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hor-banner
양순이
양순이
Author

Novels by 양순이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이 아이의 아비가 드라켄의 심연이든 아르센의 화염이든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이 제국을 물려받을 내 아이일 뿐이니까. 아비 노릇을 하고 싶다면, 내 발치에서 증명해 봐.“ 나를 적국에 팔아넘긴 짐승 같은 남편과 나를 전리품 취급하던 오만한 적국 황제. 내 체취와 기운 없이는 숨조차 쉬지 못하게 된 두 남자의 목줄을 쥐고, 가장 완벽하고 관능적인 복수를 시작한다.
Read
Chapter: 28화
로제는 창가에 서서 서늘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등 뒤의 묵직한 인기척에 그녀가 돌아보았지만, 얼굴에 놀란 기색은 없었다. “정리되었습니까, 폐하.”목소리는 낮고 고요했다. 마치 맡겨둔 사냥감을 찾으러 온 사람처럼.카시안은 그 뻔뻔함에 오히려 헛웃음이 났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로제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황후께서 그려놓은 그림대로. 쥐새끼는 아주 완벽하게 내 우리 안에 가뒀습니다.”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로제를 덮쳤다. 로제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수고하셨습니다. 서연합의 사절단은 곧 미친 듯이 항의하러 오겠지요.”“항의라.”“그들은 ‘황자 억류’를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 내부의 후계 균열이 심하니, 오히려 엘런 전하를 버리는 패로 쓸 명분이 생긴 셈이지요.”로제는 담담하게 다음 수를 읊었다. 카시안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탁자 위에 놓인 로제의 하얀 손등을 굳은살 박인 검지로 톡, 건드렸다.“그래서.” 카시안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가라앉았다.“나를 쥐덫의 미끼로 쓴 소감이 어떻습니까?” 로제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미끼라니요. 폐하께서는 증명이셨습니다.”“증명?”“아르센의 황후가 허위 문서를 보낼 리 없다는 절대적인 증명. 그걸 보증해 줄 유일한 권위이자, 감히 제 구역을 넘본 엘런을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는 가장 거대하고 날카로운 검이셨으니까요.”로제의 대답에 카시안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자신을 검으로 비유하며 입맛대로 치켜세우는 솜씨라니.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오늘 밤 절실히 느낀 건 딱 하나입니다.” 카시안이 상체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끈적하게 속삭였다.“로셀린 황후를 동맹으로 두어도 만만치 않고…… 적국으로 두면 미치도록 골치 아프겠다는 것.” 뜨거운 숨결이 귓불을 스쳤다.로제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등 뒤의 탁자에 가로막혀 도망칠 곳이 없었다.“폐하도 마찬가지입니다.”로제는 애써 침착하게 대꾸했다.“서로가 서로에게…… 꽤 유
Last Updated: 2026-04-17
Chapter: 27화
마침내, 편지에 적혀 있던 ‘이틀 뒤 자정’이 다가왔다.밤공기에는 축축한 습기가 배어 있었다.엘런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다듬었다. 최고급 향수를 뿌린 손목에서는 달콤하고 어지러운 향기가 났다. ‘이틀이나 날 애태우며 기다리게 하다니.’그는 품 안에서 빳빳한 편지를 꺼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로제의 단정한 필체가 적힌, 인장 없는 편지. ‘비밀스러운 밀회를 위해 황후의 인장까지 생략하다니. 역시 영리해.’그는 그 결함이 곧 밀회의 증거라 굳게 믿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은밀한 관계일수록 꼬리가 밟힐 만한 증거를 남기지 않는 법이니까. “기다려요, 로제. 당신의 그 도도하고 서늘한 가면을 내가 어떻게 벗겨줄지….”..밤의 정적을 깨고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울렸다.엘런은 드라켄 사절단이 머무는 북쪽 별관,그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후정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주변은 삭막했다.