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헴...”할머니가 마른기침하자 노동명은 곧바로 시선을 옮겼다.“동명아, 우빈이 나쁜 놈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너 때문에 놀라겠어. 어서 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것 좀 봐.”“아저씨, 나 좀 풀어줘요.”우빈이가 또다시 요구했다.녀석은 잔뜩 화나서 얼굴이 빨개졌다.아저씨의 힘이 워낙 세다 보니 아이는 도저히 그의 품에서 벗어나질 못했다.노동명은 황급히 그를 내려주곤 잇따라 쪼그리고 앉아 아이의 어깨를 꽉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우빈이 무사하면 됐어. 아무 일 없어서 참 다행이야.”우빈이는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노동명을 빤히 쳐다봤다.동명 아저씨는 사실 그에게 참 잘해준다.우빈이는 아저씨의 진심이 느껴졌다. 장난치며 그를 즐겁게 해주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해 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우빈이는 작은 손을 들어 노동명의 얼굴에 난 칼자국을 가볍게 어루만지더니 무서운 듯 바로 손을 거두어들였다. 노동명이 아픈 내색이 없자 아이는 다시 작은 손을 꺼내 칼자국을 쓰다듬었다.“아저씨 아파요?”“이젠 안 아파.”그해 다쳤을 땐 엄청 고통스럽고 피로 얼굴을 물들여서 윤미라를 바닥에 주저앉게 했다. 아들이 극심한 상처로 죽는 건 아닌지 두려움에 휩싸였다.엄마인 윤미라뿐만 아니라 모든 이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몸이 편찮은 그의 할머니는 상처 입은 그의 모습에 하마터면 숨넘어갈 뻔했다. 비록 그 후에 얼굴만 다친 거라고 알게 되었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아 병세가 더 위독해지셨고 얼마 못 가 숨을 거두었다.노동명은 그제야 후회가 밀려와 모든 일을 접고 그 바닥에서 깨끗이 손 씻은 후 새출발 하기로 했다.칼자국은 줄곧 함께했다. 그건 노동명의 젊은 시절 패기이고 그의 반항으로 할머니를 일찍 여읜 죄의 대가이다.의사가 말하길 몸조리를 잘하고 건강을 신경 쓰면 할머니는 3년에서 5년은 더 살 수 있다고 했다...할머니는 죽기 직전까지 여전히 이 손자가 제일 걱정됐다.손자의 얼굴에 난 칼자국을 쓰다듬으며 뭐라 말
노동명은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아 사건 경과를 물었다.“내가 볼 땐 놈들의 목표가 우빈이를 뺏어가는 거였어.”그의 직감은 하예정 부부와 일치했다.“예진아, 그놈들 얼굴 기억나? 한번 그려줄 수 있어? 내가 사람 시켜서 그 새끼들 찾아볼게.”노동명은 비록 그 바닥에서 벗어났지만 아직도 전설로 남아있어 손만 벌리면 선뜻 도와주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다들 검은색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착용해서 얼굴은 못 봤고 덩치 큰 체구에 힘이 아주 셌어요. 보통 강도라기보단 오히려 경호원 같았어요.”전태윤이 외출할 때 경호팀을 거느리고 다녀서 하예진은 제부를 따라다니는 경호원들을 자주 봐왔었는데 하나같이 덩치 큰 체구에 포스가 차 넘쳤다. 동물원의 유괴범들은 왠지 경호원에 더 가까웠다.노동명은 눈빛이 짙어졌다. 그는 하예진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곤 더 자세한 내용도 물어봤다.어느덧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왔고 어마마마께서 또다시 재촉 전화를 걸어왔다.노동명은 발신자 표시를 힐긋 보고는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아 덤덤하게 그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동명아, 누구 전화길래 안 받아?”어르신이 한마디 했다.노동명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음식을 집어 먹으며 하예정의 요리 솜씨가 좋다고 칭찬했다.“태윤이는 먹을 복이 타고났네요.”“부럽지? 질투 나지? 너도 이후에 요리 잘하는 마누라 찾으면 먹을 복이 생겨.”할머니가 장난치듯 말했다.“전화 받으렴. 이게 벌써 몇 번째야. 벨 소리가 너무 요란스러워서 다 늙은 이 할미는 귀가 아프구나.”“할머니, 저 밥 다 먹고 받을게요.”노동명은 여전히 무덤덤하게 밥을 먹으며 가끔 공용젓가락으로 우빈에게도 음식을 집어줬다.“우빈이 오늘 놀랐지? 많이 먹고 진정 좀 해.”“나 안 놀랐어요.”우빈이가 정색하며 반박했다.“그래, 안 놀랐어. 우빈이는 꼬마 사나이라서 아주 용감하지. 무서울 게 전혀 없다고.”노동명의 칭찬에 아이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이모부도 그를 꼬마 사나이라고 칭찬했었다.“예진아, 우빈이 호신술 가르쳐주는 건 어
