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미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들과 싸우는 건 괜찮지만 극단적인 일을 저지르지는 말아야 해. 네가 또 감옥에 들어가게 되면 나왔을 때는 여씨 가문의 재산이 전부 그 애들 손에 넘어갈 거야. 그땐 네가 아무리 싸워도 소용없어.”여운초는 친척들에게 호감이 없었고 고모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반면 여천우는 고모들이 가장 아끼는 조카였다.여천우만이 친정을 지탱할 사람으로 여겨졌으며 친정이 강해질수록 고모들은 시댁에서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하지만 여천우는 여운초와 한마음이었다.현재 최씨 가문과 김씨 가문은 몰락해 가진 돈이 없었다.두 집안은 여운별이 여운초와 싸워 재산의 일부를 가져오기를 기대하고 있었고 그녀를 통해 집안을 다시 일으키려 했다.여운별은 나이가 어려 패기가 넘쳤고 부모의 지나친 사랑 속에서 세상 물정을 몰랐다.그녀는 속이기 쉬운 사람이었다.그러나 한편으로 여미란은 여운별이 또 충동적으로 극단적인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두려워했다.그녀가 감옥에 다시 들어가면 두 집안이 다시 일어설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큰고모, 이 쓰레기들 빨리 치워요. 너무 냄새나요.”여운별이 쓰레기를 가리키며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알았어, 알았어. 지금 바로 전화해서 수거하러 오라고 할게.”여미란은 서둘러 휴대전화를 꺼내 폐품 수거업자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는 종이 상자와 빈 병을 늘 같은 사람에게 팔았기에 연락처를 저장해 두고 있었다.전화를 끊은 후, 여미란이 웃으며 물었다.“운별아, 네 손에 여유가 좀 있니? 큰고모는 아직 월급을 못 받아서 식구들 반찬 살 돈도 없네. 혹시 좀 도와줄 수 있어?”여운별은 대꾸했다.“여천우 그 녀석이 한 달에 겨우 100만 원만 주겠다고 했어요. 부모님은 200만 원을 주라고 했는데도요. 저도 돈이 부족해서 큰고모를 도울 수 없어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결국 지갑을 열어 현금을 꺼내 큰고모에게 건넸다.“지금은 이것밖에 없어요. 부족하면 알아서 해결하세요. 저도 아직 일을 못
여운별의 두 눈이 반짝였다.새로운 얼굴과 신분으로 하예정에게 접근하려는 동안 항상 불안했고 정체가 드러날까 걱정스러웠다.다시 자신의 신분으로 돌아가 여운초를 찾아가 소란을 피우며 일부러 모습을 드러낼 생각에 웃음이 지어졌다.그래야 사람들이 그녀가 여전히 관성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얼굴을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도 드러날 테니까.“큰고모, 그 방법 괜찮네요. 지금 바로 서원 리조트에 가서 사돈어른들한테 생활비 좀 받아 와야겠어요.”여미란은 그녀를 재촉하며 말했다.“그럼 빨리 갔다 와라. 돈을 많이 받아와서 나랑 네 작은고모도 좀 도와줘. 우린 지금 정말 가난해 죽을 지경이야. 그리고 사돈어른께 일자리 하나 마련해달라고도 해봐. 사돈어른이 너한테 일자리 하나 만들어 주는 건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하지만 여운별은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단지 손을 벌리면 누군가가 다 해주고 돈이 넘쳐나는 생활을 하고 싶었다.용 사장은 그녀에게 몇억의 용돈을 보내줬지만 그녀는 명품을 사는 핑계로 경호원을 통해 더 많은 돈을 요구했다.용 사장은 돈이 많았고,보통 그녀의 요구를 들어줬다.여운별은 용 사장의 진짜 정체를 몰랐지만 그가 돈을 잘 쓰고 용씨 가문이 매우 부유하다는 이야기를 경호원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그녀는 이미 그의 첩이었기에 오로지 돈에만 집중하고 있었다.여운별의 표정을 보고 여미란은 그녀가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러자 한마디 거들었다.“네가 일을 하고 싶지 않다면 사돈어른께 네 사촌 형제들을 전씨 가문 자회사에 넣어달라고 해봐. 사촌들이 좋은 직장을 얻고 안정된 수입을 가지면 너를 도울 수 있을 거 아니니.”여운별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큰고모,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사돈어른이 그렇게 쉽게 설득될 것 같나요? 저한테 돈을 조금이라도 주면 다행이죠.”“사촌들 일자리까지 마련해 달라니, 물론 그분은 말 한마디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겠죠. 하지만 그분이 우리 말을 들어줄 가능성은 없어요.”비록 여운별
