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정은 짧게 말을 더 보탰다. "나는 그냥 언니한테 주의만 주는 거야. 일자리 문제는 언니도 너무 급해하지 말고."심효진도 말했다. "천천히 알아봐도 돼요. 자기한테 딱 맞는 일자리 찾는 건 확실히 어려운 일이잖아요. 우리 가게 나오는 건 어때요? 제가 월급 정산해 줄게요. 아니면... 언니도 가게 하나 차리지 않을래요?"아들이 노는 것을 보며 하예진은 무력하게 얘기했다. "나 가게 차릴 돈 없어... 어떤 가게 열지도 모르겠고. 알잖아, 요즘 장사하는 것도 쉽지 않은 거."동생의 서점은 마침 관성중학교 앞이라 가게 장사가 꽤 잘 됐던 거지 만약 다른 위치였다면 잘 될지도 알 수 없었다.관성중학교 문 앞은 작은 가게들은 임대료도 많이 비싼 데다 아무나 빌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느 정도의 인맥이 필요했고, 하예정의 그 가게 역시 심효진 집안에서 아는 사람을 통해 어렵게 구한 것이었다."언니, 아니면 내가 그 공예품 땋는 거 가르쳐줄게. 그걸로 언니 인터넷에서 온라인 스토어 하나 열지 않을래? 그러면 언니 이걸로 집에 앉아서 돈도 벌고 우빈이도 돌볼 수 있잖아, 나 지금 스토어 하고 있는데 장사 엄청 잘 돼. 예약 상품이 많아서 예약 주문 되게 많이 들어오거든. 바빠서 정신이 없을 정도야."이번 달에 온라인 스토어로 번 돈은 서점 매출보다 훨씬 많았다. 서점에서 이번 달에 학생들에게 여러 건의 학습자료를 주문해 줬지만 온라인 스토어의 이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하예정은 돈복이 터졌다고 생각했다.온라인 스토어도 벌써 몇 년 차 접어들었지만 내내 수익이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가. 이번 달부터 뜨기 시작했고 게다가 리뷰도 모두 호평이었다."나도 온라인 스토어 경영 확장해 보려고, 공예품뿐만이 아니라 헤어 액세서리 만드는 것도 배워보고 싶어. 나 그런 빈티지 액세서리 되게 좋아하거든."심효진은 친구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꽤나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하예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예정아, 나는 너처럼 그렇게 뛰어난 상상력이 없어. 네가 땋는
이미 한 달이 지났고 아직 5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이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다시 싱글로 돌아갈 거고 각자 재혼하게 되면 더는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된다.소정남과 이동명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이동명이 물었다. "너희 전씨 가문 남자는 이혼 못 하지 않아?""나는 예외야."전태윤은 쌀쌀맞게 얘기했다. "나와 하예정의 혼인, 너희도 알다시피 내가 이혼한다 해도 할머니는 나한테 뭐라 못하셔. 다른 사람은 더더욱. 억울한 걸 알 테니까."맞다, 그는 억울했다.할머니의 은혜를 갚아준답시고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결혼하고 나서도 나름 관대하게 포용하며 그녀를 이해해 줬지만, 하예정은 어땠던가?말로는 언니 집에 간다고 해놓고, 알고 보니 김진우와 같이 밥을 먹고 있었다.질투해 놓고 절대 인정하기 싫었던 전 도련님은 자연스레 심효진의 존재를 무시해 버렸고 심효진과 김진우가 사이가 아주 좋은, 그것도 사촌지간인 것 역시 무시했다.소정남과 이동명은 할 말을 잃었다. "...""앞으로 절대 회장 사모라고 불러주지도 마! 그 사람 그럴 자격도 없어!"소정남이 말했다. "며칠 전만 해도 아내가 사준 옷 입고 회사에서 하루 종일 자랑이더니, 오늘은 왜 태도가 싹 변하냐, 두 사람 혹시 싸운 거야?"전태윤은 소정남을 노려봤다. "짜증 나니까 말 걸지 마."소정남에게 그런 소리를 들은 전태윤은 부끄러움에 벌컥 화를 냈다.그는 늘 슈트만 입다가 처음으로 그렇게 싼 옷을 입었다. 왜냐하면 그건 하예정이 사준 옷이었으니까. 앞으로 파트너로서 한동안 함께 살아야 할 텐데 그녀의 체면도 좀 세워주고 싶어서 그녀가 사준 옷을 입은 것이었다.그런데 뭐람, 온 하루가 지내도록 하예정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전태윤은 하예정이 자신이 사준 옷이 어떤 건지 설마 기억 못 하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싸울 기력 따위도 없어! 가자, 우리 호텔로 가서 술이나 한잔해, 내가 산다."전태윤은 가뜩이나 기분도 언짢았는데 친구가 그렇게 말하니 기분이 더 나빠져서
