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한테 주는 서프라이즈에요."전태윤은 쇼핑백을 받아쥐고 이리저리 훑어보았다."또 옷이야?"그는 쇼핑백을 열어 보았다.'이번엔 후하게 다 브랜드로만 골랐네.'"남자한테 선물을 준비해 본 적이 없어서 많이는 준비하지 못하고 요만큼만 준비해 봤어요. 전에 선물한 옷은 비싸지 않지만 이번엔 명품이에요. 그때 그 옷은 20만 원이었지만 이 옷은 200만 원이나 하는걸요. 돈을 몸에 걸치고 다니는 게 서프라이즈가 아니고 뭐예요? 전 지금껏 이렇게나 비싼 옷은 입어보지 못했어요."전태윤이 웃으며 대답했다."당신 성격과 지갑 상황을 놓고 봤을 때 이런 옷을 나한테 사준 건 정말 서프라이즈가 맞아."'지난번에 선물한 옷이랑은 비교도 안 돼. 그래, 이걸 서프라이즈라고 할 수 있지.'"제 언니를 도와 주형인이 바람 난 증거를 찾아줘서 고마워요.""나한텐 식은 죽 먹기야, 당신 언니가 내 누나기도 하잖아. 내가 내 누나를 돕는 건 마땅한 일이 아니야? 나한테 옷까지 선물하며 고마워할 필요까지야."'어쩐지 나한테 옷 선물한다고 했어. 고마워 그런 거였어.'그녀가 깍듯하게 대한다는 건 그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아 도움을 받기만 하면 은혜를 갚고 싶은 것이었다.전태윤은 이런 생각이 들자 어쩔 바를 몰랐다.갓 결혼했을 적 그녀가 이렇게 자기를 대한다면 그녀가 예의 바르다고 생각했을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는 그녀의 지나친 예의 바른 모습에 자신이 아직 그녀의 가족으로 되지 않았다고 느껴졌다.하지만 그녀를 나무랄 수 없었다.계약서를 작성한 건 그이지 않은가."언니가 항상 당신한테 잘하라고 했어요. 다음에 언니 만나면 꼭 제가 옷 사줬다고 얘기해야 해요."전태윤은 웃으며 대답했다."알겠어. 누나 만나면 꼭 말할게, 내가 입은 옷들 모두 당신이 사준 거라고. 나한테 속옷까지 사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신이 사준 거라고 말할 수도 있어.""속옷 없어요? 무슨 색깔 좋아해요? 200만 원이나 하는 슈트도 사줬겠다, 속옷 몇 벌은 충분히 사줄 수 있어
엄마랑 통화를 끝낸 후, 전태윤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고양이를 안고 베란다의 그네 의자에 앉아 있는 하예정한테 물었다."나 몰래 우리 엄마를 만난 적 있지?"하예정은 멈칫거렸다.시어머님을 만난 얘기를 꺼낸 적도 없었는데 어떻게 알았지?'하태윤은 그녀 앞으로 걸어와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너 오늘 우리 엄마 만났지?"하예정은 그가 핸드폰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시어머니가 뭐라도 일러바친 줄 알고 바삐 해명하기 시작했다. "당신 옷을 살 때 어머님을 만났어요. 인사라도 드릴까 했는데 어머님이 저를 못 알아보시고 친구와 얘기하면서 지나가는 바람에 인사도 못 드렸어요."전태윤은 총명한 사람이다.심지어 자기의 친엄마다. 그는 비록 어릴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부모님과 멀어지지 않고 친하게 지냈다.하여 엄마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전태윤의 엄마는 하예정이 자기의 며느리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한테 알리기 싫었을 것이다. 첫 번째는 그가 이 바닥에서 기혼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하예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예정이라는 사람이 싫은 것이 아니라 출신이 전태윤과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엄마는 그를 가여워했다. 그의 할머니는 아홉 명의 손자가 있는데 그는 하필 하예정과 결혼하여 할머니의 은혜를 대신 갚는 것 같았다.전태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입을 열고 말했다. "우리 엄마가 눈이 좀 나빠. 그리고 안경을 끼는 것을 싫어하셔서 길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도 친하지 않으면 그냥 보고 인사 하지 않고 지나가."하예정은 사실을 알고 다시 입을 열었다."그렇구나. 어쩐지 어머님이 저를 보는 것 같았는데 저를 모르는 척 지나가더라고요. 그래서 난처해서 인사를 다시 하지 않았어요.""오늘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음에 밖에 나가 쇼핑할 때, 안경을 끼라고 말씀드려야겠어. 집에 돌아가신 후 너를 본 것 같아서 나한테 전화했어. 그래서 오늘 우리 엄마 만났냐고 물은
