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거동조차 불편해지면 자식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 영감은 하예정의 결혼식에 참석해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하예정이 청첩장을 보내주지 않았으니 갈 수 없었고 좋은 날에 분위기를 흐려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할아버지, 가서 얌전히 있다가 얼굴이나 보고 술 한잔하고 오면 되잖아요. 그럼 모두 우리가 하예정과 잘 지내는 줄 알 거예요. 할아버지는 제가 얼마나 힘든지 알잖아요.”하지명은 가족을 데리고 같이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어서 하 영감한테 투덜거렸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직 먹고 살 수는 있잖아. 전태윤 도련님이 너의 사업에 손을 썼지만 그 뒤로는 가만히 내버려뒀고 너희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것 같더구나. 그런데도 우리한테 용돈 한 번 쥐여준 적 없고 걸핏하면 퇴직금이 얼마 있냐고 하면서 뜯어먹을 생각만 했지.”하 영감은 하지명을 노려보면서 말했다.“나랑 네 할머니는 가지 않을 거다. 죽는 게 두렵지 않거든 불청객 신분으로 가보렴. 선택은 온전히 너희들의 몫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너희들을 말릴 자격이 없어. 하지만 하예정이 결혼하는 날에 분위기를 흐리면 우리한테 득이 될 게 뭐가 있어? 되레 하예정의 미움만 받을 텐데 말이야. 우리는 이미 업보를 받았으니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 해. 하예정의 남편은 전남편처럼 무능한 남자가 아니라 재벌가 도련님이야. 전태윤 도련님이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도 모르겠어? 전화 한 통이면 너희들은 당장 짐 싸서 마을로 내려가야 할 거야.”뭇사람들은 삽시에 조용해졌고 하 영감이 가지 않는 이상 아무도 섣불리 갈 수 없었다. 간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게 없었고 되레 자매의 모순만 극대화할 것이다. 하지철은 가지 못한다는 것을 예상했었다. 하지철은 하예정을 무서워했고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누나라고 생각했다.‘예진 누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예전에 돈이 얼마 없었을 때도 예정 누나를 무술 학원에 보냈었지.’“자, 다들 이만 가봐. 오늘은 좋은 날이지만 너희들이 좋아할 날은 아니야.
“얼마 남지 않은 퇴직금을 뜯어내려고 하잖아.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도 셋째네 집이야. 우리가 셋째의 부모라서 이 집이라도 가져서 이렇게 지내는 거지. 매달 생활비는 자식들이 주는 것인 줄 알았지만 하예정이 우리 자식들한테 월세를 내라고 해서 모은 돈으로 우리가 사는 거야. 나이도 이만큼 먹었으니 눈 가리고 아웅 하지 말고 받아들이면 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발버둥 쳐도 소용없어.”하씨 노친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하 영감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기에 말문이 막혔다.“악독하다고 뭐라고 하지 마, 십여 년 전에 우리는 뭐 잘 해준 것 같아? 그때 왜 친손녀를 그렇게 미워했는지 몰라. 아들이랑 며느리가 다 세상을 뜨고 미성년자인 두 손녀를 가문에서 내쫓고 재산을 전부 빼앗아서...”하 영감은 말하면서 눈시울을 적셨고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자식이 하는 말에 흔들리지 말고 우리 둘은 조용히 지내자. 하예정 자매한테 민폐 끼치지 않으면 나중에 우리를 미워하던 마음도 사라져서 거동이 불편해졌을 때 우리한테 도우미 아줌마를 보내줄 수도 있어. 하예정 자매가 이 집을 상속받으려고 왔을 때 다른 손주들이 소름 끼치는 말을 해서 이제는 기대 안 해. 늙으면 젊은이들의 짐이 되어 힘들게 하거든. 저 아이들도 늙어서 미움받지 말았으면 좋겠어.”하 영감의 말을 들은 하씨 노친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그래, 당신 말대로 할게. 손주 중에서 제일 미워했던 손녀가 지금 제일 잘나갈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런데 하예정이 홍씨 가문 사람들은 초대했을까?”홍씨 가문은 하예정의 수양 외할머니 가문이었다.하 영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아니, 결혼식 전에 홍씨 가문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하예정이 초대하지 않았대. 홍씨 가문이 그때 두 자매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홍씨 가문에 들이지 않더니 몰래 배상금을 나눠 가졌지. 그런 홍씨 가문을 두 자매가 초대할 것 같아? 홍씨 가문이 셋째 며느리를 키워줬지만 하예정이 재벌가 도련님과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참석하지 않았어,
