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혼을 생중계합니다

내 이혼을 생중계합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4
By:  YuIm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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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원고로 박수받던 남편이 말했다. “아내는 회사 일을 한 적 없습니다.” 그날 불륜까지 목격한 나는 이혼을 선언했다. 빼앗긴 건 7년의 사랑만이 아니었다. 내 경력과 문장, 이름까지. 카메라 앞에서 모든 걸 되찾으려는 순간, 방송 PD 강도윤이 나타났다. 그는 새로운 사랑일까, 또 한 번 내 선택을 빼앗을 사람일까? 결말은 내가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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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내 문장으로 박수받는 남편

“그때 제가 밤새 고친 문장이 있습니다.”

한준혁이 잠시 말을 멈췄다. 객석을 둘러보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준비된 화면을 돌아보는 것까지. 윤서하가 어젯밤 원고에 써 넣어 준 순서였다.

대형 화면에 3년 전 미국 리콜 당시의 사과문이 나타났다. 첫 줄에 있던 ‘심려’라는 단어를 ‘불편과 불안’으로 고친 사람은 서하 자신이었다. 차를 못 타는 사람이 걱정만 하는 건 아니지 않으냐고, 식탁에 엎드려 잠든 준혁을 깨워 물었던 기억이 났다.

“고객이 겪은 문제부터 제대로 말하자. 그게 제 원칙이었습니다.”

박수가 터졌다. 앞줄에 앉은 한태산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고, 준혁은 기다렸다는 듯 아버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하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준혁의 다음 발표문은 고쳐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진행자가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화면이 웃고 있는 준혁의 얼굴로 바뀌었다.

“사모님도 그 시기에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아내는 회사 일과 철저히 분리해 두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와 계약을 맺거나 업무를 맡은 적도 없고요.”

서하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가방을 내려다봤다. 지퍼가 반쯤 열린 틈으로 오늘 발표 원고가 보였다.

새벽까지 고친 종이였다. 준혁이 올라가기 직전까지도 받아 들고 외우던 종이.

“편하게 지내게 해 주는 게 남편 몫이죠.”

이번에는 웃음이 섞인 박수가 나왔다. 서하 옆에 앉은 사람이 부럽다며 팔을 살짝 건드렸다. 서하는 웃어 주는 대신 가방의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결혼 초에는 자신도 저 말에 웃었었다. 글 쓰는 일이 얼마나 불규칙하고 힘든지 아니까 쉬게 해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쉬는 동안 남편의 발표문을 조금 봐주고, 집안 행사 순서를 짜 주고, 급하다는 일을 받아주다 보니 7년이 지났다.

그사이 준혁의 직함은 길어졌다. 행사 초대장을 받을 때마다 서하는 자기 이름이 있을 자리를 먼저 봤다.

그곳에 적힌 말은 늘 같았다. 한준혁 이사의 부인.

행사를 마친 준혁이 취재진에게 둘러싸인 사이, 서하는 객석 뒤편으로 빠져나와 대기실로 향했다. 원고를 돌려주고 나면 곧장 집에 갈 참이었다.

복도 끝에서 채미래가 먼저 준혁의 이름을 불렀다.

“오빠, 잠깐만.”

서하의 걸음이 멈췄다. 조금 전까지 행사 관계자들 앞에서 ‘이사님’이라고 부르던 목소리였다.

미래는 준혁의 옷깃에 붙은 무언가를 떼어 냈다. 손을 내린 뒤에도 두 사람의 거리는 벌어지지 않았다. 준혁이 미래의 손목을 잡아 자기 쪽으로 당겼다.

서하는 복도 모퉁이의 화분 뒤에 서 있었다.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했는데, 발바닥이 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만나야 해?”

“오늘만 넘기자고 했잖아.”

“오늘만, 이번 일정만. 그 사람 아직 작업실 쓰던데.”

준혁이 미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정리할 거야. 네가 신경 쓸 일 없게.”

그가 고개를 숙였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미래가 웃는 동안에도 서하는 제 가방 손잡이만 쥐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에 닿은 금속 장식이 아팠다.

한동안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혼자 다녀왔다던 출장에서 묻어 온 낯선 향, 전화받으러 나가면서 꼭 닫던 문. 물으면 준혁은 늘 피곤하다며 대화를 끝냈다.

서하는 손잡이에 감긴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금속 장식에 눌려 붉어진 자국을 내려다보다 가방을 고쳐 들고는 화분 옆으로 걸어 나왔다.

“무엇부터 정리할 건데?”

미래의 웃음이 먼저 사라졌다. 준혁은 손을 내렸지만 서하를 향해 오지는 않았다. 대신 복도 양쪽을 빠르게 살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작업실부터? 아니면 나부터?”

