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엘런이 사라진 뒤, 응접실에는 지독한 혐오의 침묵만이 남았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저자가 감히…….”
참모가 사색이 되어 다가왔지만, 차마 끝까지 말을 다 하지는 못했다.
카시안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엔 아까 자신을 도발하던 로제의 서늘한 눈빛이 떠올랐다.
“미친놈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역겹군.”
“그렇긴 하지만…. 얼핏 보면 난봉꾼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세를 보는 눈이 날카롭습니다.”
“알아. 그러니까 엮이지 말아야지.”
카시안은 천천히 잔을 흔들었다. 붉은 와인이 마치 피처럼 일렁였다.
참모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미 들은 말이 있으니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하긴. 구경이나 해야지.”
카시안의 목소리는 낮고 위험했다.
“인간의 지략을 운운하며 나를 짐승이라 비웃던 황후가, 저런 미친 개의 혓바닥에 어떻게 먹히는지. 혹은, 그 오만한 주둥이로 어떻게 저 자의 목을 쳐버리는지 말이야.”
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로제가 있을 황궁 본관을 향해 타올랐다.
“만약 그녀가 무너질 것 같으면…… 그때는 내가 직접 그 사냥터에 끼어들 생각이다. 저런 벌레에게 주긴 아까운 사냥감이니까.”
**
문이 닫히자마자, 로제는 더 참지 못한 듯 깊은 숨을 내쉬었다.
억눌러 둔 분노가 찬물처럼 차갑게 치밀어 올랐다.
“날 보고 애나 낳으라고? 저질스러운 작자 같으니!”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방 안의 공기가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시녀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고, 곁에 있던 에다 역시 눈을 크게 뜬 채 움직이지 못했다.
“폐하, 말씀을 조금만 낮추셔야….”
“낮출 필요 없어. 들리면 들으라지.”
로제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여긴 아르센의 황궁이야. 내가 왜 그런 무례한 인간의 눈치를 봐야 하지?”
말끝마다 날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 분노 속엔 단순히 모욕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분노는 단순한 모욕감이 아니었다.
로제는 카시안의 시선을 떠올렸다.
예를 갖춘 미소 뒤에서, 레온을 아주 날카롭게 살피던 그 눈빛.
‘그 모든 발언은 나를 겨냥한 게 아니야. 레온이 약한 황제인지, 아니면 나를 통제하는 힘이 있는지… 그 규율을 확인하려던 거였어.’
소파에 앉은 로제는 분노를 가라앉히려 숨을 들이쉬었다.
에다는 당황했지만, 로제의 표정에서 더 이상 말릴 수 없음을 깨닫고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도 많이 분노하신 듯 보였습니다.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지셔서는, 폐하를 감싸려 하셨잖아요. 기분을 좀 푸시는 게…….”
로제의 손끝이 멈칫했다.
“나를 감싸? 고작 기침이나 해대며 얼굴이나 붉히는 게?”
“그래도 폐하께서는 진심으로 황후 폐하을 아끼시는 것 같았습니다. 밤일 이야기를 하셨을 때, 당황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기쁨을 느끼시는 눈치였거든요. 분명, 사랑일 겁니다.”
“하아, 과연 그럴까…….”
입가에 비소를 건 로제가 고개를 돌리다가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전생에 자신을 카시안의 침소로 팔아넘겼던 그 비겁한 남자.
그가 지금 보여주는 그 순진한 열정과 사랑.
그것이 얼마나 얄팍하고 나약한 것인지 로제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나를 사랑한다라…….”
“네, 황제 폐하께선 마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세요. 오늘도 내내 마님의 안색만 살피셨잖아요.”
‘우리 사이에 사랑이 있었나?’
그 짧은 생각이 고요한 여운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어젯밤, 레온은 파드득 떨리는 손으로 로제를 안으며 평소보다 유독 뜨겁고 거친 숨을 토해냈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순진한 레온은 그 낯선 열기가 아내를 향해 피어난 사랑과 애욕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겠지만, 전생에서 3년이나 생명력을 쥐어짜 내며 그 마력을 받아냈던 로제는 추악한 진실을 알고 있었다.
폭주하는 드래곤의 피는 스스로를 불태우지 않기 위해, 로제가 타고난 유일한 진통제인 태양의 기운을 짐승처럼 갈구할 뿐이다.
레온 본인은 평생 모를 것이다.
