เข้าสู่ระบบ엘런이 사라진 뒤, 응접실에는 지독한 혐오의 침묵만이 남았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저자가 감히…….”
참모가 사색이 되어 다가왔지만, 차마 끝까지 말을 다 하지는 못했다.
카시안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엔 아까 자신을 도발하던 로제의 서늘한 눈빛이 떠올랐다.
“미친놈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역겹군.”
“그렇긴 하지만…. 얼핏 보면 난봉꾼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세를 보는 눈이 날카롭습니다.”
“알아. 그러니까 엮이지 말아야지.”
카시안은 천천히 잔을 흔들었다. 붉은 와인이 마치 피처럼 일렁였다.
참모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미 들은 말이 있으니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하긴. 구경이나 해야지.”
카시안의 목소리는 낮고 위험했다.
“인간의 지략을 운운하며 나를 짐승이라 비웃던 황후가, 저런 미친 개의 혓바닥에 어떻게 먹히는지. 혹은, 그 오만한 주둥이로 어떻게 저 자의 목을 쳐버리는지 말이야.”
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로제가 있을 황궁 본관을 향해 타올랐다.
“만약 그녀가 무너질 것 같으면…… 그때는 내가 직접 그 사냥터에 끼어들 생각이다. 저런 벌레에게 주긴 아까운 사냥감이니까.”
**
문이 닫히자마자, 로제는 더 참지 못한 듯 깊은 숨을 내쉬었다.
억눌러 둔 분노가 찬물처럼 차갑게 치밀어 올랐다.
“날 보고 애나 낳으라고? 저질스러운 작자 같으니!”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방 안의 공기가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시녀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고, 곁에 있던 에다 역시 눈을 크게 뜬 채 움직이지 못했다.
“폐하, 말씀을 조금만 낮추셔야….”
“낮출 필요 없어. 들리면 들으라지.”
로제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여긴 아르센의 황궁이야. 내가 왜 그런 무례한 인간의 눈치를 봐야 하지?”
말끝마다 날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 분노 속엔 단순히 모욕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분노는 단순한 모욕감이 아니었다.
로제는 카시안의 시선을 떠올렸다.
예를 갖춘 미소 뒤에서, 레온을 아주 날카롭게 살피던 그 눈빛.
‘그 모든 발언은 나를 겨냥한 게 아니야. 레온이 약한 황제인지, 아니면 나를 통제하는 힘이 있는지… 그 규율을 확인하려던 거였어.’
소파에 앉은 로제는 분노를 가라앉히려 숨을 들이쉬었다.
에다는 당황했지만, 로제의 표정에서 더 이상 말릴 수 없음을 깨닫고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도 많이 분노하신 듯 보였습니다.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지셔서는, 폐하를 감싸려 하셨잖아요. 기분을 좀 푸시는 게…….”
로제의 손끝이 멈칫했다.
“나를 감싸? 고작 기침이나 해대며 얼굴이나 붉히는 게?”
“그래도 폐하께서는 진심으로 황후 폐하을 아끼시는 것 같았습니다. 밤일 이야기를 하셨을 때, 당황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기쁨을 느끼시는 눈치였거든요. 분명, 사랑일 겁니다.”
“하아, 과연 그럴까…….”
입가에 비소를 건 로제가 고개를 돌리다가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전생에 자신을 카시안의 침소로 팔아넘겼던 그 비겁한 남자.
그가 지금 보여주는 그 순진한 열정과 사랑.
그것이 얼마나 얄팍하고 나약한 것인지 로제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나를 사랑한다라…….”
“네, 황제 폐하께선 마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세요. 오늘도 내내 마님의 안색만 살피셨잖아요.”
‘우리 사이에 사랑이 있었나?’
그 짧은 생각이 고요한 여운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어젯밤, 레온은 파드득 떨리는 손으로 로제를 안으며 평소보다 유독 뜨겁고 거친 숨을 토해냈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순진한 레온은 그 낯선 열기가 아내를 향해 피어난 사랑과 애욕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겠지만, 전생에서 3년이나 생명력을 쥐어짜 내며 그 마력을 받아냈던 로제는 추악한 진실을 알고 있었다.
