เข้าสู่ระบบ별궁의 안뜰에 발을 들여놓자, 짙은 붉은 망토를 걸친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몸을 낮추었다.
“드라켄의 위대한 포식자를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유들유들하고 관능적인 인상.
엘런은 자신의 매력을 과시하듯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끈적한 욕망이 서려 있었다.
“서쪽 연합의 제2왕자, 엘런입니다. 어제 연회는 정말 대단했죠. 아르센의 황후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다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더군요. 폐하께서도 그 맛을 보셨어야 했는데.”
카시안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서연합의 놈들은 왜 하나같이 이토록 천박한지.
“전하께서는 그 향기에 취해 머리까지 마비되신 모양이군. 잘 즐기고 가시오.”
카시안이 무심하게 지나치려 하자, 엘런이 비릿하게 웃으며 그를 막아섰다.
“에이, 폐하. 사내끼리 왜 이러십니까. 저 혼자선 이 밤이 미치도록 심심해서 말이죠.”
카시안은 말없이 엘런을 바라봤다.
그의 앞에서 저런 사적인 농을 던질 수 있는 자도, 드문 일이었다.
참모가 조용히 기침을 했고, 그제야 엘런은 체면을 차리듯 말투를 고쳐 말했다.
“아, 물론! 폐하께서 여유가 되신다면 말입니다. 실은 폐하를 꼭 한번 뵙고 싶어서 일부러 기다렸거든요. 전쟁의 책략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르센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카시안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 따라오시오.”
.
.
별궁 안쪽의 응접실.
향초의 눅진한 향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엘런은 술잔을 흔들며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아르센은 참 모든 게 탐스럽죠. 예법도, 음식도…… 무엇보다 그 황후, 로셀린 말입니다.”
카시안의 손끝이 잔 위에서 멈췄다. 엘런은 그 반응을 즐기듯 혀로 입술을 축였다.
“솔직히 말하면, 본국에 있는 제 아내보다 수천 배는 더 자극적이더군요. 제 아내는 드라켄 출신이라 그런지 얼음처럼 차갑고 딱딱해서 침대 위에서도 나무토막 같거든요. 그런데 아르센의 황후는…….”
엘런의 눈이 탐욕스럽게 번들거렸다.
“만지면 데일 것처럼 뜨거운 불꽃 같지 않습니까? 그 눈빛하며, 몸짓하며. 사내라면 한 번쯤 저 여자를 무너뜨리고 울리고 싶다는 생각, 안 하셨을 리가 없는데.”
카시안의 손에 든 잔에 미세한 실금이 갔다.
“전하의 비가 드라켄 출신이라니 안타깝군. 우리 제국의 여인들은 수준 낮은 수컷에게는 원래 차가운 법이라.”
“하하, 죄송합니다.”
엘런은 자기 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드라켄의 여인을 비하하려던 것은 아닌데, 폐하의 심기를 거슬렀나 보군요. 아무튼 그 미모라면 이혼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릴 만하지 않습니까?”
엘런은 옅은 홍조를 띠었지만, 그 홍조는 수줍음이 아니라 위험한 흥분에 가까웠다.
“그런데, 아내가 있는 전하에게 그 고고한 황후가 곁을 줄까요?”
카시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의 기류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흠, 이혼을 당하면… 후궁 자리를 주는 것도 감지덕지 아닐까요?”
“후궁 자리에 만족할 여인은 아닌 듯하던데….”
“아르센의 황후로 있을 때보다 가질 수 있는 게 더 많다면 또 모를 일이죠.”
“하지만 아르센의 황제는 누구보다 너그러운 것 같으니, 이혼당할 일은 없을 텐데.”
잔을 만지작 거리던 엘런은 작은 웃음을 지었다.
“황제의 의지가 없어도 혼인을 깨는 방법은 많죠. 가령…… 추잡한 스캔들 같은 거 말입니다. 황후의 그 정숙한 드레스 아래가 다른 사내의 손길에 젖어있는 걸 황제가 보게 된다면 어떨까요?”
카시안의 손끝이 아주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탁자 위에 닿았다.
