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친 쇼핑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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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상품처럼 판매하는 ‘남친 쇼핑몰’에서 완벽한 남자친구로 살아온 남자와, 사랑을 이야기로 쓰지만 정작 자기 마음에는 서툰 웹소설 작가가 만나, 서로를 ‘상품’도 ‘소재’도 아닌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는 현대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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الفصل الأول

1. 문이 열리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정확히는,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 멀쩡했다. 

단행본 제안을 받고처음으로 잡힌 미팅을 무사히 끝냈고, 

페이지온 출판사 대표와 편집팀 앞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계약 관련 자료가 든 봉투까지 야무지게 챙겨 들고 나왔다. 

그러니까 최소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전까지의 나는 아주 평범하게 긴장한 웹소설 작가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문이 열리는 순간, 그 평범함이 아주 산산조각 나버렸다.

안쪽에 서 있던 남자 때문이었다.

검은 셔츠에 짙은 코트를 걸친 남자. 

손목 위로 드러난 뼈마디가 유난히 정돈돼 보였고, 어깨선은 지나치게 반듯했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진 곳 하나 없이 단정했는데, 

이상하게 그게 답답해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더 눈에 들어왔다. 

사람은 가끔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잘생긴 걸 보면, 그 순간만큼은 자기 눈을 먼저 의심하게 된다.

‘저게 진짜 사람 얼굴이 맞나.’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내가 저 얼굴을 알고 있다는 거였다.

분명 며칠 전에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선명하게. 

그냥 스쳐 지나가듯 본 것도 아니고,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확대도 해보고, 옆모습 사진도 넘겨보고, 프로필 문구까지 읽었다. 

믿기지 않아서. 세상에 저렇게 생긴 남자가 정말 있나 싶어서.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가까워질수록 더 비현실적이었다. 

눈매는 날카롭기보다 길고 조용했고, 콧대는 반듯했으며, 입술은 생각보다 부드러운 선이었다. 

전체적으로는 차갑게 생겼는데, 또 이상하게 사람을 완전히 밀어내는 얼굴은 아니었다. 

무심한데 선을 넘지는 않는 사람.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도 굳이 친절한 척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불친절하지도 않은 사람.

 이상하게 그런 인상이 먼저 왔다.

나는 숨을 한 번 삼켰다.

그리고 그제야 그의 목에 걸린 출입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줄 끝에 매달린 카드엔 처음 보는 로고와 영문이 작게 찍혀 있었다. 

그땐 몰랐다. 내가 방금 미팅을 마치고 나온 출판사 건물 윗층에, 

남친 쇼핑몰 운영 라운지가 같이 들어와 있다는 걸.

그는 내 앞에 멈춰 섰다.

“이도희 고객님 맞으시죠?”

그 순간, 며칠 전 휴대폰 화면이 번쩍 떠올랐다.

[남친 쇼핑몰]

[S급 프리미엄 파트너 / 도화준]

나는 아주 천천히 입을 벌렸다.

“…도화준?”

내 입에서 이름이 너무 솔직하게 튀어나왔다. 

놀라서인지, 어이가 없어서인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톤쯤 높았다. 

남자는 내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온 게 그리 이상하지도 않은지, 

아니면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건지, 아주 옅게 웃었다.

웃는 얼굴이 또 반칙이었다.

잘생긴 사람은 웃으면 좀 깨져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적어도 인간적으로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저 남자는 웃는 순간마저도 지나치게 완성되어 있었다.

“네. 도화준입니다.”

내 머릿속이 아주 잠깐 하얘졌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간신히 삼켜졌다.

도화준.

그 남자를 처음 본 건 며칠 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오연수라는 이름의 재앙이 내 인생을 제멋대로 흔들어놓은 그날 밤이었다.

사랑이 끝나는 순간은 생각보다 별일 없었다.

누군가는 울고불고 매달리고, 누군가는 술잔을 던지고, 누군가는 적어도 비라도 쏟아져 줘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정작 내 연애가 끝나던 날 식탁 위에는 닭뼈 몇 개와 눅눅해진 튀김옷, 

그리고 반쯤 식은 떡볶이만 남아 있었다.

