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내 원고로 박수받던 남편이 말했다. “아내는 회사 일을 한 적 없습니다.” 그날 불륜까지 목격한 나는 이혼을 선언했다. 빼앗긴 건 7년의 사랑만이 아니었다. 내 경력과 문장, 이름까지. 카메라 앞에서 모든 걸 되찾으려는 순간, 방송 PD 강도윤이 나타났다. 그는 새로운 사랑일까, 또 한 번 내 선택을 빼앗을 사람일까? 결말은 내가 정한다.
View More“그때 제가 밤새 고친 문장이 있습니다.”
한준혁이 잠시 말을 멈췄다. 객석을 둘러보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준비된 화면을 돌아보는 것까지. 윤서하가 어젯밤 원고에 써 넣어 준 순서였다.
대형 화면에 3년 전 미국 리콜 당시의 사과문이 나타났다. 첫 줄에 있던 ‘심려’라는 단어를 ‘불편과 불안’으로 고친 사람은 서하 자신이었다. 차를 못 타는 사람이 걱정만 하는 건 아니지 않으냐고, 식탁에 엎드려 잠든 준혁을 깨워 물었던 기억이 났다.
“고객이 겪은 문제부터 제대로 말하자. 그게 제 원칙이었습니다.”
박수가 터졌다. 앞줄에 앉은 한태산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고, 준혁은 기다렸다는 듯 아버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하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준혁의 다음 발표문은 고쳐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진행자가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화면이 웃고 있는 준혁의 얼굴로 바뀌었다.
“사모님도 그 시기에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아내는 회사 일과 철저히 분리해 두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와 계약을 맺거나 업무를 맡은 적도 없고요.”
서하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가방을 내려다봤다. 지퍼가 반쯤 열린 틈으로 오늘 발표 원고가 보였다.
새벽까지 고친 종이였다. 준혁이 올라가기 직전까지도 받아 들고 외우던 종이.
“편하게 지내게 해 주는 게 남편 몫이죠.”
이번에는 웃음이 섞인 박수가 나왔다. 서하 옆에 앉은 사람이 부럽다며 팔을 살짝 건드렸다. 서하는 웃어 주는 대신 가방의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결혼 초에는 자신도 저 말에 웃었었다. 글 쓰는 일이 얼마나 불규칙하고 힘든지 아니까 쉬게 해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쉬는 동안 남편의 발표문을 조금 봐주고, 집안 행사 순서를 짜 주고, 급하다는 일을 받아주다 보니 7년이 지났다.
그사이 준혁의 직함은 길어졌다. 행사 초대장을 받을 때마다 서하는 자기 이름이 있을 자리를 먼저 봤다.
그곳에 적힌 말은 늘 같았다. 한준혁 이사의 부인.
행사를 마친 준혁이 취재진에게 둘러싸인 사이, 서하는 객석 뒤편으로 빠져나와 대기실로 향했다. 원고를 돌려주고 나면 곧장 집에 갈 참이었다.
복도 끝에서 채미래가 먼저 준혁의 이름을 불렀다.
“오빠, 잠깐만.”
서하의 걸음이 멈췄다. 조금 전까지 행사 관계자들 앞에서 ‘이사님’이라고 부르던 목소리였다.
미래는 준혁의 옷깃에 붙은 무언가를 떼어 냈다. 손을 내린 뒤에도 두 사람의 거리는 벌어지지 않았다. 준혁이 미래의 손목을 잡아 자기 쪽으로 당겼다.
서하는 복도 모퉁이의 화분 뒤에 서 있었다.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했는데, 발바닥이 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만나야 해?”
“오늘만 넘기자고 했잖아.”
“오늘만, 이번 일정만. 그 사람 아직 작업실 쓰던데.”
준혁이 미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정리할 거야. 네가 신경 쓸 일 없게.”
그가 고개를 숙였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미래가 웃는 동안에도 서하는 제 가방 손잡이만 쥐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에 닿은 금속 장식이 아팠다.
