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천 년 전 이루지 못한 사랑. 왕세자의 호위무사였던 도진과 세자빈 이수는 서로를 사랑했지만, 권력과 운명 앞에서 끝내 함께할 수 없었다. 그들의 비극은 한 왕조의 몰락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지만, 천 년의 시간이 흐른 현대에서 다시 시작된다. 불멸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남자 도진. 그리고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채 그를 기다려온 소설가 이수. 우연처럼 시작된 재회는 잊혀졌던 기억을 깨우고, 두 사람은 천 년 전 자신들이 남긴 사랑과 비극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과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천 년 전 모든 비극의 중심에 있었던 왕세자 현의 그림자 역시 현재를 향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View More밤은 도시의 소음을 한 겹 덮어두고 그 위에 다시 생각을 올려놓는 시간이었다.낮에는 흘려보냈던 감정들이 밤이 되어서야 제자리를 찾는 것처럼.도진은 집 안의 불을 모두 끈 채 창가에 서 있었다.유리 너머로 보이는 불빛들은 질서정연했지만,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오늘 하루 동안 자꾸만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카페에서, 비 오는 거리에서, 그리고 마지막에 이수가 남긴 그 눈빛.부탁도 아니고, 확답도 아닌 시선.그건 ‘지금 여기까지는 와도 된다’는 조심스러운 허락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자신이 언제부터 사람의 눈빛을 이렇게 오래 들여다보게 되었는지기억해보려 했지만, 생각은 끝까지 닿지 않았다.대신 가슴 안쪽에서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천천히 자리 잡았다.그는 휴대전화를 다시 들었다가 이번에도 내려놓았다.말을 걸고 싶은 마음과 조금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지금은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고 싶었다.이수는 침대 위에 앉아 노트북을 켜 놓고 있었지만 아무 글자도 입력하지 못하고 있었다.커서는 깜박였고, 그 깜박임이 마치 재촉처럼 느껴졌다.글은 늘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어떤 문장도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았다.그녀는 노트북을 덮고 등을 대고 누웠다.천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고른다.도진의 말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반복됐다.-변해도 괜찮습니다.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선언처럼 들렸고, 그래서 더 마음을 흔들었다.이수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상처받는 일이 아니라 상처를 주는 일이 아닐까 문득 생각했다.누군가에게 기대가 된다는 것.그 기대를 끝까지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비가 그친 뒤의 공기가 차갑게 밀려들었다.“조금만 더…”이수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작게 중얼거렸다.“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그 말이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 그녀 스스로도 확실하지 않았다.현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라
비는 도시를 균등하게 적셨다.누구에게도 편을 들지 않는 얼굴로,그저 위에서 아래로 같은 속도로 떨어질 뿐이었다.도진과 이수는 카페를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말이 없었지만 침묵은 무겁지 않았다.오히려 말이 필요 없는 종류의 시간에 가까웠다.비에 젖은 보도블록 위에서 이수의 발걸음이 잠시 느려졌다.“도진 씨.”그녀가 불렀다.목소리는 낮았고, 조심스러웠다.“아까 말한 것… 변해도 괜찮다는 말.”도진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쉽게 한 말은 아닙니다.”“알아요.”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더 묻고 싶었어요.”잠시 숨을 고른 뒤 그녀는 말했다.“그 말의 끝에는 어디까지가 들어 있는 건가요.”도진은 비를 맞은 채 서 있었다.우산을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이 질문 앞에서 보호막은 의미가 없었다.“제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입니다.”그는 담담하게 말했다.“좋은 결말이 아니어도, 적어도 도망치지는 않겠다는 뜻입니다.”이수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런 사람을…”그녀는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믿어도 되는 건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그건 제가 증명해야 할 문제겠죠.”도진의 말은 설명도, 다짐도 아니었다.그저 현재형의 사실에 가까웠다.이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묻지 않는 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존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 시각,현은 사무실에 홀로 남아 있었다.불을 끄지 않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비가 내리는 도시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 보였다.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사람의 마음은 도시처럼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회의실에서의 이수. 그녀의 눈빛. 선명하게 긋던 선.저를 선택의 대상으로 두지 않는 것.그 문장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그건 거절이었지만 완전한 단절은 아니었다.현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애매함.그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이수에게도, 도진에게도 연
