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별궁의 안뜰에 발을 들여놓자, 짙은 붉은 망토를 걸친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몸을 낮추었다.
“드라켄의 위대한 포식자를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유들유들하고 관능적인 인상.
엘런은 자신의 매력을 과시하듯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끈적한 욕망이 서려 있었다.
“서쪽 연합의 제2왕자, 엘런입니다. 어제 연회는 정말 대단했죠. 아르센의 황후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다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더군요. 폐하께서도 그 맛을 보셨어야 했는데.”
카시안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서연합의 놈들은 왜 하나같이 이토록 천박한지.
“전하께서는 그 향기에 취해 머리까지 마비되신 모양이군. 잘 즐기고 가시오.”
카시안이 무심하게 지나치려 하자, 엘런이 비릿하게 웃으며 그를 막아섰다.
“에이, 폐하. 사내끼리 왜 이러십니까. 저 혼자선 이 밤이 미치도록 심심해서 말이죠.”
카시안은 말없이 엘런을 바라봤다.
그의 앞에서 저런 사적인 농을 던질 수 있는 자도, 드문 일이었다.
참모가 조용히 기침을 했고, 그제야 엘런은 체면을 차리듯 말투를 고쳐 말했다.
“아, 물론! 폐하께서 여유가 되신다면 말입니다. 실은 폐하를 꼭 한번 뵙고 싶어서 일부러 기다렸거든요. 전쟁의 책략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르센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카시안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 따라오시오.”
.
.
별궁 안쪽의 응접실.
향초의 눅진한 향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엘런은 술잔을 흔들며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아르센은 참 모든 게 탐스럽죠. 예법도, 음식도…… 무엇보다 그 황후, 로셀린 말입니다.”
카시안의 손끝이 잔 위에서 멈췄다. 엘런은 그 반응을 즐기듯 혀로 입술을 축였다.
“솔직히 말하면, 본국에 있는 제 아내보다 수천 배는 더 자극적이더군요. 제 아내는 드라켄 출신이라 그런지 얼음처럼 차갑고 딱딱해서 침대 위에서도 나무토막 같거든요. 그런데 아르센의 황후는…….”
엘런의 눈이 탐욕스럽게 번들거렸다.
“만지면 데일 것처럼 뜨거운 불꽃 같지 않습니까? 그 눈빛하며, 몸짓하며. 사내라면 한 번쯤 저 여자를 무너뜨리고 울리고 싶다는 생각, 안 하셨을 리가 없는데.”
카시안의 손에 든 잔에 미세한 실금이 갔다.
“전하의 비가 드라켄 출신이라니 안타깝군. 우리 제국의 여인들은 수준 낮은 수컷에게는 원래 차가운 법이라.”
“하하, 죄송합니다.”
엘런은 자기 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드라켄의 여인을 비하하려던 것은 아닌데, 폐하의 심기를 거슬렀나 보군요. 아무튼 그 미모라면 이혼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릴 만하지 않습니까?”
엘런은 옅은 홍조를 띠었지만, 그 홍조는 수줍음이 아니라 위험한 흥분에 가까웠다.
“그런데, 아내가 있는 전하에게 그 고고한 황후가 곁을 줄까요?”
카시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의 기류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흠, 이혼을 당하면… 후궁 자리를 주는 것도 감지덕지 아닐까요?”
“후궁 자리에 만족할 여인은 아닌 듯하던데….”
“아르센의 황후로 있을 때보다 가질 수 있는 게 더 많다면 또 모를 일이죠.”
“하지만 아르센의 황제는 누구보다 너그러운 것 같으니, 이혼당할 일은 없을 텐데.”
잔을 만지작 거리던 엘런은 작은 웃음을 지었다.
“황제의 의지가 없어도 혼인을 깨는 방법은 많죠. 가령…… 추잡한 스캔들 같은 거 말입니다. 황후의 그 정숙한 드레스 아래가 다른 사내의 손길에 젖어있는 걸 황제가 보게 된다면 어떨까요?”
카시안의 손끝이 아주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탁자 위에 닿았다.
“내게 이런 추잡한 계획을 털어놓는 이유가 뭐지?”