하예정 자매한테 상처를 줄 때 혈연관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예정은 은혜에 보답할 줄 알고 원한은 몇 배로 갚는 사람이었기에 원한이 있는 사람한테 잘해줄 리 없었다. 하예정은 보살이 아닌 한낱 사람이었기에 상처받으면 아프다고 말했다. 화장대 앞에 앉은 하예정은 꾸벅꾸벅 졸았고 메이크업리스트 공지연에게 얼굴을 맡겼다.“이모!”우빈은 옆에 서서 공지연이 하예정한테 화장해 주는 것을 보다가 하예정이 졸자 높은 소리로 말했다. 하예진이 우빈 더러 하예정 곁에 있으라고 했던 것이다.하예정이 눈을 뜨자 우빈이 말했다.“이모, 이모부 오는 길이래요. 그러니까 잠들면 안 돼요!”공지연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많은 신부한테 화장해 주었지만 네 이모처럼 화장할 때 조는 신부는 처음이란다.”하예정이 머쓱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지연 씨 앞에서 자꾸 실수하게 되네요. 너무 졸려서 눈이 감겨요.”“그럴 수 있죠, 푹 주무시지 못했으니 그럴만해요. 아마 전태윤 도련님도 졸릴걸요.”“태윤 씨는 몇 시간밖에 못 자도 저처럼 졸지는 않아요.”전태윤은 평소에 새벽까지 하예정을 괴롭히고도 여전히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만약 하예정만 괜찮다면 하룻밤에 7번까지 되는지 도전해 보려고 했었다.“좋은 날이니 아주 설렐 거예요. 그리고 사모님은 임신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자고 싶을 거고요.”남들보다 몇 시간 더 자도 부족한 하예정이 어젯밤에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졸릴 만했다.“얼마나 지나야 졸음을 이겨낼 수 있을지 궁금해요.”그러자 공지연이 입을 열었다.“제가 임신했을 때도 사모님처럼 자꾸 자고 싶어 했고 10시간 넘게 자도 졸리더라고요. 그러다가 천천히 괜찮아지기 시작했어요.”“저도 10시간 넘게 자고 싶어요.”하예정은 말하면서 하품했다. 이때 우빈이 하예정한테 물었다.“이모, 고추 먹을래요?”우빈이 주머니에서 청양고추를 한 움큼 꺼냈다. 하예정이 멍한 표정을 짓자 우빈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이모, 이 고추 엄청 매워요. 너무 졸
우빈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고추가 도움이 될 줄 알았어요. 이모가 졸지 않아서 다행이에요.”하예정이 우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우빈아, 나가서 이모부 왔는지 봐줄래?”“좋아요!”우빈은 방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서는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지만 노동명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만약 거동이 불편하지 않았더라면 전태윤의 신랑 들러리로 같이 하예정을 맞이하러 왔을 것이다. 걷지 못해도 하예진을 돕고 싶었기에 하씨 가문으로 왔고 전태윤이 신랑 들러리와 함께 오면 그 뒤를 따라 서원 리조트로 갈 것이다.우빈이 위층에서 내려오자 노동명은 할 일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우빈아!”우빈은 신이 나서 노동명 쪽으로 달려왔고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아저씨!”“네 엄마가 위층에서 예정 이모랑 같이 있으라고 했잖아, 왜 아래층으로 내려온 거야?”“이모가 아래층에서 놀면서 이모부가 왔는지 보라고 했어요.”노동명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했다.“이모부도 곧 올 거야, 아까 오는 길이라고 했거든.”우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달려 나갔다.“진짜 왔는지 제가 나가볼게요!”노동명은 우빈을 말릴 틈도 없었지만 귀여운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휠체어를 밀어 현관문 앞에서 우빈을 기다렸다.“우빈이 언제 이렇게 컸지.”노씨 가문 도우미가 넷째 도련님이 방을 나서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달려와서 물었다.“동명 도련님, 계단을 내려가려고요?”노동명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응, 내려가자.”도우미 여러 명이 노동명의 휠체어를 계단 옆의 언덕까지 옮긴 뒤 천천히 언덕을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경사가 심해서 휠체어가 빠른 속도로 내려갈 수 있기 때문에 쉽게 넘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언덕을 내려갈 때는 도우미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언덕을 내려왔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게. 가봐도 돼.”도우미들은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노동명은 별장 문 앞에 서 있는 우빈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노동명은 미소를 지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우빈은 고개를 돌리더니 노동명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아저씨, 왜 혼자 나왔어요? 