아침은 어제의 밤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덮어버렸다.젖어 있던 거리도, 흐트러졌던 마음도 출근 시간의 소음 속에서 억지로 정리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정리된 것은 없었다.이수는 엘리베이터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어제보다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어제와 같은 얼굴이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사람의 마음이 바뀌면 표정은 그보다 한 박자 늦게 따라온다.회사에 도착하자 이미 몇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출판 일정, 인터뷰 요청, 그리고, 현의 이름이 적힌 회의 요청 메일.이수는 마우스를 쥔 손을 잠시 멈췄다.거절할 이유도, 미룰 이유도 없었다.그래서 더 불편했다.오후 세 시, 가능하신지요.그 문장은 업무적인 예의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이수는 알고 있었다.이 만남이 업무로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도진은 체육관 한쪽에 서 있었다.샌드백을 친 것도 아니고, 러닝머신 위에 오른 것도 아니었다.그저 운동을 하다 말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몸은 충분히 단련되어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요즘 들어 집중이 흐트러지는 순간이 잦아졌다.이유는 명확했다.이수.그녀와의 대화, 그녀가 남긴 말,그리고 말하지 않은 것들.도진은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가 다시 넣었다.연락하고 싶은 마음과 참아야 한다는 판단이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오늘 오후에 잠깐 볼 수 있을까요.이수였다.도진은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네. 시간 말씀 주세요.답장을 보내고 나서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선택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현은 회의실에 앉아 있었지만 자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머릿속에는 어젯밤의 장면이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다.나란히 걷던 두 사람.짧은 거리. 그러나 그 사이에 흐르던 공기.현은 그 공기를 잘 알고 있었다.그건 관심이나 호기심이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였다.회의가 끝나자 그는 이수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회의 시간, 변동 없겠져?.”“네.”이수의 대답은 담담했다.“
저녁이 내려앉은 도시는 낮보다 더 솔직했다.빛은 많았지만, 그 빛 아래 숨길 수 없는 그림자들이 각자의 발밑에 또렷이 드러나 있었다.이수는 카페를 나와 천천히 걸었다.현과의 대화는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상태로 가슴 한켠에 남아 있었다.중요한 인연.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그러나 중요하다는 이유만으로 머물 수 없는 자리도 있다는 걸이수는 너무 오래 살아오며 배웠다.휴대전화가 진동했다.도진이었다.-어디 계세요?-제가 가도 될까요.이수는 한참을 서서 화면을 바라봤다.답장은 간단했지만 그 한 줄이 오늘 밤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집 근처예요.-잠깐이면 괜찮아요.보내고 나서 이수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이 만남이 어떤 의미가 될지 아직은 모른 척하고 싶었다.도진은 차를 몰며 라디오도, 내비게이션도 켜지 않았다.도시는 익숙했고 길도 알았다.집중해야 할 것은 길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었다.이수와 단둘이 마주하는 밤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그러나 이번은 달랐다.이제 그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이 끌림이 우연도, 단순한 호감도 아니라는 것을.차를 세우고 그녀를 발견했을 때, 도진은 본능적으로 숨을 고르며 차에서 내렸다.“오래 기다리셨어요?”“아뇨.”이수가 고개를 저었다.“방금 나왔어요.”둘 사이에는 차가운 공기와 말하지 않은 말들이 같이 서 있었다.도진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이수도 그 옆에 나란히 섰다.“오늘…”그가 입을 열다 말고 잠시 멈췄다.“힘드셨죠.”질문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말이었다.이수는 작게 웃었다.“힘들지 않은 날이 더 드물죠.”그 대답은 담담했지만 그 속에는 긴 시간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잠시 후, 도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현 대표를 만나신 건가요.”이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피하지 않았다.“네.”그 짧은 대답에 도진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괜찮으세요?”이번에는 이수가 되묻는 차례였다.도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침묵이 짧게 흘렀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거기 호위무사.”도진은 고개를 돌렸다.“예, 마마.”“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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