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김태경은 속으로 비웃었다.‘뭐야... 속 좁게! 한 발도 다가가지 못하게 하네.’그러다 그는 문득 최하임이 떠올랐다.만약 최하임 곁에 누군가 들러붙는다면 자신 역시 전이혁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자 전이혁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전이혁 씨, 많이 기다리셨죠?”김태경이 미소를 지으며 전이혁에게 물었다.도아영 곁에 붙지 말라면 굳이 고집부릴 이유도 없었다.귀국한 뒤 도아영과 전이혁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김태경은 이미 알고 있었다.그들 집안 어른이 아무리 나서서 판을 흔들어도 자신과 도아영이 이어질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도아영은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 가족이라는 이유로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받으려 하지 않았다.김태경은 오히려 오빠인 자신이 도아영보다 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전이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영 씨를 만날 수만 있다면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되든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형은 왜 하필 밤에야 일을 보러 오신 거예요?”김태경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물론 기다림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도아영이 만나 주기만 한다면, 기회를 주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요즘 일정이 빡빡해서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었네요. 아영이랑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언제 와도 상관없죠. 아영아, 맞지?”김태경은 도아영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영아, 내 차에 타.”김태경이 다시 말했다.그 순간 전이혁이 한 손을 뻗어 도아영의 손을 붙잡았다.“아영 씨는 제 차에 탈 거예요.”김태경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린 채 도아영을 바라보았다. 선택은 그녀에게 맡기겠다는 듯한 시선이었다.도아영은 전이혁의 손을 조용히 떼어 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괜찮아요. 나도 차 있어요.”그녀는 누구의 차도 탈 생각이 없었다.직접 운전하는 편이 훨씬 편했다.가고 싶은 곳으로 원할 때 떠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도아영은 꽃다발을 안은 채 자신
도아영은 김태경이 선을 넘을까 봐 마음이 쓰였다.웃으며 이야기하고 식사 한 번 하는 정도라면 괜찮았지만 더 이상의 신체 접촉은 원하지 않았다.전이혁 때문이 아니라 최하임 때문이었다.도아영에게 김태경은 최하임의 남자였고 최하임을 언니라 부르는 이상 김태경은 자연스레 형부 같은 존재였다.“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영 씨, 일은 다 끝나셨죠? 배고프시면 제가 야식 좀 대접하겠습니다.”전이혁은 김태경에게 그 자리를 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야식을 살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신이어야 한다고 여겼다.도아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김태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전이혁 씨가 식사 대접하신다고요? 그럼 그 호의를 받아들이는 게 좋겠네요. 아영아, 우리 전이혁 씨한테도 한 번 기회를 드리자. 마침 우리도 배고프잖아.”그 말인즉, 전이혁에게 자신과 비서까지 함께 대접하라는 뜻이었다.애초부터 빠질 생각이 없는 철저한 ‘동행’ 선언이었다.전이혁은 망설임 없이 받아쳤다.“좋습니다. 그럼 제가 오늘 대접하겠습니다.”그리고 다시 도아영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아영 씨, 가실 거죠?”도아영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태경 오빠가 배고프시다고 하시니 그러면 다 같이 나가서 야식 먹죠.”그 말을 듣는 순간 전이혁의 표정이 환하게 풀렸다.“그럼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아영 씨, 먼저 이쪽으로 오세요.”전이혁은 도아영을 이끌고 VIP룸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몇 걸음 옮긴 뒤에야 손을 놓으며 곧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꽃다발을 집어 그녀에게 내밀었다.도아영은 꽃다발을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선물들로 시선을 옮겼다.그녀는 이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전이혁 씨, 올 때마다 이렇게 많은 선물을 들고 올 필요 없어요. 저는 필요하지 않아요. 전부 가져가세요.”“아영 씨, 그냥 소소한 것들이에요. 아영 씨 취향에 맞춰 골랐는데 제 마음이기도 합니다. 받아 주세요.”도아영은 잠깐 망설이다가 꽃다발만 받아 들었다.“꽃은 받을게요.