“오늘 밤에 집에 와서 밥 먹겠다고 했잖아. 몇 시인데 아직도 안 오는 거야?”윤미라가 아들을 다그쳤다.“당장 돌아와. 은경이가 널 위해 직접 요리를 만들었어. 내가 먹어봤는데 엄청 맛있어. 오성급 호텔 셰프 수준이라니까.”“엄마, 나 밥 먹으러 못 가요. 아직 일을 다 마무리하지 못했어요. 엄마랑 은경 씨 먼저 드세요. 아 그리고 은경 씨는 우리 집 손님인데 주방에서 음식 만들게 하면 돼요? 그건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윤미라는 미간을 찌푸렸다.“아직도 처리하지 못했어? 그래도 일단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니야? 날도 어두워졌겠다, 얼른 집에 와서 밥 먹어. 다 먹고 가서 계속하면 되잖아.”“엄마, 나 이미 밖에서 다 먹었어요.”윤미라는 분노가 들끓었다.“은경이가 맛있는 음식을 잔뜩 차려놨는데...”“그럼 엄마가 맛있게 드세요.”그녀는 아들 때문에 화나서 목이 꽉 멨다.안간힘을 써가며 아들을 위해 기회를 마련해줬건만 이 녀석은 죽기 내기로 피하거나 뒤로 미루기 일쑤였다.손은경은 참 괜찮은 아이이고 두 사람은 또 일찌감치 알고 지내서 일단 서로 잘 어울리기만 하면 스파클이 튀기 마련이다.“동명아, 엄마는 은경이가 참 마음에 들어.”“그럼 은경 씨더러 며칠 더 머물라고 해요. 엄마랑 함께 있어 주고 좋잖아요.”“은경이도 일이 바빠서 며칠 뒤에 집으로 돌아가야 해.”노동명이 웃으며 말했다.“그럼 엄마가 은경 씨 따라가면 되겠네요. 여행인 셈 치고 아줌마도 만나고 힐링하고 좋잖아요. 내가 전용기 마련해 드릴게요. 어때요 엄마? 이참에 아빠도 함께 가요. 두 분 이젠 정년퇴직해서 일적인 스트레스도 없겠다, 실컷 놀다가 내년에 돌아와요.”윤미라는 기가 막혀 전화를 꺼버렸다.한심한 녀석이 손은경에게 일말의 호감도 없다니!그녀는 휴대폰을 탁자에 내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못난 놈, 눈이 머리 꼭대기에 붙었어. 은경이가 얼마나 우수한데 이런 애도 눈에 안 차? 평생 결혼 안 할 거야 뭐야?!”그녀의 남편 노진규가 입을 열었다.“그
어찌 됐든 노씨 일가와 조건이 비슷해야 한다.“그래도 은경이가 제일 괜찮은데 자식이 기회도 안 주고. 은경이랑 잘 지내면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을 텐데. 내일 내가 전씨 그룹에 한 번 다녀와야겠어요.”노규진이 물었다.“거긴 뭐 하려고?”“동명이랑 태윤이, 그리고 정남이까지 절친 삼인방이잖아요. 태윤이랑 정남이는 이젠 임자 있는 몸이라 사랑의 달콤함을 맛보았을 거예요. 걔네 둘을 찾아가서 동명이 좀 어떻게 은경이랑 잘해보라고 부추겨야죠. 부모 말은 안 들어도 친구들 말은 들을 거예요. 동명이 지금 태윤이네 집에서 지내요. 여보, 태윤의 전화번호 나한테 보내요. 이따가 전화해야겠어요, 내일까진 못 기다려요!”윤미라는 전태윤과 소정남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태윤이 그 무딘 녀석이 우리 동명이보다 나을 것 같아? 정남이한테 연락해 봐. 걔가 그래도 말재주가 좋아서 동명이를 잘 타이르면 성공할 확률이 높을 거야.”“맞아요, 그럼 정남이한테 연락해 봐야겠어요.”소정남은 만능형 인간일까? 왜 다들 무슨 일만 있다 하면 그를 찾는 건지......심야 시각.늦게 귀가한 전태윤이 살며시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선 후 가볍게 문을 닫고 안으로 잠갔는데 집안에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몸을 돌려보니 하예정이 잠옷 바람으로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예정아, 아직 안 잤어?”그는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흘러내린 머릿결을 뒤로 넘겨주었다. 