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별궁의 안뜰에 발을 들여놓자, 짙은 붉은 망토를 걸친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몸을 낮추었다.
“드라켄의 위대한 포식자를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유들유들하고 관능적인 인상.
엘런은 자신의 매력을 과시하듯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끈적한 욕망이 서려 있었다.
“서쪽 연합의 제2왕자, 엘런입니다. 어제 연회는 정말 대단했죠. 아르센의 황후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다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더군요. 폐하께서도 그 맛을 보셨어야 했는데.”
카시안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서연합의 놈들은 왜 하나같이 이토록 천박한지.
“전하께서는 그 향기에 취해 머리까지 마비되신 모양이군. 잘 즐기고 가시오.”
카시안이 무심하게 지나치려 하자, 엘런이 비릿하게 웃으며 그를 막아섰다.
“에이, 폐하. 사내끼리 왜 이러십니까. 저 혼자선 이 밤이 미치도록 심심해서 말이죠.”
카시안은 말없이 엘런을 바라봤다.
그의 앞에서 저런 사적인 농을 던질 수 있는 자도, 드문 일이었다.
참모가 조용히 기침을 했고, 그제야 엘런은 체면을 차리듯 말투를 고쳐 말했다.
“아, 물론! 폐하께서 여유가 되신다면 말입니다. 실은 폐하를 꼭 한번 뵙고 싶어서 일부러 기다렸거든요. 전쟁의 책략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르센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카시안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 따라오시오.”
.
.
별궁 안쪽의 응접실.
향초의 눅진한 향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엘런은 술잔을 흔들며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아르센은 참 모든 게 탐스럽죠. 예법도, 음식도…… 무엇보다 그 황후, 로셀린 말입니다.”
카시안의 손끝이 잔 위에서 멈췄다. 엘런은 그 반응을 즐기듯 혀로 입술을 축였다.
“솔직히 말하면, 본국에 있는 제 아내보다 수천 배는 더 자극적이더군요. 제 아내는 드라켄 출신이라 그런지 얼음처럼 차갑고 딱딱해서 침대 위에서도 나무토막 같거든요. 그런데 아르센의 황후는…….”
엘런의 눈이 탐욕스럽게 번들거렸다.
“만지면 데일 것처럼 뜨거운 불꽃 같지 않습니까? 그 눈빛하며, 몸짓하며. 사내라면 한 번쯤 저 여자를 무너뜨리고 울리고 싶다는 생각, 안 하셨을 리가 없는데.”
카시안의 손에 든 잔에 미세한 실금이 갔다.
“전하의 비가 드라켄 출신이라니 안타깝군. 우리 제국의 여인들은 수준 낮은 수컷에게는 원래 차가운 법이라.”
“하하, 죄송합니다.”
엘런은 자기 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드라켄의 여인을 비하하려던 것은 아닌데, 폐하의 심기를 거슬렀나 보군요. 아무튼 그 미모라면 이혼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릴 만하지 않습니까?”
엘런은 옅은 홍조를 띠었지만, 그 홍조는 수줍음이 아니라 위험한 흥분에 가까웠다.
“그런데, 아내가 있는 전하에게 그 고고한 황후가 곁을 줄까요?”
카시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의 기류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흠, 이혼을 당하면… 후궁 자리를 주는 것도 감지덕지 아닐까요?”
“후궁 자리에 만족할 여인은 아닌 듯하던데….”
“아르센의 황후로 있을 때보다 가질 수 있는 게 더 많다면 또 모를 일이죠.”
“하지만 아르센의 황제는 누구보다 너그러운 것 같으니, 이혼당할 일은 없을 텐데.”
잔을 만지작 거리던 엘런은 작은 웃음을 지었다.
“황제의 의지가 없어도 혼인을 깨는 방법은 많죠. 가령…… 추잡한 스캔들 같은 거 말입니다. 황후의 그 정숙한 드레스 아래가 다른 사내의 손길에 젖어있는 걸 황제가 보게 된다면 어떨까요?”
카시안의 손끝이 아주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탁자 위에 닿았다.
“내게 이런 추잡한 계획을 털어놓는 이유가 뭐지?”