하예정은 전태윤의 답장을 받지 못한 채 언니에게 말했다. "태윤 씨는 친구랑 재미있게 놀고 있나 봐요.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네요.""내일은 여기 안 와도 돼, 시간을 내서 제부랑 같이 있어."하예진은 자신의 결혼생활은 파탄이 났지만, 동생의 결혼은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했다.사실 하예진은 전태윤이 마음에 들었다. 동생에게도 잘해 주는 데다 주형인처럼 쪼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서로 얼굴을 알고 연애를 한 뒤 결혼까지 한 주형인은, 이제 경제적 여유가 있음에도 늘 돈을 아까워하며 자동차 한 대 사주지 않았다.스쿠터도 동생이 사 준 것이었다."알았어, 언니.""맞다, 친가 사람들 아직도 귀찮게 구니? 어떻게 됐대? 할머니는 수술받으셨으려나?"하예진은 친가 사람들에 대해 물어봤다."한 번 합의하러 오고 나서는 다시 오지 않았어. 자기들도 민망한가 봐. 게다가 실시간 검색어는 진작에 내려갔고 일찌감치 잠잠해졌어. 별로 영향도 안 받았으니까 당연히 다시 안 찾아오지."하예정은 전태윤이 문제를 해결해 준 것도 모르고 친가 사람들이 민망해서 안 찾아온 줄로만 알고 있었다.하예진은 그 말에 한시름을 놓았다.해 질 무렵, 저녁 식사를 마친 뒤, 하예진은 동생을 집에서 쫓아냈다. 심효진은 엄마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하예정을 따라 발렌시아 아파트에 가, 하예정이 지금 살고 있는 크지 않지만 아늑한 집을 구경했다."예정아, 너랑 태윤 씨 집 참 넓다. 채광도 좋아서 진짜 밝아. 그중에서 이 베란다가 제일 좋아, 한가할 때 그네에 앉아 책도 읽고 꽃구경도 하면 진짜 마음이 너무 편안할 것 같아. 그네 앞에 작은 탁자 하나 놓으면 차도 마실 수 있고 더 편하겠다!"하예정은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제안이야, 내일 바로 작은 탁자 하나 사서 여기에 놓을게!""여기에 있는 꽃들 대부분 태윤 씨가 사 온 거고 나머지는 내가 사 온 거야. 태윤 씨가 어느 가게에서 사 온 지는 모르겠는데 꽃은 진짜 크고 예뻐, 되게 잘 폈더라고"하예정은 전태윤의 일 처
전태윤은 차갑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런 전태윤의 모습에 하예정은 명치가 턱 막힌 듯 아파왔다.누가 신경을 쓰고 싶댔나?그저 부부간에 최소한의 배려 차원에서 물어본 것이다.하예정은 휙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갔다.하예정이 더 이상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자신을 신경 쓰지 않자, 전태윤은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앞으로 잠옷 입은 채로 문 열어주지 마!"하예정은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속옷은 입고 있었다고요."하예정은 방금처럼 문을 열어줘야 하는 상황이 생길까 봐 잘 때만 속옷을 벗었다."제가 옷을 어떻게 입는지 태윤 씨가 무슨 상관이에요? 서로 사생활은 개입하지 않기로 계약서에도 썼던 걸로 기억하는데요?."전태윤은 굳은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분명 계약서는 전태윤에게만 유리하고 하예정을 구속하는 내용만 적혀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 오히려 그 계약서가 전태윤을 옥죄는 느낌인 걸까?하예정은 주방에서 따뜻한 물 한 잔을 받았다. 물이 적당히 식었을 때 꿀을 탄 뒤 잘 저어서 전태윤에게 건네주었다.