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 아이의 아비가 드라켄의 심연이든 아르센의 화염이든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이 제국을 물려받을 내 아이일 뿐이니까. 아비 노릇을 하고 싶다면, 내 발치에서 증명해 봐.“ 나를 적국에 팔아넘긴 짐승 같은 남편과 나를 전리품 취급하던 오만한 적국 황제. 내 체취와 기운 없이는 숨조차 쉬지 못하게 된 두 남자의 목줄을 쥐고, 가장 완벽하고 관능적인 복수를 시작한다.
View More패전국의 황후가 맞이한 결말은 비참했다.
적국 황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사치였다.
“정말 이 여자를 두고 갈 텐가, 아르센의 황제여?”
로제는 고개를 들어 카시안을 보았다.
피 묻은 검을 쥔 북방의 포식자.
그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러나 지독히도 오만한 시선으로 로제의 남편을 조롱하고 있었다.
“……제국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결단이오.”
레온은 차마 로제 쪽을 보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제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밤마다 자신의 생명력과 마력을 쥐어짜 내어 그 핏줄에 흐르는 드래곤의 폭주를 잠재워 주었건만.
그 착해빠진 무능한 남편이 살기 위해 내린 결단은, 아내를 적국 황제의 침소로 팔아넘기는 것이었다.
“하, 훌륭한 군주 나셨군.”
카시안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로제를 향해 느릿하게 다가왔다.
짐승처럼 번뜩이는 눈동자가 그녀의 몸을 훑어 내렸다.
“자, 네 주인이 바뀌었다. 나의 전리품.”
카시안이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이제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
남편의 목숨값을 대신해, 적국 황제의 정부가 되어 밤마다 그의 아래에서 헐떡여야 하는 삶.
하지만 로제는 그 손을 잡는 대신, 성벽 난간 너머 허공을 향해 뒷걸음질 쳤다.
발뒤꿈치 너머로 까마득한 높이의 성벽 아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휘감았다.
“……!”
“로, 로제? 안 돼!”
카시안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뒤늦게 고개를 든 레온이 사색이 되어 절규했다.
“나를 전리품 삼아 욕정할 생각인가 본데.”
로제는 피식, 서늘한 비소를 흘렸다.
“당신들의 그 비겁한 거래에 이 몸을 내어줄 생각 따위 없어.”
레온이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변명했다.
“미, 미안해, 로제.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제국이…… 카시안 황제께서 너를 정중히 대접하겠다고…….”
“정중한 대접?”
로제는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비바람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었지만, 그녀의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났다.
“레온, 착각하지 마. 카시안이 강해서 우리가 진 게 아니야.”
로제의 시선이 레온의 떨리는 두 손을 향했다.
드래곤의 문양이 새겨진 그 손은 대륙을 호령할 힘을 품고서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검기를 뿜어내지 못했다.
“네가 무능해서 진 거야. 네 그 나약함이, 내 헌신 없이는 숨조차 쉬지 못하는 그 한심한 의존증이 이 나라를 이 꼴로 만든 거라고.”
“로제, 그게 무슨…….”
“넌 그저 내 치맛자락 뒤에 숨어 피를 빨아먹고 연명하던 기생충일 뿐이었어. 그런 네가, 이제는 살겠다고 나를 팔아?”
레온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로제는 성벽 난간 위로 발을 올렸다. 더 이상 치욕스럽게 살고 싶지 않았다.
“기억해, 레온. 네 무능은 죄악이야. 나는 더 이상 네 죄를 대신 짊어질 생각이 없어.”
“안 돼!!”
두 남자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로제의 몸은 이미 허공으로 기울고 있었다.
추락하는 시야 속에서, 미친 듯이 절규하며 난간으로 달려드는 레온의 얼굴이 보였다.
‘이제 와서 후회해? 늦었어.’
내 피를 빨아먹고 산 기생충.
다음 생이 있다면, 너희 둘 다 내 발치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어 줄 테다.
쿵.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세상이 멈췄다.
아르센의 태양이 까마득한 성벽 아래 붉게 부서져 내렸다.
**
“허억!”
로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추락의 감각에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여긴……?”
익숙한 천장. 따스한 햇살.
그리고 눅진하게 가라앉은 침실의 공기.
로제는 이불 아래로 드러난 자신의 맨 어깨와, 가슴팍에 남은 붉은 흔적들을 내려다보았다.
허리 아래를 짓누르는 뻐근함과 허벅지 안쪽의 불쾌한 열기가 생생했다.
옆을 돌아보자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남편, 레온이 보였다.
아직 피 묻지 않은 얼굴.
근심이라곤 하나 없는 저 평온한 표정.
로제는 멍하니 앞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제국력 480년.