“예정 씨, 정말 부러워요. 결혼하신 지 오래되어도 아주버님과 여전히 사이가 너무 좋아 보이네요.”현재 여운초는 시력이 회복되어 눈앞의 물건을 조금씩 볼 수 있게 되었고 하예정을 위해 장미 꽃다발을 직접 고르고 포장해 주고 있었다.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도련님 부부도 사이가 좋잖아요. 우리를 부러워할 필요 없어요.”그리고 덧붙였다.“나는 태윤 씨랑 결혼한 지 오래된 것 같지 않아요. 마치 방금 혼인신고를 한 것 같은 기분이에요.”여운초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생각해 보면 아주 오래된 것도 아니죠. 아직 몇십 년이 된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두 분은 몇십 년이 지나도 첫사랑처럼 변하지 않을 거예요.”그녀는 포장을 마친 꽃다발을 하예정에게 건넸고 하예정은 꽃값을 결제했다.여운초는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하예정은 꽃다발이 전태윤에게 줄 선물이라며 돈을 받지 않으면 마치 여운초가 선물한 것처럼 느껴질 거라고 말했다.결국 여운초는 할 수 없이 돈을 받았다.“운초 씨, 나 이제 회사에 가야 해요. 주말에 도련님이랑 같이 집에 와서 식사하세요. 내가 맛있는 걸 해줄게요.”하예정은 꽃다발을 안고 가게를 나서며 여운초를 주말 식사에 초대했다.여운초는 그녀의 배를 힐끗 보며 웃었다.“어떻게 형님을 주방에 들여보내겠어요? 기름 냄새를 맡으면 속이 울렁거리지 않아요?”하예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혀 그런 거 없어요. 오히려 기름 냄새가 좋은걸요. 이상하죠? 아마도 배 속에 있는 이 작은 녀석도 먹는 걸 좋아하나 봐요.”그녀는 문을 나서며 덧붙였다.“임신 중에는 입맛도 달라질 수 있대요.”여운초는 웃으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겠네요. 저는 아직 그걸 체험하지 못해서 엄마가 되는 기분이 어떤지 잘 모르겠어요.”사실 여운초는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단기간에 임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매일 약을 복용하며 치료 중이었다.하예정은 잠시 멈춰 서서 손을 내밀어 여운초의 손을 잡았다.“정겨울 선생님도 2~3년 후엔 임신할 수 있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겉으로는 부드럽고 온화해 보이지만 사실은 강인한 성격을 지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의 겉모습은 온화하고 사람을 속일 만큼 평온해 보였지만 속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운초야, 퇴근했어? 바쁘지는 않니? 힘들지 않아?”“오후에 꽃집에서 새로 들어온 꽃가지 손질을 했어요. 바쁘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았어요.”여운초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머님, 혹시 또 몸에 좋은 음식 하시고 저를 부르신 거 아니에요?”시어머니는 며느리가 과거에 겪었던 고생을 안타까워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직접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어 그녀의 건강을 챙겨주곤 했다.그리고 매번 며느리를 볼 때마다 친정이 며느리에게 얼마나 냉정하고 잔인했는지에 대해 분개하곤 했다.“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식이라도 열 달 동안 뱃속에 품고 낳은 자식인데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대할 수 있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상처를 줄 수 있단 말이야.”명해은은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내게도 딸이 있었다면 금지옥엽으로 아끼고 사랑했을 텐데.”하지만 여씨 가문은 좋은 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오히려 학대와 냉대 끝에 여운초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다행히 정겨울 의사의 도움으로 그녀의 시력이 회복될 수 있었다.만약 그녀의 아름다운 눈이 빛을 완전히 잃었다면 정말 아쉬웠을 것이다.“엄마가 맛있는 거 해놨어. 너랑 이진이가 시간이 있으면 집에 와서 먹고 가렴. 오늘 밤 자고 내일 아침에 시내로 돌아가도 괜찮잖니.”명해은은 웃으며 말했다.“온다면 엄마가 너 좋아하는 요리를 더 준비하라고 부엌에 얘기할게.”“좋아요.”여운초는 시어머니가 직접 전화를 한 만큼 그녀의 체면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부부가 한번 들르면 될 일이었다.시내에서 별장까지 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라 다음 날 아침에 아침 식사를 하고 돌아가도 충분했다.전이진은 회사에서 자유롭게 일했기에 오전에 출근하지 않아도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여운초는 더 말할 필요 없었다.현