한동안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혼자 다녀왔다던 출장에서 묻어 온 낯선 향, 전화받으러 나가면서 꼭 닫던 문. 물으면 준혁은 늘 피곤하다며 대화를 끝냈다.
서하는 손잡이에 감긴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금속 장식에 눌려 붉어진 자국을 내려다보다 가방을 고쳐 들고는 화분 옆으로 걸어 나왔다.
“무엇부터 정리할 건데?”
미래의 웃음이 먼저 사라졌다. 준혁은 손을 내렸지만 서하를 향해 오지는 않았다. 대신 복도 양쪽을 빠르게 살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작업실부터? 아니면 나부터?”
“서하야.”
준혁이 낮춰 부르는 이름은 경고에 가까웠다. 누가 들을까 봐, 어디서 사진이라도 찍힐까 봐. 서하가 어떻게 들었는지를 확인하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미래가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가 있을게요.”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래가 서하의 옆을 지나갔다. 서하는 그대로 그 모습을 지켜봤고, 남편은 멀어지는 굽 소리가 잦아든 뒤에야 대기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이었다. 서하는 그 손을 무시하고 먼저 들어갔다.
“언제부터야?”
“지금 흥분해서 들으면 오해만 해.”
“내가 뭘 봤는지부터 설명해 줄까?”
문을 닫은 준혁은 거울 아래 놓인 생수병을 집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서하가 이 정도로 화를 내면 으레 저런 식으로 시간을 벌곤 했다.
“우리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잖아.”
“어젯밤에도 당신 원고 고쳤어.”
“그거랑 이건 별개지.”
서하는 가방에서 꺼낸 원고의 접힌 모서리를 펴고, 첫 장이 준혁 쪽을 향하도록 돌려놓았다.
‘고객이 겪은 문제부터 제대로 말하자.’ 인쇄된 문장 밑에 서하의 글씨가 남아 있었다. 여기서 카메라 보지 말고 객석.
“당신은 내 손이 필요할 때만 우리가 부부였구나.”
“그렇게까지 말할 일이야?”
준혁은 서하 대신 원고를 챙겨, 누가 볼까 봐 종이를 뒤집어 놓았다. 그 손끝을 보자 어느 호텔이었는지 몇 번 거짓말했는지 묻던 말들이 멎었다. 더 들어 봐야, 눈앞에서 자신보다 먼저 원고를 챙긴 저 손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혼해.”
준혁의 손이 종이 위에서 멎었다.
“행사 끝나자마자 무슨 소리야.”
“집에 가서 말하면 집에 오자마자 이럴 거잖아.”
“내가 지금 어떤 시기인지 몰라?”
“알아. 그 시기마다 당신 대신 잠 안 잔 사람이 나니까.”
준혁은 의자를 빼서 앉았다. 서하에게도 맞은편을 가리켰지만, 그녀는 가방을 어깨에 멨다.
“너 혼자 나가서 뭘 하려고.”
“그건 내가 알아볼게.”
“당분간 쉬어. 작업실에 있든가. 말 옮기지 말고.”
서하가 문을 열자 준혁이 덧붙였다.
“거기도 내 명의인 건 알지?”
손잡이를 잡은 채 돌아보는 서하에게 준혁은 맞은편 빈 의자를 다시 가리켰다. 서하는 앉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내 글 쓰라고 열쇠 줬을 때는 네 방이라고 했잖아.”
“누가 뺏는대? 그러니까 일을 키우지 말라고.”
다음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분주한 복도에 서하가 걸어 나왔다. 그 틈을 지나는 동안 남편이 다시 이름을 불렀지만,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
작업실에 도착하니 프린터 표시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전날 마지막으로 뽑다가 종이가 걸린 상태였다.
서하는 덮개를 열고 구겨진 한 장을 꺼냈다. 준혁의 발표문 마지막 장이었다.
창가에는 아직 비닐을 다 벗기지 않은 책장이 있었다. 3년 전 이 방을 처음 보던 날, 준혁이 말했다. 이제 여기서 네 글을 쓰면 되겠다고.
서하는 그날 바로 책상을 골랐다. 키보드를 놓고도 원고를 펼칠 자리가 남는 넓은 책상.
