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화.“옷을 지을 줄 아나?”“바느질은 꽤 합니다만, 천자님의 마음에 들만한 옷을 지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꿈도 야무지구나. 누가 너 같은 것이 만든 옷을 입고 싶다더냐. 버리기 아까운 이불이니 홑청으로 옷이나 한 벌 지어보아라.”“이 귀한 비단 이불을 버린다고요? 차라리 빨아서 쓰심이.”“내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거늘!”화들짝 놀란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한번은 그냥 넘어가나, 앞으로 내 말에 어떤 토도 달지 말아라.”“저…, 그러면 누구의 옷으로 할까요?”“그런 것까지 알려주랴? 그냥 네 마음대로 해.”“예, 알겠습니다.”미옥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연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한참을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던 미옥은 목을 빼내어 연호의 모습을 살폈다.‘진짜 잠이 들었나?’거칠지만 일정한 그의 숨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하아, 이제야 살 것 같네.”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낸 미옥은 급히 손으로 입을 막으며, 연호를 쳐다보았다.다행히도 그는 깊은 잠에 빠진 듯 눈썹 한 가닥의 미동도 없었다.“그나저나 높으신 분이라 그런지 사람을 부리는 것은 타고 난 것 같네. 내가 쉬기라도 할까 봐서 옷을 지으라니.”이불 천을 뜯어낼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곧 생길 저녁밥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뭐, 아무렴 어때. 자고로 밥 많이 주는 주인이 최고라고 했는데.”**“이게…, 밤새 만든 거라고?”미옥이 내미는 옷에 연호는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었다.‘제 옷이나 해 입으라는 것도 모르고.’“네, 아직도 천이 많이 남아서 몇 벌은 더 만들 수 있습니다. 너무 귀엽지요?”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미옥은 자랑스럽게 옷을 펼쳐 보이기까지 했다.갓난아이를 싸둘 수 있는 작은 싸개 보자기와 삼, 사세 정도의 어린아이가 입을 만한 옷 한 벌이었다.“어째서 애들 옷을 지은 거지? 천이 별로였나?”“예에? 그럴 리가요. 제 생전에 이리 고운 천에다가 바느질을 해 본 것은 처음입니다. 낡은 무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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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화“새 이불과 옷을 챙겨왔습니다.”커다란 보따리에 가려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얼어붙은 치맛자락이 미옥음을 알려주었다. 연호는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안개 같은 연기 너머로 걸어오는 그녀를 응시했다.“옷을 새로 짓기라고 한 것이냐? 머리만 나쁜 줄 알았더니, 손발까지 이리 더뎌서야.”그의 목소리는 갈라진 비단처럼 거칠고 낮았다. 하륜의 집 근처에서 습격을 당하고, 하필 이곳에 머물게 된 이 모든 상황이 누군가의 정교한 설계 같아 심사가 뒤틀렸기 때문이다.‘누군가가 있다면 하륜과 황후겠지. 그리고 그들이 보낸 이 계집 또한 독을 품은 꽃일 터.’하지만 물증은 없다.그러니 그 분풀이를 눈앞의 계집에게라도 하고 싶어졌다.“아니면, 그사이 밖에서 네 주인과 다른 수작이라도 부리고 온 것인가.”미옥은 대답대신 성큼성큼 다가왔다. 처음 이 방안에 들어와서 떨던 모습은 온간데 없었다.그녀의 손이 망설임 없이 연호의 가슴팍으로 뻗었다. 옷고름을 쥔 손가락끝이 찰나의 순간 떨리는 듯 했으나, 이내 거침없이 움직였다.“……!”“죽여도 좋으니 일단 벗으시지요.”“감히 뉘 몸에 손을…!”호통에도 미옥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되려 흔들리는 것은 연호의 눈동자가 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은 곳마다 불에 데인 듯했다. 젖은 치마에서 올라오는 한기와 그녀의 체온, 그리고 상처의 열기가 뒤섞여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눅진해졌다.“이토록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군. 하륜 그자가, 침소에서의 예법을 아주 지독하게 가르친 모양이다.”연호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제 가슴팍으로 더욱 밀착시켰다. 얇은 저고리 너머로 그의 가파른 심장 박동이 미옥의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졌다.“부끄러움도 모르고 사내의 몸을 탐하는 꼴이라니.”“입고 계신 옷이 젖어있습니다.”“뭐?”“그리 더 계시다간 열까지 날겁니다. 천자께서 고작 한기 따위에 무너지시려 합니까.”미옥은 지지 않고 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갈색 눈동자 속에는 흔한 교태 대신, 지독할 정도의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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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화.