폭주하는 드래곤의 피는 스스로를 불태우지 않기 위해, 로제가 타고난 유일한 진통제인 태양의 기운을 짐승처럼 갈구할 뿐이다.
레온 본인은 평생 모를 것이다.
아내의 살결이 닿지 않으면 숨이 막히고, 아랫배가 뻐근해질 만큼 그녀를 안고 싶어 미치겠는 그 맹렬한 충동이…… 사실은 약을 찾지 못해 죽어가는 기생충의 비참한 생존 본능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발정 난 짐승의 본능을 고결한 사랑이라 착각하며 포장하다니. 가소롭지.’
로제는 제 목에 남은 붉은 흔적을 손톱으로 차갑게 짓눌렀다.
“착각일 거야.”
냉담한 그녀의 반응을 본 에다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꼬리를 내린 강아지 같은 그 얼굴에 로제는 픽,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에다 너라는 건 잘 알지.”
또 금방 환해지는 에다의 얼굴을 본 로제는 그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너는 언제나 내 말 한마디에 상심하고 또 기뻐하는구나.’
이 차갑고 지긋지긋한 황궁에서, 대가 없이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유일한 온기.
로제는 에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멀리 카시안이 머무는 별궁이 보였다.
‘카시안……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의 눈빛은 차갑고 잔혹했지만, 딱 한 번. 자신이 인간의 지략을 운운하며 도발했을 때 멈칫하던 그 기류가 있었다.
그 작은 반응이 이상하게 머릿속에 끈적하게 남아있었다.
‘그 전쟁귀가……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나? 하긴 놀랐을 거야. 순종적인 전리품일 줄 알았던 내가 그렇게 발톱을 세울 거라곤 예상 못 했을 테니까.’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저 두 수컷을 완벽하게 장기말로 쓰려면……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그 질문은 꽤나 위험한 도박이었다.
레온의 마력을 키워 카시안의 목을 물어뜯게 할 것인가, 아니면 카시안의 정복욕을 이용해 레온과 이 지긋지긋한 아르센을 통째로 무너뜨릴 것인가.
어느 쪽이든 완벽한 위자료를 챙겨 떠나기엔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폐하, 그런데 벨라리스를 이대로 두셔도 되겠어요?”
에다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폐하께서 나가시자마자, 황제 폐하의 집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봤어요. 관직도 없는 여인이 자꾸 단독으로 폐하를 뵙는 건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누가 보면 마치 자기가 안주인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일순간, 로제의 표정이 굳었다.
벨라리스.
전생에서도 레온의 곁에서 사근사근하게 굴며 로제를 고립시켰던 영리한 뱀.
“방금 뭐라고 했어?”
에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네? 아, 죄송합니다. 제가 건방지게…….”
“아니야. 괜찮으니까 다시 말해봐.”
로제의 입꼬리가 아주 천천히, 기이하고도 요염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안주인 같다고?”
“……네.”
로제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자, 때마침 레온의 집무실을 빠져나오는 검은 드레스의 여인이 보였다.
야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빛,
레온을 지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그 오만함.
‘그래, 안주인 자리를 탐낸다 이거지.’
예전에 그녀 때문에 울고 화냈지만, 지금은 오히려 묘한 안도감과 가학심이 스쳤다.
‘재밌네. 어디 한번 해보라지. 네 그 알량한 세치혀와 책략으로, 내 체취 없이는 숨도 못 쉬고 폭주하는 저 드래곤의 마력을 감당할 수 있는지.’
레온은 이미 로제의 마력과 몸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벨라리스가 아무리 귓가에 달콤한 정치적 조언을 속삭인다 한들, 밤이 되면 레온은 결국 불타오르는 갈증을 견디지 못하고 로제의 발치에 엎드려 헐떡이게 될 터였다.
로제는 벨라리스를 쫓아내는 대신, 그녀를 레온의 비참함을 증명할 완벽한 도구로 쓰기로 했다.