다정한 제스처와 함께 그녀의 예쁜 얼굴이 고스란히 그의 눈에 담겼다.“이제 막 깼어요. 문소리가 들려서 태윤 씨 돌아온 걸 알았어요.”하예정은 말하면서 그의 정장 외투를 벗겨주었다.“배 안 고파요? 내가 야식 만들어줄까요?”“난 야식 먹는 습관 없어. 살찌면 네가 싫어할까 봐.”하예정은 가볍게 웃었다.“이 세상 사람들을 다 싫어해도 태윤 씨는 아니죠.”부부는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며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깨실까 봐 전태윤은 문도 살며시 닫았다.방안에 들어선 후 하예정이 그의 외투를 옷장에 걸어두곤 샤
그가 문을 닫은 후 하예정은 졸음이 쏟아져 하품하며 침대에 누웠다.그녀는 전태윤과 성기현, 소정남까지 동물원 사건 조사가 어떻게 됐는지 물어봐야 했기에 남편이 샤워를 마칠 때까지 기다릴 예정이었다.나중에 노동명도 조사에 돌입한 듯싶었다.그는 발렌시아 아파트를 떠난 후 틀림없이 전태윤을 찾아갔을 테니까.한참 후 전태윤이 욕실에서 나왔다.하예정은 발걸음 소리를 듣고 눈을 번쩍 떴다. 전태윤은 상의도 걸치지 않은 채 축축하게 젖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하예정은 냉큼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깨끗한 수건을 들고 가서 머리도 말릴 줄 모르는 남자를 화장대 앞에 앉혔다.그녀는 엄마처럼 전태윤의 축축한 머리를 닦아주며 말했다.“이렇게 늦은 시각에 머리는 왜 감아요? 다 감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야지, 어차피 남자들은 머리가 짧아서 수건으로 몇 번만 닦으면 바로 마를 텐데, 쯧쯧. 봐요, 그새 바닥에 물로 흥건해졌잖아요.”전태윤은 아내의 자상한 손놀림과 잔소리에 흠뻑 도취했다.밖에서 종일 바삐 돌아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의 잔소리가 이렇게 기분 좋을 줄이야.그는 역시 남들과 달랐다.다들 집에 돌아가면 아내의 잔소리가 싫다고들 하는데 전태윤은 유난히 이 과정을 즐겼다.왜냐하면 하예정은 잔소리하는 사람이 아니니까.게다가 아직 잔소리할 나이대도 아니다.“잠옷 챙겨줬는데 왜 바지만 입고 나와요? 상의는 어디 뒀어요?”전태윤이 배시시 눈웃음을 지었다.“바로 잘 거잖아. 어차피 잘 때 벗으니까 아예 안 입었지.”하예정은 그의 등을 살짝 내리쳤다.머리를 다 말린 후 그녀는 욕실에 들어가 전태윤의 상의를 찾아내서 기어코 입혀주었다.“태윤 씨 잠들고 나면 가끔 이불을 걷어차서 상의도 입어야 해요. 감기 걸릴라.”그는 또 보일러 켜는 것도 엄청 싫어한다.뭐 물론 이젠 보일러를 켤 필요도 없고...보일러를 안 켜면 하예정이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파고들 테니까.일단 보일러만 켰다 하면 그녀는 전태윤을 저 멀리 차버리고 품에 안길 생각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동물원은 소란을 일으키기 쉽고, 그 기회를 틈타 아이를 데려가기도 쉽다.번화한 도시 중심가에는 곳곳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손을 쓰기가 쉽지 않다.전태윤의 추측에 따르면 적어도 몇 달이 지나야 다시 한번 손을 쓸 것이다.“당신의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럼 동물원 사건을 평범한 사고로 생각하고 평소대로 행동하며 그놈들이 다시 나타나 미끼를 물기를 천천히 기다릴게요.”“우리 마누라님이 점점 똑똑해지고 있는데?”“예전에는 멍청했다는 말인가요?”“당연히 아니지. 당신은 늘, 항상 똑똑해. 난 당신의 이 똑똑함이 너무 좋아.”그는 잘 보이려고 무지 애를 썼다.“내가 멍청하대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네요. 맨날 당신에게 속아 쩔쩔매는데.”그는 서둘러 자신의 입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그리고 키스를 한 뒤,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여보, 밤이 깊었으니 이제 자자.”“당신도 좋은 꿈 꿔요.”전태윤은 딥키스로 옛일을 다시 언급하려는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굿 나이트 인사를 한 그녀는 다시 꿈나라로 들어갔다.