“서하야.”

준혁이 낮춰 부르는 이름은 경고에 가까웠다. 누가 들을까 봐, 어디서 사진이라도 찍힐까 봐. 서하가 어떻게 들었는지를 확인하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미래가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가 있을게요.”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래가 서하의 옆을 지나갔다. 서하는 그대로 그 모습을 지켜봤고, 남편은 멀어지는 굽 소리가 잦아든 뒤에야 대기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이었다. 서하는 그 손을 무시하고 먼저 들어갔다.

“언제부터야?”

“지금 흥분해서 들으면 오해만 해.”

“내가 뭘 봤는지부터 설명해 줄까?”

문을 닫은 준혁은 거울 아래 놓인 생수병을 집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서하가 이 정도로 화를 내면 으레 저런 식으로 시간을 벌곤 했다.

“우리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잖아.”

“어젯밤에도 당신 원고 고쳤어.”

“그거랑 이건 별개지.”

서하는 가방에서 꺼낸 원고의 접힌 모서리를 펴고, 첫 장이 준혁 쪽을 향하도록 돌려놓았다.

‘고객이 겪은 문제부터 제대로 말하자.’ 인쇄된 문장 밑에 서하의 글씨가 남아 있었다. 여기서 카메라 보지 말고 객석.

“당신은 내 손이 필요할 때만 우리가 부부였구나.”

“그렇게까지 말할 일이야?”

준혁은 서하 대신 원고를 챙겨, 누가 볼까 봐 종이를 뒤집어 놓았다. 그 손끝을 보자 어느 호텔이었는지 몇 번 거짓말했는지 묻던 말들이 멎었다. 더 들어 봐야, 눈앞에서 자신보다 먼저 원고를 챙긴 저 손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혼해.”

준혁의 손이 종이 위에서 멎었다.

“행사 끝나자마자 무슨 소리야.”

“집에 가서 말하면 집에 오자마자 이럴 거잖아.”

“내가 지금 어떤 시기인지 몰라?”

“알아. 그 시기마다 당신 대신 잠 안 잔 사람이 나니까.”

준혁은 의자를 빼서 앉았다. 서하에게도 맞은편을 가리켰지만, 그녀는 가방을 어깨에 멨다.

“너 혼자 나가서 뭘 하려고.”

“그건 내가 알아볼게.”

“당분간 쉬어. 작업실에 있든가. 말 옮기지 말고.”

서하가 문을 열자 준혁이 덧붙였다.

“거기도 내 명의인 건 알지?”

손잡이를 잡은 채 돌아보는 서하에게 준혁은 맞은편 빈 의자를 다시 가리켰다. 서하는 앉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내 글 쓰라고 열쇠 줬을 때는 네 방이라고 했잖아.”

“누가 뺏는대? 그러니까 일을 키우지 말라고.”

다음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분주한 복도에 서하가 걸어 나왔다. 그 틈을 지나는 동안 남편이 다시 이름을 불렀지만,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

작업실에 도착하니 프린터 표시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전날 마지막으로 뽑다가 종이가 걸린 상태였다.

서하는 덮개를 열고 구겨진 한 장을 꺼냈다. 준혁의 발표문 마지막 장이었다.

창가에는 아직 비닐을 다 벗기지 않은 책장이 있었다. 3년 전 이 방을 처음 보던 날, 준혁이 말했다. 이제 여기서 네 글을 쓰면 되겠다고.

서하는 그날 바로 책상을 골랐다. 키보드를 놓고도 원고를 펼칠 자리가 남는 넓은 책상.

예전에 쓰던 노트를 꺼내 맨 위 서랍에 넣었다. 회사 일을 마무리하면 시작하려고.

그 서랍은 아래로 밀려 있었다. 위쪽 칸마다 행사 순서와 인사말, 준혁의 인터뷰 예상 질문이 들어갔다.

서하는 가장 아래 칸을 열어 노트를 꺼냈다. 고무줄이 눌린 자리에 먼지가 얇게 쌓여 있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시어머니였다.

“준혁이한테 들었다.”

서하는 책상 의자에 앉았다. 아직 목이 아팠다.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부부 사이 일은 집에서 정리해야지. 밖에서 무슨 망신이니.”

서하는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물었다.

“어디까지 들으셨어요?”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어. 네가 현명하게 처신하면 지나갈 일이고.”

“아들이 다른 여자 만난 건 들으셨군요.”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곧 시어머니는 어른들 체면을 생각하라는 말을 시작했다.

서하는 중간에 끊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그러고도 자신의 안부를 묻는 말은 없었다.