“에다.”
“네, 폐하.”
“앞으로 벨라리스가 폐하를 만나는 걸 굳이 막지 마.”
에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로제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누가 주인인지 짐승에게 똑똑히 가르쳐주려면, 가끔은 낯선 냄새를 맡게 놔두는 것도 방법이거든.”
로제의 시선이 붉은 노을빛이 쏟아지는 넓은 침대를 향했다.
“다른 여자가 아무리 꼬리를 쳐도, 결국 내 치맛자락 아래서 밤을 구걸해야만 살 수 있다는 걸…… 오늘 밤, 그의 뼈저린 육체에 각인시켜줄 테니까.”
창밖의 붉은 노을이 로제의 얼굴을 요염하게 물들였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지난 열 달간 두 사내의 피를 말렸던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만천하에 밝혀질 터였다.숨이 턱 막히는 정적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침실 문 너머로, 세상을 깨우는 듯한 우렁차고 맑은 아기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응애-! 으아아앙-!”울음소리가 들리자마자 카시안과 레온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문을 박차고 침실 안으로 뛰어들었다.“로제!”“로제, 괜찮아? 정신이 들어?”두 사내는 약속이라도 한 듯 침대 머리맡으로 달려가, 땀에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로제의 양손을 하나씩 거머쥐었다.창백해진 얼굴로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본 로제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두 황제의 시선이, 그제야 비단 강보에 싸인 아기를 안고 다가오는 에다에게로 동시에 꽂혔다.꿀꺽.대륙을 호령하는 두 절대자의 목울대가 동시에 무겁게 오르내렸다.“여왕 폐하를 쏙 빼닮은 건강한 공주님이십니다!”에다의 감격에 찬 목소리와 함께 강보가 살짝 젖혀졌다.‘검은색인가!’‘황금빛인가!’두 사내가 숨을 멈춘 채 강보 속을 들여다보았다.그러나 아기의 자그마한 얼굴을 확인한 순간, 카시안과 레온의 표정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돌처럼 굳어졌다.아기의 보송보송한 배냇머리는 카시안의 칠흑 같은 검은빛도, 레온의 찬란한 황금빛도 아니었다.설상가상으로 울음을 그친 아기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눈을 깜빡였는데, 그 맑은 눈동자마저 카시안의 핏빛 적안도, 레온의 날카로운 금안도 아니었다.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심지어 조그맣게 오므린 입술과 눈매의 모양까지 거울로 찍어낸 듯 오직 로제 한 사람만을 완벽하게 빼닮은 ‘로제의 축소판’이 그곳에 누워 있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왜 내 금빛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거야? 아니, 카시안 네놈의 시커먼 색도 전혀 없잖아!”당혹감에 휩싸인 두 황제가 멍하니 아기와 로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그런 두 사내의 황망한 표
손바닥을 스치는 카시안의 뜨거운 입술 위로 시커먼 집착이 번뜩였다.당장이라도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와 그녀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였으나, 로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그의 턱을 손끝으로 가볍게 밀어냈다.“말은 바로 해야죠, 카시안. 내 침실을 차지하는 게 아니라, 내가 허락할 때만 이 방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거예요.”차갑고도 우아한 목소리가 카시안의 정수리로 내려앉았다.“먼저 그 역겨운 피비린내부터 씻고, 숲 밖의 드라켄 군대를 물리는 황제의 칙서부터 가져오세요.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게 굴거나 아이를 놀라게 한다면…… 그땐 내 침실은커녕 평생 내 얼굴조차 보지 못하게 될 줄 알아요.”순간, 짐승처럼 끓어오르던 카시안의 욕망이 찬물을 끼얹은 듯 우뚝 멈추었다.이전의 그였다면 감히 자신을 밀어내는 여인을 힘으로 찍어 눌렀을 터였다.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로제는, 까딱 잘못 건드렸다가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영원히 제 손아귀에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절대적인 갑(甲)이었다.그날 밤, 카시안은 로제의 명대로 몸에 말라붙은 마수의 피를 깨끗이 씻어낸 뒤, 타르타스의 독립을 인정하고 독점 무역로를 개방하는 칙서를 작성해 그녀의 발치에 바쳤다.