그는 한 손을 그녀의 허리에 걸치고 잠자는 그녀의 모습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그녀의 얼굴에 뽀뽀하고 나서야 함께 잠에 들었다.전태윤 부부는 달콤한 잠을 잤지만, 셋집에 누워있는 서현주는 엎치락뒤치락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녀는 몸을 뒤척일 때마다 옆에 잠들어 있는 주형인이 깨기라도 할까 봐 긴장하게 들여다 봤다.그리고 휴대폰도 띄엄띄엄 들여다 봤지만 낯선 전화도, 낯선 메시지도 없었다.‘그 여자... 또 다른 계획이 있을까? 오늘 계획이 실패한 건 내 잘못도 아닌데, 내 가족에게 화풀이하면 어떡하지?’그녀는 이미 상대방이 시키는 대로 했다.경호원을 데리고 있는 하예정은 소란이 일어났을 때 이미 경호원의 보호 아래 해양관에서 철수했다.임정한을 데려간 건 양동 작전일지도.아무튼 결국 우빈이는 무사하다.그녀는 우빈이가 유괴당할 뻔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다는 것
“그리고 정한이도 하마터면 유괴당할 뻔했고요. 예정 씨가 사람을 시켜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형님은 얼마나 애가 탔을지 몰라요.”아들을 되찾은 주서인은 바로 하예정에게 무릎을 꿇고 고마움을 표했는데, 서현주는 그때의 놀라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엄마는 자기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태윤 씨가 그 많은 사람을 데리고 마중 온 걸 못 봤어? 그리고 성 대표도 경호팀까지 거느리고 왔고. 우빈이를 보호하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데 내가 어디 끼어들 데가 있겠어? 우빈이 앞에서 한마디 할 기회조차 없었단 말이야.”“...”“정한이가 이번에 많이 놀란 것 같아, 누나도 그렇고. 우리 모두 마찬가지야.”비록 주형인은 요즘 누나와 사이가 좋지 않지만, 조카인 임정한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무지 자책했을 것이다. 만약 그가 동물원에 가자고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엄마도 누나와 조카를 불러오지 않았을 테고,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조카를 되찾았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한평생 자책했을지도 모른다.아이를 잃은 가정은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이다.“앞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 놀러 가지 말자. 가더라도 아이들을 꼭 잘 지켜봐야 해. 특히 위험이 뭔지도 모르고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우빈 또래의 아이들은 더욱 그래.”그는 동물원에서 생긴 사고를 떠올리기만 하면 소름이 돋았다.아빠인 그도 아들이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다만 아들 우빈을 관심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아빠인 그가 발 디딜 틈도 없었다.그는 자기가 아빠로서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니 사실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다.당시 그는 조카를 찾을 생각만 하였는데, 자기 아들도 곤경에 빠졌을 줄이야.그때 하예정이 아들 옆에 있었기에 다행이지...그는 자신이 아빠로서 아무 소용이 없다고 자책했다.“동물원은 너무 크고 복잡하여 사고가 나기 쉬워. 나중에 아이들이 놀러 가고 싶어 하면 동네의 작은 놀이터에 데리고 가서 놀자.”“사고가 한번 났다고 하여 아