로맨틱한 조명 대신, 드라켄 군 특유의 서늘한 경계등만이 듬성듬성 켜져 있었다. 하지만 엘런은 그 삭막한 분위기조차 자신의 승리로 해석했다.‘역시 대담해.’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아르센의 그 어떤 귀족도, 심지어 황제인 레온조차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카시안의 치외법권 구역. 로제가 이곳을 약속 장소로 잡은 의도는 명백해 보였다.‘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는 거지. 그 멍청한 남편에겐 더욱.’엘런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그 미친개 같은 카시안이 머무는 코앞에서, 그가 눈독 들이던 황후와 밀회를 즐긴다?이것만큼 수컷으로서 짜릿한 정복감은 없었다.“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로제.”엘런은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 검은 실루엣을 향해, 가장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많이 기다렸….”그러나 달빛이 구름을 벗어난 순간. 엘런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그곳에 서 있는 것은 은발의 아름다운 황후가 아니었다.밤보다 더 어두운 흑색 제복을 입고, 서늘한 흑강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 있는 거대한 사내.드라켄의 황제, 카시안이었다.순간적인
Last Updated: 2026-04-17
Chapter: 26화
로제의 어깨가 흠칫 굳어졌다.“어제 내가 그놈을 진흙탕에 처박아 준 덕분에, 부부 금실이 아주 애틋해지셨나 봅니다.”카시안의 시선이 로제의 하얀 목덜미에 닿았다.깃이 높은 드레스를 입었음에도, 천연덕스럽게 가려지지 못한 붉은 잇자국 하나가 카시안의 시야에 박혀들었다.[우득.]카시안이 턱을 강하게 씹었다.“하지만 두 남자 중에 폐하께서 더 거슬려 하시는 건 서연합의 사내겠지요.”로제는 카시안의 노골적인 살기 앞에서도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고 맞섰다.하지만 레온을 상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목덜미가 쭈뼛 서는 서늘한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폐하께선 제 주변을 맴도는 그 ‘저급한 사내’가 거슬리시고, 저는 제 사람을 건드리는 ‘비열한 사내’가 거슬립니다.”“그래서.”카시안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나더러 그 쥐새끼를 치워달라?”“아니요. 치우는 건 제가 합니다. 폐하께서는 그저…… 모른 척만 해 주시면 됩니다.”로제의 당돌한 제안.카시안은 잠시 말을 잃었다.‘날 국제적인 방패막이로 쓸테니 입닫고 있어라?’대담하고, 영리하고… 욕심이 날 만큼 매력적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치밀한 계산이 결국 그 나약한 남편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사실이 그의 오장육부를 뒤틀리게 만들었다.“그렇게까지 해서 지키고 싶은 게…… 고작 당신 몸에 그딴 더러운 자국이나 남기는 무능한 황제입니까?”카시안의 목소리에 노골적인 비틀림이 섞여 나왔다.“네. 저는 아르센의 황제, 그분의 등을 지킬 것입니다.”[쿵.]카시안은 심장 어딘가가 무겁게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저 단호함, 저 헌신.만약 저 여자가 내 등 뒤를 지키겠다고 말했다면.이것은 명백한 질투였다.레온이 가진 것을 자신은 갖지 못했다는 박탈감.카시안은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로제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좋소.”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그 제안 받아들이지. 엘런을 치우는 걸 기꺼이 묵인하겠소. 단.”카시안은 손을 놓아주는 대신 그녀
Last Updated: 2026-04-15
Chapter: 25화