치킨과 떡볶이.

웃기게도 그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조합이었고, 동시에 내가 연재 중인 웹소설 제목이기도 했다.

‘치떡빠 : 치킨이 떡볶이에 빠진 날’

1년 넘게 연재한 로맨틱 코미디였다. 

치킨을 좋아하는 여자 주인공과 떡볶이를 좋아하는 남자 주인공이, 

밥 취향 하나로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서로의 인생에 빠져드는 이야기. 

내가 가장 잘 쓰고 싶었던 종류의 사랑. 

달고, 맵고, 웃기고, 가끔은 괜히 눈물 나는 종류의 관계.

문제는 그 소설의 남자 주인공 모델이 지금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강치열이었다는 거였다.

“도희야.”

강치열이 나를 불렀다.

나는 치킨 무 통을 닫다가 멈췄다. 평소보다 조금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미세한 변화 앞에서 이상하게 둔감해진다. 

아니, 둔감해지는 척한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도 일부러 못 들은 척한다.

듣는 순간 진짜가 되어버릴까 봐.

“응?”

“우리 헤어지자.”

나는 손에 쥔 치킨 무 통을 그대로 놓쳤다.

플라스틱 통이 식탁 위에서 달그락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상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치고는 너무 가벼워서.

“뭐?”

내가 겨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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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이 열리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정확히는,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 멀쩡했다. 단행본 제안을 받고처음으로 잡힌 미팅을 무사히 끝냈고, 페이지온 출판사 대표와 편집팀 앞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계약 관련 자료가 든 봉투까지 야무지게 챙겨 들고 나왔다. 그러니까 최소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전까지의 나는 아주 평범하게 긴장한 웹소설 작가였다는 뜻이다.그런데 문이 열리는 순간, 그 평범함이 아주 산산조각 나버렸다.안쪽에 서 있던 남자 때문이었다.검은 셔츠에 짙은 코트를 걸친 남자. 손목 위로 드러난 뼈마디가 유난히 정돈돼 보였고, 어깨선은 지나치게 반듯했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진 곳 하나 없이 단정했는데, 이상하게 그게 답답해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더 눈에 들어왔다. 사람은 가끔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잘생긴 걸 보면, 그 순간만큼은 자기 눈을 먼저 의심하게 된다.‘저게 진짜 사람 얼굴이 맞나.’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진짜 문제는 내가 저 얼굴을 알고 있다는 거였다.분명 며칠 전에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선명하게. 그냥 스쳐 지나가듯 본 것도 아니고,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확대도 해보고, 옆모습 사진도 넘겨보고, 프로필 문구까지 읽었다. 믿기지 않아서. 세상에 저렇게 생긴 남자가 정말 있나 싶어서.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가까워질수록 더 비현실적이었다. 눈매는 날카롭기보다 길고 조용했고, 콧대는 반듯했으며, 입술은 생각보다 부드러운 선이었다. 전체적으로는 차갑게 생겼는데, 또 이상하게 사람을 완전히 밀어내는 얼굴은 아니었다. 무심한데 선을 넘지는 않는 사람.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도 굳이 친절한 척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불친절하지도 않은 사람. 이상하게 그런 인상이 먼저 왔다.나는 숨을 한 번 삼켰다.그리고 그제야 그의 목에 걸린 출입카드가 눈에 들어왔다.검은 줄 끝에 매달린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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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나 예쁘게 살지