엘런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웃고 있는 입술과 달리, 눈동자는 차갑고 비어 있었다
“저는 예쁜 것을 사랑해요. 그리고 아르센의 황후는…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갖고 싶은 아름다운 것들 중의 하나고요. 그러니 제가 무슨 짓을 하든… 모른 척해주셨으면 합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카시안의 얼굴엔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그의 눈빛엔 단단한 경계가 번졌다
“그건 부탁인가요? 아니면… 서연합 왕국이 내게 하는 협박인가요?”
엘런은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당연히 부탁이죠. 그리고 폐하께서도 아르센과의 동맹관계가 점점 마음에 들지 않으시잖아요.”
응접실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고, 그는 입술에 잔을 스치며 말을 이었다.
“드라켄의 아이들이 아르센의 노래를 부른다죠?”
그의 목소리는 호기심 어린 아이처럼, 그러나 숨을 죽일 만큼 위험한 기류를 품고 있었다.
“아르센의 노래를 부르고, 그들의 책을 읽고 자란 백성은… 과연 누구의 백성일까요?”
탕!
잔을 내려놓는 카시안의 입술 끝이 혐오감에 꿈틀거렸다.
“…농담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는군.”
“진정하세요.”
엘런의 눈빛이 반짝였다.
“전 폐하를 지켜봤습니다. 폐하께서 아르센을 둘러보는 그 시선을요. 보니까 어떠셨나요?”
몸을 기울인 엘런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르센은 지킬 가치보다 차지할 가치가 더 크지 않던가요?”
카시안은 잔을 들어 입술에 가볍게 대었다.
대답 대신, 한 박자 늦은 눈빛으로 엘런을 바라봤다.
“그래서 서쪽 연합이 차지하기라도 하려고?”
엘런은 한숨을 푹 쉬며 웃었다.
“여태 제 이야기를 어떻게 들으셨어요. 저는 황후 폐하만 있으면 된다니까요. 황제 자리는 폐하께서 가지세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또렷하고 선명했다.
“황후의 스캔들로 혼란스러울 때 딱! 움직이시면 쉽게 손에 넣으실 수 있을 겁니다.”
카시안의 눈이 아주 느리게 깜빡였다.
“내가 싫다면?”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렇다고 제 계획이 달라질 것은 아니라서요.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말아 달라는 제 부탁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굳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굳이 수고스럽게 찾아와서 하는 이유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제 말의 의미를 아직 이해못하셨군요.”
긴장감이 감도는 그 와중에 엘런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은 공손하지만, 그 속에 섬뜩한 광기가 담겨 있었다.
“부디 끼어들지 마세요. 로셀린 황후와 저의 사정에.”
하마터면 목 끝에 조금 남아있던 술 때문에 기침이 터칠 뻔했다.
간신히 침을 삼킨 카시안은 입을 열었다.
“내가 황후에게 관심이라도 있어보였나?”
“폐하께서 관심이 있어 보였다기보다는, 라이벌 견제라고 생각해 주세요.”
정적이 흘렀다.
카시안은 탁자 위에 놓인 잔을 내려다보았다.
역겨움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드라켄의 그 고고하던 여자가 선택한 결말이 고작 이런 난봉꾼의 옆자리라니.
“궁금하군요.”
카시안이 아주 낮고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이러고 다니는 걸…… 드라켄 출신의 그 고고한 부인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아, 그 여자요? 알든 모르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제게 관심도 없는 껍데기일 뿐이니까요.”
“…….”
“왜 물으십니까? 혹시 폐하께서도 남의 가정사가 걱정되셔서?”
엘런이 장난스럽게 되물었지만, 카시안의 눈빛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럴 리가.”
카시안은 싸늘하게 일축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게 안타까워서.”
“예?”
“아닙니다. 왕자비에게 안부나 전해주시오. 여전히 꼿꼿하게 잘 버티고 있는지.”
그 목소리엔 걱정 한 톨 섞이지 않은, 지독한 냉소가 서려 있었다.
“하하, 전해드리죠. 뭐, 듣고도 표정 하나 안 바뀌겠지만.”
