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엘런이 사라진 뒤, 응접실에는 지독한 혐오의 침묵만이 남았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저자가 감히…….”
참모가 사색이 되어 다가왔지만, 차마 끝까지 말을 다 하지는 못했다.
카시안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엔 아까 자신을 도발하던 로제의 서늘한 눈빛이 떠올랐다.
“미친놈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역겹군.”
“그렇긴 하지만…. 얼핏 보면 난봉꾼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세를 보는 눈이 날카롭습니다.”
“알아. 그러니까 엮이지 말아야지.”
카시안은 천천히 잔을 흔들었다. 붉은 와인이 마치 피처럼 일렁였다.
참모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미 들은 말이 있으니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하긴. 구경이나 해야지.”
카시안의 목소리는 낮고 위험했다.
“인간의 지략을 운운하며 나를 짐승이라 비웃던 황후가, 저런 미친 개의 혓바닥에 어떻게 먹히는지. 혹은, 그 오만한 주둥이로 어떻게 저 자의 목을 쳐버리는지 말이야.”
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로제가 있을 황궁 본관을 향해 타올랐다.
“만약 그녀가 무너질 것 같으면…… 그때는 내가 직접 그 사냥터에 끼어들 생각이다. 저런 벌레에게 주긴 아까운 사냥감이니까.”
**
문이 닫히자마자, 로제는 더 참지 못한 듯 깊은 숨을 내쉬었다.
억눌러 둔 분노가 찬물처럼 차갑게 치밀어 올랐다.
“날 보고 애나 낳으라고? 저질스러운 작자 같으니!”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방 안의 공기가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시녀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고, 곁에 있던 에다 역시 눈을 크게 뜬 채 움직이지 못했다.
“폐하, 말씀을 조금만 낮추셔야….”
“낮출 필요 없어. 들리면 들으라지.”
로제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여긴 아르센의 황궁이야. 내가 왜 그런 무례한 인간의 눈치를 봐야 하지?”
말끝마다 날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 분노 속엔 단순히 모욕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분노는 단순한 모욕감이 아니었다.
로제는 카시안의 시선을 떠올렸다.
예를 갖춘 미소 뒤에서, 레온을 아주 날카롭게 살피던 그 눈빛.
‘그 모든 발언은 나를 겨냥한 게 아니야. 레온이 약한 황제인지, 아니면 나를 통제하는 힘이 있는지… 그 규율을 확인하려던 거였어.’
소파에 앉은 로제는 분노를 가라앉히려 숨을 들이쉬었다.
에다는 당황했지만, 로제의 표정에서 더 이상 말릴 수 없음을 깨닫고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도 많이 분노하신 듯 보였습니다.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지셔서는, 폐하를 감싸려 하셨잖아요. 기분을 좀 푸시는 게…….”
로제의 손끝이 멈칫했다.
“나를 감싸? 고작 기침이나 해대며 얼굴이나 붉히는 게?”
“그래도 폐하께서는 진심으로 황후 폐하을 아끼시는 것 같았습니다. 밤일 이야기를 하셨을 때, 당황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기쁨을 느끼시는 눈치였거든요. 분명, 사랑일 겁니다.”
“하아, 과연 그럴까…….”
입가에 비소를 건 로제가 고개를 돌리다가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전생에 자신을 카시안의 침소로 팔아넘겼던 그 비겁한 남자.
그가 지금 보여주는 그 순진한 열정과 사랑.
그것이 얼마나 얄팍하고 나약한 것인지 로제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나를 사랑한다라…….”
“네, 황제 폐하께선 마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세요. 오늘도 내내 마님의 안색만 살피셨잖아요.”
‘우리 사이에 사랑이 있었나?’
그 짧은 생각이 고요한 여운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어젯밤, 레온은 파드득 떨리는 손으로 로제를 안으며 평소보다 유독 뜨겁고 거친 숨을 토해냈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순진한 레온은 그 낯선 열기가 아내를 향해 피어난 사랑과 애욕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겠지만, 전생에서 3년이나 생명력을 쥐어짜 내며 그 마력을 받아냈던 로제는 추악한 진실을 알고 있었다.