두 사람은 누구도 싸웠던 얘기를 꺼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화해했다. 하예정은 반년만 같이 살다 말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자상함에 그녀는 또 설레어 반년 계약을 깨버리고 싶었다.그녀는 자기만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어 반년이 지나 이혼을 한 후 그는 새로운 생활을 즐기며 살고 있는데 그녀는 그를 잃는 고통을 참아야 할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쳐 그를 잊어야 할까 봐 두려웠다.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기는 쉬운 일이다.하지만 사랑했던 사람을 잊기는 몹시 어렵다."걱정하지 마요. 저랑 언니에게 해결하지 못할 일이 생기면 꼭 당신에게 부탁할게요."그녀는 그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고 대답했다."우리 언니가 집에 돌아간 후, 통화해서 물어봤는데 아직은 아무 일도 없대요. 그리고 참을 수 있겠대요. 아직 시기가 안 됐으니 충동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거예요. 지금 상황으로 보면 언니가 충동적으로 그 일을 면하면 아주 불리할 수도 있으니까요."주우빈을 위하여 그녀는 이름 없는 배우에서 영화제의 상을 휩쓰는 유명한 배우로 되었다.연기를 너무 잘하여 주씨 집안의 사람들이 알아채기 힘들 정도였다."언니의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또 왔는데 무슨 일 때문에 왔는지도 모르겠대요. 내일 우빈을 데리러 갈 때 물어보려고요."하예진은 내일부터 이씨 그룹에 출근하러 가기에 주우빈을 가게로 보내서 하예정이 돌봐준다.하예정은 조카를 태어날 때부터 돌봐주고 있어 두 사람의 사이는 아주 좋았다. 하여 울면서 엄마를 찾을 일은 없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보모를 구해서 우빈을 돌보는 건 어때? 우빈이가 지금 호기심이 많고 움직이기 좋아하는 나이기에 두 사람이 바빠서 애를 잘 보지 못할 때 밖에 나가 잃어버리면 큰일이야."전태윤의 생각은 아주 치밀했다.하예정은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일단은 고민해 봐요. 바쁠 때는 함부로 뛰어다니지 못하게 업고 있으면 되니까요. 도무지 안 될 경우에 보모를 구할래요. 모르는 사람한테 애를 맡기면 걱정돼서요. 우리가 신경 쓰지 않을 때 애한테
하예정이 멈춰 섰다.곧이어 전태윤도 하예정을 따라 멈춰 섰다. 전태윤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왜 그래?""아줌마 월급은 제가 낼게요. 처음부터 우빈이 돌보는 일로 데려온 거고, 제 친조카 우빈이 일이니까, 이모인 제가 내는 게 맞아요, 어떻게 당신한테 내라고 하겠어요."요즘 아줌마 월급도 거의 백만 원까지 줘야 한다.가정 생활비도 모두 전태윤이 대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하예정은 전태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게 한 것 같았다.전태윤은 못 봐주겠다는 듯, 하예정의 볼을 꼬집으면서 말했다. "너 자꾸 나랑 시시콜콜 시비 따지면서 선 그을려고 하는데, 우리 이제 한 식구야, 가족 사이에 그렇게 따지고 들어서 뭐 해? 너랑 혼인 신고하던 날 내가 이미 말했잖아, 널 신부로 받아들이는 순간 내가 널 먹여 살린다고.""우빈이가 날 작은 삼촌이라고 부르잖아, 나도 우빈이가 너무 귀여워, 이깟 돈 좀 내고 우빈이 잘 돌봐 줄 도우미 아줌마 데려오는 거 하나도 안 아까워, 내가 바라던 바야."한참 뜸을 들이던 진태윤은 한마디 더 보탰다. "무엇보다 내 와이프가 덜 힘들었으면 해서 그랬어.""뭐라고요?""그러니까 내 말은, 이 돈은, 내가 내겠다고."전태윤은 제대로 말뚝을 박았다.말로는 설득이 안 되자, 하예정이 잠시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좋아요, 그럼, 당신이 내는 걸로 해요. 태윤 씨,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요?""무슨 일 있어?"하예정은 반려견 목줄을 쥐고 걸으면서 말했다. "우리 결혼한 지도 한참 됐는데 당신 고향 집 한 번도 안 가봤잖아요. 이번 주말에 시간이 되면 저를 데리고 당신 고향 집 한번 가볼래요?"시댁 식구들이 한번 방문 온 적은 있었지만 정작 못난 며느리는 시댁 문턱도 제대로 넘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하예정은 시댁 본가가 어디에 박혔는지도 몰랐다."보름 정도 지나면 할머니 생신이셔, 그날이면 모든 식구가 다 모일 거야, 그날에 시댁 식구들 얼굴 익히게 해줄게. 한 번에 모든 친척 지인을 볼
주형인이 문고리를 세게 비틀었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하예진이 이미 문을 다 잠가 놓았기 때문이었다.주형인이 문을 두드렸다."예진아, 문 열어."예진은 문을 열어 줬지만, 주형인이 못 들어오게 문 앞을 가로막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예진아, 상의 할 게 있어서 그러는데, 나 좀 들여보내 줘."이 방은 원래 부부의 사랑방이었으나 지금은 하예진이 독차지하고 있었다.주형인은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하예진이 그의 누나 아이들을 데려오고 데려가는 일을 계속하게 하기 위해 꾹 참고 내색하지 않았다."무슨 일인데 그래? 내일 말하면 안 되는 거야? 시간도 늦었는데.""11시밖에 안 됐어, 나 밖에서 일 처리하고 돌아와도 지금, 이 시간이야."하예진은 주형인이 상의 할 일이 시어머니나 올케와 연관이 있을 거라고 짐작이 가서 문을 막은 몸을 비켜주면서 말했다. "일 끝나면 당신 방으로 돌아가서 자."