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진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당신 동생이 부모로부터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 못했는데 지금 누군가가 그 애를 귀한 아가씨처럼 가르친 거잖아. 비록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말 대단해. 조금 있다가 태윤이 형한테도 알려줘야겠어.”여운초가 말을 이었다.“예정 씨를 노리고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런지는 아직 모르겠어.”전이진은 부드럽게 아내를 달래주었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어차피 다 밝혀질 거니까. 직원들이 돌아오면 우리 밥 먹으러 가자. 본가에 갈까, 호텔에 갈까?”“호텔로 가자. 본가는 너무 멀어.”비록 몇 분의 세외고수들이 아직도 서원 리조트에 머물고 있지만 곧 떠날 예정이라 전이진 일행은 일상으로 돌아갔다.지금은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시기라 대부분 학생은 휴식 중이지만 막내 전지율은 고등학생이라 아직도 수업을 받고 있었다. 설날이 가까워져야 방학할 수 있고 새해가 되면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개학할 예정이었다.“오늘 밤에 본가에 안 갈 생각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가야겠어. 형수님도 본가에 계시거든.”여운초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 당장이라도 하예정에게 방금 일어난 일을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하예정이 전씨 할머니와 함께 본가에 있을 것을 고려해 여운초는 잠시 참고 저녁 식사 후에 이야기할 작정이었다.한편 여운별은 차를 타고 ‘꽃필무렵'을 떠나자마자 즉시 자신의 대역에게 전화를 걸었다.가짜 여운별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지금 어디야?”“너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야.”여운별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꺼냈다.“알았어. 만나서 이야기하자.”“돈은 미리 준비해 줘. 뺨을 여러 대 맞았는데 보상 좀 해줘야 할 거 아니야.”여운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후하게 챙겨줄 테니까.”다른 사람이 뺨을 맞는 것을 본 진짜 여운별은 기분이 정말 짜릿했다!여운별은 그렇게 비뚤어진 성격이었다. 다른 사람이 불행해지는 걸 보면 기쁨을 느낄 정도로.하지만 가짜 여운별이 없었다면 그 뺨을 맞은 건 바로 자신이었을 터였다.‘이진
여운별이 금방 감옥에서 나왔을 때는 손이 거칠고 피부도 좀 까무잡잡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예전의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로 돌아왔다.어쨌든 여운별은 겨우 스물한 살뿐인 여자였다.사실 설을 넘겨야 스물한 살이니 지금은 아직 스무 살이라고 해야 맞다.이 나이의 여자들은 얼굴에 콜라겐이 넘쳐흐르는 꽃다운 시기이다.여운별은 출소 후 일자리를 구하지 않고 가져간 돈으로 생활하다 돈이 떨어지면 동생에게 조르며 살아왔다. 사실 꽤 행복한 삶을 살아왔고 일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이라 손은 당연히 하얗고 부드러웠다.하지만 그 가짜 여운별의 손은 그리 하얗지도 않았고 가늘고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잡혀 있었고 손톱이 짧을 뿐만 아니라 매니큐어도 발라져 있지 않았다.진짜 여운별은 매니큐어를 매우 좋아했고 손톱도 길게 기르는 편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손톱을 길게 기르는 버릇이 있었는데 피아노를 배우게 되며 자주 손톱을 깎아야 해서 피아노를 배우는 것을 격렬히 거부했다.결국 몇 년만 배우다가 포기해버렸다.과거 여운초가 시력을 잃었을 때 여운별은 그녀를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특히 손톱으로 꼬집는 것을 좋아했는데 여운초는 그런 학대를 여러 번 당했었다. 하여 가짜 여운별의 손을 본 순간 여운초는 그녀가 진짜 여운별이 아니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챘다.게다가 가짜 여운별이 욕을 할 때, 아무리 독설을 퍼부어도 말속에 원한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미친 듯이 욕하고 싶어 애쓰는 티가 났다.진짜 여운별이 아니었기에 아무리 흉내를 잘 내도 여운초에 대한 증오를 진정으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운별을 잘 몰라서 눈치채지 못한 거야. 이 사람은 여운별과 똑 닮았어. 쌍둥이처럼... 목소리도, 몸매도 거의 흡사해. 하지만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어. 진짜 여운별은 아무리 제멋대로라도 금수저로 태어난 집안의 우아함이 배어있는데 이 가짜에는 그런 고급스러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거든. 그런 고급스러움은 배워서 되는 게 아니야. 오랜 시간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야만