폭주하는 드래곤의 피는 스스로를 불태우지 않기 위해, 로제가 타고난 유일한 진통제인 태양의 기운을 짐승처럼 갈구할 뿐이다.
레온 본인은 평생 모를 것이다.
아내의 살결이 닿지 않으면 숨이 막히고, 아랫배가 뻐근해질 만큼 그녀를 안고 싶어 미치겠는 그 맹렬한 충동이…… 사실은 약을 찾지 못해 죽어가는 기생충의 비참한 생존 본능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발정 난 짐승의 본능을 고결한 사랑이라 착각하며 포장하다니. 가소롭지.’
로제는 제 목에 남은 붉은 흔적을 손톱으로 차갑게 짓눌렀다.
“착각일 거야.”
냉담한 그녀의 반응을 본 에다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꼬리를 내린 강아지 같은 그 얼굴에 로제는 픽,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에다 너라는 건 잘 알지.”
또 금방 환해지는 에다의 얼굴을 본 로제는 그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너는 언제나 내 말 한마디에 상심하고 또 기뻐하는구나.’
이 차갑고 지긋지긋한 황궁에서, 대가 없이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유일한 온기.
로제는 에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멀리 카시안이 머무는 별궁이 보였다.
‘카시안……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의 눈빛은 차갑고 잔혹했지만, 딱 한 번. 자신이 인간의 지략을 운운하며 도발했을 때 멈칫하던 그 기류가 있었다.
그 작은 반응이 이상하게 머릿속에 끈적하게 남아있었다.
‘그 전쟁귀가……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나? 하긴 놀랐을 거야. 순종적인 전리품일 줄 알았던 내가 그렇게 발톱을 세울 거라곤 예상 못 했을 테니까.’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저 두 수컷을 완벽하게 장기말로 쓰려면……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그 질문은 꽤나 위험한 도박이었다.
레온의 마력을 키워 카시안의 목을 물어뜯게 할 것인가, 아니면 카시안의 정복욕을 이용해 레온과 이 지긋지긋한 아르센을 통째로 무너뜨릴 것인가.
어느 쪽이든 완벽한 위자료를 챙겨 떠나기엔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폐하, 그런데 벨라리스를 이대로 두셔도 되겠어요?”
에다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폐하께서 나가시자마자, 황제 폐하의 집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봤어요. 관직도 없는 여인이 자꾸 단독으로 폐하를 뵙는 건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누가 보면 마치 자기가 안주인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일순간, 로제의 표정이 굳었다.
벨라리스.
전생에서도 레온의 곁에서 사근사근하게 굴며 로제를 고립시켰던 영리한 뱀.
“방금 뭐라고 했어?”
에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네? 아, 죄송합니다. 제가 건방지게…….”
“아니야. 괜찮으니까 다시 말해봐.”
로제의 입꼬리가 아주 천천히, 기이하고도 요염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안주인 같다고?”
“……네.”
로제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자, 때마침 레온의 집무실을 빠져나오는 검은 드레스의 여인이 보였다.
야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빛,
레온을 지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그 오만함.
‘그래, 안주인 자리를 탐낸다 이거지.’
예전에 그녀 때문에 울고 화냈지만, 지금은 오히려 묘한 안도감과 가학심이 스쳤다.
‘재밌네. 어디 한번 해보라지. 네 그 알량한 세치혀와 책략으로, 내 체취 없이는 숨도 못 쉬고 폭주하는 저 드래곤의 마력을 감당할 수 있는지.’
레온은 이미 로제의 마력과 몸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벨라리스가 아무리 귓가에 달콤한 정치적 조언을 속삭인다 한들, 밤이 되면 레온은 결국 불타오르는 갈증을 견디지 못하고 로제의 발치에 엎드려 헐떡이게 될 터였다.
로제는 벨라리스를 쫓아내는 대신, 그녀를 레온의 비참함을 증명할 완벽한 도구로 쓰기로 했다.
“에다.”
“네, 폐하.”
“앞으로 벨라리스가 폐하를 만나는 걸 굳이 막지 마.”
에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로제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누가 주인인지 짐승에게 똑똑히 가르쳐주려면, 가끔은 낯선 냄새를 맡게 놔두는 것도 방법이거든.”