명해은이 말했다.“돈을 주지 않았어. 사돈아가씨가 일부러 와서 소란을 피우며 네 명성을 망치려는 걸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집안으로 들이지 않고 내가 밖으로 나가서 만났어.”“한 번 돈을 주면 이제 돈이 없을 때마다 와서 또 달라고 할 게 뻔하잖니. 그래서 돈을 주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어.”명해은은 그런 일에 어리석지 않았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네 동생이 너를 욕하는 말이 너무 심해서 두어 마디 듣고는 사람을 시켜 그녀의 입을 막고 끌어내 버렸어. 다시는 별장 입구에서 떠들지 못하게 말이야.”“그래도 네 동생이니 너희 관계가 어떻든 간에, 사돈아가씨가 집까지 와서 돈을 요구한 건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얘기하는 거야.”“운초야, 난 단지 네게 알려주려는 거지 너를 탓하려는 게 아니니 마음에 두지 마라. 그 모녀가 예전에 너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내가 개를 풀어 그녀를 물게 하지 않은 것도 체면을 봐준 거야.”명해은은 며느리가 자신이 화가 난 걸로 오해할까 봐 급히 설명했다.그녀는 여운별이 아무리 문제를 일으켜도 여씨 가문의 둘째 딸이며 자기 며느리의 동생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여운별이 별장 입구까지 와서 돈을 요구하고 여운초를 욕한 데에 화가 났지만 며느리가 이 일을 알고 대비할 수 있도록 전한 것이다.여운초는 부드럽게 대답했다.“어머님, 알아요. 저도 어머님을 탓하지 않아요. 그리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을게요. 동생이 원래 그런 사람이라 가만히 있는 게 더 이상할 정도죠.”“동생에게 돈을 주지 않은 건 정말 잘하신 거예요. 한 번 돈을 주면 걔는 우리를 착취하려 들 거예요. 성인이 돼서 손발이 멀쩡한 데 돈이 필요하면 자기가 벌어야죠. 다음에 또 찾아오면,어머님이 기르시는 강아지를 풀어서 그녀를 겁주시면 다시는 오지 않을 거예요.”여운초는 동생을 그렇게 대하고 있었다.여운별이 찾아올 때마다 여운초는 집사에게 맹견을 풀게 했고 그러면 여운별은 토끼처럼 빠르게 도망쳤다.여운별은 어머니의 과잉보호 속에서 자라 독하고
여운초는 지금이라도 전화 한 통이면 최씨 가문과 김씨 가문의 사람들을 관성에서 일자리도 찾지 못하게 하고 쫓아낼 수 있었다.그렇게 되면 여운별 역시 그들에게 부추김을 받지 않는다면 스스로 깨닫고 자립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여운별 같은 사람은 사회의 혹독한 경험을 통해서만 성숙해질 수 있고 옳고 그름을 깨달을 수 있었다.물론, 여운초는 동생이 변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여운별의 가치관은 어머니의 과잉보호 아래 잘못 형성되었고 이를 고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하지만 동생이 얌전히만 있다면 여운초는 그녀를 완전히 내치려 하지 않았다.다만, 여운별이 여전히 문제를 일으킨다면 여운초도 더 이상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었다.원래 두 사람 사이에는 자매애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었다.그저 남동생 여천우가 둘째 누나인 여운별에게 의리를 지키는 편이라 여운초가 동생을 어느 정도 봐주고 있었을 뿐이었다.하지만 여운별이 자신의 인내심을 끝내 소진한다면 그때는 여천우가 그녀를 위해 좋은 소리를 한다 해도 더 이상 봐줄 수는 없을 것이다.명해은이 단호히 말했다.“그럼 그렇게 해. 혹시라도 엄마가 나서야 한다면 언제든 말해. 우리는 이미 한 가족이잖니. 내 며느리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어. 누가 감히 내 며느리를 괴롭히면, 내가 그들에게 후회라는 단어가 뭔지 똑똑히 알려줄 것이야.”여운초는 시어머니의 말에 감동했다.“어머님 같은 좋은 시어머니가 있는데 누가 감히 저를 괴롭히겠어요? 다들 저한테 아첨하느라 바쁠 텐데요.”명해은은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다른 사람들의 아첨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그냥 우리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돼.”그러면서 화제를 바꾸며 명해은이 말했다.“운초야, 오늘 일 마치고 빨리 들어오려무나. 내가 주방에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더 준비하라고 할게. 오면 바로 먹을 수 있게.”“네, 그렇게 할게요.”명해은은 따뜻한 말투로 덧붙였다.“그럼 일 봐라.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그리고 전화를 끊었다.여운초
