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름으로 그를 다시 만났다

다른 이름으로 그를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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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월하 🌸Updated just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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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 속에서 죽은 아이, 김소은. 공식 기록상 사망한 그녀는 20년이 흐른 지금, 백제그룹의 외동딸 백가은이자 익명의 천재 디자이너 ‘S’로 살아가고 있다. 타인의 이름으로 버텨온 세월 속에서 유일하게 놓지 못한 것은 어린 시절의 약속이었다. "나 나중에 커서 꼭 데리러 올게. 우리 결혼하자." 그리고 어느 날, 그 약속의 주인공 이태현이 그녀의 약혼 상대로 나타난다.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소은 역시 진실을 밝힐 수 없다. 다시 만난 첫사랑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이름마저 숨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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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_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

백제 그룹 본사 32층.

오늘도 이 빌딩은 완벽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통유리 너머로 오후 햇살이 쏟아지는데 팀장실 안은 냉동창고처럼 서늘했다.

서걱서걱, 가위 소리만 낮게 울렸다.

백제 그룹 디자인 기획팀 백가은 팀장.

아니. 김소은.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딱 하나만 잘하면 됐다.

스스로를 지우는 것.

김소은이라는 이름을, 그 이름에 딸린 모든 것을 깨끗하게 버리는 것.

그래야만 '백가은'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버틸 수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백 팀장님."

무거운 정적을 깨고 비서 김동석이 들어왔다.

소은은 가위질을 멈추지 않았다.

눈은 여전히 도면에 박힌 채.

"말해."

"회장실에서 서류 올라왔습니다. 상견례 날짜 확인하시라고요."

동석이 잠깐 말을 멈췄다.

그의 눈빛에 뭔가 복잡한 게 스치는 게 느껴졌다.

마른침 넘기는 소리.

동석은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룸 그룹 이태현]

검은 글씨 세 자가 눈에 박혔다.

보육원 대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마주친 소년의 얼굴이 스쳐 갔다.

그가 이룸 그룹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헤어져야 했던 그날.

동석은 팀장실 문이 완전히 닫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말투를 바꿨다.

비서라는 가면을 벗어던진 그는 소은과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세상에 남은 진짜 가족이었다.

"...이렇게 또 엮일 줄은 몰랐네. 혹시 널 알아보는 거 아니야?"

걱정과 그리움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연필을 주워 슬며시 책상 위에 올려놨다.

지난 20년 동안 소은이 어떤 지옥을 건너왔는지, 그 속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

소은이 단호하게 잘랐다.

창밖을 응시하는 눈빛은 벌써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럴 리 없어."

"왜 그렇게 생각해?"

소은이 힘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난 이미 그 불길 속에서 죽었으니까."

거의 혼잣말 같은 목소리였다.

20년 전. 그 불길 속에서 김소은이라는 아이는 죽었다. 공식적으로는.

지금 여기 있는 여자는 백제 그룹의 외동딸, 백가은. 그 껍데기를 뒤집어쓴 여자.

동석은 더 묻지 못했다.

대신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소은의 떨리는 손끝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쾅.

팀장실 문이 예고도 없이 거칠게 열렸다.

백제 그룹 수장 백동우 회장이 거침없이 걸어 들어왔다.

"결혼이 결정된 지가 언젠데. 소식이 늦구나."

책상 위 서류를 흘겨보더니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소은에게 그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자신과 동석을 보이지 않는 목줄로 채워 사육하는 잔인한 주인일 뿐이었다.

"결혼이다, 가은아. 이건 거래고 계약이야. 언제나처럼 잘 해내야 해."

"...아버지, 이 결혼은ㅡ"

"네 감정 따위는 필요 없어."

소은이 반박하려는 걸 태연하게 잘라버리며, 백동우의 시선이 작업대 위 스케치북에 꽂혔다.

백동우 입에서 쯧, 소리가 터졌다.

"낙서할 시간이 있나?"

툭.

그가 손을 쳐내자 스케치가 바닥으로 처참하게 떨어졌다.

백동우는 마치 보란 듯이 동석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

소은의 손이 움찔하며 경련했다.

동석의 어깨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쥔 두꺼운 손아귀.

명백한 경고였다.

'거역하면, 네 곁에 남은 것들을 한순간에 끊어버리겠다.'

입술을 피가 날 때까지 깨물었지만, 소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혼식 날짜는 내가 정한다."

백동우가 차갑게 덧붙였다.

