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해원은 침대 위로 올라갔다.
무릎을 대고, 팔꿈치로 몸을 지탱했다. 익숙한 자세인데도 몸이 낯설게 반응했다. 등줄기가 먼저 굳었다. 태헌이 뒤에 섰다. 손이 해원의 옷자락을 잡았다. “들어.” 해원이 팔을 들자 태헌이 옷을 위로 벗겨냈다. 천이 스치며 지나가는 감촉에 해원의 살갗이 먼저 반응했다. 이어서 등 뒤로 손이 넘어왔다. 속옷 훅을 푸는 손길도 서두르지 않았다. 하나씩, 정확하게. 어깨끈이 팔을 타고 흘러내리자 해원은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움츠렸다. 남은 옷도 차례로 벗겨졌다. 해원은 그 손길을 가만히 느꼈다. 스스로 벗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완전히 드러다음 날 아침, 수경이 눈을 떴을 때 명우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이불이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평소보다 이른 시각이었다. 수경은 침대에 앉은 채 한동안 그 빈자리를 봤다. 명우가 일어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늦게 잠든 탓인지, 명우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한 탓인지 알 수 없었다.부엌에서는 직원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회장님은 일찍 나가셨어요. 식사는 안 하신다고.""……그래요."수경은 식탁에 앉았다. 직원이 국그릇을 내려놓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본부장님은 오늘 아침 안 드시나요? 방에 안 계셔서요."수경은 수저를 들다가 멈췄다.직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 집의 아침은 늘 그렇게 돌아갔다. 명우는 먼저 나가고, 태헌은 조금 늦게 내려와 커피만 마시거나 간단히 먹고 나갔다. 그 순서를 매일 지켜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물을 만한 질문이었다."당분간 집에 없을 거예요."수경은 그 말을 하고 나서야 그게 무슨 뜻인지 실감했다."아, 출장 가셨구나. 그럼 방 정리는…….""그냥 두세요.""네?""방은 그냥 그대로 두세요."직원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경은 국을 한 숟갈 뜨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출장이라는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정정할 말이 없었다.낮 동안 수경은 집 안에서 할 일을 찾았다. 화분에 물을 주고, 미뤄둔 서랍 정리를 했다. 손이 비면 휴대전화를 들었다. 해원과의 대화창을 열었다.[밥은 먹었어?]썼다가 지웠다.[어제는 잘 들어갔어?]그것도 지웠다. 어제 현관에서 조심해서 가라고 한 게 마지막이었다. 그다음 말을 무엇으로 이어야 할지 몰랐다. 평소처럼 밥 먹었느
해원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 식탁에는 아무도 없었다.서재 문이 닫혀 있었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수경은 그 문 앞을 지나 식탁으로 갔다. 손대지 않은 음식이 그대로 식어 있었다. 직원은 이미 퇴근했고, 치울 사람은 수경밖에 없었다.수경은 그릇을 하나씩 겹쳤다. 국그릇, 밥그릇, 반찬 접시. 해원의 앞접시에서 손이 잠깐 멈췄다. 명우가 덜어준 반찬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해원이 좋아한다며 명우가 일부러 준비하라고 했던 반찬이었다.수경은 그 접시를 다른 그릇 위에 올렸다. 버리지도, 랩을 씌우지도 못하고 개수대 옆에 내려놓았다.물을 틀었다. 설거지를 시작했다가 그만두었다. 손이 젖은 채 개수대 앞에 서 있었다. 서재 쪽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차라리 큰 소리가 났으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한참 뒤 서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 태헌이었다. 명우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명우는 나오지 않았다.수경은 행주에 손을 닦으며 거실로 나왔다. 2층으로 올라간 태헌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수경은 계단 아래에 서 있다가, 그 자리에 계속 서 있는 게 이상해서 소파 쪽으로 몇 걸음 옮겼다. 앉지는 않았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다. 다시 계단에서 발소리가 났다.태헌이 내려오고 있었다. 한 손에 가방이 들려 있었다. 출장 갈 때 쓰던 크지 않은 가방이었다. 재킷도 입고 있었다.수경은 그 모습을 보고 그대로 멈췄다.태헌도 계단 아래에서 수경을 발견하고 걸음을 늦췄다. 거실 한가운데, 몇 걸음 떨어진 자리였다. 어제 저녁 현관에서 마주쳤을 때와 비슷한 거리였다. 그때 태헌은 해원에게 가고 있었다. 지금은 이 집을 나가고 있었다.수경은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그 가방이 대답이
명우는 그 대답을 한동안 아무 데에도 놓지 못했다.없습니다.목소리는 낮았고 흔들리지 않았다. 변명도, 덧붙이는 말도 없었다. 명우가 물은 그대로, 정확히 그만큼의 대답이었다.명우는 아들을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 모서리가 보였다. 내일 오전에 봐야 할 보고서였다. 오늘 저녁만 해도 그게 이 방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그럼."명우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그럼 상견례 날은. 그럼 결혼식 날은. 그럼 저녁마다 같은 식탁에서 해원이에게 반찬을 건네던 손은.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것을 물어도 같은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았다. 처음부터 없었다고. 명우가 이 집에 만들었다고 믿었던 것이, 아들에게는 한 번도 그런 모양이었던 적이 없었다고.명우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지를 수도 없었다. 식탁에서 아들에게 쏟아냈던 분노가 이번에는 목에 걸린 채 내려가지도, 올라오지도 않았다. '없습니다' 한마디로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면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태헌은 그 말을 숨긴 채 매일 이 집에서 살았다. 명우는 그 얼굴을 보고도 아무것도 몰랐다."내가."명우는 책상 의자를 당겨 앉았다. 서 있을 힘이 갑자기 빠졌다."내가 너를 안다고 생각했다."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말이 없는 건 원래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속을 안 보여주는 것도. 그래도 거짓말은 안 하는 놈이라고.”명우는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었다.서재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웃음 같은 숨이 새어 나왔다. 웃음은 아니었다.서재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벽시계 초침이 몇 바퀴를 도는 동안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헌은 문 앞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무슨
