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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Author: 양순이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6-20 14:57:17

동쪽 별궁, 백합관의 2층 테라스.

타티아나는 커다란 창문의 암막 커튼을 살짝 걷어낸 채,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문 틈 사이로 조금 전의 소란이 고스란히 보였다. 검은 레이스 드레스를 입고 황궁의 안주인 행세를 하던 그 은빛 머리카락의 정부.

‘블랑이라고 했지.’

기사들에게 가로막혀 발길을 돌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타티아나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풋.”

입가를 가리고 흘러나온 비웃음엔 노골적인 우월감이 묻어 있었다.

‘어설픈 짝퉁 주제에.’

자신이 떠나간 자리에 채워진 가여운 대용품.

‘카시안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이니까. 이해해야지.’

어쨌든 결국 이 백합관의 문턱은 넘지 못했다.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

누군가는 황제가 내린 엄명을 두고 타티아나를 감금한 것이라 수군거렸지만, 타티아나의 해석은 전혀 달랐다.

‘이건 감금이 아니야. 나를 지키기 위한 성역(聖域)이지.’

그녀는 창틀을 어루만지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엘런의 폭력과 시골 영지의 퀴퀴한 곰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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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113화

    동쪽 별궁, 백합관의 2층 테라스.타티아나는 커다란 창문의 암막 커튼을 살짝 걷어낸 채,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창문 틈 사이로 조금 전의 소란이 고스란히 보였다. 검은 레이스 드레스를 입고 황궁의 안주인 행세를 하던 그 은빛 머리카락의 정부.‘블랑이라고 했지.’기사들에게 가로막혀 발길을 돌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타티아나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풋.”입가를 가리고 흘러나온 비웃음엔 노골적인 우월감이 묻어 있었다.‘어설픈 짝퉁 주제에.’자신이 떠나간 자리에 채워진 가여운 대용품.‘카시안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이니까. 이해해야지.’어쨌든 결국 이 백합관의 문턱은 넘지 못했다.[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누군가는 황제가 내린 엄명을 두고 타티아나를 감금한 것이라 수군거렸지만, 타티아나의 해석은 전혀 달랐다.‘이건 감금이 아니야. 나를 지키기 위한 성역(聖域)이지.’그녀는 창틀을 어루만지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엘런의 폭력과 시골 영지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에서 벗어나, 저 천박한 것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도록 얀(카시안)이 나를 철저하게 감싸고 있는 것이다. 마치 유리관 속에 애지중지 모셔둔 최고급 보석처럼.“시녀장.”그녀의 부름에, 방구석에 그림자처럼 대기하고 있던 시녀장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예, 부인. 부르셨습니까.”“은밀히 전할 서신이 있어. 하나는 아이린 영애에게, 또 하나는 내 본가인 백작저로 보내.”타티아나의 눈동자가 영악하게 빛났다. 어젯밤 연회장에서 아이린의 도움으로 카시안의 눈에 띄는 데 성공했지만, 언제까지고 그녀의 선의에 기댈 순 없었다.‘아이린은 황후 자리를 노리고 나를 방패막이로 썼겠지. 하지만 이 황궁 사교계에 내 자리를 굳히려면 그 여자의 인맥이 필요해. 본가의 아버지는 내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걸 알면 당장 내게 유용한 정보통들을 붙여줄 테고.’타티아나는 치밀하게 계산했다.자신은 가련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영지 부인으로 남아야 했다. 뒤에서 아이린과 가문을 조종해 사교계의 여