“모실 아이를 보내었는데, 어찌 저를 찾으십니까.”문을 열고 들어선 하륜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조소가 섞여 있었다.“네 놈의 집에서 네 놈을 찾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인가.”“쓸모가... 없으셨습니까.”낮게 깔리는 하륜의 음성에는 묘한 박동이 섞여 있었다. 연호는 입술 끝을 비스듬히 올리며 답했다.“쓸모라…, 누구든 와서 대체 할 수 있는 거라면 없다고 봐야겠지.”하륜이 다가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극진한 태도였으나, 연호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사냥감을 살피는 맹수처럼 예리했다.“두통은 좀 어떠십니까.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지셨군요. 땀도 멎으시고.”“그러고 보니 기분이 한결 낫군.”연호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지독하게 머리를 짓누르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아니, 가벼워진 것은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팔의 통증조차 안개 너머의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그 풀떼기가 효과가 있긴 한가보군.’조금 전 미옥이 두고 간 거친 잎사귀에서 나던 쌉싸름한 향기가 코끝에 남은 듯했다. 연호는 하륜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물었다.“그 아이, 어디서 구했지?”하륜의 눈썹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는 듯, 그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미옥이 말입니까. 제 양부가 북원 평정 때 데려온 아이입니다. 어미 잃은 짐승을 거두는 게 그 노인의 취미였지요.”“북원이라… 어쩐지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더군. 황갈색 눈이라니, 타오르는 불을 가둔 것 같지 않으냐.”연호의 시선이 하륜의 얼굴을 훑었다. 하륜은 미소를 잃지 않았으나, 소매 안으로 감춘 손가락이 단단히 말려 올라갔다. 황제의 입에서 나온 미옥에 대한 감상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그저 비천한 노비일 뿐입니다. 인물이 아깝다 한들 환관의 집에서 부리는 것 외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소용이라… 글쎄. 내가 보기엔 그 아이, 이 집에 있기엔 지나치게 영민해 보이던데.”연호가 몸을 일으켜 하륜에게 바짝 다가갔다. 부상당한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위압적인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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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화.취명향 덕에 어깨의 고통은 둔감해졌지만, 이따금 머리를 찌르는 통증에 절로 눈살이 찡그려졌다. 다시 하륜을 부르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리며 미옥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이것 좀 보세요!”미옥은 품 안에 가득 찬 이름 모를 풀들을 한 움큼 들고 다가와 연호의 앞에 툭 내려놓았다.“……이게 뭐지?”연호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길쭉한 이파리에서는 모과처럼 상큼하면서도 박하처럼 매운 향이 훅 끼쳤다. 피와 취명향에 절여진 방 안의 공기를 뚫고 들어오는 생경한 냄새였다.“이름은 모릅니다. 하지만 천자님의 두통을 낫게 해줄 겁니다. 제게는 만병통치약 같은 거니까요.”“내가 머리가 아픈 건 어찌 알았지?”“당연한 것을 물어보십니다.”“뭐라?”연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으나 미옥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이 방에 들어온 지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은 저도 머리가 아픈걸요. 보나 마나 저 독한 향 연기 때문이겠지만, 추위 때문에 환기를 할 수도 없으니. 이 풀을 코 가까이에 대고 맡으세요. 상처 부위에 올려두셔도 시원하실 겁니다.”들뜬 목소리의 미옥과 달리, 연호의 표정은 급격히 가라앉았다.하륜이 보낸 여인이라기에 어떤 대단한 수작을 부릴까 싶었더니, 고작 산천에 널린 풀떼기를 가져와 수작을 부린단 말인가.“이제 네 할 일은 다 한 것이냐?”“예? 네... 행여 더 시키실 일이라도 있습니까?”천진하다 못해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대답. 연호는 허탈함 섞인 실소를 삼켰다.“가서 네 주인 놈이나 불러오너라.”자신이 가져온 풀을 들여다보지도 않는 냉담한 태도를 보며, 미옥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밖으로 나갔다.문이 닫히자마자 연호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취명향의 부작용이 이딴 풀로 해결될 것 같으면 의원들이 왜 필요하겠느냐.”