“내게 이런 추잡한 계획을 털어놓는 이유가 뭐지?”
엘런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웃고 있는 입술과 달리, 눈동자는 차갑고 비어 있었다
“저는 예쁜 것을 사랑해요. 그리고 아르센의 황후는…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갖고 싶은 아름다운 것들 중의 하나고요. 그러니 제가 무슨 짓을 하든… 모른 척해주셨으면 합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카시안의 얼굴엔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그의 눈빛엔 단단한 경계가 번졌다
“그건 부탁인가요? 아니면… 서연합 왕국이 내게 하는 협박인가요?”
엘런은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당연히 부탁이죠. 그리고 폐하께서도 아르센과의 동맹관계가 점점 마음에 들지 않으시잖아요.”
응접실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고, 그는 입술에 잔을 스치며 말을 이었다.
“드라켄의 아이들이 아르센의 노래를 부른다죠?”
그의 목소리는 호기심 어린 아이처럼, 그러나 숨을 죽일 만큼 위험한 기류를 품고 있었다.
“아르센의 노래를 부르고, 그들의 책을 읽고 자란 백성은… 과연 누구의 백성일까요?”
탕!
잔을 내려놓는 카시안의 입술 끝이 혐오감에 꿈틀거렸다.
“…농담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는군.”
“진정하세요.”
엘런의 눈빛이 반짝였다.
“전 폐하를 지켜봤습니다. 폐하께서 아르센을 둘러보는 그 시선을요. 보니까 어떠셨나요?”
몸을 기울인 엘런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르센은 지킬 가치보다 차지할 가치가 더 크지 않던가요?”
카시안은 잔을 들어 입술에 가볍게 대었다.
대답 대신, 한 박자 늦은 눈빛으로 엘런을 바라봤다.
“그래서 서쪽 연합이 차지하기라도 하려고?”
엘런은 한숨을 푹 쉬며 웃었다.
“여태 제 이야기를 어떻게 들으셨어요. 저는 황후 폐하만 있으면 된다니까요. 황제 자리는 폐하께서 가지세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또렷하고 선명했다.
“황후의 스캔들로 혼란스러울 때 딱! 움직이시면 쉽게 손에 넣으실 수 있을 겁니다.”
카시안의 눈이 아주 느리게 깜빡였다.
“내가 싫다면?”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렇다고 제 계획이 달라질 것은 아니라서요.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말아 달라는 제 부탁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굳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굳이 수고스럽게 찾아와서 하는 이유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제 말의 의미를 아직 이해못하셨군요.”
긴장감이 감도는 그 와중에 엘런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은 공손하지만, 그 속에 섬뜩한 광기가 담겨 있었다.
“부디 끼어들지 마세요. 로셀린 황후와 저의 사정에.”
하마터면 목 끝에 조금 남아있던 술 때문에 기침이 터칠 뻔했다.
간신히 침을 삼킨 카시안은 입을 열었다.
“내가 황후에게 관심이라도 있어보였나?”
“폐하께서 관심이 있어 보였다기보다는, 라이벌 견제라고 생각해 주세요.”
정적이 흘렀다.
카시안은 탁자 위에 놓인 잔을 내려다보았다.
역겨움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드라켄의 그 고고하던 여자가 선택한 결말이 고작 이런 난봉꾼의 옆자리라니.
“궁금하군요.”
카시안이 아주 낮고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이러고 다니는 걸…… 드라켄 출신의 그 고고한 부인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아, 그 여자요? 알든 모르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제게 관심도 없는 껍데기일 뿐이니까요.”
“…….”
“왜 물으십니까? 혹시 폐하께서도 남의 가정사가 걱정되셔서?”
엘런이 장난스럽게 되물었지만, 카시안의 눈빛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럴 리가.”
카시안은 싸늘하게 일축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게 안타까워서.”
“예?”
“아닙니다. 왕자비에게 안부나 전해주시오. 여전히 꼿꼿하게 잘 버티고 있는지.”
그 목소리엔 걱정 한 톨 섞이지 않은, 지독한 냉소가 서려 있었다.
“하하, 전해드리죠. 뭐, 듣고도 표정 하나 안 바뀌겠지만.”