전태윤은 소파에 기대고 있었지만 잠에 들지는 않았다. 하예정이 나온 것을 본 그는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하예정을 쳐다봤다.하예정은 꿀물을 전태윤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태윤 씨 많이 취했으니, 뭐라고 하지 않을게요. 꿀물 먹고 방으로 돌아가 씻고 자요."할 말을 마친 뒤, 하예정은 몸을 돌려 방 쪽으로 걸어갔다.전태윤은 손을 뻗어 하예정의 손목을 낚아채 세게 끌어당겼다. 하예정은 막을 새도 없이 전태윤의 품으로 쓰러졌다. 전태윤은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매우 민첩했다. 하예정이 정신 차릴 새도 없이 그녀의 몸을 돌려 소파에 눕혀 꼼짝도 못 하게 했다.순간 세상이 돌아가는 것만 같았던 하예정은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전태윤에게 잡혀 소파에 눕혀져 있었다."태윤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여태까지 전태윤은 늘 혹시라도 하예정이 자신을 덮칠까 봐 거리를 두지 않았던가?하지만 지금 전태윤은 하예정의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전태윤은 하예정의 두 손을 낚아채 하예정의 머리를 누르며 입을 맞췄다.조금도 부드럽지 않은 그 입맞춤은 마치 화를 내는 것만 같았다.입술을 깨물고 뜯는 데다, 강압적이기까지 했다.그런 전태윤에 화가 난 하예정은 참지 않고 전태윤의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나자, 밀려오는 고통에 전태윤은 그제야 하예정을 놓아주었다.전태윤이 당황한 사이에 하예정은 전태윤을 넘어뜨린 뒤, 펄쩍 뛰며 도망쳤다. 하예정은 뒷걸음치면서 경계하는 눈빛으로 전태윤을 쳐다봤다.전태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입가의 피를 닦았다.안색이 잔뜩 굳어있었다."전태윤! 너 뭐 하는 거야? 술을 몇 잔에 미친 거야?"전태윤은 어두운 낯빛으로 하예정을 노려봤다.전태윤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정아, 다시 한번만 물어볼게, 너 오늘 진짜 처형 집에 있었어?""나 언니 집에 있었…"하예정은 갑자기 하던 말을 멈췄다.전태윤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왜? 이제야 생각났어? 너 김진우랑 식객당에서 희희낙락하며 밥 먹었지? 음식도 챙겨주고 부부보다 더 가까워 보이더라? 하예정, 계약 결혼 기간 동안, 얌전히 바람피우지 말라고 했었지!""내가 얼마나 더 참아야 해! 한 번만 더 이러면 진짜 가만있지 않을 거야!"하예정은 그제야 이유를 깨달았다.어쩐지 술주정을 부린다 했더니, 이제 보니 자신과 김진우가 함께 밥을 먹는 것을 본 것이었다.자신이 김진우로 갈아타려는 것이라고 의심하며 보복하려고 한 것이다.평소에 전태윤은 하예정을 변태 취급하며 신체 접촉을 꺼리더니, 오늘 밤에 이렇게까지 했던 것은 다 남자의 자존심 때문이었던 것이다.하예정은 자기 입술을 매만졌다. 전태윤이 이로 깨문 입술은 아직도 조금 아프게 느껴졌다."태윤 씨, 제가 진우랑 밥 먹는 걸 본 거예요?"전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효진이도 있는 거 못 봤어요? 태윤 씨, 왜 이렇게 의심이 많아요? 저랑 진우를 뭐로 보는 거예요? 전 어렸을 때부터 진우를 봐왔고 계속 동생으로 여기고 있다고요. 누나로서 동생한
전태윤이 물건을 부수든 말든, 어차피 이 집은 그의 것이니 망가져도 손해는 전태윤이 봤다.꿀물을 엎은 전태윤은 방으로 들어가, 정신을 차리려고 찬물을 가득 받아 욕조에 몸을 담갔다.전태윤은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완전히 취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제정신이긴 했지만 술을 많이 마셔, 쉽게 충동적으로 행동한 것뿐이었다.거실의 불도, 나중에 하예정이 나와 전기세를 아껴주려 끈 것이었다.그날 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화가 나,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하예정은 전태윤이 자기를 의심했다는 것에 대해 화가 났다.