전이진은 차 문을 열고 여운초를 부축해 태웠다.여운초는 시력을 회복했지만 먼 거리를 또렷하게 보지는 못했기에 전이진은 여전히 그녀를 세심하게 배려하며 돌보고 있었다.그녀가 외출할 때는 항상 경호원들이 동행했으며 전이진이 여운초 곁에 있을 때만 경호원들이 잠시 쉴 수 있었다.이전의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전이진은 여전히 아찔했다.그때 큰형수님이 그녀를 우연히 발견해 구해주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그 사건 이후 전이진은 최씨 가문과 김씨 가문을 무자비하게 응징하며 그들의 사업을 모두 망하게 만들었다.그들은 파산했고 빚을 지게 되어 고급 차와 주택을 팔아 빚을 갚아야 했다.현재 두 집안은 셋방에서 살며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여운초의 두 고모는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고 한때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던 그들에게 이는 엄청난 추락이었다.여운초는 남편에게 말했다.“맞아. 아버님과 어머님은 정말 잘해주셔. 집안 모든 분들이 나를 특별히 아껴주시는 것 같아. 작은아버지, 큰아버지, 작은어머니, 큰어머니 모두 너무 좋은 분들이야. 그분들 덕분에 가족의 온기와 부모님의 사랑이 어떤 건지 느낄 수 있었어.”전씨 가문의 따뜻한 배려는 여운초가 과거에 겪었던 차가운 가정과는 완전히 달랐다.친부모 중에서도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해 준 사람은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뿐이었다.친어머니는 여운초에게 모성애를 주기는커녕 여운별과 여천우만을 자식으로 여기고 여운초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더구나 친어머니는 딸을 해치려는 끔찍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다.그 결과 여운초는 목숨을 건졌지만 여전히 매일 약을 복용하며 눈과 몸을 치료해야 했다.세상에 어느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불임으로 만들려 할까? 하지만 여운초의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전이진은 몸을 숙여 그녀의 안전벨트를 채워주며 얼굴에 입 맞추고 웃었다.“당신은 우리가 평생 아껴줄 공주님이니까.”전이진의 가족들 역시 여운초의 과거를 알게 된 후 그녀를 몹시 안타까워
여운초는 여천우의 몫을 탐내지 않았다.여운초가 쥐고 있는 것은 여씨 가문의 대동맥이다.“우리 어머니도 나에게 말했어. 신경 쓰지 마. 그 여자가 너를 욕하면 입을 틀어막고 쫓아내.”전이진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 그는 여천우를 제외한 여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 전부 증오했다.그가 사랑하는 아내의 친척들은 하예정 고향의 “일품” 친척들과 한판 붙어도 될 만큼 형편없는 사람들이다.하예정 고향의 친척들이 하예정에게 화해를 하고 싶어도 이제 기회가 없다. 그녀는 진작부터 그 친척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매달 받아온 집세 돈만 하 영감에게 생활비로 주었다.아주 가끔은 소비 돈을 조금 주겠지만 말이다.하 영감과 화해한 것도 어쩌면 하예정이 그녀의 아버지께 효도를 다 한 것일 수도 있다.그러나 여운초는 그녀의 친척들과 화해할 수 없다.여운초는 웃으며 여의치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운별은 생각이 깊지 못한 사람이야. 자기 엄마를 찾아가 돈을 요구할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그 또한 두 고모가 운별이를 부추겨서 한 짓일 거야. 돈을 가지게 되면 별문제 없겠지만 돈을 못 가지게 되면 또 내 명성을 손상할 게 뻔해. 명성이 좋든 나쁘든 뭐가 상관있겠어? 내 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할 텐데.”여운초는 수많은 괴롭힘을 당했고 몇 번이고 죽을뻔했기에 진작 명성의 좋고 나쁨에 여의치 않았다.전이진은 여운초와 결혼할 때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전이진이 그녀의 과거를 싫어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이 결혼할 수 있었다. 만약 전이진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여운초도 그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내가 대표님들에게 전화를 몇 통 걸었어. 사촌 오빠들은 내일부터 출근할 필요도 없이 쉴 수 있어서 좋을걸. 그리고 두 고모의 청소부 일도 취소했어. 앞으로 나가서 쓰레기통이나 뚜지면서 살아야 할 거야.”여운초는 두 고모가 청소부로 일하는 외 나가서 쓰레기를 주우면서 돈을 벌어 삶에 보태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다.전이진도 말을 이었다.“나도 전화할게.