술잔을 다 비운 엘런은 입술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께서 아르센을 가지고 싶어 하셨으면 정말 유익한 대화가 되었을 텐데…, 아직은 생각이 다른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거친 모래바람과 짙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드라켄 황성 외곽의 용병 투기장.“크아악-!”곰을 맨손으로 때려잡는다던 거구의 용병이 치켜든 철퇴가 허공을 가르기도 전이었다.잿빛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의 검이 벼락처럼 쏘아져 나갔다. 화려한 검기도, 대단한 초식도 없는 그저 단순한 내려치기.하지만 그 한 번의 궤적을 따라 대기가 비명처럼 찢어지더니,콰앙-!!고막을 터뜨릴 듯한 폭음과 함께 거구의 용병이 모래 바닥으로 처박혔다.방패 역할을 하던 두꺼운 강철 갑옷이 종잇장처럼 우그러져 있었고, 사내가 내리친 검 끝을 중심으로 모래 바닥이 거대한 크레이터처럼 푹 파여 사방으로 쩍쩍 갈라져 있었다.투기장을 메우고 있던 수백 명의 용병들 사이로 찬 물을 끼얹은 듯한 서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미, 미친…… 방금 저게 뭐야? 검기 같은 건 뿜어내지도 않았잖아!”“그냥 순수하게 완력으로 짓눌러 버렸다고? 저딴 괴물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심사를 보던 황궁 수비대장조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수십 년 검을 쥐어온 그의 눈에도 방금 전의 일격은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단순한 검술 훈련 따위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이치의 힘이 아니었다.흡사 거대한 비늘을 가진 마수나, 전설 속 용이 발톱을 휘두른 것만 같은 흉흉하고 이질적인 파괴력.“하, 합격! 대체 어디서 굴러먹다 온 기인인지는 몰라도 솜씨 하나는 기가 막히군. 네놈의 이름이 무엇이냐!”수비대장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사내는 무심한 손길로 검에 묻은 핏자국을 털어내며 투박한 가죽 가면 너머로 낮게 읊조렸다.“……카일.”수비대장이 합격패를 던져주며 호탕하게 웃었으나, 남자의 금빛 눈동자는 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있었다.합격패를 꽉 틀어쥔 카일, 아니 레온은 가면 너머로 드라켄의 거대한 황성을 쏘아보았다.카시안의 서쪽 별궁에 들어앉았다는 천박한 정부, 블랑 백작.국경의 술집에서 떠도는 소문은 퍽 기가 막혔다.출신도 모르는 창부 주제에 황제를 홀려 백작 작위
드라켄 제국의 무력을 지탱하는 거대한 심장, 페온 공작저의 은밀한 지하 밀실.매캐한 쇳물 냄새와 눅눅한 습기가 뒤엉킨 공기 속에서, 아이린은 탁자 위에 놓인 조잡한 양피지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고작 이것뿐인가?”서늘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심복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서부 국경으로 빼돌린 철광석의 양이 지난달보다 턱없이 부족하잖아. 내가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라고 널 살려두고 있는 줄 알아?”“공녀님. 송구하오나 최근 국경 수비대의 검문이 짐작보다 훨씬 삼엄해졌습니다. 상단의 짐마차 밑바닥을 이중으로 개조해 넘기고는 있으나,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양에 한계가…….”“핑계 대지 마!”아이린이 신경질적으로 양피지를 구겨 바닥에 내던졌다.“서연합의 미친개에게 뼈다귀를 넉넉히 던져주어야, 그놈들이 무기를 벼리고 날뛰며 카시안의 발목을 물어뜯을 것 아니야. 무기를 주조할 철이 부족하다며 벨모어 그 자가 또 불만을 표하면 네놈이 목을 내놓을 텐가?”그녀의 흉흉한 기세에 심복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당장 다음 달부터 수송량을 두 배로 늘려.”