전화를 끝낸 뒤, 서하는 평소 준혁에게 보내던 수정 원고 메일을 열었다. 가장 최근에 보낸 첨부파일의 시간이 새벽 3시를 넘겨 있었다.

받는 사람 아래, 발신자 이름이 작게 붙어 있었다. 윤서하.

노트북을 닫으려다 메일을 개인 보관함으로 옮겼다. 회사에 보낸 파일도 따로 보관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행사 원고에는 언제 누가 어떤 부분을 고쳤는지, 보낸 시각까지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오전, 서하는 방송 일을 할 때 알던 기자에게 연락했다. 결혼 이야기를 기사로 써 달라는 부탁 대신, 어제 공개 행사에서 남편이 말한 내용 중 틀린 부분을 본인이 설명하고 싶다고 전했다.

점심 무렵, 들어 보겠다던 기자는 가족 간 분쟁을 다루지 않는다는 데스크의 답을 전해 왔다. 어제 준혁의 인터뷰를 실은 기사는 그대로 두고, 서하의 설명만 받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매체에도 연락했지만 오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곳은 없었다. 한성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담당자에게 전달하겠다는 말로 끝났다. 기자 한 사람은 통화를 마치기 직전 작게 덧붙였다.

“사모님, 지금은 회사 쪽 입장이 먼저 내려와서요.”

서하는 더 부탁하지 않았다. 연락한 곳과 답변을 적어 둔 메모를 덮고, 며칠 전 받은 메일을 찾았다.

강도윤. 책임PD.

그가 보낸 출연 제안에는 이상하게도 준혁의 이름보다 자신의 이름이 먼저 적혀 있었다. 결혼 뒤 글쓰기를 멈춘 방송 작가를 만나고 싶다는 설명이었다. 그때는 뭘 보여줄 게 있겠느냐며 읽다 말았다.

지금 다시 읽으니 첫 줄보다 끝에 붙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출연 여부는 윤서하 씨의 의사부터 확인하고 싶습니다.

서하는 적힌 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두 번 울린 뒤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강도윤입니다.”

“윤서하예요. 보내주신 메일 때문에 연락드렸어요.”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멈췄다.

“말씀하세요.”

“방송 내용이 바뀌어도 만나실래요?”

“어떻게 바뀝니까?”

“저, 이혼하려고요.”

이번에는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상대는 위로하지도, 놀란 척하지도 않았다. 몇 초 뒤 그가 물었다.

“그 이야기를 카메라 앞에서 하실 생각입니까?”

“만나서 조건부터 말씀드릴게요.”

***

제작사 회의실은 생각보다 작았다. 벽에 붙은 편성표에는 지운 자국이 많았고, 테이블 한쪽에 식은 커피가 놓여 있었다. 도윤은 서하가 들어오자 노트북을 닫고 일어났다.

“윤서하 씨죠.”

키가 컸다. 얼굴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손가락에 묻은 검은 잉크였다.

그는 악수하려던 손을 보고 휴지로 닦았다. 서하는 그동안 먼저 자리에 앉았다.

도윤이 의자를 당겨 맞은편에 앉았다. 서하의 얼굴을 살피는 시선은 길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가방에서 꺼낸 서류에 곧바로 눈길을 줬다.

“이혼 결심은 언제 하셨습니까?”

“어제요.”

“출연은 하루 만에 결정하신 거고요?”

“아직 결정 안 했어요.”

서하가 서류를 테이블 가운데로 밀었다. 맨 위에는 손으로 쓴 제목이 있었다. 출연 조건.

“제 이야기를 어디까지 쓰실 건지 듣고 결정할 거예요.”

도윤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문장을 읽던 눈이 중간에서 멎었다가 마지막 줄로 내려갔다. 서하는 가방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이걸 전부 계약에 넣어 달라는 겁니까?”

“빠지는 항목이 있으면 이유를 말해 주세요.”

도윤이 첫 장을 다시 펼쳤다. 서하의 문장을 읽는 동안, 회의실 밖에서 울리던 전화가 그쳤다.

“그리고 첫 방송 전에 할 일이 하나 있어요.”

서하가 맨 아래 빈칸에 펜을 대었다.