그는 바닥에 떨어진 풀잎 하나를 발끝으로 툭 쳤다.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으나, 행동거지를 보니 영락없는 노비였다. 아무리 고운들, 색과 향이 없는 꽃이라면 종이로 접은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연호는 등 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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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화.'주인님을 놈이라고 부르다니 필시 높으신 분이구나.'미옥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어느 정도의 신분일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시, 신선님입니까?”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에 남자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흑발 사이로, 갈증에 젖은 눈동자가 번뜩였다.“신선이라…… 하긴, 이 향에 취하면 이곳이 극락인지 지옥인지 분간이 안 가긴 하지. 가까이 와서 확인해 보거라. 내가 신선인지, 아니면 너를 잡아먹을 괴물인지.”미옥은 침을 꿀꺽 삼키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었다. 발이 어찌나 무겁게 느껴지는지, 바닥에서 손이 올라와 자신의 발목을 움켜쥐는 것이 아닌지 착각마저 들었다.‘별채가 이리 컸었나?’열 걸음 정도를 앞으로 나가니, 사내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그의 앞에 놓인 화로에서 끝없이 피어나는 연기 때문에 이따금 흐려지긴 했지만, 선명한 이목구비까지는 가리지 못했다.서늘할 정도로 매끄러운 콧날은 마치 잘 벼려진 백자의 선 같았고, 짙게 그늘진 눈매 아래로 길게 뻗은 속눈썹은 창백한 뺨 위에 정교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흑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려 그의 비현실적인 안색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의원이 아닌 자신이 보기에도 아픈 사람인 것 같았으나, 환자라기엔 지나치게 수려하고, 고결한 기품이 흐르는 얼굴이었다. 그는 바로 앞에선 미옥의 전신을 느릿하게 훑었다.발갛다 못해 금방이라도 피가 배어 나올 것 같은 볼과 마디마디가 불거진 손을 가진 여인.‘칼바람에 얼어 터져도 본판은 그대로구나.’형편없는 꼴이었지만, 황갈색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하륜이 혼자서 저지를 일은 아니고, 분명 황후가 뒤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지? 아무리 미색이 있다 해도 노비라니.'취명향(醉冥香) 때문인지 연호는 생각을 깊게 하기가 어려웠다.그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아직도 내가 신선으로 보이느냐?”“아닙니다.”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미옥은 급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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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화.“으아, 이 한겨울에 빨래 담당이라니! 세수도 하기 싫은 날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원래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잖아!”동기의 칭얼거림이 차가운 냇가에 울려 퍼졌다. 미옥은 대꾸 대신 얼음장 같은 물에 방망이질을 해댔다.“입 말고 몸을 움직여. 그럼 좀 덜 추울 테니까.” “그러지 말고, 미옥아.”콧소리 섞인 목소리에 미옥이 경계 서린 눈초리로 고개를 돌렸다.“또 뭔 소리를 하려고?” “노 씨한테 가서 뜨거운 물 좀 달라고 해봐. 네가 부탁하면 물이 뭐야, 빨래도 대신 해줄걸?”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방망이질이나 해.”매몰찬 대꾸에 동기가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쉴 새 없이 나불거렸다.“잘 생각해 봐. 노 씨는 상급 하인이잖아. 따로 살 집도 있고 돈도 꽤 모았을걸? 인물도 저 정도면 훤칠하고.” “그렇게 괜찮으면 네가 가지 그래?” “어머머, 정말 몰라서 물어? 노 씨가 너한테 마음 있는 거 이 집안사람들이 다 아는데! 내가 너만큼만 예뻤어도 벌써 꼬셨지.”미옥의 눈매가 서늘해졌다.“종년이 예뻐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그래? 평민인 노 씨가 노비랑 혼인이라도 해줄 것 같아? 헛꿈 꾸지 마.”퍽, 퍽! 미옥의 방망이질 소리가 거칠어지자 동기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미옥아! 미옥아!”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멀리서 노 씨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필사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거 봐, 저렇게 애타게 부르잖아.” “입 닫으랬지? 