“두 배 말씀이십니까? 발각이라도 되는 날엔 공작가의 목이……!”“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아이린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밀실 안을 초조하게 거닐었다. 화려한 드레스 자락 아래로 감춰진 그녀의 속내는, 겉모습만큼이나 검고 탐욕스러웠다.처음엔 당연히 황후의 자리가 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국 제일의 권력과 부를 가진 페온 가문의 안주인 자리는 카시안의 옆자리여야 격이 맞으니까.하지만 카시안은 제 곁의 내밀한 자리를 내어주기는커녕, 출처도 모를 천박한 계집을 데려와 끼고 돌았다.그런 블랑을 밀어내기 위해서 타티아나를 동쪽 별궁에 슬쩍 밀어 넣어 판을 깔아준 것도 아이린 자신이었다.그런데 그 진흙탕 싸움을 구경하다 보니, 문득 불쾌한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천박한 계집들을 곁에 두고 이리저리 굴러먹은 사내를 굳이 내 반려로 취해야 할까?’아이린의 차
카시안이 예고도 없이 서쪽 별궁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을 때, 처소 안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얼어붙어 있었다.“폐하? 갑자기 어쩐 일로…….”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블랑이 놀란 듯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카시안의 시선은 블랑이 아닌, 그녀의 발치에 꿇어앉아 차를 내리던 에다에게 곧장 꽂혔다.탐색전의 시작.카시안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블랑. 네 시녀가 백합관의 안주인에게 아주 단단히 눈도장을 찍은 모양이군.”“……예?”“그녀가 이 아이의 손길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고집을 부려. 내 친히 이 아이를 동쪽 별궁으로 데려갈까 하는데.”순간, 블랑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카시안은 그 찰나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블랑의 속내를 파헤치려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일부러 에다를 보낸 것이 아니냐는, 소리 없는 압박이었다.그런데 그 순간, 카시안의 계산을 완벽하게 부숴버리는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폐, 폐하! 부디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찻잔을 내려놓은 에다가 다급하게 카시안의 발치로 기어가 납작 엎드린 것이다.“에다, 너 지금 무슨……!”“마님,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저도 살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에다는 블랑의 당황한 부름을 잔인하게 끊어내며, 카시안을 향해 필사적으로 호소했다.“폐하께서 동쪽 별궁의 마님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시는지 똑똑히 보았습니다!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작위뿐인 백작의 곁에서 매일같이 불안에 떠느니, 차라리 진정한 태양의 그늘 아래서 뼈를 묻고 싶습니다! 부디 제 충성을 백합관에 바치게……!”짝-!!에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허공을 가른 블랑의 손이 자비 없이 에다의 뺨을 후려쳤다.“이, 이 천박하고 배은망덕한 것!”고개가 꺾인 에다의 입술이 터져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블랑은 멈추지 않았다.독기가 바짝 오른 눈동자, 수치심과 배신감에 사시나무처럼 떠는 두 손.영락없이 믿었던 수족에게 뒤통수를 맞고 이성을 잃은 얼굴이었다.“그렇게 가고 싶었으면 내게 청을 할 것이지, 감히 누구에게……!