“생방송으로 해 주세요. 제가 이혼하려는 이유를, 제 입으로 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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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내 문장으로 박수받는 남편
“그때 제가 밤새 고친 문장이 있습니다.”한준혁이 잠시 말을 멈췄다. 객석을 둘러보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준비된 화면을 돌아보는 것까지. 윤서하가 어젯밤 원고에 써 넣어 준 순서였다.대형 화면에 3년 전 미국 리콜 당시의 사과문이 나타났다. 첫 줄에 있던 ‘심려’라는 단어를 ‘불편과 불안’으로 고친 사람은 서하 자신이었다. 차를 못 타는 사람이 걱정만 하는 건 아니지 않으냐고, 식탁에 엎드려 잠든 준혁을 깨워 물었던 기억이 났다.“고객이 겪은 문제부터 제대로 말하자. 그게 제 원칙이었습니다.”박수가 터졌다. 앞줄에 앉은 한태산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고, 준혁은 기다렸다는 듯 아버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하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준혁의 다음 발표문은 고쳐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진행자가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화면이 웃고 있는 준혁의 얼굴로 바뀌었다.“사모님도 그 시기에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아내는 회사 일과 철저히 분리해 두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와 계약을 맺거나 업무를 맡은 적도 없고요.”서하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가방을 내려다봤다. 지퍼가 반쯤 열린 틈으로 오늘 발표 원고가 보였다.새벽까지 고친 종이였다. 준혁이 올라가기 직전까지도 받아 들고 외우던 종이.“편하게 지내게 해 주는 게 남편 몫이죠.”이번에는 웃음이 섞인 박수가 나왔다. 서하 옆에 앉은 사람이 부럽다며 팔을 살짝 건드렸다. 서하는 웃어 주는 대신 가방의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결혼 초에는 자신도 저 말에 웃었었다. 글 쓰는 일이 얼마나 불규칙하고 힘든지 아니까 쉬게 해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쉬는 동안 남편의 발표문을 조금 봐주고, 집안 행사 순서를 짜 주고, 급하다는 일을 받아주다 보니 7년이 지났다.그사이 준혁의 직함은 길어졌다. 행사 초대장을 받을 때마다 서하는 자기 이름이 있을 자리를 먼저 봤다.그곳에 적힌 말은 늘 같았다. 한준혁 이사의 부인.행사를 마친 준혁이 취재진에게 둘러싸인 사이, 서하는 객석 뒤편으로 빠져나와 대기실로 향했다. 원고를 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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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출연 조건
도윤은 서하가 적은 마지막 문장을 오래 봤다. 생방송. 그 세 글자 아래에 그어진 선이 유난히 짙었다.“편집을 못 하게 하시려는 겁니까?”“남편이 한 말을 정정하고 싶어요. 그건 제가 직접 해야겠어요.”“남편분이 나온다고 하지는 않았는데요.”“알아요. 저 혼자 할 거예요.”도윤이 등받이에서 몸을 뗐다. 노트북을 다시 열고 행사 영상을 찾았다. 서하가 정확한 구간을 말하자 손가락이 재생 막대 위에서 멈췄다.아내는 회사와 계약을 맺거나 업무를 맡은 적이 없다는 준혁의 목소리가 작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서하는 휴대전화 보관함을 열었다.계약서 사본은 금세 찾았다. 회사에서 받은 메일을 따로 모아 두는 버릇은 결혼 후에도 남아 있었다.“원본도 갖고 계십니까?”“집에 있는 서류함에요. 계약이 끝났을 때 돌려받은 제 몫이에요.”“지금 가져오실 수 있고요?”준혁은 서하가 서류를 갖고 있다는 걸 잊었을 것이다. 챙기는 일도 늘 그녀에게 맡겼으니까.도윤은 곧장 전화를 걸었다. 현장 법무에게 자료를 함께 봐 달라는 요청이었다. 통화를 끝낸 뒤에야 조건서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본인이 한 말과 자료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확인한다. 뜻이 달라지도록 잘라 붙이지 않는다. 불리하다는 이유만으로 일방적으로 출연을 끝내지 않는다.”“제가 그만두겠다고 할 때는요?”“이유와 촬영 상황을 보고 계약대로 협의해야죠. 언제든 아무 조건 없이 나가셔도 된다고는 못 합니다.”서하는 펜 뚜껑을 열었다.“그럼 제가 멈추겠다고 했을 때 어떤 불이익이 있는지도 처음부터 적어 주세요. 나중에 말하지 마시고.”“내용을 확인한다는 게 모든 편집을 마음대로 바꾸겠다는 뜻입니까?”“제가 한 말이 제가 안 한 말로 바뀌면, 그건 고쳐야죠.”도윤의 펜이 잠시 멎었다. 그는 그 문장 옆에 작은 표시를 남겼다.“수정 전후 내용과 담당자가 남도록 하겠습니다. 확인하고 싶은 자료는 정식으로 요청하실 수 있게 하고요.”“방송이 끝난 뒤에도요.”“네. 그 부분까지 넣죠.”받아 적다가 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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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첫 정정