“전이혁 씨.”전이혁이 회사로 들어서자 프런트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밤이라 근무 중인 직원은 그녀 혼자였다.이미 도아영의 연락을 받아 둔 터라 프런트 직원은 전이혁을 보자 예의를 갖춰 인사한 뒤 곧바로 1층 VIP룸으로 안내했다.“부대표님께서 밖이 많이 추워서 VIP룸에서 잠시 쉬시라고 하셨습니다. 몸을 좀 녹이시고 따뜻한 물도 한 잔 드신 뒤에 돌아가시라고 전하셨어요.”전이혁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저는 여기서 부대표님께서 퇴근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프런트 직원은 가볍게 웃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전할 말은 이미 전했고 그 뒤는 전이혁의 선택이었다.전이혁이 꽃다발을 안고 크고 작은 선물들을 들고 있는 모습도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그는 올 때마다 늘 손에 한가득 들고 왔고 빈손으로 온 적이 없었다.예전에도 늘 그랬다.외모도 훌륭하고 집안도 좋으며 여자에게는 유난히 다정하고 세심한 남자였다.그런 사람의 마음을 끝까지 밀어낼 수 있는 여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그래서 지난해 도아영 역시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도아영이 마음을 열자 전이혁은 마치 모든 것이 장난인 듯 관성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일로 도아영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직접 관성까지 찾아갔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한동안 눈에 띄게 기운이 없었다.직원들은 저마다 그 뒤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 짐작하며 수군거렸지만 누구도 감히 도아영에게 직접 묻지 못했다.올해 초, 전이혁이 다시 나타나 도아영을 향한 구애를 시작하면서 직원들은 비로소 작년의 뒷이야기를 알게 되었다.알고 보니 그는 지금 또다시 지극정성인 얼굴로 도아영에게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그런 전이혁의 모습이 오히려 직원들의 마음에 걸렸다. 이번에도 진심이 아니라 잠깐의 열정에 불과한 것은 아닐지, 그런 의심이 자연스레 따라붙었다.도아영이 전이혁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단호하게 선을 긋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그저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듯 지켜볼 뿐이었다.그 모습을 지켜
경쟁자가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전이혁이 먼저 떠날 리가 없었다.그는 차 안에 조용히 앉아 줄곧 도아영을 기다렸다.그리고는 자주 외투를 끌어당겨 여몄다.차 안에는 난방이 켜져 있는데도 이상하게도 계속 추워 손을 비비곤 했다.관성 쪽도 요 며칠 기온이 내려갔다고 했다. 설이 지나면 잠깐 다시 추워지는 시기가 해마다 찾아오는데 이번에는 그 기세가 더 매서워진 모양이다. 심해 사흘 전까지만 해도 반팔로 지낼 만큼 더웠는데 이틀 동안 비가 내리자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하여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급히 두꺼운 외투를 다시 꺼내 입었다.해성은 원래도 추운 편이지만 요 며칠은 특히 더 추웠다.그때 회사 안에서 경비원 한 명이 나왔다.전이혁은 그를 바로 알아보았다.도씨 그룹 경호 부서의 책임자였다.그 경비원은 전이혁의 차 앞으로 걸어와 창문을 두드렸다.창문을 내리자 찬바람이 그대로 들이쳐 전이혁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추운 것만도 모자라 바람까지 거셌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이 사방에서 들이치는 듯해 스치기만 해도 얼굴이 얼얼할 정도였다.경비원은 모자를 끌어당겨 드러난 귀를 가렸다.“전이혁 씨, 저희 부대표님께서 안으로 들어오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1층 VIP룸에서 기다리셔야 하고 위층으로는 올라가실 수 없습니다. 아직 야근 중이셔서 많이 바쁘셔서 따로 마중 나올 시간은 없다고 하셨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전이혁은 신기하게도 추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역시 도아영이었다. 그가 밖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기다리는 것을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알겠습니다. 일에 방해되지 않게 VIP룸에서 기다리겠습니다.”전이혁은 한층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차를 몰고 들어가도 괜찮을까요?”이미 들어오라고 한 마당에 차를 끌고 들어오느냐 마느냐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경비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모든 직원이 야근 중인 것은 아닐 테니 주차 자리도 남아 있을 터였다.전이혁은 경비원에게 인사를 건