다음 날 아침. 드라켄 황제의 임시 집무실.카시안은 나른한 얼굴로 서류를 넘기며, 어둠 속에서 무릎을 꿇은 제 그림자이자 황실 직속 암살자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래. 어젯밤, 아르센의 고고한 황후께서 서연합의 쥐새끼(엘런)를 몰래 만나러 가기라도 하던가.”“……그것이.”암살자의 목소리가 드물게 떨렸다.“황후께서는 밤새 침소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아르센의 황제가 어젯밤 황후전에 들었고, 오늘 동이 틀 때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뭐?”“밤새 황후전 밖으로…… 두 분의 짙은 합궁의 기척이 새어 나왔다 하옵니다.”[파직.]카시안의 손에 들려 있던 값비싼 만년필이 두 동강으로 부러졌다. 새까만 잉크가 피처럼 서류 위로 번져나갔다.‘합궁?’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일순간 파충류처럼 흉포하게 좁아졌다.합궁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국혼을 치른 지 고작 이틀째 되던 날 밤에,황후전을 찾았던 레온이 뺨을 맞고 쫓겨나다시피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사실은 이미 카시안도 잘 알고 있었다.그토록 철저하게 어긋나 있던 부부였다.그런데 갑자기 하루아침에, 밤이 새도록 짙은 정사를 나누었다고?사랑이라도 싹텄을 리는 만무했다.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설마.’카시안의 뇌리에 어제 연무장 회랑 위에서 레온을 조용히 내려다보던 로제의 만족스런 눈빛이 스쳤다.‘끝까지 버텨낸 사냥개에게 내리는…… 황후의 달콤한 보상이라도 된단 말인가?’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속에서 끈적한 용암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자신이 어제 그 반쪽짜리 황제를 피투성이로 짓밟아 놓은 것이, 레온에게 절망과 수치심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두 사람의 육체를 이어주는 완벽한 명분이 되어버렸다.‘내가 그 하찮은 개새끼에게 목줄을 채운 게 아니라, 되려 제 아내를 맘껏 안을 수 있는 핑곗거리를 쥐여준 꼴이잖아.’자신이 타국의 부부 금실을 달아오르게 만든 치욕스러운 조력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만당한 그의 자존심이 산산조각 났다.**황후전의 깊숙한 서재는 한낮
Last Updated: 2026-04-13
Chapter: 24화
궁정의 긴 복도를 걸으며, 카시안은 손끝에 남아 있는 묵직한 감각을 곱씹었다.오늘, 아르센의 황제는 끝까지 제 발밑에서 버텼다.그 꼴이 가소로우면서도, 한편으론 묘한 뒷맛을 남겼다.‘부서지는 소리가 꽤 경쾌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질기군.’그는 장갑을 낀 손을 쥐었다 폈다.자신에게 있어 타국의 황제를 짓밟는 건 그저 가벼운 유희였다.그 유희의 끝에, 회랑에 선 황후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 상상하는 것만이 기대한 낙이었다.‘부디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매일같이 나와서 지켜보시오.’그런데 유유히 걷던 카시안의 발걸음이 복도 한가운데서 못이 박힌 듯 멈췄다.“로셀린 황후 폐하에 관한 소문 들었어?”모퉁이를 돌던 아르센 경비병 둘이 나누는, 지극히 낮고 은밀한 속삭임이 그의 예민한 청각을 긁었다.멈춰선 카시안은 마치 투명 인간이 된 것처럼 기척을 지웠다.“오늘 아침에 서연합의 왕자와 후원에서 단둘이 밀회를 가졌다며?”“시녀를 사이에 두고 다퉜다던데…… 그런데 고작 시녀 하나에 폐하께서 질투를 하셨다나…….”[딱.]허공을 가르던 카시안의 손가락이 문설주를 튕겼다.아주 작은 파열음이었지만, 병사 둘은 목이 졸린 사람처럼 헐떡이며 뒤를 돌아보았다.그곳엔, 붉은 눈동자를 파충류처럼 세로로 좁힌 포식자, 카시안이 서 있었다.“지금…… 뭐라고 했지?”목소리는 나직했으나, 바닥을 기어오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폐, 폐하……! 저, 저희는 그냥 하인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을 이야기했습니다!”“그러니까 그 소문의 내용이 정확하게 뭐지?”경비병들은 눈을 꼭 감은 채 파들파들 떨며 입술을 달싹였다.“로셀린 황후 폐하와 엘런 전하께서 그렇고 그런 관계인데…… 엘런 전하가 시녀에게 관심을 가지자 황후 폐하께서 질투로 다투셨다는…….”카시안의 입매가 싸늘하게 비틀렸다.그의 머릿속에서 오늘 훈련장에서 보았던 풍경이 산산이 부서졌다.회랑 위, 은빛 실루엣. 피투성이가 된 남편의 굴욕을 지켜보며 오만하게 서 있던 로제의 그 고결한 시선.그
Last Updated: 2026-04-13
Chapter: 23화