“아니, 오빠 부모님만 오빠를 어렵게 키웠나요? 우리 부모님도 날 몹시 어렵게 키워왔다고요. 그런데 왜 나만 참으라고 해요? 어머님은 날 키우신 적도 없고, 사사건건 나와 하예진을 비교하며 내가 그 여자보다 못하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래도 참아야 하는 거예요?”“...”“매일 내 앞에서 내가 형편없다는 둥, 밥도 안 하고 항상 배달시킨다는 둥 잔소리하시며 하예진 타령만 하시는데, 나도 평소에 바쁘단 말이에요. 어머님은 집에서 한가하게 계시면서 밥 한때 안 차리고, 온종일 바쁘게 일하다 온 나한테만 밥을 하라는데, 이거 너무한 거 아니에요? 처음 당신 집에 갔을 때, 어머님과 형님께서 너무 잘해주셔서 난 하예진이 고부 관계를 잘 처리하지 못한 줄로만 알았어요. 알고 보니 어머님과 형님이 연기하신 거예요. 난 그것도 모르고... 내가 하예진과는 다를 줄 알았거든요.”애인의 신분과 마누라의 신분이 대우가 이 정도로 다를 줄이야.“그리고 오빠도 예전에는 내 말이라면 다 들어줬잖아요, 지금은요?”주형인은 얼른 마누라를 달래며 말했다.“지금도 마찬가지야, 현주 네 말이라면 이거지. 나 예전에 예진이랑 더치페이하며 살았어. 우빈의 분유를 사는데 50만 원이 든다면 난 25만 원만 줬거든. 하지만 현주 넌 달라. 네가 시집오자마자 내 돈 다 너에게 맡겼잖아, 부동산 등기부에도 네 이름 올렸고. 난 정말 현주 너한테 일편단심이야.”혼인 신고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결혼식도 안 치르지 또 이혼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마누라를 달랠 수밖에.게다가 자기보다 어리고 연약한 마누라가 아직 질리지는 않았다.마음속으로 후회가 들기도 하였지만, 감히 서현주에게 말하지는 못했다.그는 늘 자신과 하예진의 이혼 대가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으니.새 결혼생활이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혼하지 않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하예진은 그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바로 이혼을 요구했고, 그에게 추호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그의 형편없는 생활에 비해 하예진은 이혼 후, 오히려 더 나은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
“저는 앞으로 큰아가씨의 평가에 근거해서 요리 방법을 조정해 나갈 거예요. 그렇게 해야만 실력을 키울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만드는 모든 요리를 큰아가씨께서 만족해하시면 제가 여기에서 졸업할 수 있겠네요.”강진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되면 큰아가씨께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걸요.”‘평생 선우민아 씨를 위해 요리해 드리는 건 기쁜 일이지.'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지만 전창빈은 꾹 참았다. 이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설령 전창빈이 선우민아에게 애정 공세를 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라고 해도 이런 생각을 드러내서는 절대로 안 된다.선우민아가 가업을 운영한다는 건 그녀가 매우 유능한 인물이라는 증거다. 이렇게 강한 강한 여성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상대이다.전호영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너무 힘들어서 하예정의 도움을 받은 끝에야 지름길을 택할 수 있었고 고현의 마음을 얻었다.강진은 그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전창빈 씨, 오늘 오후 내내 바쁘셨는데 일찍 쉬세요. 내일 아침 큰아가씨를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가장 일찍 아침을 드시는 분은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입니다. 민기 도련님은 학교에 가야 해서 일찍 식사하시고 큰아가씨는 매일 민기 도련님을 학교에 데려다주신 후 회사에 가시니까 두 분은 늘 함께 식사하시는 편이에요. 하여 아침 7시쯤이면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의 아침을 준비하시면 됩니다. 다른 분들의 아침은 9시 이후에 준비하시면 돼요.”전창빈이 말을 건넸다.“그 시간대면 아침과 점심을 함께 드시는 거네요.”“어르신과 사모님은 그렇죠. 점심 무렵에 일어나셨다가 식사 후에는 외출하셔서 저녁에야 돌아오세요. 때로는 안 오시기도 하는데, 그럴 땐 제가 미리 알려드릴게요. 안 오시는 날은 창빈 씨가 쉬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냥 자신의 배만 채우시면 돼요.”여기에서는 사실상 선우민아 자매만 아침을 먹는 셈이다.“큰아