아내의 살결이 닿지 않으면 숨이 막히고, 아랫배가 뻐근해질 만큼 그녀를 안고 싶어 미치겠는 그 맹렬한 충동이…… 사실은 약을 찾지 못해 죽어가는 기생충의 비참한 생존 본능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발정 난 짐승의 본능을 고결한 사랑이라 착각하며 포장하다니. 가소롭지.’
로제는 제 목에 남은 붉은 흔적을 손톱으로 차갑게 짓눌렀다.
“착각일 거야.”
냉담한 그녀의 반응을 본 에다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꼬리를 내린 강아지 같은 그 얼굴에 로제는 픽,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에다 너라는 건 잘 알지.”
또 금방 환해지는 에다의 얼굴을 본 로제는 그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너는 언제나 내 말 한마디에 상심하고 또 기뻐하는구나.’
이 차갑고 지긋지긋한 황궁에서, 대가 없이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유일한 온기.
로제는 에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멀리 카시안이 머무는 별궁이 보였다.
‘카시안……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의 눈빛은 차갑고 잔혹했지만, 딱 한 번. 자신이 인간의 지략을 운운하며 도발했을 때 멈칫하던 그 기류가 있었다.
그 작은 반응이 이상하게 머릿속에 끈적하게 남아있었다.
‘그 전쟁귀가……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나? 하긴 놀랐을 거야. 순종적인 전리품일 줄 알았던 내가 그렇게 발톱을 세울 거라곤 예상 못 했을 테니까.’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저 두 수컷을 완벽하게 장기말로 쓰려면……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그 질문은 꽤나 위험한 도박이었다.
레온의 마력을 키워 카시안의 목을 물어뜯게 할 것인가, 아니면 카시안의 정복욕을 이용해 레온과 이 지긋지긋한 아르센을 통째로 무너뜨릴 것인가.
어느 쪽이든 완벽한 위자료를 챙겨 떠나기엔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폐하, 그런데 벨라리스를 이대로 두셔도 되겠어요?”
에다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폐하께서 나가시자마자, 황제 폐하의 집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봤어요. 관직도 없는 여인이 자꾸 단독으로 폐하를 뵙는 건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누가 보면 마치 자기가 안주인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일순간, 로제의 표정이 굳었다.
벨라리스.
전생에서도 레온의 곁에서 사근사근하게 굴며 로제를 고립시켰던 영리한 뱀.
“방금 뭐라고 했어?”
에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네? 아, 죄송합니다. 제가 건방지게…….”
“아니야. 괜찮으니까 다시 말해봐.”
로제의 입꼬리가 아주 천천히, 기이하고도 요염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안주인 같다고?”
“……네.”
로제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자, 때마침 레온의 집무실을 빠져나오는 검은 드레스의 여인이 보였다.
야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빛,
레온을 지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그 오만함.
‘그래, 안주인 자리를 탐낸다 이거지.’
예전에 그녀 때문에 울고 화냈지만, 지금은 오히려 묘한 안도감과 가학심이 스쳤다.
‘재밌네. 어디 한번 해보라지. 네 그 알량한 세치혀와 책략으로, 내 체취 없이는 숨도 못 쉬고 폭주하는 저 드래곤의 마력을 감당할 수 있는지.’
레온은 이미 로제의 마력과 몸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벨라리스가 아무리 귓가에 달콤한 정치적 조언을 속삭인다 한들, 밤이 되면 레온은 결국 불타오르는 갈증을 견디지 못하고 로제의 발치에 엎드려 헐떡이게 될 터였다.
로제는 벨라리스를 쫓아내는 대신, 그녀를 레온의 비참함을 증명할 완벽한 도구로 쓰기로 했다.
“에다.”
“네, 폐하.”
“앞으로 벨라리스가 폐하를 만나는 걸 굳이 막지 마.”
에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로제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누가 주인인지 짐승에게 똑똑히 가르쳐주려면, 가끔은 낯선 냄새를 맡게 놔두는 것도 방법이거든.”
로제의 시선이 붉은 노을빛이 쏟아지는 넓은 침대를 향했다.
“다른 여자가 아무리 꼬리를 쳐도, 결국 내 치맛자락 아래서 밤을 구걸해야만 살 수 있다는 걸…… 오늘 밤, 그의 뼈저린 육체에 각인시켜줄 테니까.”
창밖의 붉은 노을이 로제의 얼굴을 요염하게 물들였다.
