘 버텼습니다.”도희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들었다.“당신이 그 말 하니까 좀 웃기다.”“왜요.”“되게 담임 선생님 같아.”이번에는 그도 웃었다. 길지 않은 웃음이었지만 분명했다.도희는 그 웃음을 보며 생각했다.오늘 회사 안에서 누군가가 처음으로 분명하게 선을 넘었다. 그리고 자기는 그 말에 직접 선을 그었다. 그 사실이 하루 종일 자신을 지치게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한 발쯤 더 어른이 된 기분도 들게 했다.이제는 정말로,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안 되는 단계에 들어와 있었다.그래서 더 이상 도망치는 쪽으로는 못 간다.그게 오늘의 결론이었다.그날은 이상하게도 하루가 너무 늦게 끝났다.실제로 일이 많았던 건 아니었다. 오전 회의가 있었고, 점심 전 인터뷰 연결이 있었고, 오후에 인쇄 샘플을 한 번 더 확인하는 정도의 일정이면 평소보다 특별히 바쁜 날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도 이도희는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몸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지치는 기분을 느꼈다. 회사 안을 오가던 가벼운 농담들, 웃는 얼굴로 툭 던져지던 말, 그리고 그 모든 걸 웃으며 넘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정색할 수도 없는 애매한 순간들이 하루 종일 군데군데 걸려 있었다. 사람을 진짜 피곤하게 만드는 건 대
문제는 오후 다섯 시 반에 다시 생겼다.회사로 돌아온 뒤, 도희는 최대한 조용히 일만 했다. 사람들도 노골적으로 말을 걸진 않았다. 그런데 묘한 변화는 있었다. 지나갈 때 한 번 더 보는 눈, 무언가 말하려다가 삼키는 얼굴, 그리고 아예 너무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사람들. 그 모든 게 다 피곤했다.그때, 디자인팀 선배가 인쇄 샘플을 들고 도희 자리 쪽으로 왔다.원래라면 충분히 자연스러운 업무 동선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도희 책상 옆에 멈춘 뒤, 샘플을 내려놓으며 웃는 얼굴로 한마디를 던졌다는 점이었다.“작가님, 요즘 기분 좋아 보여서 부럽다.”도희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말했다.“그래요?”“응. 사람이 예뻐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잖아.”말투는 부드러웠다. 거의 친근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 불쾌했다.도희가 대답을 고르기도 전에, 선배는 샘플 페이지를 넘기며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대표님 때문이든, 다른 누구 때문이든 좋으니까 그 기운으로 다음 화도 재밌게 써줘요.”농담처럼 말하고 웃었다.그 순간, 도희는 명확하게 알았다.이건 선을 넘은 말이다.누구 이름을 직접 대지는 않았고, 대화의 껍데기는 여전히 가벼웠지만, 이미 상대를 사람 대 사람이 아니라 화제로 다루고 있는 문장이었다. 그건 아무리 웃으면서 말해도 무례하다.도희는 페이지 위에 올려둔 손을 천천히 뗐다.그리고 아주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얘기는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사무실 안의 소리가 아주 잠깐 가라앉았다.디자인팀 선배의 웃음이 멈췄다.그녀는 약간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아, 내가 너무 가볍게 말했나.”도희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네. 그건 제 기분이랑 상관없이 좀 그래요.”짧았지만 충분했다. 정색도 아니고, 비꼼도 아니고, 웃으며 넘기는 것도 아닌 톤. 그보다 더 설명하면 감정이 길어진다.선배는 머쓱하게 웃었다.“미안, 진짜 장난으로 한 말이었어.”“알아요. 근데 이런 건 계속 장난으로 남지 않아서요.”그 문