촛불의 불빛이 밖으로 쏟아지자, 복도의 어둠을 뚫고 한 사내가 비틀거리며 들어섰다.“……로제.”레온이었다.그는 목욕을 이제 막 마친 듯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뒤로 넘긴 채, 얇은 검은색 실크 가운 한 장만을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단정하게 갈아입은 옷차림이 무색할 만큼, 그의 상태는 지독하게 위태로워 보였다.낮 동안 카시안의 발밑에서 겪어야 했던 처참한 굴욕, 엘런이 남기고 간 더러운 소문이 준 분노.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하게 몸집을 불린, 오직 로제를 향한 기형적인 갈망.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원초적인 욕정이 그의 이성을 흉포하게 갉아먹고 있었다.“……안고 싶어.”목소리는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가운 사이로 드러난 그의 가슴팍은 고통스러운 듯 격하게 들썩였고, 로제만을 맹목적으로 쫓았다.그는 로제의 침대 발치에 무너지듯 엎어지며,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억세게 틀어쥐었다. 평소의 고결한 황제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처절하고 비굴한 매달림이었다.“안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레온이 얇은 실크 슈미즈 아래로 드러난 로제의 하얀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비누 향이 섞인 뜨거운 숨결이 살결에 닿자, 로제는 나른한 표정으로 제 발밑에 엎드린 남편을 내려다보았다. 나신 위로, 감출 수 없는 열기가 훅 끼쳐왔다.“많이 애가 타셨나 보군요, 폐하.”로제는 차가운 손가락으로 레온의 젖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다정한 손길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달아오른 사내를 완벽하게 쥐고 흔드는 지배자의 여유가 가득했다.[확!]레온이 얇은 실크 슈미즈만을 걸친 로제를 침대 위로 거칠게 밀어붙였다.그의 거칠고 뜨거운 손이 그녀의 맨 허벅지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그는 로제의 하얀 가슴팍에 머리를 파묻고, 혀를 내밀어 그녀의 끈적한 체온을 탐닉하려 들었다.하지만,[탁!]로제가 레온의 두 손목을 단숨에 낚아채 고정했다.하루 종일 한계까지 훈련을 받느라 근육이 찢어질 듯 지쳐 있던 레온은, 로제의 가벼운 힘에
Last Updated: 2026-04-12
내게 오는 남자들

내게 오는 남자들

"지금 네 위에서 발정 난 새끼가, 오빠로 보여?" 6살과 11살. 부모의 재혼으로 묶였던 10년. 부모의 이혼과 함께 끊어진 인연, 그리고 다시 흐른 10년의 세월. 26살과 31살. 백화점의 점원과 VIP고객으로 재회 후, 다정했던 오빠는 온데간데없고 짐승 같은 눈을 한 남자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들의 사이를 파고드는 또 다른 그림자, 강서우. 도윤의 아버지가 새로 들인 여자의 아들이자, 현재 도윤의 동생인 그가 해인의 앞에 나타났다. “형이 아끼는 건 다 뺏어보고 싶거든. 그게 누나라도.” 형을 향한 열등감과 증오로 시작된 접근이었다. 하지만 서우의 장난질은 지독한 소유욕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말해봐, 누나. 형이야, 나야?” 숨 막히는 위압감의 권도윤 vs 애틋하게 파고드는 강서우
Read
Chapter: 82화
“어제 일 말인데.”“어제 무슨 일.”“서우가 한 말…… 그거 진짜 아니야. 나 서우 그냥 동생으로 생각해. 맹세코 그 이상으로 본 적 없어.”변명하듯 쏟아내는 해인의 말에, 핸들을 쥐고 있던 도윤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하지만 해인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어제처럼 짓궂게 굴 때도 있지만, 걔 원래 그런 장난 잘 치잖아. 오빠 긁으려고 일부러 더 과장해서 말한 걸 거야.”“…….”“그러니까……, 혹시라도 어제 일 때문에 신경 쓰고 있다면 걱정하지 마.”마침내 신호등이 붉은색으로 바뀌며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동시에 운전대에 얹혀 있던 도윤의 손이 툭 떨어졌다.“내가 뭘 걱정하는데.”느릿하게 고개를 돌린 도윤의 시선이 해인에게로 와서 꽂혔다.무심한 듯하지만, 그 안에는 형용할 수 없는 짙은 열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어? 아니, 어제…… 오빠가 화 많이 난 것 같아서. 혹시나 서우랑 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날까 봐…….”“걱정 안 해.”말문이 막힌 해인을 향해 도윤이 나른하게 상체를 기울여왔다.좁은 차 안, 두 사람의 거리가 아찔할 만큼 가까워졌다. 도윤의 짙은 체향이 코로 들어오며 해인의 숨통을 조였다.도윤은 크게 요동치는 해인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을, 기가 막힐 정도로 평온한 얼굴로 내뱉었다.“네가 서우를 만나든, 딴 놈을 만나든. 나부랭이 같은 새끼들이랑 무슨 일이 날까 봐 걱정하는 일, 앞으로도 없어.”“오빠…….”“너, 나 좋아하잖아.”순간, 해인의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져 내렸다.쿵, 쿵, 쿵.고막을 찢을 듯한 이명과 함께 귓가에 미친 듯한 박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뭐?”“아니야?”도윤의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며 비스듬히 말려 올라갔다. 그것은 오빠로서의 여유가 아니라, 승기를 쥔 포식자의 오만한 확신이었다.“네 시선이 어딜 향해 있는지, 누구한테 반응하는지.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알았어