엘런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웃고 있는 입술과 달리, 눈동자는 차갑고 비어 있었다
“저는 예쁜 것을 사랑해요. 그리고 아르센의 황후는…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갖고 싶은 아름다운 것들 중의 하나고요. 그러니 제가 무슨 짓을 하든… 모른 척해주셨으면 합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카시안의 얼굴엔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그의 눈빛엔 단단한 경계가 번졌다
“그건 부탁인가요? 아니면… 서연합 왕국이 내게 하는 협박인가요?”
엘런은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당연히 부탁이죠. 그리고 폐하께서도 아르센과의 동맹관계가 점점 마음에 들지 않으시잖아요.”
응접실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고, 그는 입술에 잔을 스치며 말을 이었다.
“드라켄의 아이들이 아르센의 노래를 부른다죠?”
그의 목소리는 호기심 어린 아이처럼, 그러나 숨을 죽일 만큼 위험한 기류를 품고 있었다.
“아르센의 노래를 부르고, 그들의 책을 읽고 자란 백성은… 과연 누구의 백성일까요?”
탕!
잔을 내려놓는 카시안의 입술 끝이 혐오감에 꿈틀거렸다.
“…농담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는군.”
“진정하세요.”
엘런의 눈빛이 반짝였다.
“전 폐하를 지켜봤습니다. 폐하께서 아르센을 둘러보는 그 시선을요. 보니까 어떠셨나요?”
몸을 기울인 엘런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르센은 지킬 가치보다 차지할 가치가 더 크지 않던가요?”
카시안은 잔을 들어 입술에 가볍게 대었다.
대답 대신, 한 박자 늦은 눈빛으로 엘런을 바라봤다.
“그래서 서쪽 연합이 차지하기라도 하려고?”
엘런은 한숨을 푹 쉬며 웃었다.
“여태 제 이야기를 어떻게 들으셨어요. 저는 황후 폐하만 있으면 된다니까요. 황제 자리는 폐하께서 가지세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또렷하고 선명했다.
“황후의 스캔들로 혼란스러울 때 딱! 움직이시면 쉽게 손에 넣으실 수 있을 겁니다.”
카시안의 눈이 아주 느리게 깜빡였다.
“내가 싫다면?”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렇다고 제 계획이 달라질 것은 아니라서요.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말아 달라는 제 부탁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굳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굳이 수고스럽게 찾아와서 하는 이유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제 말의 의미를 아직 이해못하셨군요.”
긴장감이 감도는 그 와중에 엘런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은 공손하지만, 그 속에 섬뜩한 광기가 담겨 있었다.
“부디 끼어들지 마세요. 로셀린 황후와 저의 사정에.”
하마터면 목 끝에 조금 남아있던 술 때문에 기침이 터칠 뻔했다.
간신히 침을 삼킨 카시안은 입을 열었다.
“내가 황후에게 관심이라도 있어보였나?”
“폐하께서 관심이 있어 보였다기보다는, 라이벌 견제라고 생각해 주세요.”
정적이 흘렀다.
카시안은 탁자 위에 놓인 잔을 내려다보았다.
역겨움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드라켄의 그 고고하던 여자가 선택한 결말이 고작 이런 난봉꾼의 옆자리라니.
“궁금하군요.”
카시안이 아주 낮고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이러고 다니는 걸…… 드라켄 출신의 그 고고한 부인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아, 그 여자요? 알든 모르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제게 관심도 없는 껍데기일 뿐이니까요.”
“…….”
“왜 물으십니까? 혹시 폐하께서도 남의 가정사가 걱정되셔서?”
엘런이 장난스럽게 되물었지만, 카시안의 눈빛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럴 리가.”
카시안은 싸늘하게 일축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게 안타까워서.”
“예?”
“아닙니다. 왕자비에게 안부나 전해주시오. 여전히 꼿꼿하게 잘 버티고 있는지.”
그 목소리엔 걱정 한 톨 섞이지 않은, 지독한 냉소가 서려 있었다.
“하하, 전해드리죠. 뭐, 듣고도 표정 하나 안 바뀌겠지만.”