“갈게요, 당장 갈게요.”여운별은 더는 입을 함부로 놀리지 못했고 가게에 머무를 생각도 하지 않았다.전이진의 “꺼져!”라는 말에 그녀는 몸을 돌려 차 쪽으로 달려가 문을 열고 재빨리 차에 올랐다.곧바로 차는 꽃 가게를 떠났다.여운초의 꽃가게 이름은 ‘꽃필무렵'으로 예쁘게 지었지만 정작 여운초가 있는 이곳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더 오래 머물렀다가는 이빨까지 다 뽑힐 것 같았다.여운별이 떠나자 용씨 사모님도 오래 머물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여운초에게 말을 건넸다.“사모님, 그럼 저도 먼저 갈게요. 주문한 꽃다발은 내일 다시 가지러 올게요.”“네.”여운초가 대답했다.용씨 사모님은 전이진을 슬쩍 한 번 흘겨보고는 두 경호원을 데리고 사라졌다.여운초는 가게 문 앞으로 나와 용씨 사모님을 배웅했고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제야 가게 안으로 돌아왔다.“어떻게 왔어? 안 바빠? 태윤 오빠가 출장 가셔서 당신도 바쁘잖아.”여운초는 남편에게 따뜻한 목소리로 물으며 물 한 잔을 따라주려 했다.외부에 출장 간다고 알렸지만 사실 전태윤은 강성으로 가야 했다.하예정이 걱정하지 않도록 그녀에게도 출장 간다고만 말할 뿐 강성으로 간다는 사실은 일부러 빼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태윤은 아직 하예정에게 출장 계획을 말하지 않은 상태였다.“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어야지. 지금이 몇 시인지나 봐봐.”전이진은 여운초의 볼을 가볍게 꼬집고는 이내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여보, 다음에 그 년이 또 당신을 욕하면 그때는 제대로 응징해. 오늘처럼 함부로 넘어가면 안 돼. 예전에 너에게 한 짓들을 생각해봐. 나는 그때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죽도록 패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어. 살인이 범죄가 아니었으면 그 년은 내 손에 벌써 몇 번이고 죽었을 거야.”여운초가 웃으며 말했다.“살인이 범죄가 아니었다면 아마 나도 벌써 몇 번씩 죽었을걸.”여운초를 보호하던 경호원들은 전이진이 오자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나를 욕하던 그 여운별
“여보.”여운초가 다가와 남편의 손을 잡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런 건 그냥 미친년이야. 아무나 물려고 드는 미친개로 생각하고 신경 쓰지 마. 미친개 때문에 화내는 것도 값지지 않잖아. 난 욕 먹는 건 익숙해져서 이미 무감각해졌어. 입은 운별의 몸에 달렸으니 하고 싶은 소리치게 내버려 두자. 듣기 싫으면 사람 시켜서 뺨 몇 대 때리면 그만이야.”전이진의 얼음처럼 차갑던 표정이 순간 부드러워졌다.가짜 여운별은 그의 표정 변화를 보며 속으로 질투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에게는 차갑게 산산조각내 버릴 듯한 눈빛으로 대하더니 여운초 앞에서는 이렇게 물처럼 부드러워졌다.‘역시 전씨 가문 남자들은 아내를 극진히 아낀다더니 정말이군.'“누구든 그렇게 당신을 욕을 하는 걸 참을 수가 없어. 당신이 너그러워서 안 다툰다고 해도 난 못 참아. 못 들은 척 넘어갈 수가 없어. 들었으면 반드시 혼내줘야지.”전이진은 여운초의 이마를 가볍게 톡 치며 계속해서 말했다.“당신은 너무 착해서 탈이야. 용씨 사모님의 말도 맞아. 이런 자들을 상대할 때는 너무 착할 필요 없어. 혼내줄 때는 제대로 혼내야 해. 사람만 안 죽이면 내가 다 뒤처리해줄 수 있어.”용씨 사모님과 가짜 여운별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두 사람은 속으로 여운초가 전이진 앞에서 연기할 뿐이지 전혀 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겉보기에는 연약하고 토끼처럼 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약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여운초와 여러 해 동안 대립해 온 여운별만이 알았다. 이 모습은 여운초의 교묘한 수단이자 다른 사람들을 현혹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사실 그녀들의 눈에는 여운초가 연기하는 천재였다. 불쌍한 척, 순진한 척, 착한 척하며 모두의 동정을 사는 것이 특기였다.“오늘 기분도 좋은데 저런 사람 때문에 하루를 망치기 싫어. 게다가 난 자기만 있으면 난 하늘이 무너져도 무섭지 않아. 누가 나를 괴롭히면 당신이 막아주고 대신 혼내줄 거잖아.”가짜 여운별은 속으로 욕했다.‘이 망할 장님! 벌써 알고 있었어