주형인은 그날 밤에 술기운에 참지 못하고 그 짓을 저질렀지, 맨정신엔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았을 거라고 속으로 되뇌었다.그러나 정작 하예진 앞에선 속과 다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 가져올 물건이 있어."말이 끝나자마자 주형인은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가 작은 비단함을 챙겼다. 퇴근 후 하예진 선물용으로 사둔 진주 목걸이였다. 비싼 목걸이가 아닌 몇만 원짜리 싸구려였다.곧이어 주형인이 그 비단함을 들고 사랑방에 들어왔다.하예진은 방에 있는 2인용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주형인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아들을 보았다. 어린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에 마음이 녹아내려 허리를 굽혀 아들의 작은 뺨에 뽀뽀하고 또 사랑스레 쓰다듬고서야 다시 허리를 펴고 하예진의 곁으로 와서 앉았다."자기야.""이름 불러."하예진은 아무렇지 않게 호칭을 정리하는 듯 보였지만주형인 입에서 다시 부인 소리를 듣는 게 구역질이 나도록 싫었다.주형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작은 비단 함을 건넸다. "예진아, 내가 사과할게. 전번에 손찌검 한 건 내가 잘
“우리 누나 아이들을 등하교시켜주고 밥을 해줘. 애들이 여기서 먹지 않아도 밥은 해야 하잖아. 그냥 밥그릇 두 개 더 놓는다고 생각하면 돼. 아직 애들이라 얼마 먹지도 않아. 날 도와준다고 생각하면 안 돼? 부부 사이에 이런 작은 부탁 정도는 들어줄 수 있잖아, 그렇지?”주형인의 말투는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얘기할 때 하예진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가여운 척했다.“그리고 누나가 공짜로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매달 당신한테 20만 원씩 주겠대. 지난번에 나도 생활비를 매달 30만 원 더 주겠다고 했잖아. 누나가 준 20만 원까지 합하면 50만 원이야. 얼마나 좋아.”주형인과 형님의 꿍꿍이에 하예진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작 20만 원으로 두 아이를 등하교시켜주고 하루 세끼 차려주는 것도 모자라 숙제까지 봐줘야 한다고?“주형인, 지금 20만 원이 많다고 생각하는 거야?”“먹는 거랑 쓰는 건 당신 돈이 안 들잖아. 그러니까 누나가 주는 20만 원은 거저 생긴 돈이나 마찬가지인데 비상금으로 모아놓아도 되잖아, 그게 적어? 적다고 생각하면 내가 20만 더 줄게.”하예진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지난번에도 내가 똑똑히 얘기했었지? 내 아이가 아니라서 난 책임질 수 없다고. 그리고 당신한테도 할 얘기가 있어. 나 일자리 찾았어. 내일부터 출근해야 해. 지금 우빈이도 내 동생이 봐주고 있어. 내 아들도 동생한테 맡겼는데 남의 집 애를 봐줄 시간이 어디 있어?”그녀의 말에 주형인의 낯빛이 굳어졌다.“당신이 무슨 출근을 해? 우빈이 이제 몇 살이나 됐다고 아직 엄마가 옆에 있어 줘야지. 내가 당신한테 먹을 걱정, 입을 걱정 하게 했어? 왜 갑자기 출근하겠다고 하는 건데?”“출근하든 말든 그건 내 자유야. 그리고 우빈이는 내 동생이 잘 돌봐줄 거야. 나한테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안 하게 했다고? 주형인, 나 지금 사는 게 정말 지긋지긋해! 내가 정말 돈 벌 줄 몰라서 지금까지 가만히 있은 줄 알아? 당신이랑 당신 가족들은 늘 내가 먹을 줄만 알고 돈
주형인이 갖은 말로 구슬려도 하예진을 설득할 수 없자 인내심을 잃은 그가 서늘하게 물었다.“어디 출근하는데? 그 회사 참 사람 보는 눈도 없지, 당신 같은 사람을 채용해?”하예진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노씨 그룹이야. 노 대표님께서 직접 날 채용하셨어.”주형인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노씨 그룹은 그가 건드릴만한 회사가 아니었다. 만약 일반적인 작은 회사라면 직장의 인맥을 이용하여 하예진의 일을 방해하면서 다시 일자리를 잃게 하여 집에서 얌전히 아이만 돌보게 할 수 있었다.그런데 그녀에게 이런 재간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직장을 떠난 지 3년여 동안 살도 많이 쪘고 예전의 활기찬 모습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녀가 노씨 그룹 같은 대기업에 출근하다니, 그것도 노 대표가 직접 채용했다는 게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노 대표님 사람 보는 눈이 어떻게 된 게 틀림없어.’주형인은 너무도 질투 나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아직 그도 노씨 그룹에 들어가지 못했으니 말이다.“얘기 다 했어? 다 했으면 나가. 나 쉬어야 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근해야 한단 말이야.”