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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作者: 양순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06 10:09:08

별궁의 안뜰에 발을 들여놓자, 짙은 붉은 망토를 걸친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몸을 낮추었다.

“드라켄의 위대한 포식자를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유들유들하고 관능적인 인상.

엘런은 자신의 매력을 과시하듯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끈적한 욕망이 서려 있었다.

“서쪽 연합의 제2왕자, 엘런입니다. 어제 연회는 정말 대단했죠. 아르센의 황후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다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더군요. 폐하께서도 그 맛을 보셨어야 했는데.”

카시안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서연합의 놈들은 왜 하나같이 이토록 천박한지.

“전하께서는 그 향기에 취해 머리까지 마비되신 모양이군. 잘 즐기고 가시오.”

카시안이 무심하게 지나치려 하자, 엘런이 비릿하게 웃으며 그를 막아섰다.

“에이, 폐하. 사내끼리 왜 이러십니까. 저 혼자선 이 밤이 미치도록 심심해서 말이죠.”

카시안은 말없이 엘런을 바라봤다.

그의 앞에서 저런 사적인 농을 던질 수 있는 자도, 드문 일이었다.

참모가 조용히 기침을 했고, 그제야 엘런은 체면을 차리듯 말투를 고쳐 말했다.

“아, 물론! 폐하께서 여유가 되신다면 말입니다. 실은 폐하를 꼭 한번 뵙고 싶어서 일부러 기다렸거든요. 전쟁의 책략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르센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카시안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 따라오시오.”

.

.

별궁 안쪽의 응접실.

향초의 눅진한 향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엘런은 술잔을 흔들며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아르센은 참 모든 게 탐스럽죠. 예법도, 음식도…… 무엇보다 그 황후, 로셀린 말입니다.”

카시안의 손끝이 잔 위에서 멈췄다. 엘런은 그 반응을 즐기듯 혀로 입술을 축였다.

“솔직히 말하면, 본국에 있는 제 아내보다 수천 배는 더 자극적이더군요. 제 아내는 드라켄 출신이라 그런지 얼음처럼 차갑고 딱딱해서 침대 위에서도 나무토막 같거든요. 그런데 아르센의 황후는…….”

엘런의 눈이 탐욕스럽게 번들거렸다.

“만지면 데일 것처럼 뜨거운 불꽃 같지 않습니까? 그 눈빛하며, 몸짓하며. 사내라면 한 번쯤 저 여자를 무너뜨리고 울리고 싶다는 생각, 안 하셨을 리가 없는데.”

카시안의 손에 든 잔에 미세한 실금이 갔다.

“전하의 비가 드라켄 출신이라니 안타깝군. 우리 제국의 여인들은 수준 낮은 수컷에게는 원래 차가운 법이라.”

“하하, 죄송합니다.”

엘런은 자기 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드라켄의 여인을 비하하려던 것은 아닌데, 폐하의 심기를 거슬렀나 보군요. 아무튼 그 미모라면 이혼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릴 만하지 않습니까?”

엘런은 옅은 홍조를 띠었지만, 그 홍조는 수줍음이 아니라 위험한 흥분에 가까웠다.

“그런데, 아내가 있는 전하에게 그 고고한 황후가 곁을 줄까요?”

카시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의 기류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흠, 이혼을 당하면… 후궁 자리를 주는 것도 감지덕지 아닐까요?”

“후궁 자리에 만족할 여인은 아닌 듯하던데….”

“아르센의 황후로 있을 때보다 가질 수 있는 게 더 많다면 또 모를 일이죠.”

“하지만 아르센의 황제는 누구보다 너그러운 것 같으니, 이혼당할 일은 없을 텐데.”

잔을 만지작 거리던 엘런은 작은 웃음을 지었다.

“황제의 의지가 없어도 혼인을 깨는 방법은 많죠. 가령…… 추잡한 스캔들 같은 거 말입니다. 황후의 그 정숙한 드레스 아래가 다른 사내의 손길에 젖어있는 걸 황제가 보게 된다면 어떨까요?”

카시안의 손끝이 아주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탁자 위에 닿았다.

“내게 이런 추잡한 계획을 털어놓는 이유가 뭐지?”

엘런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웃고 있는 입술과 달리, 눈동자는 차갑고 비어 있었다

“저는 예쁜 것을 사랑해요. 그리고 아르센의 황후는…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갖고 싶은 아름다운 것들 중의 하나고요. 그러니 제가 무슨 짓을 하든… 모른 척해주셨으면 합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카시안의 얼굴엔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그의 눈빛엔 단단한 경계가 번졌다

“그건 부탁인가요? 아니면… 서연합 왕국이 내게 하는 협박인가요?”

엘런은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당연히 부탁이죠. 그리고 폐하께서도 아르센과의 동맹관계가 점점 마음에 들지 않으시잖아요.”

응접실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고, 그는 입술에 잔을 스치며 말을 이었다.