길게 기른 손톱이 블랑의 하얀 뺨을 자비 없이 긁고 지나갔다.[짝-!]하는 날카로운 마찰음 뒤로, 하얀 턱선을 타고 붉은 핏방울이 툭 떨어졌다.“어머!”“세, 세상에…!”블랑은 살짝 비틀거렸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피가 배어 나오는 뺨을 감싸 쥐며, 그녀는 비명 대신 속으로 서늘하게 웃었다.‘완벽하게 걸려들었어.’아이린은 단순히 기분 나쁜 여자의 뺨을 때린 게 아니다.명백히, 황제가 총애를 내린 여인에게 피를 본 것이다.놀란 한 귀부인이 사색이 되어 아이린을 말리려 손을 뻗었지만, 이성을 잃은 공녀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그 요망한 혀를 당장 뽑아버리겠어!”아이린이 다시금 독기 어린 손을 쳐드는 순간이었다.“……뭣들 하는 거지.”마치 지옥 밑바닥에서 긁어 올린 듯한, 저음.굳게 닫혀 있던 응접실 문이 거칠게 열려 있었고, 그 너머에 검은 제복 차림의 카시안이 서 있었다.그의 붉은 눈동자가 블랑의 뺨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에 닿은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숨통을 조일 듯 무겁게 얼어붙었다.“……폐하.” 황제의 서슬 퍼런 등장에 귀부인들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지만, 아이린만은 달랐다.그녀는 순간 움찔했으나 이내 꼿꼿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페온 공작가의 여식이 고작 하룻밤 노리개의 뺨을 친 일로 황제에게 기죽을 이유는 없었다.카시안은 얼어붙은 귀부인들 사이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블랑의 앞을 막아섰다. 커다란 손이 블랑의 턱을 조심스럽게 쥐어 올렸다.엄지손가락으로 뺨의 핏방울을 스윽 훔쳐낸 그의 입매가, 잔인할 정도로 서늘하게 비틀렸다.“……감히.”그의 적안이 아이린을 향해 내리꽂혔다.“허락 없이, 내 것에 손을 대?”그 살벌한 경고에도 아이린은 당당하게 마주 섰다. 오히려 카시안이 자신보다 저 천한 여자를 감싸고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듯 쏘아붙였다.“폐하, 고작 하룻밤 품으신 계집입니다. 저 천한 것이 감히 우리 페온가를 모욕하고 반역 운운하는 망발을 지껄이지 않습니까.”아이린은 핏자국이 남은 자신의 손톱을
온 종일 황궁 곳곳을 쏘다닌 에다가 은밀히 침실로 들어왔다. 그녀의 품에는 무겁게 챙겨갔던 금화 주머니 대신, 꼬깃꼬깃한 메모장이 들려 있었다.“백작님… 말씀하신 대로 알아왔습니다.”“수고했어. 쓸 만한 게 있던가?”에다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살폈다.“그게… 레녹 후작이 현재 의회에서 페온 공작가의 철광석 채굴권을 황실 소유로 강제 귀속시키려는 법안을 은밀히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그 문제로 공작과 멱살잡이 직전까지 갔다고….”블랑의 은회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그래서였군.’어제 그가 굳이 페온 가문을 상징하는 에메랄드 브로치를 남기고 간 이유.내게 뒷배가 되어주겠다는 달콤한 말 이면에는, 나를 황제의 방패막이 겸 페온가의 채굴권을 터뜨리기 위한 가장 자극적인 폭탄으로 던져 넣을 심산이었던 거다.‘명목상으로는 황실 귀속이겠지만, 실질적인 관리와 예산 집행은 의회가 하겠지. 결국 황제의 눈을 가리고 그 막대한 돈줄을 제 주머니에 넣겠다는 소리군. 과연, 의회를 장악한 머리에서 나올 법한 발상이야.’블랑은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보석함을 다시 꺼내 열었다.“독이 든 미끼라면… 기꺼이 삼켜주지. 판을 내 쪽으로 엎어버리면 그만이니까.”“백작님…?”“초대장을 써야겠어. 지금 당장.”블랑이 건넨, 아직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초대장들을 받아 든 에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것들을 봉투에 넣으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백작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소문이… 너무 안 좋아요.”레녹 후작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은밀히 돌아다니던 에다의 귓가에는 지독한 조롱들이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들었어? 하루 만에 폐하의 침소에서 쫓겨났다며. 꼴좋지.][근본도 없는 계집이 폐하를 만족시킬 수 있을 리가 있나.][나는 저 백작이 3일 안에 별궁에서 쫓겨난다에 10골드를 걸지. 킬킬.]구석에 모인 시녀들의 비웃음과, 호사 취미를 가진 귀족들의 저급한 내기판. 궁 안에는 이미 블랑이 소박을 맞았다는 확신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그런