예전에 쓰던 노트를 꺼내 맨 위 서랍에 넣었다. 회사 일을 마무리하면 시작하려고.
그 서랍은 아래로 밀려 있었다. 위쪽 칸마다 행사 순서와 인사말, 준혁의 인터뷰 예상 질문이 들어갔다.
서하는 가장 아래 칸을 열어 노트를 꺼냈다. 고무줄이 눌린 자리에 먼지가 얇게 쌓여 있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시어머니였다.
“준혁이한테 들었다.”
서하는 책상 의자에 앉았다. 아직 목이 아팠다.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부부 사이 일은 집에서 정리해야지. 밖에서 무슨 망신이니.”
서하는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물었다.
“어디까지 들으셨어요?”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어. 네가 현명하게 처신하면 지나갈 일이고.”
“아들이 다른 여자 만난 건 들으셨군요.”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곧 시어머니는 어른들 체면을 생각하라는 말을 시작했다.
서하는 중간에 끊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그러고도 자신의 안부를 묻는 말은 없었다.
전화를 끝낸 뒤, 서하는 평소 준혁에게 보내던 수정 원고 메일을 열었다. 가장 최근에 보낸 첨부파일의 시간이 새벽 3시를 넘겨 있었다.
받는 사람 아래, 발신자 이름이 작게 붙어 있었다. 윤서하.
노트북을 닫으려다 메일을 개인 보관함으로 옮겼다. 회사에 보낸 파일도 따로 보관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행사 원고에는 언제 누가 어떤 부분을 고쳤는지, 보낸 시각까지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오전, 서하는 방송 일을 할 때 알던 기자에게 연락했다. 결혼 이야기를 기사로 써 달라는 부탁 대신, 어제 공개 행사에서 남편이 말한 내용 중 틀린 부분을 본인이 설명하고 싶다고 전했다.
점심 무렵, 들어 보겠다던 기자는 가족 간 분쟁을 다루지 않는다는 데스크의 답을 전해 왔다. 어제 준혁의 인터뷰를 실은 기사는 그대로 두고, 서하의 설명만 받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매체에도 연락했지만 오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곳은 없었다. 한성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담당자에게 전달하겠다는 말로 끝났다. 기자 한 사람은 통화를 마치기 직전 작게 덧붙였다.
“사모님, 지금은 회사 쪽 입장이 먼저 내려와서요.”
서하는 더 부탁하지 않았다. 연락한 곳과 답변을 적어 둔 메모를 덮고, 며칠 전 받은 메일을 찾았다.
강도윤. 책임PD.
그가 보낸 출연 제안에는 이상하게도 준혁의 이름보다 자신의 이름이 먼저 적혀 있었다. 결혼 뒤 글쓰기를 멈춘 방송 작가를 만나고 싶다는 설명이었다. 그때는 뭘 보여줄 게 있겠느냐며 읽다 말았다.
지금 다시 읽으니 첫 줄보다 끝에 붙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출연 여부는 윤서하 씨의 의사부터 확인하고 싶습니다.
서하는 적힌 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두 번 울린 뒤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강도윤입니다.”
“윤서하예요. 보내주신 메일 때문에 연락드렸어요.”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멈췄다.
“말씀하세요.”
“방송 내용이 바뀌어도 만나실래요?”
“어떻게 바뀝니까?”
“저, 이혼하려고요.”
이번에는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상대는 위로하지도, 놀란 척하지도 않았다. 몇 초 뒤 그가 물었다.
“그 이야기를 카메라 앞에서 하실 생각입니까?”
“만나서 조건부터 말씀드릴게요.”
***
제작사 회의실은 생각보다 작았다. 벽에 붙은 편성표에는 지운 자국이 많았고, 테이블 한쪽에 식은 커피가 놓여 있었다. 도윤은 서하가 들어오자 노트북을 닫고 일어났다.
“윤서하 씨죠.”
키가 컸다. 얼굴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손가락에 묻은 검은 잉크였다.
그는 악수하려던 손을 보고 휴지로 닦았다. 서하는 그동안 먼저 자리에 앉았다.