전씨 할머니는 한 손에 꽃다발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갓 구운 생선을 집어 전이혁에게 건넸다.“이런 작은 생선은 막 구웠을 때 먹는 게 맛있어. 식으면 맛이 없으니 따뜻할 때 먹어.”“고마워요, 할머니.”전이혁은 할머니가 건넨 생선을 받아 주저 없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먹던 중에 핸드폰을 꺼내 전우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전이혁은 전우와 나이도 비슷하고, 어릴 때부턴 전우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형제 중에서 전우와 가장 친했다. 그러니 그는 자랑하고 싶을 때는 무조건 전우를 찾았다.전이혁의 사진을 보자마자 전우는 가족 단톡방에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할머니, 낚시 가셨어요? 직접 구워 드시기까지 하네요. 많이 잡으셨어요? 저도 먹을래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이혁은 일부러 약 올리듯 답장했다.“이젠 없어. 할머니께서 나 주려고 특별히 남겨둔 거야. 그러니 네 몫은 없어. 그리고 너 진짜 생선 한 조각 먹으러 올 거야? 손해가 클 텐데?”“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할머니표 생선구이는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할머니는 워낙 자유로워서 오전엔 리조트에 있다가도 오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었으니, 큰 손자인 전태윤도 못 말릴 정도였다.부모 세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는 것밖에 없을 뿐, 감히 할머니를 간섭할 수 없었다. 그나마 큰 손자인 전태윤이 할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마저도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할머니는 그야말로 나이 든 개구쟁이였다. 할머니는 지금은 리조트에 있지만 다섯째 손자인 전우가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웃으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많이 잡지 못했어. 넷째한테 줄 몇 꼬치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먹었어. 먹고 싶으면 설 연휴 때 와서 직접 낚시해서 구워 먹어. 그래야 더 맛있지.”전우는 아쉬움으로
잠시 후, 차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아이는 고개만 돌려 살짝 보더니 다시 바비큐를 먹기 시작했다.“할머니, 저 왔어요.”멀리서 전이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이혁은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린 후,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풍겨오는 바비큐 냄새는 정말 좋았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 이런 날씨에는 바비큐가 최고죠.”관성의 겨울 날씨는 정말 변덕스러웠다. 어제는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추워서 할머니들은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온이 확 올라와 정오 무렵에는 햇빛까지 쨍쨍하게 비추더니 약간 더운 느낌마저 들었다.관성의 사람들은 겨울에 가끔 이렇게 바비큐를 해 먹긴 하지만 보통은 휴일이 되어야 준비해서 해먹을 여유가 있었다.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할머니는 생각만 나면 언제든 자유롭게 바비큐를 즐길 수 있었다.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전이혁은 자신이 나중에 결혼하고 아들이 성장하면 당장 사업을 넘겨주고, 자신은 조기 은퇴해 할머니처럼 여유로운 노후를 즐길 계획이었다. 그것은 신선놀음보다 더 행복한 삶이었다.“넷째 도련님.”양씨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전이혁에게 안부를 물었다.전씨 할머니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던 여러 할머니도 전이혁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그들은 전씨 할머니가 무려 아홉 명의 손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부러워했다. 아직 사회에 나오지 않은 막내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일곱 명의 손자는 이미 뛰어나고 유능한 인물들로 소문나 있었다. 게다가 막내 두 명은 비록 사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성적이 우수했고 앞날도 창창했다.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에 대한 효심도 지극했었다.전씨 가문은 자손들이 하나같이 훌륭했고 가업도 재산도 어마어마했으니, 그야말로 할머니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그들은 가끔 함께 수다를 떨며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그 시절에도 그들보다 훨씬 잘 살았고, 그때부터 이미 가문에서 주름잡는 존재였다. 결국 훌륭한 어른이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전씨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 여자아이를 불렀다.“소령이, 이리 와봐.”