노동명이 그녀에게 매일 아침 회사 건물 앞의 정원을 다섯 바퀴 정도 뛴 후에 출근하라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조 비서에게 그녀가 다섯 바퀴 뛰는지 감시하게 하겠다고 했다. 만약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맑은 정신에 출근할 수 없고 첫날부터 실수가 잦으면 겨우 찾은 일자리를 잃을까 두려웠다.주형인은 별다른 말 없이 그냥 가버렸다. 진주 목걸이 하나를 괜히 낭비했다.주형인이 나가면서 방문을 쾅 하고 세게 닫은 바람에 거실에서 자고 있던 어머니가 깨어났다.외투를 걸치고 나온 김은희는 아들이 성을 내며 안방에서 나오는 걸 보고 다급히 아들에게 다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형인아, 왜 그래? 예진이랑 또 싸웠어? 예진이가 네 누나 아이들 등하교 안 해주겠대?”어머니의 앞이라 그런지 주형인의 표정이 조금은 온화해졌다.“어머니, 예진이가 오늘 일자리 찾아서 내일부터
김은희가 한참 고민하더니 말했다.“내일 내가 예진이한테 출근하지 말라고 얘기해볼게. 그리고 너도 앞으로 생활비 많이 주고 더치페이하지 마. 원래는 더치페이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아무런 쓸모가 없어. 봐봐, 네가 퇴근하고 와서도 전부 다 직접 하잖아. 나랑 네 누나가 예진이한테 밥을 차려달라고 하는 것도 돈을 줘야 하니... 딱히 돈을 아끼는 것도 모르겠으니까 그냥 더치페이 하지 마. 그러면 너도 덜 힘들잖아. 예진이한테 매달 40만 원씩 준다고 해도 괜찮아.”주형인이 잠깐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어머니, 더치페이하지 않는다고 해도 저랑 예진이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이젠 예진이한테... 정이 뚝 떨어질 지경이에요. 우빈이랑 누나 일만 아니었으면 예진이한테 굽신거리지도 않았어요.”그의 말에 김은희가 그의 뺨을 내리치더니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남자들은 다 이래. 결혼만 하면 바깥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니까! 현주인지 뭔지 그 여자가 정말 널 사랑하는 것 같아? 다 네 신분을 보고 그러는 거라고. 네가 한 달에 겨우 이백이나 버는 일반 직원이었다면 그 여자가 널 쳐다보기나 했겠어? 그래, 네가 잘생기긴 했어. 나도 네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 그런데 잘생기면 밥이 나오냐? 지금 여자들 얼마나 현실적인데, 네가 돈이 없고 지위도 없었더라면 아무리 잘생겼어도 쳐다도 안 봐. 정말로 예진이랑 헤어지면 앞으로 꼭 후회할 날이 있을 거니까 명심해.”서현주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주형인은 어머니의 말을 아예 귓등으로 들었다.“어머니, 늦었어요.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예진이한테 조카들 등하교해달라고 제가 잘 설득해볼게요.”만약 하예진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집을 누나의 명의로 변경하지 않아도 된다. 설마 집을 그의 누나에게 주지 않으려고 절대 도와주지 않겠다고 하는 건가?집에 아이들의 등하교를 해줄 사람이 없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주형인은 방으로 돌아가 하예진에게 캐묻고 싶었지만 또 말다툼할까 봐 결국 포기했다
“할머니께서는 저의 선택을 존중하신다고 하셨지만 후회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이혁은 명해은에게 먼저 국물을 떠드렸고 또 전현민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다시 국물을 한 그릇 떠드리며 말했다.“저는 후회할 일은 절대 하지 않아요.”비록 이전에는 도아영과 꿈속의 여자 ‘여우'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우'와 함께할 때 특별히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는 ‘여우'와의 만남을 간절히 기대했고 만나서 싸운다고 해도 그 순간이 기다려지기만 했다. 이런 기대감은 도아영에게서는 찾을 수 없었다.그가 도아영에게 접근한 건 순전히 전씨 할머니께서 선택해주신 사람이기 때문이다.결국 감정은 억지로 할 수 없는 법, 억지로 따온 열매는 달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명해은이 입을 열었다.“그래. 후회하지나 말고.”명해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어머님이 널 이렇게 쉽게 놔두실 리가 없지. 넌 아직도 진실을 모르고 있구나!'전이혁은 그가 후회할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전씨 할머니께서는 확신 없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시는 분이었다.명해은이 전씨 할머니를 잘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전현민은 아들로서 명해은보다 그의 어머니를 더 잘 알았다.