짙은 수증기가 맴도는 백합관의 욕실.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갔다 나왔음에도, 타티아나의 표정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아파. 살살 좀 닦아내지 못해?”“죄, 죄송합니다, 마님!”시녀가 사색이 되어 수건을 거두었지만, 타티아나의 신경질적인 짜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따라 몸을 감싸는 고급스러운 백합 오일의 향기마저 겉도는 기분이었다.전혀 개운치 않았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짓누르는 듯한 뻐근함과, 출산 이후로 묘하게 무거워진 몸의 피로가 전혀 가시질 않았다.문득 며칠 전, 제 수발을 들었던 낯선 시녀의 손길이 떠올랐다.이름조차 묻지 않았던 밑밑한 인상의 하녀였건만, 그 손끝의 압력만큼은 기가 막혔다.뭉친 근육의 결을 정확히 찾아내어 부드럽게 풀어주며, 뼛속까지 스며든 피로를 씻은 듯이 녹여내던 완벽한 마사지.그날 밤엔 징그럽게도 옥죄어 오던 압박감을 잊고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었는데.“너, 이리 와서 어깨 좀 주물러 봐.”“예? 예, 마님.”타티아나의 퉁명스러운 지시에 시녀가 긴장으로 굳은 손을 한 채 다가왔다. 고급스러운 백합 오일을 듬뿍 바른 손바닥이 타티아나의 매끄러운 어깨 위로 조심스레 안착했다.하지만 그뿐이었다. 피부 겉면만 미끄덩거리며 맴도는 손길은 그저 간지럽고 불쾌하기만 할 뿐, 잔뜩 뭉친 근육의 피로를 풀어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장난해? 파리 쫓는 것도 아니고, 손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잖아! 제대로 안 주물러?”“아, 앗, 죄, 죄송합니다, 마님! 당장 다시……!”혼비백산한 시녀가 황급히 손끝에 잔뜩 체중을 실어 꾹 눌렀다. 그러나 근육의 결을 전혀 읽지 못한 채, 그저 딱딱하게 굳은 어깻죽지를 억센 악력으로 짓뭉개버린 꼴이었다.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타티아나의 뒷목을 타고 찌릿하게 뻗쳤다.“아악! 거기가 아니잖아, 이 멍청한 것아!”“히익! 소, 송구합니다……!”“무식하게 힘만 주고 누르면 다인 줄 알아? 살이 다 으스러지겠어! 어쩜 솜씨가 이다지도 조잡하고 형편없어!”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타티
바닥에 엎드린 에다의 입술 사이로 기어코 그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화장대를 쾅, 하고 내리쳤던 요란한 마찰음이 밀실의 공기 속으로 서서히 흩어졌다.숨 막히는 적막이 내려앉았다.에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블랑의 눈동자에서, 일순간 흉흉하게 일렁이던 분노가 기조조차 없이 증발했다.천박하고 신경질적인 가짜 정부의 가면이 스르르 벗겨지고, 그 자리에 아르젠 제국 안주인의 얼굴이 내려앉았다.“……일어나.”낮고 기품 있는 음성이었다.아까 전 핏대를 세우며 악을 쓰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뼛속까지 고귀한 지배자의 억양.그 목소리에 에다가 흠칫 어깨를 떨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범벅이 된 시선 끝에, 서늘하리만치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웃고 있는 주군이 서 있었다.“아직 카시안의 눈을 속일 연기가 한참 남았건만. 기어코 내 가면을 벗겨내는구나, 에다.”“폐하……!”“쉿. 목소리 낮춰. 네가 방금 내 입으로 이곳의 룰을 말해주지 않았나. 내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블랑은 우아한 손길로 치맛자락을 털어내며 다시 소파에 깊숙이 기대어 앉았다. 카시안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불안한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판을 쥐고 흔들 포식자만이 남아 있었다.“동쪽 별궁의 문턱이 높다지? 네 얄팍한 핑계로는 두 번 다시 접근하기 어려울 터.”하지만 에다는 주눅 드는 대신,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로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르센 최고의 시녀이자, 다시는 실망 시키지않을 유능한 심복의 얼굴이었다.“아니요. 곧 그곳에서 먼저 저를 찾을 겁니다.”“먼저 널 찾는다고?”“예. 그럼 폐하, 아니, 마님께서는 그저 못 이기는 척 저를 그곳으로 보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에다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블랑이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가져갔던 백합 오일로, 아주 공을 들여 마사지를 해두고 왔거든요.”“……마사지?”“감옥 같은 성역에 갇혀 몸도 마음도 잔뜩 굳어 있던 터라, 제 손길이 아주 달게 느껴졌을 겁니다. 성심성의껏 주물러 놓고 왔지요.”그