빨간 불은 생각보다 작았다. 서하는 그 불빛 아래 달린 렌즈를 보다가, 조금 옆에 선 도윤에게 시선을 옮겼다.“윤서하입니다.”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남편의 인사말은 여러 번 고쳐 줬어도 제 이름으로 시작하는 말은 오래 하지 않았다. 서하는 잠깐 숨을 고르고 다음 문장을 이었다.“저는 한준혁 씨와 결혼한 지 7년이 됐습니다. 지금은 이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모니터 옆의 댓글이 빠르게 올라갔다. 진짜 부인 맞느냐는 질문과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말이 섞였다. 서하는 더 읽지 않고 도윤을 봤다.“직접 출연을 결정하신 이유가 있습니까?”“제가 한 말이 없는 상태에서 제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와서요.”“오늘 정정하고 싶은 내용부터 말씀해 주시겠어요?”준비해 둔 행사 영상이 재생됐다. 밝은 조명 아래의 준혁은 느긋했다. 아내가 회사와 계약을 맺거나 업무를 맡은 적이 없다는 말 뒤로 객석의 웃음이 들렸다.서하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가연과 확인했던 자료가 화면에 뜨자 종이의 어느 부분이 가려졌는지부터 살폈다. 다른 직원들의 이름과 연락처는 보이지 않았다.“저는 당시 외부 자문 계약을 맺었습니다. 기술적인 리콜 판단은 전문팀에서 했고, 제가 맡은 건 대외 설명과 일정 조율 쪽이었습니다.”도윤이 계약서에 표시된 업무 범위를 읽었다. 화면에는 짧은 문장과 서하의 이름만 남았다.“직원이 아니라 외부 계약자였다는 말씀이죠?”“네. 그래서 계약하지 않았다는 말도, 업무를 맡은 적이 없다는 말도 틀렸습니다.”말을 마치자 목이 바짝 말랐다. 물을 들어도 되나 싶었는데 도윤이 다음 질문을 서두르지 않았다.서하는 컵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컵 바닥이 받침에 닿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가연이 확인을 마친 자료라는 안내가 이어졌다. 계약서를 공개하기까지의 검토 범위도 짧게 설명됐다. 전체 리콜의 성과나 세부 책임까지 판단하지는 않는다는 안내였다.도윤은 방송 직전에 도착한 한성의 입장도 읽었다. 가족의 사적인 도움을 공식 업무로 받아들이지 않기 바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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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잘린 문장
“그 이유를 찍으러 가는 겁니다.”도윤이 전화 너머에서 말했다. 서하는 펼쳐 둔 노트를 내려다봤다. 제작진이 온다니 다시 치워야 할 물건처럼 느껴졌다.“회사에서는 부부 사생활만 찍으라고 한다면서요.”“요청이 왔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어디까지 쓸지는 자료를 보고 결정해야 하고요.”“제가 말하기 전에 잘라 놓지는 마세요.”잠시 말이 없던 도윤이 촬영 시간을 확인했다. 전화를 끊은 서하는 노트를 덮어 서랍 대신 책상 한가운데 놓아두었다.오후에 도착한 제작진이 현관부터 확인하자, 주소가 찍히지 않도록 문밖은 촬영하지 않기로 했다. 서하는 회사 서류를 모아 둔 상자 쪽도 찍지 말아 달라며 손으로 가리켰다.스태프가 상자에 덮개를 씌우는 동안 도윤은 햇빛이 드는 쪽을 살폈다. 카메라를 조금 옮긴 뒤 서하에게 앉아 보라고 했다.의자를 당기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제 방에서 제 의자를 옮기는 일에도 허락이 필요한 기분이었다.“이 정도면 됩니까?”“네. 지금 앉으신 대로 계시면 됩니다.”도윤이 옆으로 비켜서고 누군가 마이크를 확인하는 동안, 서하는 익숙한 책상을 낯선 각도에서 바라봤다. 화면에 잘 나오도록 한쪽에 쌓아 둔 책까지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그녀는 책 한 권을 집어 원래 놓였던 자리에 돌려놨다. 책등이 안쪽을 향해 조금 삐뚤어졌다.“저건 저렇게 둬요. 펼쳐 놓고 보던 거라서.”도윤은 그대로 두라고 했다. 서하는 무릎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언제부터 쓰신 곳입니까?”“3년쯤 됐어요. 리콜 관련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요.”“남편분이 마련해 주셨다고요.”“네. 이제 여기서 제 글을 쓰라고 했어요.”서하의 시선이 책상 모서리에 머물렀다. 처음 배송받던 날 작은 흠집이 있었다.배송받자마자 바꿀까 싶다가도 빨리 의자를 당겨 앉고 싶어 그냥 받았다. 흠집보다 그 자리에서 처음 본 창밖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가구는 직접 고르신 겁니까?”“책상은 제가 골랐어요. 출력한 원고 옆에 노트북을 놓을 수 있게 넓은 걸로요.”“쓰신 글도 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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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첫 방송이 나간 밤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왜 잘랐어요?”