강치열은 내 표정을 피하지도 않았다. 미안한 얼굴도 아니었고, 괴로운 얼굴도 아니었다. 그게 제일 모욕적이었다. 적어도 미안해하기라도 하면 덜 비참했을 텐데, 그는 이미 혼자 오래 생각을 끝낸 사람처럼 보였다.“우리 이제 안 맞는 것 같아.”‘안 맞는다.’나는 그 말을 한 번 속으로 굴렸다. 안 맞는다는 건 참 편리한 표현이다. 구체적인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되고, 상대에게 칼을 정확히 꽂지 않아도 되고, 자기는 덜 나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그런 모호한 말이 오히려 사람을 더 오래 아프게 한다는 걸.“갑자기 왜?”“갑자기는 아니지.”강치열은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 등을 의자에 기대었다. 그 태도가 이상하게 거슬렸다. 꼭 회의 끝내고 피드백 전달하는 사람처럼. 연애가 아니라 정리였다. 사랑이 아니라 정산 같았다.“솔직히 말할게. 나 요즘 너랑 있으면 좀 답답해.”“내가 뭘 했는데?”“꼭 뭘 해야만 답답한 건 아니잖아.”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사람이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데 꼭 큰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라는 거, 나도 안다. 그런데 최소한 오래 만난 사람에게는 적어도 조금은 더 정확한 문장을 써야 하는 거 아닌가. 답답하다고? 그게 끝이라고? 내가 어떤 사람이고, 우리가 어떻게 사랑했고, 몇 번의 계절을 같이 지나왔는지가 결국 그 한마디로 정리된다고?“강치열.”내가 그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너 혹시 다른 여자라도 생겼어?”그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 작은 반응 하나로도 사람은 대개 답을 안다. 그래도 나는 기다렸다. 아니라고 해주길. 적어도 그 정도의 거짓말은 해주길. 너무 비겁한 기대인 줄 알면서도, 사람은 끝까지 상대가 덜 나쁜 쪽을 택해주길 바란다.하지만 강치열은 내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쉬운 방식으로 나를 배신했다.“있어.”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이상하게도 눈물은 바로 안 났다.대신 속이 조용히 갈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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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식어버린 치킨과 떡볶이
강치열은 더는 대화할 가치도 없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은 이미 끝냈는지 테이블 한쪽에 카드 영수증만 달랑 남아 있었다. 진짜 끝이구나. 헤어짐이 이렇게까지 모양 빠질 수 있구나. 영화처럼 멋있을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인간적일 수는 없었나 싶었다.“갈게.”“꺼져.”나는 끝까지 그를 붙잡지 않았다.붙잡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순간 붙잡는 내가 너무 불쌍해질 것 같아서였다. 사랑은 이미 상대가 끝냈는데, 자존심까지 내가 버릴 순 없지 않나.문이 닫히고, 나는 그제야 식탁 위를 내려다봤다.‘먹다 남은 치킨.’‘식어버린 떡볶이.’‘기름이 굳어가는 소스.’이상하게 꼭 내 연애 같았다.그날 밤, 나는 결국 울었다.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도 울고, 현관문을 닫고 기대선 채로도 울고, 샤워기 물소리 속에서도 울었다. 울다가 지쳐 침대에 쓰러졌고, 그 와중에도 습관처럼 노트북을 켰다.하얀 문서창.깜빡이는 커서.그리고 맨 위에 떠 있는 제목.‘치떡빠 : 치킨이 떡볶이에 빠진 날’나는 한참 동안 그 제목만 바라보다가 결국 노트북을 덮었다.‘사랑을 쓰는 사람인데, 사랑이 끝나 버렸다.’그럼 이제 무슨 수로 다음 문장을 쓰지.며칠 뒤, 오연수가 내 집에 쳐들어왔다.“야, 일어나.”“안 일어나.”“죽었냐?”“응.”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데도 연수 목소리는 천장을 뚫고 들어왔다. 나는 눈도 못 뜬 채 베개를 더 끌어안았다. 사람이 실연하면 최소 삼 일은 침대와 동화될 권리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내 주변 인간들은 다들 너무 건강했다. 상식적이고, 부지런하고, 화나도 밥은 먹고 잠은 자는 인간들. 그런 점에서 오연수는 정말 내 인생 최악의 친구였다. 너무 멀쩡해서, 내가 질척이고 망가질 시간을 잘 안 줬으니까.“씻고 나와. 술 마시자.”“낮이잖아.”“그래서? 낮술이 더 잘 들어가.”“나 안 마셔.”“그럼 내가 네 입 벌리고 부어줄게.”나는 결국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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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친 쇼핑몰. 도화준