제국이 멸망하기 3년 전의 아침.
결혼식 첫날밤을 치른 직후였다.
‘시간이……. 되돌아온 건가?’
살아 돌아왔다.
지옥 같았던 배신도, 카시안의 모욕도 없는 시간으로.
“으음, 로제…….”
레온이 잠투정하듯 뒤척이며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직 잠에 취해 로제의 목덜미에 입술을 부비는 폼이 영락없는 대형견 같았다.
전생에선 이 순진한 온기가 너무나 애틋해, 내 생명을 갉아 먹히는 줄도 모르고 그를 안아주었다.
하지만.
‘지긋지긋하고 역겨워.’
눅진한 정사의 흔적이 남은 침대 시트 위로 차가운 증오가 번졌다.
나를 제물로 바치고 살아남으려 했던 비겁자.
로제는 자신의 허리를 감은 레온의 손을 차갑게 쳐내려다, 이내 멈칫했다.
그녀의 시선이 레온의 탄탄한 가슴팍으로 향했다.
저 안에는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드래곤의 마력이 잠들어 있었다.
‘그래. 기회가 왔어.’
로제는 천천히 손을 뻗어 레온의 심장 부근을 훑어 내렸다.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레온이 흠칫 몸을 떨며 더운숨을 뱉었다.
그의 숨통을 쥐고 있는 건 결국 자신이었다.
‘이번엔 네가 날 위해 죽어줘야겠어, 레온.’
네 안의 괴물을 완벽하게 다듬어 카시안의 목을 물어뜯을 사냥개로 만들어 주마.
그리고 네가 나 없이는 단 하루도 숨 쉴 수 없을 만큼 내게 미쳐버렸을 때.
‘그때, 가장 처참하게 버려줄게.’
로제는 결심을 굳히며, 당황과 열기로 젖어 든 레온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폐하, 어젯밤은 참…… 좋았어요.“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입술을 느릿하게 가르고 안쪽의 여린 살을 짓눌렀다.
레온이 움찔하며 그녀의 허리를 더 세게 감아 쥐었다. 무능하고 나약한 남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로제, 당신 오늘……."
"앞으로 더 좋아질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로제는 그의 품에 고개를 묻으며 서늘하게 눈을 빛냈다.
사랑을 속삭이는 입술이 아닌, 사냥감을 조이는 사냥꾼의 미소였다.
가장 완벽한 복수와 이별을 위한, 지독한 사육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거친 모래바람과 짙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드라켄 황성 외곽의 용병 투기장.“크아악-!”곰을 맨손으로 때려잡는다던 거구의 용병이 치켜든 철퇴가 허공을 가르기도 전이었다.잿빛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의 검이 벼락처럼 쏘아져 나갔다. 화려한 검기도, 대단한 초식도 없는 그저 단순한 내려치기.하지만 그 한 번의 궤적을 따라 대기가 비명처럼 찢어지더니,콰앙-!!고막을 터뜨릴 듯한 폭음과 함께 거구의 용병이 모래 바닥으로 처박혔다.방패 역할을 하던 두꺼운 강철 갑옷이 종잇장처럼 우그러져 있었고, 사내가 내리친 검 끝을 중심으로 모래 바닥이 거대한 크레이터처럼 푹 파여 사방으로 쩍쩍 갈라져 있었다.투기장을 메우고 있던 수백 명의 용병들 사이로 찬 물을 끼얹은 듯한 서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미, 미친…… 방금 저게 뭐야? 검기 같은 건 뿜어내지도 않았잖아!”“그냥 순수하게 완력으로 짓눌러 버렸다고? 저딴 괴물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심사를 보던 황궁 수비대장조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수십 년 검을 쥐어온 그의 눈에도 방금 전의 일격은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단순한 검술 훈련 따위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이치의 힘이 아니었다.흡사 거대한 비늘을 가진 마수나, 전설 속 용이 발톱을 휘두른 것만 같은 흉흉하고 이질적인 파괴력.“하, 합격! 대체 어디서 굴러먹다 온 기인인지는 몰라도 솜씨 하나는 기가 막히군. 네놈의 이름이 무엇이냐!”수비대장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사내는 무심한 손길로 검에 묻은 핏자국을 털어내며 투박한 가죽 가면 너머로 낮게 읊조렸다.“……카일.”수비대장이 합격패를 던져주며 호탕하게 웃었으나, 남자의 금빛 눈동자는 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있었다.합격패를 꽉 틀어쥔 카일, 아니 레온은 가면 너머로 드라켄의 거대한 황성을 쏘아보았다.카시안의 서쪽 별궁에 들어앉았다는 천박한 정부, 블랑 백작.국경의 술집에서 떠도는 소문은 퍽 기가 막혔다.출신도 모르는 창부 주제에 황제를 홀려 백작 작위