도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모니터에 멈춘 서하의 얼굴이 편집실을 채웠다. 원본 영상 속 그녀는 질문을 듣고 잠깐 생각한 뒤 대답했지만, 검토본에서는 그 침묵만 길게 남아 있었다.“제가 놓친 부분입니다.” 도윤이 말했다.“회사 관련 내용을 확인하는 동안 주변 문장까지 같이 잘렸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수정하면 끝나는 문제인가요?”“아니요. 같은 일이 다시 생기지 않게 확인 절차를 바꾸겠습니다.”서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기보다, 적어도 사과를 대신할 설명으로 포장하지 않는 점을 눈여겨봤다. 그는 편집표를 열어 문제가 된 구간을 표시했다. 가연은 회사 업무와 직접 연결된 문장, 개인적인 경험에 관한 문장을 서로 다른 색으로 구분했다.“업무 자료는 공개 범위를 더 확인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혼을 결심한 이유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회사의 검토 대상이 아니에요.” 가연이 말했다.“다만 실제로 말한 맥락을 바꾸지 않았는지, 최종본을 확인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것은 모든 말을 무조건 내보내는 권리가 아니라, 자신이 말하지 않은 뜻을 대신 만들어 붙이지 말라는 것이었다.수정 작업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인터뷰의 질문을 원래 순서대로 돌리고, 서하가 작업실을 떠나기 아쉬워하는 이유와 이혼을 선택한 이유를 분리했다. 회사에서 맡았던 구체적인 업무는 아직 공개하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 돈이나 거처를 걱정하는 듯한 자막을 넣지 않기로 했다.“이렇게 보면 너무 담담하지 않습니까?” 편집자가 물었다.“감정이 더 드러나는 컷이 있는데요.”“담담한 게 감정이 없는 건 아니죠.” 서하가 말했다.“제가 울지 않았다고 해서 아쉬워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도윤이 편집표에 적었다. 감정 컷은 유지하되, 같은 표정을 반복해 다른 의미를 만들지 말 것.서하는 그가 자신을 위해 문장을 적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이건 자신이 요구한 조건을 지키는 일이고, 제작진이 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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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지우지 않는 PD
다음 날 오전, 제작사 회의실 화면에는 전날 방송의 반응이 숫자로 정리돼 있었다. 공개 직후 시청 완료율은 예상을 웃돌고 공식 계정의 짧은 인터뷰 영상도 빠르게 공유되는 중이었으나, 모여 앉은 사람들의 표정은 들뜬 숫자와 달랐다.“화제성은 잡았습니다. 문제는 방향입니다.”편성 담당자가 자료를 넘겼다. 서하가 이혼을 결심한 이유보다 작업실과 생활이 바뀌는 데 대한 걱정이 더 크게 읽힌다는 반응이 있었다.일부 댓글은 그녀가 남편의 재산을 더 받으려고 방송에 나왔다는 쪽으로 흘렀다. 제작사 본사에서 보낸 요청서에는 한성 측의 입장과 댓글 반응을 정규 2회에 반영하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남편이 충분히 지원했는데도 만족하지 못한 아내. 그런 구도가 한눈에 들어오게 만들자는 겁니다.” 담당자가 말했다.“시청자는 복잡한 설명보다 관계를 빨리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도윤은 요청서를 다시 읽었다. 그 문장에는 ‘지원’이라는 말이 세 번 들어갔다.한성은 자문 계약 사실을 정정하고도, 서하의 실무 기여는 가족의 도움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축소하고 있었다. 제작사 본사는 그 주장을 검증하기보다, 남편이 충분히 지원했는데도 서하가 더 많은 것을 원한다는 인상을 먼저 만들려 했다.“그렇게 편집하면 안 됩니다.”“그럼 어떤 구도로 가자는 겁니까? 지금 자료로는 회사 업무를 자세히 보여 줄 수 없잖아요.”“공개할 수 없는 자료를 쓰지 않는 것과, 다른 뜻으로 보이게 만드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편성 담당자가 의자에 기대었다.“강 PD, 이건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리얼리티예요. 시청자가 보고 싶은 갈등을 만들어야죠.”“갈등은 이미 있습니다. 출연자가 한 말을 다른 뜻으로 바꿔야만 생기는 갈등은 아니고요.”말이 끝나자 회의실에 잠깐 정적이 생겼다. 도윤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한마디만 거칠어져도 이 자리에서 따질 것은 편집이 아니라 자신의 태도가 될 것 같아, 도윤은 높아지려는 목소리를 눌렀다. 바꾸지 않겠다는 말 옆에 왜 바꿀 수 없는지도 남겨야 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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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쓰지 않는 폭로