술잔을 다 비운 엘런은 입술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께서 아르센을 가지고 싶어 하셨으면 정말 유익한 대화가 되었을 텐데…, 아직은 생각이 다른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쾅—!대리석 바닥을 부술 듯 짓이기며 달려온 맹렬한 발소리와 함께, 다이닝 룸의 문이 거칠게 열어 젖혀졌다.안으로 들어선 카시안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실내를 훑었다.방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바닥에는 사지가 기형적으로 꺾인 암살자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맹독에 당해 의식을 잃은 듯 보이는 카일이 널브러져 있었다."블랑."마침내 카시안의 시선이 카일의 곁에 꼿꼿하게 서 있는 블랑에게 가닿았다. 그녀의 실크 드레스 자락이 길게 찢겨 나가 있었다.카시안의 서늘한 시선이 그 거친 단면을 훑었다. 난전 중에 암살자들의 칼날에 찢긴 흔적이 아니었다.'스스로 찢었군.'그의 시선이 다시 바닥에 쓰러진 카일의 어깨로 향했다. 그녀가 제 손으로 가차 없이 뜯어낸 치맛자락은 그의 상처를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다.상황을 파악한 카시안의 눈동자가 이내 다시 블랑에게로 되돌아왔다. 그의 붉은 눈매가 불쾌함으로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녀의 하얀 손끝과 남은 치맛자락에는 미처 다 닦아내지 못한 검은 피가 묻어 있었다."그래도 빨리 오셨네요."블랑이 피 묻은 손을 젖은 냅킨으로 가볍게 닦아내며,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서늘한 얼굴로 카시안을 마주 보았다. 조금 전까지 암살자들의 칼날이 오가던 방에 있던 여자치고는 기이할 정도로 차분하고 이성적인 태도였다."이 자를 살려주세요."블랑은 떨림 없는 목소리로 바닥에 쓰러진 카일을 턱짓했다."맹독입니다. 제 목숨을 대신해 다친 자이니, 폐하께서 어떻게든 살려내 주시죠."부탁이 아니라 당당한 요구였다. 제 목숨을 빚진 호위에 대한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그 꼿꼿한 눈빛을 받으며, 카시안은 대답 대신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그리고는 핏발이 선 서늘한 눈동자로 블랑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다친 곳은."낮은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뺨과 목덜미, 드레스가 찢겨 드러난 어깨를 살피는 카시안의 손길은 강박적일 만큼 집요했다.혹여나 보이지 않는 생채기라도
순간, 타티아나의 숨이 턱 막혔다.'군사 기밀? 비밀 보급로?'속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어두운 방구석에 처박혀 매질만 당하던 내가 그딴 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엘런은 자신의 소유물인 그녀에게 전술 지도의 자락조차 보여준 적이 없었다.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모른다고 대답하는 순간, 눈앞의 유일한 동아줄이 끊어질 것이 뻔했다.카시안의 붉은 눈동자는 그녀의 쓸모를 저울질하듯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생각해. 생각해내야 해!'타티아나는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뒤집었다. 엘런이 술에 취해 지껄였던 끔찍한 말들, 채찍을 휘두르며 퍼붓던 욕설의 파편들. 살아남기 위해 바닥을 박박 긁듯 기억을 파헤치던 그녀의 뇌리에 불현듯 몇 가지 조각들이 스쳤다."아, 알아! 나, 나 알아, 얀!"타티아나가 카시안의 소매를 부여잡으며 허겁지겁 말을 쏟아냈다."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었어. 엘런이 술잔을 집어 던지며 욕을 했거든. '빌어먹을 검은 뱀 계곡'이라고! 비가 오면 진흙탕이 돼서 군량미 수레가 도무지 빠져나오질 못한다고 성질을 냈어!""검은 뱀 계곡……."마수들이 득실거려 아무도 쓰지 않는 버려진 사지(死地).서연합의 은밀한 주력 보급로가 그곳이었단 말인가. 카시안의 눈빛이 흥미롭게 번뜩였다. 그 반응에 용기를 얻은 타티아나가 덜덜 떨리는 입술로 다음 퍼즐을 다급히 끼워 맞췄다."그, 그리고 제라드! 남부의 제라드 백작! 엘런이 그 사람 서신을 찢으면서 죽여버리겠다고 했어! 뒤로 무기를 빼돌리고 있다면서…… 군대를 일으키기 전에 그 늙은이 목부터 쳐야 한다고 했어!"그것은 타티아나에게는 그저 공포스러웠던 폭력의 기억일 뿐이었으나, 제국을 굴리는 황제 카시안에게는 서연합의 숨통을 한 번에 끊어버릴 가장 치명적이고 완벽한 열쇠였다.조용히 그녀의 자백을 머릿속에 조립해 낸 카시안의 입매가 진득한 호선을 그렸다.'완벽해. 적의 끊어진 보급로와, 내부에서 곪아 터질 반역자의 목줄이라니.'그는 다정한 구원자의 얼굴을 한 채, 타티아나의 눈물