드라켄 제국의 무력을 지탱하는 거대한 심장, 페온 공작저의 은밀한 지하 밀실.매캐한 쇳물 냄새와 눅눅한 습기가 뒤엉킨 공기 속에서, 아이린은 탁자 위에 놓인 조잡한 양피지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고작 이것뿐인가?”서늘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심복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서부 국경으로 빼돌린 철광석의 양이 지난달보다 턱없이 부족하잖아. 내가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라고 널 살려두고 있는 줄 알아?”“공녀님. 송구하오나 최근 국경 수비대의 검문이 짐작보다 훨씬 삼엄해졌습니다. 상단의 짐마차 밑바닥을 이중으로 개조해 넘기고는 있으나,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양에 한계가…….”“핑계 대지 마!”아이린이 신경질적으로 양피지를 구겨 바닥에 내던졌다.“서연합의 미친개에게 뼈다귀를 넉넉히 던져주어야, 그놈들이 무기를 벼리고 날뛰며 카시안의 발목을 물어뜯을 것 아니야. 무기를 주조할 철이 부족하다며 벨모어 그 자가 또 불만을 표하면 네놈이 목을 내놓을 텐가?”그녀의 흉흉한 기세에 심복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당장 다음 달부터 수송량을 두 배로 늘려.”“두 배 말씀이십니까? 발각이라도 되는 날엔 공작가의 목이……!”“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아이린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밀실 안을 초조하게 거닐었다. 화려한 드레스 자락 아래로 감춰진 그녀의 속내는, 겉모습만큼이나 검고 탐욕스러웠다.처음엔 당연히 황후의 자리가 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국 제일의 권력과 부를 가진 페온 가문의 안주인 자리는 카시안의 옆자리여야 격이 맞으니까.하지만 카시안은 제 곁의 내밀한 자리를 내어주기는커녕, 출처도 모를 천박한 계집을 데려와 끼고 돌았다.그런 블랑을 밀어내기 위해서 타티아나를 동쪽 별궁에 슬쩍 밀어 넣어 판을 깔아준 것도 아이린 자신이었다.그런데 그 진흙탕 싸움을 구경하다 보니, 문득 불쾌한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천박한 계집들을 곁에 두고 이리저리 굴러먹은 사내를 굳이 내 반려로 취해야 할까?’아이린의 차
카시안이 예고도 없이 서쪽 별궁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을 때, 처소 안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얼어붙어 있었다.“폐하? 갑자기 어쩐 일로…….”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블랑이 놀란 듯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카시안의 시선은 블랑이 아닌, 그녀의 발치에 꿇어앉아 차를 내리던 에다에게 곧장 꽂혔다.탐색전의 시작.카시안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블랑. 네 시녀가 백합관의 안주인에게 아주 단단히 눈도장을 찍은 모양이군.”“……예?”“그녀가 이 아이의 손길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고집을 부려. 내 친히 이 아이를 동쪽 별궁으로 데려갈까 하는데.”순간, 블랑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카시안은 그 찰나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블랑의 속내를 파헤치려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일부러 에다를 보낸 것이 아니냐는, 소리 없는 압박이었다.그런데 그 순간, 카시안의 계산을 완벽하게 부숴버리는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폐, 폐하! 부디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찻잔을 내려놓은 에다가 다급하게 카시안의 발치로 기어가 납작 엎드린 것이다.“에다, 너 지금 무슨……!”“마님,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저도 살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에다는 블랑의 당황한 부름을 잔인하게 끊어내며, 카시안을 향해 필사적으로 호소했다.“폐하께서 동쪽 별궁의 마님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시는지 똑똑히 보았습니다!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작위뿐인 백작의 곁에서 매일같이 불안에 떠느니, 차라리 진정한 태양의 그늘 아래서 뼈를 묻고 싶습니다! 부디 제 충성을 백합관에 바치게……!”짝-!!에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허공을 가른 블랑의 손이 자비 없이 에다의 뺨을 후려쳤다.“이, 이 천박하고 배은망덕한 것!”고개가 꺾인 에다의 입술이 터져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블랑은 멈추지 않았다.독기가 바짝 오른 눈동자, 수치심과 배신감에 사시나무처럼 떠는 두 손.영락없이 믿었던 수족에게 뒤통수를 맞고 이성을 잃은 얼굴이었다.“그렇게 가고 싶었으면 내게 청을 할 것이지, 감히 누구에게……!