로제의 시선이 붉은 노을빛이 쏟아지는 넓은 침대를 향했다.
“다른 여자가 아무리 꼬리를 쳐도, 결국 내 치맛자락 아래서 밤을 구걸해야만 살 수 있다는 걸…… 오늘 밤, 그의 뼈저린 육체에 각인시켜줄 테니까.”
창밖의 붉은 노을이 로제의 얼굴을 요염하게 물들였다.
거친 모래바람과 짙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드라켄 황성 외곽의 용병 투기장.“크아악-!”곰을 맨손으로 때려잡는다던 거구의 용병이 치켜든 철퇴가 허공을 가르기도 전이었다.잿빛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의 검이 벼락처럼 쏘아져 나갔다. 화려한 검기도, 대단한 초식도 없는 그저 단순한 내려치기.하지만 그 한 번의 궤적을 따라 대기가 비명처럼 찢어지더니,콰앙-!!고막을 터뜨릴 듯한 폭음과 함께 거구의 용병이 모래 바닥으로 처박혔다.방패 역할을 하던 두꺼운 강철 갑옷이 종잇장처럼 우그러져 있었고, 사내가 내리친 검 끝을 중심으로 모래 바닥이 거대한 크레이터처럼 푹 파여 사방으로 쩍쩍 갈라져 있었다.투기장을 메우고 있던 수백 명의 용병들 사이로 찬 물을 끼얹은 듯한 서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미, 미친…… 방금 저게 뭐야? 검기 같은 건 뿜어내지도 않았잖아!”“그냥 순수하게 완력으로 짓눌러 버렸다고? 저딴 괴물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심사를 보던 황궁 수비대장조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수십 년 검을 쥐어온 그의 눈에도 방금 전의 일격은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단순한 검술 훈련 따위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이치의 힘이 아니었다.흡사 거대한 비늘을 가진 마수나, 전설 속 용이 발톱을 휘두른 것만 같은 흉흉하고 이질적인 파괴력.“하, 합격! 대체 어디서 굴러먹다 온 기인인지는 몰라도 솜씨 하나는 기가 막히군. 네놈의 이름이 무엇이냐!”수비대장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사내는 무심한 손길로 검에 묻은 핏자국을 털어내며 투박한 가죽 가면 너머로 낮게 읊조렸다.“……카일.”수비대장이 합격패를 던져주며 호탕하게 웃었으나, 남자의 금빛 눈동자는 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있었다.합격패를 꽉 틀어쥔 카일, 아니 레온은 가면 너머로 드라켄의 거대한 황성을 쏘아보았다.카시안의 서쪽 별궁에 들어앉았다는 천박한 정부, 블랑 백작.국경의 술집에서 떠도는 소문은 퍽 기가 막혔다.출신도 모르는 창부 주제에 황제를 홀려 백작 작위
드라켄 제국의 무력을 지탱하는 거대한 심장, 페온 공작저의 은밀한 지하 밀실.매캐한 쇳물 냄새와 눅눅한 습기가 뒤엉킨 공기 속에서, 아이린은 탁자 위에 놓인 조잡한 양피지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고작 이것뿐인가?”서늘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심복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서부 국경으로 빼돌린 철광석의 양이 지난달보다 턱없이 부족하잖아. 내가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라고 널 살려두고 있는 줄 알아?”“공녀님. 송구하오나 최근 국경 수비대의 검문이 짐작보다 훨씬 삼엄해졌습니다. 상단의 짐마차 밑바닥을 이중으로 개조해 넘기고는 있으나,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양에 한계가…….”“핑계 대지 마!”아이린이 신경질적으로 양피지를 구겨 바닥에 내던졌다.“서연합의 미친개에게 뼈다귀를 넉넉히 던져주어야, 그놈들이 무기를 벼리고 날뛰며 카시안의 발목을 물어뜯을 것 아니야. 무기를 주조할 철이 부족하다며 벨모어 그 자가 또 불만을 표하면 네놈이 목을 내놓을 텐가?”그녀의 흉흉한 기세에 심복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당장 다음 달부터 수송량을 두 배로 늘려.”