“오셨어요? 이 끈질긴 여자가 자꾸 사모님을 모욕하길래 제가 대신 혼을 내줬더니 반성은커녕 오히려 버릇이 더 고약하게 행동하네요. 사모님께서 마음이 너무 착하세요. 이런 사람은 자매간의 감정도 고려하지 말고 얼른 내쫓아내는 게 나아요.”용씨 사모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전이진은 그녀를 흘끗 쳐다보더니 다시 차가운 시선으로 여운별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운초가 너와 다툴 생각이 없을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 관대하지 않아. 내 아내를 모욕하는 건 곧 나를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난 나를 모욕하는 자에게는 항상 그 입술을 찢어버리는 걸 좋아하거든. 먼저 몇 대 때려서 입이 거칠면 어떤 화를 불러오는지 가르쳐 줘야 하거든.”전이진이 경호원에게 신호를 보내자 경호원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휘둘러 여운별의 얼굴을 여러 번 후려쳤다.가짜 여운별 멍한 채로 얼어붙었다. 그녀는 억울함에 미쳐버릴 것 만 같았다.‘전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 직접 사람을 때리라고 지시하다니... 그렇게 부드러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난 그냥 대역일 뿐인데. 비록 큰 보상을 받기로 했지만 욕도 먹고 뺨까지 맞는다니! 이건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나 그만두고 싶어.’그녀는 얼굴이 불타는 듯 아렸다.순간 가짜 여운별은 자신이 진짜 여운별이 아니라고 털어놓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그러다 우연히 용씨 가문 경호원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치자 움찔했다.가짜 여운별은 자신을 데려온 사람들의 잔인한 수단을 떠올렸다. 만약 진실을 폭로하면 그들은 그녀를 지옥보다 더한 삶을 만들어줄 것이라고 경고했었다.‘그래. 참자!’용씨 가문의 경호원들은 가짜 여운별의 대역 노릇을 하는 동안 고통을 당하면 추가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었다.지금까지 총 네 대를 맞았는데 한 대당 10만 원씩 추가로 준다면 네 대면 40만 원이다.이렇게 계산한 가짜 여운별은 진실을 폭로하려는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몰래 전이진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내가 운초에
여운별이 정신을 차리며 허를 찔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해 하며 황급히 말을 내뱉었다.“그래도 여운초가 싫어. 어쩔 건데?”말을 끝내자마자 가짜 여운별은 급히 자신의 차 쪽으로 달려가 재빨리 차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차를 타고 도망치려던 찰나 누군가가 그녀의 곁으로 빠르게 접근해 차 옆까지 따라붙었다. 그녀가 차 문을 닫기도 전에 크고 묵직한 손이 차 안으로 파고들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더니 거칠게 그녀를 차 밖으로 끌어 내렸다.눈을 뜨고 보니 전씨 가문의 경호원이었다.‘정말 신출귀몰하네. 너무 빨라!'경호원은 여운별을 전이진의 앞으로 끌고 갔다.용씨 사모님은 이 가짜 여운별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비록 진짜 여운별은 똑똑한 편은 아니고 지능도 평범하지만 이 대역이 이렇게까지 바보처럼 연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전이진이 왔는데도 감히 도발하다니, 목숨을 내다 버리는 짓이었다.어차피 오늘의 목적은 예상 효과를 거두었으니 아까 풀어주었을 때 당장 도망쳤어야 했다. 이제 여운초는 용씨 사모님과 여운별이 다른 사람이라는 의심을 하지 않은 듯했다.그런데 이 가짜가 연기에 너무 몰입해서 테이프를 뜯어내고도 여운초를 욕하더니 심지어 평소 여운별이 하던 대로 ‘전이진의 침대를 기어 올라가 결혼한 게 어디서 잘난 척이냐’는 식의 말까지 내뱉었다.이런 말들은 모두 진짜 여운별이 질투에 미쳐서 지어낸 헛소리일 뿐 사실과는 전혀 무관했다.감옥에서 나온 후로 인정하기 싫었지만 현실은 전이진이 먼저 여운초에게 애정 공세를 펼쳤다. 그때 여운초는 아직 눈이 안 보이는 상태였지만 전이진의 눈에 들어 그를 사랑에 빠지게 했다.심지어 여운초의 두 고모가 명해은 앞에서 여운초를 헐뜯으며 전이진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명해은은 오히려 당당하게 며느리가 돈만 잘 쓰면 된다고 감싸주기까지 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여운별은 질투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추미자는 여운별에게 전씨 가문에 시집가야 한다고 말했었다.“전씨 집안은 재벌가이니 그곳에 가면 넌 행복할 거야.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