서쪽 별궁으로 돌아왔을 때, 블랑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처소의 문을 밀고 들어섰지만, 으레 다가와 숄을 받아 들던 부산스러운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불 꺼진 난로와 차갑게 식은 찻주전자. 넓은 거실에는 사람의 온기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에다?”어깨에 두른 케이프를 벗어 소파에 던졌지만, 황급히 다가와 옷가지를 챙기는 익숙한 손길은 없었다.침실과 드레스룸까지 슬쩍 훑어보았으나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아이린을 만나고 온 터라 예민해진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미간을 좁힌 블랑이 몸을 돌려 다시 복도로 나섰다.마침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는 하급 시종 하나가 눈에 띄었다.“거기.”“예, 예? 부르셨습니까요, 마님!”“에다가 보이지 않군. 주인이 비운 처소를 내팽개치고 어딜 간 거지?”서릿발 같은 음성에 시종이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그, 그것이……. 아까 별궁을 빠져나가 동쪽 별궁 부근을 기웃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동쪽 별궁?”시종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블랑의 심기를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예, 예. 어찌나 발걸음이 바쁘던지……. 품에는 백합 오일이랑 고급 목욕 소품들을 바구니에 한가득 챙겨 들고서요.”블랑의 입매가 싸늘하게 굳었다.‘설마, 주인의 물건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알랑거리러 간 것일까?’전생의 참혹한 운명에서 자결하려던 에다를 거두어,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드라켄의 포로로 위장시켜 빼돌려 주었다.그런데 또다시 제 욕망을 채우려고 그 동쪽 별궁의 여자에게 줄을 대러 갔다?‘두 발 달린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내 목숨을 빚지고도 또다시 그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겠다는 건가.’배신감과 서늘한 분노가 가라앉기도 전, 굳게 닫혀 있던 처소의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에다가 주변을 기민하게 살피며 은밀히 스며들어왔다.소파에 기대어 앉은 블랑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어딜 쏘다니다 온 거지?”“마, 마님. 다녀오셨습니까.”“주인이 자리를 비운
“황후 폐하를 들라 하라.”레온은 목소리 아래 깔린 비릿한 긴장을 억눌렀다.대접견실의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리자, 은빛 스며든 틈 사이로 한 겹의 드레스 자락이 부드러운 광채를 머금으며 모습을 드러냈다.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은빛과 금빛이 기묘하게 얽혀 흐르는 듯한 머리칼이었다. 햇빛 아래 흔들리는 그 물결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바람 한 점 스치지 않은 얼음 조각처럼 투명하고도 서늘했다.은회색과 청색이 겹겹이 섞인 로제의 눈동자가 천천히 방 안을 훑었다. 그녀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얇은 실크 드레스가 허벅지 곡선을 따
아르센의 수도 칼텐부르크.나른한 봄볕 아래 평화롭던 도시의 공기는, 일순간 비릿한 피 냄새와 뜨거운 무쇠의 열기에 짓눌려 굳어버렸다.먼저 들린 것은 말발굽 소리가 아니었다.규칙적인 철제의 파동, 대지를 가르는 짐승의 박동이었다.“……왔다.”군중 속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성문 너머로 검붉은 그림자가 폭포수처럼 들이닥쳤다.북방의 포식자, 드라켄 제국의 황실 근위대.태양 빛을 집어삼킬 듯 번쩍이는 흑철색 갑옷들은 흙먼지 하나 없이 오만했다.300명의 기사들이 내뿜는 살기는 도시를 순식간에 질식시킬 듯 무거웠다.
엘런이 사라진 뒤, 응접실에는 지독한 혐오의 침묵만이 남았다.“폐하…… 괜찮으십니까? 저자가 감히…….”참모가 사색이 되어 다가왔지만, 차마 끝까지 말을 다 하지는 못했다.카시안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머릿속엔 아까 자신을 도발하던 로제의 서늘한 눈빛이 떠올랐다.“미친놈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역겹군.”“그렇긴 하지만…. 얼핏 보면 난봉꾼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세를 보는 눈이 날카롭습니다.”“알아. 그러니까 엮이지 말아야지.”카시안은 천천히 잔을 흔들었다. 붉은 와인이 마치 피처럼 일렁였다
대접견실의 문이 닫히자, 레온은 그대로 굳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로제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저의 폐하를 너무나 연모하거든요.]그 말은 독처럼 달콤했고, 동시에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연모……?’레온은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로제는 눈만 마주쳐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던 수줍은 여인이었다.그리고 자신은 어떠했나.첫날밤조차 그녀가 겁을 먹을까 봐 제대로 안지도 못했다.그런데 오늘 본 로제는 달랐다.카시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밤일’을 운운하고,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