도아영은 김태경을 바라보며 웃었다.“태경 오빠가 전이혁 씨 편을 들어 주실 줄은 몰랐어요.”김태경도 빙그레 웃었다.“우리 사이가 무슨 진짜 경쟁자도 아니잖아. 나는 너를 늘 동생으로만 생각했어. 너도 나를 좋아한 적 없고 우리 결혼 얘기는 부모님들 바람뿐이었지. 내가 그동안 보인 태도도 그냥 네가 하자는 대로 맞춰 준 거야. 전이혁 씨 좀 자극해 보려고. 내가 봐도 전이혁 씨가 너한테 제일 잘 어울리더라. 두 가문끼리 서로 잘 어울리고.”지금 김씨 가문의 재력과 위치는 도씨 가문과 비교하기 어려웠다.최하임의 집안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최하임의 집안 사정이 눈에 띄게 기울자 김태경의 부모는 태도를 금세 바꾸며 더는 두 사람의 관계를 지지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오래도록 애매한 상태로만 지내며 확실한 결과도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형제라고 하기에는 서로 마음이 남아 있었고 연인이라고 하기엔 사랑이라는 말을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도아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나와 이혁 씨 사이 문제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요. 손에 있는 업무만 조금 정리되면 그 사람과 솔직하게 이야기해 볼 생각이에요. 오빠와 하임 언니와는 정말 이대로 끝내실 거예요? 잡아 볼 생각은 없어요? 혹시 하임 언니가 집안 회사를 살리려고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어쩔 거예요?”김씨 가문이라면 최하임의 집안을 도울 여력은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정말로 손을 내밀 의지가 있느냐였다.도아영은 이미 큰언니와 이 문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도씨 그룹이 여력이 되는 한 최하임의 집안도 한 번쯤은 도와주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도아영의 어머니 역시 최씨 가문을 걱정하고 있었다.황서진과 최하임의 어머니는 수십 년을 함께해 온 친구 사이였으니 외면하기가 쉽지 않았다.겉으로는 황서진이 도아영과 김태경을 엮으려는 듯 보였지만 속으로는 도움을 주려 하지 않는 김태경 어머니의 태도에 조금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집안이 어려워지자마자 선을 긋는 모습이 아무래도 지나치
사무실 안은 난방이 잘 돌아가고 있어 춥지 않았다.도아영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지금은 곤란해요. 고객이 있어서 이만 끊을게요. 얼른 돌아가세요.”말을 끝내자마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전이혁이 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문득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가 궁금해져 도아영은 날짜를 확인했다.설날 연휴가 끝나고 출근한 지 아직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시간이 매우 늦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도아림의 말이 떠올랐다. 최소 반년은 버텨야 한다고 했다.괜히 희망을 주지 말고 충분히 애를 태워야 한다고 말이다.그래야 전이혁이 애태우는 처지가 되어 고생해 보고 나중에 조금의 여지를 줘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완전히 주도권을 쥘 수 있을 만큼 관계를 다진 뒤에야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게 맞고 그다음에야 둘만의 시간을 거쳐 혼인신고와 결혼식까지 생각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아무리 서둘러도 2년이란 시간을 잡아야 한다는 말이었다.어차피 전씨 할머니가 전이혁에게 정해 준 1년이라는 기한은 이미 훌쩍 지났다.사실 도아영은 전이혁을 원망하지는 않았다.여러 신분을 가지고 있었던 쪽은 그녀였기 때문이다.아직도 자신이 바로 ‘여우’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전이혁이 거절했던 건 도아영이었지 ‘여우’가 아니었다.하지만 그 ‘여우’ 역시 결국 그녀 자신이었고 나눌 수 없는 한 사람이었다.전이혁은 그 사실을 몰랐을 뿐이었다.엄밀히 따지면 속은 사람은 전이혁 쪽이었다. 진실을 모른 채 이리저리 휘둘렸으니 화가 나야 할 쪽도 그였다.도아림의 조언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도아영은 그 말을 그대로 따를 생각은 없었다.몇 달만 더 지나면 전이혁과 한번 솔직하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고 그 뒤에야 다시 함께할 수 있을지를 결정하려 했다.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전이혁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했다.비록 그가 처음 마음을 준 대상이 ‘여우’였지만 그 ‘여우’가 바로 그녀였으니 결국 같은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