제가 보디가드 삼촌을 데려와서 아저씨 옆에 있으라고 할게요.”노동명은 늘 곁에 보디가드를 데리고 다녔지만 하씨 가문 사람들이 바삐 돌아치고 있어서 보디가드를 보내 도와주라고 했다. 노동명은 멀리 나가지도 않으니 보디가드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아직 제대로 걷지는 못하지만 일어나서 두 걸음 정도는 걸을 수 있었다.“괜찮아, 아저씨는 혼자서도 할 수 있어.”그러자 우빈이 입을 열었다.“그럼 제가 아저씨를 보살필게요. 엄마는 저한테 이모가 자지 않게 옆에서 감독하라고 했지만 아까 청양고추를 꺼내니까 이모가 졸리지 않다고 한 걸요!”우빈은 의기양양하게 말했고 하예진이 내준 임무를 잘 완성했기에 칭찬을 바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노동명은 우빈을 안아서 다리에 앉혔고 미소를 지었다.“우리 우빈이 정말 대단해, 고추는 어디서 난 거야? 고추를 먹으면 졸리지 않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주방에 있는 고추를 먹다가 매워서 울었는데 그 후로는 졸리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이모가 졸릴 때 주려고 고추를 가지고 올라갔어요. 아침에 엄마가 이모를 깨우는데 이모는 제가 어린이집 갈 때처럼 일어나지 않으려고 투정 부렸어요.”노동명이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너도 어린이집 가기 싫어서 일어나지 않았던 거야? 이모 결혼식이 끝나면 또 어린이집에 가야 하는데? 우빈아,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일찍 일어나야 해. 우빈 엄마는 매일 아침 우빈이가 먹을 밥을 차려주고 네가 다 먹으면 어린이집까지 데려다주잖아. 그리고 하루 토스트 가게에 가서 토스트를 굽고 하루 레스토랑에 출근하거든. 엄마는 하루 종일 일해서 피곤하니까 우빈이가 엄마 말씀 잘 듣고 일찍 일어나야 해, 알았지?”우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아저씨, 앞으로 엄마 말씀 잘 듣고 일찍 일어날게요. 그런데 아침에 너무 졸려서 일어날 때마다 눈이 저절로 감겨요.”“넌 어린이집 가지 않는 날이면
전태윤의 웨딩카 행렬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웨딩카 행렬은 100대 정도 되는 스포츠카로 이루어졌고 전씨 가문의 서원 리조트에서 출발해서 하씨 가문의 하늘 리조트로 향했고 오는 길 내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웨딩카 행렬을 사진 찍었다. 기사가 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전태윤은 기자를 초대해서 사진을 찍게 했고 결혼 소식이 널리 퍼질 수 있게 기사를 내달라고 부탁했다.전태윤은 하예정에게 관성을 떠들썩하게 하는 성대한 결혼식을 선물하고 싶었다. 이 규모는 소정남과 심효진의 결혼식을 훨씬 뛰어넘었다. 웨딩카 행렬을 발견한 노동명이 우빈한테 알려주었다.“우빈아, 엄마한테 이모부의 웨딩카가 도착했다고 알려줘.”우빈이 고개를 돌려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 웨딩카 행렬을 발견했다.“아저씨, 이모부가 정말 저 차 안에 있는 거예요? 이모를 데리러 오는데 차가 왜 이렇게 많아요?”거리가 멀어서 제일 앞에 있는 차가 전태윤이 평소에 운전하던 차인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 뒤로 많은 차량이 줄줄이 따라오고 있었다.“네 이모부는 저 차 안에 있을 거야. 이모부는 차가 여러 대 있으니 평소에 운전하던 차가 아닐 수도 있어.”우빈은 노동명의 품에서 벗어났고 신이 나서 말했다.“엄마한테 알려주러 갈게요!”우빈은 쏜살같이 달려갔고 달리면서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엄마, 엄마! 이모부 왔어요, 엄청 많은 차랑 함께 이모를 데리러 왔어요!”우빈이가 별장 안으로 들어가면서 외치자 뭇사람들도 다 듣게 되었다. 하예진은 목소리를 듣고 방 안에서 나왔다.“엄마, 엄마!”우빈은 하예진 쪽으로 달려가서 다리를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엄마, 나 지금 예뻐요? 멋있어요?”하예진이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이모부가 데리러 온 건 네가 아니라 신부인데? 네가 예쁘든 아니든 상관없어.”“제가 화동이라면서요? 오늘 멋지게 차려입은 것도 이모 결혼식에서 주목받기 위해서인데, 당연히 멋져야죠!”우빈의 말에 뭇사람들은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하예진은 우빈을 안고는 볼에