  •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112화

    달그락.마차 문이 닫히자 좁고 어두운 마차 안으로 햇빛에 달궈진 블랑의 몸에서 밤새 짓이겨진 비릿한 체취가 확 끼쳐왔다. 레녹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차갑게 억누르며 정곡을 찔렀다.“어제 저잣거리에서 알리바이를 만들라고 건넨 위스키를 겁도 없이 병째로 들이부으시더니. 결국 폐하께 온몸을 내어주셨습니까.”블랑은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뻐근한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자조적으로 대꾸했다.“네. 덕분에 필름이 완전히 끊겼죠. 눈을 떠보니 남은 건 끔찍한 통증과 흔적뿐이고요. 그런데 황제란 작자의 취향을 모르겠네요. 밤새 날 그렇게 안았으면서, 동쪽 별궁에 다른 여자를 숨겨뒀다니.”“숨겨둔 게 아니라, 가둬둔 거겠죠.”레녹이 차갑게 블랑의 말을 정정했다.“동쪽 별궁의 경비 태세는 보셨을 테죠. 부인의 말대로 사랑하는 여인이라면 품에 안고 밤을 새웠을 텐데, 황제는 그녀를 감옥처럼 가둬놓고 부인에게 와서 미친 듯이 욕정을 풀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겠습니까.”“…….”“별궁의 여자는 애첩이 아니라 정치적 인질이거나, 부인의 목을 조르기 위한 덫일 확률이 높습니다.”블랑의 눈이 커졌다. 레녹의 날카로운 분석에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갔다.“하지만 지금 그 별궁의 정체보다 더 시급하고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부인.”레녹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게 깔려 있었다. 그의 짙은 시선이 블랑의 목덜미를 지나, 드레스 안쪽으로 가려진 그녀의 아랫배를 향해 꽂혔다.“기억도 없이 폐하의 욕정을 온몸으로 받아냈다면…… 사후 피임은, 하셨습니까?”순간, 마차 안의 공기가 뚝 멈췄다.블랑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황제의 품에서 눈을 뜬 직후 수치심과 분노에 휩싸여, 그가 제 안에 남겼을지도 모를 치명적인 씨앗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지금 아이를 갖는 건, 우리가 쥘 수 있는 최악의 팹니다.”레녹이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상체를 숙여 블랑의 코앞까지 다가왔다.“임신 초기가 되면 당장 폐하의 밤부터 온전히 감당할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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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중천에 떠오른 나른한 오전 11시.동쪽 별궁, 백합관 앞. 그곳은 이름처럼 아름답고 화사해야 할 곳이었으나, 지금의 풍경은 묘하게 기괴했다.사랑받는 애첩을 위한 은밀한 온실이라기엔 공기가 너무도 삭막했다. 창문이란 창문은 두꺼운 암막 커튼으로 빈틈없이 봉쇄되었고, 별궁을 둘러싼 기사들은 의장대가 아니라 당장 마물과 실전을 치를 살수들처럼 중무장한 채 출입구를 겹겹이 틀어막고 있었다.웃고 떠드는 시녀들의 발길조차 철저히 끊긴 그곳은, 누군가를 보호하는 은신처라기보다 흉악범을 가둬둔 거대한 감옥 같았다.그 살벌하고 무거운 풍경 속에, 황궁의 공기를 일순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이질적인 존재가 나타났다.블랑이었다.작정이라도 한 듯, 그녀의 옷차림은 누구나 한번 돌아볼 만큼 관능적이었다.살구빛 안감 위를 촘촘하게 뒤덮은 칠흑 같은 블랙 레이스 드레스.밝은 태양 빛 아래서 그 옷은 시각적인 폭력이 되었다.햇살이 비칠 때마다 안감의 색이 하얀 피부 톤과 뒤섞여, 마치 알몸 위에 아슬아슬한 검은 거미줄만 감아놓은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치켜올린 목에는 핏방울처럼 붉은 루비 초커 하나만이 위태롭게 달랑거렸다.그 모습은 질투에 눈먼 천박한 정부라기보다, 밤새 황제의 진액을 남김없이 빨아먹고 둥지에서 걸어 나온 독거미처럼 위험하고 고혹적이었다.“비키세요. 같이 폐하를 모시는 처지끼리, 면상이나 익혀두려 왔으니까.”블랑은 검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부채를 탁, 펼쳤다. 햇빛을 가리는 용도였지만, 앞을 가로막은 기사들에게는 숨통을 조이는 위협처럼 느껴졌다.“송, 송구합니다만 부인. 폐하의 엄명입니다. 그 누구도 들일 수 없습니다.”“누구도 못 들어간다? 그럼 나오라고 하세요. 내가 친히 발걸음을 했는데.”블랑은 접은 부채 끝으로 기사의 단단한 흉갑을 툭툭 치며 나른하게 속삭였다.기사는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시선을 블랑의 목 아래로 내리지 못했다. 대낮의 적나라한 햇살 아래 드러난 그녀의 실루엣과, 가슴골 부근에 희미하게 남은 붉은 잇자국이 너무 자극