나는 말없이 잔을 비웠다.연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나는 누굴 좋아하면 오래 좋아하고, 한번 마음 준 사람에게는 생각보다 오래 예의를 지켰다. 헤어지고 나서도 상대를 함부로 미워하는 법이 잘 없었다. 그게 좋은 점인지 나쁜 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내겐 독이었다. 차라리 강치열을 원색적으로 욕하고, 사진을 찢고, 번호를 지워버릴 만큼 단순한 사람이었으면 덜 아팠을 텐데.“됐고.”연수가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내 앞으로 내밀었다.“이거나 봐.”나는 인상을 쓰며 화면을 봤다.화사한 분홍빛 아이콘 하나. 그리고 이름은 더 황당했다.남친 쇼핑몰“…뭐야 이거?”연수가 입꼬리를 올렸다.“신세계.”“…뭐야 이거?”내가 핸드폰을 내려다보자 연수가 아주 당당하게 턱을 괴었다.“남친 쇼핑몰.”“글자는 나도 읽을 줄 알아.”“읽었으면 이해도 좀 해.”“아니, 이걸 어떻게 이해해. 남친을 쇼핑몰에서 왜 사?”“사지는 않고, 구독하는 거지.”“더 미쳤네.”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쳤다.연수는 내 반응이 익숙한 사람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화면을 넘겼다. 그러자 남자 얼굴들이 줄줄이 떴다. 정말 줄줄이. 이건 무슨 남자친구 버전 넷플릭스도 아니고, 등급별로 정렬된 얼굴들이 화면에 차례로 뜨는데 하나같이 사람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잘생겼다. 어떤 남자는 배우처럼 생겼고, 어떤 남자는 아이돌 같았고, 어떤 남자는 정장만 입혀놓으면 바로 재벌 3세로 캐스팅될 것 같았다.문제는 다들 너무 잘생겨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다는 거였다.“와.”내가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이건 사기 아니냐?”“왜?”“너무 다 잘생겼잖아. 이런 건 보정 사기거나, AI거나, 아니면 장기매매 조직이야.”“너 방금 실연해서 감수성 터진 애 맞냐? 왜 갑자기 범죄 스릴러 찍어.”“아니, 진짜 너무 수상하잖아.”연수는 아주 태연하게 내 손에서 핸드폰을 다시 가져가더니 앱 화면을 더 넘겼다. 그러자 각 남자 프로필 밑에 등급과 요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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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할부금 반 보내라는 전남친
“야, 네가 진짜 돈 내고 구독하라는 것도 아니고, 공짜 체험이잖아. 그냥 소개팅보다 조금 더 잘생긴 남자랑 밥 한 끼 먹는다고 생각하면 되지.”“조금 더?”“많이.”“싫어.”“왜?”“기분 나빠.”“뭐가.”“내가 왜 실연했다고 남친 쇼핑몰 체험까지 해야 되냐고.”연수는 잠깐 나를 가만히 보더니, 의외로 장난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그럼 평생 강치열 하나로 상처받고 끝낼 거야?”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못 했다.사실 그 말은 내 속을 가장 정확하게 찔렀다. 나는 늘 한 사람에게 오래 머무는 타입이었다. 좋아하면 오래 좋아하고, 아프면 오래 아팠다. 강치열이 끝내버린 사랑 하나가 마치 내 전부였던 것처럼 한동안 그 자리에 붙들려 있을 자신도 있었다. 그게 싫었다. 나도 내가 싫었다. 그런데 사람은 이상하게도, 자기 자신을 구해내는 방식이 늘 고상하진 않다. 때론 조금 유치하고, 조금 치사하고, 조금 우스워야 겨우 살아난다.연수는 그 틈을 정확히 찔렀다.“야, 넌 지금 너무 정석적으로 상처받고 있어.”“그게 무슨 말이야.”“너무 교과서적으로 차인 여자처럼 굴고 있다고.”“야.”“진짜잖아. 밥 못 먹고, 원고 못 쓰고, 침대에 누워 있고, 강치열 문자 한 줄에도 멘탈 갈리고.”나는 괜히 소주잔만 만지작거렸다. 다 맞는 말이라서.연수는 그걸 보고 한숨처럼 웃었다.“그러니까 더더욱 해야 돼.”“뭘.”“이런 이상한 짓.”“왜?”“그래야 네 인생이 다시 움직여.”그 말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네 인생이 다시 움직여.’