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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Autor: 지온
last update Data de publicação: 2026-11-02 21:45:54

욕실 안은 따뜻했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은 이 안에서 웃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유리가 지훈에게서 떨어졌다. 놀란 얼굴로 설을 보더니 어깨 너머를 살폈다.

“언니…… 혼자 왔어?”

미안하다는 말보다 그것부터 나왔다. 설의 입 안에 신물이 고였다. 

유리의 뺨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

지훈이 유리를 붙들었다. 맞은 사람보다 그 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설이 남편의 손을 뿌리치고 뺨을 때릴 때까지 그는 자신도 맞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일단 나가서 얘기해.”

“어디로 나가? 내 집인데.”

목소리가 갈라졌다. 더 크게 말하면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설은 두 사람을 지나 침실로 나왔다. 바닥에 벗어 놓은 옷들이 있었다.

옷을 한꺼번에 집어 들었다. 창문이 열리자 빗소리가 들이쳤고, 옷들이 창밖으로 쏟아졌다. 

“그만하고 내 말 좀 들어.”

지훈의 말에 설은 반지를 잡았다. 살에 걸린 테두리를 비틀어 빼는 동안 그가 두 번이나 이름을 불렀다. 손가락이 쓸려 쓰라렸지만, 반지가 빠지자 그것보다 빈자리가 더 아팠다. 설은 남편을 보며 손을 창밖으로 내밀었다.

설은 가방을 들고 나왔다. 두 사람 앞에서는 끝내 울지 않았다.

차 문이 닫힌 뒤에야 숨이 무너졌다. 운전대에 얼굴을 묻자 참았던 울음이 새어 나왔다. 등을 펴려고 해도 구역질 때문에 다시 몸을 숙여야 했다. 남편의 전화는 울리다 끊기고, 또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건 한참 뒤였다. 부재중 전화 아래 미팅 안내와 제안서 파일이 남아 있었다. 오늘 새벽에 보낸 최종본이었다. 설은 파일을 열어 페이지를 넘겼다. 고친 곳마다 남아 있는 자신의 메모를 읽었다. 내용은 이미 외우고 있었지만 끝까지 보았다.

미팅 취소 문장을 지웠다. 오늘 잃은 것들 사이에 이것까지 보태고 싶지는 않았다.

약속 장소가 보일 무렵 차가 멈췄다. 경고등이 켜진 계기판 앞에서 몇 번을 시도해도 엔진은 응답하지 않았다. 설은 보험사에 연락하고 위치를 설명하려 차에서 내렸다. 빗물에 눈물이 씻겼다. 건물 이름을 읽는 목소리가 자꾸 끊겨 같은 말을 두 번 해야 했다.

그때 머리 위로 우산이 들어왔다.

“이설 씨.”

출입구에서 그녀를 알아본 권혁이 비서의 우산을 받아 온 참이었다. 설이 고개를 들자 그가 우산을 조금 낮췄다.

“죄송해요. 차가 바로 앞에서 멈춰서…….”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설은 고개를 저었다. 물에 젖은 가방을 고쳐 안으며 말을 이었다.

“미팅은 할 수 있어요. 자료도 가져왔어요. 조금만 정리하면 돼요.”

권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비가 들이치는 쪽으로 우산을 옮겨 준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죠. 먼저 들어가시겠습니까?”

그는 비서에게 견인 처리를 부탁했다. 설이 고장 난 차를 돌아보며 망설이는 동안에도 재촉하지 않았다. 건물 안에 들어섰을 때 그의 한쪽 어깨가 젖어 있었다.

위층에는 그가 늦게까지 일할 때 쓰는 주거 공간이 있었다. 권혁은 그곳에서 옷을 정리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고, 설이 동의하자 손님용 방을 열었다.

“맞을 만한 옷이 없네요. 우선 이걸 입으시겠어요?”

새 셔츠였다. 설이 받아 들자 그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라는 말만 남기고 문을 닫았다.

단추 하나를 잘못 끼웠다. 그것을 풀다가 눈물이 또 맺혔다. 설은 고개를 젖혀 숨을 골랐다. 울음이 가라앉기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누르고 단추를 다시 맞췄다.

권혁은 수건과 드라이어를 문 앞에 두었다고 알리고 자리를 비켰다. 설이 얼굴과 머리를 정리하고 나오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실에 있던 권혁은 붉은 눈가를 묻는 대신 따뜻한 물잔을 가까이 놓아 주었다.

“시작해도 될까요?”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권혁은 그녀가 펼친 페이지 대신 추가 자료의 제품 사진을 보였다.

“이 제품, 직접 개발하셨습니까? 저도 알고 있는 제품인데.”

“초기 개발을 맡았어요. ”

“계속하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설의 시선이 사진 위에 잠깐 머물렀다.

“다른 일이 있어서요.”

권혁은 더 묻지 않았다. 새 계획서에 표시해 둔 곳으로 돌아갔다.

“이 가격을 고객이 납득하려면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다.”

“가격 때문에 고르는 제품은 아니에요.”

설의 대답이 처음으로 망설임 없이 나왔다.

“안 맞는 걸 여러 번 써 본 사람들은 새로 사는 것부터 무서워해요. 싸다는 말보다 다시 써도 괜찮겠다는 믿음이 필요하고요.”

“그 믿음은 어떻게 주실 겁니까?”

자료가 그녀 쪽으로 당겨졌다. 테스트에서 무엇을 고쳤는지 설명하고, 그가 다시 물으면 실제 고객의 말을 덧붙였다. 

권혁이 질문하면 자료를 찾았고, 납득할 수 없는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의 셔츠를 입었는지 잊은 채 흘러내리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가 웃자 설의 말이 멈췄다.

“제가 틀린 말 했나요?”

“아니요. 반박을 잘하셔서요.”

권혁이 몸을 살짝 기울였다. 깊고 서늘한 눈동자에 묘한 온기가 얽혔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순식간에 묵직하고 간지럽게 가라앉았다.

그의 시선이 설의 떨리는 손끝에 머물렀다가, 이내 그녀의 눈으로 천천히 올라왔다.

“삼 년 전 맞선 자리에서는, 정략결혼은 사양한다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셨으니까요.”

설이 순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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