  •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110화

    ‘자, 어떻게 반응하실까.’거짓말이었다.간밤 폐하는 결코 밖에서 들릴 만큼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짖은 적이 없었다.앞치마를 쥔 에다의 손에 서늘한 땀이 배었다. 정말 기억을 잃은 가여운 정부라면,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안은 황제에게 투기와 비참함을 보여야 마땅하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저 껍데기 속에 웅크린 것이 다른 존재라면…….‘알아야겠어. 당신이 이름 그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 블랑인지, 아니면 내가 영원히 충성해야 할 주인님인지.’‘로제를 불렀다고? 나를 안으면서?’블랑은 실소하며 제 옆자리를 쓸었다.짚어낸 시트는 온기라곤 먼지 한 톨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내가 로제라는 걸 모르는 거야. 알았다면 이렇게 갔을 리가 없어.’그럼 그에게 나는 뭐지?나는 그저 껍데기뿐인 대용품이자, 자위 기구에 불과한가?‘기억을 잃은 가련한 백치 정부 따위, 밤새 욕정이나 풀고 가 버려도 그만인 장난감이다 이거지.’“…….”수치심을 넘어선 맹렬한 모멸감이 전신을 난도질했다. 블랑이 덜덜 떨리는 입술을 짓씹고 있을 때, 에다가 쐐기를 박듯 폭탄 같은 소문을 꺼내 놓았다.“그, 그리고 부인. 지금 황궁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어젯밤 폐하께서…… 어떤 정체 모를 여인을 마차에 태워 데려오셨다고 합니다.”“뭐……?”“그 여인을 동쪽 별궁에 숨기셨대요. 아무도 얼굴을 보지 못하게 꽁꽁 싸매서, 폐하께서 손수 안아 들고 방 안까지 모셨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찻잔을 쥐고 있던 블랑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갔다.어젯밤. 제 안에 욕망을 쏟아내며 로제의 이름을 부르짖던 그 시간에. 카시안은 또 다른 여자를 황궁의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두었다.“하……, 하하하.”블랑의 입술 사이로 마침내 기가 막힌 실소가 터져 나왔다.밤새 저도 모르게 겪은 정사와, 대용품으로 전락한 끔찍한 진실, 그리고 동쪽 별궁의 여자. 모든 파편이 머릿속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로 정교하게 결합했다.‘역시 잔인하고 역겨운 인간.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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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아침,지독한 숙취가 머리를 반으로 쪼개는 것 같았다.“으음…….”블랑은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눈을 떴다. 익숙한 서쪽 별궁의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행히 레녹의 마차를 타고 들키지 않은 채 침대까지는 무사히 돌아온 모양이었다.“부인……! 일어나셨어요?”침대 곁에서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구르던 에다가 울상을 지으며 다가왔다. 들고 있는 트레이에는 해장용 꿀물이 놓여 있었지만, 에다의 안색은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에다…… 물 좀 줘. 목이 타네.”블랑은 상체를 일으키려 매트리스 짚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윽……!”허리와 골반을 끊어낼 듯한 뻐근한 과부하가 전신을 타고 강렬하게 들이쳤다. 술 기운으로 인한 두통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무언가에 가차 없이 짓눌리고 꺾인 듯한 노골적인 감각이었다.