거창한 위로도 아니었고, 가슴을 후벼파는 문장도 아니었는데, 그날의 나에겐 그 말이 조금 필요했던 것 같다. 움직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으니까. 끝난 사랑, 멈춘 연재, 하얗게 비어 있는 원고 창, 먹다 남은 기억 같은 것들 속에.그날 우리는 결국 술을 더 마셨다.그리고 나는, 실연한 여자답게 아주 멋없이 취해버렸다.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음 날 아침이었다.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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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앱 속 남자가 현실로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끓었다.사람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그날 정확히 알았다. 뚜껑 덮인 냄비 안에서 국물이 넘치기 직전까지 오르는 것처럼, 속이 뜨겁고 어지럽고 어이가 없었다.“아주… 지랄을 하세요.”내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린 순간, 또 하나의 알림이 떴다.[남친 쇼핑몰]무료 체험 서비스 종료까지 3일 남았습니다.아직 이용하지 않으셨다면, 지금 가장 인기 있는 파트너를 만나보세요.나는 그 문구를 한참 봤다.그리고, 아주 비참할 정도로 솔직한 생각이 하나 스쳤다.‘그래.공짠데.’‘공짜면 그냥 한 번쯤 해볼 수도 있잖아.’소개팅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아니, 소개팅도 아니다.어차피 돈 받고 역할하는 남자라면서 내가 진심만 안 되면 되는 거 아닌가.조금 웃고,조금 잘생긴 얼굴 구경하고,조금 덜 비참해지면 그만이지.그렇게 아주 손쉽게 자기 자신을 속이며, 나는 앱을 다시 열었다.그리고 봤다.도화준.검은 셔츠가 유난히 잘 어울리는 남자.지나치게 정돈된 얼굴인데, 웃는 표정은 또 생각보다 부드럽고, 프로필 한 줄은 짧았다.조용한 시간을 함께할 수 있습니다.뭐야, 이 소개글. 나는 괜히 입술을 비뚜름하게 만들었다.‘재수 없게. 정말 재수 없게 잘생겼다.’그런데도 손가락은 이미 그 얼굴을 누르고 있었다.왜냐하면 제일 잘생겼으니까. 정말 그 이유뿐이었다. 홧김이었고, 자존심이었고, 그리고 아주 조금은 강치열에게 보여주고 싶은 유치한 복수심 같은 것도 있었다.네가 날 질려 했든 말든 세상엔 너보다 훨씬 잘생긴 남자가 많다고.그런 유치한 마음.하지만 앱은 아주 쉽게 내 뜻대로 굴러주지 않았다.예약 대기 인원 多예상 연결일 10일 후“뭐야.”나는 화면을 보고 어이없어서 웃었다.무료 체험 고객 따위는 당장 만나주지도 않는다는 뜻인가. 하긴 저 얼굴이면 그럴 만도 하지. 정기 구독자들도 줄을 설 테니까. 웃기네. 진짜 유료 연애가 이렇게까지 성행할 줄 누가 알았냐.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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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람이 솔직해 보여서요
말하고 나니 더 바보 같았다. 무료 체험 파트너를 맡는다는 남자에게 지금부터냐고 묻다니. 나는 속으로 혀를 깨물었다. 그런데 도화준은 웃지도 않았다. 비웃지도 않았고, 민망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저 담백하게 대답했다.“고객님이 괜찮으시면요.”‘괜찮으시면.’그 짧은 말 하나가 이상하게 사람 마음을 조금 느슨하게 만들었다. 강요하는 기색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저 얼굴이 저렇게까지 멀끔하면 말투라도 재수 없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지나치게 정중해서였을까.“솔직히 아직도 상황이 잘 이해가 안 되거든요.”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도화준은 한 박자쯤 쉬고 물었다.“어떤 부분이 제일요?”그 질문 방식이 묘하게 좋았다. 막연하게 “뭐가 문제죠?”라고 묻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내가 어디서부터 설명하면 될지를 같이 정리해주는 느낌. 나는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가, 결국 가장 솔직한 쪽을 택했다.“그냥… 당신이 왜 여기서 나오는지가 제일요.”도화준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고객님이 저를 선택하셨으니까요.”‘아.’‘진짜 재수 없게 잘생겼네.’나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바닥만 봤다. 