온라인 연결은 다행히 별 탈 없이 지나갔다.플랫폼 쪽 담당자는 지나치게 밝았고, 질문은 예상보다 가벼웠다. 협업이 실제 성사되기 전 단계라 그런지 분위기를 보는 수준에서 끝났다. 도희는 정해진 범위 안에서 답했고, 강도윤은 필요한 부분에만 짧게 끼어들었다. 일만 놓고 보면 꽤 무난했다. 하지만 연결이 끝난 뒤에도 도희는 묘하게 지쳐 있었다. 말보다 기운이 더 빠지는 날이 있다. 오늘이 딱 그랬다.점심시간이 조금 늦어졌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탕비실과 외부 식당으로 흩어졌다.도희는 오늘만큼은 사람이 많은 데 가기 싫었다. 그래서 연수랑 둘이 회사 뒤편 작은 샌드위치 가게로 피신하듯 들어갔다.가게는 좁았고, 점심 피크 타임이 지나서 한산했다. 바질 향이 진했고, 유리 진열대 안에는 크루아상과 샐러드가 반쯤 남아 있었다. 도희는 구운 치아바타 샌드위치를 시켰고, 연수는 수프를 주문했다.자리에 앉자마자 연수가 말했다.“나 오전에 진짜 참았다.”“뭘.”“아까 기획팀 주임이 또 그 얘기 꺼내려는 거.”도희가 한숨을 쉬었다.“그 사람은 원래 그래.”“그래도 오늘은 좀 심했어.”연수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대표님 얘기하다가 네가 따로 만나는 사람 있냐고, 장난처럼 툭 던지더라. 옆에 있던 애가 받아먹었고.”도희는 샌드위치 포장을 뜯던 손을 멈췄다.“받아먹었다고?”“응. ‘그러게, 표정 보니까 진짜 있는 거 같은데?’ 이런 식.”이번에는 웃음도 나지 않았다.도희는 정말로 짧게 숨을 멈췄다. 이건 더 구체적이었다. 이제는 누군가가 있다는 가정으로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표냐, 아니냐를 떠나서. 사람들은 이미 도희의 감정 상태 자체를 화제로 삼고 있었다.연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괜찮아?”도희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다는 뜻을 최대한 안 보이게 하면서.“괜찮아. 그냥… 더 빨라졌네 싶어서.”“내가 하나만 물어볼게.”“응.”“이쯤 되면 화준이한테도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도희
도희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연수도 같이 조용해졌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그 말은 농담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은 거의 정확한 선을 밟고 있는 문장이다. 대표와 작가 사이가 아니면, 작가 쪽에 누군가 따로 있는 것 아니냐는 말. 그건 더 이상 웃고 넘길 가벼운 호기심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미 도희의 표정과 동선을 하나의 이야기로 조합하기 시작한 것이다.도희가 아주 낮게 말했다.“이제 진짜 시작됐네.”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리고 이런 건 한 번 시작되면 더 빨라.”도희는 몇 초 동안 화면만 바라봤다. 메일창 위로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그 작은 점 하나가 쓸데없이 선명했다. 지금 필요한 건 반응이 아니라 버티기라는 걸 머리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몸은 이상하게 다르게 반응한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고, 입 안이 말라가고, 갑자기 오늘 하루가 너무 길 것 같은 예감이 든다.바로 그때였다.“이도희 씨.”강도윤의 목소리가 들렸다.도희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기 자리 앞에 서 있었고,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잠깐 괜찮아요?”“네.”도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안, 연수는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버텨. 그런 뜻이었다.이번에는 회의실이 아니라 녹음 부스였다.출판사 안쪽에 작은 오디오룸이 하나 있었는데, 원래는 북트레일러 내레이션이나 짧은 인터뷰 음성을 따는 용도로 쓰는 공간이었다. 벽이 두껍고, 문을 닫으면 소리가 거의 새어나가지 않는다. 회사 안인데도 묘하게 외부처럼 느껴지는 장소라, 도희는 이 공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조용해서.강도윤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온 뒤, 마이크나 장비 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대신 벽 쪽에 기대듯 서서 말했다.“오전 열한 시 반쯤, 플랫폼 쪽에서 짧은 인터뷰 연결할 겁니다.”업무 이야기였다.도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온라인으로요?”“네. 협업 검토 전에 톤만 보는 정도예요. 길지는 않을 겁니다.”“알겠어요