전현민 부부는 서로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웃었다.그리고는 전이혁과 도아영에 관한 화제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식사하면서 명해은은 계속 전이혁에게 반찬을 얹어주었다.“엄마, 제가 방금 돌아오자마자 바비큐를 많이 먹어서 배가 불러요. 이렇게 많이는 못 먹겠어요.”자기 그릇에 산처럼 쌓인 반찬을 보며 전이혁이 말했다.“엄마, 아빠께도 좀 드리세요. 안 그러면 또 제가 아빠의 아내 관심을 뺏었다고 투덜대실 거예요.”말이 떨어지자 전현민도 전이혁의 그릇에 반찬을 얹어주셨다.“평일엔 바쁘게 일하느라 제대로 식사도 못 했겠다. 살도 많이 빠졌네. 많이 먹어.”전이혁은 웃으며 말했다.“아빠, 아까는 밥 한 그릇과 나물 한 접시만 주신다고 하셨잖아요.”“그건 화나서 한 말이지,”전이혁도 부모님께 반찬을
명해은은 선물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저도 이 녀석이 혼자 올 줄은 몰랐어요. 어머님께서 이혁이가 점심 먹으러 온다고 하시길래 아영 씨도 따라서 온줄 알았거든요. 어제 함께 저녁도 먹고 술도 마셨으니 오늘은 데려올 줄 알았는데.”명해은은 전이혁이 준 선물도 이제는 별로 반갑지 않았다. 미래의 며느리인 도아영이 와야 기쁠 것 같았다.전이혁이 입을 열었다.“지금 바로 나갈게요. 회사로 돌아갈게요.”그는 일어서서 떠나는 척했다.전현민이 다시 말했다.“네 엄마가 이미 반찬을 더 준비하라고 했는데 우리 집의 강아지도 다 먹지 못할 텐데 네가 도와서 다 먹고 가.”즉, 집에서 기르는 개가 밥을 다 먹을 수만 있다면 전이혁에게 밥을 주지도 않겠다는 의미였다.여자친구를 데려오지 못하는 아들은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집안이란 말인가.“밥 드세요.”명해은은 남편과 아들을 식탁으로 불렀다.전이혁은 일어나 명해은을 따라가며 중얼거렸다.“정말 밥 안 주실 줄 알았어요... 저는 이제 우리 집 개보다도 못한 존재네요.”“이번은 봐줄게. 다음에 도아영 씨가 오면 꼭 데리고 와서 식사해. 네 아빠와 나도 한번 보게. 길에서 마주쳐도 누군지 모를 텐데 우리도 한 번 좀 만나보자고.”“엄마, 저는 아영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명해은이 눈을 부릅떴다.“할머니께서 골라주셨는데 안 좋아한다고? 안 좋아하면서 지난 몇 달 동안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네 형은 두세 달 만에 운초의 마음을 움직였는데.”여운초는 당시 그녀가 시각장애인이어서 전이혁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계속 거절했지만 사실은 이미 마음이 움직인 상태였다.전이혁은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저랑 형은 달라요. 형도 3개월 만에 형수님을 꼬시지는 못했거든요.”명해은도 앉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가 안 좋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할머니께서 골라주신 사람인데 아무리 못해도 그 정도는 아닐걸. 너무 까다롭게 여자를 고르지는 마. 너도 거울 좀 봐. 넌 너희 형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도 아
명해은의 친정집도 재벌 가문으로 그녀는 어릴 때부터 보석 액세서리들과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었다.전씨 가문에 시집올 때 그녀의 부모님과 형님, 형수님이 준비해 주신 보석들은 보석 가게를 열어도 될 만큼 많았는데 그것이 그녀의 혼수품이었다. 지금도 그 보석들은 그녀의 보석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전이진이 여운초와 결혼한 뒤로 명해은은 수많은 소장품 보석들을 며느리에게 선물했다.전이혁이 대답했다.“저는 아직 아내가 없잖아요. 새로 나온 보석 액세서리들을 보고 너무 예뻐서 한 세트 사 왔어요.”“전씨 할머니께도 사드렸지?”전이혁은 빨간색 선물 상자를 명해은에게 건네며 말했다.“할머니께서 액세서리들을 선물하지 말라고 하셔서 꽃다발만 사드렸어요. 근데 또 산 아래 꽃밭에 꽃이 많은데 왜 돈을 쓰냐면서 꾸지람 하신 거 있죠.”명해은은 상자를 건네받으며 웃었다.“겉으로는 싫다고 하시지만 속으로는 매우 기쁘셨을 거야. 꽃다발을 네게 돌려주지 않으신 건 마음에 드셨다는 뜻일 거고. 오늘 산 아래 모든 사람에게 자랑하지 않고서는 돌아오지 않으실 거다.”수십 년 동안 전씨 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명해은은 시어머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명해은은 다시 아들 뒤를 살피다가 차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차에 아무도 없니? 너 혼자 왔어? 할머니께서 네가 식사하러 온다고 하시길래 엄마는 네가 귀한 손님을 데려올 줄 알았는데.”“제가 혼자 왔어요.”전이혁은 모른 척했지만 속으로는 전씨 할머니가 이미 도아영이 관성에 온 일을 명해은에게 알려주었을 것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말씀대로라면 명해은 부부가 아들들의 인생사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평소 부모님의 결정을 따르지 않았기에 조바심을 내도 소용없었을 뿐이다. 하여 전씨 할머니께서 나서서 형제들의 인생사를 걱정해주실 수밖에 없었다.명해은은 아들을 노려보며 나무랐다.“도아영 씨가 온 거 아니었어? 너희들 어제저녁 함께 식사도 하고 밤도 같이 보냈잖아. 근데 데려오지도 않고 말이야. 엄마는 할머니께서 너에게 골