대리석 바닥 위에 비친 내 구두 끝이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도화준은 내가 민망해하는 걸 모르는 척해줬다. 그게 또 묘하게 고마웠다.“배고프세요?”그가 갑자기 물었다.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봤다.“네?”“아까부터 표정이 그렇습니다.”“무슨 표정이요?”“배고픈데 귀찮은 표정.”나는 정말 잠깐 말을 잃었다.‘맞는 말이라서.’오늘 미팅 때문에 아침도 대충 넘겼고, 점심은 아예 건너뛰었다. 미팅 끝나고 편의점 삼각김밥이라도 사 먹을까 생각하긴 했지만, 사람은 이상하게 너무 긴장한 날엔 배고픔도 뒤늦게 몰려온다. 하필 그걸 이 남자가 정확히 읽어낸 것이다.“원래 남한테 배고픈지까지 그렇게 잘 알아보세요?”“아닙니다.”“그럼요?”도화준은 아주 잠깐 나를 보다가 말했다.“생각보다 표정에 다 드러나는 편이시네요.”나는 순간 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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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무료 체험 남친
도화준의 등을 따라 걷기 시작한 건, 솔직히 말하면 나도 이해가 안 됐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페이지온 출판사 미팅을 마치고 집에 가려던 사람이었다. 가방 안엔 계약 관련 자료가 들어 있었고, 머릿속엔 강도윤 대표가 말한 인세 구조나 초판 부수, 수정 일정 같은 단어들이 엉켜 있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내 저녁은, 버스나 택시를 타고 집에 가서 대충 컵라면이나 끓여 먹고, 노트북을 켰다가 한 줄도 못 쓰고, 괜히 강치열 문자를 다시 떠올리며 더 열받아하는 쪽에 가까웠다.그런데 지금 나는 앱 속에서 보던 남자를 따라 저녁 거리로 나서고 있었다.‘이게 맞나.’나는 몇 걸음 걷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앞서가던 도화준을 향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잠깐만요.”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돌아보는 동작마저 너무 매끈해서 괜히 더 얄미웠다. 사람은 좀 허둥지둥도 해야 인간미가 생기는 거 아닌가. 그런데 저 남자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것도 ‘무게 잡는 남자’처럼 느릿느릿한 게 아니라, 그냥 원래부터 동작 하나하나에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 같았다.“네.”“우리… 지금 진짜 가는 거예요?”“아까 괜찮다고 하셨잖아요.”“그건 분식집이 괜찮다는 뜻이지, 제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갈 준비가 됐다는 뜻은 아니었거든요.”내가 조금 빠르게 말하자 도화준은 잠깐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짧게 웃었다.“그건 죄송합니다.”“진짜 죄송해하는 얼굴은 아닌데요.”“생각보다 무사히 따라오셔서.”“저도 제가 왜 따라왔는지 모르겠어요.”“그럴 때도 있죠.”말이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순간 내가 지나치게 호들갑 떠는 사람 같아졌다. 물론 지금 상황 자체가 호들갑 떨 만하긴 했다. 무료 체험 남친. 유료 연애 서비스. S급 남자. 분식집 데이트. 이 모든 게 다 말이 안 되는데, 하필 당사자인 도화준이 제일 멀쩡하니까 상대적으로 내가 더 이상해 보이는 구조였다.“원래 다들 이렇게 바로 만나나요?”“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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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고객님 대신 이도희 씨
대단한 말도 아니고, 로맨틱한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웃기고, 조금 민망하고, 조금 얄미운 정도의 대사였다. 그런데도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을 것 같았다. 아마도 내가 방금 전까지 ‘고객님’이었던 사람이, 이번엔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기 때문일지도 몰랐다.이도희 씨.고객님보다 훨씬 사람 같고, 훨씬 가까운 호칭.나는 괜히 시선을 피해 길가의 간판들을 훑었다. 저녁 시간대라 그런지 분식집, 술집, 카페 앞이 다들 조금씩 붐비기 시작했다. 퇴근하는 사람들, 학원 가는 학생들, 손잡고 걷는 커플들. 