전태윤은 자신이 직접 본 것만을 굳게 믿기에 하예정이 김진우와 같이 있었다는 것에 화가 났다. 하예정은 김진우와 안 지 10년이 넘었고 어렸을 때부터 계속 봐왔던 사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 하예정이 심효진과 친하고, 김진우는 또 심효진의 사촌 동생이기에 전태윤은 두 사람이 10여 년 동안 알고 지냈다는 말을 믿었다.하예정은 김진우를 동생으로 생각한다지만, 김진우가 진짜 동생인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조금의 혈연관계도 없었다.게다가 하예정을 바라보는 김진우의 눈빛은 깊은 마음이 담겨 있었고, 김진우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하예정은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걸까?뭐가 됐든 전태윤은 마음속의 화가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이튿날, 일요일이 되자 하예정은 일찍이 가게로 돌아갔다.평소였다면 주말에는 일반적으로 가게를 열지 않았다.전태윤과 대판 싸우고 나니 기분이 좋지 않을뿐더러 무표정의 전태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하예정은 일찍 가게로 나온 것이다.하예정은 차라리 하루 종일 공예품이나 만드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기분이 나빴던 하예정은 심지어 전태윤에게 아침밥을 차려 주지도 않고 자기 것만 만들어 먹었다.전태윤이 배가 고파 깼을 때는 이미 오전 10시가 넘어있었다.옷을 갈아입은 뒤, 전태윤은 방에서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나왔다.자신의 집인데, 자기가 왜 하예정을 무서워해야 하지?전태윤이 방에 나왔을 때 하예정은
로열팰리스는 관성의 고급 별장 지역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권세가가 아니면 재벌가들이었다.전태윤이 아직 하예정과 혼인 신고를 하기 전에는 거의 매일을 이곳으로 돌아와 지냈고 가끔씩 본가로 가 어른들 곁에 있었다.이곳은 원래 여러 채의 별장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하지만 전태윤인 그곳을 전부 매입한 뒤, 전부 허물고 새롭게 커다란 별장과 앞뒤로 정원을 지었다. 비록 본가만큼 크지는 않지만 혼자 지내기에는 충분히 넓었다.박 집사는 전태윤이 심지어는 배를 곯으며 온다는 것을 알고는 미리 주방에 점심을 준비하라고 일렀다.전태윤은 늦게 일어난 탓에 지금은 아침과 점심을 함께 먹는 셈이었다.자신의 익숙한 집으로 돌아와 배불리 먹고 마시니 전태윤은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소파에 앉은 그는 소정남에게 전화를 걸었다.소정남은 아직 깨기도 전이었다. 어젯밤, 소정남과 이동명은 목숨을 내놓은 듯 전태윤과 함께 술을 마셔주었다. 전태윤은 주량이 센 탓에 그리 취하지 않았지만 소정남은 직원의 도움이 필요할 지경으로 취했다.주량이 전태윤보다도 좋은 이동명은 하나도 취하지 않았지만, 술을 마시고 운전할 수가 없어 아예 호텔에 남기로 했다."대표님."소정남은 목소리마저 다 갈라져 있었다."좋은 아침이야."잠시 침묵한 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아침이 아니야. 나 방금 점심 먹었어.""…" 소정남은 답이 없었다.휴대폰을 귓가에 떼고 시간을 확인하니 정말로 점심이 다 된 시각이었다. 어쩐지 대표 녀석이 전화로 깨우니 배가 아프다 싶었다. 다행히 머리는 별로 아프지 않았다. 머리마저 아팠다면 하루 종일 침대 신세나 지고 있을 게 뻔했다."왜 그래?""오후에 뭐 하는 거 있어?"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소정남은 다시 한번 휴대폰을 귓가에서 떼어서 확인했다. 자신과 통화하고 있는 사람은 확실히 그의 상사 겸 친구인 전태윤이 맞았다. 소정남은 웃으며 말했다."전태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야? 네가 먼저 나한테 뭐 하는 거 없냐고 묻다니.