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륙 최강의 제국을 굴복시킨 로제의 승리는 완벽했다.레녹은 드라켄과의 무역로를 통해 막대한 부를 쓸어 담았고, 과거 서연합의 포로수용소에서 구출된 아르센의 유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자신들의 유일한 구원자인 로제의 친위대가 되어 왕궁을 철통같이 호위했다.그리고 밤마다 로제의 침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제국의 폭군 카시안이었다.“……속이 또 메스꺼운 건가? 가만히 있어 봐.”깊은 밤, 카시안은 침대 위에조차 감히 올라가지 못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로제의 아랫배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전장을 휩쓸던 파괴적인 흑기 대신, 행여나 태아에게 해가 될까 봐 수천 번을 정제해 낸 따뜻한 마력이 그녀의 자궁을 부드럽게 감싸며 입덧을 달래주었다.드라
부서진 문짝의 나무 파편이 바닥을 나뒹구는 침실 안으로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금방이라도 방 안의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 날뛰던 카시안의 흑기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어 갔다.“……아이?”카시안의 입술에서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피비린내를 뚝뚝 흘리며 서 있던 그의 시선이 로제의 새하얀 손끝이 감싸 쥔 아랫배에 못 박힌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아이를 가졌다고? 지금 저 뱃속에……?’순간 카시안의 머릿속으로 지난 수 주간 드라켄의 황궁 침소에서 그녀와 얽혀 보냈던 수많은 밤들이 폭풍처럼 스쳐 지나갔다.그토록 집요하게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탐하고 제 흔적을 새겨 넣었던 밤들이었다. 시기상으로 따져보아도 제 씨앗이 뿌리를 내렸을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았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침대 곁을 지키고 선 레온의 존재가 시야에 걸리자 카시안의 눈동자가 다시금 사납게 일그러졌다.“……누구의 아이지?”카시안이 검자루를 으스러져라 고쳐 쥐며 한 걸음 다가섰다.“내 침소에서 잉태한 내 핏줄인가, 아니면…… 내가 없는 사이에 저놈과 뒹굴어 만든 씨앗인가!”다시금 꿈틀거리며 피어오르는 카시안의 살기에, 옆으로 물러서 있던 레온이 반사적으로 검자루에 손을 얹으며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그러나 레온이 움직이기도 전에, 로제가 먼저 차갑게 입을 열었다.“그 검부터 당장 치워요, 카시안.”로제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카시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방금 의원이 다녀갔어요. 태기가 막 자리 잡기 시작한 극초기라, 작은 충격에도 아이가 잘못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만약 당신이 이 방에서 날뛰다가 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때는 어쩔 건가요? 당신의 손으로 직접 당신의 첫 후계자를 죽인 셈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 대가를 감당할 수 있겠어요?”‘당신의 첫 후계자’라는 단어가 떨어지는 순간, 카시안의 호흡이 컥 막혔다.단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자신의 아이일 수 있다면, 그 앞에서 칼을 휘두르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
석양이 핏빛으로 물들어 가는 타르타스의 거대한 성문 앞.검은 안개 숲을 단신으로 뚫고 나온 카시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수들의 피를 뒤집어쓴 그의 행색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수라(修羅) 그 자체였다.성벽 위를 지키던 용병들이 그 살벌한 기세에 질려 일제히 창끝을 겨누었다. 카시안이 성문을 단숨에 박살 내기 위해 검에 시커먼 흑기를 끌어올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끼이이익- 쿵!굳게 닫혀 있던 육중한 철제 성문이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듯 스스로 활짝 열렸다.성문 안쪽의 광장에는 수백 명의 무장한 용병들이 도열해 있었으나, 그 누구도 카시안에게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일제히 좌우로 물러서며, 도시 한복판에 우뚝 솟은 거대한 중앙 요새까지 곧게 뻗은 길을 터주었다.‘……레온, 그가 이미 이 도시 전체를 제 손아귀에 넣었다 이건가.’