도아영은 그 선물이 전이혁이 선물인 것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잠시 생각하던 전이혁은 결국 전씨 할머니의 말씀대로 하기로 했다.만약 도아영에게 선물이 자신이 준 것이라고 알려준다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도아영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집착할 수도 있을 테니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할머니, 집에 가서 식사 안 하실 거예요?”전이혁은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전씨 할머니가 대답했다.“너무 많이 먹었더니 배가 불러. 조금 있다가 가서 흰죽 한 그릇 먹을 거야.”고기 요리를 많이 먹으면 간단한 죽에 김치를 곁들이는 게 좋았다.“넌 집에 가서 네 부모님과 식사하렴.”“네.”전씨 할머니가 집에 가길 원하지 않자 전이혁도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다른 어르신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셨고 굶을 염려도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꽃 구경하자고 전화해서 친구들을 불러야겠다.”전씨 할머니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어르신들이 이쪽으로 오는 모습을 확인한 전이혁은 그제야 정자에서 나왔다.곧 차 앞에 도착한 전이혁은 차에 올라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떠난 뒤로 전씨 할머니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으면서 속삭이는 것을.“이 자식아! 너는 할머니를 이길 수 없어. 나중에 네가 할머니에게 매달릴 날이 올 거야.”이렇게 해야 드라마가 재미있어지는 법. 노년의 삶에 약간의 즐거움을 더할 수 있으니 말이다.나이가 들면 할 일이 없어진다. 손자들이 일을 시키지 않는다면 전씨 할머니는 손자들을 놀려먹으며 즐기면 그만이었다.명해은은 별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이혁의 차가 보였고 그가 아직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명해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피어났다.아들이 다 큰 뒤로 집에 오는 횟수가 줄어들자 명해은 부부는 아들들이 집에 와서 식사라도 함께하는 걸 간절히 바랐다. 며칠이라도 집에서 머물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하지만 아들들이 모두 바쁜 사람들인
전씨 할머니는 묵묵히 전이혁을 바라보았다.이미 모든 말을 털어놓은 전이혁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전부 입 밖으로 내뱉었다.오늘 본가에 온 것도 전씨 할머니에게 확실하게 말하러 온 것이다. 그는 형들처럼 전씨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전이혁에게는 그가 원하는 여자가 있었다.그의 말이 끝나자 전씨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의 말도 일리가 있구나. 오래 끌기보다 단칼에 정리하는 게 낫지. 아영 씨도 너에 대한 감정이 아직 깊지 않을 테니 확실히 설명해 주고 마음을 접게 하는 게 좋겠다. 아영 씨의 시간을 더 뺏지 말고.”전씨 할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물었다.“이혁아, 정말 아영 씨를 고려하지 않을 거냐? 할머니의 안목을 전혀 믿지 못하겠어?”전이혁은 진지하게 대답했다.“할머니, 저는 할머니의 안목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여자예요. 그런데 저는 그녀에게 설레는 느낌이 없어요. 아영 씨와 결혼한다 해도 예의만 차리며 형식적으로 살뿐 진정한 부부간의 정은 없을 거예요. 아영 씨도 똑똑한 사람이라 그런 삶을 원하지 않을 거예요. 사랑이라는 건 강제적으로 이어진다고 해서 감정이 생기지는 않는 것 같아요.”전씨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알겠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할머니도 이제는 네 연애사에 간섭하지 않겠어. 원하는 대로 해 봐. 하지만 단 한 가지! 인품이 좋은 여자를 데려와. 아주 뛰어나지 않아도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사람이어야 해. 우리 전씨 가문의 이름을 망치지 말고. 만약 인품이 나쁜데도 네가 고집부린다면 난 억지로 막지는 않겠다. 대신 나와 인연을 끊고 전씨 가문에서 나가.”전씨 할머니는 쥐 한 마리가 천 냥 술을 썩히는 걸 용납하지 않으셨다.전씨 가문의 좋은 명성은 몇 대에 걸쳐, 그리고 전씨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평생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것이다.전이혁 하나 때문에 무너지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약속했다.“전씨 할머니, 걱정하