술잔을 다 비운 엘런은 입술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께서 아르센을 가지고 싶어 하셨으면 정말 유익한 대화가 되었을 텐데…, 아직은 생각이 다른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길게 기른 손톱이 블랑의 하얀 뺨을 자비 없이 긁고 지나갔다.[짝-!]하는 날카로운 마찰음 뒤로, 하얀 턱선을 타고 붉은 핏방울이 툭 떨어졌다.“어머!”“세, 세상에…!”블랑은 살짝 비틀거렸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피가 배어 나오는 뺨을 감싸 쥐며, 그녀는 비명 대신 속으로 서늘하게 웃었다.‘완벽하게 걸려들었어.’아이린은 단순히 기분 나쁜 여자의 뺨을 때린 게 아니다.명백히, 황제가 총애를 내린 여인에게 피를 본 것이다.놀란 한 귀부인이 사색이 되어 아이린을 말리려 손을 뻗었지만, 이성을 잃은 공녀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그 요망한 혀를 당장 뽑아버리겠어!”아이린이 다시금 독기 어린 손을 쳐드는 순간이었다.“……뭣들 하는 거지.”마치 지옥 밑바닥에서 긁어 올린 듯한, 저음.굳게 닫혀 있던 응접실 문이 거칠게 열려 있었고, 그 너머에 검은 제복 차림의 카시안이 서 있었다.그의 붉은 눈동자가 블랑의 뺨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에 닿은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숨통을 조일 듯 무겁게 얼어붙었다.“……폐하.” 황제의 서슬 퍼런 등장에 귀부인들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지만, 아이린만은 달랐다.그녀는 순간 움찔했으나 이내 꼿꼿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페온 공작가의 여식이 고작 하룻밤 노리개의 뺨을 친 일로 황제에게 기죽을 이유는 없었다.카시안은 얼어붙은 귀부인들 사이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블랑의 앞을 막아섰다. 커다란 손이 블랑의 턱을 조심스럽게 쥐어 올렸다.엄지손가락으로 뺨의 핏방울을 스윽 훔쳐낸 그의 입매가, 잔인할 정도로 서늘하게 비틀렸다.“……감히.”그의 적안이 아이린을 향해 내리꽂혔다.“허락 없이, 내 것에 손을 대?”그 살벌한 경고에도 아이린은 당당하게 마주 섰다. 오히려 카시안이 자신보다 저 천한 여자를 감싸고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듯 쏘아붙였다.“폐하, 고작 하룻밤 품으신 계집입니다. 저 천한 것이 감히 우리 페온가를 모욕하고 반역 운운하는 망발을 지껄이지 않습니까.”아이린은 핏자국이 남은 자신의 손톱을
온 종일 황궁 곳곳을 쏘다닌 에다가 은밀히 침실로 들어왔다. 그녀의 품에는 무겁게 챙겨갔던 금화 주머니 대신, 꼬깃꼬깃한 메모장이 들려 있었다.“백작님… 말씀하신 대로 알아왔습니다.”“수고했어. 쓸 만한 게 있던가?”에다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살폈다.“그게… 레녹 후작이 현재 의회에서 페온 공작가의 철광석 채굴권을 황실 소유로 강제 귀속시키려는 법안을 은밀히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그 문제로 공작과 멱살잡이 직전까지 갔다고….”블랑의 은회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그래서였군.’어제 그가 굳이 페온 가문을 상징하는 에메랄드 브로치를 남기고 간 이유.내게 뒷배가 되어주겠다는 달콤한 말 이면에는, 나를 황제의 방패막이 겸 페온가의 채굴권을 터뜨리기 위한 가장 자극적인 폭탄으로 던져 넣을 심산이었던 거다.‘명목상으로는 황실 귀속이겠지만, 실질적인 관리와 예산 집행은 의회가 하겠지. 결국 황제의 눈을 가리고 그 막대한 돈줄을 제 주머니에 넣겠다는 소리군. 과연, 의회를 장악한 머리에서 나올 법한 발상이야.’블랑은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보석함을 다시 꺼내 열었다.“독이 든 미끼라면… 기꺼이 삼켜주지. 판을 내 쪽으로 엎어버리면 그만이니까.”“백작님…?”“초대장을 써야겠어. 지금 당장.”블랑이 건넨, 아직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초대장들을 받아 든 에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것들을 봉투에 넣으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백작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소문이… 너무 안 좋아요.”레녹 후작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은밀히 돌아다니던 에다의 귓가에는 지독한 조롱들이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들었어? 하루 만에 폐하의 침소에서 쫓겨났다며. 꼴좋지.][근본도 없는 계집이 폐하를 만족시킬 수 있을 리가 있나.][나는 저 백작이 3일 안에 별궁에서 쫓겨난다에 10골드를 걸지. 킬킬.]구석에 모인 시녀들의 비웃음과, 호사 취미를 가진 귀족들의 저급한 내기판. 궁 안에는 이미 블랑이 소박을 맞았다는 확신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그런