"가서 애나 빨리 낳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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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_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
  백제 그룹 본사 32층.오늘도 이 빌딩은 완벽했다. 적어도, 겉으로는.통유리 너머로 오후 햇살이 쏟아지는데 팀장실 안은 냉동창고처럼 서늘했다.서걱서걱, 가위 소리만 낮게 울렸다.백제 그룹 디자인 기획팀 백가은 팀장.아니. 김소은.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딱 하나만 잘하면 됐다.스스로를 지우는 것.김소은이라는 이름을, 그 이름에 딸린 모든 것을 깨끗하게 버리는 것.그래야만 '백가은'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버틸 수 있었으니까.그때였다."백 팀장님."무거운 정적을 깨고 비서 김동석이 들어왔다.소은은 가위질을 멈추지 않았다.눈은 여전히 도면에 박힌 채."말해.""회장실에서 서류 올라왔습니다. 상견례 날짜 확인하시라고요."동석이 잠깐 말을 멈췄다.그의 눈빛에 뭔가 복잡한 게 스치는 게 느껴졌다.마른침 넘기는 소리.동석은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이룸 그룹 이태현]검은 글씨 세 자가 눈에 박혔다.보육원 대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마주친 소년의 얼굴이 스쳐 갔다.그가 이룸 그룹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헤어져야 했던 그날.동석은 팀장실 문이 완전히 닫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말투를 바꿨다.비서라는 가면을 벗어던진 그는 소은과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세상에 남은 진짜 가족이었다."...이렇게 또 엮일 줄은 몰랐네. 혹시 널 알아보는 거 아니야?"걱정과 그리움이 뒤섞인 목소리였다.그는 바닥에 떨어진 연필을 주워 슬며시 책상 위에 올려놨다.지난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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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_낯익은 여자
  그때, 소은이 고개를 들었다.태현은 급히 시선을 돌려 먼 허공을 바라봤다.또각, 또각.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이 팀장님?"소은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그 하얀 손을 태현은 잠시 물끄러미 내려다봤다.맞잡는 순간, 묘한 열감이 손바닥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태현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조그맣네. 너무 작아.'생각보다 훨씬 작고 연약한 감촉이었다.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아주 오래전,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낡은 기억의 한 조각이 들썩이는 것 같은 낯선 감각."혹시 저희, 전에 만난 적 있습니까?"소은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태현은 그녀의 경계심을 눈치채고 서둘러 덧붙였다."작업장에서 자주 보다 보면 얼굴이 익어 보일 때가 있어서요. 실례했습니다.""없어요."말을 자르는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소은은 잡았던 손을 거칠게 빼내고, 태현을 그대로 지나쳐 조수석 문을 열고 올랐다.쾅!지하 주차장이 울릴 정도로 무겁게 닫히는 차 문 소리.태현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성격 참."혀를 차며 운전석으로 향했다.아주 흥미롭고, 어쩌면 지독하게 피곤한 결혼 생활이 되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뒷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차 안은 침묵뿐이었다.태현은 핸들을 잡은 채 힐끗 조수석을 살폈다.소은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미동도 없었다.차 안의 공기조차 공유하고 싶지 않다는 노골적인 거부감이었다.태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식사는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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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_나랑 해, 결혼
  태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찻잔을 쥔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예?""제가 얻는 게 없거든요. 게다가 저는 이 팀장님이 원하는 그런 조신한 현모양처 타입도 아니에요. 전 아주 게으르고, 바람기도 많아요. 애 낳을 생각도 없어서 대가 끊길걸요?"태현의 미간이 눈에 띄게 좁아졌다."이봐요, 백가은 씨.""솔직히 조건 보고 결혼하시는 거잖아요. 이룸 그룹 내부에서도 이 팀장님 입지가 애매하다고 들었는데. 애인도 있으시다는 소문이 파다해요."순간, 카페 안의 공기가 냉각됐다.태현이 잠시 멈칫하더니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그 웃음 끝엔 서늘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지금 우리가 여기 사랑놀음하러 나온 줄 압니까?""그건 아니지만,""백제 그룹에서 먼저 제안한 겁니다. 백 회장님이 먼저 무릎 굽히고 들어온 판이라고요."소은은 굴하지 않고 턱을 치켜들었다."그건 우리 아버지 생각이죠. 전 단 한 번도 이 결혼에 동의한 적 없어요.""그럼 왜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안 나오면 그만이었을 텐데.""전화로 끝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태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눈앞의 여자를 관찰했다."지금 당신 태도, 충분히 무례합니다만.""알아요. 그럼 이룸 쪽에서 먼저 엎은 걸로 하죠. 이 팀장님 이미지 생각해서 제가 모자란 사람 될게요. 어때요. 이 정도면 공평하죠?"소은은 승리를 확신했다.자존심 강한 이태현이다.이 정도 모욕을 당하고 자신을 쓰레기 취급하는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매달릴 남자는 세상에 없다.그녀는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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