“두 배 말씀이십니까? 발각이라도 되는 날엔 공작가의 목이……!”“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아이린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밀실 안을 초조하게 거닐었다. 화려한 드레스 자락 아래로 감춰진 그녀의 속내는, 겉모습만큼이나 검고 탐욕스러웠다.처음엔 당연히 황후의 자리가 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국 제일의 권력과 부를 가진 페온 가문의 안주인 자리는 카시안의 옆자리여야 격이 맞으니까.하지만 카시안은 제 곁의 내밀한 자리를 내어주기는커녕, 출처도 모를 천박한 계집을 데려와 끼고 돌았다.그런 블랑을 밀어내기 위해서 타티아나를 동쪽 별궁에 슬쩍 밀어 넣어 판을 깔아준 것도 아이린 자신이었다.그런데 그 진흙탕 싸움을 구경하다 보니, 문득 불쾌한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천박한 계집들을 곁에 두고 이리저리 굴러먹은 사내를 굳이 내 반려로 취해야 할까?’아이린의 차
카시안이 예고도 없이 서쪽 별궁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을 때, 처소 안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얼어붙어 있었다.“폐하? 갑자기 어쩐 일로…….”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블랑이 놀란 듯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카시안의 시선은 블랑이 아닌, 그녀의 발치에 꿇어앉아 차를 내리던 에다에게 곧장 꽂혔다.탐색전의 시작.카시안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블랑. 네 시녀가 백합관의 안주인에게 아주 단단히 눈도장을 찍은 모양이군.”“……예?”“그녀가 이 아이의 손길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고집을 부려. 내 친히 이 아이를 동쪽 별궁으로 데려갈까 하는데.”순간, 블랑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카시안은 그 찰나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블랑의 속내를 파헤치려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일부러 에다를 보낸 것이 아니냐는, 소리 없는 압박이었다.그런데 그 순간, 카시안의 계산을 완벽하게 부숴버리는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폐, 폐하! 부디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찻잔을 내려놓은 에다가 다급하게 카시안의 발치로 기어가 납작 엎드린 것이다.“에다, 너 지금 무슨……!”“마님,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저도 살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에다는 블랑의 당황한 부름을 잔인하게 끊어내며, 카시안을 향해 필사적으로 호소했다.“폐하께서 동쪽 별궁의 마님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시는지 똑똑히 보았습니다!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작위뿐인 백작의 곁에서 매일같이 불안에 떠느니, 차라리 진정한 태양의 그늘 아래서 뼈를 묻고 싶습니다! 부디 제 충성을 백합관에 바치게……!”짝-!!에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허공을 가른 블랑의 손이 자비 없이 에다의 뺨을 후려쳤다.“이, 이 천박하고 배은망덕한 것!”고개가 꺾인 에다의 입술이 터져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블랑은 멈추지 않았다.독기가 바짝 오른 눈동자, 수치심과 배신감에 사시나무처럼 떠는 두 손.영락없이 믿었던 수족에게 뒤통수를 맞고 이성을 잃은 얼굴이었다.“그렇게 가고 싶었으면 내게 청을 할 것이지, 감히 누구에게……!