다들 제 일상을 사는 얼굴이었다. 그 한가운데서 나는 무료 체험 남친과 분식집에 가는 중이었다.세상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웃긴 방향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그쪽은요?”내가 괜히 화제를 돌리듯 물었다.“제가요?”“표정 잘 보는 사람.”“네.”“자기 표정도 잘 봐요?”도화준이 발걸음을 아주 미세하게 늦췄다.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지만, 분명 멈칫했다.“그건 잘 모르겠습니다.”“와.”나는 헛웃음을 쳤다.“그 답이 제일 수상한데요.”“왜요?”“남 표정은 다 읽으면서 자기 표정은 모른다고 하면, 보통 되게 복잡한 사람 같잖아요.”“복잡한 사람으로 보입니까?”“아직은요.”“아직은?”“네. 지금은 그냥….”나는 잠깐 생각했다.뭐라고 해야 하지. 너무 잘생겨서 재수 없는 사람? 지나치게 멀쩡해서 수상한 사람? 생각보다 말이 괜찮은 사람?결국 나온 말은 뜻밖에도 가장 얌전한 쪽이었다.“낯선 사람.”도화준은 그 말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게 더 기억에 남았다. 대개 사람은 ‘낯선 사람’이라는 표현을 들으면 조금쯤 서운해하거나, 어색하게 웃거나, 적어도 질문을 되묻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그렇군요 하고 넘길 수 있는 사람 같았다.“맞는 말이네요.”그리고 그렇게 대답했다.분식집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빌딩 하나를 끼고 골목으로 조금만 들어오니, 유리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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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첫날의 온도: 떡볶이와 모르는 척
그 말이 입에서 튀어나온 직후, 나는 약간 후회했다.그러나 이미 늦었다.가게 아주머니가 주문을 주방 쪽으로 넘기고, 나는 물컵을 손에 쥔 채 괜히 태연한 척만 했다. 도화준은 굳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조금 고맙기도 하고, 조금 얄밉기도 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은 분명 내가 허세를 부렸다는 걸 알고 있을 것 같아서.“원래 매운 거 잘 드십니까?”‘아니나 다를까.’나는 눈썹을 아주 살짝 치켜올렸다.“왜요. 못 먹을 것처럼 보였어요?”“그건 아닙니다.”“그럼요?”“방금 대답하시기 전에 조금 고민하셔서.”정말 못 살겠다.나는 정말로 웃음을 참지 못했다.“진짜 관찰력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그 정도는 기본입니다.”“무슨 면접도 아니고.”“고객님이 저를 선택하셨으니까요.”또 그 말.이 남자는 꼭 내가 민망해할 포인트를 정확히 골라 툭 건드린다. 그게 일부러인지, 진짜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건지 더 헷갈려서 문제였다.“계속 그렇게 말할 거예요?”“어떻게요?”“고객님이 저를 선택하셨다고.”“사실이니까요.”나는 물컵만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데도 얼굴은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때 떡볶이가 나왔다. 아주 빨갛고, 아주 위험해 보이는 비주얼. 소스 냄새가 진하게 올라오자 나는 잠깐 멈칫했다. 그래도 이미 큰소리를 쳐버린 이상 뒤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떡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 두 번쯤 씹었을 때 바로 알았다.‘아, 망했다.’‘맵다.엄청 맵다.’혀끝이 얼얼했고, 귀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그런데 사람이 이상한 게, 그럴 때일수록 더 태연한 척한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떡을 삼켰다. 그리고 물을 조금 마셨다. 아니, 조금 마시려 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마셨다.옆에서 도화준이 조용히 물었다.“괜찮으세요?”“네.”“많이 매우신 것 같은데.”“아닌데요.”“지금 눈가에 눈물 맺히셨습니다.”나는 반사적으로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뜨거웠다. 아,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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