Last Updated: 2026-04-17
Chapter: 81화
어젯밤, 해인의 입에서 ‘남’이라는 단어가 떨어졌을 때 권도윤은 앓던 이가 빠진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그래, 남. 빌어먹을 오빠 동생이 아니라 완벽한 타인.그런데 문제가 생겼다.생판 남인 여자, 그것도 제가 미치도록 탐내고 있는 여자에게 대체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건지 서른이 넘도록 단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다는 것."숨 막히는 이사회 심문 앞에서도 넥타이 한 번 고쳐 매지 않던 그가, 아침부터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글자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온 신경은 창밖 너머, 굳게 닫힌 별채의 현관문에 쏠려 있었다.‘언제쯤 나오려나. 마주치면 뭐라고 해야 하지? 잘 잤냐고? 아니, 너무 오빠 같잖아. 그럼 오늘 예쁘네? 미친놈처럼 보이려나.’머릿속으로 수십 번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그때였다.덜컥-.멀리서 별채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밤새 잠을 설쳤는지 조금 퀭한 얼굴로 걸어 나오는 해인의 어깨에는 무거운 포트폴리오 가방이 매달려 있었다.그녀가 본채 앞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도윤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신문을 소파에 던져두고 현관을 나섰다.평소라면 마당을 가로지르는 해인에게 냉큼 다가가 가방부터 뺏어 들며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터였다. 하지만 도윤은 정원 한가운데서 섣불리 다가가지 못한 채 우뚝 걸음을 멈췄다.아침 햇살 아래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와, 얇은 셔츠 위로 도드라진 가녀린 어깨선이 오늘따라 숨이 막힐 정도로 기이하고 낯설게 느껴졌다.“……어?”갑자기 길을 막아선 도윤의 등장에 놀란 해인이 흠칫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얇은 셔츠 위로 무거운 가방끈이 비스듬히 파고들어 꼬여 있었다.“……가방끈.”도윤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저 꼬인 끈을 바로잡아주려던 것뿐인데, 손끝이 해인의 어깨에 닿는 순간 도윤은 숨을 헉 삼킬 뻔했다.‘……미치겠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안아주고 쓰다듬었던 어깨였다.대체 그때는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거지?‘
Last Updated: 2026-04-16
Chapter: 80화
[도윤 오빠]평소라면 한 번 안 받으면 그만일 도윤이 연달아 열 통이 넘게 전화를 남겼다.‘무슨 일이 있나? 또 한참 안 받았다고 화를 내면 어쩌지?’해인은 초조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려 통화 버튼을 눌렀다.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연결되었다.“……오빠? 미안해. 서우 일하는 데 구경 왔는데, 촬영장 안이라 소리를 못 들었어.”[끝났어?]그녀의 예상과 달리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도윤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하고 매끄러웠다.화가 났다거나 다그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평온한 음성.해인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응, 방금 끝났어. 이제 정리하고 가려고.”[그럼 서우랑 같이 내려와. 스튜디오 앞이야. 저녁 사줄게.]그 차분한 통보에 해인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오빠가 이곳까지 왔다고?갑자기?