보충 촬영을 마친 도윤이 다음 인터뷰 질문지를 보내 왔다. 회사에서 검토 중인 자료와는 별개로 개인적인 경험을 묻는 질문부터 확인해 달라던 약속대로였다. 서하는 파일을 열어 한 장씩 읽어 내려갔다.‘남편의 외도를 언제부터 의심했습니까?’그 문장에서 손이 멈췄다. 질문 아래에는 촬영 때 이야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상황을 말해 달라는 안내가 붙어 있었다.서하는 복도에서 본 장면을 떠올렸다. 준혁이 채미래의 손목을 잡아당겼고, 두 사람은 입을 맞췄다. 그 이상은 자신이 직접 확인한 사실이 아니었다.그날 이후 둘이 얼마나 오래 만났는지, 미래가 준혁의 약속을 어디까지 믿었는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 서하는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는 부분을 추측으로 채우면 안 된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남편에게 당한 일을 말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함부로 공개할 수는 없었다.서하는 질문지에 댓글을 달았다. ‘제가 직접 본 장면은 설명할 수 있지만, 관계의 기간이나 그 밖의 사정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추측을 유도하는 질문은 빼 주세요.’잠시 뒤 도윤에게서 전화가 왔다.“외도 의혹을 다루는 걸 원하지 않으십니까?”“제가 본 건 있어요. 하지만 그걸로 모든 걸 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그 장면이 이혼을 결심한 계기였다고 말씀하실 수는 있겠죠.”“그건 맞아요. 다만 그 사람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가 대신 설명할 수는 없잖아요.”도윤은 잠깐 조용했다.“시청자는 그 장면을 궁금해할 겁니다. 왜 이혼을 결심했는지 알고 싶어 할 테니까요.”“그럼 제가 직접 본 것과 모르는 걸 구분해서 말하면 돼요. 제가 모르는 것까지 말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알겠습니다. 질문을 다시 정리하겠습니다.”서하는 전화를 끊은 뒤에도 질문지를 열어 두었다. 도윤이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이번에는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그가 편집 원칙을 지키려 한다는 것과, 시청자의 관심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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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조용히 나가라는 말
다음 날 오전, 시어머니의 집에 약속보다 10분 일찍 도착하고도 서하는 현관에서 한참 기다렸다. 안쪽에서 전화하는 목소리가 잦아들고 문이 열렸을 때, 시어머니의 눈은 서하보다 시계로 먼저 향했다.“시간은 잘 지키는구나.”“오라고 하셔서요.”“들어와라.”거실 테이블에는 차 두 잔과 얇은 서류철이 놓여 있었다. 서하는 서류철을 먼저 보지 않았다.시어머니가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한 뒤에야 맞은편 의자를 당겼다. 예전 같으면 차를 따르고 안부부터 물었을 것이다. 오늘은 그런 순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피곤했다.“방송을 봤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어.”시어머니의 말투는 차분했다. 화를 내기보다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설명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하지만 집안일을 밖으로 끌고 나가서 얻는 게 뭐니? 네가 다친 만큼 우리도 다친다. 준혁이 회사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지 알잖아.”“제가 한 일을 하지 않은 일처럼 말하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그걸 꼭 전국에 알려야겠니?”조용히 끝내겠다는 말 한마디를 기다리는 시어머니 앞에서 서하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아무 일도 없던 집으로 돌아가자는 대답까지 요구받은 것 같아, 그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제가 한 일까지 남편이 했다고 말하는 건 조용히 끝내는 일이 아니에요.”시어머니가 찻잔을 내려놓았다.“네가 그 집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던 건 누구 덕이라고 생각하니? 생활비 걱정 없이 지냈고, 네가 원한다는 작업실도 마련해 줬어. 결혼하면 서로 돕는 거야. 그걸 이제 와서 네가 다 해 준 것처럼 말하면 곤란하지.”“제가 다 해 줬다고 말한 적은 없어요.”“그럼 뭘 원하니?”질문은 짧았다. 서하는 그 안에 준비된 답이 있다는 걸 알았다.돈을 원한다고 말하면 탐욕스럽다고 할 것이고, 사과를 원한다고 하면 이미 충분히 대우받았다고 할 것이다. 무엇을 요구하든 그들의 언어로 다시 이름 붙여질 터였다.“제가 한 일은 제가 했다고 말하고 싶어요. 이혼하는 이유도 제가 말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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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네 작업실이라던 곳