숲의 마수들을 굴복시켰던 그 거대한 드래곤의 위압감으로 이 무법지대의 패거리들을 찍어 누른 모양이었다.거친 숨을 고르며 걸음을 옮기던 카시안의 머릿속에, 그제야 의문 하나가 피어올랐다.‘아르센이 무너지던 날까지만 해도, 그놈은 곱상한 껍데기만 내세우던 온실 속의 나약한 황제에 불과했어. 대체 어떻게 그토록 흉포한 고대의 힘을 깨운 거지?’빼앗긴 여자를 되찾겠다는 지독한 집념이 그 유약하던 사내를 한계 너머로 밀어붙여 각성하게 만든 것일까.‘설마 블랑…… 너는 처음부터 그놈을 각성시키기 위해 이 모든 판을 짰던 건가?’자신의 침소에서 달콤하게 미소 지으며 순종하던 모든 순간마저 오직 옛 남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기만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카시안의 심장이 다시금 시커먼 배신감으로 뒤틀렸다.그러나 그가 살기를 삼키며 중앙 요새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내의 얼굴을 본 순간 카시안의 미간이 사납게 좁혀졌다. 분명 드라켄의 수도에 있어야 할 자신의 신하, 레녹이었다.“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시안 폐하.”“……레녹,
무거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낯선 천장의 화려한 문양이 흐릿한 시야에 들어오고, 곧이어 축 늘어진 손등 위로 뚝뚝 떨어지는 뜨거운 물기가 느껴졌다.로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침대 맡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레온의 황금빛 정수리가 보였다.“……아직도 안 떠나고 여기 있었네요.”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은 차가운 한마디에, 레온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로제! 정신이 들어? 몸은…… 어디 아픈 데는 없어?”핏기 없이 창백해진 얼굴에 벌겋게 충혈된 금빛 눈동자가 물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로제는 대답 대신 그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손을 매정하게 빼냈다.“아르센의 황좌를 되찾으러 간다더니, 왜 아직도 남의 침실에서 이러고 있는 거죠?”“내가 잘못했어, 로제. 아까 내가 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 내가 질투에 눈이 멀어서 미쳤던 거야.”레온이 다급하게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애원했다.“너한테 그런 모진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어. 제발 화 풀고 안정을 취해야 해. 지금 네 몸이…….”어쩔 줄 몰라 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레온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로제의 아랫배로 향했다.그 시선을 따라가던 로제는, 정신을 잃기 직전 아랫배 깊은 곳을 훑고 지나갔던 낯설고도 묵직한 통증을 떠올렸다.로제가 자신의 배 위에 천천히 손을 얹었다.“나…… 왜 쓰러진 거죠? 의원이 다녀갔나요?”레온이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아이가…… 생겼대. 태기가 막 자리 잡기 시작한 극초기라고 했어.”순간, 로제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찔했다.그녀가 눈을 감고 내면에 집중하자, 몸 안을 흐르던 따뜻한 태양의 기운이 자궁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작은 생명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 그 여린 생명력의 중심에서 맥동하는 고유한 마력의 빛깔을 확인한 순간, 로제는 아이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렇군. 이 아이의 아버지는…….’심장이 기묘하게 뛰었으나, 로제는
같은 시각, 타르타스의 국경을 가로막은 검은 안개 숲 초입.콰아아앙-! 크아아아악!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에서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사, 살려줘! 괴물이다!”“대열을 유지해라! 창병대, 앞으로…… 크아악!”기세등등하게 숲으로 진격했던 드라켄의 선봉대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도륙 당하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그림자 늑대들이 병사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었고, 집채만 한 갑피 괴수가 내뿜는 산성 독기에 중장갑 기사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녹아내렸다.