아니, 그보다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고?열 통이 넘는 부재중 전화.그런데도 기이할 정도로 평온한 목소리.그리고 묻지도 않은 제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집요함까지.그 이질적인 조합에 등줄기로 오싹한 전율이 훑고 지나갔다.해인이 미처 ‘여길 어떻게 알았냐’고 입을 떼기도 전에 전화는 일방적으로 툭 끊어졌다.“누구야?”어느새 다가온 서우가 끊긴 핸드폰을 쥐고 굳어 있는 해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아……, 오빠가 스튜디오 앞이래. 저녁 사준다고 같이 내려오라는데.”“형이 여길 왔다고?”해인의 말에 서우는 아주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비스듬히 말아 올렸다.“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고 온건지…….”서우의 눈이 반짝 커지더니, 이내 손뼉을 짝 쳤다.“아! 내가 촬영 시작 전에, 스튜디오 태그해서 SNS에 우리 사진 올렸거든. 그거 왔나보네.”서우가 여유롭게 제 겉옷을 챙겨 입으며 해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가자. 기왕 형이 여기까지 납셨는데 안 가면 섭섭하지. 오늘 메뉴는 우리가 골라도 된대? 엄청 비싼 거 사달라고 해야겠다.”잠시 후,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을 맞이
Last Updated: 2026-04-14
Chapter: 79화
손끝이 화면 위를 내리누르자, 조명이 은은하게 비치는 프라이빗 스파 풀장의 사진이 액정을 가득 채웠다.수증기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나른하게 미소 짓고 있는 반나체의 강서우.그리고 그 옆에서, 얇은 홀터넥 수영복만 입은 채 당황한 듯 렌즈를 피하고 있는 윤해인의 젖은 어깨와 붉어진 뺨.게시물 아래에는 보란 듯이 태그가 달려 있었다.@Seowoo_K: 협찬 바우처 덕분에 주말 오전부터 완벽한 힐링. 이제 열일하러 촬영장 갑니다.#프라이빗스파 #VIP코스 #휴식 #일일어시스턴트랑_함께누가 봐도 협찬받은 스파를 홍보하는 평범한 모델의 일상 사진.대중들은 그저 서우의 화려한 외모와 스파의 고급스러움에 환호할 테지만, 도윤의 눈에는 달랐다.사진 속 서우의 시선은 렌즈가 아니라, 제 옆에 바짝 붙어 앉은 해인의 젖은 쇄골을 향해 아주 교묘하고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리넨 냅킨이 도윤의 손아귀 안에서 처참하게 구겨졌다.바스라지는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짓이겨진 천 뭉치는, 당장이라도 누군가의 숨통을 틀어쥐고 싶은 그의 뒤틀린 심사 그 자체였다.‘대체 무슨 생각이지.’선박에서의 그 밤, 채영의 농간에 휘둘려 해인에게 약이 든 술을 건넸던 서우를 도윤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기꺼이 용서했다.실수였다는 그 비겁한 변명을 믿어준 것이 아니었다.결론은 서우가 해인을 건드리지 않았고, 해인의 주변을 더는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도윤의 인내였을 뿐이다.그런데 강서우는 보란 듯이 그 인내를 비웃으며 다시 해인을 건드리고 있었다.‘진심인 건가, 아니면 단순히 나를 이겨 먹기 위해 던지는 패인가.’어느 쪽이라 하더라도 끔찍했다.사진 속 저 맹목적인 눈빛이 해인을 흔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도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하지만 만약 이게 단순한 게임이라면, 저놈은 오늘 제 손에 죽어야 했다.감히 윤해인을 상대로 우월감을 확인하려 들고, 수만 명의 눈앞에 그녀를 전시하며 저를 조롱하는 그 가벼운 유희를 도
Last Updated: 2026-04-13
Chapter: 78화
스파 건물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는 내내, 해인은 반쯤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었다.풍성한 아로마 오일의 향도,전문가의 섬세한 마사지도 해인의 굳은 몸을 풀어주진 못했다.엎드려 있는 한 시간 내내 머릿속에는 오직 수면 아래에서 들려오던 강서우의 목소리만이 이명처럼 맴돌았으니까.‘나는 누나만의 얌전한 개가 될 수 있어.’해인은 확 달아오르는 얼굴을 식히려 연신 손바닥을 뺨에 갖다 대었다.반면 서우는 스파 덕분인지, 아니면 제 고백에 흔들리는 해인의 모습을 구경한 덕분인지 아주 개운하고 반짝거리는 얼굴이었다.조수석 문을 열어주던 서우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아차 하는 표정으로 해인을 내려다보았다.“아, 맞다. 깜빡하고 말 안 했는데, 나 오늘 오후에 화보 촬영 있거든.”“……어? 촬영?”“응. 그래도 뭐, 같이 가줄 거지? 