누가 들을까 겁난다.”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가온 노 씨는 미옥의 앞에 서자마자 다급하게 외쳤다.“주인님께서 널 찾으신다! 일각을 넘기지 말고 오라 하셨으니 어서 뛰어!”“예? 무슨 일로요?”옆에 있던 동기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일어섰다. 하지만 노 씨는 대답할 여유도 없다는 듯 미옥의 팔을 낚아챘다.“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그의 손길에 휩쓸린 미옥이 그만 반석에 걸려 냇가에 주저앉고 말았다. 얼음물 같은 냉기가 치맛자락을 타고 순식간에 번졌다.“으아, 차가워! 옷이라도 갈아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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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화.타이트하게 조여오던 넥타이를 풀어 내리고, 자켓을 침대 위로 던지듯 벗어던졌다.도윤은 마스터 룸 안쪽, 어둠이 짙게 깔린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책상 위에 놓인 스탠드 조명 하나만이 비좁은 빛의 영토를 만들고 있었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그가 마른세수를 하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하나도 안 변했네.’가만히 떠올려 보면 아직도 중학생 꼬맹이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자신을 보고 엄마 뒤로 숨던 6살 아이의 눈빛 그대로였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렸다. 그 투명한 눈동자에 담긴 고단함을 읽어버린 순간, 도윤은 제 심장이 뜯겨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그때 가볼 걸.’중학교 졸업식 때 갈게.고등학교 입학하면 보러 갈게.고등학교 졸업하면 보러 갈게...자꾸 늘어난 지키지 못한 약속이 반복될 때쯤, 해인에게 오던 이메일도 끊어졌다.용기를 내볼까 했을 땐 남자친구가 생겼단다.복잡한 가정사에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가 알고 있던 모든 연락처를 바꾸어었다. 그게 해인을 위한 길이라 믿었던 자신의 오만함이, 결국 해인을 그 시궁창 속에 홀로 버려두게 만들었다.“지금부터 다시 해주면 돼. 대학도 보내고…….”텅 빈 서재에 그의 다짐이 무겁게 가라앉았다.“남부럽지 않게 결혼도…… 시켜줘야지.”그래, 그거면 됐다. 해인이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해주고, 가장 좋은 것만 입히고 먹여서 가장 좋은 놈에게 보내주는 것. 그것이 오빠로서, 그리고 그녀의 인생을 망가뜨린 공범의 아들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라고 생각했다.스스로 내린 결론은 명쾌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여전히 정체 모를 답답함이 응어리져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 노트북 앞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해인이 편안히 기댈 수 있는 완벽한 울타리를 더 견고하게 다지는 것뿐이었다.노트북 화면 너머로 내일의 스케줄을 확인하던 도윤의 귀에 둔탁한 소리가 꽂혔다.텅!플라스틱 통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였다. 서둘러 서재를 나가보니 주방 불이 환하게 켜져
最終更新日: 2026-02-26
Chapter: 4화.“그냥…, 바빴어. 군대 다녀오고 학교 졸업하고, 일하고 살다 보니. 넌 왜 안 했는데?”“나도 바빴지 뭐. 순식간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하고 일 시작하니까 시간이 더 빠르게 가더라.”그녀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백화점 일?”“아니. 처음엔 미용실에서 일하다가, 백화점으로 들어왔어. 내가 손재주가 없나봐 하핫, 지금도 포장 잘 못한다고 혼나거든.”가벼운 웃음소리가 차 안을 울렸지만, 도윤의 표정은 굳어졌다.“자격증 같은 건? 고등학교에서 전문 자격증 따서 졸업하는 친구들도 있잖아.”“자격증은 뭐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나. 그것도 돈이랑 시간이 있어야 학원도 다니고 공부도 하지. 학교 끝나고 고깃집 아르바이트 다녔는데.”도윤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너희가 진짜 남매도 아니고 네 아버지랑 이혼한 마당에, 가깝게 지내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해인이 남자친구 생겼어. 돈 좀 보내봐, 아비도 없는데 비싸게라도 보여야지 대접을 받지.]어째서 그 여자가 보내온 말과 사진을 믿었을까.거짓말이 가득한 메시지를 볼 때마다, 해인이 적어도 자신의 부재를 느끼지 못할 만큼 화려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 믿으며 비겁하게 안도했었다.“……아버지가 살던 집도 줬었고 해서 그렇게 어려울 줄 몰랐어.”“안 어려웠어. 내 주변 친구들 다 비슷하게 살아. 그래도 아저씨 덕분에 남들 보기에 좋은 집에서 살았어. 감사하게 생각해.”감사하다니. 그 말은 도윤에게 독설보다 더 아프게 박혔다.“남자친구는……, 있어? 20대 초반인데 한창 연애할 나이잖아.”도윤이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약 올려? 누구 인생 망치려고. 아마 내가 누구만난다고 하면 우리 엄마, 그 남자 찾아가서 돈 뜯어낼 생각부터 할걸?”“…….”“오빠 여자친구, 아니 그 약혼녀 이야기나 해줘. 강채영…이라고 했지? 예쁘더라. 성격은 좀 까칠한 것 같지만.”“미안해.”갑작스러