성소현은 말하면서 웨딩카 행렬이 천천히 들어오는 것을 휴대폰으로 찍었다. 신부 들러리들도 창가에 서서 영상을 찍었다. 성소현은 영상을 찍은 뒤, 침대 위에 앉아 있는 하예정한테 영상을 보여주었고 하예정은 미소를 지었다.“카톡으로 영상 보내주세요. 저장해서 나중에 두고두고 보려고요.”오늘은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날이 될 것이다. 전태윤은 약속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했고 하예정은 관성에서 여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여자가 되었다.하예정은 전생에 나라를 구해서 이번 생에 전태윤처럼 멋지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여겼다. 전태윤은 하예정을 평생 책임지고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맹세했다. 달콤하고 박력 있는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성소현은 카톡으로 하예정에게 영상을 보내주었다.“촬영사가 결혼식 내내 따라다니면서 찍을 거니까 나중에 천천히 봐.”하예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다 추억으로 남을 거니까요.”성소현은 하예정의 곁에 앉아 꼭 끌어안고 말했다.“예정아, 행복해야 해. 난 네가 태윤 씨랑 백년해로하고 아들을... 아니, 너처럼 예쁜 딸을 낳길 바랄게.”하예정이 성소현의 등을 토닥이면서 말했다.“언니, 꼭 행복하게 잘 살게요. 고마워요.”성소현은 하예정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내가 너랑 태윤 씨를 이어준 것도 아니잖아.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될 운명이었던 거야.”“축하해줘서 고마워요.”성소현이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우린 친구이자 자매니까 축복해 주는 건 당연한 거지. 난 가서 태윤 씨가 별장 안으로 들어왔는지 볼게. 문을 막을 때 태윤 씨가 준비한 꽃값을 가득 받지 못하면 이 문을 열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거야.”“고대의 신랑은 신부를 데리러 갈 때 즉흥적으로 시를 지어서 읊었다는데 전태윤 도련님한테도 시를 지으라고 할까요?”누군가 제안하자 하예정이 미소를 지었다.“저는 상관없으니 편한 대로 해요.”그러자 신부 들러리들은 성소현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시선이 느껴진 성소현이 피
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신부 들러리는 당황했다.“설마 벌써 올라왔겠어요?”신부 들러리는 창가에 가서 내려다보았다. 전태윤의 웨딩카 행렬이 별장 안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차량이 너무 많았고 하씨 가문 별장 마당에 하객 차들을 주차해서 웨딩카가 다 들어올 수 없었다. 웨딩카 행렬의 절반 정도 되는 차량이 별장 문 앞에서 멈췄다. 창가에서 내려다보면 하씨 가문 별장의 마당과 문 앞에 자동차 전시장처럼 차가 빼곡히 들어섰고 전부 스포츠카거나 그만큼 비싼 차량이었다.전태윤이 평소에 운전하던 롤스로이스는 웨딩카 행렬의 제일 앞에 있었고 꽃과 ‘우리 오늘 결혼해요’가 적힌 팻말로 장식해서 아주 예뻤다. 키가 훤칠하고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한 전태윤이 차에서 내렸다. 예전에는 보디가드한테 둘러싸여서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있었겠지만 오늘은 만나는 사람한테 깍듯이 인사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성소현 말대로 전태윤은 신부 들러리가 아무리 난처하게 굴어도 웃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성소현은 절대 앞장서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결혼하면 전태윤이 성소현 가족 신분으로 예준하를 난처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전태윤 씨는 방금 차에서 내렸어요. 다른 사람이 문을 두드린 것 같아요.”신부 들러리 중 한 명이 말하면서 문을 열었고 우빈이 문이 열린 틈을 비집고 들어와 하예정 쪽으로 달려갔다. “이모, 이모! 이모부가 완전 많은 차와 함께 이모를 데리러 왔어요!”우빈은 하예정이 앉아 있는 침대 위에 올라가서는 신이 나서 말했다. 하예정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알려줘서 고마워.”“이모, 나 이뻐요? 멋져요?”우빈은 하예진한테 했던 질문을 똑같이 했고 침대에서 일어나 한 바퀴 돌았다. 우빈의 말에 방에 있는 여자들이 까르르 웃었다. 하예정이 우빈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우리 우빈이가 제일 예쁘고 멋져.”성소현은 우빈을 안아 들고는 웃으면서 말했다.“우빈은 관성에서 제일 멋진 화동이 될 거야. 이모가 결혼할 때도 우빈이가 화동 해줄 거지?”“당연하죠!”우빈이 앳된
전씨 할머니는 한 손에 꽃다발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갓 구운 생선을 집어 전이혁에게 건넸다.“이런 작은 생선은 막 구웠을 때 먹는 게 맛있어. 식으면 맛이 없으니 따뜻할 때 먹어.”“고마워요, 할머니.”전이혁은 할머니가 건넨 생선을 받아 주저 없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먹던 중에 핸드폰을 꺼내 전우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전이혁은 전우와 나이도 비슷하고, 어릴 때부턴 전우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형제 중에서 전우와 가장 친했다. 그러니 그는 자랑하고 싶을 때는 무조건 전우를 찾았다.전이혁의 사진을 보자마자 전우는 가족 단톡방에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할머니, 낚시 가셨어요? 