도윤이 의자를 당겨 맞은편에 앉았다. 서하의 얼굴을 살피는 시선은 길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가방에서 꺼낸 서류에 곧바로 눈길을 줬다.
“이혼 결심은 언제 하셨습니까?”
“어제요.”
“출연은 하루 만에 결정하신 거고요?”
“아직 결정 안 했어요.”
서하가 서류를 테이블 가운데로 밀었다. 맨 위에는 손으로 쓴 제목이 있었다. 출연 조건.
“제 이야기를 어디까지 쓰실 건지 듣고 결정할 거예요.”
도윤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문장을 읽던 눈이 중간에서 멎었다가 마지막 줄로 내려갔다. 서하는 가방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이걸 전부 계약에 넣어 달라는 겁니까?”
“빠지는 항목이 있으면 이유를 말해 주세요.”
도윤이 첫 장을 다시 펼쳤다. 서하의 문장을 읽는 동안, 회의실 밖에서 울리던 전화가 그쳤다.
“그리고 첫 방송 전에 할 일이 하나 있어요.”
서하가 맨 아래 빈칸에 펜을 대었다.
“생방송으로 해 주세요. 제가 이혼하려는 이유를, 제 입으로 말하게.”
작업실을 다녀온 뒤로 서하는 노트북 앞에 앉는 시간이 길어졌다. 준혁이 보낸 메시지는 변호사에게 전달했고, 작업실에 남아 있던 개인 원고도 챙겼다. 당장 해결된 일은 없었지만, 적어도 무엇을 잃을 수 있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는 전보다 분명해졌다.다음 날 오전, 제작진은 정규 4회 편집 회의를 열었다. 채미래와 준혁 사이의 관계가 방송에 들어갈 수 있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미래가 공개에 동의하지 않은 부속합의는 구성안에서 제외돼 있었지만, 제작진은 공개된 장면만으로도 관계의 균열을 보여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서하가 준혁의 거짓을 어떻게 확인했고, 자신이 어떤 일을 맡았는지 설명하는 장면이 중심이었다.마케팅 담당자가 편집본을 띄웠다. 서하가 준혁의 개인 해명 영상을 바라보는 장면 뒤로, 준혁과 미래가 행사장에서 나란히 걷는 과거 영상이 붙어 있었다.자막은 ‘아내가 몰랐던 남편의 두 얼굴’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하는 화면을 끝까지 본 뒤 손을 들었다.“이 장면은 빼 주세요.”“어떤 부분이요?” 담당자가 물었다.“행사장에서 같이 걷는 영상이요. 저 영상만으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알 수 없어요. 제가 그때 몰랐다는 사실을 설명할 자료도 아니고요.”“시청자는 두 사람이 가까웠다는 걸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가까웠다는 건 누구와 누구 사이를 말하는 거죠? 준혁 씨와 미래 씨가 같이 걷는 장면이라면 그 사실만 보여 주면 돼요. 제가 그걸 언제 알았는지는 별도로 확인해야 하고요. 화면에
준혁이 보낸 메시지는 짧았다. ‘그 작업실, 계속 비워 둘 생각은 없어.’ 설명도 이유도 없었다. 서하는 그 문장을 캡처해 변호사에게 전달하고, 작업실에 남아 있는 자신의 물건부터 확인했다.당장 돌려받을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등기는 준혁의 이름으로 돼 있었고, 두 사람이 나눌 정산도 아직 합의에 이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곳에 남겨 둔 원고까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그녀는 오래된 메모장을 꺼냈다. 작업실을 마련해 주던 날 준혁이 했던 말이 안쪽 표지에 적혀 있었다.‘이제 여기서 네 글을 써.’ 당시 서하는 그 말을 믿었다. 결혼하고 나서 회사의 원고와 남편의 말을 대신 쓰느라 자기 문장을 뒤로 미뤘지만, 언젠가 다시 쓰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작업실은 그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질 장소처럼 보였다.그런데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생각과 달랐다. 책상 위에는 회사 브리핑 초안이 쌓였고, 벽면에는 일정표와 행사 동선이 붙었다.서하가 개인적으로 쓰던 노트는 서랍 안으로 들어갔다. 준혁은 급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그 공간을 회의실처럼 썼고, 서하는 그가 원하는 문장을 정리했다. ‘네 글을 써’라는 약속은 조금씩 ‘내 일을 도와줘’라는 말에 밀려났다.서하는 노트북을 열어 작업실 관리 메시지를 확인했다. 준혁은 다음 주에 중개인을 불러 내부를 확인하겠다고 했다.그동안 남겨 둔 개인 물품은 날짜를 정해 가져가라는 말도 붙어 있었다. 마치 그 공간이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듯한 문장이었다.그녀는 변호사에게 연락했다.&ldqu