“드라켄의 아이들이 아르센의 노래를 부른다죠?”

그의 목소리는 호기심 어린 아이처럼, 그러나 숨을 죽일 만큼 위험한 기류를 품고 있었다.

“아르센의 노래를 부르고, 그들의 책을 읽고 자란 백성은… 과연 누구의 백성일까요?”

탕!

잔을 내려놓는 카시안의 입술 끝이 혐오감에 꿈틀거렸다.

“…농담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는군.”

“진정하세요.”

엘런의 눈빛이 반짝였다.

“전 폐하를 지켜봤습니다. 폐하께서 아르센을 둘러보는 그 시선을요. 보니까 어떠셨나요?”

몸을 기울인 엘런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르센은 지킬 가치보다 차지할 가치가 더 크지 않던가요?”

카시안은 잔을 들어 입술에 가볍게 대었다.

대답 대신, 한 박자 늦은 눈빛으로 엘런을 바라봤다.

“그래서 서쪽 연합이 차지하기라도 하려고?”

엘런은 한숨을 푹 쉬며 웃었다.

“여태 제 이야기를 어떻게 들으셨어요. 저는 황후 폐하만 있으면 된다니까요. 황제 자리는 폐하께서 가지세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또렷하고 선명했다.

“황후의 스캔들로 혼란스러울 때 딱! 움직이시면 쉽게 손에 넣으실 수 있을 겁니다.”

카시안의 눈이 아주 느리게 깜빡였다.

“내가 싫다면?”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렇다고 제 계획이 달라질 것은 아니라서요.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말아 달라는 제 부탁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굳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굳이 수고스럽게 찾아와서 하는 이유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제 말의 의미를 아직 이해못하셨군요.”

긴장감이 감도는 그 와중에 엘런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은 공손하지만, 그 속에 섬뜩한 광기가 담겨 있었다.

“부디 끼어들지 마세요. 로셀린 황후와 저의 사정에.”

하마터면 목 끝에 조금 남아있던 술 때문에 기침이 터칠 뻔했다.

간신히 침을 삼킨 카시안은 입을 열었다.

“내가 황후에게 관심이라도 있어보였나?”

“폐하께서 관심이 있어 보였다기보다는, 라이벌 견제라고 생각해 주세요.”

정적이 흘렀다.

카시안은 탁자 위에 놓인 잔을 내려다보았다.

역겨움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드라켄의 그 고고하던 여자가 선택한 결말이 고작 이런 난봉꾼의 옆자리라니.

“궁금하군요.”

카시안이 아주 낮고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이러고 다니는 걸…… 드라켄 출신의 그 고고한 부인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아, 그 여자요? 알든 모르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제게 관심도 없는 껍데기일 뿐이니까요.”

“…….”

“왜 물으십니까? 혹시 폐하께서도 남의 가정사가 걱정되셔서?”

엘런이 장난스럽게 되물었지만, 카시안의 눈빛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럴 리가.”

카시안은 싸늘하게 일축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게 안타까워서.”

“예?”

“아닙니다. 왕자비에게 안부나 전해주시오. 여전히 꼿꼿하게 잘 버티고 있는지.”

그 목소리엔 걱정 한 톨 섞이지 않은, 지독한 냉소가 서려 있었다.

“하하, 전해드리죠. 뭐, 듣고도 표정 하나 안 바뀌겠지만.”

술잔을 다 비운 엘런은 입술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께서 아르센을 가지고 싶어 하셨으면 정말 유익한 대화가 되었을 텐데…, 아직은 생각이 다른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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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2화

    아르센의 수도 칼텐부르크.나른한 봄볕 아래 평화롭던 도시의 공기는, 일순간 비릿한 피 냄새와 뜨거운 무쇠의 열기에 짓눌려 굳어버렸다.먼저 들린 것은 말발굽 소리가 아니었다.규칙적인 철제의 파동, 대지를 가르는 짐승의 박동이었다.“……왔다.”군중 속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성문 너머로 검붉은 그림자가 폭포수처럼 들이닥쳤다.북방의 포식자, 드라켄 제국의 황실 근위대.태양 빛을 집어삼킬 듯 번쩍이는 흑철색 갑옷들은 흙먼지 하나 없이 오만했다.300명의 기사들이 내뿜는 살기는 도시를 순식간에 질식시킬 듯 무거웠다.

  •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1화. 프롤로그

    패전국의 황후가 맞이한 결말은 비참했다.적국 황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사치였다.“정말 이 여자를 두고 갈 텐가, 아르센의 황제여?”로제는 고개를 들어 카시안을 보았다.피 묻은 검을 쥔 북방의 포식자.그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러나 지독히도 오만한 시선으로 로제의 남편을 조롱하고 있었다.“……제국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결단이오.”레온은 차마 로제 쪽을 보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로제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밤마다 자신의 생명력과 마력을 쥐어짜 내어 그 핏줄에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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