식탁 위에서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명우는 수경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대신 식탁을 내려다봤다. 식어버린 국그릇과 손대지 않은 반찬 접시들. 그 사이 어딘가를 한참 보고 있었다. 해원은 명우가 무언가를 정리하려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무엇부터 정리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수경도, 태헌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해원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아직 식탁 위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태헌 씨 혼자 한 일이 아니에요. 그 말을 꺼낸 순간에는 숨이 트였는데, 지금은 그 말 때문에 오히려 숨이 막혔다.한참 뒤 명우가 고개를 들었다. 해원을 봤다."오늘은 돌아가."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차갑지도 않았다. 다만 피곤했다.해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열려고 하자 명우가 먼저 말을 이었다."지금은 더 못 듣겠다."그 말에 해원은 입을 다물었다. 내쫓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명우는 지금 이 식탁 위에 올라온 것들을 한꺼번에 다 들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들의 거짓말, 아내의 침묵, 그리고 아들 편에 서서 끼어든 해원까지."……네."해원은 의자를 뒤로 밀었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해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동안 명우가 태헌을 봤다."태헌이 너는 남아."해원의 걸음이 멈췄다.어제 해원 집 복도, 엘리베이터 앞이 떠올랐다. 엄마는 복도 끝의 태헌을 보며 너만 와, 라고 했다. 그날은 해원이 엄마를 따라갔고 태헌이 남았다. 오늘은 해원이 이 집을 나가고, 태헌이 남는다.해원은 맞은편을 봤다.태헌은 의자에 앉은 채 해원을 보고 있었다. 명우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해원과 눈이 마주치자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명우는 태헌을 보고 있었다. 방금 들은 말을 머릿속에서 다시 맞춰보는 얼굴이었다. 만나고 있다. 해원이와. 그 두 문장이 이어 붙는 모양을 명우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식탁 위에서는 국그릇의 김만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해원은 명우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바뀌는 순간을 봤다. 소리를 지르기 직전의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표정이 한 겹씩 지워지는 쪽이었다. 조금 전까지 반찬을 덜어주며 웃던 사람이, 회사 회의실에서나 지을 것 같은 얼굴로 아들을 보고 있었다."언제부터야."질문은 해원이 아니라 태헌에게 향해 있었다. 명우는 해원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태헌은 바로 대답했다."상견례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명우의 손이 식탁 위에서 멈췄다."상견례 전."명우가 그 말을 되풀이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해원은 명우가 무엇을 떠올리는지 알 수 있었다. 수경이 어제 차 안에서 떠올렸던 것과 같은 장면이었다. 식당의 긴 테이블, 처음 인사를 나누는 자리. 그리고 자기 아들이 해원에게 손을 내밀며 했던 말.처음 뵙겠습니다.명우는 그 장면을 수경보다 짧게 떠올렸다. 길게 곱씹지 않았다. 다만 태헌을 보는 눈빛이 한 번 더 식었다."그 자리에서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구나."태헌은 부정하지 않았다."……네.""둘이."명우는 그 한마디만 하고 말을 멈췄다. 해원을 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해원은 그 말이 자신에게도 떨어졌다는 걸 알았다."그 뒤로는."명우가 다시 물었다."우리가 결혼한 뒤에도."태헌은 잠깐 옆자리를 봤다. 수경이 아니라 해원 쪽이었다. 해원은 그 시선을 받았다. 태헌이 다시
본가 앞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일곱 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이었다.해원은 택시에서 내려 대문 앞에 섰다. 몇 번이나 와본 집이었다. 결혼식 뒤에도 몇 번 이 집에서 식사했다. 그때마다 크게 긴장한 적은 없었다. 엄마가 사는 집이었고, 엄마가 편해 보이는 집이었다.해원은 초인종을 눌렀다.잠시 뒤 문이 열렸다. 집안일을 봐주는 직원이 해원을 알아보고 반갑게 고개를 숙였다."오셨어요.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네. 안녕하세요."인사는 평소처럼 나왔다. 그런데 신발을 벗는 동안 손이 조금 느려졌다. 현관 한쪽에 태헌의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제 해원의 집 현관에 있던 그 구두였다.거실로 들어서자 명우가 소파에서 일어났다."왔구나. 들어와, 들어와."명우는 해원 쪽으로 몇 걸음 다가왔다. 얼굴에 반가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어제 통화할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을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퇴근하고 바로 온 거야? 배고프겠다.""조금요.""잘됐네. 오늘 음식 신경 좀 쓰라고 했어. 너 좋아하는 것도 해두라고 했고."명우는 그 말을 하며 식탁 쪽을 가리켰다. 자랑하는 말투였다. 해원은 그쪽을 봤다. 식탁은 이미 차려져 있었다. 가운데 놓인 접시 몇 개 사이로, 예전에 이 집에서 맛있다고 한 번 말했던 반찬이 보였다. 명우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해원의 목을 조였다."감사합니다.""감사는 무슨. 앉아. 여보, 해원이 왔어."명우가 부엌 쪽을 향해 말했다.수경은 부엌 입구에서 직원과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해원과 눈이 마주친 건 아주 잠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