동생 선우정아가 어이없어하는 모습을 보며 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었다.“알았어. 지금은 네가 전창빈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는 일이니까. 앞으로 매일 여기 와서 식사해. 전창빈 씨와 접촉할 기회도 많아져야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거 아니야. 만약 그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면 거리가 멀어도 너희 부모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실 거야. 혹은 전창빈 씨에게 우리 지역에서 사업을 하게 하고 여기서 집을 사도록 하든가.”선우정아는 또 벙어리가 되어버렸다.선우민아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선우정아는 앞으로는 감히 그 집에 밥 먹으러 가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여겼다.선우민아가 자꾸 자신이 전창빈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지 않는가.전창빈은 미래의 아내는 지금 미래 처제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전이혁은 강진을 따라 숙소로 돌아갔다. 강진은 웃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전창빈 씨, 이제 우리는 동료가 되었군요. 오래 함께 일했으면 좋겠습니다.”선우씨 가문의 여러 집안이 같은 대저택 안에서 함께 살고 있었지만 집안마다 독립된 공간이 있었다.선우민아의 요리사는 자주 교체되는 편이었기에 강진 역시 1년 정도는 함께 일할 사람을 원했다.요리사와 친해지기도 전에 퇴직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전창빈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저도 집사님과 오래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제가 요리들을 더 연구해서 큰아가씨께서 제 요리만 먹고 싶어 하도록 해야겠네요.”“큰아가씨께서 창빈 씨 요리만 고집하게 만들면 정말 대단한 거예요. 요리 대회에 나가면 ‘요리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을 만큼요.”선우민아의 입맛을 사로잡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전창빈은 웃으며 말했다.“‘요리의 신' 같은 건 관심 없어요. 저는 단지 제 요리 실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손님들을 만족시키고 싶을 뿐이죠.”전창빈은 그가 고용한 요리사들에게는 항상 조언을 해주곤 한다. 본인이 잘 배워야 현재 이끌고 있는 요리사들도
선우민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저런 사업을 가진 사람을 네가 정말 좋아한다면 작은아버지와 숙모도 반대하지 않으실 거야. 다만 전창빈 씨가 관성 사람이라 우리랑 거리가 너무 멀어. 작은아버지와 숙모는 네가 먼 곳으로 시집가는 걸 아쉬워할 수도 있을 거야.”선우정아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언니! 제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저는 정말 그런 마음 없단 말이에요. 오히려 저는 그분이 언니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우리 자매 일곱 명 중 언니가 맏이라 당연히 언니가 먼저 시집가야죠. 제가 언니를 앞지를 순 없잖아요.”착각인지 정말 본 건지, 선우정아는 전창빈이 선우민아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특별한 시선이 느껴졌다.그리고 전창빈은 사실 정말로 선우민아를 위해 온 거였다.아니, 정확히는 선우민아의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온 것이다.