직접 구워 드시기까지 하네요. 많이 잡으셨어요? 저도 먹을래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이혁은 일부러 약 올리듯 답장했다.“이젠 없어. 할머니께서 나 주려고 특별히 남겨둔 거야. 그러니 네 몫은 없어. 그리고 너 진짜 생선 한 조각 먹으러 올 거야? 손해가 클 텐데?”“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할머니표 생선구이는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할머니는 워낙 자유로워서 오전엔 리조트에 있다가도 오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었으니, 큰 손자인 전태윤도 못 말릴 정도였다.부모 세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는 것밖에 없을 뿐, 감히 할머니를 간섭할 수 없었다. 그나마 큰 손자인 전태윤이 할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마저도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할머니는 그야말로 나이 든 개구쟁이였다. 할머니는 지금은 리조트에 있지만 다섯째 손자인 전우가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웃으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많이 잡지 못했어. 넷째한테 줄 몇 꼬치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먹었어. 먹고 싶으면 설 연휴 때 와서 직접 낚시해서 구워 먹어. 그래야 더 맛있지.”전우는 아쉬움으로
잠시 후, 차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아이는 고개만 돌려 살짝 보더니 다시 바비큐를 먹기 시작했다.“할머니, 저 왔어요.”멀리서 전이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이혁은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린 후,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풍겨오는 바비큐 냄새는 정말 좋았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 이런 날씨에는 바비큐가 최고죠.”관성의 겨울 날씨는 정말 변덕스러웠다. 어제는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추워서 할머니들은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온이 확 올라와 정오 무렵에는 햇빛까지 쨍쨍하게 비추더니 약간 더운 느낌마저 들었다.관성의 사람들은 겨울에 가끔 이렇게 바비큐를 해 먹긴 하지만 보통은 휴일이 되어야 준비해서 해먹을 여유가 있었다.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할머니는 생각만 나면 언제든 자유롭게 바비큐를 즐길 수 있었다.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전이혁은 자신이 나중에 결혼하고 아들이 성장하면 당장 사업을 넘겨주고, 자신은 조기 은퇴해 할머니처럼 여유로운 노후를 즐길 계획이었다. 그것은 신선놀음보다 더 행복한 삶이었다.“넷째 도련님.”양씨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전이혁에게 안부를 물었다.전씨 할머니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던 여러 할머니도 전이혁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그들은 전씨 할머니가 무려 아홉 명의 손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부러워했다. 아직 사회에 나오지 않은 막내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일곱 명의 손자는 이미 뛰어나고 유능한 인물들로 소문나 있었다. 게다가 막내 두 명은 비록 사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성적이 우수했고 앞날도 창창했다.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에 대한 효심도 지극했었다.전씨 가문은 자손들이 하나같이 훌륭했고 가업도 재산도 어마어마했으니, 그야말로 할머니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그들은 가끔 함께 수다를 떨며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그 시절에도 그들보다 훨씬 잘 살았고, 그때부터 이미 가문에서 주름잡는 존재였다. 결국 훌륭한 어른이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전씨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 여자아이를 불렀다.“소령이, 이리 와봐.”여자아이는 깡충깡충 뛰어갔다.“어르신, 닭 다리 다 구워졌어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자신에게 닭 다리를 주려고 부른 줄 알았다.전씨 할머니는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웃었다.“아직 다 안 구워졌어. 조금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을 거야.”“그런데 왜 양씨 아저씨의 자리를 잇고 싶다고 했지?”