레녹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선을 넘지 않던 그가, 어느새 블랑의 숨결이 닿을 만큼 지척까지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얇은 레이스 실내복 위로, 그의 나른하면서도 짙은 시선이 적나라하게 내려앉았다.“질투는 가장 확실한 정치적 도구입니다.”레녹이 긴 손가락을 뻗어, 블랑의 쇄골에 남은 카시안의 붉은 잇자국을 허공에서 스치듯 가리켰다. 직접 닿지는 않았으나, 소름이 돋을 만큼 농밀하고 아찔한 간격이었다.“그 미친 황제께서, 당신을 다른 사내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그 순간 아이린 공녀도, 페온가도, 그 어떤 귀족도 감히 당신에게 이빨을 드러내지 못할 테니까.”“……질투라.”블랑이 헛웃음을 삼키며 되물었다.“그래서 폐하의 마음을 쥐고 흔들어라… 후작님의 입지를 위해서? 하지만 제가 얻는 건 뭐죠?”그녀는 팔짱을 끼며 레녹을 똑바로 응시했다.“폐하의 총애는 뜬구름 같은 겁니다. 제가 후작님을 위해 춤을 추다가, 폐하가 질려서 저를 버리시면요? 그때는 후작님도 저를 버리시겠죠.”“바로 그 지점입니다.”레녹이 기다렸다는 듯 한 걸음 더 다가왔습니다.안경 너머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총애는 짧고, 권력은 깁니다. 백작님은 지금 뿌리 없는 꽃입니다. 황제의 변덕이 끝나면 시들어 죽을 운명이죠.”
서쪽 별궁.황제가 블랑에게 하사한 거처는 지나치게 화려해서 오히려 서늘했다.높은 천장에는 화려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고, 바닥은 걸을 때마다 차가운 냉기가 올라오는 최고급 대리석이었다.역대 황비들이 별채로 썼던, 그러나 지금은 주인을 잃고 비어있던 거대한 새장.그 적막을 깨는 것은 옷감이 스치락거리는 소리뿐이었다.“……저기, 백작님.”에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그녀는 카시안이 보낸 시녀들이 가져온 짐을 정리하다 말고, 힐끗 블랑의 눈치를 살폈다.“찻물을 좀… 올릴까요? 안색이 창백하셔서….”그것은 단순한 시중이 아니었다.어떻게든 말을 붙여보려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담은 물음이었다.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제발 나를 알아봐 달라고. 우리가 아르센에서 나눴던 그 온기를 기억해 달라고.하지만 블랑은 창밖을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필요 없어.”돌아온 대답은 칼로 자른 듯 차가웠다.“짐 정리가 끝났으면 나가 봐. 피곤하니까.”블랑은 에다 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냉정함.그것은 블랑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단 한 명, 아니 쥐새끼라도 눈치채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야.’계획대로 움직이려면 철저히 남이 되어야 했다.“아…… 네…….”에다의 어깨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짐을 정리했다.짐짓 분주하게 손을 놀렸지만, 시선은 자꾸만 창가에 선 블랑의 옆모습에 머물렀다.‘정말…… 너무 닮으셨어.’아르센의 붉은 장미 같았던 나의 황후님.자신을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드라켄으로 빼돌려 주셨던 그 고귀한 분.하지만.에다의 시선이 블랑의 옷차림에 닿았다.속살이 훤히 비치는 얇은 레이스 실내복, 목덜미와 쇄골에 붉게 남은 정사의 흔적들.그리고 무엇보다 저 서릿발 같은 눈빛.‘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에다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스스로를 타일렀다.‘황후 폐하께서는 저런… 천박한 옷을 입으실 분이 아니야.’고귀하고 긍지 높던 나의 주인님이다.황제