같은 시각, 동쪽 별궁.타티아나는 화려한 침대 위에서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카시안이 자신을 황궁 안에 들이기는 했으나, 정작 밤을 함께 보내지는 않고 있었다.이대로 가만히 앉아 황제의 변덕을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얇고 야릇한 레이스 속옷 위에, 속살이 고스란히 비치는 실크 가운을 걸쳤다. 그리고 탁자 위의 물그릇에 손을 담가, 제 창백한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카락 주위로 물기를 뚝뚝 떨어뜨렸다. 흡사 끔찍한 악몽을 꾸다 깨어나 식은땀을 흘리는 가련한 여인의 그럴싸한 몰골이었다."꺄아아악!"타티아나가 허공을 향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밖에서 대기하던 시녀장이 사색이 되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마, 마님! 무슨 일이십니까!""얀…… 얀을 불러줘! 너무 무서워! 엘런이, 그 악마가 날 쫓아와!"타티아나는 숨이 넘어갈 듯 바들바들 떨며, 시녀장의 옷자락을 틀어쥐고 소리를 질렀다.시녀장이 황급히 전갈을 보내러 달려 나간 뒤, 타티아나는 텅 빈 응접실을 초조하게 서성였다.그리고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화려한 융단 위에 처연하게 웅크려 앉았다.‘문을 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곳은 여기야.’그녀는 얇은 실크 가운의 한쪽 어깨를 일부러 느슨하게 끌어내렸다. 그러자 새하얀 속살 위로 엘런의 채찍이 남긴 붉고 흉측한 흉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그리고 이렇게 하면…….”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가느다란 양팔을 교차해 어깨를 감싸 안으며,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파들파들 떠는 시늉을 했다.“완벽하지.”'얀은 절대 이 상처를 외면하지 못해. 그의 동정심이야말로, 이곳에서 살아남을 내 가장 확실한 무기니까.'..얼마 지나지 않아, 굳게 닫혀 있던 무거운 문이 열렸다.카시안의 눈동자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화려한 융단 위였다. 그곳에는 타티아나가 애처롭게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얇은 실크 가운이 어색하게 흘러내려, 그녀의 하얀 어깨를 가로지르는 흉측한 붉은 흉터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그 작위
마치 혈관 속에 끓는 쇳물을 들이부은 듯한,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기이한 작열감과 마비 증세가 어깨에서부터 천천히 뻗어나가고 있었다.독(毒)이었다.하지만 카일에게는 그 낯선 감각을 곱씹으며 쓰러질 여유 따위가 없었다."카, 카일……!"블랑의 당혹스러운 부름을 뒤로한 채, 카일은 바닥을 박차고 다시 튀어 올랐다. 독 기운이 전신의 근육을 마비시키기 전에 이 상황을 끝내야만 했다."죽어!"남은 두 명의 암살자가 일제히 단검을 치켜들고 쇄도했다. 그러나 카일의 그들의 숨통이나 목을 노리지 않았다. 배후를 캐내려면 놈들의 혀가 온전히 움직여야 했으니까.퍼억-!단숨에 거리를 좁힌 카일의 묵직한 검면이 첫 번째 암살자의 다리를 무자비하게 짓부수었다."끄아아악!"비명과 함께 놈이 고꾸라지기가 무섭게, 카일은 지체 없이 몸을 회전시켰다. 허리를 비틀어 올린 반동을 고스란히 실어 후려친 다리가 두 번째 놈의 흉부를 벼락같이 걷어찼다.갈비뼈가 함몰되는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놈은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대리석 바닥에 처박혔다.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몸놀림.블랑은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불현듯, 등골을 타고 서늘한 깨달음이 스쳤다.'