最終更新日: 2026-02-26
Chapter: 3화.마감 시간을 알리는 부드러운 음악이 매장에 깔리기 시작했다. 지친 다리를 두드리며 매대를 정리하던 해인의 귀에, 결코 들려서는 안 될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꽂혔다.“어, 그래! 나 지금 에비뉴 백화점에 옷 사러 왔다니까? 내가 말했잖아, 우리 딸이 여기서 일한다고.”불안한 예감은 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을까.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저 멀리서 화려하다 못해 천박한 원색 원피스를 입은 명희가 전화를 귀에 댄 채 위풍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어머, 해인아! 아직 마감 아니지?”명희는 사색이 된 딸의 안색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급하게 안으로 들어와 마구잡이로 행거에 걸린 고가의 코트들을 헤집기 시작했다. 한 벌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신상들이 명희의 거친 손길에 힘없이 흔들렸다.“엄마…… 여기 왜 왔어. 지금 영업 끝나가. 일단 나가서 얘기해.”“왜 이래? 나 오늘은 여기 고객으로 온 거야. 어머, 이거 색깔 예쁘다. 이것도 꺼내봐.”명희는 보란 듯이 고가의 실크 블라우스를 집어 들었다. 해인은 떨리는 손으로 명희의 팔을 붙잡았다.“제발…… 왜 이래, 돈 없잖아. 이거 엄마가 살 수 있는 옷 아니야.”“왜 못 사? 여기 직원 할인되잖아. 딸 덕 좀 보자는데 뭐가 문제야? 그래야 내 배 찢고 너 낳은 게 안 억울하지 않겠니?”명희의 목소리가 커지자 주변 동료들의 시선이 따갑게 꽂혔다. 명희는 보란 듯이 코트와 원피스 서너 벌을 계산대 위에 툭 던져 올렸다.“자, 이거 네 사원 카드로 긁어. 직원가로 하면 얼마 안 하겠네.”“절대 안 돼. 이거 내 몇 달치 월급으로도 못 갚아. 당장 내려놔.”해인이 강하게 거부하며 옷을 다시 가져가려 하자, 명희의 눈독이 잔인하게 번뜩였다. 명희는 집어 들었던 화이트 실크 블라우스를 제 화장기 가득한 얼굴에 대고 막무가내로 문질러버렸다.“어머, 어쩌니? 파운데이션이 다 묻어버렸네?”새하얀 실크 위에 진득하게 묻어난 살색 파운데이션과 붉은 립스틱 자국. 해인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最終更新日: 2026-02-26
Chapter: 2화.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거칠게 차에 올랐다. 핸들을 잡은 그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해인이 학원비 좀, 대학은 붙었는데 학비가 없네. 해인이가 해외연수도 가고 싶대.괜찮은 남자 만나려면 해인이도 명품 좀 들고 다녀야 하지 않겠어?그렇게 그 여자에게 보낸 돈이 억 대에 달했다.적어도 한 때는 제 여동생이었던 그녀가 번듯한 대학 졸업장을 따고, 고생 따위는 모르는 귀한 집 아가씨처럼 살고 있을 거라 믿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씨발, 그런데 왜……!”참지 못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도윤은 핸들을 세게 내리쳤다.“왜 저 꼴로 살고 있냐고, 대체!”갈라진 손끝과 푸석한 얼굴과 머리카락.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건지, 앙상한 손목과 발목이 망막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거칠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는 그의 눈동자가 액정 불빛에 번들거렸다.뚜르르르. 뚜르르르.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익숙하고도 위압적인 목소리가 차안을 채웠다.[이 시간에 웬일이냐.][해인이 어머니, 지금 뭐 하고 사는지 아버지는 아시죠.]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수화기 저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와 냉소적인 대답이 돌아왔다.[그건 알아서 뭐하게. 네가 그 여자 계좌로 돈 보내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지? 그런데 이제 직접 찾아가기까지 하려고?][오늘 해인이 만났습니다. 그 애가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것도 아세요?][이혼 한 지가 언제 인데 내가 그것까지 알아냐 하니.][저한테 분명히 그랬어요. 대학교도 가고, 어학연수도 가고 싶어한다고 해서…….][내가 뭐라고 했어! 그 여자한테 돈 보내봐야 해인이 밑으로 한 푼도 안 들어간다고 했지!]아버지의 무심한 포표에 도윤의 눈시울이 뜨겁게 타올랐다. 핸들을 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아버지도 해인이는 귀여워하셨잖아요. 무려 10년을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며 따랐어요.][그렇다고 그 애가 진짜 내 딸이 되는 건 아니지 않니.]