나 일하는 거 구경도 좀 하고.”뻔뻔하고도 자연스러운 통보였다.해인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지만, 서우는 해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가볍게 그녀의 등을 밀어 조수석에 앉혔다.“촬영 금방 끝나니까, 같이 있다가 맛있는 거 먹고 들어가자. 누나 좋아하는 거 사줄게.”스파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강서우의 능수능란한 페이스에 완전히 휘말려, 해인은 ‘안 돼’라고 거절할 타이밍조차 놓쳐버렸다.“벨트 매.”서우가 운전석에 올라타며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렸다.해인은 어쩐지 저 여우 같은 놈이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바우처를 내밀었다는 강한 합리적 의심이 들었지만, 이미 스포츠카는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서우의 스포츠카가 해인을 태우고 능수능란하게 스파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을 무렵.같은 시각, 본가에서 멀지 않은 프라이빗 호텔 라운지.도윤은 식은 홍차 잔을 매만지며 맞은편에 앉은 차민영을 건조한 시선으로 응시했다.태성과 에이펙의 합작 건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주말 낮부터 그녀를 불러냈지만, 사실 비즈니스 점검은 얄팍한 핑계에 불과했다.진짜 속내는 따로 있었다
Last Updated: 2026-04-13
Chapter: 77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프라이빗 VIP룸.문이 닫히고 단둘만 남겨지자, 앞장서 걷던 해인의 걸음이 뚝 멎었다.은은한 아로마 향과 따뜻한 수증기가 감도는 실내 중앙.당연히 나란히 누워 받는 마사지 베드가 있을 줄 알았던 공간에는, 은은한 조명을 받는 커다란 온수 풀(Spa tub)이 자리 잡고 있었다.“여기…… 마사지 샵 아니었어?”해인이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서우 역시 작게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깨를 으쓱했다.“어라. 바우처에 스파 코스라고 적혀 있긴 했는데, 진짜 물에 들어가는 스파일 줄은 나도 몰랐네. 그냥 전신 마사지인 줄 알았어.”한 치의 당황함도 묻어나지 않는, 뻔뻔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변명이었다.제공된 홀터넥 스타일의 얇은 스파용 수영복을 입은 해인이 난감한 얼굴로 맨살을 가리려 팔짱을 끼자, 서우가 피식 웃으며 제 어깨에 걸치고 있던 가운을 훌렁 벗어 던졌다.조명 아래로 모델다운 매끈하고 탄탄한 상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군더더기 없이 갈라진 근육 위로 수증기가 맺히는 것을 보며 해인이 흠칫 시선을 피했지만, 서우는 아무렇지 않게 계단을 밟고 따뜻한 물속으로 스르륵 몸을 담갔다.“뭘 그렇게 얼어 있어, 누나.”“아니, 남녀가 같이 탕에 들어가는 건 좀…….”“우리 둘 다 수영복 챙겨 입었잖아. 해변가 가면 이것보다 헐벗고도 잘만 돌아다니면서 왜 새삼스럽게 유교 걸처럼 굴어?”서우가 찰바닥, 가볍게 물장구를 치며 나른하게 턱을 괴었다.“다리 끊어질 것 같다며. 따뜻한 물에 담그고 있으면 금방 풀릴 거야. 정 불편하면 밖에서 기다리든가. 나 혼자 이 넓은 거 다 쓰지 뭐.”얄미울 정도로 여유로운 태도였다.여기서 뒷걸음질 치면 혼자 이상한 상상을 한 것 같아 우스워질 판이었다.결국 해인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못 이기는 척 물속으로 조심스레 발을 담갔다.따뜻한 온기가 굳어있던 몸을 녹이자 저도 모르게 나른한 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평화도 잠시, 일렁이는 파도 소리와 함께 서우가 해인의 바로 옆으로 스르륵
Last Updated: 2026-04-12
환관의 비

환관의 비

#동양풍 #피폐물 #고수위 #삼각관계 #황제공 #조련남 #계략남 #순진녀 #절륜녀 단 사흘. 황제의 발목을 잡으려던 그 짧은 시간은 제국의 역사를 뒤바꿀 지독한 집착의 시작이 된다. “내 씨를 받아내겠다던 그 당돌한 입술로, 이제는 목숨을 구걸해 보거라.” 피를 뿌려서라도 미옥을 제 곁에 묶어두려는 오만한 포식자, 황제 연호. “너를 빚은 것은 나다. 그러니 네 영혼의 마지막 조각까지 내 것이어야지.” 미옥을 황좌에 앉혀 제국을 손에 넣으려는 잔혹한 설계자, 주인 하륜. 두 남자가 감춰두었던 발톱을 드러내며 서로의 목을 겨누는 사이, 미옥의 뱃속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핏줄이 자라나기 시작하는데……. 그 아이의 아비가 밝혀지는 순간, 제국은 가장 잔혹하고도 뜨거운 불길에 휩싸인다.