전씨 할머니가 여자아이를 예뻐한다는 건 리조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전씨 가문은 몇 대째 아들만 태어났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딸을 가지길 원했었고, 그것이 안 되자 손녀를 기대해 보았지만, 매번 실망으로 마무리되었다.할머니는 이제 증손녀를 기대해 보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증손녀를 안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종종 직원들에게 집에 여자아이가 있으면 관성으로 데려와 학교도 보내고 같이 생활하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리조트에 있는 놀이공원에 놀러 오라고도 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여자아이들이 리조트에 놀러 오게 되면 손주며느리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한테 증손녀를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양씨 아저씨는 참 멋있는 사람이에요.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돈도 많이 벌잖아요. 양씨 아저씨가 사는 집도 아주 예뻐요. 저도 양씨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요.”그 여자아이는 겨우 세 살밖에 안 됐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말도 잘해서 가끔 그 여자아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어른들이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여자아이는 부모도 가르친 적이 없는 말을 스스로 내뱉곤 했었다.우빈이도 가끔 서원 리조트에 올 때마다 리조트에서 내려와 그 여자아이와 함께 신나게 놀곤 했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여자아이가 리조트에 올라와 우빈이와 함께 놀기도 했었다.“아까 양씨 아저씨가 한 말 잘 들었지? 네가 컸을 때는 양씨 아저씨는 이미 은퇴하고 다른 사람이 저 자리에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은퇴한 다음에야 네 차례가 오게 돼. 그보
할머니는 함께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말했다.“날씨가 좀 쌀쌀하네. 우리 따뜻하게 몸도 데울 겸 한 잔씩 할까?”“어르신.”전씨 할머니가 술을 마시자고 하자 양씨 아저씨는 바로 할머니를 제지했다.“어르신 술 마시면 안 됩니다. 큰 도련님께서 아시면 또 어르신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며 저를 혼내실 거예요.”“양 집사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알겠어?”“태윤이는 점점 자기 할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아. 온갖 걸 다 간섭하려 들어.”할머니는 손자인 전태윤이 자신을 간섭하려 든다며 투덜거렸다.그러자 함께 있는 몇몇 할머니들이 웃기 시작했다.“큰 도련님께서 어르신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저희 나이에는 술도 적게 마시는 게 좋잖아요.”“과일주는 괜찮아. 양 집사, 가서 과일주 두 병 가져와. 바비큐에는 술이 있어야 제맛이지.”양씨 아저씨는 더 이상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리조트에 전화해서 과일주 몇 병을 가져오도록 했다.그들이 직접 잡은 생선 외에도 양씨 아저씨는 몇몇 어르신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바비큐용 식재료를 다양하게 준비했다. 어르신들 옆에는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양씨 아저씨는 그들을 위해 과일 주스를 준비해 두었다. 덕분에 그들은 기분 좋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전씨 할머니는 이렇게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있는 따뜻한 분위기의 생활을 참 좋아했다. 게다가 내년엔 첫 증손주가 태어나니 할머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졌다.할머니는 자신이 구운 소시지 한 꼬치를 여자아이에게 건네주고 그 아이의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소령이 갈수록 예뻐지네. 반짝이는 눈 좀 봐. 네 엄마가 너를 ‘소령이’라고 부르는 게 딱 맞아.”그 여자아이는 소시지를 건네받으며 귀엽게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어르신.”전씨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또 뭐 먹고 싶어? 할머니가 구워줄게.”“닭 다리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익숙한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씨 할머니에게 닭 다리를 구워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