最終更新日: 2026-02-26
Chapter: 1화.“지퍼 좀 올려줄래요?”피팅룸의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나왔다.“네, 손님.”해인은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빠르게 다가갔다. 그녀가 걸친 원피스는 해인의 석 달 치 월급을 합쳐도 살 수 없는 고가의 신상이었다. 여자가 해인을 등지고 거울 앞에 섰다.순간, 해인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거울 속 여자의 실루엣이, 그리고 살짝 돌아본 옆얼굴이 어쩐지 자신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는 화려한 조명 아래서 빛나는 보석 같았고, 해인은 그 보석을 닦는 초라한 수건 같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예쁘다…….’그 찰나의 멍함이 독이 되었다.“아얏!”돌연 여자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해인의 팔을 거칠게 밀쳤다.“미쳤어요? 지금 뭐 하는 거야!”“죄, 죄송합니다!”당황한 해인은 급히 지퍼를 살폈다. 가늘고 긴 머리카락 몇 올이 지퍼 이빨 사이에 단단히 씹혀 있었다.“머리카락이 지퍼에 걸려서…….”“아, 진짜 짜증 나. 이거 오늘 관리받고 온 머리인데! 당신 눈 어디다 두고 일해?”“정말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제가 금방 해결해 드릴게요.”다급히 카운터에서 쪽가위를 가져왔다. 조심스럽게 엉킨 머리카락을 끊어내려던 찰나, 여자의 눈이 가자미처럼 찢어졌다.“지금 내 머리카락을 자르겠다고? 이 상황에서 가위질이야? 당신 미쳤어?”“하지만 고객님, 지퍼가 완전히 끼어서 이 방법밖에는…….”“관리자 불러, 당장! 내가, 네 머리카락도 모조리 잘라줄게.”매장 안이 채영의 고함으로 소란스러워진 그때, 묵직한 구두 소리와 함께 매장 입구의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무슨 일이야.”낮고 위압적인 음성. 여자는 반색하며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여기 점원이 내 머리카락을 뜯어놓고는 이제 자르겠대. 말도 안 되지?”남자의 시선이 채영을 지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해인에게 멎었다. 얼음처럼 차갑던 남자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균열을 일으키며 흔들렸다.“……윤해인?”익숙하면서도 낯선 무게감에 해인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맞닿는 순간, 해인의 손에 든 가
最終更新日: 2026-02-26
Chapter: 프롤로그“왜 하필 강서우야.”낮게 깔린 도윤의 목소리가 방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분노를 억누르느라 불거진 그의 턱 근육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해인은 담담했다. 아니, 오히려 무심해 보이기까지 했다.“서우가 뭐 어때서. 겉으로 보기에만 철없는 거지, 속도 깊고 여린 애야.” “네가 걔에 대해서 뭘 알아!”쾅. 도윤이 화장대를 내리쳤다. 정적을 깨는 굉음에도 해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 옛날 그의 으름장 한마디에 겁을 먹던 꼬맹이는 이제 없었다.“그래 몰라. 그런데 사람 속을 다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나한테 잘해주면 되는 거잖아.” “윤해인.” “적어도 서우는 내가 아니면 안 된대. 걔 시선은 한결같이 나야.”도윤은 성큼 다가와 해인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너, 자신 있어? 내 눈앞에서 다른 놈이랑 살 자신 있냐고.”"못할 건 뭐 있어. 어차피 오빠 선택지에 나는 없잖아.”순간, 도윤의 숨이 멎었다.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찔린 자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해인은 그 비극적인 표정을 감상하듯 서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사실 나는 누구랑 결혼하든 똑같아. 그게 강서우든, 길거리의 누구든 상관없다고.” “……말 함부로 하지 마.”도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얇은 니트 위로 해인의 가녀린 뼈마디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해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그보다 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도윤의 심장에 박혔다.“대체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네. 남부럽지 않은 결혼 시켜주겠다며. 자기 하기는 싫지만, 남 주려니 아까운 마음인가?”도윤의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해인을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이며 제 몸으로 그녀를 가둬버렸다.“계획 바꿨어."도윤의 뜨거운 숨결이 해인의 입술 바로 위에서 흩어졌다. "못 가. 강서우한테도, 그 어떤 새끼한테도.”“그럼 어떻게 하라고. 그냥 죽어버릴까.”해인은 있는 힘껏 입꼬리를 끌어당겨 봤지만, 기어이 눈앞이 흐려졌다. 그 처절한 얼굴을 내려
最終更新日: 2026-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