한준혁의 연락은 서하의 변호사를 통해 왔다. 공식적인 조정 일정이나 서면 제안이 아니라, 짧은 문장 하나였다.직접 만나 정리할 일이 있으니 시간을 내 달라는 요청이었다. 변호사는 응할 의무는 없지만, 상대가 어떤 조건을 내놓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대리인과 함께 만나면 된다고 했다.서하는 메시지를 한 번 더 읽었다. 준혁은 업무 기록이 공개된 방송 이후 개인 계정에 입장문을 올렸고, 그 뒤로는 서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일을 줄였다.그렇다고 물러선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은 이제 ‘내가 직접 했다’에서 ‘최종 승인권은 내게 있었다’로 좁아졌다. 기록이 확인한 순서를 되돌릴 수 없으니, 다른 방식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을 만들려는 듯했다.“만나야 할까요?” 서하가 물었다.“만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상대가 정산과 관련된 제안을 하려는 것이라면, 조건을 확인한 뒤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구두로 합의하지 말고, 어떤 제안이든 문서로 받는 편이 안전합니다.”“방송을 그만두라는 얘기를 할 수도 있겠네요.”“그럴 가능성은 있겠죠. 그 부분은 정산과 분리해서 판단하시면 됩니다.”서하는 잠시 생각한 뒤 만남을 받아들였다. 준혁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서만은 아니었다.무엇을 바라는지 직접 듣고,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은 자기 말로 거절하고 싶었다. 준혁이 정해 놓은 이야기 안에서 답만 고르기보다, 어디서 멈출지를 먼저 확인하려는 만남이었다.외부 사무실의 작
채미래의 메시지는 다음 날 오전에 도착했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방송과 무관한 자리였으면 합니다. 문서를 보여 드리겠다는 뜻은 아니고, 제가 확인한 사실을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부터 정하고 싶어요.’서하는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미래는 여전히 공개에 동의하지 않았고, 문서도 제공하지 않겠다고 했다.그래도 먼저 대화를 청해 온 점은 전날과 달랐다. 서하는 이 개인적인 만남이 방송 자료 수집으로 바뀌지 않도록, 답장을 쓰기에 앞서 메시지를 가연에게 전달했다.가연은 짧게 답했다.“만나실 수는 있습니다. 다만 촬영이나 녹음은 하지 않는다고 먼저 분명히 하세요. 대화 중 들은 내용을 나중에 방송에 쓰려면 별도 동의와 검토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당사자가 공개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요.”서하는 그 문장을 그대로 미래에게 보냈다. 잠시 뒤 미래가 답했다.‘그 조건이면 괜찮아요. 장소는 제가 정해도 될까요?’ 서하가 동의하자 방송국과 떨어진 작은 카페로 약속이 잡혔다. 창가 대신 출입문이 보이는 안쪽 자리라, 지나는 사람에게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을 곳이었다.약속 시간보다 10분 먼저 도착한 서하는 물 한 잔을 주문했다. 카페에는 점심을 앞둔 손님이 몇 명뿐이었다. 그녀는 휴대전화 녹음 기능이 꺼져 있는지 확인하고, 화면을 아래로 뒤집어 놓았다.미래를 만나러 온 이유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상대가 직접 말하고 싶은 범위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정해 놓고도, 혹시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기다리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됐다.미래는 약속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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