은밀한 곳은 열감으로 홧홧하게 부어올라 있었고, 젖은 허벅지 안쪽이 움직일 때마다 끈적하게 달라붙었다.‘이게 뭐지……?’황급히 이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제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손끝에 점액질처럼 묻어 나오는, 밤새 짓이겨진 농밀한 정사의 흔적. 뒤이어 코끝을 스치는 지독한 위스키 향과 낯익은 진한 체취를 확인한 순간, 블랑의 사고가 서서히 얼어붙었다.어젯밤의 기억이 조각조각 부서져 있었다. 분명 독주에 취해 환각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꿈속에서 카시안이 제 옷을 찢고, 제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사납게 몰아쳤던 기억.‘꿈이니까…… 마음대로 해, 카시안.’제 입으로 그 서늘한 허락을 건넸던 기억이 벼락처럼 머릿속을 스쳤다.‘……그게 꿈이 아니었다고?’심장이 천 길 낭떠러지로 뚝 떨어졌다. 술김에 미쳐서 카시안에게 몸을 내준 것도 모자라, 그 지독한 폭주를 고스란히 받아내며 매달렸다니.블랑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에다가 건넨 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켜고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누르며 물었다.“에다. 어제…… 폐하가 오셔서 어떻게 됐지?”“…….”“말해. 내가 실수한 게 있어? 내 입으로 무슨 말이라도 뱉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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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는 기다릴 이유도, 지켜볼 이유도 없었다.카시안은 제 목을 감아오는 블랑의 가느다란 손목을 한 손으로 거칠게 낚아채 침대 헤드 위로 찍어 눌렀다. 다른 한 손으로는 에다가 입혀놓은 얇은 실크 슬립을 거칠게 쥐어뜯었다.찌익- 가차 없이 찢겨나간 백색 원단 사이로, 위스키의 열기에 절여져 붉게 물든 뽀얀 속살과, 한 손에 으스러지도록 쥘 수 있을 것 같은 유려한 허리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아…… 읏.”독한 술기운과 갑작스러운 한기에 블랑이 몸을 잘게 떨며 눈을 흐리게 떴다. 초점이 풀린 눈동자에 저를 집어삼킬 듯 포악한 독점욕을 번뜩이는 카시안의 얼굴이 들어왔다.지독한 취기에 이성이 통째로 녹아내린 그녀는 제 몸을 짓누르는 이 압도적인 무게감을 그저 서글픈 환각이라 확신했다.“꿈이구나…….”블랑의 입술 사이로 나른하고 실없는 미소가 흘러나왔다. 눈가에 고여있던 투명한 눈물이 귀밑으로 툭 떨어졌다.그녀는 도망치는 대신, 오히려 이 서늘한 환각을 안아버리겠다는 듯 힘 풀린 팔을 뻗어 카시안의 단단한 어깨를 감싸 안았다.“가끔은…… 이런 꿈도 나쁘지 않지.”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그의 넓은 품 안으로 더 깊숙이 밀착되었다. 사방으로 끼치는 지독한 위스키 향 속에서, 블랑이 카시안의 목덜미에 숨을 불어넣으며 웅얼거리듯 속삭였다.“어차피 꿈이니까…… 마음대로 해, 카시안.”그 체념 섞인 허락이, 카시안을 억누르던 마지막 이성의 빗장을 산산조각 내버렸다.자신에게 매달리는 여자를 보며, 아랫배 깊은 곳에서부터 잔인한 가학증과 지독한 성욕이 왈칵 뒤엉켜 솟구쳤다.“네가 원한 거다, 로제.”카시안의 낮고 굵은 한숨이 블랑의 젖은 입술 위로 내리꽂혔다. 입술을 가르는 통증과 함께 지독한 위스키 향과 황제의 거친 타액이 끈적하게 섞여 들었다. 질척한 마찰음이 밀실 같은 침실 안에 외설적으로 울렸다.그의 입술은 이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 가슴골 사이에 말라붙은 호박색 액체를 사납게 핥아 올렸다. 혀끝이 닿을 때마다 홧홧하게 타오르는 자극에 블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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