레녹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선을 넘지 않던 그가, 어느새 블랑의 숨결이 닿을 만큼 지척까지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얇은 레이스 실내복 위로, 그의 나른하면서도 짙은 시선이 적나라하게 내려앉았다.“질투는 가장 확실한 정치적 도구입니다.”레녹이 긴 손가락을 뻗어, 블랑의 쇄골에 남은 카시안의 붉은 잇자국을 허공에서 스치듯 가리켰다. 직접 닿지는 않았으나, 소름이 돋을 만큼 농밀하고 아찔한 간격이었다.“그 미친 황제께서, 당신을 다른 사내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그 순간 아이린 공녀도, 페온가도, 그 어떤 귀족도 감히 당신에게 이빨을 드러내지 못할 테니까.”“……질투라.”블랑이 헛웃음을 삼키며 되물었다.“그래서 폐하의 마음을 쥐고 흔들어라… 후작님의 입지를 위해서? 하지만 제가 얻는 건 뭐죠?”그녀는 팔짱을 끼며 레녹을 똑바로 응시했다.“폐하의 총애는 뜬구름 같은 겁니다. 제가 후작님을 위해 춤을 추다가, 폐하가 질려서 저를 버리시면요? 그때는 후작님도 저를 버리시겠죠.”“바로 그 지점입니다.”레녹이 기다렸다는 듯 한 걸음 더 다가왔습니다.안경 너머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총애는 짧고, 권력은 깁니다. 백작님은 지금 뿌리 없는 꽃입니다. 황제의 변덕이 끝나면 시들어 죽을 운명이죠.”
서쪽 별궁.황제가 블랑에게 하사한 거처는 지나치게 화려해서 오히려 서늘했다.높은 천장에는 화려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고, 바닥은 걸을 때마다 차가운 냉기가 올라오는 최고급 대리석이었다.역대 황비들이 별채로 썼던, 그러나 지금은 주인을 잃고 비어있던 거대한 새장.그 적막을 깨는 것은 옷감이 스치락거리는 소리뿐이었다.“……저기, 백작님.”에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그녀는 카시안이 보낸 시녀들이 가져온 짐을 정리하다 말고, 힐끗 블랑의 눈치를 살폈다.“찻물을 좀… 올릴까요? 안색이 창백하셔서….”그것은 단순한 시중이 아니었다.어떻게든 말을 붙여보려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담은 물음이었다.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제발 나를 알아봐 달라고. 우리가 아르센에서 나눴던 그 온기를 기억해 달라고.하지만 블랑은 창밖을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필요 없어.”돌아온 대답은 칼로 자른 듯 차가웠다.“짐 정리가 끝났으면 나가 봐. 피곤하니까.”블랑은 에다 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냉정함.그것은 블랑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단 한 명, 아니 쥐새끼라도 눈치채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야.’계획대로 움직이려면 철저히 남이 되어야 했다.“아…… 네…….”에다의 어깨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짐을 정리했다.짐짓 분주하게 손을 놀렸지만, 시선은 자꾸만 창가에 선 블랑의 옆모습에 머물렀다.‘정말…… 너무 닮으셨어.’아르센의 붉은 장미 같았던 나의 황후님.자신을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드라켄으로 빼돌려 주셨던 그 고귀한 분.하지만.에다의 시선이 블랑의 옷차림에 닿았다.속살이 훤히 비치는 얇은 레이스 실내복, 목덜미와 쇄골에 붉게 남은 정사의 흔적들.그리고 무엇보다 저 서릿발 같은 눈빛.‘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에다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스스로를 타일렀다.‘황후 폐하께서는 저런… 천박한 옷을 입으실 분이 아니야.’고귀하고 긍지 높던 나의 주인님이다.황제