다음 날 아침, 서하는 노트북보다 먼저 빈 상자를 꺼냈다.작업실에서 가져갈 물건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당장 그곳에서 나와야 한다는 통보를 받은 건 아니었다.하지만 시어머니가 생활비를 끊겠다고 한 이상, 자신이 어디에 무엇을 두고 살았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결혼 전부터 쓰던 원고와 외장 저장 장치가 있었다. 준혁의 발표문을 고치느라 몇 년 동안 열지 못한 파일도 그 안에 남아 있었다.이 오피스텔은 준혁과 살던 집에서 차로 20분쯤 떨어져 있었다. 리콜 수습이 끝난 뒤 준혁이 계약했다며 데려온 곳이었다. 당시 그는 문을 열어 보이며 웃었다.‘이제 여기서 네 글을 써.’그 말이 좋아서 서하는 한동안 집보다 그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처음 며칠은 결혼 전에 쓰다 만 장편을 다시 열었다.인물 이름을 바꾸고, 지워 둔 장면을 살리고, 새벽까지 문장을 고쳤다. 준혁은 가끔 커피를 들고 와서 물었다.얼마나 썼느냐고. 재미있느냐고. 서하는 그 질문을 응원이라고 생각했다.수습이 끝난 뒤에도 리콜 후속 업무 연락은 이어졌다. 준혁이 해외 업무를 맡는 동안, 서하는 일정과 브리핑을 계속 정리했다.처음에는 한두 번 도와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 더, 이번 한 번만, 이번 발표까지만. 어느새 원고 파일은 회사 이름으로 바뀌었고, 개인 작품은 폴더 안쪽으로 밀렸다.상자의 먼지를 털어 거칠어진 손끝을 비비며 서하는 창문을 열었다. 소파의 접힌 이불, 촬영 때 정리한 책장 아래로 길게 든 햇빛이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있었다.책상 위에는 마지막으로 열었던 원고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모니터 옆에 세워 둔 작은 액자도 제자리에 있었다. 결혼 전 첫 방송 대본을 끝낸 날, 자신이 직접 산 것이었다.서하는 상자를 내려놓고 컴퓨터를 켰다. 잠금 화면이 뜨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이곳에 들어오면 다시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준혁이 말한 대로, 자신의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책상 서랍을 열자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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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혼자 사는 사람
작은 방에서 맞는 첫 아침은 생각보다 부산했다.서하는 바닥에 펼쳐 둔 가방에서 옷을 꺼내고, 노트북 충전기를 찾고, 세면도구를 욕실 선반에 올렸다. 컵이 없어 종이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침대 대신 접이식 매트를 깔았더니 허리가 조금 뻐근했다. 불편한 점은 금방 눈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준혁의 일정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낯설 만큼 가벼웠다.휴대전화에는 제작진이 보낸 알림이 쌓여 있었다. 정규 2회 최종본 검토, 홍보용 클립 문구 확인, 인터뷰 일정 조율.커피를 사러 나가기 전, 서하는 쌓인 메시지에서 마감이 있는 것과 자신의 발언이 들어간 부분을 먼저 나눠 표시했다. 자신이 출연한 프로그램이라 확인할 일이 많아도, 모든 연락에 즉시 답할 필요는 없었다.정규 2회는 별거 이후의 생활을 담기로 했다. 촬영팀이 작은 방에 들어와도 되는지 물었을 때 서하는 화면에 보일 범위를 먼저 정했다. 방 전체를 훑는 촬영은 하지 말 것.주소가 드러나는 우편물과 창밖의 특정 건물은 찍지 말 것. 개인 원고의 제목과 미공개 문장은 화면에 나오지 않게 할 것. 제작진은 촬영 동선을 다시 잡았다.“집이 너무 좁아 보이면 불편하지 않으시겠어요?” 촬영 담당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좁은 건 사실이니까요. 다만 제가 어떤 물건을 갖고 사는지까지 보여 줄 필요는 없어요.”서하는 방 한쪽에 놓인 상자를 의자 옆으로 옮겼다. 화면에 들어갈 만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카메라가 지나갈 길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스태프가 조명을 옮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은 촬영 계획표를 확인한 뒤, 서하에게 추가로 보여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이 장면은 혼자 사는 생활을 담는 거죠. 불편함을 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그는 촬영팀에 그렇게 말하고, 인터뷰 질문을 한 장씩 정리했다. 서하는 그가 자신의 방을 가난한 피해자의 상징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걸 알아챘다.그렇다고 그를 믿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어제의 편집본에서 무엇이 잘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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