짙은 수증기가 맴도는 백합관의 욕실.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갔다 나왔음에도, 타티아나의 표정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아파. 살살 좀 닦아내지 못해?”“죄, 죄송합니다, 마님!”시녀가 사색이 되어 수건을 거두었지만, 타티아나의 신경질적인 짜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따라 몸을 감싸는 고급스러운 백합 오일의 향기마저 겉도는 기분이었다.전혀 개운치 않았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짓누르는 듯한 뻐근함과, 출산 이후로 묘하게 무거워진 몸의 피로가 전혀 가시질 않았다.문득 며칠 전, 제 수발을 들었던 낯선 시녀의 손길이 떠올랐다.이름조차 묻지 않았던 밑밑한 인상의 하녀였건만, 그 손끝의 압력만큼은 기가 막혔다.뭉친 근육의 결을 정확히 찾아내어 부드럽게 풀어주며, 뼛속까지 스며든 피로를 씻은 듯이 녹여내던 완벽한 마사지.그날 밤엔 징그럽게도 옥죄어 오던 압박감을 잊고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었는데.“너, 이리 와서 어깨 좀 주물러 봐.”“예? 예, 마님.”타티아나의 퉁명스러운 지시에 시녀가 긴장으로 굳은 손을 한 채 다가왔다. 고급스러운 백합 오일을 듬뿍 바른 손바닥이 타티아나의 매끄러운 어깨 위로 조심스레 안착했다.하지만 그뿐이었다. 피부 겉면만 미끄덩거리며 맴도는 손길은 그저 간지럽고 불쾌하기만 할 뿐, 잔뜩 뭉친 근육의 피로를 풀어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장난해? 파리 쫓는 것도 아니고, 손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잖아! 제대로 안 주물러?”“아, 앗, 죄, 죄송합니다, 마님! 당장 다시……!”혼비백산한 시녀가 황급히 손끝에 잔뜩 체중을 실어 꾹 눌렀다. 그러나 근육의 결을 전혀 읽지 못한 채, 그저 딱딱하게 굳은 어깻죽지를 억센 악력으로 짓뭉개버린 꼴이었다.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타티아나의 뒷목을 타고 찌릿하게 뻗쳤다.“아악! 거기가 아니잖아, 이 멍청한 것아!”“히익! 소, 송구합니다……!”“무식하게 힘만 주고 누르면 다인 줄 알아? 살이 다 으스러지겠어! 어쩜 솜씨가 이다지도 조잡하고 형편없어!”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타티
바닥에 엎드린 에다의 입술 사이로 기어코 그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화장대를 쾅, 하고 내리쳤던 요란한 마찰음이 밀실의 공기 속으로 서서히 흩어졌다.숨 막히는 적막이 내려앉았다.에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블랑의 눈동자에서, 일순간 흉흉하게 일렁이던 분노가 기조조차 없이 증발했다.천박하고 신경질적인 가짜 정부의 가면이 스르르 벗겨지고, 그 자리에 아르젠 제국 안주인의 얼굴이 내려앉았다.“……일어나.”낮고 기품 있는 음성이었다.아까 전 핏대를 세우며 악을 쓰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뼛속까지 고귀한 지배자의 억양.그 목소리에 에다가 흠칫 어깨를 떨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범벅이 된 시선 끝에, 서늘하리만치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웃고 있는 주군이 서 있었다.“아직 카시안의 눈을 속일 연기가 한참 남았건만. 기어코 내 가면을 벗겨내는구나, 에다.”“폐하……!”“쉿. 목소리 낮춰. 네가 방금 내 입으로 이곳의 룰을 말해주지 않았나. 내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블랑은 우아한 손길로 치맛자락을 털어내며 다시 소파에 깊숙이 기대어 앉았다. 카시안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불안한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판을 쥐고 흔들 포식자만이 남아 있었다.“동쪽 별궁의 문턱이 높다지? 네 얄팍한 핑계로는 두 번 다시 접근하기 어려울 터.”하지만 에다는 주눅 드는 대신,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로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르센 최고의 시녀이자, 다시는 실망 시키지않을 유능한 심복의 얼굴이었다.“아니요. 곧 그곳에서 먼저 저를 찾을 겁니다.”“먼저 널 찾는다고?”“예. 그럼 폐하, 아니, 마님께서는 그저 못 이기는 척 저를 그곳으로 보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에다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블랑이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가져갔던 백합 오일로, 아주 공을 들여 마사지를 해두고 왔거든요.”“……마사지?”“감옥 같은 성역에 갇혀 몸도 마음도 잔뜩 굳어 있던 터라, 제 손길이 아주 달게 느껴졌을 겁니다. 성심성의껏 주물러 놓고 왔지요.”그