도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가락을 괜히 한 번 접었다 펴고, 차가 식어가는 걸 멍하니 보다 말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해.”이번에는 진짜 모르겠어서 묻는 말이었다.도화준은 잠깐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이도희 씨는 지금처럼 하시면 됩니다.”“뭐가 지금처럼인데.”“회사에서는 회사 일만 하시고, 밖으로 나온 문제는 밖에서 정리하시는 것.”그는 아주 단정하게 덧붙였다.“그리고 누가 이름 붙이기 전에, 먼저 설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도희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그건 왜.”“설명하는 순간, 상대가 생각할 자리를 더 줍니다.”그는 잔을 손끝으로 한 번 밀며 말했다.“지금 필요한 건 설명이 아니라 일관성입니다.”도희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꽤 안심이 됐다. 지금 자기에게 필요한 건 감정적인 위로보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버티는 방식을 정리해주는 말이었다.“당신 진짜 이상해.”그녀가 말했다.“네.”“이런 말 할 때 제일 든든해.”도화준은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그건 다행입니다.”도희는 몇 초쯤 그를 보다가 웃었다.“이제 알겠어요.”“뭘요.”“왜 자꾸 만나고 싶어지는지.”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시선이 조금 부드러워졌다.도희는 괜히 더 덧붙였다.“평소엔 엄청 답답한데, 꼭 이런 타이밍엔 사람이 편해져.”그는 이번에는 아주 짧게 웃었다.“칭찬인지 아닌지 애매합니다.”“애매한 게 맞아요.”“그럼 됐습니다.”둘은 동시에 웃었다. 짧고 낮은 웃음. 테라스 위 작은 전구 조명이 흔들리고, 멀리서 강아지 한 마리가 아주 크게 짖었다가 다시 조용해졌다.그날 도희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상하게도 한결 가벼워진 기분을 느꼈다.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복잡해질 수도 있다. 회사 안의 말은 앞으로 더 구체적이 될 거고, 강도윤은 더 조용한 방식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며, 남친 쇼핑몰 쪽 협업 문제도 아직 시작일 뿐이다.
마지막 파일을 넘기고, 메일을 정리하고, 강도윤에게 내일 아침 일정 확인만 받고 나니 시계가 이미 아홉 시 가까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무실에는 몇 사람 안 남아 있었고, 형광등 불빛은 낮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강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오늘은 들어가서 쉬어요.”“네.”“내일 오전에 외부 전화 하나만 같이 받으면 됩니다.”“알겠어요.”그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런데 도희는 문득, 오늘 하루 종일 그와 이렇게 짧은 문장으로만 대화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마치 둘 다 일부러 긴 문장을 피하는 것처럼. 길게 말하면, 불필요한 감정이 섞일 수 있다는 걸 알아서.회사 건물을 나서자마자 도희는 아주 길게 숨을 내쉬었다.도시의 밤은 여전히 분주했지만, 회사 안의 공기보다는 훨씬 덜 피곤했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냈다.‘나왔어요. 근데 진짜 짧게만 볼래요?’답장은 거의 바로 왔다.‘압니다. 이미 와 있습니다.’도희는 피식 웃었다.“또.”그녀는 걸음을 옮겼다.오늘의 장소는 예전처럼 편의점도 아니고, 놀이터도 아니었다. 도화준이 보낸 위치는 강변 산책로 쪽 작은 반려견 카페였다. 밤늦게까지 여는 곳이었고, 실내보다 테라스가 더 넓은 구조라 사람들 사이에 섞이기 쉬웠다. 무엇보다, 동네 사람들과 강아지 때문에 누구도 남을 유심히 보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도희가 도착했을 때, 테라스 한쪽에는 소형견 두 마리가 서로 짖지도 못하고 낑낑대며 냄새를 맡고 있었고, 안쪽 테이블에서는 젊은 부부가 강아지용 케이크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틈 사이에 도화준이 앉아 있었다.“여긴 또 어떻게 찾았어요?”도희가 다가가며 묻자,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사람들이 남한테 관심 없는 곳을 찾다 보니.”도희는 의자에 앉으며 웃었다.“이제 거의 범죄자 대사 같은데.”“이도희 씨가 원하신 쪽 아닙니까.”“맞긴 한데.”그녀는 테이블 위 메뉴판을 내려다보다가, 강아지 간식 코너를 보고 또 웃었다.“우리 둘 다 개도 안 키우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