새벽 회의가 끝나고, 레녹은 서류를 정리하며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황궁은 아직 차갑고 고요했다. 새벽 안개가 걷히기도 전에 들리는 하녀들의 분주한 속삭임만이 이른 아침을 채우고 있었다.그는 늘 그렇듯 나른하게 벽에 기대어 귀를 기울였다. 이 하찮은 소음 속엔 언제나 금이 될 만한 정보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들었어? 뒷방 아니, 그 백작님 말이야….”“어젯밤에 황제 폐하의 침실에서… 쫓겨났대.”“진짜? 작위까지 받았는데 무슨 일이지?”“아무튼, 아침도 밝기 전에 시녀 둘이 데리고 나가는 걸 봤다더라. 폐하께서 엄청나게 화를 내셨나 봐.”‘쫓겨났다?’레녹의 창백한 얼굴 위로, 서늘한 눈동자가 느리게 가라앉았다.웃지도 않았고, 놀라지도 않았다.그저 완벽해야 할 수학 공식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발견한 학자처럼 미묘한 표정일 뿐이었다.“하루 만에?”그가 긴 손가락으로 은테 안경을 천천히 밀어 올리며 낮게 중얼거렸다.백작위 서임, 북부의 노른자위 로트 영지 하사.전례 없는 파격으로 권력을 쥐여주고는, 다음 날 새벽에 안지도 않고 내쫓았다?논리가 맞지 않았다.그가 아는 황제 카시안은 감정에 휘둘리거나 변덕을 부리는 인간이 아니다. 전리품을 취하는 데 거칠 것이 없는 짐승이다.입력값은 최고의 대우인데, 결과값은 축출이다.이 방정식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다.‘단순한 변심이 아니야.’레녹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그의 비상한 머릿속에서 수많은 경우의 수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황제가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물어뜯지 않은 이유.과거, 카시안의 이성이 흔들렸던 유일한 예외는 딱 한 번 있었다.지금은 국경 너머로 사라져버린, 그의 첫사랑.“……그 폭군이, 스스로 이성을 쥐어짜 내서 참았다는 소리군.”레녹의 얇은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소문처럼 블랑이 황제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황제가 제 욕정조차 통제하지 못할까 봐 스스로를 격리한 것이다.“과연.”레녹은 창밖, 블랑이 머물고 있을 서쪽
[서연합 국경 외곽, 전쟁 노예를 실은 수송 수레]덜컹거리는 진동과 함께 육중한 쇠사슬이 부딪쳤다.축축한 천막 틈새로 스며드는 한겨울의 냉기와 썩어가는 피 냄새가 진동했다.수레 안에 짐짝처럼 구겨진 노예들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목숨값보다 사슬값이 더 비싼 고기방패들.그중 구석에 처박힌 한 남자, 레온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웅크리고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 들썩이는 흉통만큼은 짐승처럼 기괴하고 묵직한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조금만 기다려.’죽어 있던 그의 심장이, 오직 한 여자의 흔적을 쫓아 미친 듯이 박동하기 시작했다.아르센.그의 모든 것이자, 모든 걸 잃은 곳. 그리고 잃어버린 아내가 있는 곳.천막 바깥에서 병사들의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이 노예들은 아르센 국경에 넘기면 된다지?”“그래. 서연합이 고용한 전선 보조라고… 뭐, 그냥 죽이기엔 아깝다나?”“아깝다고? 이런 고깃덩어리들이?”비웃음 섞인 발걸음이 멀어져 갔다.그 순간, 레온의 입꼬리가 어둠 속에서 기괴하게 찢어지며 비틀렸다. 그것은 비웃음이 아니라, 먹잇감의 목을 물어뜯기 직전인 맹수의 환희였다.아르센 국경. 드디어 도착했다.이 냄새나는 수송 수레에 얌전히 짐짝처럼 타준 것은, 오직 이곳에 빠르고 조용하게 도달하기 위함이었을 뿐.[쩌적- 투둑!]돌조각으로 갉아낼 필요조차 없었다.레온이 전완근에 핏줄이 터질 듯 힘을 주자, 그를 구속하던 두꺼운 강철 사슬이 종잇장처럼 허무하게 뜯겨 나갔다.“어이, 쥐새끼들. 조용히들 하…….”순찰을 돌던 경비병이 인원 점검을 위해 천막을 걷어 올린 순간,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어둠 속에서 세로로 찢어진 금안(金眼)이 섬뜩하게 번뜩였고, 레온의 거대한 손아귀가 병사의 안면을 통째로 짓눌렀다.[우드득-!]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병사의 목이 기괴하게 꺾였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즉사였다.두 번째 병사가 기겁하며 검을 뽑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투기장의 지옥에서 살아남은 괴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