Read
Chapter: 179 화
그 순간이었다.짜악-!소름 끼치는 파열음과 함께 초희의 고개가 거칠게 돌아갔다.선호의 눈자위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조금 전까지 조롱기를 머금고 있던 한량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궁지에 몰려 이빨을 드러낸 독오른 생쥐처럼 악다구니를 썼다.“감히…… 천한 기생년 따위가 함부로 내 속을 재단하려 들어?”선호는 씩씩거리며 초희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틀어쥐었다.술기운이 싹 가신 얼굴에서는 검푸른 핏발과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누가 도망을 쳤다는 것이냐! 입을 함부로 놀렸다간 이 남원 바닥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혀가 뽑힐 줄 알
Last Updated: 2026-04-17
Chapter: 178 화
초희는 그 기묘한 광경에 잠시 숨을 멈추었다.도성의 취홍루에서 그녀는 그저 영악함 하나로 버티던, 수많은 미색(美色)들에 가려진 어중간한 계집에 불과했다.하지만 이곳은 달랐다.생명력을 잃고 바싹 말라버린 낙엽들 사이에 선 초희는, 그 자체로 붉게 터질 듯 만개한 꽃 같았다.“어이구, 어쩜 이리 고울까. 우리 낙화루에 아주 귀한 꽃이 굴러들어왔네.”행수로 보이는 기생이 초희의 뺨을 쓰다듬으며 감탄을 내뱉었다. 주변을 둘러싼 퇴기들 역시 질투조차 잊은 채 초희의 싱그러운 자태에 넋을 잃고 있었다.초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Last Updated: 2026-04-17
Chapter: 177 화
**덜컹거리는 마차 안, 짙은 어둠 속에서 사혁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네가 홀려야 할 자의 이름은 선호(宣皓)다. 남원 바닥에서 돈이나 흩뿌리고 다니는 한량이지. 나이는 올해로 서른이다.”“……예? 고작 서른이요?”초희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당연히 오늘내일하며 관짝에 들어갈 날만 기다리는 쭈글쭈글한 늙은 영감탱이일 줄 알았다.그래서 송장 같은 노인네의 비위를 맞추며 수발을 들 각오까지 단단히 하고 있었건만, 혈기 왕성한 젊은 사내라니!그녀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화색이 돌았다.사혁은 그런 초희의 얄팍한 속
Last Updated: 2026-04-16
Chapter: 176 화
황궁의 집무실. 연호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인 책상 너머로 강진을 내려다보았다.단정한 무관복으로 갈아입고 어전에 무릎을 꿇은 강진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래, 하륜 그자의 꼬리는 밟았느냐. 이리 철저한 놈이 그냥 있을 리는 없고, 밖에서 도대체 무얼 하고 다니더냐.“강진은 고개를 깊게 숙이며 마른침을 삼켰다."……하륜은 최근 도성 안팎의 기방을 전전하고 있었습니다.""기방?“연호의 눈썹이 흥미롭다는 듯 위로 휘어졌다."기방을 드나든다라. 궐 밖으로 나가더니 뒤늦게 향락에라도 빠졌다는 것이냐?""단순한 향락
Last Updated: 2026-04-16
Chapter: 175 화
잰걸음으로 취홍루의 인적 드문 뒷문을 빠져나오자, 아직 가시지 안흔 새벽안개 속에 허름한 마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사혁.”하륜의 부름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사혁이 고개를 숙였다. 하륜은 보따리를 꽉 쥔 채 불안하게 서 있는 초희를 건조하게 훑으며 말을 이었다.“이 계집을 남원(南原)으로 데려가거라. 그곳에 낙화루(落花樓)라는 기방이 있을 것이다. 행수에게는 이미 전갈을 넣어두었으니, 당분간 그곳에서 몸을 낮추고 기회를 엿보게 해.”남원? 낙화루?초희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나으리, 낙화루라니요! 기껏 도성 기방을
Last Updated: 2026-04-16
Chapter: 174 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성큼성큼 마당을 가로질렀다.**같은 시각, 취홍루의 별채.초희는 땀방울이 맺힌 이마를 닦지도 못한 채 붓을 꽉 쥐고 있었다.종이 위에는 그녀의 이름 석 자가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 삐뚤빼뚤하게 적혀 있었다. 먹물이 튀어 손가락 끝이 시커멓게 물들었지만 초희는 입술을 짓씹으며 다시 붓을 세웠다.'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나으리께 칭찬받을 수 있어.‘하륜은 그녀에게 글은 몰라도 좋으니 그저 이름이라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하지만 초희는 욕심이 났다.이름만 겨우 쓰는 무식한 계집보다는,
Last Updated: 2026-04-15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