단순히 영역을 침범당해 날뛰는 야생 마수들이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지휘관의 통제를 받는 정예 군단처럼, 마수들은 드라켄 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조직적으로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서걱-! 푸화아악!그 아비규환의 한복판에서, 카시안이 시커먼 심연의 흑기를 휘감은 검으로 달려드는 키메라의 목을 단숨에 베어 넘겼다.시뻘건 마수의 피를 뒤집어쓴 카시안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는 마수들의 몸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낯익은 황금빛 마력의 잔재를 느끼고는 이를 갈았다.‘레온……! 감히 드래곤의 힘으로 숲의 마수들을 복속시켜 내 앞길을 막아?’눈앞의 괴물들이 움직이는 방식은 명백히 타르타스로 향하는 길을 봉쇄하기 위한 방어 진형이었다. 즉, 이 숲 너머에 로제와 레온이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도 했다.“폐, 폐하! 더 이상의 진격은 무리입니다!”피투성이가 된 부관이 말을 몰아 카시안의 곁으로 다가오며 절규했다.“안개 때문에 방향조차 잡을 수 없는데, 숲 전체의 마수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본대까지 전멸합니다! 일단 숲 밖으로 퇴각해 전열을 재정비하셔야……!”부관의 절규에 카시안의 붉게 충혈되었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그의 시선이 안개 속에서 마수들에게 처참하게 물어뜯기면서도, 황제의 명을 받들기 위해 끝까지 사투를 벌이는 병사들에게로 향했다. 수년간 전장에서 자신과 생사를 함께해 온 드라켄의
탑의 꼭대기 방.육중한 문이 닫히고,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감옥의 철창 소리보다 더 무겁게 울렸다. “하아….” 엘런은 로제를 침대 기둥으로 몰아붙이며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그는 급하지 않았다. 이미 제 손아귀에 들어온 완벽한 전리품이었으니까. 그는 로제의 얇은 쉬폰 드레스 자락을 손끝으로 느릿하게 훑어 올렸다. “떨고 있군요, 황후.” 그의 손이 로제의 허리를 지나, 맨살이 드러난 어깨를 타고 뱀처럼 미끄러졌다.“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그 무능한 황제 놈은 당신의 이 뜨거운 몸을 제대로 다루는 법조차 몰랐던 모양인
별궁의 안뜰에 발을 들여놓자, 짙은 붉은 망토를 걸친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몸을 낮추었다.“드라켄의 위대한 포식자를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유들유들하고 관능적인 인상.엘런은 자신의 매력을 과시하듯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끈적한 욕망이 서려 있었다.“서쪽 연합의 제2왕자, 엘런입니다. 어제 연회는 정말 대단했죠. 아르센의 황후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다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더군요. 폐하께서도 그 맛을 보셨어야 했는데.”카시안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서연합의 놈들은 왜 하
아르센의 수도 칼텐부르크.나른한 봄볕 아래 평화롭던 도시의 공기는, 일순간 비릿한 피 냄새와 뜨거운 무쇠의 열기에 짓눌려 굳어버렸다.먼저 들린 것은 말발굽 소리가 아니었다.규칙적인 철제의 파동, 대지를 가르는 짐승의 박동이었다.“……왔다.”군중 속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성문 너머로 검붉은 그림자가 폭포수처럼 들이닥쳤다.북방의 포식자, 드라켄 제국의 황실 근위대.태양 빛을 집어삼킬 듯 번쩍이는 흑철색 갑옷들은 흙먼지 하나 없이 오만했다.300명의 기사들이 내뿜는 살기는 도시를 순식간에 질식시킬 듯 무거웠다.
패전국의 황후가 맞이한 결말은 비참했다.적국 황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사치였다.“정말 이 여자를 두고 갈 텐가, 아르센의 황제여?”로제는 고개를 들어 카시안을 보았다.피 묻은 검을 쥔 북방의 포식자.그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러나 지독히도 오만한 시선으로 로제의 남편을 조롱하고 있었다.“……제국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결단이오.”레온은 차마 로제 쪽을 보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로제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밤마다 자신의 생명력과 마력을 쥐어짜 내어 그 핏줄에 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