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다른 손님들도 분명히 만족시킬 수 있을 테니까.선우정아는 생각했다. 선우민아처럼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고.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동생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우리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 게다가 사촌 자매이기도 하기 때문에 네가 나보다 먼저 시집간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안 되거든. 나는 당분간 시집갈 생각 없어. 만약 고려한다 해도 이 지역의 사람일 거야. 생각해봐, 민기와 민수는 아직 몇 살밖에 안 됐는데 애들이 커서 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을 때까지 적어도 20년은 더 기다려야 되잖아. 이 20년 동안 우리 자매는 계속 회사를 떠받쳐야 해. 만약 우리가 먼 곳으로 시집가면, 누가 회사를 이끌겠어? 셋째와 넷째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지켜봐야 할 거야 아니야.”셋째 동생과 넷째 동생도 이제 성인이 되어 사업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거대한 가업을 떠받칠 능력이 되지 못했다.하여 선우민아는 자연스레 먼 곳으로 시집갈 생각이 없었다. 시집을 간다 해도 A시의 남자에게 시집갈 것이다. 그래야 시집가서도 친정 회사를 계속 관리할 수 있으니까.앞으로 선우민기
전창빈이 말했다.“행동으로 보여드리죠.”선우정아는 눈썹을 치켜들며 웃었다.“전이혁 씨는 정말 자신만만하신가 봐요.”선우민아는 선우정아를 한 번 흘겨보더니 전창빈에게 물었다.“그럼 언제부터 출근 가능하세요?”“이 자리를 위해 온 만큼 언제든지 가능합니다.”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세요. 강 집사님께서 이미 숙소를 준비해 뒀을 테고 월급은 내일부터 계산됩니다. 한 달의 수습 기간이 있고 수습 기간 중 급여는 일당으로 지급됩니다. 공짜로 일을 시키진 않을 거예요.“누구든 마찬가지로 하루 일하면 하루 급여를 계산해 주었다.“집사님께서 어제 이미 숙소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급여는 어떻게 계산되든 상관없습니다. 전 도전을 위해 온 거지 월급을 위해 온 게 아니니까요.”전이혁은 돈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아내만 부족할 뿐...“좋아요. 지금은 숙소로 가서 쉬세요. 우리 집에서의 하루 세끼 준비 시간은 집사님께서 알려주실 거예요. 아침을 제외한 점심과 저녁 식사 준비 시간은 변함없어요.”선우씨 가문의 사람들 아침 식사는 각자 일어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딱히 정해진 시간이 없었다.전창빈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집사님께 여쭤보겠습니다.”그는 다시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떠났다.전창빈이 떠나자 선우민아도 일어서서 가족들에게 말했다.“저는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민기한테는 주말에 데리고 나가주겠다고 전해주세요.”선우민기는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기 때문에 남동생을 아들처럼 키웠다.선우민기는 선우민아를 무서워하면서도 잘 따랐다.선우정아도 그녀의 언니를 따라 일어섰다.“저도 일 보러 갈게요.”한경주가 딸에게 당부했다.“접대할 때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몸에 해로워.”“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5년 전의 제가 아닌걸요.”선우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회사를 막 이어받았을 때 그녀는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땐 위엄도, 경험도 없었고 회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