“할머니는 제 마음속에서 저의 부모님보다도 더 중요하거든요. 백 세까지 오래오래 사셔야 증손녀도 안으실 거 아니에요. 우리 형제가 아홉이나 되는데 앞으로 아홉 며느리가 생기면 그중 한 명이 꼭 증손녀를 낳아드릴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증손녀를 안고 키우시면서 나중에 좋은 신랑을 골라주시기까지 하셔야 하는걸요.”전씨 할머니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나도 하느님께 500년 수명을 더 빌고 싶지만 그게 될 일이니? 현실을 직시해야지. 나는 증손녀가 태어나는 걸 보기만 해도 만족해. 증손녀가 시집갈 때까지 살겠다는 건 너무 큰 욕심이지.”전씨 할머니의 건강은 아직 좋으시지만 이미 여든이 넘으신 데다 증손녀가 언제 태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다.어쩌면 막내인 전이율이 결혼할 때까지 살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어이구, 농담이야. 아까 내가 말했듯이 인품이 좋고 가치관이 바르면 내가 정한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고. 그럼 꿈속의 그녀가 누군지는 아느냐?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네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전이혁은 얼굴이 빨개지며 당황했다.“제가 너무 무능해서 알아낸 정보가 하나도 없어요. 정남 형에게 부탁해 그녀를 조사해보라고 했는데 이런 일은 신경 쓰기 싫다고 하더군요. 만약 태윤 형이 부탁한다면 무슨 일이든 도와주겠지만 제가 부탁하는 건 싫다고 하더라고요.”“정남이가 네 형의 친구이지 네 친구가 아니잖아.”전씨 할머니는 소정남이 전이혁의 부탁을 거부한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정남은 전이혁에게 빚진 것도 없지 않는가.전이혁은 전씨 그룹 본사에서 일하지도 않고 소정남과도 동료 사이도, 친구 사이도 아니었다. 소정남이 원하면 도와주고 원하지 않으면 안 도와줘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그런 일까지 정남에게 부탁하려고?”전씨 할머니가 다시 물었다.전이혁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그는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라 결국은 바베큐만 먹었다.“2, 3개월 정도의 시간을 더 주겠다. 그때 가서도 여전히 도아
그런데도 전이혁은 휴지로 할머니의 자리를 닦았다. 그러나 전이혁 자신은 의자에 앉을 거라서 굳이 의자를 닦지 않았다.“할머니는 정말 수재이신 것 같아요. 수재는 집 밖을 안 나가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잖아요.”할머니는 전이혁을 흘겨보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만 아부하고, 어서 말해봐. 도아영 씨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 건데?”“아영 씨 괜찮은 사람이에요. 전 나쁘다고 한 적 없어요. 저도 좋아해 보려고 노력했어요. 아영 씨와 감정을 쌓아보려고 노력도 했는데 전 안 생기고 아영 씨만 강정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먼 길까지 절 찾아와서 따지더라고요.”“아영 씨는 제가 자기 가지고 논 거 아니냐고 하는데, 저도 억울해요. 저도 아영 씨 좋아해 보려고 진심으로 노력했지만,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는 걸 어떡해요.”전이혁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입은 쉬지 않고 계속 바비큐를 먹고 있었다.“할머니가 점찍은 사람이라 능력도 좋고 조건도 잘 맞고, 여러모로 저랑 잘 어울린다는 거 알아요. 저도 아영 씨를 싫어하지 않고요. 하지만 함께 있으면 뭔가 찌릿한 느낌이 부족해요. 이미 봐온 시간도 꽤 되고, 이제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전 아영 씨를 사랑할 수 없어요.”“물론 제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아영 씨와 결혼해서 평생 서로 존중하며 지낼 수는 있을 거예요.”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그런데?”전이혁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뗐다.“할머니도 아시잖아요. 제 꿈속에 자꾸 어떤 여자가 나타나 저와 얽힌다는 사실을요. 사실, 현실에서 진짜로 그 여자를 만났어요.”“나도 알고 있어.”전이혁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정말 할머니를 속일 수 없다니까. 제가 그 여자의 물건을 가지고 간 것도 아시잖아요.”“네가 그 물건 가져간 거 인정하면서 왜 아직도 안 돌려줘? 그 여자가 회사까지 찾아가서 네 둘째 형에게 물어봤었다며. 너 없다는 거 알고 나서야 돌아갔다고 하더라.”이 일은 할머니뿐만 아니라 전씨 가문 온 가