풍경을 계속 보던 그녀는 졸음이 밀려 와 그녀에 기댔다. 잠깐 눈 좀 붙이려던 것이 어느새 새벽 5시가 넘어서야 깨어났다. 두 눈을 떴을 때 해가 다 뜨고 있었다.베란다에서 하룻밤을 자게 된 것이다.정신을 차린 하예정은 전태윤이 어젯밤에 돌아오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돌아왔다면 그녀를 깨웠을 게 분명했다.그 사람은 차갑기는 해도 매정한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꽤 잘해주었다. 아내에게 주어야 할 것들을 그는 전부 다 주었다.의자에서 일어나 거실로 돌아온 하예정은 불을 켰다. 그러자 자신이 가져온 공예품이 여전히 티 테이블 위에 있는 것이 보였다. 잠시 침묵한 하예정은 이내 전태윤의 방으로 향했다.방문은 잠겨 있었고, 하예정에게는 방 키가 없어 문을 열 수가 없었다.돌아오지 않은 거겠지.벌써 월요일이었다. 또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비록 전태윤은 밤새 집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하예정도 따로 전화를 하지 않았다. 아직도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데 괜히 건드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감히 장담하건대, 설령 전화를 한다고 해도 절대로 받지 않을 게 분명했다.전태윤이 집에 없는 탓에 하예정도 집에서 아침을 먹지는 않았다. 날이 밝자, 그녀는 차키를 들고 내려갔다. 밖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산 뒤 언니네로 가 우빈이를 데리러 갈 생각이었다. 오늘도 하예진은 계속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아래로 내려온 하예정은 주차장에 있는 전태윤의 현대 SUV를 발견했다. 걸음을 멈춘 그녀는 그 차를 자세히 살펴봤다. 차량 번호를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건 전태윤의 차가 맞는데, 차를 가지고 않은 건가?한참 뒤, 하예정은 결국 휴대폰을 꺼내 전태윤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오늘 출근해요? 보니까 당신 차 집 아래에 주차되어 있네요."문자를 보낸 하예정은 이내 걸음을 옮겨 다른 차로 향했다.이내, 하예정은 차를 몰고 멀어졌다.언니네 집에 도착한 하예정은 놀랍게도 형부인 주형인이 돌아온 것을 발견했다."예정아, 왔니?"주형인이 먼저 처제에게 인사를 건넸다.잠시
전씨 할머니는 한 손에 꽃다발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갓 구운 생선을 집어 전이혁에게 건넸다.“이런 작은 생선은 막 구웠을 때 먹는 게 맛있어. 식으면 맛이 없으니 따뜻할 때 먹어.”“고마워요, 할머니.”전이혁은 할머니가 건넨 생선을 받아 주저 없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먹던 중에 핸드폰을 꺼내 전우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전이혁은 전우와 나이도 비슷하고, 어릴 때부턴 전우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형제 중에서 전우와 가장 친했다. 그러니 그는 자랑하고 싶을 때는 무조건 전우를 찾았다.전이혁의 사진을 보자마자 전우는 가족 단톡방에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할머니, 낚시 가셨어요? 직접 구워 드시기까지 하네요. 많이 잡으셨어요? 저도 먹을래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이혁은 일부러 약 올리듯 답장했다.“이젠 없어. 할머니께서 나 주려고 특별히 남겨둔 거야. 그러니 네 몫은 없어. 그리고 너 진짜 생선 한 조각 먹으러 올 거야? 손해가 클 텐데?”“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할머니표 생선구이는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할머니는 워낙 자유로워서 오전엔 리조트에 있다가도 오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었으니, 큰 손자인 전태윤도 못 말릴 정도였다.부모 세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는 것밖에 없을 뿐, 감히 할머니를 간섭할 수 없었다. 그나마 큰 손자인 전태윤이 할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마저도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할머니는 그야말로 나이 든 개구쟁이였다. 할머니는 지금은 리조트에 있지만 다섯째 손자인 전우가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웃으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많이 잡지 못했어. 넷째한테 줄 몇 꼬치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먹었어. 먹고 싶으면 설 연휴 때 와서 직접 낚시해서 구워 먹어. 그래야 더 맛있지.”전우는 아쉬움으로
잠시 후, 차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아이는 고개만 돌려 살짝 보더니 다시 바비큐를 먹기 시작했다.“할머니, 저 왔어요.”멀리서 전이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이혁은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린 후,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풍겨오는 바비큐 냄새는 정말 좋았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 이런 날씨에는 바비큐가 최고죠.”관성의 겨울 날씨는 정말 변덕스러웠다. 어제는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추워서 할머니들은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온이 확 올라와 정오 무렵에는 햇빛까지 쨍쨍하게 비추더니 약간 더운 느낌마저 들었다.관성의 사람들은 겨울에 가끔 이렇게 바비큐를 해 먹긴 하지만 보통은 휴일이 되어야 준비해서 해먹을 여유가 있었다.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할머니는 생각만 나면 언제든 자유롭게 바비큐를 즐길 수 있었다.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전이혁은 자신이 나중에 결혼하고 아들이 성장하면 당장 사업을 넘겨주고, 자신은 조기 은퇴해 할머니처럼 여유로운 노후를 즐길 계획이었다. 그것은 신선놀음보다 더 행복한 삶이었다.“넷째 도련님.”양씨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전이혁에게 안부를 물었다.전씨 할머니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던 여러 할머니도 전이혁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그들은 전씨 할머니가 무려 아홉 명의 손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부러워했다. 