저런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투기장에 내던져졌다고?'그렇다면 검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해 허우적대던 그 나약한 사내가 살아남았을 리 만무했다.지긋지긋하고 원망스러웠으나, 한때는 연을 맺었던 남편이다. 블랑은 차가운 흙바닥에서 눈을 감았을 그의 고독한 마지막을 그리며, 속으로 아주 짧고 고요한 애도를 보냈다.'잘 가, 레온. 그곳에선 부디 평안하기를.'그 사이에 바닥에 굴렀던 첫 번째 암살자가 기겁하며 다시 독 묻은 단검을 쥐고 발악했으나, 카일은 놈의 손목의 힘줄을 가차 없이 끊어버리고는 턱을 걷어차 그대로 기절시켰다.불과 수 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세 명의 암살자가 사지가 꺾이고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하아, 하아……."카일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카일이라….”블랑은 그 이름을 입안에서 느릿하게 굴려보았다."용병치고는 꽤 단정한 이름이네."그녀의 무심한 시선이 사내의 덩치와 투박한 가죽 가면을 다시 한번 훑어내렸다."고향은 어디지? 그리고 그 얼굴은... 어쩌다 그렇게 흉측하게 망가진 거야?""어릴 때부터 떠돌아 고향 같은 건 모릅니다. 얼굴은……."카일은 잠시 뜸을 들이다, 긁히는 쇳소리로 대답했다."서연합의 노예 검투장에서, 마수들과 뒹굴다 입은 흉터입니다. 그중에 불을 쓰는 짐승이 있었거든요."서연합의 노예 검투장.그 단어가 복도의 공기를 가르는 순간,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리려던 블랑의 어깨가 미세하게 멈칫했다.블랑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엘런의 손에 의해 목에 굵은 쇠사슬이 묶인 채, 질질 끌려가며 절규하던 레온의 마지막 모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살아남았을까.'검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던 그 나약한 남자가, 마수들이 득실거리는 그 지옥 같은 사지에서 아직 숨이라도 붙어 있을까.하지만 흔들림은 찰나였다. 블랑은 이내 꽉 쥐었던 치맛자락을 놓으며 차갑게 눈을 떴다.'아니, 이제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그는 자신의 무능함으로 자초한 길을 간 것뿐이다. 그가 살아남든 짐승의 먹이가 되든, 이미 자신과는 완벽하게 끊어진 인연이었다."그래. 험한 곳에서 굴러먹은 만큼, 눈치는 빠르겠네. 앞으로 내 등 뒤를 확실히 지켜."블랑은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려 다이닝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녀의 그 서늘하고 흔들림 없는 뒷모습을 보며, 흉곽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듯한 끔찍한 절망감을 삼켜야 했다.다이닝 룸의 긴 테이블 끝에 블랑이 자리를 잡았다. 조용한 공간에서 에다가 세팅한 정갈한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울렸다.문가의 어둠 속에 선 카일은 숨죽인 채 그녀를 주시했다. 가면 너머의 금안은 아직도 혼란과 고통 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저 여자는 로제인가, 아니면 그저 지독하게 닮은 악마의 장난인가.그때였다.김이 피어오르는 수프 그릇 앞에
[딸깍.]굳게 닫혀 있던 문이 마침내 열린 것은 해가 붉게 기우는 늦은 오후였다.카시안이 걸어 나오자, 투박한 가죽 가면을 쓴 카일의 고개가 기계처럼 뻣뻣하게 숙여졌다.시야 아래로 황제의 검은 군화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허벅지 옆에 늘어뜨린 카일의 커다란 손이 가죽 장갑이 찢어질 듯 꽉 쥐어졌다.“블랑을 지키는 데 빈틈이 없어야 해.”낮고 묵직한 명령을 남긴 카시안은 더는 지체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규칙적이고 묵직한 군화 굽 소리가 서궁의 긴 복도를 타고 점차 멀어지며, 거대한 그림자 역시 짙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에다가 따뜻한 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을 들고 침실 안으로 종종걸음을 쳤다.문을 열고 닫는 그 짧은 찰나였다. 훅 끼쳐오는 짙고 비릿한 정사의 냄새와 섞인 그녀 특유의 달큰한 체향이 사내의 폐부를 잔인하게 찌르고 들어왔다.방금 전까지 저 수건으로 무엇을 닦아냈을지, 노골적인 상상이 시야를 하얗게 태웠다. 