전날 밤잠을 설쳐 속이 불편했던 전이혁은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비닐봉지에 먹을 것들을 담고 나서야 할머니의 뒤를 따랐다.“할머니, 여기 구운 닭 다리요.”전이혁은 할머니에게 닭 다리 하나를 건넨 뒤, 고개를 돌려 테이블 앞에 앉아 입가가 번지르르할 정도로 맛있게 먹고 있는 그 여자아이를 바라보더니 할머니에게 물었다.“할머니, 그런데 저 여자아이는 누구예요? 엄청 복스럽게 먹고 있네요.”“소령이라고, 그 애 부모가 여기 꽃밭 관리자야. 난 그 애가 참 마음에 들어.”전이혁은 할머니가 구운 생선 꼬치를 먹으면서 말했다.“할머니는 여자아이면 다 좋아하잖아요. 예씨 가문에 갔을 때도 그 집안에 유일한 증손녀를 데려오고 싶어 하셨잖아요.”할머니는 아쉬운 듯 말했다.“우리는 예씨 가문과 조건도 비슷하고 가풍도 똑같이 좋은 집안이라 지연이가 우리 집에서 살더라도 나쁠 게 없을 텐데, 아쉽게도 그 집 식구들이 허락하지 않더구나. 예준성은 내가 정말 딸을 데려가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나를 경계했는지 몰라. 내가 가면 할 일도 없는지, 맨날 집에 붙어서 나를 감시하는 거야.”“그거야 지연이가 예씨 가문의 유일한 증손녀이니 당연히 아까워하죠. 제가 예준성이라도 할머니가 딸 훔쳐 갈까 봐 감시했을 거예요. 하하하.”전이혁은 눈앞에 그려지는 그 장면을 상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손자인 전이혁이 보기에도 할머니는 진심으로 손녀 아니면 증손녀를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그는 가끔 자기 부모에게 시험관 아기라도 시도해서 넷째는 꼭 딸을 낳으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돌아오는 건 부모의 매질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의 부모는 이제 손주 볼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 그들 형제 셋이 각자 노력해서 딸 한 명쯤은 낳아 보라고 독려하곤 했었다.“할머니한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자, 이제 말해 봐.”할머니가 물었다.전이혁은 웃으면서 대답했다.“할머니 보고 싶어서 왔죠. 그냥 할머니 보러 오면 안 돼요? 꼭 할머니한테 무슨 할 얘
전씨 할머니는 한 손에 꽃다발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갓 구운 생선을 집어 전이혁에게 건넸다.“이런 작은 생선은 막 구웠을 때 먹는 게 맛있어. 식으면 맛이 없으니 따뜻할 때 먹어.”“고마워요, 할머니.”전이혁은 할머니가 건넨 생선을 받아 주저 없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먹던 중에 핸드폰을 꺼내 전우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전이혁은 전우와 나이도 비슷하고, 어릴 때부턴 전우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형제 중에서 전우와 가장 친했다. 그러니 그는 자랑하고 싶을 때는 무조건 전우를 찾았다.전이혁의 사진을 보자마자 전우는 가족 단톡방에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할머니, 낚시 가셨어요? 직접 구워 드시기까지 하네요. 많이 잡으셨어요? 저도 먹을래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이혁은 일부러 약 올리듯 답장했다.“이젠 없어. 할머니께서 나 주려고 특별히 남겨둔 거야. 그러니 네 몫은 없어. 그리고 너 진짜 생선 한 조각 먹으러 올 거야? 손해가 클 텐데?”“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할머니표 생선구이는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할머니는 워낙 자유로워서 오전엔 리조트에 있다가도 오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었으니, 큰 손자인 전태윤도 못 말릴 정도였다.부모 세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는 것밖에 없을 뿐, 감히 할머니를 간섭할 수 없었다. 그나마 큰 손자인 전태윤이 할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마저도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할머니는 그야말로 나이 든 개구쟁이였다. 할머니는 지금은 리조트에 있지만 다섯째 손자인 전우가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웃으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많이 잡지 못했어. 넷째한테 줄 몇 꼬치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먹었어. 먹고 싶으면 설 연휴 때 와서 직접 낚시해서 구워 먹어. 그래야 더 맛있지.”전우는 아쉬움으로