짙은 수증기가 맴도는 백합관의 욕실.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갔다 나왔음에도, 타티아나의 표정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아파. 살살 좀 닦아내지 못해?”“죄, 죄송합니다, 마님!”시녀가 사색이 되어 수건을 거두었지만, 타티아나의 신경질적인 짜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따라 몸을 감싸는 고급스러운 백합 오일의 향기마저 겉도는 기분이었다.전혀 개운치 않았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짓누르는 듯한 뻐근함과, 출산 이후로 묘하게 무거워진 몸의 피로가 전혀 가시질 않았다.문득 며칠 전, 제 수발을 들었던 낯선 시녀의 손길이 떠올랐다.이름조차 묻지 않았던 밑밑한 인상의 하녀였건만, 그 손끝의 압력만큼은 기가 막혔다.뭉친 근육의 결을 정확히 찾아내어 부드럽게 풀어주며, 뼛속까지 스며든 피로를 씻은 듯이 녹여내던 완벽한 마사지.그날 밤엔 징그럽게도 옥죄어 오던 압박감을 잊고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었는데.“너, 이리 와서 어깨 좀 주물러 봐.”“예? 예, 마님.”타티아나의 퉁명스러운 지시에 시녀가 긴장으로 굳은 손을 한 채 다가왔다. 고급스러운 백합 오일을 듬뿍 바른 손바닥이 타티아나의 매끄러운 어깨 위로 조심스레 안착했다.하지만 그뿐이었다. 피부 겉면만 미끄덩거리며 맴도는 손길은 그저 간지럽고 불쾌하기만 할 뿐, 잔뜩 뭉친 근육의 피로를 풀어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장난해? 파리 쫓는 것도 아니고, 손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잖아! 제대로 안 주물러?”“아, 앗, 죄, 죄송합니다, 마님! 당장 다시……!”혼비백산한 시녀가 황급히 손끝에 잔뜩 체중을 실어 꾹 눌렀다. 그러나 근육의 결을 전혀 읽지 못한 채, 그저 딱딱하게 굳은 어깻죽지를 억센 악력으로 짓뭉개버린 꼴이었다.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타티아나의 뒷목을 타고 찌릿하게 뻗쳤다.“아악! 거기가 아니잖아, 이 멍청한 것아!”“히익! 소, 송구합니다……!”“무식하게 힘만 주고 누르면 다인 줄 알아? 살이 다 으스러지겠어! 어쩜 솜씨가 이다지도 조잡하고 형편없어!”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타티
탑의 꼭대기 방.육중한 문이 닫히고,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감옥의 철창 소리보다 더 무겁게 울렸다. “하아….” 엘런은 로제를 침대 기둥으로 몰아붙이며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그는 급하지 않았다. 이미 제 손아귀에 들어온 완벽한 전리품이었으니까. 그는 로제의 얇은 쉬폰 드레스 자락을 손끝으로 느릿하게 훑어 올렸다. “떨고 있군요, 황후.” 그의 손이 로제의 허리를 지나, 맨살이 드러난 어깨를 타고 뱀처럼 미끄러졌다.“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그 무능한 황제 놈은 당신의 이 뜨거운 몸을 제대로 다루는 법조차 몰랐던 모양인
엘런이 사라진 뒤, 응접실에는 지독한 혐오의 침묵만이 남았다.“폐하…… 괜찮으십니까? 저자가 감히…….”참모가 사색이 되어 다가왔지만, 차마 끝까지 말을 다 하지는 못했다.카시안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머릿속엔 아까 자신을 도발하던 로제의 서늘한 눈빛이 떠올랐다.“미친놈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역겹군.”“그렇긴 하지만…. 얼핏 보면 난봉꾼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세를 보는 눈이 날카롭습니다.”“알아. 그러니까 엮이지 말아야지.”카시안은 천천히 잔을 흔들었다. 붉은 와인이 마치 피처럼 일렁였다
별궁의 안뜰에 발을 들여놓자, 짙은 붉은 망토를 걸친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몸을 낮추었다.“드라켄의 위대한 포식자를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유들유들하고 관능적인 인상.엘런은 자신의 매력을 과시하듯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끈적한 욕망이 서려 있었다.“서쪽 연합의 제2왕자, 엘런입니다. 어제 연회는 정말 대단했죠. 아르센의 황후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다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더군요. 폐하께서도 그 맛을 보셨어야 했는데.”카시안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서연합의 놈들은 왜 하
대접견실의 문이 닫히자, 레온은 그대로 굳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로제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저의 폐하를 너무나 연모하거든요.]그 말은 독처럼 달콤했고, 동시에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연모……?’레온은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로제는 눈만 마주쳐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던 수줍은 여인이었다.그리고 자신은 어떠했나.첫날밤조차 그녀가 겁을 먹을까 봐 제대로 안지도 못했다.그런데 오늘 본 로제는 달랐다.카시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밤일’을 운운하고,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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