아직 사회에 나오지 않은 막내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일곱 명의 손자는 이미 뛰어나고 유능한 인물들로 소문나 있었다. 게다가 막내 두 명은 비록 사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성적이 우수했고 앞날도 창창했다.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에 대한 효심도 지극했었다.전씨 가문은 자손들이 하나같이 훌륭했고 가업도 재산도 어마어마했으니, 그야말로 할머니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그들은 가끔 함께 수다를 떨며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그 시절에도 그들보다 훨씬 잘 살았고, 그때부터 이미 가문에서 주름잡는 존재였다. 결국 훌륭한 어른이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전씨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 여자아이를 불렀다.“소령이, 이리 와봐.”여자아이는 깡충깡충 뛰어갔다.“어르신, 닭 다리 다 구워졌어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자신에게 닭 다리를 주려고 부른 줄 알았다.전씨 할머니는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웃었다.“아직 다 안 구워졌어. 조금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을 거야.”“그런데 왜 양씨 아저씨의 자리를 잇고 싶다고 했지?”전씨 할머니가 여자아이를 예뻐한다는 건 리조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전씨 가문은 몇 대째 아들만 태어났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딸을 가지길 원했었고, 그것이 안 되자 손녀를 기대해 보았지만, 매번 실망으로 마무리되었다.할머니는 이제 증손녀를 기대해 보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증손녀를 안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종종 직원들에게 집에 여자아이가 있으면 관성으로 데려와 학교도 보내고 같이 생활하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리조트에 있는 놀이공원에 놀러 오라고도 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여자아이들이 리조트에 놀러 오게 되면 손주며느리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한테 증손녀를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양씨 아저씨는 참 멋있는 사람이에요.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돈도 많이 벌잖아요. 양씨 아저씨가 사는 집도 아주 예뻐요. 저도 양씨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요.”그 여자아이는 겨우 세 살밖에 안 됐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말도 잘해서 가끔 그 여자아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어른들이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여자아이는 부모도 가르친 적이 없는 말을 스스로 내뱉곤 했었다.우빈이도 가끔 서원 리조트에 올 때마다 리조트에서 내려와 그 여자아이와 함께 신나게 놀곤 했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여자아이가 리조트에 올라와 우빈이와 함께 놀기도 했었다.“아까 양씨 아저씨가 한 말 잘 들었지? 네가 컸을 때는 양씨 아저씨는 이미 은퇴하고 다른 사람이 저 자리에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은퇴한 다음에야 네 차례가 오게 돼. 그보
할머니는 함께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말했다.“날씨가 좀 쌀쌀하네. 우리 따뜻하게 몸도 데울 겸 한 잔씩 할까?”“어르신.”전씨 할머니가 술을 마시자고 하자 양씨 아저씨는 바로 할머니를 제지했다.“어르신 술 마시면 안 됩니다. 큰 도련님께서 아시면 또 어르신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며 저를 혼내실 거예요.”“양 집사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알겠어?”“태윤이는 점점 자기 할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아. 온갖 걸 다 간섭하려 들어.”할머니는 손자인 전태윤이 자신을 간섭하려 든다며 투덜거렸다.그러자 함께 있는 몇몇 할머니들이 웃기 시작했다.“큰 도련님께서 어르신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저희 나이에는 술도 적게 마시는 게 좋잖아요.”“과일주는 괜찮아. 양 집사, 가서 과일주 두 병 가져와. 바비큐에는 술이 있어야 제맛이지.”양씨 아저씨는 더 이상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리조트에 전화해서 과일주 몇 병을 가져오도록 했다.그들이 직접 잡은 생선 외에도 양씨 아저씨는 몇몇 어르신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바비큐용 식재료를 다양하게 준비했다. 어르신들 옆에는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양씨 아저씨는 그들을 위해 과일 주스를 준비해 두었다. 덕분에 그들은 기분 좋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전씨 할머니는 이렇게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있는 따뜻한 분위기의 생활을 참 좋아했다. 게다가 내년엔 첫 증손주가 태어나니 할머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졌다.할머니는 자신이 구운 소시지 한 꼬치를 여자아이에게 건네주고 그 아이의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소령이 갈수록 예뻐지네. 반짝이는 눈 좀 봐. 네 엄마가 너를 ‘소령이’라고 부르는 게 딱 맞아.”그 여자아이는 소시지를 건네받으며 귀엽게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어르신.”전씨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또 뭐 먹고 싶어? 할머니가 구워줄게.”“닭 다리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익숙한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씨 할머니에게 닭 다리를 구워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