새벽 회의가 끝나고, 레녹은 서류를 정리하며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황궁은 아직 차갑고 고요했다. 새벽 안개가 걷히기도 전에 들리는 하녀들의 분주한 속삭임만이 이른 아침을 채우고 있었다.그는 늘 그렇듯 나른하게 벽에 기대어 귀를 기울였다. 이 하찮은 소음 속엔 언제나 금이 될 만한 정보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들었어? 뒷방 아니, 그 백작님 말이야….”“어젯밤에 황제 폐하의 침실에서… 쫓겨났대.”“진짜? 작위까지 받았는데 무슨 일이지?”“아무튼, 아침도 밝기 전에 시녀 둘이 데리고 나가는 걸 봤다더라. 폐하께서 엄청나게 화를 내셨나 봐.”‘쫓겨났다?’레녹의 창백한 얼굴 위로, 서늘한 눈동자가 느리게 가라앉았다.웃지도 않았고, 놀라지도 않았다.그저 완벽해야 할 수학 공식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발견한 학자처럼 미묘한 표정일 뿐이었다.“하루 만에?”그가 긴 손가락으로 은테 안경을 천천히 밀어 올리며 낮게 중얼거렸다.백작위 서임, 북부의 노른자위 로트 영지 하사.전례 없는 파격으로 권력을 쥐여주고는, 다음 날 새벽에 안지도 않고 내쫓았다?논리가 맞지 않았다.그가 아는 황제 카시안은 감정에 휘둘리거나 변덕을 부리는 인간이 아니다. 전리품을 취하는 데 거칠 것이 없는 짐승이다.입력값은 최고의 대우인데, 결과값은 축출이다.이 방정식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다.‘단순한 변심이 아니야.’레녹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그의 비상한 머릿속에서 수많은 경우의 수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황제가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물어뜯지 않은 이유.과거, 카시안의 이성이 흔들렸던 유일한 예외는 딱 한 번 있었다.지금은 국경 너머로 사라져버린, 그의 첫사랑.“……그 폭군이, 스스로 이성을 쥐어짜 내서 참았다는 소리군.”레녹의 얇은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소문처럼 블랑이 황제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황제가 제 욕정조차 통제하지 못할까 봐 스스로를 격리한 것이다.“과연.”레녹은 창밖, 블랑이 머물고 있을 서쪽
[서연합 국경 외곽, 전쟁 노예를 실은 수송 수레]덜컹거리는 진동과 함께 육중한 쇠사슬이 부딪쳤다.축축한 천막 틈새로 스며드는 한겨울의 냉기와 썩어가는 피 냄새가 진동했다.수레 안에 짐짝처럼 구겨진 노예들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목숨값보다 사슬값이 더 비싼 고기방패들.그중 구석에 처박힌 한 남자, 레온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웅크리고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 들썩이는 흉통만큼은 짐승처럼 기괴하고 묵직한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조금만 기다려.’죽어 있던 그의 심장이, 오직 한 여자의 흔적을 쫓아 미친 듯이 박동하기 시작했다.아르센.그의 모든 것이자, 모든 걸 잃은 곳. 그리고 잃어버린 아내가 있는 곳.천막 바깥에서 병사들의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이 노예들은 아르센 국경에 넘기면 된다지?”“그래. 서연합이 고용한 전선 보조라고… 뭐, 그냥 죽이기엔 아깝다나?”“아깝다고? 이런 고깃덩어리들이?”비웃음 섞인 발걸음이 멀어져 갔다.그 순간, 레온의 입꼬리가 어둠 속에서 기괴하게 찢어지며 비틀렸다. 그것은 비웃음이 아니라, 먹잇감의 목을 물어뜯기 직전인 맹수의 환희였다.아르센 국경. 드디어 도착했다.이 냄새나는 수송 수레에 얌전히 짐짝처럼 타준 것은, 오직 이곳에 빠르고 조용하게 도달하기 위함이었을 뿐.[쩌적- 투둑!]돌조각으로 갉아낼 필요조차 없었다.레온이 전완근에 핏줄이 터질 듯 힘을 주자, 그를 구속하던 두꺼운 강철 사슬이 종잇장처럼 허무하게 뜯겨 나갔다.“어이, 쥐새끼들. 조용히들 하…….”순찰을 돌던 경비병이 인원 점검을 위해 천막을 걷어 올린 순간,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어둠 속에서 세로로 찢어진 금안(金眼)이 섬뜩하게 번뜩였고, 레온의 거대한 손아귀가 병사의 안면을 통째로 짓눌렀다.[우드득-!]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병사의 목이 기괴하게 꺾였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즉사였다.두 번째 병사가 기겁하며 검을 뽑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투기장의 지옥에서 살아남은 괴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