서쪽 별궁으로 돌아왔을 때, 블랑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처소의 문을 밀고 들어섰지만, 으레 다가와 숄을 받아 들던 부산스러운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불 꺼진 난로와 차갑게 식은 찻주전자. 넓은 거실에는 사람의 온기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에다?”어깨에 두른 케이프를 벗어 소파에 던졌지만, 황급히 다가와 옷가지를 챙기는 익숙한 손길은 없었다.침실과 드레스룸까지 슬쩍 훑어보았으나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아이린을 만나고 온 터라 예민해진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미간을 좁힌 블랑이 몸을 돌려 다시 복도로 나섰다.마침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는 하급 시종 하나가 눈에 띄었다.“거기.”“예, 예? 부르셨습니까요, 마님!”“에다가 보이지 않군. 주인이 비운 처소를 내팽개치고 어딜 간 거지?”서릿발 같은 음성에 시종이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그, 그것이……. 아까 별궁을 빠져나가 동쪽 별궁 부근을 기웃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동쪽 별궁?”시종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블랑의 심기를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예, 예. 어찌나 발걸음이 바쁘던지……. 품에는 백합 오일이랑 고급 목욕 소품들을 바구니에 한가득 챙겨 들고서요.”블랑의 입매가 싸늘하게 굳었다.‘설마, 주인의 물건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알랑거리러 간 것일까?’전생의 참혹한 운명에서 자결하려던 에다를 거두어,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드라켄의 포로로 위장시켜 빼돌려 주었다.그런데 또다시 제 욕망을 채우려고 그 동쪽 별궁의 여자에게 줄을 대러 갔다?‘두 발 달린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내 목숨을 빚지고도 또다시 그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겠다는 건가.’배신감과 서늘한 분노가 가라앉기도 전, 굳게 닫혀 있던 처소의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에다가 주변을 기민하게 살피며 은밀히 스며들어왔다.소파에 기대어 앉은 블랑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어딜 쏘다니다 온 거지?”“마, 마님. 다녀오셨습니까.”“주인이 자리를 비운
탑의 꼭대기 방.육중한 문이 닫히고,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감옥의 철창 소리보다 더 무겁게 울렸다. “하아….” 엘런은 로제를 침대 기둥으로 몰아붙이며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그는 급하지 않았다. 이미 제 손아귀에 들어온 완벽한 전리품이었으니까. 그는 로제의 얇은 쉬폰 드레스 자락을 손끝으로 느릿하게 훑어 올렸다. “떨고 있군요, 황후.” 그의 손이 로제의 허리를 지나, 맨살이 드러난 어깨를 타고 뱀처럼 미끄러졌다.“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그 무능한 황제 놈은 당신의 이 뜨거운 몸을 제대로 다루는 법조차 몰랐던 모양인
별궁의 안뜰에 발을 들여놓자, 짙은 붉은 망토를 걸친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몸을 낮추었다.“드라켄의 위대한 포식자를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유들유들하고 관능적인 인상.엘런은 자신의 매력을 과시하듯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끈적한 욕망이 서려 있었다.“서쪽 연합의 제2왕자, 엘런입니다. 어제 연회는 정말 대단했죠. 아르센의 황후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다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더군요. 폐하께서도 그 맛을 보셨어야 했는데.”카시안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서연합의 놈들은 왜 하
아르센의 수도 칼텐부르크.나른한 봄볕 아래 평화롭던 도시의 공기는, 일순간 비릿한 피 냄새와 뜨거운 무쇠의 열기에 짓눌려 굳어버렸다.먼저 들린 것은 말발굽 소리가 아니었다.규칙적인 철제의 파동, 대지를 가르는 짐승의 박동이었다.“……왔다.”군중 속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성문 너머로 검붉은 그림자가 폭포수처럼 들이닥쳤다.북방의 포식자, 드라켄 제국의 황실 근위대.태양 빛을 집어삼킬 듯 번쩍이는 흑철색 갑옷들은 흙먼지 하나 없이 오만했다.300명의 기사들이 내뿜는 살기는 도시를 순식간에 질식시킬 듯 무거웠다.
패전국의 황후가 맞이한 결말은 비참했다.적국 황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사치였다.“정말 이 여자를 두고 갈 텐가, 아르센의 황제여?”로제는 고개를 들어 카시안을 보았다.피 묻은 검을 쥔 북방의 포식자.그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러나 지독히도 오만한 시선으로 로제의 남편을 조롱하고 있었다.“……제국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결단이오.”레온은 차마 로제 쪽을 보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로제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밤마다 자신의 생명력과 마력을 쥐어짜 내어 그 핏줄에 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