여자아이는 깡충깡충 뛰어갔다.“어르신, 닭 다리 다 구워졌어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자신에게 닭 다리를 주려고 부른 줄 알았다.전씨 할머니는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웃었다.“아직 다 안 구워졌어. 조금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을 거야.”“그런데 왜 양씨 아저씨의 자리를 잇고 싶다고 했지?”전씨 할머니가 여자아이를 예뻐한다는 건 리조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전씨 가문은 몇 대째 아들만 태어났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딸을 가지길 원했었고, 그것이 안 되자 손녀를 기대해 보았지만, 매번 실망으로 마무리되었다.할머니는 이제 증손녀를 기대해 보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증손녀를 안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종종 직원들에게 집에 여자아이가 있으면 관성으로 데려와 학교도 보내고 같이 생활하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리조트에 있는 놀이공원에 놀러 오라고도 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여자아이들이 리조트에 놀러 오게 되면 손주며느리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한테 증손녀를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양씨 아저씨는 참 멋있는 사람이에요.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돈도 많이 벌잖아요. 양씨 아저씨가 사는 집도 아주 예뻐요. 저도 양씨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요.”그 여자아이는 겨우 세 살밖에 안 됐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말도 잘해서 가끔 그 여자아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어른들이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여자아이는 부모도 가르친 적이 없는 말을 스스로 내뱉곤 했었다.우빈이도 가끔 서원 리조트에 올 때마다 리조트에서 내려와 그 여자아이와 함께 신나게 놀곤 했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여자아이가 리조트에 올라와 우빈이와 함께 놀기도 했었다.“아까 양씨 아저씨가 한 말 잘 들었지? 네가 컸을 때는 양씨 아저씨는 이미 은퇴하고 다른 사람이 저 자리에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은퇴한 다음에야 네 차례가 오게 돼. 그보
할머니는 함께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말했다.“날씨가 좀 쌀쌀하네. 우리 따뜻하게 몸도 데울 겸 한 잔씩 할까?”“어르신.”전씨 할머니가 술을 마시자고 하자 양씨 아저씨는 바로 할머니를 제지했다.“어르신 술 마시면 안 됩니다. 큰 도련님께서 아시면 또 어르신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며 저를 혼내실 거예요.”“양 집사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알겠어?”“태윤이는 점점 자기 할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아. 온갖 걸 다 간섭하려 들어.”할머니는 손자인 전태윤이 자신을 간섭하려 든다며 투덜거렸다.그러자 함께 있는 몇몇 할머니들이 웃기 시작했다.“큰 도련님께서 어르신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저희 나이에는 술도 적게 마시는 게 좋잖아요.”“과일주는 괜찮아. 양 집사, 가서 과일주 두 병 가져와. 바비큐에는 술이 있어야 제맛이지.”양씨 아저씨는 더 이상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리조트에 전화해서 과일주 몇 병을 가져오도록 했다.그들이 직접 잡은 생선 외에도 양씨 아저씨는 몇몇 어르신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바비큐용 식재료를 다양하게 준비했다. 어르신들 옆에는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양씨 아저씨는 그들을 위해 과일 주스를 준비해 두었다. 덕분에 그들은 기분 좋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전씨 할머니는 이렇게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있는 따뜻한 분위기의 생활을 참 좋아했다. 게다가 내년엔 첫 증손주가 태어나니 할머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졌다.할머니는 자신이 구운 소시지 한 꼬치를 여자아이에게 건네주고 그 아이의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소령이 갈수록 예뻐지네. 반짝이는 눈 좀 봐. 네 엄마가 너를 ‘소령이’라고 부르는 게 딱 맞아.”그 여자아이는 소시지를 건네받으며 귀엽게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어르신.”전씨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또 뭐 먹고 싶어? 할머니가 구워줄게.”“닭 다리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익숙한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씨 할머니에게 닭 다리를 구워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