그는 가면 속에서 턱관절이 어긋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입안 여린 살을 짓씹어 비릿한 핏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간 뒤에야 간신히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억누를 수 있었다...시간은 끔찍하게 느렸다. 핏빛 석양이 완전히 저물고 서늘한 보랏빛 어둠이 복도에 무겁게 내려앉고 나서야, 젖은 은발을 늘어뜨린 블랑이 얇은 가운 차림으로 걸어 나왔다.나른한 쾌락의 여운이 덕지덕지 묻은 그녀는 문가에 선 그를 무심히 지나쳐 곧장 다이닝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에다, 기운이 없어. 바로 식사할 수 있지?”말이 떨어지자마자, 에다가 황급히 다이닝 룸으로 종종걸음을 쳤고, 블랑 역시 그 뒤를 따라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호위의 임무를 띤 사내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달빛이 비쳐드는 긴 복도.사내의 시선이 앞서 걷는 여자의 가녀린 뒷모습에 집요하게 박혔다. 얇은 실크 가운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드러난 하얀 뒷목과 날개뼈 부근에는, 붉고 푸르게 멍든 노골적인 흔적들이 빼곡했다
엘런이 사라진 뒤, 응접실에는 지독한 혐오의 침묵만이 남았다.“폐하…… 괜찮으십니까? 저자가 감히…….”참모가 사색이 되어 다가왔지만, 차마 끝까지 말을 다 하지는 못했다.카시안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머릿속엔 아까 자신을 도발하던 로제의 서늘한 눈빛이 떠올랐다.“미친놈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역겹군.”“그렇긴 하지만…. 얼핏 보면 난봉꾼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세를 보는 눈이 날카롭습니다.”“알아. 그러니까 엮이지 말아야지.”카시안은 천천히 잔을 흔들었다. 붉은 와인이 마치 피처럼 일렁였다
대접견실의 문이 닫히자, 레온은 그대로 굳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로제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저의 폐하를 너무나 연모하거든요.]그 말은 독처럼 달콤했고, 동시에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연모……?’레온은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로제는 눈만 마주쳐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던 수줍은 여인이었다.그리고 자신은 어떠했나.첫날밤조차 그녀가 겁을 먹을까 봐 제대로 안지도 못했다.그런데 오늘 본 로제는 달랐다.카시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밤일’을 운운하고, 적
“황후 폐하를 들라 하라.”레온은 목소리 아래 깔린 비릿한 긴장을 억눌렀다.대접견실의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리자, 은빛 스며든 틈 사이로 한 겹의 드레스 자락이 부드러운 광채를 머금으며 모습을 드러냈다.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은빛과 금빛이 기묘하게 얽혀 흐르는 듯한 머리칼이었다. 햇빛 아래 흔들리는 그 물결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바람 한 점 스치지 않은 얼음 조각처럼 투명하고도 서늘했다.은회색과 청색이 겹겹이 섞인 로제의 눈동자가 천천히 방 안을 훑었다. 그녀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얇은 실크 드레스가 허벅지 곡선을 따
아르센의 수도 칼텐부르크.나른한 봄볕 아래 평화롭던 도시의 공기는, 일순간 비릿한 피 냄새와 뜨거운 무쇠의 열기에 짓눌려 굳어버렸다.먼저 들린 것은 말발굽 소리가 아니었다.규칙적인 철제의 파동, 대지를 가르는 짐승의 박동이었다.“……왔다.”군중 속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성문 너머로 검붉은 그림자가 폭포수처럼 들이닥쳤다.북방의 포식자, 드라켄 제국의 황실 근위대.태양 빛을 집어삼킬 듯 번쩍이는 흑철색 갑옷들은 흙먼지 하나 없이 오만했다.300명의 기사들이 내뿜는 살기는 도시를 순식간에 질식시킬 듯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